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왼쪽)와 여동생 비니가 파티의 남자들을 관찰하고 있다. |
여류시인 에밀리 딕킨슨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시적 감각을 지닌 영국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각본 겸)가 그린 19세기 중반 미 매사추세츠 주 앰허스트에 살았던 여류시인 에밀리 딕킨슨의 초상화로 아름답고 진지하며 유려하다. 마치 긴 시 구절로 이어진 한 폭의 시화를 보는 느낌인데 데이비스 특유의 느리고 서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이 인물들과 주변 환경을 화사하게 담아내고 있다.
종교적으로 또 남녀 간의 차별이 엄격하던 시절 독립적이요 반항적이며 사색하는 시인의 자기 정체성과 신념의 고수와 함께 그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렸다. 대사가 많고 다소 흐름이 느려 서술이 고여 있는 것은 사실이나 딕킨슨 역의 신시아 닉슨을 비롯한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와 황홀한 촬영 그리고 데이비스의 사려 깊은 연출력 등 여러 모로 보기 좋은 훌륭한 작품이다. 딕킨슨은 처녀인 채 1886년 55세로 사망했다.
영화는 처음에 젊은 딕킨슨(엠마 벨)이 자신의 독특한 신앙관 때문에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에서 쫓겨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딕킨슨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 장면으로 봐선 딕킨슨이 후에 입에서 불을 토하는 여권론자가 될 것 같지만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딕킨슨은 밤에 시를 쓰기 위해 아버지(키스 캐라딘)의 허락을 받는 양순한 딸이다.
그의 다른 가족은 어머니(조앤나 베이컨)와 오빠 오스틴(던칸 더프) 그리고 딕킥슨과 정반대의 성격이면서도 둘이 양손처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여동생 비니(제니퍼 엘). 딕킨슨에겐 고독이 타고난 권리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조용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도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가차 없이 독설을 내뱉고 깔깔대고 웃으면서 희롱과 조롱을 아끼지 않는 여자다.
딕킨슨은 복종과 반항 그리고 철저한 도덕적 규범과 과격한 낭만주의에 사로잡혔던 사람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시달려 통곡을 하기도 한다. 자기 외모에 자신을 잃고 스스로 유배자의 처지를 선택하면서 오로지 시를 쓰는 것으로 위로를 받았으나 생전에 그렇게 많은 시를 출판하지는 못 했다.
이런 까닭에 딕킨슨의 가족들도 그를 조심스럽게 다뤘는데 이렇게 복잡한 내면을 지녔던 딕킨슨의 행동과 내면 묘사를 쥐처럼 생긴 닉슨이 마치 정교하게 수를 놓듯이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얼굴을 잘 알아 볼 수 없는 캐라딘이 오래간만에 스크린에 등장해 엄격하게 연기하고 엘이 닉슨에 맞서서 태양처럼 빛나는 연기를 한다. 그런데 비니도 언니처럼 생전 결혼을 안 했다.
저 세상 적으로 몽환적이면서도 엄격하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으면서도 절대적 형식미를 갖춘 독특한 영화인데 데이비스의 영화들은 전부 이처럼 환상적인 면이 강하다.
그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감독으로 그의 영화들은 마치 시극과도 같다. 그의 다른 영화들로는 ‘디스탄트 보이시즈, 스틸 라이브즈’ ‘롱 데이 클로지즈’ 및 ‘선셋 송’ 등이 있다. PG-13. 로열(310-478-3836).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