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2월 23일 화요일

‘시저 만세’(Hail, Caesar)의 조지 클루니




“유머는 자신을 야유하는 것 두려워하면 안 돼”


 소수계를 중요한 역으로 쓸 영화 많이 제작돼야
‘난 스타야’라는 생각이 바보가 되는 첫 걸음


현재 상영 중인 1950년대 할리웃을 동경하면서 아울러 풍자한‘시저 만세’(Hail, Caesar)에서 로마 장군으로 나오는 약간 멍청한 수퍼스타 역을 맡은 조지 클루니와의 인터뷰가 지난 1월31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언제나 봐도 호인이요 신사인 클루니는 인터뷰장에 들어오면서부터“이거 위험한 집단이지”라며 너스레를 떨면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와의 친분을 보여줬다. 그는 유머가 대단히 많은 사람이어서 인터뷰 때도 눈웃음까지 치면서 끊임없이 유머와 위트 그리고 자기 비하적인 농담을 구사, 인터뷰가 농담 잘하는 친구로부터 재미있는 얘기를 듣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정치적 얘기를 할 때는 눈초리와 함께 얼굴 표정도 매우 진지하게 변해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물론 그는 골수분자 진보파다. 항상 만나서 즐거운 사람으로 사진을 찍을 때도 꼭“별일 없지”라면서 다정하게 군다. 이러니 그가 HFPA의 총아가 될 수밖에.   

-역을 위해 어떻게 준비했는가.
“난 매카시즘을 비롯해 할리웃의 1950년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내 역이 악간 멍청한 것이니 만큼 그렇게 많이 연구하진 않았다. 난 왕년의 빅스타로 연기에는 신통치 않았던 빅터 마투어를 어느 정도 흉내 냈다. 영화를 감독한 조엘과 이산 코엔 감독과는 이번이 함께 일한지 다섯 번째로 둘은 로마 장군 역을 날 위해 썼다.”

-오는 2월28일에 열리는 오스카 시상식의 남녀 주조연상 후보가 모두 백인이라서 지금 아카데미는 ‘오스카는 온통 백색이다’라는 구설수에 휘말려 들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질문 나올 줄 알았다. 아카데미가 인종문제에 있어 보다 다양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보다 많은 젊은이들과 인종적으로 다양한 회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카데미도 그럴 준비가 돼 있다고 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소수계를 중요한 역으로 쓸 수 있는 영화가 많이 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제작비를 대는 스튜디오들이 영화제작을 허락할 때 쓰기를 원하는 주연 배우들은 거의 다 백인들이다. 이런 절차가 고쳐져야 한다. 스튜디오뿐 아니라 에이전트와 각본가들도 새로운 눈으로 크게 봐야 한다. 그래서 여배우들과 히스패닉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올 수 있는 영화들도 많이 나와야 한다.” 

-로마 장군 노릇 하느라 스커트 입은 기분이 어땠는가.
“그 옷 입고서 내 생애 이젠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조엘과 이산이 내가 스커트 입은 것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더라.”

-당신의 아내 아말은 패셔니스타인데 혹시 당신의 패션에도 조언을 하는가.
“절대로 아무 말도 안 한다. 나도 아내의 패션에 대해선 일언반구 안 한다. 우린 서로 각자가 알아서 패션을 선택한다.”

-과거 당신이 연기한 영화 인물 중 풍자하고 싶은 인물은 누구인가.
“‘오 형제여 당신은 어디 있는가’의 천하멍청이 에버렛 맥길과 ‘아웃 오브 사이트’의 잭 폴리다. 특히 에버렛이다. 난 과거 내가 했던 극중 인물들을 모두 극진히 사랑한다. 늘 그들이 영화가 끝난 뒤 어떻게 살았을까 하고 궁금해 하곤 한다.”

-어떤 배우가 도널드 트럼프 역을 제일 잘할 것 같은가.
“내가 트럼프 역에 적당할 베우들의 이름을 거론했다가는 이튿날 신문에서 자기 이름을 본 배우들이 다 자살할 것이다. 트럼프의 선거유세를 보면 마치 퍼포먼스 아트 구경을 하는 것 같다. 그가 말하는 무슬림의 미국 입국금지와 1,200만명에 이르는 멕시칸들의 추방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 간의 장벽 건설 등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같은 생각이야 말로 외국인 혐오증자요 파시스트의 것이다. 선거유세가 끝나면 그런 미친 소리도 끝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진짜 문제에 대한 얘기가 나올 것이다.”

-당신이 어렸을 때 본 옛날 영화에 대한 추억을 말해 달라.
“내가 10대 후반이었을 때는 사극이나 화려한 테크니칼러 영화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다. 내 첫 데이트 영화가 ‘에일리언’이었으니까. 그래서 난 그런 영화들을 TV로 봤다. ‘스파르타커스’를 보고 또 봤고 ‘벤-허’도 정말 재미있게 봤다. 그리고 매년 부활절마다 방영되던 ‘성의’도 즐겨 봤다. 또 ‘오즈의 마법사’도 빼놓지 않고 봤다. ‘멋진 인생’도 좋고. 유감스럽게도 대하 서사극들인 역사물과 화려한 뮤지컬들을 극장에선 못 봤다.”

-옛날 할리웃의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일해야 했다면 어떻게 생존할 수가 있었겠는가.
“1950년대 들어 베티 데이비스를 비롯한 스타들이 스튜디오가 주는 역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처럼 일해 왔다. ‘배트맨’에 나온 뒤로 내 스스로가 선택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못해도 내가 그 잘못의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튜디오 시스템에도 좋은 점이 있다. 특히 배우와 감독에서부터 자질구레한 기능직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로를 잘 아는 동지와도 같은 분위기가 있었는데 난 그것을 내가 오랫동안 일한 워너 브라더스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소리가 있는데.
“아니다. 그리고 우린 물론 이혼도 안 한다.   
            
클루니는‘시저 만세’에서 멍청한 수퍼스타로 나온다.
 -시간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나이가 먹을수록 더 귀중해진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난 좀 다르다. 난 내가 사 랑하는 사람들인 아내와 부모님과 친구와 함께 보낸 과거가 더 귀중하다. 살아오면서 좋을 때와 나쁠 때를 다 경험하는데 나쁜 때가 있기에 좋은 때를 더 귀중하게 여기게 된다. 내 생애와 결혼 같은 좋은 때를 난 그래서 축하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엔 운도 따라 줘야 한다. 우리는 항상 정상에서 정상으로만 넘어 뛸 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좋을 때가 소중한 것이다.”

-당신의 모습과 역은 ‘쿼바디스’의 로버트 테일러와 ‘성의’의 리처드 버튼을 코믹하게 짬뽕한 것 같은데.
“일리가 있다. 나도 그 영화들을 다 봤다. 내가 빅터 마투어를 흉내 낸 이유는 심각한 테일러와 버튼과는 달리 마투어는 역사극에 나오면서도 마치 브롱스에서 온 사람처럼 보여 어딘가 어색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기서 멍청이 스타로 나오는데 스타들의 멍청한 점은 무엇인가.
“‘아이구 하느님, 난 영화 스타입니다’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그것이 바보가 되는 첫 걸음이다.”

-당신의 일상에 대해 말해 달라.
“아침 7시께 일어난다. 그리고 커피를 끓이고 거의 매일 아침 당신들과 인터뷰 하려고 집을 나선다(웃음.) 아내와 나는 요즘 LA와 영국과 이탈리아 등 세 군데를 돌아가면서 살고 있다. 영국에서는 집필을 하고 인본주의적 활동에 시간을 쓴다. LA에서는 영화를 만든다. 난 매우 조직적인 사람이어서 아침에 일어나 그 날 할 일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에 차질이 생기면 다소 갈팡질팡해 한다. 아말의 경우 런던에 있을 때는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기 때문에 LA에 있을 때 자기 일을 한다(아말은 인권문제 국제변호사). 영국에 있는 집은 1680년에 지은 것이다.”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과 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유머감각이란 자기를 야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들의 행사인 골든 글로브 시상식의 사회를 본 두 여자 코미디언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는 연 2년간 나를 우스갯거리로 삼았는데 그것은 내가 들은 나에 대한 가장 우스운 농담이었다. 유머감각이 없고 자기를 비하하는 도량이 없다면 그 무엇도 즐길 수 없다. 왜냐하면 누가 당신에 대한 진실을 말할까 봐 늘 자기 주위에 보호막을 치고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에 대한 농담을 하고 싶다면 제일 먼저 자기에 대해 하라고 말하고 싶다. 아말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제일 우선인 것도 그의 유머감각이다. 아말은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사람 중의 하나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경주(Race)


오웬스의 넓이뛰기가 레니 리펜슈탈의 카메라에 잡히고 있다.


미국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웬스의 전기영화


손기정이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달려 마라톤에서 우승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100m 경주 등 4종목 금메달을 따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려던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았던 미국의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웬스의 전기영화다.
파란만장한 오웬스의 삶에서 그가 오하이오 주립대 선수로서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온갖 인종차별을 감수하면서 달리기에 전념하는 결의와 함께 오웬스의 올림픽 참가에 초점을 맞췄다. 장애를 극복하고 이룬 인간 승리담으로 영화가 너무 미화된 감이 있지만 말끔하게 잘 만들어진 흥미 있는 작품이다. 
전형적인 전기영화의 틀을 그대로 따르면서 일종의 언더독의 승리처럼 처리했는데 전반적으로 모범답안 같아 강렬한 충격이나 감동을 느끼기엔 부족하다. 그러나 연기와 현지에서 찍은 촬영과 세트 등 여러 모로 모양새 좋은 작품으로 보고 즐기기에 족하다.
오웬스(스테판 제임스가 호연한다)는 달리기를 잘해 경제공황 시대 부모의 큰 기대 속에 오하이오 주립대에 들어가는데 주위의 인종차별 속에서도 용기와 결단력과 인내로 이를 참으면서 오직 자신의 최고 최선에만 매어 달린다. 그를 적극 응원하는 것이 애인 루스 솔로몬(샤니스 밴턴)으로 둘 사이에는 어린 딸이 있다. 오웬스는 대학의 육상코치이자 후에 친구 같이 된 래리 스나이더(제이슨 수데이키스)의 밀어붙이는 식의 지도하에 실력이 일취월장하는데 이로 인해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다.
한편 제레마이아 마호니(윌리엄 허트) 미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히틀러에 반대해 올림픽 참가 보이콧을 주장하나 막강한 힘을 지닌 사업가 에이버리 브런디지위원(제레미 아이언즈)의 참가 주장이 위원회 투표에서 통과된다. 
이와 함께 전미 흑인지위향상협회 측은 인종차별에 항의, 오웬스에게 올림픽 출전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나 오웬스는 이를 거절한다.
베를린에 온 오웬스는 새삼 인종적 정치적 문제의 초점이 되는데 이는 베를린 올림픽을 아리안족의 육체적 지적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한 선전수단으로 삼은 히틀러의 의도 탓이다. 히틀러를 비롯한 그의 참모들은 다 흑인을 짐승처럼 여겼는데 그래서 히틀러는 관례를 어기고 금메달리스트인 오웬스와의 악수를 피하기 위해 자리를 일찍 떠난다.
오웬스의 우수성에 각광을 비춘 것은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여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카리스 반 후텐)의 카메라다. 레니는 ‘올림피아’라는 기록영화를 찍으면서 오웬스의 100m 달리기에서의 준비과정과 스타트 및 전속 질주 그리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아 그를 마치 초인처럼 전 세계에 보여준다(2부로 된 ‘올림피아’는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 기록영화로 평가받는다). 오웬스가 승리할 때마다 불쾌한 표정을 짓는 히틀러의 모습이 재미있다.
영화는 오웬스의 영광으로 끝나고 그가 미 아마추어 육상위원회로부터 제명당한 것을 비롯해  올림픽 후에 겪은 다사다난한 어두운 사실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베를린 올림픽 80주년을 기념해 개봉된다. 스티븐 합킨스 감독. PG-13. Focus.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부활(Risen)


클라비어스가 돌문이 열린 예수의 무덤을 응시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로 인해 신자가 된 로마 장군 


기독교 신자들은 물론이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예수 부활의 영화인데 왜 부활절에 안 나오고 지금 개봉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을 그대로 충실히 따른 전형적인 기독교 영화여서 기독교 신자들이 아주 좋아하겠다. 
이 영화는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리처드 버튼, 진 시몬즈 및 빅터 마투어가 나온 ‘성의’(The Robe·1953)을 연상케 하는데 예수를 믿지 않던 로마 장군이 부활한 예수로 인해 신자가 된다는 점이 똑 닮았다.
일종의 개인의 자기 구제의 드라마이기도한데 너무 정석적으로 성경을 따라가 특별한 굴곡은 없지만 연기를 비롯해 촬영과 의상 그리고 음악 및 디자인 등이 좋은 수준급 영화다. 특히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예수로 나오는 마오리족 배우 클리프 커티스의 모습으로 자비스런 예수의 자태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첫 장면에서 로마 장군 클라비어스(조셉 화인즈-레이프 화인즈의 동생)가 부관 루시어스(탐 펠턴)와 부하들을 이끌고 유대인 반란군을 무찌르는 액션은 종교영화에 흥분감을 돋우기 위한 양념이다. 
이어 클라비어스는 유대 땅을 통치하는 로마 총독 빌라도(피터 퍼스)에게 불려가 유대인들 사이에 나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슈아(예수)의 부활을 둘러싼 소문을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빌라도의 이 같은 지시에는 소문의 진위를 밝혀내 유대인들의 구세주에 대한 기대와 함께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감을 제압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 이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있지만 지나치게 끔찍하진 않다. 영화는 그보다는 예수 부활 이후의 얘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예슈아의 처형을 목격한 클라비어스는 빌라도의 지시에 따라 굴속에 안장한 예슈아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그의 사체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클라비어스는 빌라도의 지시에 따라 유대인들이 예슈아의 사체를 훔쳐 어딘가에 감췄다고 생각하고 수색을 시작하다가 한 집에서 예슈아가 제자들과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클라비어스는 자기를 보고 인자한 미소를 짓는 예슈아를 보고 깊은 충격과 함께 신비감에 빠진다.
클라비어스는 여기서부터 자기 임무를 버리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가는 예슈아를 따라간다. 그리고 중간에 예슈아로부터 “무엇을 믿지 못하는가”라는 물음을 받는다. 영화는 약간 스릴러의 기운도 갖췄는데 제자들 역의 배우들과 함께 막달라 마리아로 나오는 마리아 보토의 모습과 연기도 좋다. 케빈 레널즈 감독. PG-13. Columbia.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육체의 문’과 ‘춘부전’




자기 몸속에서 생명을 잉태해서 그럴까. 여자는 남자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혼자서 우리 두 남매를 키운 나의 어머니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전후 도쿄의 창녀 마야와 중일전쟁 때 만주의 이름 없는 한국인 위안부도 생명력이 억척스럽게 강한 여자들이다.
마야와 한국인 위안부는 각기 일본의 스즈키 세이준 감독(92)의 ‘육체의 문’(Gate of Flesh·1964)과 ‘춘부전’(Story of a Prostitute·1965)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나는 며칠 전 이 두 영화를 웨스트LA의 해머뮤지엄 내 빌리 와일더극장에서 보면서 다시 한 번 고난 속 여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혀를 내 휘둘렀다.
마야는 미군에게 겁탈을 당한 뒤 전후 난장판이 된 도쿄로 올라와 창녀가 된다. 배가 고파 거리에서 삶은 고구마를 훔쳤다가 야쿠자에게 붙잡힌 것이 계기가 된다. 마야를 한동아리 안으로 받아주는 4명의 창녀들은 폭탄을 맞아 뼈만 남은 건물을 주거지로 몸을 파는데 자매들처럼 똘똘 뭉친 이들의 규율은 ‘공짜 섹스는 없다!’이다.
마야가 활동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개가 개를 잡아먹는’ 살벌한 전쟁터로 G.I.와 M.P.와 창녀와 야쿠자가 삶은 고구마장수와 호떡장수가 요란하게 호객행위를 하는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내가 꼬마 때 경험한 부산 피난시절이 떠올랐는데 이런 모습은 한국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더러 볼 수 있다.
우리가 양공주라 부른 마야(노가와 유미코)와 동료 창녀들의 삶은 미군의 총격에 부상당한 전직 군인 이부키 신타로(조 시시도)가 마야네 건물로 들어와 이들의 식객이 되면서 큰 물결이 친다. 마야는 이부키를 보르네오에서 전사한 자기 오빠의 대체물로 삼고 그를 연모하는데 마야뿐 아니라 동료 창녀들도 뻔뻔하나 신체건강하고 사나이다운 이부키를 탐내면서 이들 사이에 욕정의 불길이 타오른다.
스즈키 감독은 섹스와 음식이 존재의 이유인 이부키의 미군 증오를 통해 동물적인 생존본능과 함께 노골적인 반미감정을 토해내고 있는데 이런 감정의 또 다른 표시로 공중에서 펄럭이는 성조기를 클로스업해 보여준다. 이와 함께 스즈키는 갑자기 이식된 민주주의도 ‘개뿔 같은 소리’라면서 야유한다.    
마야와 다른 창녀들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 파인애플을 사 이부키에게 바치는데 이야말로 창녀의 순정이다. 나는 이런 깡통 파인애플뿐 아니라 영화에서 “이 맛이야 말로 최고”라고 찬미한 부대찌개도 먹어봐 영화가 남의 소리 같질 않았다. 그리고 이부키가 같은 패들과 미군부대에서 페니실린과 럭키 스트라익을 훔쳐 달아나는 모습과 거리의 암시장 등도 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의 지스러기들이다.
이부키는 마야의 순정에 가슴이 녹아 둘이 함께 도쿄를 떠나기로 약속하나 비극으로 끝난다. 혼자 남은 마야가 “나는 여기 남겠다”며 그런 비극에 결코 굴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매우 야하면서도 나신을 보듯 적나라하게 노골적인 생존기로 나는 이 영화로 부산 피난살이를 한 번 더 한 셈이다.
전쟁에 나갔던 스즈키 감독은 ‘춘부전’(사진)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아울러 전쟁의 광기를 우스갯거리로 삼고 있다. 매우 사실적인 이 영화는 또 다른 일본의 반전영화인 ‘인간의 조건’을 연상케 한다. 만주전선에 투입된 일본군 부대의 포악한 지휘관 나리타소위(다마가와 이사오)의 당번병인 도도한 미카미 신기치(카와지 다미오)와 나리타의 총애를 받는 창녀로 미카미를 사랑하는 하루미(노가와 유미코)는 각기 ‘인간의 조건’의 가지와 미치코를 생각나게 한다. 미카미가 툭하면 나리타로부터 귀싸대기를 얻어맞는 것도 가지를 연상시킨다.
하루미 등 서너 명의 일본 창녀들과 한 명의 한국인 위안부는 줄줄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수백명의 일본군인들을 상대한다. 나이 먹은 한국인 위안부는 영화에서 두 번 한복을 입는데 스즈키 감독은 이 여자를 매우 동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 여자를 찾아오는 일본 군인이 불순분자로 찍혀 장교에서 하사관으로 강등된 아키야마(오자와 쇼이치)다. 아키야마는 육체적 욕망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의 방에서 조용히 ‘철학단상’을 읽기 위해 찾아온다. 책을 읽은 뒤 방을 떠나면서 아키야마는 여자에게 화대를 지불하는데 이를 세던 여자가 “일본 여자와 같은 화대를 주네. 고맙기도 하지”라며 감사한다. 일본 창녀와 한국인 위안부는 화대에도 차별이 있었던 것 같다.    
미카미와 하루미는 사로 사랑하게 되나 동반자살의 비극으로 끝난다. 이를 본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한국인 위안부가 “죽는 것은 비겁해. 사는 것이 더 힘들어”라면서 멀리 사라진다. 마야와 백의의 한국 여인이야말로 생존의 불기둥과도 같은 여인들이다. 스즈키 세이준 시리즈는 오는 3월13일까지 계속된다. (310)206-8013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