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4월 24일 월요일

조용한 정열(A Quiet Passion)


에밀리(왼쪽)와 여동생 비니가 파티의 남자들을 관찰하고 있다.

여류시인 에밀리 딕킨슨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시적 감각을 지닌 영국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각본 겸)가 그린 19세기 중반 미 매사추세츠 주 앰허스트에 살았던 여류시인 에밀리 딕킨슨의 초상화로 아름답고 진지하며 유려하다. 마치 긴 시 구절로 이어진 한 폭의 시화를 보는 느낌인데 데이비스 특유의 느리고 서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이 인물들과 주변 환경을 화사하게 담아내고 있다.
종교적으로 또 남녀 간의 차별이 엄격하던 시절 독립적이요 반항적이며 사색하는 시인의 자기 정체성과 신념의 고수와 함께 그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렸다. 대사가 많고 다소 흐름이 느려 서술이 고여 있는 것은 사실이나 딕킨슨 역의 신시아 닉슨을 비롯한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와 황홀한 촬영 그리고 데이비스의 사려 깊은 연출력 등 여러 모로 보기 좋은 훌륭한 작품이다. 딕킨슨은 처녀인 채 1886년 55세로 사망했다. 
영화는 처음에 젊은 딕킨슨(엠마 벨)이 자신의 독특한 신앙관 때문에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에서 쫓겨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딕킨슨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 장면으로 봐선 딕킨슨이 후에 입에서 불을 토하는 여권론자가 될 것 같지만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딕킨슨은 밤에 시를 쓰기 위해 아버지(키스 캐라딘)의 허락을 받는 양순한 딸이다.
그의 다른 가족은 어머니(조앤나 베이컨)와 오빠 오스틴(던칸 더프) 그리고 딕킥슨과 정반대의 성격이면서도 둘이 양손처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여동생 비니(제니퍼 엘). 딕킨슨에겐 고독이 타고난 권리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조용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도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가차 없이 독설을 내뱉고 깔깔대고 웃으면서 희롱과 조롱을 아끼지 않는 여자다.
딕킨슨은 복종과 반항 그리고 철저한 도덕적 규범과 과격한 낭만주의에 사로잡혔던 사람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시달려 통곡을 하기도 한다. 자기 외모에 자신을 잃고 스스로 유배자의 처지를 선택하면서 오로지 시를 쓰는 것으로 위로를 받았으나 생전에 그렇게 많은 시를 출판하지는 못 했다.
이런 까닭에 딕킨슨의 가족들도 그를 조심스럽게 다뤘는데 이렇게 복잡한 내면을 지녔던 딕킨슨의 행동과 내면 묘사를 쥐처럼 생긴 닉슨이 마치 정교하게 수를 놓듯이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얼굴을 잘 알아 볼 수 없는 캐라딘이 오래간만에 스크린에 등장해 엄격하게 연기하고 엘이 닉슨에 맞서서 태양처럼 빛나는 연기를 한다. 그런데 비니도 언니처럼 생전 결혼을 안 했다. 
저 세상 적으로 몽환적이면서도 엄격하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으면서도 절대적 형식미를 갖춘 독특한 영화인데 데이비스의 영화들은 전부 이처럼 환상적인 면이 강하다. 
그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감독으로 그의 영화들은 마치 시극과도 같다. 그의 다른 영화들로는 ‘디스탄트 보이시즈, 스틸 라이브즈’ ‘롱 데이 클로지즈’ 및 ‘선셋 송’ 등이 있다. PG-13. 로열(310-478-3836).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올리 마키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The Happiest Day in the Life of Olli Maki)


올리가 챔피언전에 임하기 전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있다.

시골서 빵을 굽던 올리 마키의‘월드 페더급 복싱 챔피언’쟁탈전


1962년 벌어진 권투 세계 페더급 챔피언 미국 선수 데이비 모어와 핀랜드 시골에서 빵을 굽던 올리 마키의 챔피언쉽 쟁탈전 실화를 그린 우아한 핀랜드의 권투영화로 흑백이다. 
여느 권투영화의 투쟁과 인내와 승부 같은 상투적인 플롯을 배제하고 유머와 우수와 민감한 인간적 통찰력을 사용해 권투와 사랑의 이야기를 내용과 기술적인 면에서 모두 균형 있게 다룬 반-권투영화라고 하겠다.
인간적이며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영화로 감상성을 회피하면서 권투선수이면서도 권투보다 먼저 정직과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서 살려고 하는 남자의 얘기를 재미있고 또 감동적으로 그렸다.
26세의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핀랜드의 시골마을 코콜라 태생인 올리(야르코 라티)는 매니저 엘리스(에로 밀로노프)에 의해 발탁돼 핀랜드의 차기 국민영웅으로 훈련을 받는다. 올리는 페더급이 되기 위해 체중을 줄이고 엘리가 하라는 대로 패션지의 모델로도 나선다. 
단 10회의 프로경력 밖에 없는 올리가 챔피언 전에서 싸울 상대는 64전 전승의 미국 선수 모어(존 보스코 주니어). 올리를 둘러싸고 미디어가 난리법석을 떨자 올리는 점점 불편을 느끼는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트레이닝 때문에 올리의 개인적 문제가 침해를 받는 것.
올리는 고향의 한 결혼식에서 만난 라이야(오나 아이롤라)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데 라이야도 마찬 가지. 따스하고 근본이 튼튼한 라이야는 헬싱키에서 훈련하는 올리 곁에서 그를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돌보나 점증하는 미디어의 사생활 침해에 질려 시골로 내려간다. 이로 인해 경기를 앞둔 올리의 초점도 흐려진다.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록키’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라 상냥한 인간 혼을 지닌 권투영화로 선한 눈과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미소를 지닌 라티의 인간적 연기가 영화의 숭고한 정신을 지고한 경지에까지 올려놓고 있다. 티 안 내는 한 점의 결함도 없는 연기다. 
이와 함께 아이롤라도 부드럽고 상냥한 연기를 잘 한다. 권투영화이긴 하나 액션보다는 겸손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남자의 내면세계를 그린 성격영화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 성인용. 일부지역.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졸업’




내가 올 해로 개봉 50주년이 되는 ‘졸업’(The Graduate^사진)을 본 것은 뒤 늦게 군에 입대해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그 때 장안에 이 영화가 과거 다른 영화들과는 전연 다른 특이한 영화라는 입소문이 무성해 종로3가에 있던 단성사에서 봤다.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상낙원과도 같았던 미국의 상류층이 사는 풀이 있는 저택과 잘 차려입은 그들의 호화스런 삶 그리고 파격적인 섹스와 내용이 거의 초현실적으로 느껴졌었다. 이와 함께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르는 사운드트랙의 노래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졸업’은 물질을 대변하는 “플래스틱”이라는 말을 대뜸 신유행어로 만들어 놓은 영화다. 대학을 막 졸업한 어눌한 벤자민(더스틴 호프만)에게 벤자민의 아버지의 친구가 “너의 장래는 이 것에 달려 있다”면서 조언한 말이다.
이와 함께 또 유명한 대사가 벤자민이 자기를 유혹하는 미시즈 로빈슨(앤 밴크로프트)에게 “미시즈 로빈슨, 당신 지금 날 유혹하려고 하는 거지요”라고 하는 말. 이 때 카메라가 미시즈 로빈슨의 벌린 다리 아래로 당황해하는 벤자민을 잡는다. 미시즈 로빈슨은 후에 벤자민의 애인이 된 일레인(캐서린 로스)의 어머니로 모녀가 한 남자를 놓고 얄궂은 삼각관계를 이룬다.
미국서 개봉되자마자 비평가들의 찬사와 함께 젊은 층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받으면서 빅 히트를 한 신 청춘영화의 효시인 ‘졸업’은 미 상류층의 물질주의와 위선 그리고 성적 관행과 세대 차이를 비판하고 풍자한 혁신적인 작품이다.
영화가 개봉된 1967년은 베트남전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히피문화의 절정기였는데 이 영화의 무정부적 분위기는 당시 젊은이들의 불안한 시대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풍자영화치곤 유유자적하는 분위기를 지녔는데 이런 분위기를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르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미시즈 로빈슨’ 및 ‘스카보로 페어’ 등이 부드럽게 다독여주고 있다. 이들의 사운드트랙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했었다.
21세의 벤자민은 대학을 막 졸업하고 LA인근 부촌 패사디나의 집으로 돌아온다. 벤자민은 대학원 진학을 미루고 집에서 떠돌이처럼 겉돌면서 성공한 변호사인 아버지를 비롯한 기성세대에 수동적 반항을 한다.
이런 벤자민이 아버지의 파트너인 로빈슨의 부인의 유혹에 걸려들면서 호된 성인신고식을 치르게 된다. 처음에는 미시즈 로빈슨의 유혹에 저항하던 벤자민은 부인의 무르익은 육탄공격에 항복, 호텔에서 섹스를 즐긴다. 이 호텔이 지금은 중학교가 된 LA 코리아타운에 있던 앰배서더호텔이다.
외톨이인 벤자민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버클리대학생인 일레인. 그러나 일레인은 벤자민이 자기 어머니와 동침했다는 것을 알고 벤자민을 떠나 서둘러 한 때 사귀던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산타바바라의 교회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달려온 벤자민이 “일레인”하고 소리치자 일레인이 “벤”하고 메아리치면서 식장에서 달아난다.
이어 벤자민은 대형 십자가를 휘둘러 추격자들을 물리친 뒤 일레인과 함께 달려오는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은 벤자민과 일레인은 서로를 보면서 미소를 짓지만 곧 이어 얼굴 표정이 어두워진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졸업’은 당시 29세였던 호프만의 첫 주연영화(출연료는 7,000달러)로 어설프게 보이는 그는 재정적 성공만을 가치 척도의 기준으로 삼는 속물들 사이에서 이들과의 대화 불통으로 인해 애를 먹는 청년의 모습을 어정쩡하게 표현, 일약 청춘문화의 영웅이 됐다. 그런데 제작진은 처음에 벤자민 역으로 금발미남 로버트 레드포드를 쓸 생각이었다.
호프만과 함께 밴크로프트가 섹스에 굶주린 자극적인 중년부인의 연기를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사실적으로 해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 주연상(뮤지컬/코미디)을 탔다. 미시즈 로빈슨 역도 당초 도리스 데이에게 제의됐었다.
영화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으로 당시만 해도 영화계에서는 풋내기였던 마이크 니콜스의 두 번째 감독 작품이다. 신인답지 않게 원숙한 연출력을 발휘, 미 문화비평의 걸작을 내놓았다. 원작은 찰스 웹의 소설. 한편 ‘졸업’ 개봉 50주년을 맞아 오는 23일과 26일 전미 700여개 극장에서 영화의 디지털 프린트 판이 상영된다.    
마침 이 달 초 영화의 노래를 부른 아트 가펑클(75-폴 사이먼과의 듀엣은 지난 1970년에 해체됐다)의 공연이 세리토스에서 열려 참석했다. “아직도 내가 노래를 부르다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공연을 시작한 가펑클은 ‘졸업’의 노래들과 ‘박서’ 및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 등 왕년의 자신의 히트곡들을 불러 올드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나이는 못 속인다고 가펑클은 고음에 가서는 다소 힘들어했고 가끔 가사도 잊었다. 내 청춘에로의 뒷걸음질과도 같은 향수에로의 여정이라고 생각하고 들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