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2월 28일 월요일

레버넌트(The Revenant)


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동료 사냥꾼에게 북수하려고 설원을 걷고 있다.

생존의 몸부림과 복수… 디카프리오의 처절한 연기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영화제작이다. 방대한 스케일과 내장을 끄집어내 씹고 생살을 깎아내는 것 같은 쓰고 고통스런 생존의 몸부림과 복수, 폭과 깊이가 대하 서사적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영상미 그리고 불길하고 우울한 음악(사카모토 류이치와 알바 노토) 및 처절한 연기 등이 마치 명필가의 거대한 붓이 일필휘지로 쓴 것 같은 연출력에 의해 극단적으로 생생하게 표현된 걸작이다.
지난해에 ‘버드맨’으로 오스카 감독상을 탄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공동 각본)의 영화로 실제 있었던 모피사냥꾼의 사건을 바탕으로 캐나다의 캘거리와 아르헨티나에서 찍었는데 마치 영화 속의 복수심에 불타는 주인공처럼 이를 득득 갈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만든 것 같은 절박감과 치열한 작품 욕심이 느껴져 고개가 숙여진다. 
가차 없고 잔혹한 실존적 웨스턴이기도 한데 눈 덮인 광활한 동토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장정을 하면서 겪는 주인공이 겪는 견디어내기 힘든 조건과 상황 그리고 폭력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참혹하고 끔찍해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1823년 록키산 지역에서 캡튼 앤드루 헨리(돔날 글리슨)의 지휘 하에 모피사냥을 하던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사냥꾼 일행이 포니 인디언들에 의해 기습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장시간 진행되는 이 기습장면의 속도감과 공포와 잔인성 및 혼란이 감관을 유린하는 것 같은 카메라에 의해 박진감 있게 포착된다. 그런데 휴는 한 때 포니들과 함께 살면서 원주민과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은 사냥꾼으로 지역 지리에 대해 정통하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사냥꾼들은 철수를 시작하는데 숲 속에서 혼자 휴식을 취하던 휴가 거대한 어미 곰에 의해 습격을 받아 빈사의 지경에 이른다. 
특수효과로 처리된 이 곰의 습격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으로 너무 생생해 진짜로 곰에게 물리고 발톱에 찢기고 밟히는 것 같은 현실감을 느끼게 된다(감독은 어떻게 찍었는지 밝히질 않는다.)
들것에 실려 운반되던 휴를 날씨와 험한 지형 때문에 더 이상 운반할 수 없게 되자 앤드루는 사이코 같은 성질을 지닌 탐욕스런 존(탐 하디)과 양심적인 젊은 짐(윌 풀터)에게 휴가 죽으면 제대로 매장을 하라고 지시하고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요새를 향해 떠난다. 그러나 얼마 후 존은 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를 거의 생매장하다시피 한 뒤 버리고 떠난다.
여기서 살아남은 휴가 처음에는 벌벌 기어 다니면서 먹고 마실 것을 찾아다니다가 기운을 차리고 나무 지팡이에 의존한 채 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설원과 산을 걷고 타고 넘고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집요하게 목적지를 향해 간다. 이 과정에서 휴는 거의 초인적 인내와  생존본능으로 온갖 위험과 고통을 극복한다. 특히 경악할 장면은 그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죽은 말의 내장을 손으로 꺼낸 뒤 말 속에 드러누워 혹한을 피하는 모습.
마침내 휴는 요새에 도착, 존의 행위를 폭로하나 존이 도주하면서 휴는 이번에는 달아난 존을 잡기 위해 다시 혼자 설원으로 떠난다. 
자연광을 이용한 에마누엘 루베즈키의 촬영이 물 흐르듯 하고 급박한데 휴가 말을 탄 채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비롯해 경탄을 금치 못할 장면들이 많다. 내용이 간단한 영화에서 디카프리오는 별로 말을 많이 안 하는데 두꺼운 동물털가죽을 입고 텁수룩한 수염에 장발을 한 채 입안으로 웅얼대면서 강렬한 눈매와 사로잡힌 얼굴 표정으로 필사적인 연기를 한다. 상영시간 2시간36분. R. Fox. 아크라이트(선셋과 바인)와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45 Years


케이트(오른쪽)는 제프의 되살아난 과거 때문에 갈등한다.

    과거의 그림자 속 삶에 격변을 겪는 노부부


아내인 당신이 결혼생활 45년만에 여태껏 남편의 죽은 옛 여자 그림자 속에서 살아 왔다는 것을 깊이 의심하게 된다면 과연 당신은 이에 어떻게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처하겠는가. ‘아, 나는 여지껏 헛 살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면 말이다. 2인극이나 다름없는 이 조용하나 안으로 격한 감정과 의혹과 좌절 그리고 분노가 소용돌이치는 영화는 이같은 물음을 제시한 뒤 애매모호하게 끝이 난다. 
사랑과 결혼의 손상되기 쉬운 확실성에 관한 영국 영화로 소품이지만 영화가 던지는 명제가 대단히 심각하고 또 그 감정적 여파가 크고 넓어 작품 속에 깊이 파묻히게 된다. 영국의 두 베테런 샬롯 램플링(69)과 톰 코트니(78)가 주연하는 향수감 짙은 작품이다.
떨쳐버려지지 않는 과거의 그림자 때문에 내적 격변을 겪어야 하는 노부부의 드라마가 차분하고 절제됐으면서도 매우 세련되고 민감하게 그려졌는데 각본을 쓰고 연출한 앤드루 헤이의 윤기 나는 솜씨가 돋보인다.
영국 동부 노포크의 곱고 조용한 교외에서 사는 제프(코트니)와 케이트 머서(램플링) 부부는 1주 후에 가질 결혼 45주년 기념파티 준비에 바쁘다. 둘은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지만 자식은 없다(그 이유는 보는 사람 자의대로 해석하면 된다.) 영화 처음에 부엌 식탁에 제프가 앉아 있는 가운데 케이트가 설거지를 하면서 미 흑인 보컬그룹 플래터즈의 ‘스모크 겟츠 인 유어 아이즈’를 콧노래로 부르는데 이 노래는 둘이 연애할 때 즐겨 듣고 부르던 노래로 영화에는 옛 팝송이 많이 나오면서 올드팬들의 향수감을 자극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프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내용은 50년 전 제프와 함께 스위스 알프스 빙하지대에 놀러갔다가 실족사한 그의 옛 독일인 애인 카티아의 사체가 고스란히 보존된 채 발견됐다는 것. 이 편지를 받고 제프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 스위스여행마저 생각한다.
그러나 제프보다 더 심각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케이트. 더군다나 제프가 알프스 여행을 하면서 카티아를 자기 아내로 등록했다는 것을 안 케이트는 깊은 좌절감과 질투 그리고 의혹에 시달린다. 그리고 다락에 올라가 남편의 옛 사진들과 필름 등을 뒤지면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라스트 신이 가슴을 때린다. 착 가라 앉은 연기를 하는 램플링(LA 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 올해 최우수 주연여우로 뽑혔다)과 코트니의 화학작용이 절묘하다. 진짜 어른들 영화다. 일부극장.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하숙생’




스크루지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공연히 번잡하고 번거로운 시즌이다.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까닭은 지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지독한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끼면서 자꾸 슬퍼했다. 이 때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이 시즌의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때마다 생각나는 터무니없는 과거는 대학생 때의 일이다. 그 때 통금이 있던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와 신년 전야에 통금을 해제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는 종교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모처럼 밤의 자유를 만끽하려고 거리로 몰려 나왔었다.
나와 대학 친구들도 음주창가하며 마치 풀어놓은 개떼들처럼 명동거리를 몰려다니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자축했었다. 그 때 느낀 가슴 속의 한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처지곤 한다.
난 요즘 진짜 캐롤 대신에 내 고등학교 선배인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을 듣는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최희준이 약간 코가 막힌 듯한 저음으로 부르는 창법과 가사와 곡조가 청승맞기 짝이 없어 부운 같은 인생의 자락에 매달린채 가는 세월 말리지도 못하고 술 한 잔 하면서 따라 부르기에 딱 맞는 캐롤이다.      
KBS 라디오 동명 드라마의 주제곡이었던 ‘하숙생’은 신성일과 김지미 주연의 동명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나도 재미있게 봤다. 사랑과 배신과 복수의 멜로드라마로 흑백영화로 기억하는데 실연당한 남자가 보면 가슴 싸하니 아플 영화다.              
그러나 세상이 온통 즐겁고 행복해만 보이는 시즌이니 만큼 크리스마스 연휴에 듣고 보면서 즐길만한 캐롤과 영화를 찾아보았다. 캐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빙 크로스비가 솜사탕 같은 음성으로 부르는 ‘와이트 크리스마스’다. 어빙 벌린이 작곡한 이 노래는 크로스비가 주연한 시즌영화 ‘할러데이 인’의 주제가로 오스카상을 탔다.
짙은 초컬릿 맛 나는 벨벳 감촉의 음성을 지닌 냇 킹 코울이 부르는 ‘크리스마스 송’도 좋다. “체스넛 로스팅 온 언 오픈 파이어”라면서 시작되는 노래를 들으면 늘 털스웨터를 입고 장작불이 타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 되곤 한다.                    
캐롤 앨범을 8개나 출반해 ‘미스터 크리스마스’라 불리는 앤디 윌리엄스의 ‘이츠 더 모스트 원더풀 타임 오브 더 이여’와 역시 캐롤의 단골가수인 자니 마티스의 ‘아베 마리아’ 그리고 맑고 고운 음성의 팻 분의 ‘퍼스트 노엘’과 함께 크로스비와 음성이 비슷한 페리 코모의 ‘두 유 히어 왓 아이 히어’ 등도 좋다.
그리고 시내트라는 ‘아일 비 홈 포어 크리스마스’를 잘 부르고 주디 갈랜드가 부른 자기가 주연한 영화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의 노래 ‘해브 유어셀프 어 메리 리틀 크리스마스’도 시즌 송 18번이다. 합창으로 부르는 ‘리틀 드러머 보이’는 애잔해 더욱 연말 분위기에 잘 어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당신 없는 크리스마스는 외롭다”고 궁상을 떠는 ‘블루 크리스마스’와 ‘실버 벨즈’도 재미있다.
이 밖에도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캐롤들로는 *어 할리 졸리 크리스마스 *오 홀리 나잇 *징글 벨 록 *록 어라운드 더 크리스마스 *윈터 원더랜드 *렛 잇 스노 *펠리스 나비다드 등이 있다. 앤젤리노들은 지금 KOST-FM(103.5)을 틀면 하루 종일 시즌 송들이 나와 이들 캐롤들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올드 랭 자인’을 들으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영화로 콧등이 시큰해지는 고운 것이 ‘동방박사의 선물’(The Gift of the Magi-사진)이다. O. 헨리의 단편소설이 원작으로 가족의 유물인 회중시계를 애지중지하는 말단 사원 짐(팔리 그레인저)과 탐스럽고 아름다운 긴 머리칼을 지닌 그의 아내 델라(진 크레인)의 크리스마스 선물교환 얘기다.
델라는 남편이 그렇게 좋아하던 자신의 머리칼을 팔아 남편을 위해 백금시계줄을 사고 짐은 자기 시계를 팔아 아내를 위해 고급 빗을 산다. 둘은 머리칼 없는 빗과 시계 없는 시계줄을 서로 교환하면서 자기들의 실수를 크게 웃는데 이 때 창 밖에서 캐롤이 울려 퍼진다.    
이 단편은 O. 헨리의 다른 단편들인 ‘마지막 잎새’와 ‘경찰과 성가’ 그리고 ‘클래리언 콜’ 및 ‘인디언추장의 몸값’ 등을 영화로 만들어 묶은 DVD ‘O. 헨리의 풀 하우스‘(O. Henry’s Full House)에 수록됐다.
크리스마스 단골영화로 해마다 이맘때면 TV로 마라톤 방영되는 3편의 영화가 있다. 꼬마 나탈리 우드가 나오는 진짜로 산타가 있다는 것을 법정에서 증명하는 ‘34가의 기적’(The Miracle on 34th Street)과 지미 스튜어트가 주연한 모든 개인의 중요성을 얘기한 ‘멋진 세상’(It’s a Wonderful Life) 그리고 빨간 장난감엽총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파 안달이 난 소년 랄피의 소원성취를 우습게 그린 ‘크리스마스 이야기’(A Christmas Story)를 꼭 보세요.  “해피 뉴 이여!”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