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9년 2월 20일 수요일

‘버드 오브 패시지’(Birds of Passage)


잘다가 화련한 의상을 입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성인식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약밀매로 돈 맛본 원주민 사회의 갈등과 몰락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함께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예비후보 9편 중에 올랐다가 최종 5편 선정에서 탈락한 콜롬비아의 범죄 서사스릴러로 촬영을 비롯한 형식미와 마약밀매를 둘러싼 치열한 갈등과 이로 인한 가족과 원주민 집단사회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다소 길고 진행이 거북이 걸음이지만 서서히 타들어가는 눈부신 영화로 1970년대 국제 마약밀매단이 콜롬비아의 평화로운 마을을 잠식하면서 급작스런 부가 꽁꽁 뭉쳤던 가족을 무참히 파괴시키는 과정을 인종학 연대기를 다루듯이 묘사했다.
제목은 콜롬비아 북동쪽 구아히라 지역에 수천 년간 살아온 원주민들의 전설 속의 새들이기도 하고 이와 함께 마리화나를 운반하기 위해 뜨고 내리는 경비행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 마리화나는 미국으로 공수되는데 이로 인해 원주민들은 손쉽게 부를 획득하나 탐욕으로 인해 유혈폭력이 벌어지면서 그들을 분해하고 만다. 
처음에 원주민 소녀 잘다(나탈리아 레이에스)의 성인식으로 시작된다. 다채로운 색채 속에 펼치는 음악과 춤으로 장식된 파티가 황홀하다. 잘다의 어머니 어슐라(카르미나)는 절대권력으로 마을 원주민을 통치하는 리더. 이 파티에 청년 라파옛(호세 아코스타)이 나타나 잘다에게 청혼한다. 어슐라와 라파옛의 현명한 삼촌 페레그리노(호세 빈센테 코테스)는 결혼 지참금에 대해 합의하나 술과 커피를 밀매하면서 연명하는 라파옛이 부담하기에는 과하다.
이어 라파옛과 그의 성질 급한 친구 모이세스(이온 나바레스)는 귀국해서 국내에 팔기 위해 대마초를 구하러 온 미 평화봉사단원들을 만난다. 여기서부터 원주민들은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대마초 밀수업에 개입되면서 순수를 상실하게 되고 그 결과 엄청난 유혈폭력과 파괴와 비극이 일어난다. 액션은 영화 후반에 발생한다. 
한편 라파옛은 정글 속에서 대규모로 마리화나를 경작하고 있는 또 다른 삼촌으로 나이는 먹었으나 막강한 권력을 쥔 아니발(완 마티네스)과 손을 잡고 본격적인 마리화나 장사를 시작한다. 이로 인해 서푼짜리 밀매업자였던 라파옛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내가 된 잘다와 잘다의 가족과 함께 오두막에서 방대한 사막 한복판에 있는 초현대식 대저택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부는 라파옛과 총질하기를 즐기는 모이세스와 잘다의 성질 사나운 오빠 레오니다스(그레디에 메사)와의 갈등과 욕심 그리고 라이벌 마약밀매단과의 충돌 등의 부작용을 동반하면서 집단과 가족의 초석이 붕괴되고 만다. 
20세기 초 외국인들이 콜롬비아의 원주민 사회 속으로 파고들면서 마약과 돈과 외부세력에 의해 부패하고 마는 원주민들의 전통과 문화를 탐구한 이색적인 범죄대하극으로 두 감독 크리스티나 갈레고와 시로 게라는 이 같은 얘기를 지적이요 확실한 솜씨로 처리했다. 
보기 좋은 것은 와이드 스크린 총천연색 화면. 아찔하도록 눈부신데 광대한 백사의 사막과 바다 등 자연을 큰 폭으로 찍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우행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연기들도 자연스럽다.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설원의 추적’(Cold Pursuit)


칵스맨이 자기 아들을 살해한 갱두목을 살해하기 위해 라이플을 겨냥하고 있다

설원 위 펼쳐지는 리암 니슨의 복수극‘재미 만점’


10년 전에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나쁜 놈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전직 CIA요원으로 나온 ‘테이큰’으로 뒤늦게 나이 먹어 액션 스타로 부상한 리암 니슨(‘쉰들러 리스트’)의 또 다른 액션 스릴러로 상영시간 2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재미 만점이다. 
니슨은 ‘테이큰’ 이후에도 ‘테이큰’의 2편과 3편을 비롯해 ‘난-스탑’과 ‘커뮤터’ 등 내용이 비슷한 액션 스릴러에 나왔는데 ‘설원의 추적’은 이들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고 아찔하니 흥분된다.
그 큰 까닭은 이 영화가 2014년에 수입된 노르웨이 영화로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주연한 ‘실종 순서’(In Order of Disappearance)의 리메이크이기 때문이다. 내용이 원작과 거의 비슷한데 감독도 원작의 한스 페터 몰란드가 했다. 능숙한 연출 솜씨다. 
백설이 만건곤한 겨울 콜로라도의 스키마을 키호에서 일어나는 유혈 낭자하고 가차 없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화로 시뻘건 피가 하얀 눈 위에 흩뿌려져 그 잔인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이런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깔깔대고 웃게 되는 이유는 온갖 범죄자들이 내 뱉는 대사가 때로 엉뚱하고 새카만 유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감독이나 배우들이 우리 재미있게 즐기니 당신들도 즐기라는 식으로 유유자적한데 유머와 폭력을 적절히 잘 섞어 잔인성을 중화시켜주고 있다. 영화를 보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 픽션’ 및 코엔형제의 ‘화고’가 연상된다.   
키호의 외딴 곳에 아내 그레이스(로라 던이 잠깐 나온다)와 비행장의 화물 운송자로 일하는 아들 카일과 살고 있는 넬스 칵스맨(니슨)은 제설차 운전사. 그런데 카일이 마약밀매단 갱에 의해 살해된다. 그러나 부검 결과는 헤로인 과다복용. 칵스맨과 아내는 이를 믿지 않는데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평소 사이가 소원하던 부부는 급기야 별거한다. 
카일과 함께 일하던 친구로부터 아들이 마약 갱에 의해 살해된 것을 알게 된 칵스맨은 이 친구로부터 갱의 한 명인 스피도의 이름을 전해 듣고 그를 찾아가 아들 살해에 동참한 다른 범인의 이름을 알아낸다. 물론 칵스맨은 스피도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여기서부터 칵스맨은 마치 사다리 타고 올라가듯이 마약 갱을 차례로 하나씩 처치한다. 갱두목은 성질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거부 바이킹(탐 베이트만이 약 먹고 흥분한 사람처럼 연기를 한다)으로 그는 이혼 수속중인 아내와의 사이에 조숙한 어린 아들을 두고 있다. 
한편 칵스맨은 한 때 바이킹의 하수인이었던 형(윌리엄 포사이트)을 찾아가 바이킹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한 발작 한 발작씩 그에게 접근한다. 그런데 처음에 자기 졸개들의 황천행을 오래 전에 마약거래 영토를 분할해 그 동안 평화공존을 해온 인디언들의 소행으로 오해한 바이킹이 인디언 족장의 아들을 납치해 살해하면서 사건은 엉뚱하게 바이킹 갱 대 인디언 갱의 유혈폭력으로 비화한다. 
이런 와중에 칵스맨은 바이킹을 유인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납치한다. 칵스맨과 바이킹의 아들과의 관계가 폭력영화에 유머와 자비를 베푼다. 세다가 포기할 정도로 여러 명이 비명횡사하는데 니슨이 묵직하게 연기를 잘 한다. R. Lionsgate 배급.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모두가 알고 있어’(Everybody Knows)


딸을 안고 있는 라우라와 그녀의 옛 연인 파코(오른쪽)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납치극이 멜로드라마로… 이란 화라디 감독 맥빠진 연출


‘이혼’(A Seperation)으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란의 아스가르 화라디의 가족 드라마이자 납치극 미스터리 스릴러인데 페넬로피 크루즈와 그의 남편 하비에르 바르뎀 등 스페인 배우들을 사용해 스페인에서 찍었다. 인물들의 성격묘사와 이란의 사회상 비판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감독이 자기 보금자리를 떠나 국제적인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영화가 맥이 빠진 신파 타작이 되고 말았다.
납치극이면서도 별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데다가 여러 인물들이 나와 엮는 얘기도 중언부언 식이고 결말이 완전히 바람 빠진 풍선 같아 화라디의 촘촘하고 강인한 연출 솜씨를 기대하던 사람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볼만한 것은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다시피 하는 크루즈의 연기와 그와 바르뎀의 화학작용이다.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라우라(크루즈)가 여동생의 결혼식을 위해 오래간만에 스페인의 시골 마을을 찾아온다. 온 가족이 모여 파티를 열면서 시끌벅적대던 저녁에 라우라의 10대 난  딸 이레네(칼라 캄프라)가 실종된다. 이어 정체불명의 납치범으로부터 이레네의 몸값을 요구하는 통지가 온다. 이 소식을 들은 라우라의 남편 알레한드로(아르헨티나의 베테런 배우 리카르도 다린)도 스페인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라우라의 가족들의 삶의 실타래가 풀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안고 있는 과거의 비밀들이 드러난다. 이 과거들 중에는 라우라와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그의 전 애인 파코(바르뎀)의 깊고 뜨거웠던 사랑이 있다. 라우라의 가족이 몸값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겉으론 완벽하게 보이던 그의 가족의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난다.     
개인들의 비밀과 납치를 다룬 영화로선 감정이 결여됐는데 영화를 멜로드라마처럼 이끌어 가는 바람에 강렬한 긴장감이나 극적 폭발력이 아주 미약하다. 그리고 결말을 맺는 부분이 다분히 조작적인데다가 느슨해 맥이 빠진다. 클라이맥스가 엉성하기 짝이 없다. 기대에는 못 미치나 볼만은 하다. 화라디의 주도면밀한 연출과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얘기 그리고 섬세한 인물과 성격개발이 아쉽다. R등급. Focus.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내 딸’(Daughter of Mine)


생모 안젤리카(가운데)와 기른 엄마 티나는 딸 비토리아의 사랑을 놓고 서로 겨룬다.

기른 정이냐, 낳은 정이냐, 과연 딸의 선택은?



기른 엄마와 낳은 엄마가 10세난 딸의 사랑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참 모성애를 발견하게 되는 여인의 자아발견의 얘기이자 소녀의 성장기인 이탈리아 영화다.
한 여름 사르디니아 해변 마을에서 열린 축제의 로데오를 구경하러 온 소녀 비토리아(사라 카수)는 어쩌다 축사에 숨어서 섹스를 하던 안젤리카(알바 로어바허)를 목격한다. 이어 비토리아는 엄마 티나(발레리아 골리노)를 찾아 가는데 갸름한 얼굴의 빨강머리 비토리아가 둥근 얼굴의 검은 머리 티나 보다는 갸름한 얼굴의 딸기빛 금발을 한 안젤리카를 닮았다.
안젤리카는 비토리아의 생모로 마을에서 떨어진 시골에서 혼자 사는데 비토리아를 자기 딸로 삼고 키워온 티나는 종종 술주정뱅이요 섹스와 향락을 즐기는 안젤리카의 집에 찾아와 식료품을 남겨놓고 청소도 한다. 이는 티나와 남편 움베르토가 비토리아를 자기들에게 준 안젤리카에게 치르는 비공식적 계약에 대한 보답 행위다.
무일푼의 안젤리카가 집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안젤리카는 티나에게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딸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티나가 비토리아를 안젤리카에게 데려다 주면서 비토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상하고 아이 같은 안젤리카에게 마음이 끌린다. 안젤리카는 술과 섹스를 즐기는 향락주의자인 반면 티나는 동네 양어장에서 일하면서 성당에 나가는 성실한 사람.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나 고지식한 부모 밑에서 사는 비토리아가 아이 같고 자유혼을 지닌 안젤리카에게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면서 티나가 깊은 슬픔과 고통에 빠지게 된다.
딸을 잃을까봐 두려움에 떠는 티나와 뒤늦게 모성애를 깨달은 안젤리카 간에 갈등이 인다. 이런 둘을 꼭두각시 다루듯 하는 사람이 비토리아. 과연 비토리아는 둘 중 누구를 엄마로 선택할 것인지.
골리노의 심지 굳은 연기와 로어바허의 자유로운 연기가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히 경탄스런 것은 신인 카수의 성숙한 연기다. 촬영도 좋다. 라우라 비스푸리 감독.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크라이슬러 빌딩


맨해턴은 도시 전체가 영화세트다. 이곳을 안 가본 사람들에게라도 많은 영화에 나온 도시 곳곳의 명소들로 인해 맨해턴은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도시라고 하겠다. 센트럴파크와 뮤지컬 ‘42번가’로 유명한 브로드웨이와 42번가,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과 타임스 스퀘어와 워싱턴 스퀘어, 그리니치빌리지와 월스트릿 그리고 브루클린브리지와 퀸스보로브리지 및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과 크라이슬러빌딩 등은 모두 우리를 맨해터나이트로 만들어 주다 시피 한 명소와 명물들.
맨해턴의 정취와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 영화가 LA를 우습게 아는 맨해터나이트인 우디 알렌의 흑백 ‘맨해턴’(Manhattan)이다. 영화에서 신비하도록 로맨틱한 장면은 주인공인 작가 아이작(알렌)과 그의 애인 메리(다이앤 키튼)의 퀸스보로브리지 아래 데이트 장면. 새벽안개가 자욱하니 깔린 퀸스보로브리지 아래 벤치에 앉은 두 연인의 뒷모습이 실루엣으로 비쳐지는 가운데 거쉬인의 ‘섬원 투 워치 오버 미’의 멜로디가 흐르는 이 장면은 신비할 정도로 고혹적이다.
거쉬인의 노래 ‘섬원 투 워치 오버 미’(Someone to Watch over Me)는 첫 장면에서 밤의 크라이슬러빌딩을 공중회전 촬영한 리들리 스캇 감독의 로매틱 스릴러의 제목으로도 쓰였다. 퀸스에서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뉴욕형사(탐 베렌저)가 살인위협으로부터 자기가 보호하는 맨해턴의 아름다운 상류층 여인(미미 로저스)에게 빠져드는 얘기로 크라이슬러빌딩이 소시민인 형사의 잡을 수 없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듯이 쓰였다. 맨해턴의 밤하늘을 마치 유린이라도 하듯이 찌르고 선 그 고고하도록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티아라를 쓴 우아한 몸매의 여인과도 같은 크라이슬러빌딩이 최근 매물로 나왔다. 77층 1,046피트 높이의 이 아르 데코 양식의 건물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뾰족탑과 괴물형상의 가고일로 유명한데 1930년에 완공되었을 때만해도 세계 최고 높이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1931년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건설되면서 채 1년도 못 가 깨어지고 말았다. 크라이슬러빌딩은 아직도 세계 100대 최고층건물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에 맨해턴의 최고자리를 내준 뒤로 두 건물은 지금까지도 라이벌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
크라이슬러빌딩의 뾰족탑은 당시 월스트릿에 짓고 있던 맨해턴은행에 최고층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신축중인 건물 안에서 남 몰래 지어 불과 90분 만에 올렸다고 한다. 건축기술상 한 쾌거로 알려져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크라이슬러빌딩을 제치고 맨해턴을 대표하는 건물로 여겨지는 이유는 반드시 높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 진짜 이유는 영화 탓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의 위용을 천하에 과시한 영화가 ‘킹 콩’이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생포돼 맨해턴 쇼의 구경거리가 된 킹 콩이 탈출해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자기를 공격하는 군용기를 맨손으로 박살내는 장면으로 이 빌딩은 킹 콩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애초 ‘킹 콩’의 이 클라이맥스 장면은 크라이슬러빌딩에서 찍을 예정이었으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세워지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니 두 빌딩이 라이벌이 아니 될 수가 없겠다.
‘킹 콩’ 못지않게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을 만인의 가슴에 뚜렷이 새겨놓은 영화가 ‘잊지 못할 연정’(An Affair to Remember)이다. 여객선에서 만난 각자 임자가 있는 니키(케리 그랜트)와 테리(데보라 카)는 배가 뉴욕항에 도착하면서 6개월 후인 7월 1일 하오 5시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꼭대기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때까지 서로를 못 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6개월 후 테리는 약속장소로 달려가다 교통사고로 쓰러진다. 니키는 천둥번개가 치는 속에 빌딩 꼭대기에서 밤이 늦도록 테리를 기다리다 지쳐 돌아선다.
이들 영화와 달리 크라이슬러빌딩은 주로 영화의 이스태블리싱 샷(첫 장면)이나 잠깐 스쳐지나가는 식으로 비쳐져 주연인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의 조연 취급을 받고 있다.
크라이슬러빌딩이 주연급이다 시피하게 묘사된 영화가 스릴러 ‘Q‘(사진)다. 영화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하늘을 나는 선사시대의 거대한 뱀이 맨해턴을 박살내면서 크라이슬러빌딩 꼭대기에 알을 까는데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거구의 고릴라로 유명해졌다면 크라이슬러빌딩은 커다란 날개를 가진 뱀으로 그나마 알려진 셈이다. 그런대로 헐한 재미가 있는 컬트무비다.
크라이슬러빌딩은 이 밖에도 ‘스파이더-맨’ ‘멘 인 블랙’ ‘아마게돈’ ‘디프 임팩’ ‘인디펜던스 데이’ 및 ‘고질라’ 등에도 출연했다. 2008년에 아부 다비 투자회사가 8억달러에 산 크라이슬러 빌딩의 연 부지 임대료는 작년에 3,250만달러로 2028년에는 무려 4,100만달러로 오른다고. 이 역사적 건물이 과연 누구에게 얼마에 팔릴지 자못 궁금하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