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4년 1월 22일 수요일

2090만명



골든 글로브 레드카펫은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었다. 팬들은 스타들이 카펫을 밟을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아, 아”하며 죽는 소리를 내고 카메리맨들과 기자들 역시 스타들의 이름을 외치면서 셔터를 눌러대고 인터뷰 하자며 아우성들을 쳐댔다.
12일 베벌리힐스의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열린 제7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중계한 NBC-TV 측은 카펫 옆 야외석에 앉은 팬들에게 카메라를 향해 “골든 글로브, 골든 글로브”를 외치라고 예행연습까지 시켰다.
난 이 날 이런 도떼기시장이 열린 레드카펫을 오락가락하면서 입장객들에게 “어서들 안으로 들어가세요”라며 밀어대는 시큐리티 노릇을 했다. 그래 봐야 내 말 듣는 사람 아무도 없었지만.
시상식이 열리는 하오 5시가 가까워 오면서 스타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날 작품상(드라마)을 탄 ‘12년간의 노예생활’을 감독한 스티브 매퀸과 마이크 타이슨은 만나서 반갑다고 아이들처럼 좋아했고 ‘네브래스카’로 남우주연상(코미디/뮤지컬) 후보에 오른 브루스 던은 시종일관 딸이자 배우인 로라 던의 손을 잡고 카펫을 걸었다.
헬렌 미렌과 그의 남편인 감독 테일러 핵포드, 마이클 더글러스, 탐 행스와 그의 배우인 아내 리타 윌슨, 제니퍼 로렌스, 제시카 채스테인, 루피타 니옹고, 아델, 테일러 스위프트, 샌드라 불락, 콜린 패럴, 마이클 J. 팍스와 그의 배우인 아내 트레이시 폴랜, 드루 배리모어, 어셔, 매튜 매코너헤이, 케이트 블랜쳇, 올랜도 블룸, 줄리아 로버츠, 치웨텔 에지오포 및 엠마 톰슨 등이 잇따라 카펫을 밟았다.
빅스타일수록 도착이 늦는데 이 날 맨 꼴찌로 카펫을 밟은 사람은 맷 데이먼. 스타들은 또 자기들대로 서로 반갑다며 끌어안고 얘기를 나누는 바람에 레드카펫의 교통체증은 공사 중인 405프리웨이를 방불케 했다.
레드카펫은 일종의 비공식 패션쇼 장이기도 하다. 특히 여자 스타들의 드레스가 황홀무아지경으로 아름답고 화려하다. ‘12년간의 노예생활’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루피타 니옹고의 빨간 실크 케이프가운이 그의 검은 피부색깔과 치열한 적과 흑의 대결을 이뤘다.
이 날 ‘푸른 재스민’으로 여우주연상(드라마)을 탄 케이트 블랜쳇의 속이 들여다보이는 우아한 검은 망사 가운과 곧 엄마가 될 드루 배리모어의 붉은 꽃무늬가 화사한 드레스 그리고 검은 띠로 액센트를 한 제니퍼 로렌스의 백색 드레스도 눈부시게 곱다.
그런데 이 날 ‘아메리칸 허슬’로 여우조연상을 탄 로렌스는 젖가슴을 간신히 덮은 드레스 끝이 내려가는 것이 신경이 쓰이는 듯 제시카 채스테인과 대화를 나누면서도(사진 왼쪽) 연신 드레스를 끌어올렸다. 나는 얼마 전 로렌스를 인터뷰하면서 그의 영화 속 노브라에 대해 물어 “별 얄궂은 질문도 다 한다”는 가벼운 핀잔을 받은 터여서 가서 도와줄까 하다가 그만 뒀다.
남자 스타들 중에 눈에 띄는 멋쟁이는 이 날 ‘달라스 바이어즈 클럽’으로 남우주연상(드라마)을 탄 매튜 매코너헤이. 검은 깃으로 조화를 이룬 벨벳 초록 턱시도가 강렬했다. 스타들이 카메라맨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패션쇼 모델 저리 가라로 멋있다. 하긴 그 것도 연기의 한 동작이겠지.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주관하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참석자들이 먹고 마시는 중에 진행되는 즉흥적이요 부담 없이 편안하게 즐기는 쇼다. 딱딱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오스카 시상식과는 전연 다른 경쾌한 이지 고잉 스타일의 쇼다. 식이 진행 중인데도 식장에 붙은 오픈 바에 가서 술 시켜 마시는 배우들도 종종 눈에 띈다. 나도 그렇지만.
그런데 사실 골든 글로브는 시상식보다 식후의 파티가 더 인기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워너브라더스와 인 스타일이 공동 주최하는 파티를 비롯해 HBO와 팍스와 NBC-유니버설 그리고 와인스틴이 마련하는 파티는 새벽 2시까지 흥청망청 대면서 계속된다. 타락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는데 여기서는 보타이를 풀어 헤친 스타들과 팬들이 서로 하나가 돼 즐긴다.      
골든 글로브는 영화와 함께 TV 부문에도 시상하는데 올 시상식을 TV로 본 시청자 수는 총 2,090만명에 이른다. 이는 지난 10년만에 처음 이룬 최고의 기록이다. 이렇게 시청률이 치솟은 데 일등공신 노릇을 한 것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사회를 본 두 여자 코미디언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다. 재치 있고 귀엽고 우습고 희롱하고 꾸밈이 없어 보기에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이들은 내년에도 사회를 본다.
HFPA의 한 회원(이 날 ‘하우스 오브 카드’로 TV시리즈 드라마부문 여우주연상을 탄 션 펜의 전처 로빈 라이트는 수상 소감에서 우리를 ‘괴짜들의 무리’라고 불렀다)으로서 내가 투표한 시상식을 2,090만명이 봤다니 기분이 괜찮다.
                               -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1.17.2014. 한국일보>    


우주와 바다

중력이 있는 우주와 그것에 매달린 바다는 서로 거꾸로 엎질러 놓은 것처럼 닮았다. 둘은 절대성을 지닌 쌍둥이다. 인간은 이런 절대치 앞에 서면 참으로 보잘 것 없이 작아진다.
신년 연휴에 우주와 바다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의 생존투쟁을 다룬 두 영화 ‘그래비티’(Gravity)와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를 다시 보면서 내 존재가 콩알만 해지는 경험을 했다.
두 영화는 형태와 내용 면에서 거의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만든 ‘그래비티’는 우주작업 중 타고 온 셔틀이 파괴되면서 혼자 살아남은 여우주인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락)이 우주를 표류하면서 지구로 귀환하려고 사투를 벌이는 공상과학 스릴러다.
J.C. 챈도르가 감독한 ‘올 이즈 로스트’는 우주의 지상판인 인도양에서 고장 난 범선을 타고 표류하면서 뭍을 찾아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로버트 레드포드)의 해양 스릴러다. 둘 다 망망대해 공간을 무대로 벌어지는 인간의 생존투쟁이라는 점이 우선 닮았다.
이 두 1인극(‘그래비티’를 이렇게 불러도 될 것이다)은 대사가 거의 없는 무성영화와도 같은데 화면에 가득한 침묵과 정적이 웅변보다 훨씬 더 극의 내용을 뒤에서 강하게 떠 받쳐주고 있다. 또 둘 다 검소한 미니멀리즘 영화로 거의 공포영화의 분위기마저 느껴지는데 말 대신 정적과 음향과 교향시적 음악을 효과적으로 사용, 보는 사람의 감관을 사로잡는다.
내가 이 두 영화를 다시 보면서 겪은 최우선적 경험은 절대성 앞에서의 인간의 무기력감과 운명감이다. 그것은 공포감과도 같은 것으로 영화를 보는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선험적이요 초월적인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것을 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스톤이 영원한 우주 미아가 돼버린 동료 우주인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에게 유언식으로 “(네살 때) 죽은 내 딸에게 내 사랑을 전해 달라”고 독백하는 것이나 바다를 표류하던 남자가 절망 끝에 “갓”을 부르짖는 것이나 비슷한 심정이다.
그런데 확인할 길은 없지만 내가 보기엔 스톤이나 남자나 다 신을 믿는 사람들 같지가 않다. 고작해야 나처럼 교회에 나가면서도 밤하늘에 뜬 별들을 볼 때나야 ‘아, 저 어딘가에는 이 세상과 존재들을 초월한 보다 강력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자들처럼 여겨진다.
이 밖에도 두 영화는 닮은 데가 많다. 스톤이 타고 온 셔틀을 파괴한 버려진 인공위성의 파편들은 범선을 손으로 모는 남자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폭우라고 하겠다. 또 남자가 침몰하기 직전의 범선을 버리고 옮겨 탄 구명정은 스톤이 번갈아가며 몸을 의지한 우주에 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의 우주 정거장이다. 그리고 우주의 중력은 바다의 격랑이다.
드러매틱한 스릴러인 두 영화는 또 불락과 레드포드의 ‘원 맨(우먼) 쇼’로 두 사람의 연기는 매우 용감하고 지적이며 또 감정적으로도 강렬한 가상한 것이다. 위험과 생사를 모르는 공포 속에서도 결코 침착과 이성을 잃지 않는 스톤과 남자의 내적 강인함도 오누이처럼 닮았다.
특히 나이 77세의 레드포드가 자신의 얼굴과 목과 손을 비롯한 온 육신의 나이테를 그대로 노출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보여주는 연기는 경외스러울 정도다. 나는 지난해에 레드포드(사진)를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그 때 그는 “이 영화는 저 예산 영화여서 하루 종일 물속에 있다가 밖에 나와 잠시 쉴 때도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가 없어 고생이 막심했다”면서 “이 영화는 어디 까지나 J.C.의 영화”라고 감독의 노고를 치하하는 겸손의 미덕을 보여 주었다.
상대역 없이 혼자 하는 연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안다면 불락과 레드포드의 연기는 단연 상감이다.
두 영화의 촬영도 모두 수려하다. ‘올 이즈 로스트’의 수중촬영도 아름답고 준수하지만 황홀무아지경인 것은 ‘그래비티’의 우주의 신비와 미 그리고 두려움을 아찔하게 찍은 에마누엘 루베즈키의 촬영이다. 기술적으로도 혁신적인 촬영이다. ‘그래비티’는 3월2일에 있을 오스카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놓고 ‘12년간의 노예생활’과 치열한 양자대결을 벌일 것이다.
두 영화의 끝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같을 수도 또 다를 수도 있다. ‘그래비티’의 결말은 마치 스탠리 쿠브릭의 철학적 공상과학 우주영화 ‘2001: 우주 오디세이’의 새 생명의 기원을 상징하는 결말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올 이즈 로스트’의 결말은 아주 애매모호하다. 과연 남자는 살았는가 아니면 죽었는가. 전연 다른 줄 알았던 우주와 바다가 이렇게 같은 줄은 두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1.10.2014. 한국일보>


                   

나의 베스트 텐





할리웃은 2013년 총 109억달러에 이르는 흥행수입을 올렸는데 이는 할리웃 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2013년은 영화의 질과 다양성에서 모두 훌륭했던 해로 특히 흑인문제를 다룬 좋은 영화들이 여러 편 나왔다.
프로야구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의 전기 ‘42’와 모두 8명의 대통령을 돌본 백악관의 흑인 집사의 얘기 ‘리 대니얼스의 버틀러’ 그리고 북가주 오클랜드 전철역의 흑인 청년 총격 피살사건을 다룬 ‘프루트베일 스테이션’ 및 노예문제를 다룬 ‘12년간의 노예생활’ 등은 모두 호평과 함께 흥행도 잘됐다.
2013년은 또 1980년대 액션영화의 우상들이었던 실베스터 스탤론(67)과 아놀드 슈워제네거(66)가 양수겸장으로 흥행서 죽을 쑨 해이기도 하다.
2013년 기자가 본 300편에 가까운 영화들 중 거의 충격적인 감동을 받은 나의 최고의 영화는 우주 스릴러 ‘그래비티’(Gravityㆍ사진)다.
멕시코의 알폰소 쿠아론이 감독한 이 입체영화는 기술적인 면에서도 영화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영적이요 철학적인 의미를 지닌 심오한 작품이다. 우주의 신비와 아름다움 그리고 두려움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획기적 영화로 샌드라 불락과 조지 클루니가 나온다.
‘그래비티’에 이은 나의 2103년도 베스트 텐을 알파벳순으로 적는다.
2.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인도양을 항해 중이던 요트가 사고로 배 옆구리에 큰 구멍이 나면서 배를 몰던 남자(로버트 레드포드)가 온갖 지혜와 용기를 구사해 가면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친다. 레드포드(77)의 원맨쇼로 대사가 거의 없는 무성영화와도 같다.
3. ‘자정 이전’(Before Midnight)-리처드 링크레이터 감독의 ‘해 돋기 이전’(1995)과 ‘해 지기 이전’(2005)에 이은 대사 위주의 로맨스 3부작의 마지막 편. ‘해 돋기 이전’에서 유로레일 안에서 만나 사랑이 싹텄으나 헤어졌다가 ‘해 지기 이전’에서 재회한 미국인 제시(이산 호크)와 파리지엔 셀린(줄리 델피)은 이제 파리에서 살면서 딸 쌍둥이를 둔 중년의 커플. 여름 휴가차 그리스에 온 둘이 먹고 마시고 걷고 대화를 나누면서 다투고 화해하고 후회하고 포옹하면서 중년 부부의 공통된 삶의 권태와 아픔과 함께 기쁨과 사랑을 재확인한다. 삼삼하게 매력적인 로맨스 영화다.
4. ‘푸른색이 가장 따뜻한 색’(Blue Is the Warmest Color)-고교 시니어인 여학생과 미술을 전공하는 여대생 간의 격정적이요 영육을 불사르는 사랑. 러브신이 극사실적으로 노골적인 프랑스영화.
5. ‘이너프 세드’(Enough Said)-둘 다 이혼한 싱글 페어런트들인 중년 남녀(제임스 갠돌피니와 줄리아 루이스-드라이퍼스)의 두 번째 기회인 사랑을 사실적이요 촉촉한 봄비의 감촉처럼 부드럽게 그렸다. 얼마 전 로마서 급사한 갠돌피니(토니 소프라노)의 유작 중 하나다.
6. ‘프랜시스 하’(Francis Ha)-뉴욕에 사는 젊은 댄서의 꿈과 좌절과 우정과 사랑 등 일상사를 날듯이 상쾌하게 그린 흑백 소품. 프랜시스 역의 키 큰 요정과도 같은 그레타 거윅의 사뿐한 모습과 연기가 아름답다. 아! 청춘의 기쁨과 슬픔이여. 그런데 프랜시스의 성은 하씨가 아니다.
7. ‘허’(Her)-가까운 미래의 LA. 연애편지 대필가인 젊은이(와킨 피닉스)가 컴퓨터 속의 인공지능인 여자(스칼렛 조핸슨의 음성)와 사랑한다. 첨예화한 기계시대의 인간 대 인간의 접촉의 아쉬움과 고독을 차분하고 로맨틱하고 또 소슬하게 묘사했다.
8. ‘보이지 않는 여인’(The Invisible Woman)-찰스 디킨스(레이프 화인스 감독 주연)와 그가 숨겨둔 정부이자 뮤즈(펠리시티 존스)인 여인과의 관계.                  
9. ‘네브래스카’(Nebraska)-몬태나주에 사는 노인(브루스 던)이 100만달러 경품에 당첨됐다는  통보를 받고 돈을 받으러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네브래스카주로 향한다. 향수감 짙은 흑백 코미디 드라마.
10. ‘스펙태큘라 나우’(The Spectacular Now)-고교 시니어들인 두 10대 남녀 학생의 사랑과 갈등과 이별과 재회를 사실적이요 절실하니 곱게 그렸다.
이 밖에도 ‘과거’(The Past) ‘필립스선장’(Captain Phillips) ‘머드’(Mud) ‘사냥’(The Hunt) ‘공격’(The Attack) ‘부전자전’(Like Father Like Son) ‘바람이 인다’(The Wind Rises) ‘필로메나’(Philomena) ‘차일즈 포즈’(The Child’s Pose) ‘어네스트와 셀린’(Earnest & Celine) ‘숏 텀 12’(Short Term 12) 및 ‘메이지가 아는 것’(What Maise Knew) 등이 기억에 남는다.      
                               -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1.3.2014.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