영화 이야기

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45 Years’의 샬롯 램플링




“배우로서 정의 내릴 수 없는 마음의 상태 표현하고 싶었다”


"유럽은 형태보다 내용을… 미국은 변화 두려워 하는 것 같아
자신을 나무라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지 않은 일"


드라마‘45년’(45 Years-영화평 참조)에서 결혼생활 45년만에 자신이 남편 제프(탐 코트니)의 죽은 옛 연인 카티아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 케이트 역을 조용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 올해 베를린 영화제서 주연여우상을 탄 영국의 베테런 스타 샬롯 램플링(69)과의 인터뷰가 최근 웨스트할리웃의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사무실에서 있었다. 우아하게 세월을 받아들인 귀부인 티가 나는 램플링은 단정히 앉아 가끔 유머를 구사하면서   물음에 차분히 대답을 했는데 삶의 예지가 가득한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겸손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는데 눈매가 매서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을 때는 싸늘한 매력을 발산했다. 오래 전부터 스크린을 통해 연모하다시피 한 여인이어서 인터뷰 후 사진을 찍을 때 두 손을 꼭 잡고 “반갑다”고 말했더니 램플링은 “댕큐”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영화는 결혼 속의 비밀에 관한 얘기인데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제프의 옛 여자는 비밀은 아니다. 그저 새로 만난 케이트에게 제프가 자신의 옛 여자에 대해 상세한 얘기를 안 했을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갔을 뿐이다. 케이트도 제프가 여자가 있었고 그녀가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여자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둘 사이의 관계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뒤늦게 그 여자의 사체가 냉동상태로 발견됐다는 편지가 날아들면서 과거의 상처가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나 케이트는 뒤늦게 남편이 평생을 옛 여자에 대한 정열을 간직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렇게 간단히 얘기할 영화가 아니다. 케이트는 만약 카티아가 살았더라면 남편이 그녀와 결혼했을 것인가 또 카티아와 자기 둘 중에 누가 더 남편을 사랑했을까와 같은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의문에 시달리고 있다. 이 영화는 이렇게 이성적이지 않은 것에 바탕을 둔 얘기여서 더 사무친다.”

-영화의 어떤 점이 좋아 출연했는가.
“인물들의 내적 언어의 강렬성과 배우로서 정의 내릴 수 없는 마음의 상태를 연기해 보고 싶었다. 아주 연약한 얘기를 연기로 표현해 관객을 사로잡는 도전에 응하고 싶었다.”

-당신은 영화 속에서나 실물이 다 화장을 짙게 안 한 아름다운 모습인데 할리웃 배우들은 화장 안 하고는 못 견디는 사람들이다. 유럽 여배우와 할리웃 여배우의 차이가 무엇인가.
“유럽은 늘 형태보다 내용을 더 중요시해 왔다고 여긴다. 문학서적 속에 깊이 잠기고 싶을 때 우리는 어떤 예쁜 형태를 찾지 않고 책 내용의 깊이를 진실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점이 미국과 다른 것이다. 미국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변화는 성형수술로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난 늘 내 모양을 바꾸지 않고 인간으로서 영화를 통해 사람들을 나의 여정에 함께 동반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흥미 있겠는가 하고 생각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이 영화가 바로 그런 큰 도전이다.”
결혼 45주년을 맞은 제프(왼쪽)와 케이트의 삶이 편지 한 통으로 혼란에 휩싸인다.

-만약 영화 속 일이 당신에게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남편을 떠나겠는가 아니면 남편 곁에 있으면서 의혹과 고뇌에 시달리겠는가.
“카티아는 제프의 큰 과거일 뿐으로 제프는 사실 케이트를 사랑하고 그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 영화는 케이트 개인의 여정이라고 하겠다. 왜 그녀가 그렇게 큰 혼란과 격동 속에 빠져 들게 되었는가를 묻는. 케이트는 결코 제프를 안 떠날 것이다. 영화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실존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영화는 남편의 죽은 옛 여인의 얘기라기보다 삶의 위기에 관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 겪는 것으로 이 영화가 본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까닭도 거기에 있다.”

-당신은 멋있고 훌륭한 생애를 살았는데 돌이켜 봐 후회하는 일이라도 있는지.
“있지만 난 별로 과거를 돌아보질 않는다. 내가 과거에 한 일들은 그것이 내 최선이었기 때문에 난 결코 후회하질 않는다. 자신을 나무라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지 않은 일 중의 하나다. 이 건 내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난 내가 한 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옛날 영화를 보는가.
“안 본다.”

-당신은 국가로부터 작위를 받았는데 소감이 어떤가.
“의식은 치렀지만 유감스럽게도 여왕은 못 만났다. 난 여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지정 일에 런던에 있을 수가 없어 나중에 내가 살고 있는 파리에서 주불 영국대사로부터 받았다. 작위 받아 참 기쁘다.”

-당신은 대부분 비극적이거나 음울한 역을 자주하는데 왜 그런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나 그런 역들이 가장 강렬한 역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역을 할 때면 역에 배우로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연결되기 때문에 탐구하기에 흥미를 느낀다.”

-젊었을 때 본 것들 중 당신에게 가장 강한 영향을 준 영화는 무엇인가.
“배우로서는 캐서린 헵번의 영화들이다. 나도 그녀와 같은 혼과 질을 지녀 헵번이 나온 영화와 같은 것에 나오고 싶어도 이젠 더 이상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그녀의 영화 중 기억에 뚜렷한 것은 ‘아프리카의 여왕’과 ‘필라델피아 이야기’ 및 ‘베이비 키우기’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배운 점은 무엇인가.
“이 영화처럼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누가 탐을 당신 상대로 골랐는가.
“나와 감독 앤드루 헤이다. 난 탐을 전에 잘 몰랐지만 이 영화에서 함께 일하기를 학수고대 했었다. 그래서 그가 출연을 승낙한 뒤에는 그가 날 사랑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한 때 연기를 포기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깊은 침체에 빠져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이렇게 돌아왔다. 난 늘 가는 데까지 가서야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벽에서 뛰어내릴 필요는 없으나 그런 위기의식을 느낄 필요는 있다.”  

-여성의 힘은 어디서 나온다고 보는가.
“그것은 스스로가 개발해야 한다. 누구도 그것을 당신에게 줄 수가 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준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안에서 개발해 사용해야 한다. 여성의 성적인 힘은 대단히 강력한 내적 요소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취하는데 매우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그것에 당신이 휩쓸려 갈 수 있기 때문에 겸손하게 써야 한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 둘을 사랑은 할 수 있으나 오직 한 사람에게만 충실할 수가 있다. 그러나 충실하다는 것과 사랑은 다르다.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충실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적어도 내 경험에 따르면.”

-사랑하는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은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보는가.
“말은 정말 조심해서 해야 한다. 난 말이 무섭다. 좋지 않은 말은 비수 같아서 진짜로 상처를 남긴다.”

-이 영화에선 다른 영화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나이 먹은 사람들의 섹스신이 있는데 나이 먹은 배우로선 그런 연기를 하기가 거북한가.
“성적이란 것은 젊었을 때만 아름다운 것이다. 배우로서 섹스 신을 할 수는 있으나 내가 그런 연기를 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 난 나이 먹은 사람들을 사랑하긴 하나 어떤 것은 별로 보기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당신이 부엌에서 콧노래로 부른 플래터즈의 ‘스모크 겟츠 인 유어 아이즈’를 평소에도 좋아하는가.
“난 그 노래 사랑한다. 우리의 결혼 45주년 파티가 열리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 노래에 맞춰 나와 탐을 비롯해 모두가 춤을 추는데 영혼과 직접 연결되는 느낌을 경험했다.”

-보통 때의 삶은 어떤가.
“남들과 마찬가지다. 배우라고 해서 남들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도 보통 사람들이다.”

-당신이 폴 뉴만과 공연한 ‘평결’ 이후 모두들 당신이 할리웃의 수퍼스타가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당신은 유럽으로 돌아갔는데 이유가 무엇인가.
“이 곳에선 매우 위협감을 느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돌아갔다. 매우 두려웠다. 여기가 내 세상이 아니어서 행복할 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2월 28일 월요일

레버넌트(The Revenant)


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동료 사냥꾼에게 북수하려고 설원을 걷고 있다.

생존의 몸부림과 복수… 디카프리오의 처절한 연기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영화제작이다. 방대한 스케일과 내장을 끄집어내 씹고 생살을 깎아내는 것 같은 쓰고 고통스런 생존의 몸부림과 복수, 폭과 깊이가 대하 서사적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영상미 그리고 불길하고 우울한 음악(사카모토 류이치와 알바 노토) 및 처절한 연기 등이 마치 명필가의 거대한 붓이 일필휘지로 쓴 것 같은 연출력에 의해 극단적으로 생생하게 표현된 걸작이다.
지난해에 ‘버드맨’으로 오스카 감독상을 탄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공동 각본)의 영화로 실제 있었던 모피사냥꾼의 사건을 바탕으로 캐나다의 캘거리와 아르헨티나에서 찍었는데 마치 영화 속의 복수심에 불타는 주인공처럼 이를 득득 갈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만든 것 같은 절박감과 치열한 작품 욕심이 느껴져 고개가 숙여진다. 
가차 없고 잔혹한 실존적 웨스턴이기도 한데 눈 덮인 광활한 동토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장정을 하면서 겪는 주인공이 겪는 견디어내기 힘든 조건과 상황 그리고 폭력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참혹하고 끔찍해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1823년 록키산 지역에서 캡튼 앤드루 헨리(돔날 글리슨)의 지휘 하에 모피사냥을 하던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사냥꾼 일행이 포니 인디언들에 의해 기습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장시간 진행되는 이 기습장면의 속도감과 공포와 잔인성 및 혼란이 감관을 유린하는 것 같은 카메라에 의해 박진감 있게 포착된다. 그런데 휴는 한 때 포니들과 함께 살면서 원주민과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은 사냥꾼으로 지역 지리에 대해 정통하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사냥꾼들은 철수를 시작하는데 숲 속에서 혼자 휴식을 취하던 휴가 거대한 어미 곰에 의해 습격을 받아 빈사의 지경에 이른다. 
특수효과로 처리된 이 곰의 습격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으로 너무 생생해 진짜로 곰에게 물리고 발톱에 찢기고 밟히는 것 같은 현실감을 느끼게 된다(감독은 어떻게 찍었는지 밝히질 않는다.)
들것에 실려 운반되던 휴를 날씨와 험한 지형 때문에 더 이상 운반할 수 없게 되자 앤드루는 사이코 같은 성질을 지닌 탐욕스런 존(탐 하디)과 양심적인 젊은 짐(윌 풀터)에게 휴가 죽으면 제대로 매장을 하라고 지시하고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요새를 향해 떠난다. 그러나 얼마 후 존은 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를 거의 생매장하다시피 한 뒤 버리고 떠난다.
여기서 살아남은 휴가 처음에는 벌벌 기어 다니면서 먹고 마실 것을 찾아다니다가 기운을 차리고 나무 지팡이에 의존한 채 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설원과 산을 걷고 타고 넘고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집요하게 목적지를 향해 간다. 이 과정에서 휴는 거의 초인적 인내와  생존본능으로 온갖 위험과 고통을 극복한다. 특히 경악할 장면은 그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죽은 말의 내장을 손으로 꺼낸 뒤 말 속에 드러누워 혹한을 피하는 모습.
마침내 휴는 요새에 도착, 존의 행위를 폭로하나 존이 도주하면서 휴는 이번에는 달아난 존을 잡기 위해 다시 혼자 설원으로 떠난다. 
자연광을 이용한 에마누엘 루베즈키의 촬영이 물 흐르듯 하고 급박한데 휴가 말을 탄 채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비롯해 경탄을 금치 못할 장면들이 많다. 내용이 간단한 영화에서 디카프리오는 별로 말을 많이 안 하는데 두꺼운 동물털가죽을 입고 텁수룩한 수염에 장발을 한 채 입안으로 웅얼대면서 강렬한 눈매와 사로잡힌 얼굴 표정으로 필사적인 연기를 한다. 상영시간 2시간36분. R. Fox. 아크라이트(선셋과 바인)와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45 Years


케이트(오른쪽)는 제프의 되살아난 과거 때문에 갈등한다.

    과거의 그림자 속 삶에 격변을 겪는 노부부


아내인 당신이 결혼생활 45년만에 여태껏 남편의 죽은 옛 여자 그림자 속에서 살아 왔다는 것을 깊이 의심하게 된다면 과연 당신은 이에 어떻게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처하겠는가. ‘아, 나는 여지껏 헛 살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면 말이다. 2인극이나 다름없는 이 조용하나 안으로 격한 감정과 의혹과 좌절 그리고 분노가 소용돌이치는 영화는 이같은 물음을 제시한 뒤 애매모호하게 끝이 난다. 
사랑과 결혼의 손상되기 쉬운 확실성에 관한 영국 영화로 소품이지만 영화가 던지는 명제가 대단히 심각하고 또 그 감정적 여파가 크고 넓어 작품 속에 깊이 파묻히게 된다. 영국의 두 베테런 샬롯 램플링(69)과 톰 코트니(78)가 주연하는 향수감 짙은 작품이다.
떨쳐버려지지 않는 과거의 그림자 때문에 내적 격변을 겪어야 하는 노부부의 드라마가 차분하고 절제됐으면서도 매우 세련되고 민감하게 그려졌는데 각본을 쓰고 연출한 앤드루 헤이의 윤기 나는 솜씨가 돋보인다.
영국 동부 노포크의 곱고 조용한 교외에서 사는 제프(코트니)와 케이트 머서(램플링) 부부는 1주 후에 가질 결혼 45주년 기념파티 준비에 바쁘다. 둘은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지만 자식은 없다(그 이유는 보는 사람 자의대로 해석하면 된다.) 영화 처음에 부엌 식탁에 제프가 앉아 있는 가운데 케이트가 설거지를 하면서 미 흑인 보컬그룹 플래터즈의 ‘스모크 겟츠 인 유어 아이즈’를 콧노래로 부르는데 이 노래는 둘이 연애할 때 즐겨 듣고 부르던 노래로 영화에는 옛 팝송이 많이 나오면서 올드팬들의 향수감을 자극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프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내용은 50년 전 제프와 함께 스위스 알프스 빙하지대에 놀러갔다가 실족사한 그의 옛 독일인 애인 카티아의 사체가 고스란히 보존된 채 발견됐다는 것. 이 편지를 받고 제프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 스위스여행마저 생각한다.
그러나 제프보다 더 심각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케이트. 더군다나 제프가 알프스 여행을 하면서 카티아를 자기 아내로 등록했다는 것을 안 케이트는 깊은 좌절감과 질투 그리고 의혹에 시달린다. 그리고 다락에 올라가 남편의 옛 사진들과 필름 등을 뒤지면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라스트 신이 가슴을 때린다. 착 가라 앉은 연기를 하는 램플링(LA 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 올해 최우수 주연여우로 뽑혔다)과 코트니의 화학작용이 절묘하다. 진짜 어른들 영화다. 일부극장.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하숙생’




스크루지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공연히 번잡하고 번거로운 시즌이다.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까닭은 지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지독한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끼면서 자꾸 슬퍼했다. 이 때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이 시즌의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때마다 생각나는 터무니없는 과거는 대학생 때의 일이다. 그 때 통금이 있던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와 신년 전야에 통금을 해제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는 종교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모처럼 밤의 자유를 만끽하려고 거리로 몰려 나왔었다.
나와 대학 친구들도 음주창가하며 마치 풀어놓은 개떼들처럼 명동거리를 몰려다니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자축했었다. 그 때 느낀 가슴 속의 한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처지곤 한다.
난 요즘 진짜 캐롤 대신에 내 고등학교 선배인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을 듣는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최희준이 약간 코가 막힌 듯한 저음으로 부르는 창법과 가사와 곡조가 청승맞기 짝이 없어 부운 같은 인생의 자락에 매달린채 가는 세월 말리지도 못하고 술 한 잔 하면서 따라 부르기에 딱 맞는 캐롤이다.      
KBS 라디오 동명 드라마의 주제곡이었던 ‘하숙생’은 신성일과 김지미 주연의 동명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나도 재미있게 봤다. 사랑과 배신과 복수의 멜로드라마로 흑백영화로 기억하는데 실연당한 남자가 보면 가슴 싸하니 아플 영화다.              
그러나 세상이 온통 즐겁고 행복해만 보이는 시즌이니 만큼 크리스마스 연휴에 듣고 보면서 즐길만한 캐롤과 영화를 찾아보았다. 캐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빙 크로스비가 솜사탕 같은 음성으로 부르는 ‘와이트 크리스마스’다. 어빙 벌린이 작곡한 이 노래는 크로스비가 주연한 시즌영화 ‘할러데이 인’의 주제가로 오스카상을 탔다.
짙은 초컬릿 맛 나는 벨벳 감촉의 음성을 지닌 냇 킹 코울이 부르는 ‘크리스마스 송’도 좋다. “체스넛 로스팅 온 언 오픈 파이어”라면서 시작되는 노래를 들으면 늘 털스웨터를 입고 장작불이 타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 되곤 한다.                    
캐롤 앨범을 8개나 출반해 ‘미스터 크리스마스’라 불리는 앤디 윌리엄스의 ‘이츠 더 모스트 원더풀 타임 오브 더 이여’와 역시 캐롤의 단골가수인 자니 마티스의 ‘아베 마리아’ 그리고 맑고 고운 음성의 팻 분의 ‘퍼스트 노엘’과 함께 크로스비와 음성이 비슷한 페리 코모의 ‘두 유 히어 왓 아이 히어’ 등도 좋다.
그리고 시내트라는 ‘아일 비 홈 포어 크리스마스’를 잘 부르고 주디 갈랜드가 부른 자기가 주연한 영화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의 노래 ‘해브 유어셀프 어 메리 리틀 크리스마스’도 시즌 송 18번이다. 합창으로 부르는 ‘리틀 드러머 보이’는 애잔해 더욱 연말 분위기에 잘 어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당신 없는 크리스마스는 외롭다”고 궁상을 떠는 ‘블루 크리스마스’와 ‘실버 벨즈’도 재미있다.
이 밖에도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캐롤들로는 *어 할리 졸리 크리스마스 *오 홀리 나잇 *징글 벨 록 *록 어라운드 더 크리스마스 *윈터 원더랜드 *렛 잇 스노 *펠리스 나비다드 등이 있다. 앤젤리노들은 지금 KOST-FM(103.5)을 틀면 하루 종일 시즌 송들이 나와 이들 캐롤들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올드 랭 자인’을 들으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영화로 콧등이 시큰해지는 고운 것이 ‘동방박사의 선물’(The Gift of the Magi-사진)이다. O. 헨리의 단편소설이 원작으로 가족의 유물인 회중시계를 애지중지하는 말단 사원 짐(팔리 그레인저)과 탐스럽고 아름다운 긴 머리칼을 지닌 그의 아내 델라(진 크레인)의 크리스마스 선물교환 얘기다.
델라는 남편이 그렇게 좋아하던 자신의 머리칼을 팔아 남편을 위해 백금시계줄을 사고 짐은 자기 시계를 팔아 아내를 위해 고급 빗을 산다. 둘은 머리칼 없는 빗과 시계 없는 시계줄을 서로 교환하면서 자기들의 실수를 크게 웃는데 이 때 창 밖에서 캐롤이 울려 퍼진다.    
이 단편은 O. 헨리의 다른 단편들인 ‘마지막 잎새’와 ‘경찰과 성가’ 그리고 ‘클래리언 콜’ 및 ‘인디언추장의 몸값’ 등을 영화로 만들어 묶은 DVD ‘O. 헨리의 풀 하우스‘(O. Henry’s Full House)에 수록됐다.
크리스마스 단골영화로 해마다 이맘때면 TV로 마라톤 방영되는 3편의 영화가 있다. 꼬마 나탈리 우드가 나오는 진짜로 산타가 있다는 것을 법정에서 증명하는 ‘34가의 기적’(The Miracle on 34th Street)과 지미 스튜어트가 주연한 모든 개인의 중요성을 얘기한 ‘멋진 세상’(It’s a Wonderful Life) 그리고 빨간 장난감엽총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파 안달이 난 소년 랄피의 소원성취를 우습게 그린 ‘크리스마스 이야기’(A Christmas Story)를 꼭 보세요.  “해피 뉴 이여!”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2월 21일 월요일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Star Wars: The Force Awakens)


레이(왼쪽)와 핀이 스톰트루퍼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제다이의 귀환’ 이후 30년 뒤 선과 악의 대결


마치 천지가 개벽이라도 하는 듯이 요란하게 선전을 해대고 또 팬들이 기다렸던 ‘스타워즈’의 일곱 번째 시리즈로 올드 팬들과 새 젊은 팬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옛 인물들과 새로운 인물들이 나와 치고 박고 광선 칼싸움하고 도망가고 추격하고 웃고 떠들면서 난리법석을 떤다. 특수효과가 대단한 액션영화인데 매우 코믹하게 만들어 때론 ‘스타워즈’의 패러디를 보는 것 같다.  
‘제다이의 귀환’(1983)이 끝난 지 30년 뒤의 얘기인데 플롯이 매우 복잡하지만 이 시리즈의 기본골격인 선과 악의 대결이 주제. 보고 즐길 만하지만 얘기가 그렇게 참신하지도 못하고 또 일부 미스 캐스팅이 눈에 띄는데다가 내용이나 톤이 고르다기보다 울퉁불퉁해 재미도 역시 울퉁불퉁하다.
볼만한 것은 나이 먹은 한 솔로 역의 해리슨 포드. 완전히 포드의 영화라고 해도 될 만큼 그가 시치미 뚝 떼는 표정과 함께 코믹한 대사를 구사하면서 액션을 하는데 그가 영화에 나올 땐 영화가 살아나고 그가 없어지면 맥이 빠질 지경이다. 포드와 함께 영화에 젊은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이 새 인물 레이 역의 신인 데지이 리들리. 여전사 역을 단단하게 해내는데 마치 ‘헝거게임’ 시리즈의 캐트니스를 보는 것 같다.
김정은 같은 수프림 리더 스노크(앤디 서키스 음성)가 지배하는 악의 세력 퍼스트 포스와 시리즈에서 공주로 불렸던 레아(캐리 피셔)가 이제 장군이 돼 지도자가 된 퍼스트 포스에 대한 저항세력 리퍼블릭이 공중전과 지상전을 벌이면서 선과 악의 대결이 벌어진다. 
리퍼블릭은 이 싸움을 이끌 영웅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가 절실히 필요한데 루크는 종적을 감춰 그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리퍼블릭과 함께 퍼스트 포스도 루크를 찾는데 그의 거처를 알려주는 지도의 부분을 간직한 사람이 리퍼블릭의 제트 파일럿 포(오스카 아이잭). 그런데 포는 스노크의 하수인으로 시리즈의 다트 베이다처럼 검은 마스크를 쓴 카일로(애담 드라이버)의 군대 스톰트루퍼의 습격을 받기 전 이 지도의 일부를 수록한 장치를 굴러다니는 귀여운 로봇 BB-8 속에 감춘다.
포를 돕는 것이 스톰트루퍼의 만행에 질려 군에서 탈영한 핀(잔 보이에가가 마치 ‘궁정의 어릿광대처럼 군다). 둘이 퍼스트 포스 본부에서 쌕쌔기를 타고 탈출하다 격추돼 불시착한 곳이 정크야드 혹성 자쿠. 그리고 둘은 여기서 본의 아니게 헤어지고 핀은 독립심 강한 여전사 레이를 만나 전우가 된다. 영화 절반쯤 지나 이들은 정크가 된 한 솔로의 비행기 밀레니엄 팰콘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한 솔로와 그의 털북숭이 친구 추바카를 만난다. 영화에는 추바카 외에도 R2D2와 C-3PO도 나온다. 
클라이맥스는 푸른 광선 검을 든 레이와 붉은 광선 검을 든 카일로의 격투.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한 특수효과와 액션신이 장관인데 영화는 물론 속편을 예고하면서 끝난다. 시리즈의 음악을 작곡한 존 윌리엄스가 이 영화의 음악도 작곡했는데 영화의 첫 부분과 마지막 크레딧 장면의 음악을 LA 필의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했다.
J.J. 에이브람스 감독. PG-13. Disney.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사울의 아들(Son of Saul)


사울이 마스크를 한 채 유대인들의 사체를 치우고 있다.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아우슈비츠’배경


보면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사실적이요 처참하고 끔찍하며 또 강력한 헝가리 영화로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의 개스처형실 안에 갇힌 공포와 절망과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데 상영시간의 상당 부분을 개스처형된 유대인들의 벌거벗은 사체를 보고 있자니 몸과 마음의 느낌이 모두 마비가 된다. 이것은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얘기도 될 수 있겠지만 그와 반대로 영화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끼고 생각할 수 없게 하는 부작용 구실을 한다. 과도하다. 
음악이 없는 영화로 음악 대신 비명과 총성과 구령 그리고 개스실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살려 달라”며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 등 음향효과가 절실한데 얘기는 간단한 반면 이런 음향효과와 시각적 강렬성이 거의 기록영화도 같은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 영화로 데뷔한 라즐로 네메스 감독(그는 각본도 공동으로 썼다)의 연출력이 확고하고 자신만만한데 영화 내내 질식할 것처럼 짓누르던 긴장감과 강렬성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끝에 가서 김이 빠진다. 그러나 연기를 비롯해 대단한 작품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반응이 정반대로 갈릴 것이다. 
사울(헝가리 시인 게자 로릭)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존더코만더. 존더코만더는 나치를 위해 사체운반 등 잡일을 하는 유대인들로 이들은 처형이 연기된 사람들이다. 사울이 하는 일은 개스실에 들어간 사람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 그는 개스실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그 모습이 완전히 산송장 같다. 
그런데 사울이 어느 날 자기 아들의 것이라고 확신하는 소년의 사체를 목격하면서 그는 자기 아들(사울의 아들인지 밝혀지지 않는다)에게 유대교 의식에 따른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아들의 사체를 숨긴 뒤 수용소 내에서 율법사를 찾아다닌다. 
지금까지 좀비 같던 사울은 이런 사명의식 때문에 몸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강렬한 인간으로 변신한다. 사울의 이런 집념은 그가 유물을 정리한 죽은 자들에 대한 속죄행위와도 같다. 사울의 이런 행적과 함께 유대인들의 탈출 모의와 폭동 등이 곁가지로 얘기된다.    
영화는 내용이나 카메라가 거의 모두 사울에게만 집중돼 있어 관객은 다른 많은 일들은 음향효과를 통한 상상으로 감지하게 만들었다. 무표정하면서도 안으로 끓어오르는 로릭의 얼굴연기가 훌륭하다. 최근 LA 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 올해 최우수 외국어 영화로 선정된 이 영화는 2015년도 헝가리의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부문 후보작으로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올랐다. 오스카와 골든 글로브상을 모두 탈 가능성이 크다. 
성인용. Sony Classics.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물 먹은 자니 뎁




자니 뎁이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로부터 큰 물을 먹었다. 10일 발표된 각 부문 골든글로브상 후보 중 실화인 ‘블랙 매스’(Black Mass·사진)에서 보스턴의 악명 높은 갱 와이티 벌저로 나와 호연, 주연배우(드라마) 후보로 오를 것이 떼놓은 당상처럼 여겨지던 뎁이 후보에서 탈락된 것은 이번 발표에서 일어난 경악할 만한 변괴다. 나는 그에게 표를 찍었는데 뎁은 HFPA의 총아로 그동안 총 10번이나 주연상 후보에 올랐었는데 이번 탈락은 뎁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HFPA는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와 함께 인디 영화도 여러 부문에서 수상후보로 골랐는데 1950년대 미 부유층 가정주부와 젊은 백화점 여직원 간의 동성애를 그린 ‘캐롤’(Carol)이 작품, 감독 및 주연여우 등 총 5개 부문에서 드라마 부문 후보에 올라 최다 후보작품이 됐고 이어 2008년 미 주택가격의 붕괴를 다룬 ‘빅 쇼트’(The Big Short·뮤지컬/코미디)와 지난해에 ‘버드맨’으로 오스카 감독상을 탄 멕시코 태생의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가 감독하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살벌한 생존과 복수의 웨스턴 ‘레버난트’(The Revenant·드라마)와 애플컴퓨터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삶을 다룬 드라마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각기 작품상 등 총 4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다. 
디카프리오는 그동안 모두 4차례나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오르고도 번번이 고배를 마셨는데 이번에 ‘레버난트’로 골든글로브 상에 이어 마침내 오스카 주연상을 탈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화성 탐사를 갔다가 팀과 떨어져 달랑 혼자 남게 된 우주인의 생존투쟁을 그린 드라마 ‘마션’(The Martian)이 뮤지컬/코미디 부문에서 작품상 후보에 오른 까닭은 이 영화의 배급사인 폭스가 드라마 부문에서 작품상 후보로 오른 자사 작품 ‘레버난트’와의 경쟁을 피해가기 위해서 뮤지컬/코미디로 밀었기 때문이다.   
각기 드라마 부문과 뮤지컬/코미디 부문에서 작품상 후보로 오른 ‘스팟라이트’(Spotlight)와 ‘빅 쇼트’는 모두 앙상블 캐스트의 영화. 그런데 ‘빅 쇼트’의 크리스천 베일과 스티브 커렐은 각기 주연상 후보에 오른 반면 보스턴 가톨릭교구 내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 보도한 보스턴 글로브지 기자들의 드라마 ‘스팟라이트’의 마이클 키튼과 마크 러팔로는 다 탈락됐다. 러팔로는 ‘인피니틀리 폴라 베어’(Infinitely Polar Bear)로 주연상(뮤지컬/코미디) 후보에 오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빅 쇼트’처럼 한 작품으로 두 배우가 주연상을 놓고 경쟁하는 또 다른 영화가 ‘캐롤’. 오스카상을 이미 탄 베테런 케이트 블랜쳇과 떠오르는 신예 루니 마라가 겨루게 됐는데 둘이 다투는 바람에 다른 배우가 어부지리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스웨덴 태생의 떠오르는 연기파 알리시아 비칸더는 실제로 의학 사상 최초로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한 덴마크의 화가 릴리 엘베의 아내 화가로 나온 ‘덴마크 여자’(The Danish Girl)로는 주연상(드라마) 후보 그리고 공상과학 스릴러 ‘엑스 마키나’(Ex Machina)에서는 인간화한 인조인간으로 나와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연기상 후보에 오른 베테런 중 먼저 눈에 띄는 배우가 실베스터 스탤론이다. 스탤론은 권투영화 ‘크리드’(Creed)에서 록키 발보아로 나와 왕년의 자기 라이벌의 아들의 권투코치 노릇을 하는데 이는 그가 39년 전 ‘록키’로 주연상 후보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연기상 후보에 다시 오르는 쾌거다. 그리고 8순의 음악가와 그의 영화감독 친구의 삶에 대한 성찰을 그린 ‘청춘’(Youth)에서 화장을 짙게 하고 상소리를 마구 내뱉는 여배우 역으로 조연상 후보에 오른 제인 폰다도 30년만에 처음으로 후보명단에 올랐다. 
또 다른 베테런은 ‘대니 칼린스’(Danny Collins)에서 한물 간 가수로 나온 알 파치노(뮤지컬/코미디). 파치노는 HFPA의 사랑을 받는 배우로 그동안 모두 17번 연기상 후보에 올라 4번 상을 탔고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상도 받았다. 그리고 릴리 탐린(할머니)과 매기 스미스(밴 속의 여자)도 노련한 연기파들이다. 또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피범벅 웨스턴 ‘헤이트풀 에잇’(The Hateful Eight)으로 음악상 후보에 오른 엔니오 모리코는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음악을 작곡한 베테런이다.       
한편 한국영화는 이번에도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서 탈락됐다. 한국은 송강호와 유아인이 공연한 사도세자의 얘기인 ‘사도’(The Throne)를 출품했었다. 다소 위안이 되는 것은 만화영화상 후보에 오른 ‘좋은 공룡’(The Good Dinosaur)의 감독이 한국인 피터 손이라는 점과 조수미가 부르는 ‘청춘’의 노래 ‘심플 송 #3’(Somple Song #3)이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점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2월 15일 화요일

‘크리드’(Creed)의 실베스터 스탤론




“사랑하는 것은 삶을 값있게 해 주는 요소”


이 나이에 연기·각본·감독한다는 것은 두려워
지혜란 더불어 태어나지 않아 살면서 얻게 돼


현재 비평가들의 격찬과 함께 흥행도 잘 되고 있는 권투 드라마‘크리드’(Creed)에서 왕년의 자신의 라이벌의 아들인 권투선수의 코치로 나와 민감한 연기를 보여준 실베스터 스탤론(69)과의 인터뷰가 지난 11월6일 영화의 무대인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다.‘록키’ 스탤론은 나이는 먹었지만 어딘가 소년과도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는데 떡 벌어진 체구답지 않게 질문에 얼굴을 붉혀가면서 위트와 유머를 섞어 굵은 저음으로 대답했다. 록키가 어느덧 7순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는데 세월의 켜가 쌓인 탓인지 스탤론은 매우 겸손하고 또 현명하게 물음에 답했다. 때로 마치 권투를 하듯이 두 손으로 제스처를 써 록키가 권투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크리드는‘록키’ 시리즈 첫 편에서 록키와 싸운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의 성으로 이 영화에서 록키는 아폴로의 아들 아도니스 크리드의 코치로 나온다. 스탤론은 얼마 전 내셔널 필름 보어드에 의해 이 영화의 역으로 최우수 조연남우로 뽑혔는데 오스카 조연상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조용히 점쳐지고 있기도 하다.

-당신이 다시 록키 역을 맡으리라고 생각을 한 적이라도 있는가. 어떻게 이 영화가 만들어졌는가.
“시리즈 제5편을 만들고 나서 실망을 해 그 실망을 극복하기 위해 딱 한 번만 더 만들겠다는 것을 내 삶의 모토로 여겨왔다. 그러나 제5편이 큰 성공을 못한데다가 내 나이 그 때 6순이어서 제작비 조달이 쉽지가 않았다. 다행히 제6편이 만들어졌고 그래서 난 이제 더 이상 ‘록키’에 집착하지 말고 이 것으로 끝내자고 마음을 먹었다. 임무를 다 했으니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클랜드로부터 시리즈 제4편이 나왔을 때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이 친구(젊은 흑인 감독 라이언 쿠글러)가 날 찾아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어두워 난 못하겠다고 말했더니 쿠글러가 다른 빅 스튜디오들이 큰 영화를 제공하는데도 궂이 ‘크리드’를 만들겠다고 고집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내가 29세 때 ‘록키’를 만들려고 집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자꾸 망설이니까 내 아내가 날 더러 비겁한 사람이라고 다그쳤다. 그 때서야 난 이 영화가 록키에 관한 것이 아니라 크리드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난 크리드를 지원하는 역이란 점을 확신하고 영화에 나오기로 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이 젊은이의 삶의 여정이다. 내 여정은 이미 끝난 지가 오래다. 그래서 난 쿠글러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코치 역을 얼마나 즐겼으며 영화를 찍으면서 혹시나 글로브를 끼고 싶다는 생각이라도 했는가.
“그런 생각했다. 정신적으로는 글로브를 벗기가 힘들지만 육체는 ‘더 이상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크리드 역의 마이클 B. 조단이 맹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흥분이 되더라. 그는 내가 ‘록키’를 위해 준비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훈련을 했다. 연기도 진짜 경기처럼 잘 했는데 체육관에서 있은 연습게임 때 너무 열중해 진짜로 치고받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단의 스파링 파트너는 진짜 권투선수로 조단이 너무 강하게 나오자 체면 구기기가 싫어서 조단에게 진짜로 대어들었다. 그 장면은 그러니까 진짜 게임이다. 그런데 코치란 별로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그 역을 맡기로 한 이상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니까 난 시리즈 첫 편에서 내 코치였던 버제스 머레데스 역을 하는 셈으로 ‘야 이것 괜찮네’라고 생각했다. 내가 크리드의 보호자요 아버지 역이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래서 가능하면 사실적으로 연기하려고 노력했다.”
록키가 아도니스에게 권투지도를 하고 있다.

-록키의 좌우명은 한 번에 한 걸음, 한 펀치인데 당신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두려워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말하기는 쉽지만 이 나이에 연기하고 각본 쓰고 감독한다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를 만들기를 2년이나 미뤘다. 그러다가 ‘왜 두려워 하는가’라고 생각하니 힘이 생기더라.”    

-당신은 록키와 램보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각본가요 감독이며 또 화가이다. 그림이 당신에게 어떤 뜻이 있는지 말해 달라. 
“난 어려서 학교 다닐 때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 때만해도 사람들은 난독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가 생각나면 그에 대해 그림부터 그리고 이어 글을 썼다. ‘록키’도 그림부터 그리고 각본을 썼다. 그런데 어릴 때 시작한 그림을 평생 그릴 줄은 몰랐다. ‘두려워 말라’는 좌우명은 나의 이런 배경과도 관계가 있다. 그래서 난 조단에게도 연기할 생각만 하지 말고 각본도 쓰고 감독도 하라고 만날 때마다 조언했다. 두려워 말고 너의 예술적 가능성을 다 소진할 때까지 모든 것을 시도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조단은 지금 작은 영화를 감독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가 다음 ‘크리드’를 감독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과거를 돌아볼 때 무엇을 달리 해보고 싶은가.    
“그 걸 다 얘기하려면 우리 함께 저녁 먹으면서 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린 지혜와 더불어 태어나질 않는다. 지혜란 살면서 실수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하라면 개인적 관계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하고 싶다. 여자와의 관계가 역동적이요 신나는 관계라고 생각한 것이 전쟁이 된 경험이 있다. ‘램보’는 거의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그 시리즈의 첫 편인 ‘퍼스트 블러드’는 그 때까지 액션영화엔 없었던 주인공이 대사를 시각적으로 하는 형식을 취했다. 배우로서 후회가 있다면 액션영화 말고 다른 분야에 좀 더 과감히 도전하지 못한 것이다.”

-사랑으로 인해 구원 받아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사랑이란 당신을 천국으로 데려가기도 하나 때론 지옥으로도 데려간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값어치 있게 해 주는 필요한 요소다. 아이들과의 관계란 아주 복잡한 것이어서 쉽지가 않다. 난 아이들에 대해 지나치게 통제적이 아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라기를 바란다. 난 딸만 셋인데 그들과의 전투에선 결코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백기를 들었더니 아이들이 ‘아빠 사랑해’라고 반기더라. 우리 관계는 완벽하다. 그저 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키웠다는 것만 바랄 뿐이다. 내가 이 영화에 애착을 갖는 것도 아도니스가 내 아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가는지를 보고파서 이 영화의 속편을 보고 싶다. 내가 아니라 감독이 그를 어디로 데려 갈지를 보고 싶다.” 

-권투선수는 이기기 위해 싸우는데 승리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승리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록키’ 첫 편에선 록키가 아무리 준비를 했어도 결코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상대가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승리란 성취할 수 있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너무 지나친 목표를 세우다간 실패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위대한 셰익스피어 배우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결코 되지 않을 일을 왜 하려고 드는가. 너의 가능성 안에 있는 목표를 설립해 성취하고 자기보다 월등히 우수한 사람의 능력을 탐내지 않는 것이 내겐 승리다. 따라서 승리란 자신의 가능성에 따라 목표를 조절하는 것이다.”

-당신의 아내가 당신의 결혼생활에 어떤 행복을 가져다주었는가.
“그녀는 매우 독립적이며 자신의 삶을 혼자서 창조한 사람이다. 그녀가 우리 삶에 가져다 준 것은 정직과 독립적인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난 아내가 모든 진실을 알기 때문에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그녀는사람을 육성하고 또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능력을 가졌다. 이것은 비단 내 아내뿐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의 자연 요소이다. 그들은 큰 그림을 볼 줄 안다. 여자들은 남편을 보호하고 안내하며 또 인도하는 능력을 지녔다. 남자들은 쉽게 흥분하는 반면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본능을 지녔다. 나의 아내는 이런 여성 특유의 요소를 우리 삶에 잘 쓰고 있다.”

-아내와 즐기면서 함께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 참 당황할 질문이네. 뒷마당에서 우리의 작은 개들과 공을 갖고 노는 일이다. 내가 이런 것을 다 털어놓다니 정말로 쑥스럽네.”

-필라델피아 미술관 아래에는 록키의 동상이 서 있고 미술관 계단은 ‘록키계단’이라고 부르면서 록키와 이 도시는 감정적으로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오래간만에 이 도시에 돌아온 소감은 어떤가.
“계단을 오를 때마다 감정적이 되곤 한다. 내가 처음 그 계단을 올랐을 땐 12세인가 13세 때인데 그 때만 해도 그 주위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나 다시 그 곳에 돌아오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 계단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난 이 말을 이 영화에서도 했는데 왜냐하면 나의 모든 것이 그 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계단 위에서 시내를 바라다볼 때면 내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마법의 나라에 있는 기분이다. 거기에 서면 내 성공과 실패가 다 생각나면서 날 명상케 만든다. 내가 이 곳에서 좋아하는 다른 장소는 황폐한 거리에 있는 록키의 집이다. 그 곳을 찾아갈 때면 이 집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꿔 놓은 곳이란 생각과 함께 거기서 영화를 찍은 날이 바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두 곳은 다 날 격한 감정에 싸이게 만드는 곳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바다의 심장 속에서(In the Heart of the Sea)


1등 항해사 오웬이 고래를 향해 작살을 던질 채비를 하고 있다.

‘모비 딕’ 실화 에섹스호… 생존 선원들의 사투


고래사냥 이야기인데 참치사냥 이야기로 줄어들었다. 큰 스케일의 해양 모험영화로 액션과 생존투쟁이 치열한 내용인데도 영화가 박력과 역동성과 내적 폭이 넉넉지를 못해 스릴이나 흥분감이 간 곳이 없다. 연말 대목을 노리고 워너 브라더스(WB)가 장에 내놓았으나 별로 손님이 들 것 같지가 않다.
튼튼하게 영화를 만드는 론 하워드가 감독했지만 연출력이 어중간한데 그 외에도 연기와 촬영과 특수효과(특수효과 영화라고 해도 될 만큼 많이 썼다) 및 음악 등이 전부 중간급을 넘지 못한다. 내용에 기대가 컸는데 실망이다.
나사니엘 필브릭이 쓴 논픽션이 원작인데 실제로 19세기 초에 있었던 포경선 에섹스호의 침몰과 구명보트를 탄 생존 선원들의 장기간에 걸친 표류와 생존투쟁을 그렸다. 이 사건은 후에 허만 멜빌의 소설 ‘모비 딕’(Moby Dick)의 모델이 된다.
영화는 1850년 젊은 멜빌(벤 위셔)이 에섹스호의 생존자 중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탐 닉커슨(브렌단 글리슨)을 찾아와 그의 경험을 소설로 쓰기 위해 인터뷰를 하면서 회상식으로 전개된다.
1820년 고래사냥의 수도인 매사추세츠주 낸터킷에 정박한 에섹스호는 수리를 마치고 출항을 기다리고 있다. 원래 이 배의 새 선장으로는 경험이 많고 고집 센 1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크리스 헴스워드-덩지는 큰데 연기력은 그에 못 미친다)가 임명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선주의 아들로 항해 경험도 없는 조지 폴래드(벤자민 워커)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오웬과 조지의 갈등은 명약관화하다.
에섹스호는 남대서양으로 항해, 고래를 잡아 기름을 채취하는데 고래사냥의 큰 목적은 이 기름 채취로 에섹스호는 2,000파운드의 기름이 목표량이다. 인간 드라마 티를 내려고 오웬과 조지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는데 조지는 배에 문제가 생기자 귀항을 주장하나 오웬은 이에 반대한다. 여하튼 에섹스호는 항해를 계속해 케이프혼을 돌아 태평양으로 나아간다.
에콰도르에 정박한 에섹스호의 선원들은 포경선을 침몰시킨 ‘악마 고래’와 그 고래 주변에 수많은 다른 고래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남태평양으로 진출한다. 고향을 떠난 지 1년만이다. 그리고 마침내 에섹스호 만큼이나 거대한 회색과 백색의 바다의 야수를 만나다. 이 고래는 첫 인사로 자기를 잡으러 모선에서 내려온 보트를 꼬리로 쳐 박살을 낸다.
이어 고래는 에섹스호를 머리로 박고 꼬리로 내려쳐 침몰시키고 오웬과 조지와 탐 등 생존 선원들은 구명정을 타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망망대해를 표류한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죽은 동료선원의 인육을 먹는다. 그런데 복수심에 불 탄 고래가 계속해 표류하는 보트를 따라온다. 고래가 사람 잡네! 카리스마 있는 그레고리 펙이 나온 ‘백경’의 무게와 엄숙함이 아쉽다. PG-13.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잉그릿 버그만: 그녀의 말들(Ingrid Bergman: In Her Own Words)


잉그릿 버그만이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있다.

잉그릿 버그만의 삶 다룬 기록영화


그레타 가르보 이후 할리웃이 스웨덴으로부터 직수입한 광채 나는 보석과도 같은 여배우 잉그릿 버그만의 삶을 포괄적으로 다룬 기록영화로 스웨덴의 작가이자 감독이며 비평가인 스틱 뵤르크만이 버그만의 딸이자 배우인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제안에 따라 만들었다. 가족사진과 홈무비 그리고 버그만의 유품과 일기와 그녀가 늘 가지고 다니던 각종 카메라로 찍은 필름 및 버그만의 네 자녀의 진술 등을 통해 이 윤기 나는 미소를 지녔던 여배우의 삶을 매우 자세히 보여준다.
대단히 흥미 있고 버그만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는 작품이나 다소 미흡한 것은 내용이 너무 가족위주라는 점이다. 그녀의 영화와 영화인으로서의 삶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처리됐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버그만은 공부보다는 연기에 더 능해 엑스트라를 거쳐 스크린에 등장한다. 그녀가 나온 스웨덴 영화 ‘간주곡’이 할리웃의 눈에 띄어 버그만은 24세 때 남편 페터 린드스트롬과 딸 피아를 남겨 놓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한 데이빗 O. 셀즈닉의 초청으로 할리웃에 진출, 이 영화의 미국판에 나온다.
그 뒤에 만든 ‘개스등’(버그만 최초의 오스카 주연상 수상작)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및 ‘카사블랑카’와 함께 히치콕의 작품 ‘망각의 여로’와 ‘오명’ 등에 관한 설명이 너무 약하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집착했던 ‘잔 다크’의 스크린과 무대에서의 역에 관해서는 다소 시간을 할애했다.
버그만은 매우 용감하고 독립적이 또 강한 여성으로 자기 사생활에 대해선 철저히 외부 시선을 무시했다. 그녀가 이탈리아의 명장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스트롬볼리’를 찍기 위해 이탈리아에 갔다가 둘 다 기혼자인 버그만과 로셀리니는 사랑에 빠진다. 버그만이 이혼도 하기 전에 아들 로베르토를 낳으면서 그녀는 할리웃의 기피인물로 찍혀 10여년을 유럽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버그만은 할리웃의 보이콧을 철저히 무시했다. 버그만은 이어 딸 쌍둥이 이사벨라와 잉그릿 이소타를 낳았다. 버그만의 할리웃 컴백작품은 ‘추상’으로 이 영화로 두 번째 오스카 주연상을 탔다.
버그만이 세계적인 배우여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자주 떨어져 살아야 했는데 그래서 아이들은 어머니를 장기간 못 보기가 일쑤였다. 버그만은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독립적이어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자녀 양육을 거의 즐기다시피 했다.
그녀의 마지막 영화는 스웨덴의 명장 잉그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 그녀는 유방암에 걸린 채 TV 영화에서 이스라엘 수상 골다 마이어 역을 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유작이다. 그녀가 2차 대전 때 유럽으로 군 위문공연을 다니면서 만난 유명한 전쟁사진 작가 로버트 카파와 깊은 사랑을 나눴다는 사실은 이 작품을 통해 알았다. 버그만의 팬은 물론이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작품이다. 17일까지 뉴아트(11272 Santa Monica)서 상영.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LAFCA의 베스트



기자가 속한 LA 영화비평가협회(LAFCA)는 6일 2015년도 최우수 영화로 보스턴 교구 내 가톨릭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을 폭로해 퓰리처상을 받은 보스턴 글로브 기자들의 활동을 그린 ‘스팟라이트’(Spotlight)를 선정했다. 차석은 ‘매드 맥스: 분노의 길’.
마이클 키튼, 마크 러팔로, 리에브 슈라이버 및 레이철 맥애담스 등 연기파 앙상블 캐스트의 이 영화는 보스턴 영화비평가협회와 뉴욕 온라인비평가들에 의해서도 올해 최우수 작품으로 뽑혀 오스카상 후보에 오를 것이 확실할 뿐만 아니라 작품상을 탈 가능성도 높다. 
‘스팟라이트’는 LAFCA에 의해 최우수 각본 작품(이 영화의 감독 탐 맥카시와 조쉬 싱어 공동 집필)으로도 뽑혀 2관왕이 됐다. 각본 부문 차석은 성인용 만화영화 ‘아노말리사’.
최우수 감독으로는 ‘매드 맥스: 분노의 길’(Mad Max: Fury Road)을 연출한 호주 감독 조지 밀러가 선정됐다. 밀러는 이 영화의 고전 원전인 멜 깁슨 주연의 ‘매드 맥스’(1979)를 감독했다. 감독 부문 차석은 ‘캐롤’의 타드 헤인즈.
‘매드 맥스: 분노의 길’은 감독 부문 외에도 촬영(존 실)과 프로덕션 디자인 부문에서도 올해 최우수 작품으로 뽑혀 3관왕이 됐다.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부문의 차석은 모두 ‘캐롤’.
최우수 주연남우로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서 애플 컴퓨터 공동 창업주 잡스로 나온 마이클 화스벤더가 선정됐다. 차석은 헝가리의 홀로코스트 영화 ‘사울의 아들’의 게자 로릭.
최우수 주연여우에는 영국영화 ‘45년’(45 Years)에서 결혼생활 45년만에 남편의 오랜 비밀을 발견한 여인으로 나온 영국의 베테런 샬롯 램플링이 선정됐다. 차석은 ‘브루클린’(Brooklyn)의 셔사 로난.
‘99채의 집’(99 Homes)에서 무자비한 부동산업자로 나온 마이클 섀논은 최우수 조연남우로 뽑혔다. 차석은 스필버그 감독의 ‘스파이들의 다리’(Bridge of Spies)에 나온 영국 배우 마크 라일런스. 최우수 조연여우로는 공상과학 스릴러 ‘엑스 마키나’(Ex Machina)에서 인간화한 인조인간으로 나온 스웨덴 배우 알리시아 비칸더가 선정됐다. 차석은 올리비에 아세야스가 감독한 프랑스 영화 ‘실스 마리아의 구름’(Clouds of Sils Maria)에서 프랑스의 유명여우(쥘리엣 비노쉬)의 미국인 비서로 나온 크리스튼 스튜어트.
최우수 기록영화로는 마약과 술에 절어 살다가 요절한 영국의 재즈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삶을 다룬 ‘에이미’(Amy)가 선정됐다. 차석은 인도네시아의 양민 학살을 다룬 ‘침묵의 모습’(The Look of Silence). 최우수 만화영화에는 찰리 카우프만(각본 겸)과 듀크 잔슨이 공동 감독한 현대인들의 고독과 소외를 다룬 ‘아노말리사’(Anomalisa)가 뽑혔다. 차석은 픽사 작품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최우수 외국어 영화로는 나치 수용소에 감금된 헝가리유대인들의 참상을 그린 ‘사울의 아들’(Son of Saul)이 선정됐다. 차석은 우크라이나 영화 ‘트라이브’(The Tribe). 최우수 편집부문에는 2008년 미국의 주택가격 붕괴를 다룬 앙상블 캐스트의 ‘빅 숏’(The Big Short)이 선정됐다. 차석은 ‘매드 맥스: 분노의 길’.
최우수 음악으로는 모두 카터 버웰이 작곡한 레즈비언의 사랑을 그린 ‘캐롤’(Carol)과 ‘아노말리사’가 공동으로 선정됐다. 차석은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의 음악을 작곡한 이탈리아의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피비린내 나는 웨스턴 ‘헤이트풀 에잇’(The Hateful Eight).
신인상은 ‘록키’에서 파생된 권투 드라마 ‘크리드’(Creed)를 감독한 젊은 흑인 감독 라이언 쿠글러에게 돌아갔다. 한편 생애업적상 수상자로는 오스카 수상자로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엘레판트 맨’ 등을 편집한 여류 앤 V. 코츠(89)가 뽑혔다.
60명에 가까운 LA 지역 신문, 잡지 및 웹사이트 기자들로 구성된 LAFCA는 매우 모험적이요 색다른 작품과 배우들을 베스트로 선정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아카데미와는 별로 의견이 맞질 않는다. 과거 20년간 두 단체가 같은 작품을 베스트로 뽑은 경우는 지난 2009년의  ‘허트 락커’(The Hurt Locker)가 유일하다.
한편 LAFCA와 함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뉴욕 영화비평가서클이 뽑은 2015년도 각 부문 베스트는 다음과 같다. 
▲작품-‘캐롤’ ▲감독-타드 헤인즈(캐롤) ▲각본-‘캐롤’ ▲주연여우-셔사 로난(브루클린) ▲주연남우-마이클 키튼(스팟라이트) ▲조연여우-크리스튼 스튜어트(실스 마리아의 구름) ▲조연남우-마크 라일런스(스파이들의 다리) ▲촬영-‘캐롤’ ▲외국어 영화-‘팀북투’ ▲기록영화-‘잭슨 하이츠에서’ ▲만화영화-‘인사이드 아웃’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2월 9일 수요일

청춘(Youth)


프레드(안경)와 믹이 알몸으로 입욕하는 미스 유니버스를 망연자실하니 관람하고 있다.

80대 두 예술가, 삶에 대한 심오한 성찰

진지하면서도 위트 넘쳐... 조수미 피날레 송 인상적

과도하게 예술적인 것은 사실이나 두 나이 먹은 예술가의 삶에 대한 성찰이자 회고인 이 영화는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비롯한 모든 감관과 함께 영혼마저 아름다움과 심오함에 듬뿍 적셔주는 예술의 향연과도 같은 작품이다.
2013년에 ‘그레이트 뷰티’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탈리아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각본 겸)의 영어대사 영화로 ‘그레이트 뷰티’와 유사한 느낌과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펠리니의 장난기 짙은 초현실적이요 엉뚱한 이미지와 진지하나 부담이 되지 않는 철학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펠리니는 소렌티노의 우상이다).
내용이 80노인들의 인간으로서 또 예술가로서의 삶과 작품의 마감에 대한 것인데도 무겁지가 않고 오히려 경쾌하고 사뿐하다. 지적이요 변덕스럽고 또 생명력과 위트와 유머가 가득한 영화로 이야말로 성숙한 어른들을 위한 작품으로 마치 박쿠스의 잔치에 참석해 춤과 노래와 포도주에 잔뜩 취한 기분이다. 
은퇴한 영국의 베테런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80세인 프레드 밸린저(마이클 케인)과 그의 친구인 미국인 영화감독 믹 보일(하비 카이틀)은 스위스 알프스의 온천장에서 목욕하고 마사지 받으면서 시간을 함께 보낸다. 둘이 농담하고 음담패설하고 또 노인증세인 불편한 소변 보기와 기억력 약화 등에 관해 얘기하면서 노는 모양이 꼭 아이들 같다. 둘은 물론 생에 대한 심각한 대화도 나눈다.  
프레드는 완전히 음악에서 손을 뗐는데 이 곳까지 영국 여왕의 특사가 찾아와 작위를 줄 테니 그의 가장 유명한 곡인 ‘심플 송즈’(Simple Songs)를 지휘해 달라고 부탁한다. 여왕이 듣고 싶어 한다는데도 프레드는 이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한편 믹은 프레드와는 달리 여러 명의 각본가들을 데리고 와 마지막 걸작에 대한 구상을 한다. 
프레드는 비록 은퇴는 했지만 음악을 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가 시골길을 걷다가 젖소들의 울음소리와 목에 단 방울소리에 맞춰 지휘를 하는 모습에서 잘 알 수가 있다. 두 사람 외에 갖가지 군상들이 온천에 머무는데 그 중에 비중이 큰 사람이 젊은 미국인 배우로 독일의 초기 낭만파 작가 노발리스를 읽고 있는 지미 트리(폴 데이노)와 아버지의 등한시로 가슴에 상처를 입은 신경이 예민한 프레드의 아름다운 딸 레나(레이철 바이스).
이 밖에도 식당에서의 저녁식사 때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잘 차려 입은 부부(대화 부재에는 이유가 있는데 어느 날 식사 중 아내가 남편의 뺨을 느닷없이 후려갈기는 장면이 폭소를 자아낸다). 이와 함께 대낮 숲속에서의 두 남녀의 야단스런 섹스 등 엉뚱한 이미지 희롱이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영화에 가뿐한 채색을 한다.
영화에서 프레드와 믹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빼앗아 가는 장면이 프레드와 믹이 몸을 담고 있는 스파에 완전 알몸으로 들어온 미스 유니버스(루마니아 배우이자 모델인 마달리나 디아나 게데아의 풍만하고 굴곡이 유려한 육체가 비너스는 저리 가라다)의 입욕 장면. 여기에 믹의 뮤즈이자 그의 단골배우인 제인 폰다(상 감이다)가 짙은 화장을 하고 나타나 상소리를 마구 내뱉으면서 영화에 변태적 활기를 부여한다.
마침내 프레드는 여왕 앞에서 ‘심플 송’을 지휘하기로 결정하고 노래를 부를 가수로 조수미를 선정한다. 프레드의 지휘로 조수미가 아름답고 슬픈 ‘심플 송’(미국 작곡가 데이빗 랭 작곡)을 깊고 곱고 뜨겁게 부르면서 끝난다. 두 베테런 배우 케인과 카이틀의 조용하고 확신에 가득하면서도 경쾌한 연기가 눈부시고 눈 덮인 알프스 마을의 정경을 포착한 촬영이 곱다. 
R. Fox Searchlight. 일부 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히치콕/트뤼포(Hitchcock/Truffaut)


프랑솨 트뤼포(왼쪽)가 알프레드 히치콕을 인터뷰하고 있다.

트뤼포, 히치콕과 8일간에 걸친 인터뷰


1962년 유니버설 스튜디오 내 한 사무실에서 프랑스의 젊은 감독 프링솨 트뤼포(당시 30세)가 ‘서스펜스의 장인’ 알프레드 히치콕(당시 63세)을 상대로 8일간에 걸쳐 가진 인터뷰에 관한 기록영화. 두 사람의 인터뷰 사진(필름촬영은 안 했다), 히치콕 영화의 장면들, 그의 영화 제작 배경사진 및 홈무비 그리고 마틴 스코르세지, 폴 슈레이더, 피터 보그다노비치, 데이빗 핀처 등 현존하는 저명 감독들의 히치콕에 대한 해석 등을 모아 만들었다.
영화 비평가로 시작해 자전적 영화 ‘400 블로우즈’(400 Blows·1959)로 감독으로 데뷔,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프랑스 누벨 바그의 기수 중 하나인 트뤼포는 이 인터뷰 내용을 ‘히치콕/트뤼포’라는 제목의 책으로 냈는데 이 책은 영화학도와 영화인은 물론이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녹음상태가 좋아 히치콕과 트뤼포의 대담을 자세히 들을 수 있는데(영어통역 대동) 특히 히치콕의 진지하다가도 때때로 내뱉는 듯한 짓궂은 농담이 매우 우습다. 영화는 배우 밥 밸라반의 해설로 진행된다.      
히치콕의 무성영화로 시작된 영국에서의 초기 활동에 이어 그가 할리웃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와 1940년대와 50년대에 걸쳐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됐는데 이와 함께 트뤼포의 프랑스에서의 비평가와 감독으로서의 활동이 얘기된다.
트뤼포의 요청으로 이뤄진 이 인터뷰는 특히 상기한 감독들 외에도 일본의 키요시 쿠로사와와 미국의 제임스 그레이 및 리처드 링크레이터 등 여러 감독의 히치콕에 대한 통찰력 있고 주도면밀하며 또 애정이 어린 해석이 들 을 만하다.    
영화의 말미 3분의 1은 스코르세지의 히치콕 작품 ‘사이코’와 ‘버티고’에 대한 외과의사의 수술과도 같은 빈틈없는 분석으로 진행된다. 
특히 ‘버티고’의 여주인공 킴 노박의 변용에 대한 그의 해석이 치밀한데 그는 고지공포증자인 전직 형사 제임스 스튜어트의 킴 노박에 대한 집념을 사체에 대한 애정으로 해석한다.
트뤼포는 히치콕을 가벼운 오락영화 감독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진지한 예술가로 승화시킨 사람으로 둘은 이 인터뷰 후 히치콕이 죽을 때까지 서신을 교환하며 깊은 우정을 지켰다. 히치콕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훌륭한 기록영화다. 켄트 존스 감독. 
10일까지 뉴아트극장(11272 샌타모니카 310-473-8530). ★★★½(5개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세추코 하라와 야수지로 오주



세추코 하라(사진)가 지난 9월5일 도쿄 인근의 해안도시 카마쿠라에서 95세로 별세했다. 스크린에서 늘 큰 누님 같은 분위기를 지녔던 사람이어서 마치 내 누님을 잃은 것 같은 마음이다.
하라는 가장 일본적인 감독 야수지로 오주(1903~1963)의 뮤즈로 함께 모두 6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몇 편의 영화에서 혼기를 놓친 딸 노리코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토실토실하니 살이 찐 긴 얼굴에 늘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었던 하라는 절제의 장인 오주의 스타일답게 오히려 감추어 드러내 보인 연기를 했다.
태평양전쟁 중에 만든 전쟁고무 영화 ‘하와이에서 말레이아까지 해전’과 전후 아키라 쿠로사와의 성격드라마 ‘우리 청춘에 후회는 없다’를 비롯해 생애 총 75여편의 작품에 나온 하라는 오주의 전후 3대 명화로 꼽히는 ‘만춘’(Late Spring·1949)과 ‘맥추’(Early Summer·1951) 그리고 오주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도쿄 이야기’(Tokyo Story·1953)에서 노리코로 나왔다. ‘만춘’에서는 나이 먹은 홀아버지를 남겨 놓고 시집을 갈 수 없어 혼기를 놓친 딸로 나오고 ‘맥추’에서도 28세의 노처녀로 나와 가족을 걱정시킨다. ‘도쿄 이야기’에서는 상경한 시부모를 시부모의 아들과 딸보다 더 극진히 모시는 젊은 전쟁미망인으로 나와 우수가 가득히 배인 아름다운 연기를 한다.  
하라는 독립심이 강한 전후의 전형적인 ‘모던 걸’로 나와 가족의 전통과 사회의 관습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조용하면서도 심오하게 보여주었다.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습의 여인이었으나 늘 노처녀나 미망인으로 나와 이런 식으로 속 걱정을 해 불행해 보였다.
‘도쿄 이야기’의 끝 부분에 노리코의 시누이 교코가 자기 모친 장례식을 마친 후 노리코에게 “삶이란 실망스런 것이지요”라고 묻자 노리코가 “네 그래요”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이 ‘삶은 실망’이라는 말은 오주의 철학이자 노리코의 뜻이기도 하다.
하라는 1963년 자기와 염문설이 나돌던 오주가 죽자 배우로서의 절정기에 은퇴를 선언했는데 그 후 죽기 전까지 평생을 혼자 살면서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하라는 ‘영원한 처녀’요 ‘일본의 가르보’라고도 불렸다.
오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또 모든 것이 일어난다. 오주 영화의 주제는 소시민 가족의 평범힌 삶으로 특히 전통 일본 가족의 해체를 자주 그리고 있다. 그의 영화는 별 내용이 없는 자질구레한 일상의 소묘인데도 그것이 매우 보편적인 데다가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어질고 자상해 그의 영화를 보느라면 미열과도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
많은 그의 영화들을 보면 가족들이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와 직장에 가고 오후에는 각자 귀가해 다시 밥 먹고 얘기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게 일이다. 그는 이런 평범한 것들을 통해 세대 차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실망 그리고 가족의 죽음과 부부갈등 및 부모의 자녀 결혼걱정과 같은 우리 모두의 얘기를 거의 반 극적으로 천천히 들려주고 있다.
그의 영화는 얘기뿐만 아니라 영상형태도 지극히 고즈넉하고 검소하다. 얘기에서 분명한 플롯과 과다한 드라마를 포기했듯이 카메라도 앉은뱅이의 부동자세를 취한다. 다다미 위에 앉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놓은 카메라(다다미 촬영법) 앞에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데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 다다미 위를 오락가락하는 맨발들을 자주 보게 된다. 오주는 ‘적을수록 많다’는 것을 실현한 미니멀리스트였다.
꼼짝도 않는 카메라는 이런 서민가족의 삶과 함께 다다미방과 복도, 밥상과 혼자 놓인 꽃병과 새장 안의 새, 통근열차와 조는 듯한 후원 그리고 빨랫줄에 걸린 빨래와 연기 나는 굴뚝과 지붕 같은 사물과 풍경을 멀리서 낮은 각도로 관조하듯이 포착하면서 화면에 은근한 감정적 파랑을 일군다. 그것이야말로 정일 속의 힘찬 감동으로 오주의 화폭은 얘기만큼이나 쓸쓸하니 아름답다. 삶을 이토록 솔직하고 편견 없이 보여준 감독도 찾아보기 힘들다.
서민들의 일상의 자태를 고상하게 승화시켜 준 오주의 작품이 좋은 까닭은 그가 우리의 실수와 과오를 넉넉히 관용하면서 삶의 문제를 체념에 가까운 자세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를 받아들일 줄 아는 현자로 우리가 아무리 삶 때문에 울고불고 안달을 해도 그것은 마련된 제 코스를 따라간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었다.
하라의 부음을 듣고 다시 본 ‘맥추’에서 부인과 함께 공원에 놀러 나온 노리코의 아버지가 아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선 안 되지”라고 한 말에 오주의 이런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오주의 영화는 체념적인 기분 속에서도 결코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그의 영화는 촉촉한 비감과 함께 따스하고 때로는 짓궂은 유머가 알게 모르게 섞여 있는데 이런 장난기 있는 유머감각은 ‘맥추’에서 노리코의 버릇없는 어린 조카 이사무의 세수장면에서 우습게 묘사됐다. 오주는 멜로드라마 같은 삶을 웃어넘길 줄 아는 스크린의 소박한 사색가였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1월 30일 월요일

‘아푸’3부작


소년 아푸가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깡촌 소년이 아버지가 되기까지의 윤회적 삶


인도의 벵갈 깡촌에서 태어난 소년 아푸의 삶의 서클을 그린 인도의 명장 사티아짓 레이의 ‘아푸’ 3부작은 인도 영화를 세계적인 예술영화의 무대에 올려놓은 인생과 인간성에 관한 풍요한 찬미다. 인도 영화계의 마하트마 간디라 불린 레이의 이 3부작은 세계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비부티부산 배너지의 2권으로 된 베스트셀러가 원작. 영화는 1955년 제1편이 만들어진 뒤 5년간에 걸쳐 3편이 완성됐다. 각 영화는 개별적으로도 충분히 하나의 독립된 영화로서 즐길 수 있다.  
마치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케 하는 자연광과 현장을 이용한 영화들은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낙천성과 함께 강한 생명력을 구사하는 아푸의 삶을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될 때까지 윤회하듯이 아름답고 정직하고 또 민감하게 그렸다.
가슴 다한 연민의 정과 자비롭게 통찰하는 눈길 그리고 시적인 붓질로 인생을 관조한 심오한 영화인데 절제되고 정적인 카메라가 포착한 인간성의 적나라한 내면의 조감도라고 하겠다. 흑백화면이 광채를 발휘, 보는 사람을 아름다운 이미지 속으로 침잠케 만든다. 
특히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배우들이 마치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사람들 같아 작품의 사실성을 더욱 북돋우는데 대화가 별로 많지 않은데도 찌들고 여윈 삶을 헤쳐 나아가는 아푸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 웅변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요와 함께 소용돌이치는 역동성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영화로 가깝고 상냥하며 비탄적이면서도 삶에 대한 긍정으로 술렁거리는데 이런 영화의 분위기와 내용을 인도의 세계적 시타 음악가인 라비 샨카르의 음악이 뒤에서 효과적으로 반주해 주고 있다.     
1955년에 만든 3부작의 제1편 ‘파터 판찰리’(Pather Panchali)는 ‘작은 길의 노래’(Song of the Little Road)라는 뜻으로 레이의 영화 데뷔작이다. 
벵갈의 깡촌에서 평 승려인 아버지와 잔소리가 많지만 굳건하고 실질적이며 다정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아푸가 검고 큰 눈으로 세상의 경이를 보고 경험하면서 자라는 얘기다. 카메라가 아푸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한 시골 정경을 조용하고 곱게 화폭에 담는다.
아푸의 또 다른 가족은 아푸의 독립심 강한 어린 누나와 죽음의 변두리에서 서성대지만 장난기를 잃지 않은 깡마른 꼬부랑 할머니(이 할머니를 통해 우리는 닥쳐올 죽음을 관조할 수 있다). 아버지는 출장이 잦아 아푸는 여자들 틈에서 자라는 셈이다. 인간적이요 솔직하며 아름다운 영화다. 
제2편은 ‘아파라지토’(Aparajito)로 ‘정복되지 않는 사람들’(The Unvanquished). 원래 레이는 속편을 만들 생각이 없었으나 ‘파터 판찰리’가 세계적으로 성공하면서 속편을 만들었다. 아푸의 누나가 병으로 죽으면서 슬픔에 빠진 가족이 시골을 떠나 시끌벅적한 도시 베나레스로 이사 온다. 카메라가 도시의 혼란의 소리와 풍경을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많은 10대 소년 아푸가 콜카타에서 공부하며 성장하는 모습과 그와 어머니와의 관계(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성장과정과 비슷한 어머니를 둔 아푸가 나처럼 느껴졌다)를 표현력 풍부하게 묘사했는데 1957년 베니스 영화제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탔다.
제3부는 ‘아푸 산사르’(Apu Sansar)로 ‘아푸의 세계’(The World of Apu). 이 영화는 레이가 그의 또 다른 걸작 ‘음악실’(The Music Room)로 세계 영화계의 전설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만들었다.
20대가 된 아푸는 작가로 평생을 살기로 결심하면서 박봉에 콜카타의 달동네에 살면서도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의 낙천성과 생명력에 감염이 된다. 어느 날 아푸는 친구와 함께 시골에 있는 친구의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남의 부인이 될 젊고 아름답고 총명한 여자와 벼락치기로 결혼을 하게 된다.
아푸와 아내는 콜카타의 쪽방에서 행복한 신혼살림을 하는데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출산 차 친정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아내가 아들을 낳으면서 사망한다. 깊은 슬픔에 빠진 아푸는 아들을 보기조차 마다하고 집을 떠나 방랑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동안 써놓은 귀중한 소설 원고도 바람에 날려 보낸다. 
전 3부작을 통해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제3편의 마지막 장면. 아푸가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기 전 아내의 집에 와 어린 아들과 대면하는데 아들은 아푸에게 돌팔매질로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탓한다. 부자 간의 짧지만 긴장감 감도는 갈등이 끝나고 아들을 목마 태우고 미래를 향해 발길을 옮기는 아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이로써 아푸의 삶이 한 바퀴 돌아온 셈이다. 디지털로 복원된 ‘아푸’ 3부작이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출시됐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크리드(Creed)


록키가 과거 자기 라이벌이었던 아폴로의 아들 아도니스(왼쪽)를 코치하고 있다.

록키의 권투열정, 코치로 링에 돌아오다


실베스터 스탤론의 ‘록키’ 시리즈 제7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록키’에서 파생된 ‘검은 록키’로 주인공 이름만 달랐지 내용은 ‘록키’ 제1편을 그대로 답습한 기시감이 있는 영화다. 권투선수처럼 튼튼하고 흥분과 재미를 모두 갖춘 영화로 연기와 촬영과 연출 등 여러 면으로 잘 만들었으나 내용이 특별히 새롭다기보다 옛날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점이 흠이다. 스탤론은 시리즈 6편의 각본을 다 자기가 썼는데 이번에는 조연으로 출연만 하고 있다.
감독(공동 각본)을 한 라이언 쿠글러와 주연배우 마이클 B. 조단은 비평가들의 칭찬을 받은 인디영화 ‘프르투베일 스테이션’으로 주목을 받고 이번에 이 WB 영화로 메이저 스튜디오 작품에 선을 보이게 된다. 
언더독 권투영화이자 멜로드라마인 영화는 처음에 부모 없이 거칠게 자란 소년 아도니스 잔슨(B. 조단)이 소년 교도소에서 싸움을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체구가 작은 아도니스가 자기보다 큰 아이를 주먹으로 때려누이는 모습에서 이 아이가 타고난 싸움꾼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이어 아도니스에게 시리즈 제1편에서 록키와 싸운 아폴로 크리드(칼 웨더스)의 미망인이 찾아와 아도니스가 크리드의 사생아임을 알리고 집에 데려다 키운다. 아도니스는 커서 회사원이 되는데 일종의 부업으로 멕시코 티와나에 내려가 도박권투로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니까 아도니스에겐 아버지의 권투인자가 유전된 것이다.
권투가 하고파 주먹이 근질거리는 아도니스는 직장을 그만두고 필라델피아로 록키를 찾아간다. 그는 죽은 아내의 이름인 ‘에이드리안스’라는 식당을 경영하는 록키를 찾아가 권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나 록키는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록키가 아도니스를 지도할 것은 뻔한 일로 영화의 각본은 이런 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록키가 자기의 과거 훈련장인 프론트 스트릿 체육관에서 아도니스를 훈련시키면서(그러니까 록키는 시리즈 제1편에서 자기를 가르쳐주던 코치 믹키 역을 맡았던 고 버제스 머레데스 노릇을 하고 있는 셈) 얘기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는데 여기에 아도니스와 아래층 아파트에 사는 아름다운 가수 비안카(테사 탐슨이 반짝반짝 빛난다)와의 로맨스를 양념으로 섞어 넣었다. 이 것까지 ‘록키’ 제1편을 닮았다.  
그리고 영화의 절반쯤 가서 아도니스가 링에 올라 상대방과 격렬한 경기를 벌이면서 본격적인 프로 권투선수의 맛을 본다. 그리고 아도니스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영국의 불패 기록을 가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릭키 콘란(그래암 맥타비시)으로부터 도전장이 날아든다. 리버풀에서 열린 빅매치의 피가 튀는 경기를 찍은 촬영이 사나운데 다소 과장돼 현실감이 떨어진다. 영화는 ‘록키’ 제1편과 똑같이 끝이 나는데 그러니까 이 영화가 성공하면 속편이 나온다는 말이다.
B. 조단이 다부진 연기를 잘하는데 보기 좋은 것은 스탤론의 민감한 연기다. 그가 세상풍파를 다 경험한 사람으로 더 이상 권투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안에서 끓고 있는 권투에 대한 열정에 시달리다 코치로 링에 복귀하는 모습을 연민의 마음이 일도록 아름답게 보여준다. 오스카 조연상 후보감이라는 말이 나돈다. 
유명한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의 록키계단이 영화 맨 끝에 나오고 빌 콘티가 작곡한 사람을 흥분시키는 ‘록키’의 주제음악의 일부가 필라델피아의 하늘에 메아리를 남긴다. PG-13.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야생마(Mustang)


5명의 자매들은 집안의 억압과 통제에 집단으로 저항한다.

터키 시골 5자매의 ‘전통과 관습 탈출기’


제목은 갈퀴를 휘날리며 광야를 달리는 짐승이 아니라 야생마와 같은 독립심과 넘치는 에너지 그리고 자유혼을 지닌 5명의 터키 시골의 자매를 말한다. 아름답고 심오하며 감수성과 민감함이 가득한 눈부신 작품으로 빈틈없는 연출과 흥미진진한 서술방식 그리고 음악과 촬영과 연기 등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한 작품이다.
장소와 배우들과 대사 그리고 감독(여류 데니즈 감제 에르구벤은 터키계 프랑스인으로 이 영화가 데뷔작) 등이 전부 터키어요 터키인인데도 이 영화는 프랑스의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이다. 돈과 제작진이 프랑스산이어서 그렇다.
시대는 현재. 터키 북부 흑해안의 작은 마을. 부모를 일찍 잃고 할머니(니할 콜다스)와 삼촌(아이베르크 펙칸) 밑에서 자라는 5명의 10대 소녀들이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다가 신나게 바다에서 또래 소년들의 목마를 타고 장난을 한데 이어 사과밭에서 사과를 훔쳐 따다 주인에게 걸려 혼이 난다.
주변에서 이들의 행동을 고발하는 바람에 소녀들은 할머니와 삼촌으로부터 컴퓨터와 셀폰을 빼앗긴 채 가택연금을 당한다. 어쩌다 할머니 감시 하에 마을에 나갈 때도 부대자루 같은 옷을 입고 나간다.
이들의 삼촌은 조카들의 처녀성 상실과 그로 인해 시집을 못 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가 처녀성 검사까지 시킨다. 그리고 소녀들의 할머니와 삼촌은 장녀 소나이(일라이다 아크도간) 부터 벼락치기로 시집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형제애로 똘똘 뭉친 아이들은 자신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하나 전통과 규칙을 고수하는 기성 체제의 조직적 길들이기를 뒤집어 엎기에는 역부족이다.        
둘째도 시집을 가고 5명의 형제가 하나씩 각개 격파가 되면서도 이들은 형제애로 결연히 뭉치나 결국 최후의 수단은 탈출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일종의 감옥 탈출기라고도 하겠는데 그에 따른 긴장감과 스릴이 있다.
굉장히 강렬한 작품으로 아이들에 대한 관찰이 연미에 가득차고 또 주도면밀한데 귀여운 막내 랄레(구네스 센소이)를 비롯해 대부분이 비배우들인 소녀들의 연기가 진짜 야생마들처럼 자유롭고 활력이 넘친다. 바닷가의 마을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은데 안팎으로 나무랄 데 없이 힘 있고 고운 영화다.
마치 물건을 치우듯이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시집을 보내 처리하는 영화의 내용은 요즘에도 보수적인 국가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이어서 현실감과 함께 거의 공포감마저 느끼게 된다. PG-13. 로열(310-478-3836). ★★★★★(5개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허영의 산물




지난 13일에 개봉된 할리웃의 수퍼스타 앤젤리나 졸리 핏(40)이 제작과 감독을 하고 또 각본을 쓰고 주연까지 한 ‘바닷가에서’(By the Sea)가 비평가들의 혹평과 함께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지금 할리웃에서는 ‘스타와의 관계유지용 영화’에 대한 회의론이 나돌고 있다.
‘스타와의 관계유지용 영화’라는 것은 스튜디오가 수퍼스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흥행성이 희박한 아트하우스 스타일 영화인데도 스타들이 원해 만드는 영화를 말한다. 이를 ‘개인의 열정의 작품’이요 ‘특혜 영화’라고도 부르는데 비평가들은 ‘허영의 산물’이라고 일컫는다.
졸리 핏의 남편 브래드 핏이 공연하는 ‘바닷가에서’는 부부문제를 다른 유럽풍의 영화로 보잘 것 없는 평과 관객의 외면으로 영화를 배급한 워너 브라더스는 4,000만달러의 손해를 보게 됐다.
이 영화와 비슷한 때에 개봉된 샌드라 불락이 주연하고 조지 클루니가 제작한 정치 풍자영화 ‘우리의 상표는 위기’도 ‘스타와의 관계유지용 영화’로 이 역시 비평가들과 관객 모두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 이로 인해 배급사인 소니도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다. 그래서 지금 할리웃에선 이들 영화에 대한 자금투자의 타당성을 놓고 검소란 모르는 스튜디오들이 절약을 생각하고 있다고 연예 전문지들이 보도했다.
‘바닷가에서’는 졸리 핏의 세 번째 감독 작품으로 졸리는 최근 인터뷰에서 “모든 부부에게 살면서 큰 시련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견디어 내면서 끝까지 함께 있으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관객들이 영화를 본 뒤 얘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나는 관객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큰 키에 긴 갈색머리 그리고 큰 눈과 탐스럽게 두툼한 입술을 한 졸리는 해골처럼 마르긴 했지만 아름답고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다(사진).
인터뷰에서도 “나는 완전한 나 자신”이라고 말할 정도로 도도하고 위풍당당해 접근하기가 다소 망설여지기까지 하나 진지하고 솔직한 사람이어서 나는 그녀를 배우라기보다 인간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녀가 인본주의자로서 유엔 특별대사로 전 세계를 돌며 난민보호와 환경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것도 찬양할 만한 일이다.
졸리 핏은 절제수술하고 인공유방으로 대체한 자신의 건강문제에 대해서도 솔직히 얘기했다. 영화의 욕조 속 유방노출 장면에 대해 그녀는 “처음에는 잠시 망설였으나 수술을 받고도 유방을 지닐 수 있으며 그것이 약간 다르게 느껴지긴 하나 여전히 여자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허점과 상처야말로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덧붙였다.
졸리 핏은 또 나이에 대해서도 솔직했다. 그녀는 “난 이제 40이 되었는데 50과 60이 되는 것은 행복하다”면서 “나는 늙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졸리 핏은 남편 브래드를 아주 매력적인 남자라고 추켜세웠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도 남편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낄 줄 아나 난 내 아이들의 아버지요 나의 절친한 친구인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녀는 이어 “나는 그를 무척 사랑한다”면서 “우리도 영화 속의 부부처럼 문제도 있고 싸우기도 하나 문제가 있으면 미루지 않고 신속히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또 서로 많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간다”고 말했다.
졸리 핏은 브래드와의 10년간의 삶을 통해 배운 원만한 관계유지의 비결은 “타협과 함께 강하게 나 자신을 지키면서 상대방이 최고가 되도록 돕는 것”이라면서 “둘이 공동목표를 가지고 아울러 상대의 뜻을 바꾸도록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것도 관계유지의 비결”이라고 덧붙였다.
졸리 핏에게 있어 브래드보다 더 중요한 것은 6명의 자녀들이다. 그녀는 “무조건 아이들이 먼저”라면서 “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빼앗기거나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게 된다면 결코 일을 안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큰 아이들 셋은 졸리 핏이 촬영할 때면 세트에서 함께 일한다고.
‘바닷가에서’는 실패했지만 졸리 핏은 감독을 계속할 것이다. 그녀는 “나는 감독하는 일을 사랑한다”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역사와 전쟁영화로 나는 지금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의 양민 대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알려줬다. 그녀의 감독 데뷔작은 보스니아전쟁을 그린 ‘피와 꿀의 땅에서’(2011)이고 두 번째 것은 태평양전쟁을 다룬 ‘언브로큰’(2014)이다.
그녀는 감독이라는 일에 대해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배우인 나 자신을 내가 감독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면서 “그러나 남편을 감독하는 것은 재미있었다”며 웃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브래드와 정식 결혼 후 사흘 만에 말타에서 영화를 찍어 최고의 신혼여행을 한 기분이었다고. 앤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핏은 10년 전 스파이 스릴러 ‘미스터 앤 미시즈 스미스’에 공연하면서 사랑이 싹텄었다. 졸리 핏의 다음 영화의 성공을 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1월 23일 월요일

‘캐롤’(Carol)의 케이트 블랜쳇




“사랑은 위험하나 밧줄 달린 번지점프 같아”


동성애자의 이성과 결혼은 남에게 고통주려함은 아닐 것
모든 조직·유기체처럼 교회도 변하지 않으면 멸종될 수도


20일 개봉되는‘캐롤’(Carol-영화평 참조)에서 젊은 여자와 정열적인 동성애를 불사르는 중년의 가정주부 캐롤로 나오는 오스카 주연상 수상자(블루 재스민)인 케이트 블랜쳇(46)과의 인터뷰가 지난 13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짙은 푸른색의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인터뷰에 응한 블랜쳇은 홍조를 띤 백색얼굴에 긴 금발을 늘어뜨린 미인이었는데 아름다우면서도 눈초리가 매서워 위압적인 분위기마저 느꼈다.  두 손으로 제스처를 쓰다가 또 손으로 턱을 받쳤다가 하면서 여우같은 모습의 표정 연기까지 동원해 질문에 길고 상세하게 대답을 했는데 매우 지적인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블랜쳇은 캐롤 역으로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 영화는 1950년대로선 굉장히 과감한 소설인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금의 값’이 원작인데 당신은 영화에 나오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었는지.
“당시로선 혁명적인 소설이었다. 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팬으로 책은 미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 1950년대에 강렬한 조명을 비추고 있다. 핵가족시대요 소비시대였던 당시의 모습을 영화에서도 잘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영화가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폐쇄적이고 질식할 것만 같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1950년대 자란 나로서도 매우 다른 렌즈로 그 당시를 들여다보는 경험이었다.”

-시상시즌이 왔다. 당신은 이 영화와 함께 CBS-TV의 댄 래더 오보사건을 다룬 ‘진실’(Truth)에서의 제작자 역으로 모두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말 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 내가 특히 자랑스러운 것은 내가 관여하고 있는 제작사 더티 필름스가 이 두 영화에 모두 참여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아주 자랑스러운데 유감인 것은 두 영화가 거의 동시에 개봉된 일이다. 그러나 두 영화는 내용이 완전히 달라 서로 공존할 수 있다고 본다. 난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상시즌의 절차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런 것은 아이폰 세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나도 어차피 그 같은 과정에 동참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도 안다.”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는가.
“난 크리스마스 샤핑을 생각하면 공포에 질리곤 한다.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우린 땡스기빙을 더 즐긴다. 나의 아버지가 미국 사람이어서(어머니는 호주인) 기족이 함께 모이는 땡스기빙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는 엄청나게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마련했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베니스를 비롯해 유럽여행을 했다. 야단스럽지 않은 크리스마스로 아이들이 주가 돼 축하를 한다.”

-사랑은 집념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랑에는 여러 타입이 있다고 본다. 사랑이 오래 가려면 이런 다른 타입을 다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캐롤이 사랑하는 테레즈를 정열적으로 집념하면서도 놓아준 것도 이런 타입이 다른 사랑의 행위다. 둘이 모텔에서 마침내 사랑의 행위를 할 때도 그 것은 집념의 행위라기보다 누가 인도하고 누가 따르는 대신 함께 매여 공존하는 행위여서 아름답다. 사랑은 동시에 이타적이요 또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인 테레즈(왼쪽) 앞에서 딸을 잃게 된 캐롤이 울고 있다.

-당신은 동성애자이면서도 결혼을 해 결국 희생되는 사람은 가정을 지키려는 남편이다. 이런 일은 요즘에도 일어나는데 당신의 이에 대한 견해는.
“캐롤의 사랑이 불법이며 변태로 여겨지니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다.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졌으나 요즘에도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과는 달리 자기 성애의 기호여부를 밝히고 얘기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내성적이요 매우 사적인 캐롤은 남편 하지와 결혼해 그 것을 유지해 보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둘 간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캐롤은 하지에게 우리 모두 진짜로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아직도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살 권리가 있는 대도 말이다. 우리나라(호주)도 아직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결혼하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사람마다 다른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그럴 수도 있고 또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불편해서도 그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꼭 남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그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당신은 현재 두 개의 다른 영화에 나오고 있는데 둘은 얼마나 서로 다른가.
“완전히 다르다. 얘기도 다를 뿐 아니라 인물들의 성격 개발의 리듬도 다르다. 따라서 그 둘의 심장의 박동도 내겐 다르게 느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독들이 세트에서 아주 다른 분위기를 조성한 사실이다. 그래서 난 각기 다른 세상으로 들어갈 때 아주 기뻤다. 두 세상이 너무 달랐고 또 영화제작 스타일도 서로 아주 틀렸기 때문이다.”

-당신이 처음으로 사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당신의 사랑이 어떻게 변했다고 보는가.
“난 아주 알맞은 때에 내 영혼의 동반자를 만난 행운아다. 우린 그 때 둘이 같이 물불 안 가리고 서로에게 뛰어들었다. 우리의 관계가 훌륭한 것은 우리가 서로 상대의 이해 관심사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와 함께 유머감각도 사랑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나는 내 남편이 나를 웃길 때마다 매번 다시 그에게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다. 사랑은 번지점프 같은 것으로 위험한 것이나 밧줄이 당신을 지탱해 주길 바라는 것과도 같다.”

-자라면서 당신에게 큰 영향을 준 영화는 무엇인가.
“제나 롤랜즈(얼마 전 아카데미 명예상인 가버너즈상을 받았다)가 나온 ‘우먼 언더 디 인풀루언스’이다. 그렇게 생살처럼 노골적이요 사실적이며 또 공개적인 영화와 연기를 본 것은 그 것이 처음이다. 마치 영화 속 롤랜즈의 삶이 내게 일어나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완전히 나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흥분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무엇인가.
“난 늘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너무 좋아해 남에게 주기 싫은 것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라고 이른다. 캐서린 헵번의 질녀가 준 헵번의 장갑을 아끼고 결혼 15년 후 시어머니가 준 그녀의 약혼반지도 귀중하다. 난 결혼하는 내 친구에게 내가 아끼는 보석을 주었는데 이렇듯이 나는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기보다 내가 떨어지기 싫은 것과 떨어지면서 선사한다. 선물로 받은 것 중에 싫었던 것은 결혼 후 몇 년간 남편이 준 진공청소기와 믹서와 다리미이다.”

-새로 영화계에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해줄 충고는 무엇인가.
“배우로서의 성공은 ‘예스’하는 것만큼이나 ‘노’하는 데도 달려 있다.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되 자신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 애독한 책은 무엇인가.
“난 탐정소설을 좋아해 ‘낸시 드루’의 팬이었다. 내게 큰 영향을 준 책은 ‘투 킬 어 목킹버드’이다. 나 책 냄새 맡기를 좋아했다.”
                                                          
-당신은 캐롤처럼 우아한데 그것은 타고 난 것인가.
“난 늘 나를 모양을 낼 줄 모르는 여자라고 여기고 또 우아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 고맙다.

-바티칸은 여전히 동성애를 비난하는데 당신은 교회가 변하리라고 보는가.
“어떤 조직이나 유기체나 변하지 않으면 멸종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은 진화하게 돼 있다. 따라서 교회도 진화하지 않으면 멸종되리라고 본다. 지금 교황인 프랜시스는 과거 교황들과는 매우 다른 데가 많아 교회도 과거로부터 큰 출발을 할지도 모른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캐롤(Carol)


캐롤(오른쪽)이 백화점에서 테레즈로부터 물건을 사면서 눈을 맞추고 있다.

1950년대 두 여인의 사랑 절제 있게 그려


1950년대 초 중년의 가정주부와 젊은 백화점 여점원 간의 사랑을 그린 향수감 짙은 잘 만든 드라마로 소설 ‘기차 안의 낯선 사람들’과 ‘재주꾼 미스터 리플리’를 쓴 여류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이 원작이다.  
두 연인이 만나 사랑하면서 희열하고 이어 다투면서 울고불고하다가 헤어진 뒤 심한 가슴앓이 끝에 재회한다는 사랑 영화의 공식적 틀을 그대로 따라가 얘기는 단순하나 두 주인공의 연기가 눈부시다. 
아름답고 지적이며 또 감수성 있으며 기능적으로도 우수한 작품인데 지나치게 조심을 하면서 마치 연애소설이라기보다 학술 논문을 쓰듯이 딱딱하고 주도면밀한 것이 영화의 깊은 풍미를 제대로 느끼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피가 끓는 사랑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분위기가 다소 차고 경직됐다. 그러나 지적인 흥미와 관심과 함께 50년대 초의 미국의 모습과 풍습 그리고 당시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 등을 관찰할 수 있는 고급 드라마다.
영화는 회상식으로 서술된다. 1952~53년 크리스마스/신년 할러데이 기간. 뉴저지주에 사는 상류층 여인 캐롤(케이트 블랜쳇)은 점심을 먹으러 맨해턴에 왔다가 백화점 양품부에 들른다. 여기서 캐롤은 젊고 아름답게 생긴 사진작가 지망생인 테레즈(루니 마라)를 보고 마음이 가는데 테레즈도 캐롤에게 야릇한 관심을 느낀다. 테레즈에게는 자기를 따르는 남자들이 있지만 캐롤은 이들과 본격적인 이성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한편 캐롤은 물건을 산 뒤 진열대 위에 자신의 가죽장갑을 남겨놓고 가는데 일부러 남긴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테레즈가 이 장갑을 캐롤을 찾아가 전달하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런데 캐롤은 자기 어린 딸의 대모이자 절친한 친구인 애비(새라 폴슨)와 동성애 관계를 가진 것 때문에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로부터 이혼소송을 당한 생태다. 그래서 캐롤의 테레즈에 대한 열정은 잘못하면 캐롤의 딸에 대한 양육권은 물론이요 방문권마저 박탈당할 재앙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뜨거운 사랑을 참지 못한 캐롤은 남편과 딸이 며칠 집을 비운 사이 테레즈에게 서부 기차여행을 청하고 테레즈도 이에 응한다. 얘기가 여기까지 오는데 근 1시간이 걸리는데 영화의 진행속도가 매우 느리다. 그리고 둘은 아이오와주 워털루의 작은 모텔에 들면서 비로소 뜨거운 육체의 기쁨을 누린다. 두 주인공의 상반신 나체와 사랑의 행위가 매우 품위 있고 아름답게 묘사됐다.
집요한 하지의 추적으로 캐롤과 테레즈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캐롤은 딸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테레즈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세월은 몇 년이 지나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블랜쳇의 안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연기와 마라의 연약한 듯 하면서도 강인하고 변화무쌍한 연기가 일품이다. 촬영과 의상과 옛날을 잘 재현한 프로덕션 디자인 및 조 스태포드의 노래 등 흘러간 팝송을 잘 이용한 음악도 아주 좋다. R. Weinstein. 일부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확인하라!




지금 LA에서는 언론에 관한 2편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먼저 개봉된 영화는 소위 ‘래더게이트’라 불리는 CBS-TV의 앵커맨 댄 래더의 부시의 병역문제를 둘러싼 오보를 다룬 ‘진실’(Truth)이다.
래더는 미 대통령 선거 2개월 전인 지난 2004년 9월8일 시사프로 ‘60분’을 통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과거 특혜를 이용, 텍사스주 공군방위군에 입대한 뒤 근무지를 이탈하면서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보도의 근거가 된 문서가 가짜임이 밝혀지면서 래더는 사임하고 프로의 제작자인 메리 메입스는 해고를 당했다. 진실보도가 허위보도가 된 셈인데 래더는 지금까지도 비록 문서는 가짜이나 부시의 근무 태만은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화에서 래더로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메입스로는 케이트 블랜쳇이 나오는데 잘 만든 재미있는 작품이나 지나치게 래더 편을 들고 있는 느낌이다. 대통령 선거전이 가열되고 있는 요즘 보면 딱 알맞을 영화다.
이어 얼마 전에 개봉된 ‘스팟라이트’(Spotlight)는 2002년 막강한 보스턴 천주교 교구 내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을 보도한 보스턴 글로브지의 기자들의 취재를 다룬 튼튼한 드라마다. 신문사 내 4명으로 구성된 심층조사 보도팀인 ‘스팟라이트’(사진)가 6개월에 걸친 취재 끝에 교구 내 90여명의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을 교회가 알고서도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실을 보도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로 인해 LA를 비롯한 전 미국 내 천주교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과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신부들의 섹스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천주교는 지금까지 문제수습에 무려 30억달러를 써야 했다.
취재팀의 팀장으로 마이클 키튼이 나오고 마크 러팔로와 레이철 맥애담스 등이 취재기자들로 나오는 앙상블 캐스트 영화로 마치 수사영화를 보듯이 긴장감과 스릴이 있는데 배우를 비롯해 작품이 오스카상 후보에 오를 기능성이 크다.
‘래더게이트’의 원인은 보도의 소스 진위여부를 100%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도팀이 문제의 문서의 진위여부를 놓고 필적 감정사까지 고용해 99%의 확인 작업을 한다. 그러나 마감날짜에 쫓기면서 부시를 잡겠다는 욕심으로 인해 100%의 확인 없이 보도, 래더는 TV를 통해 공개사과를 하고 방송인으로서의 생명도 끝이 났다. 그러니까 1%의 확인 불이행 때문에 일어난 희대의 오보사건이었다.
‘스팟라이트’에서도 이런 확인 작업이 자세히 묘사된다. 취재팀이 신부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희생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사실여부를 묻는 모습과 함께 시끌벅적한 편집국 내 풍경이 매우 생생하게 그려졌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과거 한국에서의 내 기자시절이 생각나 감개가 무량했다. 내가 한국일보의 졸병기자였을 때 후에 주불 특파원을 지낸 김승웅 선배를 비롯한 고참들로부터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은 것이 ‘100% 확인’이었다. 기사를 써 데스크에 넘기면 기사를 손보던 데스크들이 매번 묻는 말이 “야, 박흥진 너 이거 확인한 것 맞지”였다. 그래서 확인은 그 뒤로 나의 좌우명이 되었고 후에 내가 미주 한국일보에 와 데스크 노릇을 하면서 신참 기자들에게 가르친 첫 말도 ‘100% 확인’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확인을 게을리 하다가 오보를 낸 적이 더러 있다. 글을 쓰면서 어딘가 찜찜한 부분이 있으면 꼭 확인을 해야 하는데도 게으름을 피우면서 이를 어물쩍 넘기다 보면 반드시 탈이 나게 마련이다. 독자로부터 오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받으면서 등에 식은땀이 흐른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좋은 기자가 되는 자격 중 하나가 ‘100% 확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밖에 또 다른 자격을 과연 ‘스팟라이트’의 팀장 역의 키튼은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해서 며칠 전 그를 인터뷰했을 때 물었다.
키튼은 이에 대뜸 “완전무결”이라고 대답했다. 기자라는 인격체의 완전무결을 의미하는 듯했다. 이어 그는 파고들어 사실을 캐내고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이에 “집요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더니 키튼은 “그것도 맞다”고 말했다.
내가 ‘확인’과 ‘집요성’ 이외에 생각하는 좋은 기자로서의 자격요건들은 ‘불의를 의롭게 하겠다는 결의’와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다. 나는 이런 뜻을 품고 기자가 되었지만 과연 그 뜻을 얼마나 실천으로 옮겼는지는 의문이다.
‘진실’과 ‘스팟라이트’는 언론매체가 인터넷화 하는 요즘에 보면 향수감을 불러일으키는 ‘구식 언론’의 모습이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종이신문을 외면해 신문사들이 문을 닫고 최근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처럼 파산신청을 하거나 기자를 비롯한 직원들이 대량 해고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40여년을 기자생활을 해온 나로선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지곤 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바닷가에서(By the Sea)


바네사가 남편 롤랜드의 품에 안겨 고통과 슬픔을 앓고 있다.

졸리와 핏의 권태로운 얘기 지루하게 담아


순전히 앤젤리나 졸리 핏의 허영의 산물로 수퍼스타인 그녀의 이름 때문에 유니버설사가 마지못해 만들었음에 분명하다. 얘기 결핍증에 걸린 재미라곤 전연 없는 영화로 2시간이 넘도록 영화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짙은 화장을 한 앤젤리나가 공연히 폼을 잡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로 그녀는 영화 내내 줄담배를 타우면서 죽을상을 해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하고 육신이 불편해 영화가 끝나면서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앤젤리나의 세 번째 감독 영화로 감독 외에도 각본도 쓰고 제작도 하고 또 주연도 하면서 1인4역을 하고 있는 사이비 예술영화로 지난해에 나온 ‘언브로큰’을 비롯한 그녀의 연출솜씨는 잘 해야 65점 정도다. 
브래드 핏과 앤젤리나 졸리 핏이 무슨 문제가 있는 부부로 나와 영화 내내 담배 태우고 술 마시고 침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피핑 탐’ 짓으로 무료를 달래다가 끝이 나는 극적으로 처음부터 사망한 영화로 얘기가 흐름이 없이 고여 상한 냄새가 난다. 
유럽 영화 흉내를 낸 이 작품은 특히 현대의 남녀 간의 무료와 무관심과 권태와 고독을 잘 다룬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고독 3부작'(라벤투라, 밤, 일식)을 연상케 하나 이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1970년대로 생각되는 어느 여름 작가인 롤랜드(브래드 핏)와 댄서 출신의 바네사(앤젤리나 졸리 핏)가 빨간 컨버터블 시트로앙을 타고 프랑스의 한 한적한 해변마을에 찾아와 호텔에 짐을 푼다. 그리고 즉시 바네사는 침대에 눕고 롤랜드는 바닷가에서 홀아비 미셸(닐스 알스트룹)이 경영하는 카페에 들러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 롤랜드와 바네사는 영화 내내 밥은 거의 안 먹고 담배 태우고 술만 마시는데 그러고도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롤랜드는 글이 안 써져 끽연에 음주를 계속하고 바네사는 역시 흡연과 음주를 하면서 베란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침통한 표정을 짓는데 가끔 남편한테 한다는 소리가 설익은 철학용어다. 바네사의 모양이 좀비 같은데 그녀의 우울증 이유가 영화 끝에 가서 서두르듯이 얘기된다. 매우 미숙한 처리다. 
이런 두 사람의 소통 부재와 권태와 무료는 둘이 벽에 난 구멍을 통해 옆방에 든 젊은 신혼부부 레아(멜라니 로랑)와 프랑솨(멜빌 푸포)의 잦은 섹스를 훔쳐보면서 변태적인 위로를 받지만 이 같은 플롯은 바네사의 고뇌하는 심리와 아무 연관을 맺지 못한다.
졸리 핏이 큰 인공유방을 노출하면서 열심히 연기하나 그것은 마치 모델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 같아 가슴에서 스며나오는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엄청나게 아픈 심적 질병을 앓는 여자가 왜 그렇게 시종일관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브래드 핏의 연기도 심심하다. 음악(게이브리엘 야렐)과 촬영은 좋다. R.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33


마리오(가운데)와 광부들이 구출되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다.

지하에 매몰된 33명의 광부 구출기


2010년 칠레에서 일어난 33명의 지하에 매몰된 광부들의 극적 구출을 그린 영화인데 인물 묘사나 얘기가 지나치게 공식적이어서 큰 긴장감이나 흥분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극적인 드라마를 폭이 크고 넓게 묘사하는 대신 잔소리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는데다가 주요 인물들도 깊이 있게 다뤘다기보다는 피상적이요 간추리는 식으로 처리했다.
보고 즐길 만은 하지만 생존의지 하나로 2달여를 지하에서 견디다가 구출되는 광부들의 서스펜스와 스릴 그리고 박진감이 가득한 내용이 과감하지 못하고 무사안일하게 그려져 맥이 빠진다. 특히 워너 브라더스가 만든 이 영화는 세계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칠레 사람들로 여러 명의 국제적 스타를 기용한데다가 대사도 영어여서 보고 듣기가 어색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보기 딱한 것은 프랑스 스타 쥘리엣 비노쉬를 거리에서 음식을 들고 다니면서 파는 가난한 칠레 여인으로 캐스팅한 것. 그리고 단역인 칠레 대통령도 미국 배우이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남편인 제임스 브롤린까지 구출요원 캐미오로 썼다.        
영화는 지하 2,300피트에 갇힌 광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지상에서 굴착전문가 안드레(게이브리엘 번)가 이끄는 구조팀의 활동과 함께 광부들의 가족들이 광산 인근에 임시 마을을 형성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얘기는 지하와 지상을 오락가락하면서 진행되는데 매몰된 광부들의 리더인 마리오(안토니오 반데라스)를 주인공으로 서술된다. 마리오는 탁월한 통솔력과 넓은 인간성으로 깡통식량을 고루 배분하고 절망에 처한 광부들 간의 분쟁과 폭력을 다스린다.    
광부 매몰사건 후 10여일쯤 지나 구조팀에 의해 광부들이 있는 곳까지 작은 구멍이 뚫어져 지상과 지하 간에 쪽지로 의사가 소통되고 우주식량이 전달되나 엄청나게 두껍고 큰 돌이 장애가 돼 구출작전이 지연된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뉴스팀이 이 곳에 와 구출뉴스를 시시각각 보도하면서 칠레의 사막에 있는 광산이 삽시간에 세계적인 뉴스의 초점이 된다. 이런 내용은 빌리 와일더가 감독하고 커크더글러스가 주연한 지하에 매몰된 사람을 구출하는 잘 만든 드라마 ‘에이스 인 더 호울’(Ace in the Hole 1951)을 연상케 한다. 
33명의 광부들 중 마리오를 제외한 5~6명의 인물들이 그나마 단편적으로 묘사되면서 마리오의 역을 보조하지만 장식과도 같은 것이어서 깊이나 폭은 모자란다. 여류 패트리시아 리겐 감독. PG-13.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모비-딕’




우리는 모두 자기 안의 악마와 싸워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자기 구제일진대 이 구제는 자신 속의 악마와의 싸움이 있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포경선 피쿼드의 에이해브 선장과 백경 모비-딕과의 치열한 대결도 에이해브의 자기 구제를 위한 영혼의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허만 멜빌이 쓴 미국의 성경이요 신화라고 불리는 ‘모비-딕’(Moby-Dick)의 영문판을 대학생 때 읽기 시작했다가 분량이 너무 방대하고 또 내용이 형이상학적이요 어려워 중도에 책을 접고 말았다. 며칠 전 필라델피아에서 ‘록키’의 부산물인 권투영화 ‘크리드’(Creed·26일 개봉)에 나오는 실베스터 스탤론을 인터뷰했는데 그도 ‘모비-딕’을 다 읽는데 장구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비-딕’의 얘기는 중학생 때 경남극장에서 본 ‘백경’(1956)을 통해서다. 존 휴스턴이 감독하고 그레고리 펙이 에이해브로 나온 이 영화는 연출과 연기 등이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흥미진진한 모험영화다. 펙이 고래 뼈로 만든 다리를 짚고 다니면서 자기 다리를 물어 뜯어버린 모비-딕에게 복수하려고 광인이 되다시피 해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이 극적이다. 그의 이런 모습은 후에 ‘조스’에서 식인상어 조스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퀸트(로버트 쇼)를 생각나게 한다.
‘모비-딕’은 또 인간의 집념이 불러오는 재앙에 대한 경고문이기도 하다. 에이해브는 자신의 집념을 풀기 위해선 신에게마저 대어드는데 문학 비평가들은 모비-딕을 신이요 자연이며 또 운명이라고도 해석한다.
에이해브의 이런 반-신적 행동과 언사는 지난 7일 본 LA 오페라가 공연한 ‘모비-딕’(사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독재자 에이해브는 자기가 종들처럼 부리는 선원들 앞에서 “그것이 날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때려 부수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에이해브는 자기가 마치 신처럼 행세하는 선동가로 부질 없는 허영이나(젊은 선원 그린혼이 이렇게 노래한다) 다름없는 집념 때문에 결국 자신을 비롯한 선원들과 배에 죽음과 파괴를 불러 오는데 유일한 생존자는 순수와 순진을 상징하는 그린혼(소설에서는 이쉬매엘). ‘모비-딕’은 이처럼 다분히 신앙적 색채도 품고 있다.
신에게 거역하면서 백경과 싸우다 죽은 에이해브를 생각하면 신의 지시를 어긴 탓으로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회개하고 구출된 요나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이다.
오페라 ‘데드 맨 워킹’을 작곡한 제이크 헤기가 작곡하고 진 쉬어가 대사를 쓴 2막짜리 오페라(공연시간 3시간) ‘모비-딕’은 현대음악치고는 멜로디가 상당히 다채롭다. 특히 바다의 정령들의 맑은 울음소리 같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시작해 바다의 거센 물결과 선원들과 백경과의 사투를 연상시키는 격렬한 리듬으로 이어지는 서곡이 매우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음악이 장엄하고 강렬하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음들의 씨줄과 날줄들이 절묘하게 직조돼 지루한 줄 모르고 흥미 있게 관람했다.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LA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를 들으면서 곡의 바그너풍을 느꼈다.
에이해브는 테너 제이 헌트 모리스가 불렀는데 고음일색이었다. 에이해브 역을 바리톤이 불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선적인 에이해브에 맞선 양심적인 1등 항해사 스타벅은 바리톤 모간 스미스, 포경선을 처음 탄 그린혼은 테너 조슈아 게레로 그리고 나머지 선원들인 남태평양 태생의 신령한 혼을 지닌 퀴킥은 베이스 바리톤 무사 엔쿤그와나, 에이해브의 시종 핍은 소프라노 재클린 애콜스(오페라에서 유일한 여자)가 각기 맡아 잘 노래했는데 특히 스미스의 노래가 듣기 좋았다.
2010년 4월 달라스 오페라가 초연한 ‘모비-딕’은 음악뿐 아니라 “백금을 바다로부터 거두리라”를 비롯해  대사도 매우 시적이고 심오하다. 이와 함께 뛰어난 것은 큰 돛대가 무대를 군림한 검소하면서도 튼튼한 세트와 밤하늘에 뜬 별들과 대양을 질주하는 피쿼드 그리고 거칠게 몸을 뒤트는 파도 등을 스크린에 투사한 영상처리. 입체감이 압도적이다. 모비-딕은 맨 끝에 거대한 눈이 노려보는 머리가 에이해브를  향해 달려들면서 그 위용을 나타낸다.
소설은 혼자 살아남은 이쉬매엘(그린혼)이 퀴켁이 생전에 자기에게 부탁해 만든 관을 타고 포류하면서 “나를 이쉬매엘이라고 부르세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오페라는 이 말로 끝이 난다.          
한편 멜빌의 ‘모비-딕’의 모델이 된 실제사건을 나사니엘 필브릭이 소설로 쓴 ‘바다의 심장 속에서’(In the Heart of the Sea)를 원전으로 론 하워드가 감독하고 크리스 헴스워드가 주연한 동명영화가 오는 12월11일에 개봉된다. 이 소설의 제목은 오페라에서 노래로 불려진다. 오페라 ‘모비-딕’은 19일, 22일, 28일 3차례 공연이 남아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1월 10일 화요일

‘화성인’(The Martian)의 맷 데이먼




“내 아이들도 볼 수 있는 영화라 기뻐”

위험한 상황에 유머를 함께 유지하는 것은 큰 도전

LA는 고독에 빠지기 쉬운 곳, 실직자 일 경우 더 해


리들리 스캇리 감독한 흥미 있고 지적인 우주모험영화‘화성인’(The Martian)에서 동료 우주인들과 함께 화성탐사를 갔다가 달랑 혼자 남게 된 뒤 온갖 기지와 생존술을 동원해 구출 받을 때까지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우주인 마크 와트니로 나온 맷 데이먼(45)과의 인터뷰가 지난 9월 11일 토론토영화제가 열리는 토론토의 리츠칼튼 호텔에서 있었다. 짧은 머리에 간편한 셔츠 차림의 데이먼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질문에 대답했는데 그를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은 점은 그가 도무지 수퍼스타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 약간 수줍어하는 미소와 함께 소박하고 정이 가는 태도가 바로 이웃집에 사는 마음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서 아주 편하다.              

―각본을 읽었을 때 느낀 소감은 무엇이었는가.
“난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처럼 우주인 노릇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내가 각본을 읽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마크의 유머가 있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내가 느낀 도전은 어떻게 하면 원작인 책의 유머와 마크가 처한 위험을 함께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즉 영화를 흥분감으로 가득 채우면서 아울러 낙천적이요 재미있게 만든다는 도전이었다.”

―마크는 고립과 동거하며 사는 셈인데 당신과 혼자 있는다는 것과의 관계는 어떤가. 
“지금 난 아이가 넷이나 돼 화성에서 시간을 좀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을 할 때도 우리 가족은 함께 여행한다. 혼자 있었을 때를 찾는다면 내가 LA에서 배우가 되려고 애쓸 때라고 하겠다. LA는 고독을 아주 쉽게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특히 실직자일 경우는 더 하다.”

―고독의 느낌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냥 마주 대하는 수밖에 없다. 배우로서 그것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 할리웃에는 고독에 시달리는 배우들이 엄청나게 많다. 따라서 서로 친구가 돼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고독에 대처하는 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마크는 생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재활용하는데 당신도 실제로 그런가. 그리고 또 마크는 아주 숫자와 수학에 능한데 당신도 그런 것에 능한지.
“우린 철저히 모든 것을 재활용한다. 이 영화는 지능과 셈에 관한 것이기도 해서 난 각본을 쓴 드루 고다드에게 이 영화는 과학에 바치는 연서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지능과 용감하면서도 똑똑한 사람들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우리나라가 점점 더 멍청해 가고 있는 요즘 이런 영화를 내놓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숫자와의 관계를 말하자면 마크만은 못하나 그런대로 괜찮다. 팁 계산도 잘 한다.”

―당신이 마크라면 동료 우주인들이 당신이 죽은 줄 알고 지구로 귀환한 것이 더 나쁜가 아니면 화성에서 생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더 나쁜가.
“혼자 남게 됐구나 하고 처음에 깨달았을 때가 가장 나쁜 순간이라고 본다. 그 후로는 마크가 아주 치밀하게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고 또 언제나 뭔가 할 일들이 있기 때문에 혼자 있어도 미칠 지경은 아니라고 본다.” 
화성에 혼자 남은 마크는 온갖 지혜를 동원, 생존한다.

―마크는 자신과 동료 우주인들의 인분으로 감자를 재배하는데 당신은 어느 감자요리를 좋아하는가. 그리고 감자 키울 줄 아는가.
“으깬 감자요리다. 추수감사절에도 그걸 먹는다. 이 영화 덕분에 감자 재배법을 배웠다. 촬영장 바로 옆에 감자밭을 만들어놓고 감자를 키웠다.”

―당신의 전신 나체 모습은 대역이 했는데 당신 뜻인가.
“내 뜻이 아니다. 원래는 내가 체중을 감소할 예정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다음 장면을 위해 다시 체중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제작상 쉬운 일이 아니다. 화성 외부 장면은 요르단에서 찍고 화성의 우주인 거처 장면은 헝가리에서 찍었는데 내 대역은 그래서 헝가리 사람이다. 그러나 난 감독이 허락했다면 나체로 나올 의향이 있다.”

―마크는 영화에서 탐사팀장(제시카 채스테인)이 가져온 디스코 음반을 들으면서 끔찍한 음악이라고 인상을 쓰는데 실제로 당신은 어떤가.
“나도 딱 마크가 좋아하는 만큼만 디스코 음악을 좋아한다. 누가 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스코 노래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아 윌 서바이브’라고 말하겠다.”  

―리들리 스캇과 일한 경험은 어떤지.
“그는 배우들로 하여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놔두는 감독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면 그것을 키우는 식이다. 그리곤 배우에게 다가가서 ‘거 참 좋은 아이디어다. 아주 잘 했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배우들이 스스로 운전을 하게 하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면 시정해 주는 감독이다.”

―요즘 같이 로봇이 모든 것을 하는 때에 왜 화성에 로봇을 보내지 않고 인간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탐험정신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 인간들이 언젠가는 지구에서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혹성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어린 아이들도 볼 수 있는 것인데 당신도 그것이 기쁜가.
“그렇다. 내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든 것이 아주 흥분된다. 사실 난 그 동안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별로 만들지 않았다.”

―영화를 위해 미 국립항공우주국(NASA)이나 제트추진연구소 직원들에게 자문을 구했는지.
“그들은 기술적인 면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책을 쓴 앤디 위어의 기본 착상은 고도로 훈련을 받은 우주인이 과연 혼자 화성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질문에 대해 과학적으로 대답을 해 나간다. 그들은 인간이 불원 화성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영화에 나오는 인분으로 감자를 재배하는 법과 우주에서 인간의 몸이 받는 영향 등 모든 것에 대해 연구했다. 나는 역을 위해 현재 우주정거장에 6개월 째 체류하고 있는 우주인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영화에는 많은 기술적 과학적 용어가 있어 잘 이해를 못하겠는데 당신은 다 이해했는지.
“마크는 공기와 음식과 물 등 모든 것에 대해 이해하기 때문에 나도 내가 작업하고 말해야 하는 것은 다 이해했다. 책이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으나 보통 사람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사실 NASA 직원들의 전문용어는 이해하기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로켓과학자들의 용어인 만큼 별 수 없지 않은가.”

―학교 다닐 때 과학 성적이 어땠는지.
“난 좋은 과학자가 못 된다. 난 과학자보다는 예술가 편이다.       

―당신의 일상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내 아이들과 아내다. 아이들이 세상을 순진한 눈으로 보는 것을 보면 참담한 경우에도 희망을 보게 된다.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로 인해 나는 스스로를 재충전하고 다음 날을 준비하게 된다.”

―다시 제이슨 번 역을 맡게 된 소감은 어떤지.
“역을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첫 장면에서 내 모습이 볼썽사나우면 영화는 끝장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강인한 몸을 만들기 위해 많은 훈련을 받았다. 지금 1주일 간의 촬영을 마쳤는데 굉장하다. 내년 7월에 개봉한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지나 난 잿빛머리를 하고 나온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