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빅토리아와 압둘’ 주디 덴치




“고독한 여왕에게 압둘은 잠자던 정열 깨운 존재”


‘빅토리아와 압둘’(Victoria and Abdul)에서 여왕 즉위 50주년을 맞아 인도에서 예물을 갖고 온 젊은 서기 압둘 카림과 오랜 우정을 지속했던 빅토리아 여왕으로 나온 주디 덴치(82)와의 인터뷰가 토론토영화제 중인 지난 9월 토론토의 페어몬트 로열 요크호텔에서 있었다.
짧은 백발에 품위를 지닌 덴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치미를 뚝 딴 유머를 섞어 친절하고 재치 있게 질문에 대답했는데 매우 명랑하고 인터뷰를 즐기는 모습이 마치 귀여운 소녀 같았다. 그런데 덴치는 시력이 나빠져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덴치는 ‘미시즈 브라운’(1997)에서도 빅토리아 여왕으로 나왔고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1998)에서 또 다른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 나와 오스카 조연상을 탔다. 

-빅토리아 여왕으로 두 번이나 나왔는데 여왕에 대한 의견은 어떤 것인가.
“두 번째로 빅토리아로 나오리라곤 전연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빅토리아와 압둘의 얘기도 몰랐다. 나는 빅토리아의 남편 알버트에 대한 정열과 함께 빅토리아가 남편을 잃은 뒤 겪은 슬픔에 대해선 알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정열적인 사람으로 이런 정열을 모두 포기하고 있을 때 압둘이 나타나 여왕의 내면에서 잠자던 정열을 다시 점화시켜 놓으면서 여왕의 말년을 구제해준 셈이다. 압둘은 그 누군가와 의견을 교환하고 얘기를 나누면서 긴장을 풀 필요가 있는 사람의 정열적인 면을 되살려놓은 사람이다. 그것은 마치 꽃이 다시 개화하는 것과도 같다.”

-80세가 되었을 때 뜻밖에 받은 선물은 무엇인가.
“내 딸과 함께 닥치는 대로 쇼핑을 하고 있는데 딸이 갑자기 문신을 새길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 ‘예스’라고 답했다. 그래서 팔목에 ‘카르페 디엠’(오늘을 마음껏 살아라)라는 문신을 새겼다.” 

-그렇다면 ‘카르페 디엠’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매일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만 보려고 팔찌로 문신을 가리긴 했으나 가끔 보면서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떻게 해서 압둘은 자기 나라의 정복자인 당신에게 ‘여왕 폐하를 섬기는 것은 몸 둘 바를 모르는 특전’이라며 순종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곤란한데.
“그는 예의범절이 매우 바른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섬긴다고 한 것은 단순히 하인 노릇을 한다기보다 영화에서 보다시피 여왕에게 우루드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고 봐야겠다. 그의 섬김으로 인해 여왕은 희망을 갖게 되고 또 매일 아침 일어날 그 무언가를 갖게 된 것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두 문화가 서로를 알게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 내용이 요즘 시의에도 적용된다고 보는지.
“그렇다. 아주 적당한 시기에 나왔다고 본다. 압둘은 회교도이고 빅토리아 여왕은 기독교도이지만 서로 이해하고 사랑했다. 요즘처럼 서로 다른 종교가 다투는 때 이보다 더 좋은 교훈도 없을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압둘로부터 우르드어를 배우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편지를 많이 썼는데 본인도 아직 글을 펜으로 쓰는가. 
“난 늘 편지와 엽서를 많이 썼는데 이젠 시력이 나빠져 더 이상 그렇게 많이 쓰지를 못한다. 내게 있어 그것은 큰 손실이다. 나는 이 인터뷰에 오기 전에 편지를 썼는데 눈이 안 보여 애를 먹었다.”

-보수적인 빅토리아 여왕이 어떻게 해서 회교도에게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있었다고 보는가.
“여왕은 고지식하고 엄격하고 자식들과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긴 하다. 이 영화가 흥미 있는 까닭은 그런 여왕이 놀랍게도 내면에 애정에 대한 심각한 갈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왕은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또 그것을 교환할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모든 것이 격식위주인 삶에서 마음 놓고 함께 웃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왕의 내면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이 영화가 흥미 있는 까닭이다.” 

-배우와 인간으로서의 긴 생애를 돌아 볼 때 무언가 달리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없는지.
“난 원래 무대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러나 지난 1950년대 스트래트포드의 무대에 설치된 ‘리어왕’의 디자인을 보고 내겐 저런 상상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배우가 됐고 그 결정에 대해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종종 무대 디자인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한다.”

-압둘로 나온 알리 화잘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는가.
“촬영에 들어가기 이틀 전에 만났는데 즉시로 일체감을 느꼈다. 그는 유머 감각이 많은 사람으로 처음 보는데도 긴장감이나 서먹서먹한 느낌이 전연 없었다. 그는 아주 멋쟁이로 함께 일 하기가 정말로 좋았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원작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도 나오는데 재미있었는지. 
“별로 대사도 많지 않고 그저 화려한 장신구에 잘 차려 입고 열차에 앉아 있으면 돼 즐거웠다. 그리고 내 친한 친구인 케네스 브라나가 감독해 더 좋았다. 그와 나는 이번으로 10번째 함께 일하는 것이다. 브라나는 감독일 뿐 아니라 영화의 주인공인 탐정 퐈로로도 나온다. 앙상블 캐스트 영화로 멋진 시간을 보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팬인가.
“그가 대단한 존재이긴 하나 특별한 팬은 아니다. 

-연극을 감독한 적이 있는데 영화를 감독할 생각은 없는지.
“케네스 브라나가 주연하는 연극을 두 편 감독했다. 그런데 그 일은 너무 힘들어 영화는 물론이요 연극도 더 이상 감독할 생각이 없다.”

-영화에서 여왕과 압둘은 만나는 즉시로 교감이 돼 둘은 영혼의 만남을 이룬 셈인데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는가.
“몇 차례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도 이해하고 또 느낌으로 금방 가까워질 수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과 친근해질 수 있는 일종의 지름길이다. 내가 함께 일한 감독들 중에도 더러 그런 사람이 있는데 이 영화를 만든 스티븐 프리어스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스티븐은 과묵한 사람이지만 우린 별 말이 없어도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다.”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시력이 나빠져 잘 볼 수는 없지만 그림을 좀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난다. 난 늘 친구 특히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모두 함께 모여 카드를 하고 게임을 하면서 즐기는 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다. 내게 있어 함께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뜻을 지닌 것은 없다.”

-여왕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나 사실은 자유도 없고 자기가 살고픈 대로 살지도 못하는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자리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도 표현됐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것을 스케줄에 따라 해야 한다. 매일 같이 그렇게 산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닌 막중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치하할만한 일이다.”

-여왕처럼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대면한 경험이 있는가.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폭군처럼 자신의 힘을 마구 행사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난 적이 있다.”

-운동은 하는지.
“두 무릎을 다 수술해 하루에 10분을 속보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시력이 나빠져 이젠 운전도 못하는데 운전면허증이 발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난 스포츠카가 있었는데 그 것을 몰고 어딘가를 가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로 유감이다. 시력이 호전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매일 같이 하는 반복해 하는 일이라도 있는가.
“이 닦는 것 외엔 없다.”

-본인에게 있어 매일은 날마다 다른가.
“바라건대 매일이 각기 다 달랐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루해 죽을 것이다. 난 지금까지 60년을 무대에서 활동했는데 이 나이에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운이 좋았다. 특히 이 직업에서 이 나이에 아직도 고용될 수 있다는 것은 진짜로 운이 좋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승객들.  왼쪽이 명탐정 퐈로역의 케네스 브라나.

초호화 캐스팅으로 리메이크한 살인 미스터리극


영국의 여류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원작으로 영국의 배우이자 감독인 케네스 브라나가 연출하고 주연도 겸했는데 특급열차가 영화에서처럼 눈사태를 맞아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연출이 지지부진하고 탄력이 없어 초호화 캐스트영화인데도 지루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살인 미스터리극이 되고 말았다. 
이 소설은 지난 1974년 시드니 루멧이 감독하고 알버트 피니, 션 코너리, 로렌 바콜, 리처드 위드마크, 잉그릿 버그만(이 영화로 오스카 조연상 수상), 마이클 요크, 재클린 비셋, 앤소니 퍼킨스 및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등이 출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이 영화도 잘 생기긴 했으나 외모만큼 내용이 실하진 못했으나 브라나의 것보단 훨씬 낫다. 
브라나의 영화의 대죄는 앙상블 캐스트의 영화에 미국과 영국의 탑클래스 배우들을 기용하고도 이들을 완전히 버리다시피 한 것이다. 배우들이 하나같이 제 구실을 못하고 마지못해 나왔다는 듯이 어색한데 그에 반해 브라나가 너무 독주를 하고 있다. 그는 자동차 운전대만한 콧수염을 하고 나와 심한 프랑스어 액센트를 구사하면서 자주 자기 얼굴을 클로스업으로 과시하고 있다. 브라나가 오버 액팅을 하는 원맨쇼다. 
브라나가 맡은 역은 세기의 명탐정인 벨기에 태생의 에르퀼 퐈로. 퐈로는 하도 유명해 과거 피터 유스티노프, 알버트 피니, 이안 홈 및 오손 웰즈 등도 이 역을 맡았었다. 
영화는 서막식으로 1931년 예루살렘에서의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모처럼 휴가를 즐기고 있는 퐈로가 통곡의 벽 앞에서 발생한 절도사건을 푸는 얘기다. 이어 런던에서 큰 사건이 발생해 퐈로에게 즉각 귀환해 달라는 전보가 날아든다. 
가장 빨리 돌아갈 수 있는 길이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유럽으로 가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열차의 사무장이 퐈로의 친구인 북(탐 베이트만)이어서 퐈로는 쉽사리 특급칸을 얻는다. 퐈로의 이웃 승객들은 직업과 국적과 출신 성분이 각기 다른 12명. 
여자 가정교사 메리 데벤햄(데이지 리들리), 집사 베도스(데렉 자코비), 영국인 의사 아부스노트(레즐리 오돔 주니어), 남자 찾느라 혈안이 된 고독한 허바드 부인(미셸 파이퍼), 하녀 출신의 선교사 필라(페넬로피 크루즈), 독일인 교수 게르하르트 하르트만(윌렘 다포), 영국인 노 귀부인(주디 덴치) 그리고 얼굴에 흉한 칼자국이 난 배경이 깨끗하지 못한 미국인 새뮤엘 래쳇(자니 뎁) 및 래쳇의 하인 매퀸(조시 개드) 등. 그런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래쳇이 퐈로에게 자기 신변보호자로 고용하겠다고 제안을 하나 퐈로로부터 거절을 당한다. 
기차가 “칙칙폭폭” 하면서 신나게 달리다가 대형 눈사태를 만나 탈선을 하는데 이어 래쳇이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죽는다. 이에 북은 퐈로에게 현지 경찰이 오기 전에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다. 현지 경찰이 알았다간 열차의 명성이 훼손될 것이 두려워서다.
열차의 수리반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퐈로는 수사를 시작하는데 12명이 모두 혐의자다. 여기서부터 브라나가 일인극이다시피하게 혼자서 대사를 외어가면서 독주하는데 그 바람에 다른 배우들은 주눅이 들어 우물쭈물하고 있다. 정차한 기차처럼 영화의 서술과 진행이 올스탑해 긴장감도 서스펜스도 느낄 수가 없고 감정도 결여됐다. PG-13. Fox.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펠리시테’(Felicite)


펠리시테가 골목 카페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열창하고 있다.

밤골목 카페 여가수의 애잔한 삶·노래
열정적 아프리카 선율‘한편의 뮤지컬’


화끈하게 정열적이요 땀 냄새가 나고 꺼칠꺼칠할 정도로 사실적인 한 여인의 사랑과 생존의 이야기로 뜨거운 아프리카 대륙 콩고의 킨샤사가 무대다. 거의 기록영화 같은 실존적이요 생명감이 넘치는 영화로 주인공이 골목 카페의 여가수여서 노래가 많이 나온다. 이 거리 노래들의 열기에 화상을 입을만하다.
열정적인 노래들이 거구의 주인공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듣노라면 영육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흥분감에 젖게 된다. 주인공 펠리시테 역의 신인 여배우 베로 티샨다 베야의 막강한 연기가 영화에 강한 에너지를 부어 담는데 킨샤사 현지 거리에서 찍은 생동감 넘치는 촬영도 영화의 사실성을 부추긴다.
처음에 펠리시테가 거리에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큰 제스처와 함께 열창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0대 아들 사모(가에탄 클라우디아)를 혼자 키우는 펠리시테는 골목 카페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런데 사모가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펠리시테는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는 사람마다 찾아다니면서 돈을 빌린다. 펠리시테가 동네 깡패 두목을 비롯해 생전 모르는 사람의 집마저 찾아다니면서 돈을 구걸하는 모습이 집요하고 처절하다. 보기에 고통스러울 정도인 모정과 생존의 적나라한 모양이다.
이와 함께 펠리시테의 밤 골목 카페에서의 노래가 섞여드는데 손님 중 하나가 주정뱅이이자 바람둥이인 동네 미케닉 타부(파피 므카파). 그러나 타부는 내면에 부드러운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자로 펠리시테를 사랑한다. 그리고 펠리시테도 그에게 마음을 준다. 영화의 후반부는 펠리시테와 타부와의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관계와 함께 역시 펠리시테의 노래들로 연결된다.
노래의 치유 능력도 이야기하고 있는 일종의 뮤지컬인 셈인데 펠리시테가 부르는 노래들이 하나 같이 아프리카 밀림 속의 짐승들처럼 야수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비롯해 북적대는 킨샤사 거리의 풍경 등 모든 것이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작품처럼 사실적인데 간혹 타오르는 대낮의 거리의 장면을 꿈을 꾸는 듯한 밀림의 모습과 대조한 촬영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와 함께 아마추어 연주자들로 구성된 킨샤사 교향악단이 낡은 창고에서 클래시컬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도 펠리시테의 폭발적인 열창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알랭 고미 감독.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레이디 버드’(Lady Bird)


고3 레이디 버드는 집을 떠나 훨훨 나르는 새처럼 살고싶다.

자유갈망 10대의 청춘고백, 첫 경험 등 위트 있게 그려


키가 껑충하니 크고 숲속의 요정처럼 맑고 신선한 분위기와 34세의 나이에도 소녀 같은 모습을 한 배우 그레타 거윅의 감독(각본 겸) 데뷔작으로 위트 있고 총명하고 재빠르며 통찰력이 뚜렷한 영화로 듣기 좋고 보기 좋다. 거윅은 벤 스틸러와 공연한 ‘그린버그’로 두각을 나타낸 자연스런 연기파로 주연한 ‘프랜시스 하’의 감독 노아 바움박의 애인이다. 
이 영화는 거윅의 고교 3학년 때의 자기 얘기로 그의 고향 새크라멘토에 바치는 연시이자 질식할 것 같은 가정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파 안달이 난 10대의 청춘고백이다. 특히 거윅은 캘리포니아 주의 수도이지만 서자 취급받는 새크라멘토를 마치 우디 알렌이 뉴욕을 사랑하듯이 극진한 마음으로 찬미하고 있다. 그러나 과하지 않고 절제 있게 다루었다.   
본명이 크리스틴 맥퍼슨인 주인공이 자기 이름을 마다하고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는 이유도 새처럼 자유롭고 싶은 마음과 자기를 사랑하나 사사건건 간섭하고 현실에 안주하라고 압력을 넣는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서다. 
이런 10대의 얘기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이 영화도 다소 기시감은 있으나 거윅은 레이디 버드와 그의 부모 그리고 애인과 친구의 얘기를 소상하게 보여주면서 이들을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다뤄 그의 관용과 이해심이 갸륵하게 느껴진다.
2002-2003년 새크라멘토. 중산층 가족의 외딸 레이디 버드(셔사 로난)는 가톨릭학교 졸업반. 착한 아버지 래리(트레이시 레츠)는 실직자여서 간호사인 어머니 매리온(로리 메트캐프)이 살림을 도맡다시피 한다. 그런데 매리온은 절대적 현실주의자로(꿈이 없어서 라기 보다 현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봐야겠다) 집을 떠나 훨훨 날아가고파 하는 딸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레이디 버드의 반발은 커지면서 지역대학교에 가라는 어머니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대학에 원서를 넣는다.           
이런 가정생활과 함께 레이디 버드의 학교생활과 친구와 애인과의 관계가 사실적이요 우습고 아기자기하게 그려진다. 먼저 반항적인 레이디 버드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석수녀(로이스 스미스)와의 관계가 포근하고 자비롭다. 
레이디 버드가 처음에 눈독을 들인 남자는 학교연극 ‘템페스트’에서 공연하는 잘생긴 대니(루카스 헤지스). 그러나 잘 나가던 둘의 관계는 레이디 버드가 전연 생각하지도 못한 일로 인해 끝이 난다. 이어 레이디 버드가 눈독을 들인 아이가 파격적인 독서광 카일(티모데 샬라메). 레이디 버드는 이 아이를 통해 섹스를 실험하고 경험하는데 첫 섹스를 경험하는 레이디 버드의 내면과 행위가 우습고 부끄럽고 겸연쩍고 아울러 저돌적으로 그려졌다. 아주 현실감이 있다. 
마침내 레이디 버드는 연극도 잘 끝내고 졸업을 한 뒤 대학에 진학한다. 입학에 큰 격려와 협조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뜻 밖에도 집안의 국외자 같았던 아버지 래리. 끝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다소 재잘대는 말이 많기는 하지만 거윅은 자기와 자기 주변 인물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는 심정으로 솔직하고 아름답게 그렸다.
연기들이 출중한데 특히 로난의 당돌하고 의기양양하면서도 10대의 허점이 있는 연기와 딸을 사랑하면서도 내리누르는 현실로 인해 본의 아니게 권위적인 사람이 되고만 매리온 역의 메트캐프의 다양한 연기가 눈부시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LBJ’


린든 존슨이 ‘에어포스 원’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36대 대통령 존슨의 정치 전기영화… 우디 해럴슨과 도노반의 연기 볼만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허수아비 같은 부통령이었다가 케네디의 사망으로 대통령이 된 뒤 민권법안을 통과시키고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프로그램 등을 만든 제36대 미국 대통령 린든 베인즈 존슨의 정치 전기영화다. 
쇼맨쉽이 강했던 케네디의 후광과 그의 비극적 사망으로 인해 진가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던 존슨의 개성과 정치적 역량을 새롭게 조명했는데 정통 전기영화의 틀을 답습하고 있지만  흥미 있는 영화다. 
존슨으로는 우디 해럴슨이 나오는데 분장을 진하게 했으나 전연 존슨 같지 않다. 그러나 해럴슨이 저속한 상소리를 내뱉으면서 저돌적으로 해내는 연기 하나만으로도 볼만한 영화다. 그와 함께 케네디로 나온 제프리 도노반의 해럴슨과 대조되는 점잖 빼는 차분한 연기 역시 아주 좋다. 그런데 도노반도 전연 케네디 같지 않게 생겼다. 
영화는 1963년 케네디가 재키와 함께 달라스를 방문해 오픈카를 타고 시내를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해 모터케이드와 케네디가 오스왈드의 저격을 받고 쓰러지는 장면이 얘기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식으로 진행된다.
존슨은 여당인 민주당의 상원 대표로 닳고 닳은 정치인. 입이 걸고 직선적이고 실무적이며 목표를 위해선 타협도 마다 않는 남부(텍사스) 토박이로 케네디에 맞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나 열세다. 그를 자상하게 돌보고 응원하는 사람이 그의 부인 레이디 버드(제니퍼 제이슨 리). 이어 케네디가 동생 바비(마이클 스탈-데이빗)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존슨에게 부통령직을 제의한다. 남부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존슨은 의원시절의 막강한 권력을 다 잃고 대통령의 들러리 노릇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극히 싫어하는 바비가 자기 대신 존에 이어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 분명하다고 믿게 되면서 그의 좌절감은 극도로 커진다. 
이를 뒤바꿔 놓은 것이 케네디의 죽음. 대통령이 된 존슨은 자기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남부출신 의원들을 배신(?)하고 케네디가 추진하던 민권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이로 인해 그는 막강한 남부 출신 의원들과 적이 된다. 마지막 장면은 케네디가 시작한 일을 계속하자는 존슨의 상하양원 의회합동연설로 장식되는데 아주 감동적이다. 존슨은 베트남전을 확대하면서 국민의 인기가 떨어지자 1969년까지의 임기를 마치고 차기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다시 한 번 존슨의 인물과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볼만한 작품이다.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뱀피르’


덴마크의 엄격한 감독 칼 테오도어 드라이어의 분위가 스산한 ‘뱀피르’(Vampyr^1932^사진)는 걸작 초기 흡혈귀영화 중의 하나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 최면에 걸린 것 같은 분위기와 혹독할 정도로 꾸밈이 없고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영상을 갖추어준 괴이하도록 아름다운 작품이다. 드라이어의 또 다른 걸작으로는 영화사에 길이 남는 마리아 팔코네티 주연의 ‘잔 다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1928)이 있다. 
‘뱀피르’의 잿빛 몽상과도 같은 영상은 헝가리 태생의 촬영감독으로 유럽서 활동하다 후에 할리웃으로 옮겨 촬영을 거쳐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루돌프 마테의 솜씨다. 마테가 할리웃에서 감독한 영화들은 ‘D.O.A.’   ‘낙인’ ‘유니언 스테이션’ ‘도둑왕자’ 및 ‘미시시피 도박사’ 등이다.  ‘뱀피르’는 드라이어의 첫 유성영화로 카메라 및 편집기술과 함께 다양한 음향효과를 써 꿈과 같은 공포무드를 조성하고 있는 73분짜리 작품. 움직이는 그림자와 빛의 명암을 극적으로 사용해 보는 사람을 악몽으로 몰아넣는데 세트는 독일 표현주의영화 ‘닥터 칼리가리의 관’(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을 연상케 한다.
내용은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젊은이가 파리 인근의 한 마을에 들렀다가 겪는 초현실적이요 불길한 현상과 악마적 현실이 뒤섞인 경험을 그렸다. 서서히 움직이는 안개와 죽음을 전조하는 큰 낫 그리고 불길한 메아리 등이 보는 사람의 감관을 두려움으로 감싸 안는다. 출연은 제작비를 댄 사람과 대부분 감독이 촬영현장에서 고른 사람들이 했는데 독일어 등 3개국어로 녹음했다. ‘뱀피르’가 최근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복원된 독일어판 블루-레이로 나왔다.
무성영화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만들어지고 있는 흡혈귀영화의 매력은 무엇인가. 우선 그 것은 우리 내면에 잠복한 어두운 욕망이 갈구하는 공포와 변태성을 충족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흡혈귀의 색깔이라 할 블랙은 감각적이요 퇴폐적이고 염세적이며 또 야수적으로 그 것은 두려움과 저주 그리고 비밀과 죽음을 품고 있다. 이런 성질은 모두 우리가 탐하거나 피치 못할 것들이다.     
검은 망토를 걸친 드라큘라는 밤에만 활동하는 사체이지만 매우 인간적이다. 그에겐 백작 칭호가 달려 있는데다가 초인의 능력을 지녀 어둠의 수퍼맨이라 부를만하다. 또 이 고독한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집착하는 로맨틱한 정열파다. 그리고 그는 치명적인 성적 매력을 지녔다. 그 성적 매력은 악마적인 것으로 아무래도 성적 매력이란 어두워야 제 가치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여자들이 ‘암흑의 왕자’라 불리는 드라큘라에게 자기 목을 서슴없이 내어주는 까닭을 알만하다.
그런데 드라큘라의 사랑은 저주받은 국외자의 것이요 반드시 피를 봐야하는데다가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간절하고 비극적이다. 그래서 그가 사랑을 못 이룬 채 인간에 의해 타살되며 내지르는 한과 고통의 비명을 듣게 되면 이 밤의 신사에게 깊은 연민의 정마저 갖게 된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이 원작인 드라큘라영화의 고전 중 하나인 유니버설사 작품 ‘드라큘라’(Dracula^1931)는 헝가리 태생의 주연 벨라 루고시를 공포영화의 빅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다. 그는 강한 액센트와 함께 천천히 대사를 구사하면서 압도적이요 초연한 연기로 흡혈귀의 신비감과 저 세상 같은 분위기를 완벽히 보여주었다. 그의 후배 드라큘라들로 크리스토퍼 리, 프랭크 란젤라, 잭 팰랜스 및 탐 크루즈 등이 있지만 지금도 루고시는 드라큘라와 동일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수 많은 흡혈귀영화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독일의 명장 F.W.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Nosferatu^1922)다. ‘노스페라투’는 흡혈귀의 루마니아어. ‘공포의 심포니’(A Symphony of Horror)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는 빛과 그림자와 조명 그리고 카메라의 동작을 통해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명작이다.
특히 꿈에 볼까봐 겁이 나는 흡혈귀 올록백작(막스 슈렉)의 모습은 욕지기가 날 정도로 추하다. 역대 드라큘라 중 가장 추남으로 쥐 같은 얼굴에 해골처럼 마른 몸과 길고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독수리 발톱을 닮은 야위고 긴 손가락을 한 그는 세균을 온몸에 묻히고 다니는 악의 화신과도 같다.
독일의 또 다른 명장 베르너 헤르조크가 ‘노스페라투’를 치하하면서 리메이크한 ‘노스페라투 흡혈귀’(Nosferatu the Vampyre^1977)도 내가 좋아하는 흡혈귀영화. 독일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가 드라큘라로 그의 희생물 루시 하커로는 프랑스의 따갑도록 아름다운 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나온다. 특이한 것은 드라큘라가 좋은 흡혈귀라는 점. 드라큘라는 루시를 사랑해 상사병에 걸리는데 그가 시름에 빠져 축 늘어져 있는 측은한 모습을 보자니 동정심마저 간다. 사랑엔 흡혈귀도 속수무책이로구나. 이 작품은 화사한 수채화 같은 칼러영상과 함께 시적 분위기를 지닌 아름다운 공포영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