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9월 23일 토요일

성의 대결(Battle of the Sexes)


세기의 테니스 대결에 앞서 기자 회견을 하는 빌리 진 킹(왼쪽)과 바비 릭스.

세기의‘테니스 성 대결’통해 남녀평등 재미있게 터치


지난 1973년 여자 알기를 신발털이 깔개 정도로 아는 쇼비니스트인 55세의 왕년의 테니스 챔피언 바비 릭스(1995년 77세로 사망)와 29세의 여자 테니스 챔피언 빌리 진 킹(73)의 세기의 성의 테니스 대결을 그린 재미있는 코미디성 드라마다. 휴스턴의 애스트로돔에서 야단스러운 행사에 이어 열린 이 경기는 전 세계에서 9,000만 명이 TV를 통해 봤다.
스포츠 영화이지만 그 안에 남녀평등 문제와 동성애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기민하고 진지하게 다루었는데 궁극적으로 보는 사람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작품으로 안팎으로 사뿐하고  능률적으로 잘 만들었다. 
빌리 진 킹(엠마 스톤)이 입심이 센 홍보담당자 글래디스 헬드맨(새라 실버맨)의 인솔 하에  동료 선수들과 전국을 돌며 경기를 할 때만 해도 여자 선수들이 받는 돈은 남자 선수들의 12분의 1이었다. 그 때만해도 여자는 남자의 보증 없이는 크레딧 카드를 발급받지 못했다. 
당시 여자 선수들의 경기인 버지니아 슬림스대회가 생겼는데 단연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킹. 따라서 킹은 보수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아 테니스협회의 간부 잭 크레이머(빌 풀맨)를 찾아가 항의하나 별무 소득. 
킹은 래리 킹(오스틴 스토웰)의 아내로 래리는 아내의 코치요 매니저이자 트레이너. 그런데 킹이 미용사 매릴린 바넷(앤드레아 라이스보로)을 만나면서 둘 사이에 동성애가 싹이 튼다. 래리도 아내의 성적기호에 대해 눈치를 챈다. 그리고 킹은 죄책감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염려로 슬럼프에 빠진다.  
한편 오래 전에 테니스 챔피언이었던 바비 릭스(스티브 카렐)는 백만장자 상속녀 프리실라(엘리자베스 슈)의 건달기 있는 도박광 남편으로 데스크잡에 염증을 느껴 시도 때도 없이 도박에 매달린다. 이를 참고 용서하는 프리실라. 쇼맨인 바비는 다시 한 번 각광을 받을 생각에 킹에게 시합을 제의하나 거절당한다.   
이에 바비는 현 여자 챔피언인 마가렛 코트(제시카 맥내미)와 경기를 치루고 승리한다. 바비가 기자회견을 통해 여자를 마구 깔보고 조롱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본 킹은 바비와의 경기를 수락한다. 상금 10만 달러가 걸린 경기다. 이 경기 장면을 옛날 식으로 찍은 촬영이 향수감을 불러일으킨다. 또 영화에는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한 하워드 카셀도 컴퓨터로 재생시켰다. 
작년에 ‘라라 랜드’로 오스카 주연상을 탄 스톤이 젊은 시절의 킹과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여유만만하면서도 인간미가 넘쳐흐르는 연기를 기막히게 해낸다. 그리고 카렐도 곡예를 하는 원숭이 같은 쇼맨 연기를 활기차게 한다. 보고 즐기기엔 안성맞춤의 영화로 여자들이 박수를 칠 것이다. 발레리 화리스와 조나산 데이턴(‘리틀 미스 선샤인’) 공동 감독의 솜씨가 유연하다. 구식 의상과 프로덕션 디자인 등도 좋다. 보다 극적으로 깊고 강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PG-13.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빅토리아와 압둘(Victoria & Abdul)


빅토리아 여왕과 압둘이 궁정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영국 여왕과 인도 말단 서기간 우정의 비결은


빅토리아는 영국 여왕이고 압둘은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맞아 인도에서 예물을 들고 온 말단 서기의 이름이다. 두 사람의 오래 지속된 뜻밖의 우정의 실화로 얘기가 아기자기하게 재미있고 연기와 촬영과 의상 그리고 프로덕션 디자인과 음악 등이 고루 훌륭한 대중의 입맛에 딱 맞을 시대극이다. 
형식에 얽매인 궁중생활에 싫증과 짜증이 난 여왕이 모든 것이 색다른 이국 인도의 젊고 잘 생기고 격식을 무시하는 남자를 만나 생기와 활기를 찾는 얘기를 유머와 페이소스를 잘 섞어 한 상 잘 차린 풍성한 잔치처럼 내놓았다. 
타지 마할이 있는 아그라에서 선발된 압둘(알리 화잘)과 그의 동료 모하메드(압딜 악타르)는 빅토리아여왕(주디 덴치)에게 바칠 선물을 들고 영국으로 간다. 압둘과 달리 모하메드는 압제자의 나라에 가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여긴다. 이어 여왕의 궁중생활이 우습고 재미있게 묘사되는데 격식을 싫어하고 퉁명스러우나 속은 인자하고 현명한 여왕이 식탁에 앉아 닭고기를 손으로 집어 뜯어 먹고 곧이어 조는 모습이 웃긴다.
압둘이 여왕에게 예물을 바칠 때 영국 왕실 관리인의 지시를 무시하고 여왕과 눈을 마주치면서 여왕은 즉시로 이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압둘은 여왕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여왕 폐하에게 봉사하는 것은 몸 둘 바를 모를 특전입니다”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도무지 이해 못할 점은 어떻게 해서 압둘이 정복자요 탄압자인 여왕에게 그렇게 충성과 애정의 표시를 하는 것인가 하는 것. 종이나 하인의 근성으로 영화에서 이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는 것이 흠이다. 따라서 압둘의 개성 묘사도 빈약하다. 
여왕은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사하고 압둘을 자기 심복이자 친구요 조언자로 삼고 산책을 하면서 개인적이요 공적인 일들까지 얘기를 나누고 이어 압둘로부터 우르두어까지 배우면서 압둘은 여왕의 선생이 된다. 영화는 대부분 이런 여왕과 압둘의 지극한 관계를 그리고 있는데 둘은 플라토닉한 우정관계이나 애정관계처럼 느껴진다. 
이 관계로 인해 여왕은 소녀처럼 웃고 떠들고 생기와 신선함이 되살아나는데 뒤늦게 압둘이 결혼했다는 것을 밝히고 또 무슬림이라는 것도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작은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압둘을 철저히 믿고 사랑하는 여왕은 압둘의 가족까지 초청해 압둘을 자신의 보좌관처럼 만든다. 여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버티(에디 이자드)가 왕이 되면서 압둘과 그의 가족은 인도로 쫓겨난다.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작품인데 극적 굴곡이 약해 큰 감동은 모자란다.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 PG-13.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팜므 파탈 카르멘




내가 6개월마다 남자를 갈아 치우는 스페인 세빌의 담배공장 여공 카르멘이 단순한 요부가 아니라 여성 자유와 해방의 주창자요 자기 소신을 위해선 하늘과 죽음과도 맞설 용의가 있는 대담무쌍한 여자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은 지난 14일 LA 다운타운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오페라 ‘카르멘’(Carmen^사진)을 보고나서였다.
주인공이 담배공장에서 일해 오페라 처음에 “담배는 공기를 향기롭게 해 준다”라는 여공들의 끽연찬양 합창이 있는데 요즘처럼 모든 것이 ‘폴리티칼리 코렉트’한 세상에선 야단맞을 소리다.
뭇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인 카르멘은 자신의 성적 매력이 지닌 힘을 이용해 여자를 우습게 알던 때에 성의 불균형을 깨어버린 여자요 천대받는 집시라는 신분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 의기양양한 여자다. 이 정열덩어리 여인이 자신의 사랑과 진실을 위해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운명을 수용하는 것을 보자니 경외심마저 인다. 믿음을 위해 자기 생명마저 바치는 순교자와도 같은 여자다.
비제의 ‘카르멘’은 시종일관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음악과 극적인 내용 때문에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에도 팬들의 열렬한 요청에 따라 LA오페라는 1회 공연을 추가했다.
이번 공연은 보고 즐기기엔 큰 손색은 없지만 상당히 평범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돋보인 것이 카르멘 역을 맡은 푸에르토 리코 태생의 소프라노 아나 마리아 마르티네스. 작달만한 체구나 불덩어리였는데 노래는 물론이요 춤과 제스처를 비롯한 동작이 모두 당당하고 정열적이었다. 음성은 청아하면서도 약간 칙칙했는데 마치 밑에서 피어오르는 물 먼지가 건드리는 맑은 냇물과도 같은 음색이다.
그런데 카르멘을 사랑해 함께 살자고 애걸복걸하다가 퇴짜를 맞자 살인을 저지르는 단순한 마음의 호세 역의 테너 리카르도 마시는 덩지만 컸지 카리스마도 노래도 모자랐다. 그리고 마르티네스와의 화학작용도 미적지근해 이 정열적이요 비극적인 오페라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돈 호세의 라이벌로 투우사인 에스카밀로 역의 베이스 알렉산더 비노그라도프의 노래는 시원했으나 전반적으로 가수들이 별 특색이 없고 노래도 그만 그만했다.
눈요기 거리는 남녀댄서들의 플라멩코. 빨간 드레스에 빨간 부채를 든 여인들과 검은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빨간 타이를 맨 남자들이 어울려 구두 발로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맞추며 절제된 동작으로 추는 플라멩코가 화사하다. 합창도 좋았고 LA오페라 음악감독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LA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속도 있고 스무스 했다.
‘카르멘’은 여러 편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프란체스코 로시는 플라시도 도밍고(현 LA오페라 총감독)와 줄리아 미제네스-존슨이 주연하는 오페라 영화 ‘카르멘’(1984)을 만들었고 칼로스 사우라는 ‘카르멘’(1983)을 댄스극으로 연출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오토 프레민저가 제작^감독하고 흑인 배우들만 나오는 ‘카르멘 존스’(Carmen Jones^1954)다. 2차대전 때 군인 조(해리 벨라폰테)와 낙하산 제조공장 여공 카르멘 존스(긴 다리 미녀 도로시 댄드리지가 아스팔트도 녹일 화씨 100도짜리 검은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권투 챔피언 허스키 밀러(조 애담스)간의 삼각관계를 그렸는데 주옥같은 노래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댄드리지의 노래는 마릴린 혼이 벨라폰테의 노래는 르번 허처슨이 그리고 애담스의 노래는 마빈 헤이스가 각기 더빙했는데 노래 가사는 뮤지컬 ‘오클라호마!’ ‘카루셀’ ‘남태평양’ ‘왕과 나’ 및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가사를 쓴 오스카 해머스틴 II가 썼다.
카르멘이 비록 여권 신장의 선창자이긴 하지만 역시 이 격정적인 여자에게는 치명적인 유혹녀인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명칭이 더 잘 어울린다. ‘팜므 파탈’은 자신의 섹스 어필을 동원해 어리숙한 남자를 유혹해 이용한 뒤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요부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범죄영화 장르인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들로 ‘카르멘’의 주인공과 내용은 이 장르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담을 유혹해 인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이브와 천하장사 삼손을 파멸시킨 딜라일라가 원로급 ‘팜므 파탈’. 영화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1944)에서 봉 같은 보험외판원 프레드 맥머리를 유혹해 보험에 든 자기 남편을 살해시키는 바바라 스탠윅과 ‘살인자들’(The Killlers^1946)에서 역시 어리숙한 전직 권투선수 버트 랭카스터를 유혹해 파멸시키는 에이바 가드너도 카르멘과 어깨를 나란히 할 탑 클래스 ‘팜므 파탈’들이다.
‘카르멘’은 23일, 28일 및 10월 1일 세 차례 공연이 남았다. 28일 공연(하오 7시 30분)은 LA다운타운 엑스포지션 공원과 샌타모니카 피어에서 야외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무료 관람할 수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