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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라 랜드’의 감독 데미언 차젤과 남녀 주연상(뮤지컬/코미디)을 탄 라이언 가슬링과 엠마 스톤(왼쪽부터). |
작품상^남녀주연상 등 총 7개 부문 최다 수상
생애업적상 메릴 스트립, 트럼프 비판 수상소감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주관하는 제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라 라 랜드’(La La Land)의 잔치였다. 지난 8일 베벌리 힐스의 베벌리 힐튼호텔에서 거행된 시상식에서 작품상(뮤지컬/코미디)을 비롯해 남녀주연상 등 모두 7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오른 이 영화가 7개 부문의 상을 다 타면서 골든 글로브사상 최다 수상작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필자를 비롯해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전체 회원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HFPA가 이 같은 복고풍의 뮤지컬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다. 이로써 이 영화는 오는 24일에 발표될 오스카상 후보작들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게 됐고 마지막 영광을 누릴 가능성도 커졌다.
‘라 라 랜드’는 할리웃에서 성공하려고 몸부림치는 두 젊은 남녀(라이언 가슬링과 엠마 스톤)의 매력적이요 아름다운 작품으로 가슬링과 스톤이 각기 남녀주연상(뮤지컬/코미디)을 탔다. 이 밖에도 이 영화는 감독과 각본(데미언 차젤) 그리고 음악과 주제가상을 탔다. 차젤(‘윕래쉬’)은 이로써 이날 3관왕이 됐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각본상을 탄 것은 다소 이변이다.
‘투나잇 쇼’의 지미 팰론이 사회를 본 시상식은 ‘라 라 랜드’의 첫 장면을 본 딴 올스타 캐스트의 춤과 노래를 담은 필름으로 시작됐는데 여기서부터 ‘라 라 랜드’가 여러 부문에서 상을 탈것이라는 조짐이 느껴졌다.
작품상(드라마) 등 총 5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올랐던 ‘바닷가의 맨체스터’(Manchester by the Sea)는 케이시 애플렉이 남자주연상을 타는 것으로 끝났다. 고통스런 과거를 지닌 남자의 자기 치유와 소생의 이 드라마는 남자주연상과 함께 작품과 각본상 수상이 유력했었다.
작품상(드라마) 등 총 6개 부문에서 수상후보에 올랐던 ‘문라이트’(Moonlight)는 시상 맨 마지막에 있는 작품상 수상작이 발표되기 전까지 단 한 개 부문에서도 상을 못 타 영패를 면치 못할 것처럼 보였으나 최후에 ‘바닷가의 맨체스터’를 제치고 작품상을 타는 영광을 누렸다. 이 영화는 마이애미인근의 달동네에 사는 흑인소년의 성장과 동성애자로사의 자기 정체를 수용하는 얘기를 세 개의 시간대로 나누어 그린 부드러운 드라마다.
시상식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에서 소년을 자기 품 안에 받아들이는 마약딜러로 나오는 마헤르샬라 알리가 남자조연상을 탈 것이 거의 확실했으나 뜻밖에도 이 상은 ‘야행성 동물’(Nocturnal Animals)에서 흉악무도한 모녀납치범으로 나온 아론 테일러-잔슨이 탔다. 시상식 첫 이변이었다.
이 날 가장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은 강간을 당한 50대의 여자가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복수자로서 여성의 힘을 행사하는 프랑스영화 ‘엘르’(Elle)의 주인공인 이자벨 위페르가 여자주연상(드라마)을 탄 것. 위페르는 미국의 내로라하는 에이미 애담스, 제시카 체스테인, 나탈리 포트만과 신인 영국배우 루스 네가를 제치고 상을 탔는데 이 베테런 배우가 골든 글로브상을 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위페르는 오스카상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원초적 본능’을 만든 네덜랜드 감독 폴 베어호벤이 연출한 ‘엘르’는 여자주연상과 함께 외국어영화상도 타 2관왕이 됐다. 필자를 포함한 외국인 기자들로 구성된 HFPA가 위페르에게 주연상을 준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다.
한편 여자조연상은 덴젤 워싱턴이 감독한 오거스트 윌슨의 무대극 ‘울타리’(Fences)에서 피츠버그의 쓰레기차 용원으로 집안을 독재자처럼 지배하는 남편(워싱턴)의 횡포와 허세를 인내와 예지로 견디어내는 아내 역을 한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탔다. 만화영화상은 디즈니의 ‘주토피아’(Zootopia)가 받았다.
한편 이번 시상식에서는 지난 달 세상을 떠난 할리웃 뮤지컬과 코미디의 수퍼스타 데비 레놀즈와 그보다 하루 먼저 타계한 배우이자 작가인 딸 캐리 피셔를 기리는 필름모음을 내보내 장내를 숙연케 했다.
그러나 이날 무엇보다도 시상식 장내를 침묵으로 잠기게 한 뒤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상을 탄 메릴 스트립의 수상소감이었다. 스트립은 상을 탄 후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도널드 트럼프 차기 미대통령을 신랄하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스트립은 “할리웃은 국외자들과 외국인들이 가득한 곳으로 우리가 그들을 모두 내쫓는다면 당신들은 예술이 아닌 풋볼과 종합무술 밖에 볼 것이 없게 될 것”이라면서 트럼프의 외국인 기피증을 꾸짖었다.
그는 이어 트럼프가 유세중 지제부자유자인 뉴욕타임스의 기자 세르게이 코발레스키의 흉내를 낸 것에 대해 “그것은 올 해 나를 아연케 만든 연기였다. 나는 그것을 보았을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아직도 그것을 내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화가아니라 실제 삶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분개해 했다.
스트립은 또 트럼프의 인간을 모멸코자하는 본능을 개탄하면서 “힘 있는 자들이 그들의 위치치를 위협용으로 쓴다면 우린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몇 시간 후 트위터를 통해 이렇게 반박했다. “메릴 스트립은 할리웃에서 가장 과대평가 받고 있는 배우 중 하나다. 그는 나를 모르면서도 어제 밤 골든 글로브시상식에서 나를 공격했다. 그는 대패한 힐러리의 추종자이다.” 대통령답지 못한 반응이다.
사실 이날 트럼프에 대한 힐난은 팰론의 첫 인사말부터 시작됐다. 팰론은 서두에서 “골든 글로브는 미국에서 아직도 일반투표를 존중하는 몇 안 되는 곳 중의 하나다”라면서 실제 유권자의 지지 투표수는 힐러리 보다 적었으나 선거인단수로 이긴 트럼프를 빗대어 조롱했다.
그리고 ‘야근 매니저’(The Night Manager)로 TV드라마 시리즈 부문(HFPA는 TV부문에 대해서도 시상한다) 국제적 무기 밀매상 거부로 나와 남자조연상을 탄 영국배우 휴 로리도 매섭게 트럼프를 공격했다. 로리는 수상소감에서 “이번이 마지막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할리웃’과 ‘포린’과 ‘프레스’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면서 “ 이 상을 모든 곳의 사이코 억만장자를 대신해 받는다”고 말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시상식 호스트를 맡은 지미 팰론의 사회는 톡 쏘는 맛이 없는 무덤덤한 것이었다. 작년과 그 전에 몇 차례 사회를 본 독설가 릭키 제르베즈의 할리웃과 HFPA를 조롱하는 신랄한 농담이 결여돼 맹물 먹는 맛이었다.
그런데도 NBC-TV를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된 시상식의 시청률은 작년보다 8% 높아져 전 미국에서 2,000만명이 시상식을 시청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