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11월 8일 화요일

핵소 리지(Hacksaw Ridge)


데즈몬드가 부상자를 밧줄로 묶어 고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양심적 집총 거부한 데즈몬드 T. 도스 실화 영화


필자가 본 전쟁영화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끔찍하고 잔인하며 유혈이 강같이 흐르는 전쟁영화다. 역동적이고 강건하며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 있는 듯한 현실감을 느끼게 되는 사실적인 작품이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게끔 전쟁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됐는데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출작전’은 이에 비하면 아이들 전쟁놀이다. 내장이 튀어나오고 몸과 팔 다리가 너덜너덜하니 끊어지고 쥐가 사체의 얼굴을 파먹는 등 심장 약한 사람이 봤다간 졸도하겠다.
감독은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으면 못 견디는 멜 깁슨. 그의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상케 만드는 피와 고통의 작품인데 묘하게도 이런 피범벅 영화의 주인공은 전장에서 총을 들기를 거부한 실제 인물 데즈몬드 T. 도스(2006년 사망)다. 깁슨은 게이와 유대인을 싫어하는 편협한 인간이긴 하지만 영화 하나는 잘 만든다. 
영화는 도스의 민간인으로서의 생활과 그가 입대해 훈련을 받고 오끼나와 전투에 투입돼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얘기로 나뉘어 묘사된다. 버지니아 시골태생의 비쩍 마른 키다리 도스(앤드루 가필드)는 독실한 제7일 안식일 재림교 신자로 어느 형태로든 폭력을 거부한다. 
도스와 그의 1차 대전 베테런인 알콜중독자이자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휴고 위빙)와의 갈등과 함께 도스가 2차 대전에 나간 군인들을 위해 헌혈을 하러 갔다가 만난 아름답고 현명한 간호사 도로시(테레사 파머)와의 사랑이 먼저 이야기된다. 
이어 도스는 군에 입대한다. 그런데 도스가 종교적 이유로 총을 만지지도 않겠다면서 의무병을 시켜달라고 요구, 말뚝상사와 장교들은 물론이요 동료 군인들로부터도 질책을 당하고 시달림을 받고 배척을 당한다. 
도스에게 악을 지르면서 밀어붙이는 사람이 그를 훈련시키는 하웰 상사(빈스 번이 군인영화에 자주 나오는 터프하나 가슴은 따스한 고참상사 역을 재미있고 힘차게 한다). 동료 졸병들 중에서는 특히 터프한 스미티(루크 브레이시)가 도스를 가혹하게 다룬다. 그러나 도스는 자기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데 군재에 회부되기 일보직전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 그는 의무병으로 오끼나와 전투에 투입돼 일본군이 사수하는 ‘핵소 고지’ 탈환작전에 뛰어든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일본군의 필사의 방어로 아군 피해가 막대해지자 고지철수 명령이 내리는데 이를 어기고 고지에 달랑 혼자 남는 것이 도스. 그는 “주여 제발 한 명 더 구하도록 저를 도와주소서”를 되뇌이며 부상한 동료들을 100피트 높이의 고지에서 밧줄로 묶어 아래로 내려 보내는데 그가 구한 인명은 적어도 50명. 그 중에는 부상한 일본군도 있다.
도스는 양심적 거부자로서 대통령으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은 최초의 군인이다. 처절하고 강인하며 살점과 피가 튀는 영화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키 큰 갈비씨 가필드(‘스파이더 맨’)가 내용에 딱 맞게 캐스팅 돼 안으로 팽팽한 연기를 잘 한다. 조용하게 맹렬한 연기다. 
R. Summit.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러빙(Loving)


인종차별을 사랑으로 이긴 리처드와 밀드레드가 포옹하고 있다.

백인 남편 리처드와 흑인 아내 밀드레드의 사랑


지극히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딱 맞는 성을 가진 백인 리처드(조엘 에저턴)와 그의 흑인 아내 밀드레드(루스 네가) 러빙의 극심한 인종차별을 극복한 사랑의 승리담으로 매우 감동적이다. 아직도 ‘흑인들의 생명도 중요하다’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해야 하는 요즘 시의에도 맞는 실화로 제프 니콜스 감독의 사랑과 이해와 연민의 마음이 차분히 고인 연출이 돋보인다.
1958년 타인종 간의 결혼이 금지된 버지니아주에 사는 벽돌공 리처드와 그의 연인 밀드레드는 워싱턴 DC에 가서 결혼했다가 주법 위반죄로 1년 실형을 선고 받는다. 판사는 실형 대신 둘이 타주로 이사, 25년 동안 버지니아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집행유예를 내린다. 이에 둘은 자녀들과 함께 DC로 이사해 사나 특히 밀드레드가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몹시 그리워한다.     
그리고 둘은 1964년 몰래 버지니아로 숨어들어 외딴 곳에서 사는데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이 때 현명한 밀드레드가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편지로 써 보낸다. 케네디가 이를 미 민권자유연맹(ACLU)에 넘기면서 긴 법정투쟁이 이어지고 1967년 연방 대법원은 타인종 간의 결혼을 합법이라고 판결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은 이들의 삶을 취재하러 온 라이프지의 사진기자 그레이 빌렛(마이클 섀넌)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우치에서 밀드레드의 무릎을 베고 누운 리처드와 밀드레드가 TV의 ‘앤디 그리피스 쇼’를 보면서 소리를 내 웃는 모습. 이를 빌렛이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찍는다. 
리처드는 민권운동보다는 오직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데 충실한 남편인 반면 불의에 맞서는 것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외유내강의 밀드레드. 이런 두 사람의 모습과 내면을 에저턴과 네가(에티오피아 아버지와 아일랜드 어머니의 혼혈)가 조용하면서도 다부지게 연기한다. 아름다운 연기다.
심한 역경 속에서도 오직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부부의 사랑의 얘기가 절제된 연출력에 의해 매우 가깝고 단순하며 또 상냥하게 그려졌다. 옛날 얘기가 아니라 요즘 얘기처럼 밀접한 사실감이 있는 작품으로 따뜻한 훈기가 내면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듯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PG-13. Focus.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바비 비



모든 것이 저물고 떨어지는 이 늦가을 조락의 계절에 내가 10대 때 들으며 즐거워하던 팝송을 부른 가수가 또 한 명 세상을 떠났다. 본명이 로버트 토머스 벌라인인 바비 비(Bobby Vee·사진)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지난 10월 24일 73세로 미네소타주 로저스에서 타계했다.
그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역시 내가 좋아하던 노래들인 ‘위치타 라인맨’ ‘라인스톤 키우보이’ 및 ‘젠틀 온 마이 마인드’를 부른 록과 컨트리가수 글렌 캠블이 생각났다. 그도 지금 이 질병을 앓고 있는데 지난해에 생애 마지막 순회공연을 한 바 있다.
바비 비하면 제일 먼저 흥얼거려지는 노래가 ‘테이크 굿 케어 오브 마이 베이비’다. 자기를 버리고 간 애인의 새 남자에게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얘기를 하면서 잘 보살펴 주라”고 청승맞은 부탁을 하는 노래다. 비가 1961년에 불러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었는데 이 노래는 한국에서도 빅히트, 다방과 음악감상실과 라디오 방송의 DJ들이 계속 틀어댔었다.
귀엽게 생긴 비는 1959년 그의 첫 싱글 ‘수지 베이비’가 히트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해 이어 ‘테이크 굿 케어 오브 마이 베이비’ 등 히트곡들을 줄줄이 내놓으며 10대들의 우상이 되었다. ‘수지 베이비’는 비와 묘한 인연이 있는 모범생처럼 생긴 안경을 낀 록가수 버디 할리의 히트곡으로 템포가 빠른 ‘페기 수’를 본 따며 이 곡을 치하한 노래다.
내가 고등학생 때 들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노래들은 한두 곡이 아니다. “굿나잇 하기 전에 마지막 키스를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원 라스트 키스’와 “그의 입술이 내 입술보다 더 네게 키스를 잘 해준다면 내 자존심을 잊을 테니 그에게 달려가라”고 속에도 없는 말을 하는 ‘런 투 힘’ 그리고 “나는 네가 악마인지 천사인지 모르겠으나 그 어느 것이든지 너를 그리워할 것”이라며 ‘아무르 푸’식의 사랑을 고백하는 ‘데블 오어 에인절’ 등이다. 틴에이저였던 내 가슴에 와 닿았던 노래들이다. 틴에이저란 국적을 불문하고 마음이 같았다.
또 “나는 너를 내일엔 두 곱으로 사랑할 것이며 말로 할 수 없게끔 사랑한다”는 ‘모어 댄 아이 캔 세이’와 “사람들이 널 돌아다니며 사랑하는 사람이라는데 내게 시치미 떼고 거짓말 해 봐야 난 알게 되지. 밤이 천개의 눈을 가졌으니까”라고 은근히 애인을 겁주는 ‘더 나잇 해즈 어 다우전드 아이즈’ 그리고 “난 고무공처럼 계속해 네게 튀어 돌아온다”는 ‘러버 볼’ 및 “널 만나고 나서 내 인생이 온통 달라졌다”고 어른 같은 소리를 하는 ‘신스 아이 멧 유 베이비’ 등도 가사를 외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 덕택에 영어실력이 좀 늘었다.
생애 100개 히트곡 차트에 38곡이 오르고 그 중 10곡이 탑20 안에 들어갔던 비가 가수가 된 경우는 아주 특이하다. 1959년 2월3일. ‘댓일 비 더 데이’와 ‘페기 수’ 같은 히트송을 부른 버디 할리(22)와 ‘라 밤바’와 ‘다나’ 등 히트송을 노래한 히스패닉 리치 발렌스(17) 및 빅 바퍼(28) 등 ‘윈터 댄스파티’ 순회공연팀이 탄 경비행기가 다음 목적지인 미네소타주 모어헤드로 가다 추락, 모두 사망했다. 이 얘기는 루 다이아몬드 필립스가 발렌스로 나온 영화 ‘라 밤바’에서 생생히 그려졌다.
이 때 15세로 할리의 팬이자 그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비가 할리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고교 동급생들로 급조된 5인조 밴드 ‘쇄도즈’를 이끌고 고향인 노스다코타주 화고(영화와 TV 시리즈로 잘 알려진 도시)로부터 모어헤드에 도착, 공연을 한 것이 성공을 하면서 비의 가수로서의 생애가 시작됐다. 이 비극적 날은 단 맥클린이 부른 ‘아메리칸 파이’에서 ‘음악이 죽은 날’로 추모되었고 비는 1963년에 추모앨범 ‘아이 리멤버 버디 할리’를 출반했다.
비의 음성은 한 때 잠깐 그와 함께 순회공연을 한 뒤로 친구지간이 된 올 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의 표현이 아주 정확하다. 딜런은 “비의 음성은 금속성의 모가 진 톤을 지녔으며 은종의 소리처럼 음악적이다”고 말했는데 비의 부음을 듣고 다시 들은 그의 노래 소리가 낭랑하기 짝이 없다. 딜런은 믹 재거와 마돈나를 비롯해 자기와 함께 노래를 부른 수많은 가수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이 바비 비라고 말한 바 있다.
바비 비는 알츠하이머 진단이 나온 2011년까지 노래를 불렀는데 그 해 3월 로카빌리 홀 오브 페임 전당에 이름이 올랐고 지난 2014년 2월 가족과 친구들에 의해 비의 마지막 앨범 ‘어도비 세션즈가’ 나왔다.
바비 비도 가고 이제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즐겨 듣던 노래들을 부른 가수들이 몇 안 남았다. 폴 앵카, 브렌다 리, 바비 라이델, 바비 빈튼, 닐 세다카, 해리 벨라폰테, 자니 마티스, 앤디 윌리엄스, 엥겔버트 험퍼딩크, 탐 존스, 토니 베넷 그리고 알 마티노와 비치보이즈의 브라이언 윌슨… 이들도 불원 노래만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테니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