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월 4일 일요일

‘인간의 음성’ 소피아 로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생의 기본은 사랑”


과거 모국인 이탈리아와 할리웃에서 맹활약한 연기파이자 육체파 수퍼스타 소피아 로렌(80)과의 인터뷰가 할리웃에 있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사무실에서 있었다.
이 자리는 로렌의 아들 에도아르도 폰티가 감독하고 로렌이 주연한 26분짜리 단편영화‘인간의 음성’(Human Voice)을 홍보하기 위해 마련됐다. 로렌이 최근 출판한 자서전‘어제, 오늘, 내일: 나의 인생’(이 제목은 비토리오 데 시카가 감독하고 로렌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공연한 1964년작 동명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딴 것이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가슴 윗부분이 들여다보이는 셔츠 위에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로렌은 나이가 있어 젊은 시절만큼의 아름다움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그러나 터질 것 같은 육체미를 뽐내던 로렌의 주름진 얼굴과 피부를 보면서 세월의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금발의 긴 머리와 큰 눈에 옅은 갈색 선글라스를 낀 로렌은 액센트를 써가면서 질문에 위트와 유머를 섞어 솔직하고 진지하게 답했는데 생의 예지가 가득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로렌은 현재 스위스의 제네바에 살고 있다.      

-인생 80을 살면서 자기 삶에 대해 후회한 것이라도 있는가.
“왜 후회한 일이 없겠는가. 살면서 너무나 많은 일을 겪다 보면 후회도 하게 마련이나 난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애써 왔다. 그것은 결국 양심대로 사는 것이다.”

-나이를 먹은 이제 과거보다 현명해졌다고 생각하는가.
“난 늘 내 감정에 따라 살아 왔기 때문에 현명하진 못하다. 그러나 난 전후의 이탈리아에서 문제가 많고 어려운 가정환경 하에서 고생을 하며 자라 그 같은 삶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그 같은 경험을 보석처럼 중하게 여기는데 나이를 먹어서도 그때의 경험에서 삶의 예지를 빌려다 쓴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며 또 기대하는가.
“난 이제 내가 과거에 원했던 것을 성취했기 때문에 평화로운 삶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좋은 가족과 아름다운 자식들과 손주들이 있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단 하나 유감이라면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지 못한 것이다. 그 꿈만은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다.”

-삶이 사랑에 관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가.
“사랑이란 인생의 모든 면의 기본이다. 그것 없이 무얼 할 수가 있겠는가. 난 사랑 없이 살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모두가 늘 찾는 것이며 또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명성과 성공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난 명성과 성공이 내게 찾아오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와 함께 시골서 로마로 갔을 때 그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리라 다짐했었다. ‘쿼바디스’의 엑스트라부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갔다. 내가 성공한 큰 이유는 나와 같은 나폴리 출신의 비토리오 데 시카가 나를 나폴리가 무대인 영화에 썼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나는 점차 무게 있는 역을 맡게 됐다. 난 데 시카와 함께 20년을 일했다. 그는 나의 꿈을 이뤄준 사람이다.”

-아들 감독과 다른 감독들과의 차이라도 있었는가.
“감독은 비교할 수 없다. 무슨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장 콕토의 1인 독백극이 원작인 ‘인간의 음성’은 나이 먹은 여자의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난 늘 이 역을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안 돼 못했다. 2년 전에야 작품의 여인과 나이가 비슷해 만들었다. 꿈의 실현과도 같은 영화다.”

-아직도 영화에 대한 정열을 지니고 있는가.
“아직도가 아니다. 난 늘 열정을 가지고 있다.”

-당신의 손주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라도 있는가.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난 그들로부터 단순함을 배우고 있다. 아이들이 있을 때면 집에 생기가 돈다.”

-당신이 오스카 주연상을 받은 ‘두 여인’에는 어떻게 나오게 됐는가.
“원래 그 역은 안나 마냐니에게 제공됐고 난 그의 딸 역을 맡을 예정이었는데 마냐니가 역을 거절하는 바람에 내가 맡게 된 것이다. 정말로 좋은 역으로 역시 데 시카가 감독했다.”

-요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난 육체적 운동을 싫어한다. 아침 4시 반에 일어나 이런 저런 할 일들을 한다. 난 매사에 정확한 것을 좋아한다. 이젠 마치 아이들처럼 무엇이든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어 좋다.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데 난 쉬는 것을 좋아한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당신에게 그런 힘과 열정과 추진력을 준다고 생각하는가.
“나도 모르겠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이것이 내 인생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난 아직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열성이 있다. 난 늘 그랬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요즘 미국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젤라(소비아 로렌)는 자기를 버리고 간 님을 애타게 그리워한다. 영화‘인간의 음성’ 장면.
“시상시즌이 오면 영화들이 집으로 배달되는데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별로다. 난 음악과 뮤지컬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인’에도 나왔다. 난 이 영화를 몹시 좋아하는데 특히 공연한 대니얼 데이-루이스 때문에 더 좋아한다.”

-얼마 전에 미 영화학회(AFI)가 주는 생애업적상을 받은 소감은.
“아름다웠다. 마치 4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는데 유감인 것은 모두들 셀피를 찍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난 그 때까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는데 아주 성가시더라. 나는 원래 그런 행사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번엔 정말 즐겼다.”

-당신을 사모하던 그 멋진 사람들이 이젠 여기에 없는데 그들을 생각하면 고독해지는가.
“참 슬프다. 자기에게 매우 귀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내 남편 칼로 폰티(명 제작자)가 죽었을 때가 그랬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나와 함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사망했다 할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케리 그랜트가 당신에게 구혼했을 때 왜 거절했는가.
“그가 내게 구혼하진 않았다. 그와는 나의 첫 미국 영화 ‘자랑과 정열’에서 처음 만났다. 프랭크 시내트라도 나왔다. 그랜트는 정말로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우린 아주 좋은 관계였는데 난 23세였고 그랜트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들었었다. 나이 23세엔 사랑이 무언지도 잘 모른다. 그 후 난 이탈리아에서 칼로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어쨌든 그랜트와 나는 오래 관계를 유지했다. 우린 좋은 우정을 지키면서 편지와 전화로 교통했다. 그랜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린 아름다운 우정을 지켰다.”

-건강의 비결은 무엇인가.
“많이 안 먹는다. 난 파스타를 좋아하지만 체중을 적당히 유지하기 위해 과식은 안 한다.”

-스위스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해 달라.
“작은 마을에 산다. 난 외출을 잘 안 한다. 가능하면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침 7시 반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돌아와선 미국에 있는 아들과 손주들과 전화로 통화한다. 매우 단순한 일상으로 책과 각본을 많이 읽는다. 이 자서전을 쓰는데 1년이나 걸렸다. 누군가 날 저녁에 초대해도 난 거의 응하지 않는다. 공원에 가면 사람들이 날 보고 셀피 찍자고 요구하는데 다 들어준다.”

-과거 할리웃에서의 생활은 어땠는가.
“아주 즐겼다. 조지 큐커와 찰리 채플린 같은 훌륭한 감독들과 일한 것은 정말로 멋있는 일이었다. 특히 채플린과 일한 것에 대해선 굉장한 자부심을 느낀다.”

-아시아 영화에서 일할 생각이 있는가.
“당장은 없지만 난 새 장소를 발견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럴 생각이다. 난 세계의 구석구석과 연결되고 싶다.”

-당신과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 가까웠는가.
“아주 가까웠다. 내가 이렇게 된 근원은 어머니 때문이다.”

-혹시 미를 위해 당신 모습을 고쳐볼 생각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사람은 태어나서 나이를 먹게 마련인데 뭘 고치려고 하는가. 젊어 보이려고 성형수술을 하다간 괴물이 되는 수가 있다. 주름살이 있지만 난 슬픈 주름살보다는 행복한 주름살을 갖고 싶다. 성형수술을 하면 영원히 슬픈 주름살을 갖게 된다.”                

-편지를 무엇으로 쓰는가.
“펜으로 종이에 쓴다. 난 컴맹이다. 내 생일에 팬들이 카드를 보내오면 난 일일이 친필로 글을 써 답신한다. 컴퓨터로 답한다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셀마 (Selma)

닥터 킹(가운데)이 지지자들과 함께 민권운동 행진을 하고 있다.

“흑인 투표권 보장”비폭력 행진 생생히


1965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흑인들의 투표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민권운동 지지자들과 함께 앨라배마주 셀마에서부터 몬고메리까지 비폭력 무저항 행진을 한 역사적 사실을 지적이요 강력하고 감동적이며 또 사려 깊게 그린 심금을 뒤 흔드는 작품이다.
단역 배우들의 표정과 민권행진을 둘러싼 막후 토론 그리고 행진 대열에 가한 기마경찰들의 가혹한 진압 등 작은 것에서부터 스케일 큰 것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정성껏 고르게 잘 다루고 있다. 
서사적이면서 세밀하고 영혼이 떨리는 감동을 일으키면서 아울러 냉정한 자세를 잃지 않는 빼어난 솜씨로 연출한 감독은 흑인 여류 에이바 뒤버네이. 장인의 연출력과 지적인 각본 그리고 좋은 촬영과 앙상블 캐스트의 완벽한 연기 등을 즐기면서 아울러 역사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는 훌륭한 영화다.
1964년 존슨 대통령(탐 윌킨슨)이 민권법에 서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앨라배마와 같은 미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의 방해와 위협으로 투표를 할 수가 없었다. 영화는 처음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스톡홀름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어 버밍햄의 흑인교회에 폭탄이 투척되면서 4명의 소녀들이 사망한다. 그리고 장소는 셀마로 이동한다. 흑인 여자(오프라 윈프리-공동 제작 겸)가 투표를 하기 위해 유권자 등록을 하려고 하나 퇴짜를 맞는다. 
닥터 킹(데이빗 오이엘로)이 셀마에 본부를 차리고 지지자들과 함께 흑인 투표권 확보를 위한 사전운동을 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진다. 토론과 반박이 격론을 벌이고 궁극적 지지로 이어지는 전략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닥터 킹의 이런 공적인 활동과 함께 그의 개인적 문제를 공평하게 얘기하면서 그가 회의하고 개인적 결함에 갈등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보여 주는데 그와 부인 코레타 스캇 킹(카르멘 에조고)의 긴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다. 
닥터 킹은 목적을 달성키 위해 존슨을 여러 차례 만나는데 둘의 대면장면이 산 역사를 보듯이 생생하다. 그리고 존슨이 조지 월래스(팀 로스) 앨라배마 주지사를 만나는 장면이 우습고 재미있다.
이윽고 닥터 킹의 추종자들이 셀마로부터 몬고메리까지 첫 행진을 시작(이 때는 닥터 킹은 참여하지 않았다),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 이르렀을 때 기마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받고 해산된다. 이 장면이 충격적으로 긴박감 있다. 그러나 경찰의 이런 잔혹한 진압이 TV를 통해 생중계되면서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백인들이 셀마로 찾아와 행진에 참여하면서 며칠 후 다시 행진을 시작한 대열은 몬고메리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흑인 투표권 법안에 회의를 표하던 존슨도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의회에서 법안 통과를 위한 감격적인 연설을 한다. 연설은 “위 셜 오버컴”으로 끝난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힘차고 감정적이며 공정하고 또 현명한 영화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특히 오이엘로의 웅변과 함께 묵직하면서도 내밀한 연기가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 그 밖에도 윌킨슨과 로스와 에조고의 연기도 훌륭하다. 그리고 잠깐 나오는 말콤 X 역의 나이벨 태치의 연기가 비수처럼 빛난다. PG-13. Paramount. 일부 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아메리칸 스나이퍼 (American Sniper)

카일(브래들리 쿠퍼)이 라이플로 표적을 겨냥하고 있다.

이라크전서 160여명 사살한 ‘전설의 저격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만든 잘 생긴 영화이긴 하나 너무 겅-호 마초식의 호전적 영화여서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다. 이라크전에 4차례나 참전해 무려 160여명을 사살한 미 해군 특공대(SEAL)원 크리스 카일의 실화로 총을 사랑하는 이스트우드에게 맞는 소재다.
약간 반복적이요 카일의 내면 묘사와 그와 아내와의 갈등을 비롯한 가족 얘기를 할 때는 마지못해 하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으나 매우 긴장감 있고 사납고 또 생생한 작품이다. 특히 볼만한 것은 체중을 많이 늘리고 텍사스 액센트를 써 가면서 카일의 역을 해낸 브래들리 쿠퍼의 듬직한 모습과 연기다.  
레드 넥 미국인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영화로 카일은 9.11사태가 나자 “하느님과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해군 특공대에 자원입대한다. 카일의 아버지는 신심이 깊은 사람으로 카일이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가르쳤다. 따라서 카일은 총을 잘 쏴 저격수가 된다.
저격수는 표적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적이냐 또는 민간인이냐를 구분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처음에 카일은 대형 수류탄으로 미군을 겨냥하는 어린 소년을 망원 렌즈로 조준하면서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갈등한다. 그러나 카일과 그의 동지들은 적을 “야만인”이라 부르면서 “그 곳에는 악이 있어 우리는 그 악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카일은 바에서 만난 타야(시에나 밀러)와 결혼, 아이까지 두고 있지만 그가 전쟁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수록 부부관계는 악화된다. 카일은 집에 있는 것보다 전선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현지에서 적을 골라 단 한 발에 사살하면서 ‘전설’이라 불리게 된다. 
먼지와 흙바람과 땀과 피로 얼룩진 전투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졌는데 영화가 이같은 전투와 카일의 저격수 모습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어 긴박감이 약해진다. 
한편 카일에 맞설 만한 이라크의 저격수로 올림픽 출전 사격선수가 나타나 신출귀몰하면서 미군을 저격, 재미를 부추기긴 하나 ‘천일야화’에나 나옴직한 칼 잘 쓰는 페르샤 사나이처럼 보여 실감이 나질 않는다.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전쟁에 4차례나 투입됐던 카일은 마침내 지쳐 제대를 한다. 그리고 그는 귀향해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폭력의 보수가 어떤 것인지를 묻고도 있어 이스트우드 특유의 멜랑콜리한 기운도 스며들어 있지만 어디 까지나 총기예찬과도 같은 영화다. 믿음직한 연기를 하는 쿠퍼가 내면 묘사를 보다 깊이 있게 했더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R. WB.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골드핑거’



며칠 전에 지나가버린 2014년은 역대 007시리즈 중 가장 잘 만들었다는 시리즈 세 번째 영화 ‘골드핑거’(Goldfinger)가 개봉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물론 살인면허를 지닌 영국 정보부 MI6 요원인 제임스 본드이지만 사실 본드보다 더 흥미 있는 인물은 본드의 적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인 ‘닥터 노’(1962)와 이 영화의 제목이 다 본드의 적의 이름인 것만 봐도 악한이 정의한보다 더 매력적이라는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드가 “프랑스제 손발톱용 니스 이름 같다”고 비웃은 이름을 지닌 오릭 골드핑거(독일 배우 게르트 프뢰베)는 ‘색깔과 광채와 신성한 무게’ 때문에 황금을 사랑하는 황금광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골드핑거가 자기가 보유한 금값을 올려놓기 위해 켄터키주 포트낙스에 있는 미연방준비위의 금괴를 방사능으로 오염시키려는 ‘그랜드 슬램작전’을 본드가 저지한다는 것. ‘마이다스 터치’를 지닌 골드핑거는 억만장자이면서도 카드놀이와 내기골프에서 속임수를 쓰는 승부욕에 집착하는 ‘소어 루저’로 시리즈 중 하나인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처럼 황금총을 소지했다.
골드핑거는 비행하는 개인용 비행기 안에서 이 총을 본드에게 겨눈 채 “난 2시간 후면 쿠바에 있다”고 말하는데 얼마 후 미-쿠바 간 국교가 정상화될 요즘 같았으면 그런 말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골드핑거는 이 총으로 본드를 쏴 죽이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황천으로 날아간다.
골드핑거가 하늘로 날아간 뒤 본드걸 푸시 갤로어가 본드에게 “골드핑거 어디에 있어요”라고 묻자 본드는 “하늘에서 황금 하프를 켜고 있지”라며 이죽거린다.
골드핑거는 배신자를 살해할 때도 황금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본드걸이 된 질(셜리 이튼)을 발가벗긴 뒤 온몸에 도금을 해(사진) 기공을 막아 질식사 시킨다. 
그런데 질을 죽인 사람은 한국인이다. 그는 골드핑거의 벙어리 바디가드 아드잡(잡일이라는 뜻으로 역은 일본인 올림픽 역도선수 해롤드 사카다)으로 거구에 검은 상의와 타이를 매고  치명적인 금속 테두리를 한 검은 실크햇을 쓰고 다니는데 히죽이 웃으면서 사람 잡는다.
골드핑거가 자기 소유의 골프클럽에서 본드와 골프를 치러 가면서 아드잡에게 “한국에선 아직 골프가 국민경기가 아니지”라고 빈정거리는데 한국은 그 때 막 보릿고개를 넘어선 때였으니 그 말이 틀리진 않다.
본드 시리즈에서 본드 악인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본드걸이다. 보통 본드는 진짜 본드걸을 만나기 전 여러 준 본드걸들과 동침을 하는데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 천하의 플레이보이다. ‘골드핑거’의 본드걸 푸시 갤로어(Pussy Galore)는 그 외설적인 이름 때문에 미국에서 검열 때 논란이 됐었다. 푸시 역의 오너 블랙만은 역대 본드걸 중 가장 나이 먹고 성숙한 여인으로 본드와의 화학작용의 농도가 황금도 녹일 만큼 강렬하다. 
최근에 본드의 새 상관 M(주디 덴치)은 새 본드(대니얼 크레이그) 보고 “당신은 술과 색에 탐닉하는 공룡과도 같은 존재”라고 본드의 구세대적 남성행위를 비판했지만 본드만 탓할 일이 아니다. 가슴에 시커먼 털이 무성한 늠름한 체격에 강한 마스크 그리고 멋과 맛을 아는 데다가 박학다식하고 출중한 정력을 지닌 이 ‘섹시 비스트’를 보고 자기 몸을 스스로 바치는 여자들도 문제다.
그런데 나는 수많은 본드걸 중에 넘버원이요 영원한 본드걸을 M의 비서 모니페니라고 본다.  모니페니는 본드가 플레이보이인 줄 알면서도 그를 간절한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데 이를 잘 알고 있는 본드가 모니페니와 나누는 아이들 소꿉장난 같은 사랑의 행위가 재미있다. 
시리즈의 또 다른 유명한 것이 주제가. 금관악기가 강조된 ‘골드핑거’의 음악은 이 영화 외에도 ‘선더볼’ 등 여러 편의 본드영화 음악을 작곡한 존 배리가 지었는데 노래는 셜리 배시가 불러 빅히트했다. 고함지르듯 하는 노래가 강철의 쓴맛이 느껴지도록 섹시하다. 배시는 이 노래 외에도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등 3편의 시리즈 노래를 불렀다.
미디엄 마일드 보드카 마티니(셰이큰 낫 스터드)를 즐겨 마시는 본드의 또 다른 멋은 위기 속에서도 결코 냉정을 잃지 않고 툭툭 내뱉듯이 하는 위트 있는 말이다. 때로 냉소적인데 ‘골드핑거’에서도 “총을 늘 차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열등감 때문”이라고 답하고 물 담긴 욕조에 빠진 적을 감전사시킨 뒤 “쇼킹”이라고 한마디 한다. 그리고 M이 본드에게 아무 여자하고나 잔다고 나무라자 본드는 “나는 내 단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호색을 시인한다.  
본드는 영화 끝에 미국을 위기에서 구해준 공로를 치하 받기 위해 백악관으로 가는데 영화에는 안 나오나 린든 존슨과 레이디 버드가 본드를 맞았음에 분명하다. ‘골드핑거’는 이 영화 외에도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등 시리즈 4편을 만든 가이 해밀턴이 감독했다.
한편 대니얼 크레이그가 주연하고 샘 멘데스가 감독하는 24번째 본드영화 ‘스펙터’(Spectre)가 11월에 개봉된다. 본드의 적으로는 크리스토프 월츠가 그리고 본드걸로는 레아 세이두와 모니카 벨루치(50)가 나온다. 벨루치는 역대 본드영화 사상 가장 나이 먹은 본드걸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