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오른쪽)는 제프의 되살아난 과거 때문에 갈등한다. |
과거의 그림자 속 삶에 격변을 겪는 노부부
아내인 당신이 결혼생활 45년만에 여태껏 남편의 죽은 옛 여자 그림자 속에서 살아 왔다는 것을 깊이 의심하게 된다면 과연 당신은 이에 어떻게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처하겠는가. ‘아, 나는 여지껏 헛 살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면 말이다. 2인극이나 다름없는 이 조용하나 안으로 격한 감정과 의혹과 좌절 그리고 분노가 소용돌이치는 영화는 이같은 물음을 제시한 뒤 애매모호하게 끝이 난다.
사랑과 결혼의 손상되기 쉬운 확실성에 관한 영국 영화로 소품이지만 영화가 던지는 명제가 대단히 심각하고 또 그 감정적 여파가 크고 넓어 작품 속에 깊이 파묻히게 된다. 영국의 두 베테런 샬롯 램플링(69)과 톰 코트니(78)가 주연하는 향수감 짙은 작품이다.
떨쳐버려지지 않는 과거의 그림자 때문에 내적 격변을 겪어야 하는 노부부의 드라마가 차분하고 절제됐으면서도 매우 세련되고 민감하게 그려졌는데 각본을 쓰고 연출한 앤드루 헤이의 윤기 나는 솜씨가 돋보인다.
영국 동부 노포크의 곱고 조용한 교외에서 사는 제프(코트니)와 케이트 머서(램플링) 부부는 1주 후에 가질 결혼 45주년 기념파티 준비에 바쁘다. 둘은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지만 자식은 없다(그 이유는 보는 사람 자의대로 해석하면 된다.) 영화 처음에 부엌 식탁에 제프가 앉아 있는 가운데 케이트가 설거지를 하면서 미 흑인 보컬그룹 플래터즈의 ‘스모크 겟츠 인 유어 아이즈’를 콧노래로 부르는데 이 노래는 둘이 연애할 때 즐겨 듣고 부르던 노래로 영화에는 옛 팝송이 많이 나오면서 올드팬들의 향수감을 자극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프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내용은 50년 전 제프와 함께 스위스 알프스 빙하지대에 놀러갔다가 실족사한 그의 옛 독일인 애인 카티아의 사체가 고스란히 보존된 채 발견됐다는 것. 이 편지를 받고 제프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 스위스여행마저 생각한다.
그러나 제프보다 더 심각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케이트. 더군다나 제프가 알프스 여행을 하면서 카티아를 자기 아내로 등록했다는 것을 안 케이트는 깊은 좌절감과 질투 그리고 의혹에 시달린다. 그리고 다락에 올라가 남편의 옛 사진들과 필름 등을 뒤지면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라스트 신이 가슴을 때린다. 착 가라 앉은 연기를 하는 램플링(LA 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 올해 최우수 주연여우로 뽑혔다)과 코트니의 화학작용이 절묘하다. 진짜 어른들 영화다. 일부극장.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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