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9월 4일 금요일

‘미스터 홈즈’ 이안 홈즈




“죽음도 삶의 한 얼굴… 피할 대화소재 아냐”


  많은 배우들이 셜록 홈즈 연기했지만 93세역은 처음
  동성결혼 합헌판결 환영하지만 난 결혼할 생각 없어


현재 상영 중인‘미스터 홈즈’(Mr. Holmes)에서 시골에 은퇴해 어린 아들을 둔 가정부(로라 린니)의 돌봄을 받으면서 살면서 쇠약해가는 기억에 시달리며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는 9순의 명탐정 셜록 홈즈로 나온 영국의 무대와 스크린의 베테런 배우 이안 홈즈 경(76)과의 인터뷰가 최근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잿빛 머리에 머플러를 목에 감은 인자한 노신사 모습의 홈즈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노래까지 불러가면서 인터뷰를 즐겼는데 그러면서도 대답은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했다. 장난 끼 짙은 소년 같으면서도 그는 지혜롭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녔는데 자신의 동성애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다정하고 인자한 인상과 언사 그리고 태도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홈즈는‘해리 포터’ 시리즈의 도사 갠달프로 아이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왜 셜록 홈즈는 세월과 무관하게 인기가 있다고 보는가.
“미스터리를 푸는 탐정은 늘 인기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에겐 숨겨진 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을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를 표현한 많은 배우들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명성은 그다지 빛나지 못했을 것이다. 홈즈의 또 다른 매력은 그가 상당히 어두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니며 비록 총명하나 내면적으로는 보통 사람들처럼 연약한 사람이다. 내게 역이 주어졌을 때 난 ‘아이구 맙소사. 내 전에 홈즈를 연기한 사람이 무수히 많은데 또 필요하단 말인가’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가 93세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늙은 홈즈는 누구도 안 했기 때문에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홈즈는 기억력 상실에 고민하는데 당신의 기억력은 얼마나 분명한가.
“옛날과 달리 요즘에 기억이 필요한 사람들은 대사를 외워야 하는 배우들뿐인 것 같다. 배우가 대사를 기억 못하면 그의 인생은 끝이다. 난 그런 문제는 없다. 과거에는 대사 외우기가 연기의 가장 쉬운 것이었는데 이젠 그렇지 못하다. 내 나이가 되면 주위에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저 그렇게 안 되기를 빌 뿐이다. 달리 묘안이 없지 않은가. 

-이 영화는 죽음에 관한 영화이기도 한데 당신은 가끔 죽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렇다면 거기서 무엇을 보는가.
“촤근에 죽음의 침상에 누운 친구를 방문했고 또 다른 가까운 친구의 죽음도 봤다. 가슴이 아프다. 죽음의 얼굴은 삶의 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관한 존 돈의 시 ‘종은 모든 죽음 하나 하나를 위해 울린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알려고 하지 말라. 그것은 너를 위하여 울리니 모든 사람의 죽음은 너 자신의 죽음이다’가 생각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얘기를 회피할 필요가 없다. 그 같은 대화는 건전한 것이다. 그것은 매일의 가치를 깨닫게 만든다. 30, 40, 50대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지만 70대가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전에 연방 대법원이 동성결혼에 대해 합헌판결을 내렸는데 그에 대해 당신의 의견은.
“과거에는 군대에도 갈 필요가 없고 또 결혼도 할 필요가 없어 동성애자라는 것에 감사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들은 하라고 해라. 난 그들을 축복하겠다. 이번 판결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아주 좋은 것이나 난 결혼할 생각이 없다.”

-당신은 훌륭한 탐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셜록 홈즈는 쇠퇴홰 가는 기억력을 되살려가며 과거를 정리한다.
“아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반장을 했는데 우리 반의 누군가가 남의 차를 파괴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게 사건의 당사자를 찾아내라는 임무가 주어졌었다. 내가 맨 처음에 인터뷰한 아이는 차 주인의 아들로 난 즉시 그 아이가 무죄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바로 당사자였다. 셜록 홈즈 같았으면 금방 알아냈을 것이다. 난 너무 순진하다. 나는 남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난 거짓말을 파악하는데 아주 서툴다.”

-당신은 ‘신들과 괴물들’ 그리고 이 영화와 막 촬영을 끝낸 뮤지컬 ‘미녀와 야수’ 3편에서 다 빌 콘돈 감독과 일했는데 그 경험에 대해 말해 달라.
“‘신들과 괴물들’ 이후 그와 나는 절친한 사이가 됐다. 이 영화를 마친 뒤 그가 내게 ‘당신 디즈니의 뮤지컬에 나올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 오케이 했다. 우린 아주 친한 사이로 빌을 안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다. 약간 말을 더듬어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 아주 진지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모두 훌륭한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의 영화들은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좋은 연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훌륭한 감독의 일이다.”

-‘미녀와 야수’에서 노래를 부르는가.
“부른다. 나는 영화에서 시계 칵스워스로 나오는데 ‘내 이름은 칵스워스, 나는 시계다 틱 톡 틱 톡”하고 노래 부른다. 그랬더니 작곡자인 알란 멘켄이 웃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라. 영화는 대규모의 걸작이 될 것을 확신한다. 오드라 맥도널드, 이완 맥그레고, 스탠리 투치, 엠마 탐슨, 에밀리 왓슨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영국의 쉐퍼튼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빌 콘돈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완벽히 그려낼 수 있는 감독이다.“

-일이 당신의 전 생애인가 아니면 다른 것에도 관심이 있는가.
“기본적으로는 일이 내 삶으로 그것은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다. 다른 것도 하려고 노력한다. 좋은 친구와 이웃이 되려고 하지만 내가 제일 잘 하는 것은 역시 연기다. 난 처음부터 좋은 배우는 아니었지만 이젠 그렇다고 보겠다.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데 나는 그 점을 즐긴다. 완벽한 의자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목수와도 같다. 힘들지만 가치 있는 일이다. 특히 영화를 만드는 기쁨은 서로를 ‘달링’이라며 부르면서 일할 수 있는 배우 친구들과 일한다는 점이다. 연기가 내 생애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은 내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나오는 신판 셜록 홈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의 홈즈는 머리 대신 주먹을 휘두르는 액션 탐정이라고 보는데.  
“로버트에게 내가 그의 영화들을 안 봤다는 말 전하지 말기를 바란다. 따라서 영화에 대해 말 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말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난 로버트 식의 해석에 반대하진 않는다. 하고 싶은 대로 만들라고 내버려둬라. 원작은 언제나 제 자리에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원작을 마음대로 해석한다고 해서 그것을 파괴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무언가를 원작에 보탠다고 볼 수도 있다.”

-로라 린니와 일한 경험은 어땠는가.
“로라 린니는 메릴 스트립과 같은 수준에 있는 배우다. 헌신적이며 안팎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녀는 또 철저히 직업적이며 주도면밀한 기술자다. 마음을 열어 놓는 사람이어서 함께 일 하기가 아주 쉽다. 정말 사랑스런 사람이다.”

-이성과 가졌던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있는가.
“내가 9세 때 웬디라는 소녀와 사랑의 편지를 서로 교환했었다. 연애편지 쓸 때의 기쁨과 기다리는 편지가 안 올 때 느끼는 고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얼마 전 런던의 한 극장에서 연극을 보려고 로비에 서 있는데 한 작은 노파가 내게 다가오더니 ‘헬로 이안 내가 웬디야’라고 소개를 하더라. 이에 난 처음엔 ‘당신은 웬디가 아니야’라고 말했으나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난 할머니가 됐어’라고 대답했다. 난 이어 ‘우린 정말 서로 잘 지냈지’ 하고 물었더니 웬디는 ‘그럼’이라고 말했다. 난 편지 생각이 나서 내 회고록 쓸 때 이용하려고 웬디에게 편지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결혼하는 날 아침에 불태웠다고 답하더라. 그것이 내가 이성과 가진 로맨틱한 경험이다.”               

-직업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언제인가.
“난 대학생 때 연극을 많이 봤다. 나는 많은 대학 연극에 나오면서도 직업배우가 되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존 길거드와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대학생 때 연극 ‘헨리 4세 제2부’에 나오면서 전국지에서 격찬을 받았다. 그 날 밤 내가 기쁨과 당황감에 사로잡혀 대학 극장에 들어서자 친구들이 ‘넌 이제 에이전트가 필요해’라고 말했다. 그 때가 바로 내가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그 전에는 난 그저 남의 연기를 보고 매료돼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심했을 뿐이다.

-대학서 무엇을 공부했는가.
“케임브리지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21편의 연극에 나오는 바람에 학점은 엉망이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리피피(Rififi)


보석상을 터는 마리오(왼쪽부터), 조, 토니 그리고 세자르.

스릴·멜로·영상미… 파리에 바치는 교향시 


중절모를 쓰고 트렌치코트의 깃을 올린 채 과묵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가차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전형적인 프랑스 갱스터들의 사실적이요 꽉 조여진 구성을 한 1955년산 저예산 걸작 ‘하이스트 무비’(heist movie-절도영화)다.
전후 미국에 몰아닥친 매카시즘으로 공산당 동조자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유럽으로 피신한 줄스 대신이 감독한 서스펜스 가득한 스릴러이자 멜로드라마인데 원작은 오귀스트 르 브르통의 소설. ‘리피피’는 프랑스 암흑가의 은어로 ‘인정사정없이 거친 사나이들의 적의에 찬 함성을 뜻한다. 대신은 이 영화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늦가을의 파리. 범죄로 짙은 인연을 맺은 젊은 조(칼 뫼너) 대신에 5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막 출옥한 토니(장 세르베)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범죄자. 옥살이로 건강이 나빠져 기침을 하면서도 줄담배를 태우는 토니는 조와 조의 이탈리안 친구 마리오(로베르트 마누엘)의 권유에 따라 파리 시내 번화가의 보석상을 털기로 한다. 여기에 합류하는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온 마리오의 친구로 금고털이 전문인 세자르(줄스 대신).
그러나 토니는 범행에 들어가기 전 해결할 일이 있다. 자기를 배신하고 라이벌 갱스터로 몽마르트에서 ‘황금시대’ 클럽을 경영하는 피에르 그뤼터(마르셀 뤼포비치)에게 간 애인 마도((마리 사브레)를 찾아내 옷을 벗긴 뒤 가죽혁대로 매질을 하고 내쫓아버린다.
4인조는 ‘소방서보다 더 경보장치가 많은’ 보석상을 털기 위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짜고 현장답사를 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경보기의 소리를 죽이느냐는 것. 그 수단으로 소화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보석상의 주인이 집을 비우는 주말을 이용해 털이를 시도한다.
이 영화가 절도영화의 금자탑으로 꼽히는 큰 이유가 4인조가 운동화를 신고 보석상 내로 침투해 들어가는 장면 때문이다. 이들은 먼저 보석상 2층의 주인집으로 들어가 마룻바닥을 뚫고 아래로 내려가 금고를 터는데 이 과정이 30분 정도 진행된다.    
30분 동안 일체 대사와 음악을 제거하고 범인들의 동작소리, 마루와 금고를 뚫는 소리 등 사실음만 살리면서 가끔 가다 땀이 밴 일당의 얼굴을 클로스업 시키는데 매우 주도면밀하고 영특하며 또 긴장감 가득한 장면이다. 
범죄의 소도구로 우산이 사용되는 것이 재미있는데 관객들은 30분간 4인조와 공범이 되어 마치 외과의사가 수술하듯 또 곡예사가 묘기를 펼치듯 범인들이 작업을 해나가는 모습을 숨을 죽이고 들여다보게 된다.               
마침내 범죄는 성공하나 세자르가 혼자 몰래 슬쩍한 다이아몬드반지를 ‘황금시대’의 가수로 자기 애인인 비비안(마갈리 노엘)에게 선물한 것이 화근이 돼 토니 일행은 피에르와 그의 마약중독자인 동생 레미(로베르 오생) 등 그뤼터 3형제의 공격을 받는다. 토니 일당이 2억여프랑의 보석 절도단임을 확신한 피에르 형제는 조의 어린 아들 토니오(도미니크 모랭)를 납치한 뒤 보석과 바꾸자고 제안한다. 이어 양측 갱 간에 살육전이 벌어지고 악인들은 모두 지옥으로 간다. 
총에 맞은 토니가 손에 든 장난감 권총을 쏘며 신이 난 토니오를 차에 태우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가로수가 휙휙 지나가는 파리 교외로부터 개선문이 있는 샹젤리제를 거쳐 시내로 고속 질주해 조의 아파트 앞에서 급정거하며 끝나는 마지막 장면이 멋있다.
영화는 파리에 바치는 영상 교향시라 부를 만치 흐리고 비 오는 늦가을의 파리 시내 뒷모습을 흑백촬영으로 샅샅이 보여준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회색빛 구름이 뒤덮은 가운데 마치 속살을 드러내듯 스케치한 파리 번화가의 뒷모습이 음울하게 아름답다.
이런 파리의 흐린 날씨만큼이나 잔뜩 찌푸린 세르베의 연기가 일품이다. 그는 얇은 입술을 비롯해 역시 프랑스 갱스터 영화의 베테런인 장 가방을 닮았다. 여윈 장 가방이라고 부를 만한데 피곤과 우수에 절은 주름 패인 얼굴에 고독한 음성을 내는 그의 모습은 비극적 장엄미마저 지니고 있다. 
‘리피피’가 리알토 픽처스(Rialto Pictures)에 의해 새로 디지털로 만들어져 4일부터 10일까지 로열극장(11523 샌타모니카)에서 상영된다. (310)478-3836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산행(A Walk in the Woods)


산행에 나선 빌(로버트 레드포드·왼쪽)과 스티븐(닉 놀티).

2,200마일 산행 나선 두 노인의 티격태격


스크린의 두 베테런 로버트 레드포드(78)와 닉 놀티(74)가 고루 호흡을 맞추면서 아이들처럼 티격태격하고 우정을 새삼 다독이면서 장장 긴 북행 산행을 하는 노인들의 버디무비다. 두 배우의 콤비와 현장에서 찍은 수려한 풍경 등으로 그런대로 볼만은 하나 참신성은 모자라는 무던한 작품이다. 
등산가 빌 브라이슨의 산행기를 원작으로 만들었는데 편안하게 두 심술첨지의 산행을 따라 가면서 즐기기엔 적당하지만 도무지 새로운 것이 없고 만사가 뻔해 나른하게 맥이 빠진다. 뉴앙스나 갑자기 트는 방향전환 및 신선한 분위기라곤 찾아보기 힘든 가볍기 짝이 없는 작품. 
뉴햄프셔주에서 영국인 아내 캐시(엠마 탐슨)와 조용히 은퇴생활을 즐기며 사는 등산 전문가 빌(레드포드)은 근래 들어 몸에 좀이 쑤셔 안절부절 못한다. 그리고 갑자기 2,200마일에 이르는 아팔라치안 산행을 하겠다고 캐시에게 통보한다. 이를 결사적으로 말리던 캐시는 빌의 고집에 못 견뎌 혼자만 가지 말라고 부탁한다.
빌이 동반자를 구하나 아무도 응하질 않는데 뜻밖에 옛날 젊었을 때 유럽여행을 같이 간 뒤로 헤어져 소식이 없던 스티븐 캐츠(놀티)가 상거지 차림에 배낭을 메고 이이오와주에서 도착한다. 알콜 중독자였던 스티븐은 비만해져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질 못할 정도이나 빌은 마지  못해 그를 동반자로 삼고 조지아주로 떠난다. 여기서부터 북행해 메인주까지 가는 산행이 2,200마일이다. 
둘은 가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인생무상을 얘기하고 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잡다한 에피소드가 엮어진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하면서 실수도 하고 또 여자와의 짧은 만남도 있는데 전부 상투적인 것들이어서 기시감이 든다.
레드포드의 연기는 작품 자체가 잘 나질 못해 무던한 편인데 틀에 박힌 것이긴 하나 오래간 만에 보는 놀티의 모습과 연기가 재미있다. 29년 전에 나온 ‘베벌리힐스 거지’의 홈리스 꼴을 한 놀티가 가래 끓는 음성으로 헤픈 연기를 하는 모습이 볼만하다. 엠마 탐슨과 빌에게 호감을 갖는 모텔 여주인 역의 메리 스틴버젠 등 조연진은 모두 낭비된 역. 간식 같은 영화로 금방 공복감을 느낄 것이나 나이 먹은 사람들에겐 권한다. 켄 크와피스 감독. 
R. Broadgreen.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나는 쿠바다’




영화 ‘대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티스타 독재정권 하의 쿠바의 아바나는 미 자본주의자들의 카리브해 판 라스베가스였다. 방탕과 타락이 판을 치는 가운데 국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바티스타 정권은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혁명에 의해 붕괴됐고 그 후 미국과 쿠바는 서로 적이 되었다. 이런 두 나라가 반세기 전 단절했던 외교관계를 복원한 것이 얼마 전. 이제 불원 고도 하바나에는 미 자본주의의 상징인 맥도널드가 들어서게 됐다.
바티스타 정권의 타락상과 카스트로의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유려하고 역동적인 카메라로 흑백화면에 기록영화 식으로 묘사한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나는 쿠바다’(I Am Cuba·사진)이다. 이 영화는 1964년 소련 핵무기의 쿠바 배치로 미소 간 핵전쟁의 전운이 짙어지는 가운데 소련과 쿠바가 합작한 쿠바혁명을 찬미한 불후의 명화다.
비배우와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을 써 대사를 가급적 줄인 채 미 제국주의의 방탕과 부패를 비판하고 아울러 미 정부의 지원을 받던 바티스타 정권의 붕괴를 찬양한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로 매 이미지가 마치 시 구절과 같이 절실하고 아름답다.
카메라의 리듬이 춤을 추듯 하고 그 동작이 물 찬 제비의 비상처럼 사뿐히 날렵한데 이제는 사라진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있지만 매우 엄숙하고 감각적인 작품이다. 특히 소련의 세르게이 우루세프스키가 찍은 촬영은 새 영화 언어를 창조해냈다는 찬사를 받았는데 클로스업과 와이드 앵글을 사용해 잽싸게 교체해 가면서 찍은 장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 카스트로의 쿠바를 환호하는 군중 속에 동참한 현실감을 갖게 된다.
역시 영상미가 수려한 ‘두루미들의 비상’(The Cranes Are Flying·1957)을 만든 소련의 미하일 칼라토조프가 감독했고 각본은 각기 소련과 쿠바의 시인들인 예프게니 예프투셴코와 엔리케 바넷이 썼다.
영화는 데카당한 바티스타의 쿠바와 칵테일을 마시면서 노리개 여자를 거래하는 미국 남자들과 해군 그리고 비키니 차림의 여자들의 모습과 굶주리고 일상의 고역에 시달리는 농촌과 도시 슬럼의 쿠바인들의 모습을 병행해 보여준다.
손에 들고 찍은 카메라가 마치 율동체조를 하듯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면서 사물과 인물들을 끊임없이 확대하고 또 변형시키고 있다. 이런 카메라 테크닉 때문에 우리는 영화 속 고통 받는 쿠바인들을 내 이웃처럼 연민하게 된다.
제작기간 2년 그리고 상영시간 141분짜리 영화는 *식민주의와 그것이 아바나에 미친 영향 *농부들의 비극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 준비 및 *산 속에서의 투쟁과 승리로 마련됐다.
팜트리와 사탕수수가 검은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흰 깃털처럼 보이는 꿈을 꾸는 듯한 첫 장면부터 단숨에 우리의 감관을 사로잡는 영화의 주인공 중 하나는 아름답고 육감적인 마리아. 마리아는 밤에는 베티라는 이름으로 야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가 새벽이 되면 아바나 교외의 썩어 문드러져가는 달동네로 퇴근한다. 6.25 후 G.I.가 주둔한 한국이 생각난다. 마리아를 사랑하는 르네는 과일 수레행상을 하면서 혁명세력에게 암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근면한 농부 페드로는 자기 사탕수수밭을 외국의 대기업에 잃게 되자 밭을 불태워 버린다. 페드로의 10대난 자식들은 마을에 나가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양키 팝송을 듣는다.
대학생 엔리케는 혁명가로 부르좌들의 단골 드라이브-인 극장에 몰로토프 칵테일을 투척하면서 공산혁명 동조자들에게 경찰의 물 폭탄과 총격에 맞서라고 촉구한다. 이 장면은 4.19혁명을 연상케 한다. 산꼭대기에 사는 농부 알베르토는 처음에는 부상당한 혁명군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나 정부군 폭격기에 의해 집이 파괴되면서 저항의 무기를 든다.  
카메라가 이들의 얘기를 장면에서 장면으로 뛰어넘어 포착하면서 우리는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는 이 섬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자이크를 뚜렷이 목격하게 된다.
컬럼버스가 “인간의 눈으로 본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부른 쿠바 하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시가와 럼과 맘보와 룸바. 미국인들은 이제 그 동안 몰래 사고 팔면서 태우던 쿠바시가를 내 놓고 태우게 됐다.
해적들의 술 럼은 코카콜라와 라임과 칵테일한 ‘쿠바 리브레’가 달짝지근하니 맛있다. 미국에서는 ‘럼 앤 코크’라 부르는데 옛날 옛적에 세 자매 보컬그룹 앤드루스 시스터즈가 ‘럼 앤 코카콜라’라는 노래를 불러 빅 히트를 했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 축하차 ‘럼 앤 코카콜라’를 들으며 럼 앤 코크라도 마셔야겠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