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3월 23일 월요일

‘신데렐라’ 릴리 제임스




“조연 오디션서 덜컥 여주인공… 마법 걸린 듯”

화 났을 때 날 웃게 만드는 사람이 나의 멋진 왕자
댄스는 유튜브 보며 연습… 무도회에 가본 적 없어


지난 13일 개봉, 주말 사흘간 7,000만여달러의 수입을 올리면서 흥행순위 1위를 차지한 화려하고 환상적인‘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 역을 한 영국의 신성 릴리 제임스(25)와의 인터뷰가 최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긴 금발의 소녀 같은 모습의 제임스는 PBS가 방영하는 영국의 인기 드라마 시리즈‘다운턴 애비’에 나오는데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와의 공식 인터뷰가 처음이어서인지 인터뷰 내내 손가락을 깨물고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수줍어했다. 그러나 매우 명랑했는데 액센트가 있는 약간 굵은 음성으로 솔직하고 편안하게 답변을 하면서 다소 흥분한 듯이 우리들에게“정말 고마워요”라고 인사를 했다. 신데렐라처럼 고운 색싯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디션 과정과 함께 세트에 섰을 때의 소감은 어땠는가.
“원래 나는 신데렐라의 계모의 두 딸 중 하나인 아나스타시아 역의 오디션에 참가했는데 그 때 ‘다운턴 애비’에 나올 때여서 금발이었다. 이런 나를 본 감독이 금발이니 이왕이면 엘라(신데렐라의 본명) 역 대사를 읽어 보라고 해서 달랑 15분만 연습하고 대사를 읽었다. 그 뒤로 3개월간에 걸친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야 신데렐라 역을 땄다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마법과 같은 경험으로 내가 진짜로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곤 역을 제대로 해낼 수가 있을까 하고 겁에 질리고 또 압박감에 시달렸다.” 

-당신은 용감하고 우스운가.
“그러길 바란다. 힘과 용기와 친절을 지닌 엘라 역을 하면서 그처럼 되고자 했다. 그런 것들은 아주 단순한 메시지이면서 아울러 심오한 것들이다.” 

-당신과 패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신데렐라 역을 맡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다. 난 원래 오렌지색과 밝은 색을 좋아하는데 내 의 의상 담당자가 기자회견을 위한 여러 벌의 엷은 색깔의 드레스를 만들어줘 입은 뒤로 내 자신이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자신감을 느끼게 되더라. 그러나 난 평소엔 찢어진 진 바지에 티셔츠를 입는다.”

-신데렐라는 못된 계모와 그의 두 딸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는데 당신도 이들처럼 못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으며 또 질투의 대상이 된 적이 있는가.
“질투를 받아 본 적이 있다. 특히 이 직업에선 그런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럴 때마다 옆으로 치워 놓으려고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질투를 무시하려면 두꺼운 피부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배우란 엷은 피부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러자면 삶의 태도를 변질시켜야 한다는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못되고 민한 사람들에게는 신데렐라처럼 용기와 친절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동화 속의 왕자들은 대부분 약간 멍청한 사람들이기가 십상인데 당신의 왕자는 어땠는가.
“난 멍청한 왕자를 원치 않는다. 난 우습고 영리한 왕자가 좋다. 내가 이 영화를 자랑스럽게 느끼는 이유도 왕자와 내가 다 깊이와 개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왕자고 그의 애인이고 간에 난 멍청한 사람은 싫다.”

-젊은 여인들은 다 나름대로 멋진 왕자에 대한 개념이 있는데 당신의 멋진 왕자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화가 잔뜩 났을 때 날 웃게 만드는 유머감각이 있는 남자다. 난 어떤 특정 타입의 남자를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자기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자신 있는 사람이 좋다.”

-신데렐라를 하면서 무엇을 배웠나.
“역을 맡은 뒤로 공주들이 나오는 만화영화들을 모조리 봤는데 그 중에서 ‘미녀와 야수’와 ‘인어공주’가 특히 좋았다. 두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다 무언가를 찾고 보다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자 하는 독립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혼과 삶에 있어 무언가를 바라고 동경하는 것을 배웠다.”

신데렐라가 황금마차를 타고 왕궁에 도착했다.
-당신의 삶에 있어 모범이 된 사람은 누구인가.
“미국인인 내 할머니다. 그는 아름답고 멋있고 강하다.”

-무도회 춤에 능하며 집에 영화의 유리 구두를 만든 스바로브스키 제품을 가지고 있는가.
“댄스는 유튜브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배웠지만 난 무도회에 가본 적은 없다. 영화의 춤은 안무가가 준비한 대로 철저히 따라 한 것이다. 스바로브스키 제품은 영화의 분장 팀이 준 유리나비가 있는데 침실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

-신데렐라는 용기 있는 여자이긴 하나 아직도 멋진 왕자가 나타나 자기를 처참한 환경에서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태도가 다소 수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맞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에서 보여준 신데렐라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신데렐라는 단 한 번도 왕자와 결혼할 것을 꿈꾸지 않았다. 센데렐라는 삶을 실제로 다루면서 아버지에게 약속한 대로 고난 속에서도 자기 집을 지킨다. 그는 그런 삶에서 기쁨을 찾고 있다. 신데렐라는 끝에 왕자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여자다. 그러나 이 건 동화이니 만큼 왕자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둘이 사랑에 빠진 것이지 반드시 왕자가 신데렐라를 구해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로맨스란 마법적인 것 아닌가. 그런데 난 불치의 로맨틱한 사람이다.”

-여기서 신데렐라는 별명인데 당신도 별명이 있는가.
“없다. 단지 사람들이 릴리라는 이름을 이리 저리 바꿔 부르면서 놀리는 적은 있다.”

-신데렐라는 양심대로 살면서도 제대로 보답을 못 받는데 그래도 그럴 필요가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 보상과 행복의 길로 다다르지 못할지라도 용기와 친절은 필요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얻는 행복감은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영화를 찍을 때 켄(감독 케네스 브라나)이 내게 명상에 관한 책을 줘서 요가를 많이 했다. 그리고 내적 힘은 당신에게 보상의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켄은 내게 삶의 아주 작은 것에라도 용기를 가지고 친절을 적용하라고 일러 줬다. 그러면 하루가 보다 나은 삶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의 삶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인가.
“자라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다 난 아버지를 18세 때 잃었다.”      

-가장 좋아하는 러브스토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가.
“유머와 함께 날 뇌쇄시킬 수 있는 눈동자를 지닌 남자다.”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교훈이 무엇인가.
“아버지가 가르쳐 준 관대하라는 것이다. 난 그 말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당신 이름을 지닌 백합을 좋아하는가.
“원래 내 세례명은 클로에였는데 아버지가 내가 두 살 때 릴리로 바꿨다. 난 내 이름과 함께 향기가 좋은 백합을 좋아하나 그것이 장례식 꽃이란 점이 슬프다.”

-지금 무슨 작품에 나오고 있는가.
“BBC-TV의 6부작 시리즈 ‘전쟁과 평화’다. 오는 6월까지 찍는다. 대하서사 극으로 나는 나타샤 역을 맡았고 폴 데이노가 피에르로 나온다. 대단한 경험이지만 겁이 난다. 그리고 짐 브로드벤트와 제임스 노턴 및 질리안 앤더슨 등 초호화 캐스트다. 옛날 영화에서 내가 사랑하는 오드리 헵번이 내 역을 맡았는데 그 걸 보려고 해도 한 번 보면 그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안 보기로 했다.”

-일 안할 땐 어떻게 지내는가.
“친구와 함께 맥주 집에 간다. 그리고 나는 거의 집착할 정도로 사랑하는 애완용 고양이 코코가 있다. 코코는 내가 집을 자주 비워 신경이 곤두 서 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땐 코코를 극진히 돌봐준다.”

-다음 영화는 무엇인가.
“샘 라일리가 다시로 나오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들’이다. 난 여기서 좀비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액션 영웅으로 나온다.

-영국 사람이니까 축구 팬일 텐테 어느 팀 팬인가.
“첼시다.”

-어떤 배우로 나아가고 싶은가.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하는 배우다.”

-부와 명성에 관해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해줄 말은.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그것에 눈이 멀어 샛길로 나가는 수가 있다. 그리고 사람과 환경과 열광을 끌어안으라고 말해 주고 싶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대니 칼린스 (Danny Collins)


대니 칼린스(알 파치노)가 오래간만에 올드팬들을 위해 무대에 섰다.

속물이 된 록 스타의 뒤늦은 깨달음


이야기가 다소 조작적이긴 하지만 알 파치노가 쉰 목소리로 노래까지 부르면서 열연을 하는 따뜻하고 감상적인 드라마로 파치노의 연기는 마치 그가 오스카 주연상을 탄 ‘여인의 향기’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호탕하기 짝이 없다.
오랫동안 절연된 부자지간의 관계 연결을 통한 한 나이 먹은 수퍼스타 록가수의 뒤늦은 속죄와 자기 구원의 얘기이자 부와 명성의 부질없음을 다룬 내용으로 파치노를 비롯해 베테런 조연진들의 연기가 눈부시다. 올드팬들을 위한 영화다.
재미있는 것은 오래 전에 예술적 주체성을 잃고 팬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싸구려 수퍼스타 가수가된 주인공 대니 칼린스의 얘기가 파치노의 생애를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그는 한 동안 일련의 싸구려 영화에 나와 LA타임스의 영화평론가 케네스 투란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었는데 얼마 전부터 정신을 차렸는지 짭짤한 소품 드라마에 나와 호연을 하고 있다.
영화는 대니 칼린스(에릭 슈나이더가 파치노를 판에 박은 듯이 닮았다)가 아직 나이 어린 진지한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1971년 음악잡지와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인터뷰에서 부와 명성이 예술가의 진실된 영혼을 손상시킬 것을 우려하는 말을 한다. 
그로부터 40년 뒤 대니는 돈과 명성을 지닌 수퍼스타가 되었지만 이미 예술적 혼을 상실한지 오래 된다. 술과 약물에 취해 살면서 새파랗게 젊은 여자(카타리나 카스)를 약혼자로 두고 케케묵은 옛날 노래들을 반복해 부르면서 올드 팬들의 비위를 맞추며 산다. 탐 존스와 폴 앵카가 된 것이다.
이 때 그의 오랜 매니저이자 친구(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대니에게 40년 전에 존 레논이 대니의 인터뷰를 읽고 그에게 보낸 편지를 전한다. 내용은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라는 것으로 레논은 편지에 자기 전화번호를 적고 대니에게 전화를 걸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대니가 인터뷰한 잡지사 기자가 가로채는 바람에 대니에게 전달이 안 된 것. 이 같은 내용은 영국의 포크가수 스티브 틸슨의 실화를 빌려다 쓴 것이다.              
이 편지를 읽은 대니는 갑자기 대오각성하고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뒤 자기가 옛날에 하룻 밤 정사를 나눈 여자 팬이 낳은 아들 탐(바비 카나발리)을 찾아 아들이 사는 뉴저지주의 서민동네 인근의 힐튼호텔에 장기 투숙한다. 이런 얘기는 좀 억지다.  
그리고 불쑥 탐과 그의 심지가 굳은 임신한 아내 새만사(제니퍼 가너)와 특수교육이 필요한 이들의 어린 딸 호프(지젤 아이젠버그)가 사는 집을 찾아온다. 아기 때 자기를 버리고 간 대니를 맞아 탐은 노발대발하며 꺼지라고 소리친다. 일단 호텔로 물러간 대니는 상심을 스카치로 달래면서 호텔의 아름다운 매니저(아넷 베닝)에게 수작을 건다.  
대니는 그 후에도 끈질기게 아들 집을 찾아와 손녀를 맨해턴의 최고급 특수학교에 입학시키고 선물을 산더미 같이 사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과 화해하려고 애를 쓴다. 이에 탐의 마음도 서서히 녹아든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연결에 불치병이라는 통속적인 플롯을 쓴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라스트신이 좋다. 
파치노가 요란한 제스처에 약장수 같이 술술 나오는 대사를 구사하면서 야단스럽고 코믹하면서도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다채로운 연기를 하는데 보기 좋다. 플러머와 카나발리와 베닝과 가너 등도 잘한다. ‘이매진’을 비롯한 비틀즈의 노래가 여럿 나온다. R. Bleecker Street.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쿠미코, 보물 찾는 여인 (Kumiko, The Treasure Hunter)


도쿄 노처녀 쿠미코(린코 키쿠치)가 마침내 미네소타주의 화고에 도착했다.

영화-현실 혼돈, 노스다코타 눈보라 속으로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무시한 이 다크 코미디는 영화를 현실로 믿는 일본의 한 노처녀 회사원의 돈 보따리 찾아 가는 이역만리 오디세이로 분위기가 초현실적이다. 순전히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이야기로 약간 공포영화와 일본 귀신영화 분위기마저 지녔다.
‘바벨’로 오스카 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일본 배우 린코 키쿠치가 거의 대사 없이 눈으로 연기하는 큰 수고를 하는데 눈 덮인 겨울 노스다코타주의 설원을 찍은 촬영과 신경을 건드리는 전자음악도 좋다.
코엔 형제 감독의 새카만 코미디 스릴러 ‘화고’(Fargo)의 내용이 중요한 플롯을 구성하는데 데이빗 젤너 감독의 솜씨에서 ‘화고’ 냄새가 물씬 난다. 데이빗과 그의 형제인 네이산이 공동으로 각본을 썼는데 매우 기이하고 독특한 영화다. 그리고 진행 속도가 무지무지하게 느리다.      
29세난 도쿄의 과묵한 회사원 쿠미코는 친구도 애인도 없이 토끼 한 마리를 데리고 고독하게 산다. 시골 사는 어머니는 전화로 시집 안 간다고 보채고 회사의 사장(노부유키 카추베)은 쿠미코를 식모 다루듯 하고 동료 사원들은 쿠미코를 왕따 놓는다.
쿠미코의 유일한 낙은 VHS로 ‘화고’를 보는 것. 그리고 쿠미코는 영화에서 스티브 부세미가 눈밭 속에 거액의 현찰이 든 가방을 숨기는 것을 보고 이것을 현실로 알고 언젠가 그 가방을 찾아가리라고 다짐한다. 영화는 쿠미코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이상한 여자인지에 대해 언급이 없다.
그리고 쿠미코는 사장이 자기 결혼기념일을 위한 선물을 사오라고 준 크레딧카드를 이용해 미니애폴리스행 비행기표를 산다. 쿠미코는 눈 오고 추운 노스다코타에 도착, 화고행 버스를 탄다. 그리고 화고로 가는 길에 모두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절한 노스다코타 주민들을 몇 만나는데 그 중에서 아주 아름다운 만남이 언어소통이 불편하고 돈도 떨어진 쿠미코를 불쌍히 여겨 정성껏 돌봐 주는 셰리프(데이빗 젤너).
쿠미코는 셰리프의 ‘화고’는 영화라는 말에 역정을 내고 그를 떠나 혼자 걸어서 화고를 찾아 간다. 모텔의 이불을 찢어 코트처럼 걸치고 눈보라 속을 걷는 쿠미코의 모습이 마치 고난의 길을 가는 순례자 같다. 그리고 쿠미코는 마침내 현장에 도착한다. 꿈과도 같은 결말이다. 고독한 사람에겐 영화가 현실 도피의 수단이자 진짜로 현실도 될 수가 있다는 얘기로 어찌 보면 쿠미코는 기자처럼 영화에 미친 사람이라고 하겠다. 성인용. 26일까지 뉴아트극장(11272 샌타모니카). ★★★(5개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단성사



1907년 종로 3가에 개관한 한국 최초의 영화관으로 나운규의 ‘아리랑’을 상영한 단성사가 수 년 전 폐관, 경매에 내놓았지만 3차 경매까지 유찰돼 아직까지 새 주인을 못 찾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뉴스를 읽으면서 ‘아, 단성사’하는 한숨과 함께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영화 구경을 단체로 수업시간 전 꼭두새벽에 담임선생 인솔 하에 극장에 가서 했다. 혼자 따로 극장에 갔다가 걸리면 정학을 받았다. 무지한 학칙이었다.
내가 특히 단성사의 폐관에 남다른 석별의 정을 느끼는 것은 경복중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단체 관람한 ‘셰인’을 여기서 봤기 때문이다. 말을 탄 셰인이 그랜드 티튼을 배경으로 멀리서 조이의 농가를 향해 다가오는 첫 장면부터 “셰인 컴백”하고 외치는 조이를 남겨 놓고 셰인이 말을 타고 그랜드 티튼을 타고 넘는 마지막 장면까지 넋을 잃고 봤다.
이렇게 꼬마 때 처음 간 단성사는 내가 어른이 돼서도 자주 갔던 극장이다. ‘대경주’ ‘네바다 스미스’ ‘알라모’ ‘대장 부리바’ ‘나바론’ ‘졸업’ 및 ‘줄루전쟁’ 등도 다 여기서 봤다.
당시 종로 3가는 극장가로 단성사 건너편에는 피카디리가 있었고 피카디리에서 종로길 건너편에는 서울극장이 있었다. 학생 때 피카디리에서 단체 관람한 영화가 후에 제임스 본드가 된 로저 모어가 나온 ‘기적’인데 그 밖에도 ‘양귀비도 꽃이다’ ‘633 비행중대’ ‘황야의 7인’ ‘엘 시드’ 및 ‘007/위기일발’ 등을 여기서 봤다. 서울극장에서는 고등학교에 붙은 날 폴 뉴만이 나온 권투영화 ‘상처뿐인 영광’을 봤고 ‘형제는 용감했다’도 여기서 봤다.
그런데 그 때 단성사나 피카디리에 가려면 공연히 남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피카디리 옆 골목이 소위 ‘종3’이라 불리는 유명한 사창가로 때론 아가씨들이 극장 근처에까지 나와 유객행위를 했었다. 
피카디리는 멀티플렉스로 개조돼 운영되고 있다고 하나 내가 어렸을 때 다니던 극장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다. 난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면서 인격 형성이 되고 또 자랐다고 해도 될 만큼 영화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들 극장이 폐쇄됐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내 과거의 살점이 한 줌씩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곤 한다.
단성사나 피카디리는 일류극장이어서 고등학교를 나와서야 자주 갔고 중·고등학생 때는 2류 극장들인 현 조선호텔 앞의 경남극장과 서대문의 동양극장 그리고 명동극장과 용산에 있던 성남극장이 내 단골이었다.
동양극장은 내 인생의 좌표를 정해 주다시피 한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본 곳. ‘쾌걸 조로’와 ‘7인의 신부’도 여기서 봤다. 성남극장에서는 ‘제17 포로수용소’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봤고 명동극장에서는 ‘뜨거운 것이 좋아’와 ‘태양은 뜨거워’ 및 ‘초연’과 내가 좋아하던 수전 헤이워드가 나온 신파극 ‘백 스트릿’을 봤다.
이들 극장 중 내가 제일 자주 간 곳이 경남극장. 여기서 고1 때 앨란 래드가 주연한 웨스턴 ‘대혈산’을 보고 나오다가 단속원에게 걸려 2주 정학을 받았다. 그러나 난 정학기간에도 회개하지 않고 마치 벌을 명예의 배지처럼 착용하고 열심히 극장엘 갔다. ‘노인과 바다’와 ‘피서지에서 생긴 일’과 ‘기관총 켈리’와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및 ‘십계’도 여기서 봤다.
이 네 극장 외에도 싸구려 극장들인 계림, 마포, 우미관, 광무극장 그리고 화신백화점 꼭대기에 있던 화신극장 등 서울바닥을 헤집고 다니면서 안 가본 극장이 없다. 화신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이미 다른 극장에서 하도 많이 돌려 화면에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옛날 극장 이름을 생각하면 극장마다 대뜸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국도극장은 어머니와 같이 본 ‘쿼바디스’, 을지극장은 ‘파계’, 명보극장은 존 웨인이 징기스칸으로 나온 ‘정복자’, 국제극장은 마리오 란자가 노래 부르는 ‘세레나데’, 중앙극장은 역시 존 웨인이 나온 ‘리오 브라보’, 수도극장은 이탈리아의 육체파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나온 ‘외인부대’, 아카데미는 루이 말르 감독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서대문극장은 장-폴 벨몽도가 나온 ‘네 멋대로 해라’. 
단성사의 폐관은 급속히 변화하는 영화산업 구조 탓이라고 하겠다. 단독관이던 단성사도 시류에 따라 멀티플렉스로 개조했으나 식당가와 샤핑가까지 복합 운영하는 3, 4개의 대기업 유통망으로 재편된 배급시장 구조에 밀려 부도를 내면서 폐관했다는 소식이다. 그런 상황은 미국도 마찬가지로 LA를 비롯한 대도시의 단독 상영관들도 모두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기사를 쓰려고 구글을 들춰 찾아낸 사진을 보니 상영 중인 영화가 엘비스 프레슬리가 백인-인디언 혼혈아로 나온 웨스턴 ‘평원아’(Flaming Star·1960)이고 그 위에 차기 상영작인 말론 브랜도의 유일한 감독 작품이자 주연도 겸한 ‘애꾸눈 잭크’(One-Eyed Jacks·1961)와 프랑스배우 장 마레가 나오는 칼싸움 영화 ‘기사 푸라카스’(Le Capitaine Pracasse·1961)의 간판이 보인다. (사진)  
참 옛날이다. 단성사의 폐관을 보면서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말이 생각난다. 마치 ‘황혼열차’를 탄 기분으로 쓸쓸하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3월 16일 월요일

신데렐라 (Cinderella)


신데렐라와 왕자가 무도회에서 월츠를 추고 있다.

현실은 잠시 잊고… 동화 속 거닐어요


살아 있는 동화의 꿈나라에서 노니다 나온 듯이 황홀하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대가로 영화와 연극의 배우이자 감독인 케네스 브라나가 연출했는데 마치 마술사가 경탄을 금치 못할 재주를 부린 것처럼 어지럽도록 다채롭다.
따스하고 매력적이고 로맨틱하며 또 화려하고 우아하며 위트와 유머와 함께 삶의 예지도 가득한데 브라나는 전통적인 옛 동화에 약간 현대적 색채를 가미해 요즘 아이들이 보기 좋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른들도 보고 충분히 즐길 만한 생동감 넘치고 알록달록하기 짝이 없는 잘 생긴 작품이다.
두 남녀 주인공의 화학작용도 좋고 의상과 세트와 촬영과 풍성한 음악 그리고 특수효과도 모두 최고급인데 특히 오스카상 수상자인 단테 페레티가 만든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는 궁정을 비롯한 세트가 눈부시고 신데렐라가 입은 하늘색 푸른 드레스가 곱기도 하다.
1950년에 디즈니가 만든 만화영화로 잘 알려진 신데렐라 얘기는 이번에 신데렐라를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낙천적이며 독립심 강한 여자로 묘사해 현대 여성답게 재생시켰다. 그러나 그런 현대적 터치는 얘기의 고전적 감각에 거슬린다기보다 서로가 잘 섞여들고 있다.
엘라(엘로이즈 웹)가 열 살 때 어머니(헤일리 애트웰)가 죽고 딸과 함께 혼자 살던 여행하는 상인인 엘라의 인자한 아버지(벤 채플린)가 아내 사후 몇 년이 지나 촌스런 두 딸 드리셀라(소피 맥쉐라)와 아나스타시아(할러데이 그레인저)를 둔 허영에 들뜬 레이디 트레메인(케이트 블랜쳇)을 아내로 맞아 데려온다.
얼마 안 있어 엘라의 아버지는 해외에서 사망한다. 이제 집주인이 된 트레메인과 그의 두 딸은 엘라를 신데렐라라고 부르면서 부엌데기처럼 부려 먹는다. 그리고 신데렐라를 다락방으로 쫓아낸다. 그러나 신데렐라는 이런 학대 속에서도 4마리의 쥐를 친구로 위로 받으면서 열심히 산다.
신데렐라(릴리 제임스)는 어느 날 말을 타고 숲 속으로 갔다가 사냥 나온 왕자(리처드 매든)를 만나고 둘은 서로에게 첫 눈에 반한다. 물론 신데렐라는 왕자의 정체를 모른다. 병약한 선군인 아버지(데렉 자코비)가 사망하기 전에 결혼을 해야 할 처지인 왕자는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무도회를 열기로 한다. 왕자는 민주적이어서 전 세계의 공주들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의 모든 평민들의 딸도 무도회에 참석하도록 발표한다.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왕자의 정략결혼을 도모하는 대공(스텔란 스카스가드).
트레메인이 신데렐라는 버려둔 채 두 딸을 데리고 무도회에 가자 착한 신데렐라를 불쌍하게 여긴 요정대모(헬레나 본햄 카터가 재미있다)가 호박과 도마뱀과 개구리와 거위에게 마술을 부려 마차와 말과 마부 등으로 만든다. 그리고 신데렐라에게 푸른색 드레스를 입히고 유리구두를 신켜 마차에 태워 왕궁으로 달려 보낸다. 자정을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가 끝날 때 까지 귀가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재회한 왕자와 신데렐라는 중인환시리에 월츠를 추면서 사랑에 빠져 드는데 아뿔싸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그 다음은 다 아는 얘기. 잘 생긴 선남선녀 릴리 제임스와 리처드 매든의 콤비가 보기 좋고 케이트 블랜쳇이 못된 계모 역을 품위를 지닌 채 사악하게 해낸다. PG. Disney.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히로시마, 내 사랑 (Hiroshima, Mon Amour)


헤어져야 할 연인 남자와 여자는 히로시마의 밤을 아쉬워 한다.

원폭의 도시, 암울하고 강렬한 사랑의 불꽃  


핵폭탄의 파괴성과 적의 그리고 그것의 암울하고 긴 잔영을 사랑의 수용 불가능성과 상징적으로 연결시킨 프랑스의 명장 알랭 르네 감독의 사무치게 아름다고 사색적이며 또 비감한 1959년 작 흑백 러브스토리다. 시랑의 망각성과 기억의 아픔을 히로시마의 고통과 원폭투하 불과 14년 만에 서서히 잊혀져가는 기억의 상실과 접목시킨 사랑의 얘기이자 반전영화다.
히로시마라는 범세계적 장소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하루 남짓한 이야기는 호텔 히로시마 118호실에서 두 남녀가 벗은 상반신을 꼭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어 나신 위에 내려앉은 핵진이 서서히 정사로 촉진된 땀방울로 변하는데 둘의 이런 모습은 핵을 맞아 응고된 두 연인을 상기시킨다.
남자(영화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없다)는 단조로운 톤으로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 것도 보지 않았소”라는 독백을 계속한다. 여자(에마뉘엘 리바-‘아무르’)는 히로시마에 평화에 관한 영화를 찍으러 온 파리지엔 배우요 남자(에이지 오카다)는 건축가. 
내일이면 떠나야 할 여자는 2차 대전 때 고향 느베르에서 겪은 독일 병사와의 쓰라린 첫 사랑 때문에 또 다른 살육의 장소인 히로시마에서 또 다른 외국인인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남자와 여자는 밤새도록 인적이 끊긴 바와 식당의 네온만이 명멸하는 거리를 마치 이별을 연장시키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천천히 걷는다. 둘의 보조에 맞춰 따라가는 카메라의 걸음과 흑백촬영이 검소하면서도 고혹적이다.
두 사람은 다 기혼자이나 르네는 이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여자는 “남겠다”고까지 말하나 그것은 단지 염원일 뿐이다. 둘이 마지막으로 들른 카페는 ‘카사블랑카’. 이어 호텔로 돌아온 여자를 뒤쫓아 남자가 방문을 두드린다. “올 수밖에 없었다”는 남자는 여자의 두 팔을 아프도록 붙잡고 “내 이름은 히로시마, 당신 이름은 느베르”라면서 영화는 사랑의 교착상태로 끝난다. 
이 영화와 함께 르네의 1961년 작으로 상징이 가득한 흑백 예술영화 ‘작년 마리앙바드에서’(Last Year at Marienbad)가 15일 하오 7시30분 이집션 극장(6712 Hollywood Blvd.)에서 동시 상영된다. (323)466-3456.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말러의 ‘비극적’ 교향곡 제6번




프랑스 영화 ‘라스트 해머 블로우’(The Last Hammer Blow)는 ‘비극적’이라는 부제가 붙은 말러의 방대한 교향곡 제6번이 플롯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검소하고 온화한 드라마다. 10년 전에 자기를 버리고 떠난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아버지 새뮤엘과 13세난 아들 빅터와의 관계의 연결을 다룬 소년의 성장기로 이 관계 연결의 촉매구실을 하는 것이 이 교향곡이다.
암을 앓는 어머니를 정성껏 돌보는 빅터가 사는 몽펠리에에서 이 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해 오래간만에 도시를 찾아온 새뮤엘은 자기를 만나러온 생면부지이다시피 한 빅터에게 교향곡 제6번의 CD를 주면서 들으면서 느낌을 적으라고 이른다.
며칠 후 새뮤엘이 빅터에게 소감을 묻자 빅터는 대뜸 “길다”라고 대답한다. 그래 맞다. 교향곡 제6번은 참으로 길다. 7일 디즈니홀에서 구스타보 두다멜의 지휘로 LA필이 연주한 제6번은 휴게시간 없이 장장 75분이 계속됐다.  
새뮤엘은 리허설을 하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이 음악이 비극적이라고 해서 훌쩍훌쩍 우는 것은 아니다”면서 “스트레스가 큰 음악”이라고 교향곡의 성질을 설명한다. 그래 맞다, 영육을 스트레스로 질끈 동여매는 음악이다. 그런 스트레스 끝에 느끼는 융성한 기쁨은 가히 마조키스틱하다고 해도 좋겠다. 이어 새뮤엘은 플룻과 클라리넷과 오보 연주자들에게 보다 부드럽고 물 흐르듯 연주하라고 지시한다.
고전과 현대가 혼합된 제6번은 세기말 병 환자요 염세주의자이며 운명론자인 말러의 교향곡 중 가장 어둡고 비극적이며 또 염세적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 음악이 그가 매우 행복했던 때 작곡됐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알마와 결혼해 첫 딸 마리아를 낳고 자신의 음악도 점점 많이 연주되고 또 자신이 감독으로 있는 비엔나 오페라의 공연도 내리 히트를 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말러가 1906년 5월 이 곡을 독일의 에센에서 초연한지 1년 안에 4세난 마리아가 죽고 알마의 부정이 밝혀지고 비엔나 오페라와도 결별하는가 하면 자신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말러가 이 음악에서 자기 미래를 예견했다고들 한다.
말러의 이 같은 운명론은 이 교향곡의 장렬한 제4악장 후반부에 사용되는 떡메 같은 커다란 해머의 두 차례의 강타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말러는 마치 타격에 의해 큰 나무가 쓰러지듯 영웅의 종말을 상상했다고 하는데 따라서 교향곡 제6번은 말러의 ‘운명’교향곡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해머 타격은 원래 세 차례였는데 후에 말러가 둘로 고쳤다. 이에 대해 영화의 빅터는 “말러가 세 번째 타격을 지운 것은 자기 운명을 피하고 또 무시하겠다는 의도를 보인 것”이라고 성숙한 해설을 한다. 
제4악장과 함께 군대의 행진곡 풍으로 시작되는 제1악장을 지휘하는 두다멜은 다소 놀랍게도 사납도록 강건하고 우람찼다. 타악기와 금관악기가 천둥번개를 치고 하늘의 승전가를 연주하듯 눈부신데 나는 말러의 제4악장의 금관악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느낌을 겪곤 한다.
나는 말러의 음악을 생각하면 헤세의 글이 떠오르곤 한다. 둘 다 자연과 산책을 사랑했는데 둘 다 자연이 자신들의 작품에 큰 영감을 제공했다. 교향곡 제6번의 서정미 그윽한 제2악장은 헤세의 ‘페터 카멘진트’를 연상시키는 말러의 풍경화다. 
말러는 교향곡 제6번을 1903년과 1904년 뜨거운 여름 오스트리아의 휴양지 마이에르니크의 뵈르터제 호숫가의 오두막(사진)에서 작곡했는데 제2 악장에는그가 즐긴 숲속 산책과 함께 오두막 창으로 내다본 자연의 풍광에서 얻었을 악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뭉게구름이 함박꽃 피듯 피어오르고 산새가 지저귀며 푸른 숲이 숱 많은 머리를 풀어헤치면서 바람이 불면 호수가 잔잔한 물결을 규칙적으로 일으키고 멀리서는 워낭 소리가 딸랑딸랑하고 반향을 불러온다. 
꿀빛 부드러움과 피곤한 영혼을 위무하는 듯한 멜로디와 하모니가 고즈넉이 아름답다. 물감 대신 음표로 그린 평화로운 풍경화다. 두다멜은 마치 연인을 끌어안고 애무하듯이 정성들여 아늑하게 지휘했는데 음악에 취한 듯이 보였다. 빈 틈 없는 지휘다.
그러나 교향곡의 뿌리는 제4악장에 있다고 하겠다. 오케스트라 뒷좌석에 앉은 청중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지켜본 떡메가 마치 천둥번개의 신 토르가 망치 내려치듯 하는 소리를 내는 마지막 악장은 첩첩산중의 압력으로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거대한 무게와도 같다. 감정이 채 다 감당 못할 정도로 크고 장엄하다. 말러의 운명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운명을 통고하는 결연하고 치열한 종말이다. 절정에 이르렀다 아래로 내리 곤두박질치듯 허무하다. 
내 몸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오케스트라 쪽으로 몸을 내밀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음악이다. 이상하게 두다멜의 팬이 못된 나로서는 장쾌하고 맵시 있는 그의 지휘를 오래간만에 즐겼다. 그리고 음악은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영화 속 새뮤엘의 말이 떠올랐다. 말러의 제6번 교향곡은 이달 말 LA 필의 아주 순회공연 때 한국에서도 연주된다. *‘주말 산책’은 기자의 블로그 <hjpark1230.blogspot.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3월 9일 월요일

‘그레이의 50가지 색조’ 다코타 존슨




“결국엔 사랑 이야기란 점에 반해서 출연”


현재 빅 히트 중에 있는 소프트 포르노‘그레이의 50가지 색조’(50 Shades of Grey)에서 변태적 성행위를 즐기는 젊은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제이미 도난)를 사랑하는 여대생 아나스타시아 스틸로 나오는 다코타 존슨(25)과의 인터뷰가 최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이 영화는 여류 E. L. 제임스(필명)가 쓴 3부작 베스트셀러의 첫 작품이 원작인데 지극히 지루하고 선정적이지도 못한 무미건조한 영화로 존슨과 도난의 화학작용도 미적지근하다. 존슨은 모두 배우인 단 존슨과 멜라니 그리피스의 딸이며 그의 외조모는 히치콕의‘새들’과‘마니’에 나온 금발 미녀 티피 헤드렌이다.‘미스 골든 글로브’인 존슨은 이 영화로 첫 메이저 영화사의 작품에 주연을 맡았다. 긴 갈색 머리에 검소한 차림을 한 존슨은 아직도 소녀 같았다. 인터뷰 경험이 많지 않은 탓인지 경직된 자세로 머뭇거리면서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했는데 솔직했다. 가끔 미소로 자신의 어색함과 수줍음을 가렸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긴장이 다소 풀린 듯 웃기도 했다.           

-당신은 영화에서 과감히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가 여자의 나신인데 당신은 나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체에 대해 두려워한다면 불편해지게 마련이다. 난 여자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수치감을 느끼지 않고 보다 편안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왜 이 역을 하기로 결심했는가.
“너무나 잘 알려진 얘기인데다가 얄궂은 섹스가 판을 치는 내용이어서 다소 주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용이 사랑의 이야기라는 점에 반했다.”

-부모로부터 자문이라도 받았는가.
“부모의 직업을 답습하는 자식들이라면 당연히 그 껍질을 벗어나려고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난 내 자신을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이라고 취급 받기를 원치 않았다. 역에 대해선 어머니로부터 자문을 받지 않았다. 어머니도 책을 읽어 내용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출연문제를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다뤘다. 어머니와는 그런 일 말고도 상의할 것이 따로 있다.”

-노골적인 섹스신을 찍을 때 기분이 어땠는가.
“제이미와 나 사이에 먼저 신뢰와 이해를 쌓기 위해 섹스신은 촬영 마지막에 찍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그 장면에 대해 준비를 했어도 별 도움이 못됐고 촬영할 때 가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몹시 노골적이요 또 감정적이어서 취약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내 역을 바닥에서부터 철저히 이해해야 했다.”

-감독 샘 테일러-존슨은 당신에게 그 장면에 대해 어떤 준비를 시켰는가.
“우린 그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난 노골적인 성애장면의 모든 면에 대해 정확히 알고자 했다. 카메라 각도는 어떤 것이며 촬영팀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비롯해 모든 것을 안 뒤 촬영에 임했다.”

-영화제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크리스천(오른쪽)과 아나스타시아는 변태적 성애를 즐긴다.
“이 기자회견이다(웃음). 감정적으로 강렬히 도전적인 마지막 부분이다.”

-아나스타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 가치관이 투철하고 자신만만한 여자다. 여자에게 있어 처녀성을 잃는다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일이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시아는 힘과 자존을 지켰다. 난 그 점을 존경했고 그것의 한 부분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여성들이 아나스타시아와 같이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역을 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무엇인가.
“난 처음에 나체와 섹스신을 실제로 할 때가 가장 두렵고 힘들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것을 하기 전이 훨씬 더 두렵고 힘들었다. 막상 연기에 들어가니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역에 몰두할 수가 있어 보다 쉬웠다.”

-역을 한 뒤로 당신에게 뭔가 달라진 점이라도 있는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가 보다 편해졌다. 그리고 과거보다 자기 가치를 더 많이 얻게 됐다. 또 아나스타시아로부터 힘도 얻었다.”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매주 바뀌는 것 같다.”

-영화에 대한 반응을 어떻게 용감히 받아들일 것인가.
“내 마음 어딘가에 용기가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이 영화를 좋아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싫어할 사람들도 있을 텐데 난 그 모두를 순순히 수용하겠다”

-역을 맡고 나서 어떻게 감정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가 있었는가.
“영화 속의 나는 실제의 내가 아니고 또 그 감정도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감정에 다다르기 위해 매우 취약하고 또 야생적인 곳에 찾아가야 했다. 몹시 지치고 감정적으로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작중인물을 집에까지 데려가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스크린에서 자신을 본 소감은.
“아주 옛날 일 같기만 하다.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영화 출연에 대한 당신 부모의 반응은 어땠는가.
“출연이 확정되기 전에는 부모에게 그에 대해 말을 안 했다. 내가 역을 맡았다는 것을 안 뒤로 할머니와 어머니는 나를 전적으로 후원했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직업이요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 영화를 안 볼 것이며 나도 그러기를 원한다.”

-당신은 어머니 쪽을 닮았는가 아니면 아버지를 닮았는가.
“나는 할머니의 힘과 우아함을 다소 지녔다고 생각하고 싶다. 내 할머니처럼 우아한 여자도 보기 드물다. 그리고 내 어머니는 영리하고 우습다. 나도 어느 정도 그렇다. 그러나 난 부모 양쪽을 함께 닮은 편이다.”

-나체와 노골적인 섹스가 있는 영화에 나온 뒤로 자신의 몸에 대해 보다 더 편해졌는가.
“난 언제나 내 몸에 대해 상당히 편안하게 느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장면들은 철저히 기술적인 것이어서 난 내 육체의 이미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이미와 섹스신 연습을 했는가.
“훈련과 함께 연습을 했다.

-크리스천과 같은 남자가 당신의 꿈의 남자인가.
“아니다. 내 꿈의 남자는 우습고 나이스한 남자다.”

-부모가 모두 배우여서 당연히 배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속에서 자라 나도 배우가 되리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영화의 원전인 책을 읽었을 때의 소감은.
“읽어 나가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쏜살같이 읽었다. 내가 반했던 점은 내용이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괴상하고 흥미 있는 동화와도 같다는 것이다. 사랑의 얘기라는 점에 사로 잡혔었다. 제1권은 이미 읽었고 나머지 두 편은 내가 할 일을 정확히 알기 위해 오디션 과정에서 읽었다.”

-애인이 있는가.
“없다. 애인이 있다면 이 영화에 대해 나와 자유롭게 대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남자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존경할 수 있다.”

-영화에 나오기 전에 에로틱한 작품에 흥미가 있었는가.
“난 에로틱한 책을 많이 읽었다. 난 특히 에로틱한 그림에 관심이 큰데 그 중에서도 에곤 쉴레와 그의 여자의 육체에 대한 개념을 좋아한다.”

-당신의 아버지는 남자관계에 대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으며 당신이 애인을 집에 데려왔을 때 반응이 어땠는가.
“관계에 대해 많이 가르쳐주었다. 언제나 나를 존경하며 또 늘 사랑 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남자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늘 내가 애인을 집에 데려오면 달가워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으나 진짜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왕이면 스포츠를 좋아하는 애인을 택하기를 바랐다.”                   

-배우가 되기로 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
“17세 때 몰리에르의 ‘건성으로 앓는 남자’를 읽고 극중의 계모 역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그리고 난 어렸을 때 매우 격한 감정적 과정을 거치면서 옷도 자주 바꿔 입었다. 그래서 영화에 나와 나 아닌 다른 사람 노릇을 하면 그것이 진짜 내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나체에 대해 편안하게 느끼게 만드는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편안하게 느끼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내 부모가 내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The Second Best Exotic Marigold Hotel


쿠퍼 부인과 가이(리처드 기어)가 로맨스 무드에 젖어 있다.

이국적 풍광 속 결말 뻔한 ‘실버 로맨스’


2011년에 나와 히트한 은퇴한 영국 남녀 노인들의 인도 자이푸르에서의 삶과 티격대격과 로맨스를 그린 코미디 드라마의 속편인데 나태하고 당분이 너무 많은 소프 오페라다. 전편에 나온 영국의 연기파들이 다시 나오는데 이번에는 국제적으로 돈을 벌 목적으로 미국 배우 리처드 기어를 영국 노인들 사이에 편입시켰다.
‘물 떠난 물고기’ 얘기인 전편은 감상적이요 플롯도 크게 놀랄 것 없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었는데 속편은 같은 인물들 모아놓고 아이디어가 달려 옛 애기를 반복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가 궁하다 보니 공연히 노인네들의 사랑의 줄다리기를 억지로 엮어 뻔한 결말에 장애물을 놓아 서술이 덜컹거린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내로라하는 고참 배우들과 자이푸르의 풍족과 가난이 범벅을 이룬 이국적이요 다양한 풍경을 보고 즐길 만은 하지만 영화 너무 사탕발림 식인데다가 모든 것이 다 말끔하고 행복하게 마무리 지어지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처리 때문에 노인용 동화를 보는 것 같다. 
전편에서 구닥다리 호텔을 개수해 거주를 겸한 호텔로 만들어 크게 성공한 매리골드 호텔에는 전편에서 남은 여섯 명의 영국인 노인 거주자들이 그대로 살고 있다. 주인은 아름다운 미망인 어머니 쿠퍼 부인(릴리엣 더비)과 함께 호텔을 운영하는 활기찬 청년 소니(데브 파텔이 호들갑을 떤다). 소니가 호텔 직원으로 고용한 영국인 할머니는 산성 혀를 지닌 뮤리엘 도넬리(매기 스미스). 
파텔은 호텔을 프랜차이즈로 만들려고 샌디에고에 와서 투자회사 사장 타이 벌리(데이빗 스트레테언)에게 융자를 요구한다. 자이푸르로 돌아온 소니는 벌리가 보낼 신분을 숨긴 호텔 평가자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이 때 달랑 가방 하나를 들고 나타난 남자가 미국인 가이 체임버스(리처드 기어). 그와 같은 시간에 영국인 여자 라비니아 비치(탐신 그레이그)가 어머니를 위해 호텔을 둘러보러 왔다며 투숙한다.
한편 소니는 호텔 확장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결혼식을 앞둔 약혼녀 수나이나(티나 데사이)를 소홀히 하면서도 수나이나가 자기 오빠의 번지르르한 친구 쿠샬(샤자드 라티프)과 시간을 보내자 질투를 부린다.
노인들이라고 연애 못하라는 법 있느냐는 듯이 두 쌍의 노인들의 애정문제가 서브플롯으로 나선다. 전편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표시한 이블린(주디 덴치)과 더글러스(빌 나이)는 공연히 아직도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고 부부인 노만(로널드 피컵)과 캐롤(다이애나 하드캐슬)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바람을 피워댄다. 그리고 노인 섹스덩어리인 매지(셀리아 임리)는 두 명의 동네 부자로부터 구애를 받는다. 
여기에 가이가 쿠퍼 부인과 로맨스를 엮으면서 노인들의 사랑에 반주를 넣는데 둘의 로맨스는 아주 어색하고 기어도 내가 왜 이 영화에 나왔지 하며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다. 끝은 요란하고 화려한 춤이 있는 소니의 결혼식으로 장식된다. 뒤는 빈민촌인데 겉만 다색으로 페인트칠한 건물과도 같은 영화다. 존 매든 감독. PG. Fox Searchlight.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채피 (Chappie)


좋은 로봇 채피(오른쪽)가 나쁜 로봇을 공격하고 있다.

“평화를 지켜라” 착한 로봇의 분투


액션이 요란한 로봇과 인공지능의 얘기로 공상과학 영화들인 ‘디스트릭 9’과 ‘엘리지움’을 감독한 남아공의 닐 블롬캠프가 연출하고 각본을 썼다. 무대는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로 블롬캠프는 자기 영화에서 늘 사회경제적 문제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보통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 영화는 초능력을 지닌 사악한 로봇이 인간세상을 풍비박산 내기가 일수인데 이번에는 채피라는 이름을 지닌 로봇이 범죄가 판을 치고 싸움질을 하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려고 애를 쓴다. 못난 인간을 계도하는 로봇인데 괜히 하는 소리다.  
휴 잭맨과 시고니 위버 같은 빅스타가 나오고 요즘 매우 분주한 인도 청년 데브 파텔(위 영화 참조)이 나오긴 하지만 영화는 평범한 공상과학 액션영화의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과거   의 여러 로봇영화들을 얘기를 짬뽕한 것처럼 신선미가 부족한데 마치 비디오게임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프로덕트 플레이스먼트(상품을 장면에 내놓는 것)도 눈에 거슬린다. 컴퓨터와 액션 좋아하는 젊은 층을 위한 영화다.
멀지 않은 미래. 요하네스버그는 범죄가 판을 치는 험악한 도시로 전락했고 치안을 담당하는 것은 로봇들. 경찰서장 미셸(시고니 위버)이 관리하는 로봇 조종실의 프로그래머 디온(데브 파텔)은 로봇에 인공지능 칩을 넣어 사람과 또 같이 생각하고 느끼도록 하는 연구에 몰두한다.
이런 디온에 적수로 등장하는 사람이 역시 같은 경찰서에서 일하는 엔지니어 빈센트 모어(휴 잭맨). 그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 지시대로 행동하는 거대한 로봇 무스를 고안, 디온에 한 발 앞서 가려고 한다. 둘이 치열한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일단 디온이 먼저 인공지능 칩을 개발해 로봇에 집어넣고 이를 채피라 명명한다.
채피(‘디스트릭 9’의 주연 샬토 코플리의 음성)의 인공지능은 아직 어린 아이의 수준이어서 아기 같이 군다. 이런 채피를 남녀 3인조 갱이 훔쳐다 자기들 졸개를 만드는 과정이 우습고 재미있다. 닌자와 요-란디 및 양카라는 이름을 지닌 3인조는 아이 같은 지능의 채피에게 도둑질하는 방법과 총 쏘는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범죄로봇으로 교육시킨다. 이를 막는 것이 채피의 창조자인 디온.
한편 빈센트는 마치 ‘로보캅’처럼 자기가 기계 안에 들어가 자의대로 조종할 수 있는 무스를 동원해 채피를 처치하려고 나선다. 그리고 보통 체격의 채피와 덩지가 산 만한 무스 간에 생사결단의 격투가 벌어진다. 여기에 채피를 위험분자로 간주한 당국마저 채피 처리에 나서면서 채피의 위험은 배가한다.
고철처럼 덜렁거리는 고장난 장난감 같은 영화로 나오는 인물들이 한 결 같이 1차원적인데다가 플롯이 씨도 안 먹히는 소리를 하고 있어 관심이 안 간다. 연기도 볼 것 없다. 
PG-13. Sony.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다운턴 애비’



PBS-TV에서 매주 일요일 오후 9시에 방영하는 영국 드라마 ‘다운턴 애비’(Downton Abbey)는 TV 드라마 사상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시청자들이 관람하는 의상 드라마다. 영국 TV의 자랑거리인 ‘매스터피스 클래식’의 한 작품인 이 드라마는 영화 ‘고스포드 팍’으로 오스카 각본상을 탄 줄리안 펠로즈의 역작으로 한 번 보기 시작하면 TV에서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나도 이 드라마의 중독자로 얼마 전 본 극중 주인공 백작 로버트 크롤리의 대저택 다운턴 애비에서 그의 온 가족과 하인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로 말미를 장식한 시즌 5가 끝나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콧등이 시큰해지는 피날레였다. 현재 시즌 6를 촬영 중이다.
역시 ‘매스터피스’ 시리즈의 하나인 ‘업스테어즈, 다운스테어즈’를 연상시키는 ‘다운턴 애비’는 1910년에 즉위한 국왕 조지 5세의 통치기간에 요크셔 카운티의 다운턴 애비에서 벌어지는 로드 그랜담(로버트 크롤리를 이렇게 부른다)의 가족과 친척과 친지와 하인들의 얘기로 시즌 5는 영국 사회가 서서히 현대화하면서 귀족계급이 신분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1924년에 끝났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왔다 사라지고 또 새 인물이 등장하면서 드라마가 엮어지는데 주요 인물만 해도 수십명에 이른다. 이들이 각자 사연과 비밀이 있고 또 사랑하고 이별하니 그 사정이 얼마나 구구각색이겠는가.
다운턴 애비의 주인은 권위 있고 인자한 로드 그랜담(휴 본느빌)과 그의 돈 많은 현모양처 미국인 아내 레이디 코라(엘리자베스 맥거번). 과거 한 때 돈 많은 미국 여인들이 거액의 지참금을 싸들고 와 영국의 돈이 궁한 귀족 남자들과 결혼했는데 코라도 그 중 하나다.
이들 부부의 장녀로 차가운 젊은 미망인 메리(미셸 도커리)를 비롯한 딸들과(로드 그랜담의 사촌남자 상속자는 타이태닉호의 희생자다) 친척과 친지들이 위층 사람들이요, 우두머리 하인인 미스터 카슨(짐 카터)과 우두머리 하녀 미시즈 휴즈(필리스 로간)를 비롯한 하녀와 발레와 후트맨과 쿡들이 아래층 사람들.
그런데 하인층에서도 계급의식이 위층만큼이나 철저해 미스터 카슨이 식당엘 들어오면 모두들 기립한다. 어깨에 힘 들어간 위층 사람들의 얘기도 재미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흥미 있는 것이 아래층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얘기다.
위층 사람들 중에(다운턴 애비에서 떨어진 곳에 살긴 하지만) 톡톡 튀는 사람이 로드 그랜담의 어머니인 백작 미망인 바이올렛(매기 스미스-시즌 6로 드라마에서 퇴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앙시앙 레짐’의 전형적인 인물인 이 냉소적인 독설가가 “주말, 주말이 뭐야”라며 평민들을 깔보는 발언을 할 때면 웃으면서도 심기가 뒤틀린다. 놀고 먹는 그에겐 매일이 주말이니까 나온 말이다.
아래층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관심 있고 흥미롭게 보는 사람은 미스터 카슨이다. 그는 하인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으로 로드 그랜담보다 더 권위적이요 구식이다. 그래서 얼마 전 ‘다운턴 애비’의 세트 방문차 런던에 갔을 때도 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미스터 카슨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내가 “카슨씨, 당신은 로드 그랜담보다 더 보수적이요 귀족적이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그는 “아무렴 그렇지요”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큰 코와 검고 굵은 눈썹에 묵직한 마스크를  한 그의 육중한 저음이 오페라에 나왔으면 딱 맞겠는데 그래서 내가 “카슨씨, 오페라 출연 제의 받은 적 있나요”하고 물었더니 “나 음치입니다”라며 껄껄대고 웃었다.
2월의 런던답게 런던서 차로 1시간 반쯤 떨어진 다운턴 애비의 실제 모델인 촬영장소 하이클레어 캐슬에 찾아간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뿌연 연무 속에 저 멀리 다운턴 애비(사진)가 보인다. 아는 집이나 방문하듯 반가웠다. 이 캐슬은 1749년에 지은 것으로 현 주인 레이디 카나본이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의 우리들을 반갑게 맞았다.
로드 그랜담과 레이디 메리가 도서실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저택 안팎을 둘러 본(무지무지하게 넓고 크다) 뒤 출연진들과의 기자회견에 이어 점심을 그들과 함께 했다. 줄리안 펠로즈와 매기 스미스를 비롯해 자리에 함께한 배우들이 초면인데도 TV로 자주 봐 구면 같다. 식사 장소에는 귀족들이 사냥할 때 입는 빨간 코트와 검은 모자 등 드라마의 의상이 진열돼 있어 나도 코트 입고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었는데 후에 보니 아주 어색하다. 귀족이 될 팔자가 아닌가 보다.
런던에 돌아와 상류층 프라이빗 클럽인 새빌 클럽에서 미스터 카슨의 “레이디즈 앤 젠틀멘 디너 이즈 서브드”라는 통보에 따라 로드 그랜담과 레이디 코라 등 극중 인물들과 함께 포도주를 겸한 저녁을 들면서 훈훈한 기운 속에 얘기를 나눴다. 제일 궁금한 것이 시리즈가 언제 끝날까 하는 점. 그러나 이에 대해 펠로즈를 비롯해 출연진 모두가 “그 건 나도 몰라요”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긴 미리 알면 재미가 없긴 하지. 시즌 6가 학수고대 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3월 3일 화요일

‘버드맨’마이클 키튼




“내게‘버드맨’은 큰 축복… 세번이나 다시 봐”

‘배트맨’성공이 짐 된 적 없어, 그냥 꾸준히 일할뿐
 진취적 사고·다양한 인종의 캘리포니아 너무 좋아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 및 촬영상을 받은‘버드맨’(Birdman)에 주연한 마이클 키튼(63)과의 인터뷰가 뉴욕의 팰리스 호텔에서 있었다. 키튼은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상은‘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스티븐 호킹 박사로 나온 영국의 젊은 배우 에디 레드메인이 탔다.‘버드맨’은 한물간 할리웃 스타 리간이 브로드웨이 무대에서의 재기를 시도하는 블랙 코미디다. 영화에서 열연을 한 키튼은 지난 1월 기자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주는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코미디/뮤지컬 부문)을 받았다.  간편한 차림에 머리를 짧게 깎은 대머리인 키튼은 나이보다 젊어 보였는데 처음에는 긴장한 태도로 질문에 대답했으나 시간이 가면서 긴장을 풀고“헤 헤”하며 웃고 농담도 섞어가면서 매우 진지하게 대답했다. 눈초리가 강렬하고 탄탄한 에너지가 넘쳐흘렀는데 다소 냉소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에는 대사가 많고 또 말하는 속도도 빠른데 사전에 충분한 리허설을 했는가.
“알레한드로의 뜻대로 만들기 위해선 리허설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한 달간 리허설을 했다. 마치 실제 연기하듯이 모든 배우가 참가해 단어 하나도 빼지 않고 또 동작도 실연과 똑같이 했다.”

―당신은 히트작 ‘배트맨’으로 빅스타가 됐다가 그 후 활동이 뜸했는데 마치 그 상황이 이 영화와 비슷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버드맨’의 망령에 시달린 것처럼 당신도 ‘배트맨’의 망령에 시달렸는가.
“난 그런 망령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다. ‘배트맨’에 나온 것은 행운이었지만 이 영화에 나온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큰 행운이다. 이 영화는 그 누구도 만들어본 적이 없고 또 나도 해본 적이 없는 아주 독특한 영화다. 매우 하기 어려운 영화요 순수예술인데 나는 어려운 것과 순수예술을 좋아한다.”

―영화는 명성과 자만에 관한 얘기인데 당신은 명성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았나.
“명성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야 된다. 난 명성이 주는 부담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 젊은 여배우들이 명성의 압박에 시달리는 것 같다. 그들은 잡지 표지를 장식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사람들이 그들에게 집착하고 따라다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와 반면에 난 아주 따분한 삶을 살고 있다.”

―리간은 영화배우인데 왜 연극으로 재기를 시도하는가.
리간(마이클 키튼)의 뒤를 그의 망령과도 같은 버드맨이 따르고 있다.
“일반인이나 배우들 중 진짜 연기는 무대 위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연극은 철저한 훈련과 나름대로의 엄격한 규율이 있어서 모두가 다 쉽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리간이 무대를 선택한 까닭에도 그런 이유가 조금은 있다. 그는 자신의 불안한 처지를 무대를 통해 보상받고자 한 것이다. ‘제발 날 사랑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팬티바람으로 타임스퀘어를 걸은 기분은 어땠는지.
“내가 진짜 돈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배우란 무언가를 저지르고자 하는 사람들이어서 어떤 일이라도 하게 된다. 아마 수영을 못하는 배우에게 영불해협을 수영해 건너라고 해도 할 것이다. 난 그 장면에 대해 너무 심각히 생각 안 하고 일상사 하듯이 했다.”

―감독은 영화를 의식의 흐름의 영화라고 했는데 당신은 영화를 찍을 때 어떤 의식이었는가.
“그에 관해 우리는 리허설과 함께 실연을 할 때도 계속해 얘기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난 내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으로 각본 속 인물의 마음상태에 어떻게 감정적으로 다다를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리간은 깊은 어둠에 빠졌다가 삽시간에 우스워지는가 하면 또 진지하다가 곧 이어 불안한 상태가 되는 역이어서 촬영 내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래서 때론 집에 와서도 그를 떠나지 못했다.”

―당신은 그동안 활동이 뜸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꼭 그렇지도 않다. 아무도 보진 않았으나 한 일들이 꽤 많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별로 신통치 못한 영화에 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당신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오랜 연예계 생활을 해왔는데 그 동안 영화산업이 어떻게 변화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그에 대해 말할 올바른 사람인 줄 모르겠다. 그러나 난 리간처럼 할리웃의 사사건건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내 본능을 믿는다.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매력을 느낀다. 나는 독창적이요 흥미 있고 또 흥분되는 것을 늘 찾고 있다. 난 적기에 적소에 있는 행운을 누렸는데 특히 ‘비틀주스’와 ‘배트맨’을 감독한 팀 버튼과 함께 일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팀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가다.”

―‘배트맨’의 성공 이후의 당신의 여정에 관해 말해 달라. 편했나 아니면 힘들었나.
“그것은 큰 결실로 난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다. 그로 인해 내가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될 것에 대해선 거부권을 행사할 수가 있게 됐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내가 ‘배트맨’으로 국제적으로 성공하는 축복을 받은 이후 더러 영화에 나오긴 했지만 활동이 뜸했던 것은 아내와 헤어진 뒤 혼자 어린 아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공되는 영화들이 엉터리가 많은 것도 또 다른 이유다. 나는 영화에 나오려고 찾아다니는 사람은 아니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또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리간처럼 자신의 과거 성공의 그림자를 등에 짊어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당신은 목장에서 사는 것으로 아는데.
“연중 일부분은 거기서 산다. 난 어렸을 때 펜실베니아주 서부의 시골에서 자라 우리 7남매가 모두 숲과 들을 뛰어다니면서 살았다. 변소도 집 밖에 있었다. 그래도 난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집이라며 좋아했다. 나는 그래서 방 안에 오래 있지 못한다. 늘 신체적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 그렇게 동부에서 자란 나는 늘 영화를 보면서 서부를 그리워했다. 언제나 서부에 가고 싶어서 20세 때 쯤에는 애리조나주의 인디언 거주지역에서 일도 했다. 그래서 시골에 사는 것은 나의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다. 내가 사는 목장은 작가와 화가와 사진작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끓여 마시고 이메일 보고 개와 산책을 하고 이웃과 할 일을 얘기하다 보면 어느 새 저녁이 된다.”

―LA에서의 삶과 목장에서의 삶을 어떻게 균형을 맞추는가.
“나는 목장 없이는 못 살지만 LA와 캘리포니아도 매우 좋아한다. 캘리포니아는 훌륭한 곳이다. 사람들이 이 곳을 비판하는 것은 질투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는 앞서 생각하는 곳으로 그 생각이 처음에는 미친 것처럼 여겨지다가도 결국은 세계가 그것을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또 이곳은 인종적으로도 온갖 인종이 모여 살아 아주 흥미 있다. 차로 5시간만  달리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 캘리포니아다.”

―이 영화에서처럼 왜 영화배우들이 연극 무대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다. 영화와 연극은 완전히 다른 근육을 지녔다. 연극의 이점은 오랜 리허설이다. 3~4주씩 연습하다 보면 극중 인물이 완전히 자기 것이 된다. 그리고 연극은 매일 같이 달리 연기할 수 있지만 영화는 단 한 번의 연기가 필름에 담겨지게 마련이다. 나는 대학 때 연극을 잠깐 한 뒤로는 별 경험이 없는데 아주 즐거웠다. 최근에 와서 나는 연극 대본을 많이 읽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할 것은 연극배우가 영화배우보다 반드시 나은 배우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연기가 격찬을 받고 있는데 기분이 어떤지. 이 영화가 당신 생애의 새로운 전기가 되리라고 생각하는가.
“정말로 기분이 좋다. 새 전기라는 면에서는 그럴 수도 또 아닐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나는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꾸준히 같은 일을 하는 스타일이다. 이 영화에 나오게 된 것은 정말로 축복이다. 난 벌써 영화를 세 번이나 봤는데 앞으로도 얼마를 더 볼지 모르겠다. 어떤 때는 영화에 너무 몰입해 내가 나온 것도 잊을 정도다.”

―이 영화 이후 당신에게 출연 제의가 쇄도할 것이 뻔한데 그것을 원하는가.
“난 일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에겐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난 지금 ‘스팟라이트’라는 영화에 출연 중이다. 보스턴 글로브가 폭로한 보스턴 가톨릭교구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에 관한 실화인데 각본과 감독(탐 맥카시)과 배우들이(마크 러팔로와 레이철 맥애담스) 다 좋다. 그러니 난 2연타 히트를 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흥분하지 않고 내 갈 길로 서서히 가고 있다. 한 가지 신통한 일은 이 영화 후 그 동안 몇 년간 한 마디 없던 영화계 사람들이 갑자기 내게 전화를 걸어와 ‘아이 러브 유 마이클’이라고 축하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포커스 (Focus)


닉키(윌 스미스·왼쪽)와 제스(마고 로비)가 첫 대면을 하고 있다.

사기·소매치기로 도배, 로맨스까지 뒤범벅


로맨스와 코믹 터치를 곁들인 사기꾼들과 소매치기들의 한탕 영화로 겉만 번드르르하지 흡인력이 모자라는 쇼윈도의 장식용 고급 드레스 같은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를 치고 소매치기를 하고 내기를 하는데 마치 사기 치기 교본을 보는 것 같다.
수퍼스타 윌 스미스와 ‘월스트릿의 늑대’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애인으로 나온 호주산 섹시한 신성 마고 로비가 사기꾼 선생과 제자로 나와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로맨스를 엮지만 스미스가 공연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생기를 잃어 둘 간의 화학작용도 미적지근하고 또 러브 신도 어색하다. 스미스보다는 로비가 더 화끈하다.
모든 것이 사기여서 또 사기 당하는구나 하는 느낌 때문에 내용에 빠져들기가 어려운데 플롯이 너무나 황당무계하고 터무니가 없어 혀를 내휘두르게 된다. 뉴욕과 뉴올리언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찍은 화려한 촬영과 부와 사치와 로비가 수시로 바꿔 입는 드레스 같은 눈요깃거리를 즐기면서 속빈 강정 같은 영화의 허구를 즐길 사람도 있겠으나 세련미란 전연 없는 영화다. 진짜로 잘 만든 사기영화를 보려면 ‘게임의 집’과 ‘그리프터즈’와 ‘스팅’을 보기를 권한다. 
영화에서 눈알이 돌아갈 정도로 재빠른 몽타주로 이어지는 소매치기 장면은 무려 25만명을 털었다는 소매치기 아폴로 로빈스의 자문을 받은 것이다. 
이 세상에 사기 치지 못할 것이 없다며 자신만만한 소매치기요 사기꾼인 닉키(스미스)가 자신의 수제자가 될 섹시한 제스(로비)를 처음에 만나는 곳은 뉴욕의 고급 호텔 식당. 물론 이 만남부터가 사기행각의 하나다.  
닉키는 제스를 제자 겸 애인으로 삼고 수십명에 달하는 졸개들과 함께 풋볼경기가 있는 뉴올리언스로 소매치기 원정을 간다. 주말 인파로 붐비는 프렌치쿼터에서 잽싸게 행해지는 소매치기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볼만한 것. 여기서 얻은 수확이 무려 100여만달러. 
닉키와 제스는 이 돈을 가지고 풋볼경기가 열리는 수퍼돔의 귀빈실로 들어간다. 여기서 닉키는 거부의 중국인 도박꾼 리유안(BD 웡이 꼭두각시처럼 논다)과 내기를 하나 계속해서 진다. 내기의 액수는 200만달러까지 오른다. 믿거나 말거나인데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그리고 닉키는 느닷없이 제스를 내버린다. 
그로부터 3년 후 자동차 경주 포뮬라 1이 열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닉키는 오만한 거부로 경주팀을 소유한 가리가(로드리고 산토로)에 고용돼 가리가의 라이벌인 호주인 매큐언을 사기 치기로 계약한다. 매큐언에게 가리가의 비밀 연료첨가제 성분 공식을 판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수백만달러가 오가는데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런데 아뿔사 가리가의 애인이 나타나는데 그 여자가 제스가 아닌가. 우연이 판을 치는 영화다. 닉키와 제스 간의 애정 고백과 사랑의 줄다리기가 지루하게 곁가지를 치면서 닉키의 과거가 설명된다.
한편 의심 많은 가리가는 닉키를 철저히 믿지 못해 자기의 나이 먹은 킬러 하수인 오웬스(제럴드 맥레이니가 잘 한다)로 하여금 닉키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시킨다. 클라이맥스에 가서 또 한 번 사기가 벌어지는데 이 부분은 ‘스팅’의 장면을 도용했다. 글렌 피카라와 존 레콰 공동감독(각본 겸).R. WB.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에벌리 (Everly)


에벌리가 암살자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있다.

‘일당백’여전사의 만화같은 액션극


기가 막히는 영화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잔인하고 끔찍하고 유혈 폭력이 난무하는 액션 스릴러 복수극으로 퀜틴 타란티노의 ‘킬 빌’의 싸구려 판이다. 너무 잔인하고 피가 철철 넘쳐흘러 보다가 포기했다가 다시 나머지 부분을 보니 역시 끔찍하고 역겹긴 하나 코믹하고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만화를 보는 재미마저 있다. 철저한 액션장르의 팬들 용이다.
볼만한 것은 영화를 혼자 걸머진 히스패닉 섹시스타 셀마 하이엑의 혼신의 연기. 등에 화려한 문신을 한 하이엑이 주먹과 발과 함께 수류탄, 기관총, 단검, 장검 그리고 권총과 청산가리 등 온갖 흉기를 동원해 자기를 죽이려고 물밀 듯이 몰려오는 암살자들을 처치하는 모습이 가히 성난 암사자 같다. 브라바!
피가 흥건히 흐르는 가운데서도 낄낄대고 웃게 되는 다크 코미디이기도 한 영화의 내용은 별 것 없다. 잔인한 일본인 애인 타이코(히로유키 오타나베)를 배신하고 아파트에 진을 친 에벌리(하이엑)를 처리하기 위해 타이코가 파견한 온갖 유형의 암살자들을 에벌리가 혼자서 맞아 싸우는 것이 전부다. 
무대는 아파트의 한 방과 이 방 건너의 다른 방 그리고 복도와 엘리베이터로 대부분의 액션은 에벌리의 방에서 일어난다. 파견된 킬러들 중에서 가관인 것은 새디스트(토고 타가와)와 마조키스트(마사시 후지모토). 만화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이들이 싸구려로 웃기는 대사와 인상을 쓰면서 에벌리와 난투극을 벌이는데 그 결과가 끔찍해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이 중 하나는 청산가리 등 각종 치명적인 화학제를 살상무기로 쓴다. 
에벌리는 한 아파트에 4년간이나 갇혀 타이코로부터 강간을 당하며 살다가 탈출을 결심한 것인데 문제는 타이코가 에벌리의 어머니와 어린 딸의 소재지를 알고 있는 것. 그래서 에벌리는 이 둘을 자기 아파트로 불러들인 뒤 이들을 보호하면서 암살자들과 대결하느라 죽을 고생을 한다.
시뻘건 물감으로 그린 살아 있는 만화 같은 영화는 잔인무도함을 달래느라 새카만 유머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 중 하나가 에벌리의 총을 맞고 소파에 앉아 죽어가는 안경을 낀 샌님 스타일의 일본인 암살자(아키에 코타미)와 에벌리의 대사. 
한편 타이코는 개별 암살자들 외에도 검은 정장차림의 졸개들을 떼거리로 파견하는데 이 중 그 누구 하나도 살아남는 자가 없다. 이를 악물고 암살자들을 황천으로 보내는 에벌리의 결의가 가공한데 그러자니 그가 온 몸에 입는 총상이 한둘이 아니다. 
과연 에벌리는 살아남을 것인지. 마침내 에벌리를 사랑한다는 타이코가 정장을 하고 아파트에 들어선다. 그리고 둘 간에 애증이 얽힌 대격전이 벌어진다. 때는 크리스마스로 영화 간간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흐르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찬양하는데 이것이 영화의 살육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조 린치 감독. R. Radius. 전지역.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더블린 사람들




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더블린 공항에서 숙소인 쉘번 호텔까지 가는 차 안에서 안내원이 “2월에 더블린에 오면서 우산을 안 가져 오다니”하면서 핀잔을 준다. 그는 이어 “이런 날은 펍에서 기네스 마시기 딱 좋은 날”이라고 권주사를 건넸다.
차창 밖으로 새뮤엘 베켓다리가 걸린 리피강이 도심을 가로지르는 아담한 더블린을 바라보자니 학생 때 읽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 때 나는 이 15편의 단편들로 구성된 소설과 함께 조이스의 성장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으면서 더블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기억이 난다.
아일랜드 헌법이 여기서 초안됐다는 1824년에 지은 쉘번에 여장을 풀자마자 나는 안내원의 권유대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독일인 동료기자 엘마와 함께 호텔 인근의 80년된 오도노휴즈 펍엘 들렀다. 평일인데도 펍은 술꾼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기네스를 시키면서 바텐더에게 “늘 이렇게 초만원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펍은 유명한 포크그룹 ‘더블리너즈’가 활동을 시작한 곳으로 이 날도 펍 한구석에 대여섯명의 음악인들이 앉아 맥주를 거푸 마시면서 기타와 밴조와 아코디언과 플룻을 치고 켜고 불면서 아이리시 음악을 연주했다. 손님들 들으라기보다 자기들이 더 즐기는 것 같았다. 나도 기네스와 아이리시 위스키 재미슨을 번갈아 마시면서 신나는 리듬에 발장단을 맞추다가 아이리시 음악의 특유한 멜랑콜리 기운이 감도는 서정적인 곡이 연주될 때면 감상에 푹 젖어 들었다. 기네스와 재미슨의 완벽한 화학작용 탓이려니.
아이리시들 정말로 술 좋아한다. 꼭 한국 사람들 닮았다. 누가 누구를 먼저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리시와 한국 사람은 닮은 데가 많다. 우선 문학적이다. 조이스와 베켓, 오스카 와일드와 예이츠 그리고 조지 버나드 쇼와 브람 스토커 등이 다 아이리시 문학인들이다. 그리고 두 나라는 다 피점령국의 압박과 설움을 겪어야 했다.
아이리시들은 또 감정적이요 울기를 잘 하고 술 마시면서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다가 싸움박질 까지 하는 것도 서로 닮았다. 그래서 한국을 동양의 애란이라고도 했다. 이런 아이리시들의 특징은 존 포드가 감독하고 존 웨인과 모린 오하라가 나온 ‘아일랜드의 연풍’(The Quiet Man)에서 잘 그려졌다.
아이리시 술꾼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다. 그는 평소 술을 한꺼번에 몰아 마시고 대취하곤 했는데 그래서 영화사에서 그의 촬영현장에 구급차를 따라 보내기까지 했다는 설이 있다.  
아이리시 영어는 영국 영어보다 액센트가 훨씬 더 심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 때가 많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매우 운율적이어서 듣기가 좋다. 아이리시 노래가 아름다운 것이 이해가 간다.    
아일랜드하면 궁금한 것이 영국이 점령한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귀속문제다. 그래서 안내원에게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직도 북아일랜드를 되찾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것은 아주 미묘한 문제여서 대답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에 클로버 색깔 초록의 나라 아일랜드를 찾아간 것은 케이블 TV 쇼타임의 시리즈 ‘페니 드레드풀’의 세트방문(사진)과 출연진 인터뷰 때문이었다. 이 시리즈 제목은 19세기 영국에서 나온 선정적이요 무서운 주제를 다룬 싸구려 출판물을 말한다.
시리즈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인물들 그리고 메리 쉘리의 프랑켄스타인과 그가 창조한 괴물 등과 함께 온갖 잡귀들이 나와 난리법석을 떠는 공포물이다.
우리는 프랑켄스타인의 실험실과 초상화로 사방 벽을 가득 메운 도리안 그레이의 리빙룸 그리고 해골 샹들리에로 가꿔진 저택 및 시리즈용 의상실 등을 둘러본 뒤 그레이의 접견실에서 출연진과 인터뷰를 했다. 먼저 납치당한 딸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탐험가 말콤 머리경 역의 영국 배우 티머시 달턴을 만났다.
그는 ‘리빙 데이라이츠’와 ‘라이센스 투 킬’ 등 2편의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로 나왔다. 6순의 나이에도 늠름하고 섹시했는데 유머가 많은 호인이다. 달턴에 이어 미국 배우 조시 하트넷과 귀신을 자기 몸 안에 불러들일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여인 바네사 아이브스 역의 프랑스 배우 에바 그린을 인터뷰했다. 그린은 유럽 여인답게 젖가슴 노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배우로 산성이 있는 어둡게 아름다운 여자다. 그린은 007시리즈 ‘카지노 로열’에서 본드 걸로 나왔다.        
비는 하루 종일 쉬었다 내렸다 했다. 이러니 아이리시들이 술 안 마시고 배겨낼 재간이 없겠다. 호텔로 돌아와 몸과 마음에까지 묻은 물기를 털어내려고 바에 들렀다. 아일랜드 특산물인 우울을 선물로 받아들고 다음 목적지인 런던으로 떠났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