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8년 8월 21일 화요일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 (Crazy Rich Asians)

아들 닉의 애인 레이철을 맞이하는 엘리노어(왼쪽)의 표정에 온기가 감돌지 않는다.

재벌가 아들과 우여곡절 사랑 화사하게 묘사 ‘수작’


할리웃 메이저가 25년 전에 아시안 감독과 아시안 배우들을 사용해 만든 ‘조이 럭 클럽’ 이후 처음으로 아시안 감독(존 추)과 아시안 배우들을 동원해 만든 막대한 재산과 편견을 극복한 사랑의 승리의 코미디 드라마로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화사하고 재미있다. 
둘 다 뉴욕에 사는 싱가포르의 중국계 거대 부동산 재벌집 아들과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성공한 중국계 딸과의 우여곡절이 심한 사랑의 얘기인데 원작은 싱가포르 작가 케빈 콴의 베스트셀러. 가족과 전통과 명예에 집착하는 아시안들에게 특히 어필할 영화지만 내용은 보편적인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찍은 초현대식 건축과 의상과 음식 그리고 장식 등이 눈부신 칼라 촬영에 의해 화면을 야단스러울 정도로 찬란하게 장식하는데 이와 함께 주인공의 일가친척과 친구 등 수 많은 배역이 나와 누가 누구인지를 잘 구별하지 못할 정도다. 그러나 개개인의 묘사가 뚜렷하고 부와 호사의 극치를 보여주면서도 이를 천박하게 처리하지 않은 감독의 재치 있는 솜씨와 배려가 가상하다.
레이철 추(콘스탄스 우)는 2세 때 홀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 NYU의 경제학 교수가 된 아름답고 독립심 강한 여자. 그의 애인은 싱가포르의 엄청난 재벌집 아들 닉 영(헨리 골딩)인데 닉은 레이철에게 자기가 부자라는 것을 숨긴다. 닉의 절친한 친구 콜린(크리스 팽)이 자기 결혼식에 닉을 들러리로 서달라고 부탁하면서 닉은 레이철에게 동행을 제의한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레이철은 궁궐 같은 저택에 사는 닉의 가족이 동양 굴지의 부자라는 것을 알고 놀라고 당황한다. 그런데 레이철을 예의를 갖춰 맞는 닉의 어머니 엘리노어(미셸 여)의 표정에 온기가 안 돈다. 엘리노어는 미국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미국화한 레이철을 중국가족의 전통을 이해 못하는 여자라고 치부한다. 이와 함께 엘리노어의 친척들과 이웃 가십꾼들은 레이철이 닉의 재산을 노리는 여자라고 입방아들을 찧는다. 
레이철이 닉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소개되면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이 닉의 근엄한 친할머니 아 마(리사 루-필자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아마는 처음에는 레이철을 친절하게 맞는다. 
물 떠난 물고기 신세처럼 된 레이철의 싱가포르 문화와 풍습 안내자요 위로가 되는 사람이 미국에서 함께 대학을 다닌 졸부 아버지(켄 정이 웃긴다)를 둔 딸 펙 린 고(한국계 어머니와 중국계 아버지를 둔 래퍼 코미디언 아콰피나가 다른 배우들을 제치고 영화를 훔치다시피 한다).
연일 파티와 대연회가 열리고 장소도 도시와 휴양지 섬 등으로 이동하면서 눈요기 거리를 충분히 제공한다. 이런 상황 하에서 레이철은 자기를 수용 못하는 닉의 가족으로 인해 깊은 좌절감에 빠져 닉을 떠날 생각마저 한다. 그러나 참 사랑은 모든 악조건을 이기는 법. 
가족과 사랑의 중요성을 티 나지 않게 강조한 흥미진진하고 진지한 작품으로 연기들이 다 좋은데 특히 여의 엄격하면서도 자비로운 연기와 함께 우의 지적이요 민감하며 또 감정적인 연기가 돋보인다. 우와 골딩의 콤비도 일품. 연출이 물 흐르듯 매끄럽고 촬영과 음악도 좋다. 
PG-13 WB.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우리는 짐승들(We the Animals)

세 형제 중 막내인 조나(왼쪽)는 엄마와 감정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다.

10대 눈에 비친 어른들 삶·형제애·동성애… 시적이고 아름답게 그려



정열적으로 서로를 사랑하나 때론 폭력까지 동원해 싸우는 부모를 둔 어린 세 형제의 눈 그 중에서도 10세짜리 막내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삶과 형제애 그리고 육체적 성장과 성적 각성(동성애)을 거칠도록 시적이요 거의 초현실적으로 아름답고 강렬하게 그린 보석 같은 소품이다. 
지극히 절제된 영화로 별 얘기가 있는 것은 아니나 환상적인 촬영과 애니메이션을 동원해 표현한 아이의 내면의 온갖 생각과 감정이 피부가 상하도록 까칠까칠 하면서도 서정적으로 그려진 인상파 화가의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은 영화다. 
벗은 육체들이 치열하게 부딪치고 생명력을 과시하는데 특히 경탄스런 것은 세 아이들로 나오는 비배우 소년들의 자연스런 연기다. 그야말로 짐승처럼 뛰고 다투고 도둑질 하고 또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반항하는데 이들이 나오는 첫 장면부터 화면 안으로 빨려들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이 중요한 배역을 맡았지만 실제로 또래 아이들이 보기엔 성적 장면(TV화면이지만)이 많다. 
영화는 10대 안팎의 세 형제 중 막내인 조나(에반 로사도)의 눈과 귀와 내레이션에 의해 서술된다. 뉴욕 주 북부 시골에서 백인 엄마(쉴라 밴드)와 푸에르토 리칸 아빠(라울 카스티요)와 사는 세 형제 매니(아이재이아 크리스찬)와 조엘(조시아 게이브리엘) 그리고 조나는 “우리는 형제다”라며 똘똘 뭉친 아이들. 엄마는 소다공장에서 일하나 아버지는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한다. 영화는 이들 부부를 통해 앞날이 막막한 소시민들의 삶도 얘기한다.
엄마와 아빠는 뜨겁게 사랑하나 좌절감에 의해 자주 다투는데 그러면서도 엄마는 과거가 험남한 아빠의 육체와 성적 매력에 사정없이 빨려든다. 아이들은 이런 부모의 사랑과 애정 행위와 폭력과 화해를 순진한 눈으로 보면서 자란다. 아이들 중 위로 둘은 아버지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나 감수성이 예민한 조나는 어머니와 더 가깝다. 얘기의 부분 부분이 조나가 보고 느낀 것을 노트에 그림과 함께 빽빽이 적은 글로 서술된다. 
세 형제인 어린 아이들의 우정과 분노와 좌절 그리고 희망과 육체적 감정적 성장 및 막내의 성적 각성이 사랑하고 다투고 헤어졌다 화해하는 부모인 어른들의 삶과 교직되면서 정교하게 서술된다. 특히 훌륭한 것은 시골의 자연 풍경과 함께 클로스업을 자주 이용해 인간의 육체와 감정의 동물적인 근접성을 과시하면서 아울러 조나의 상상을 환상적인 형식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촬영이다. 음악도 좋다. 원작은 저스틴 토레스의 자신의 성장기를 쓴 동명 소설. 제레마이아 제이가 감독. R. The Orchard.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마키오카 자매들’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딱 하나만 고르라면 난 서슴없이 곤 이치가와 감독이 만든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1983^사진)을 고르겠다.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1938년 몰락해가는 오사카의 갑부 집 네 딸들에 관한 가족 멜로드라마로  화사하게 아름답고 향수감이 고즈넉하니 배인 작품이다.
원작은 주니치로 다니자키의 ‘세설’(Sesameyuki)로 제목은 봄철 가지에서 눈처럼 떨어져 내리는 사쿠라꽃을 말한다. 그리고 제목에서 ‘눈’이라는 뜻의 ‘유키’는 네 자매 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셋째인 유키코를 말한다.
소설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출판돼 독자들의 큰 인기를 끌자 검열당국에 의해 ‘온건하고 나약하며 천박하도록 개인적인 여자의 삶을 그렸다’는 이유로 출판이 금지됐다. 작품 인물과 사건들은 작가의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일들을 바탕으로 구성됐는데 소설은 이전에도 두차례나 영화화 했었다. 인본주의자였던 이치가와의 다른 영화들로는 반전영화들인 ‘버마의 하프’와 ‘들불’ 그리고 기록영화 ‘도쿄 올림피아드’ 등이 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사쿠라꽃이 활짝 핀 숲을 카메라가 롱샷으로 잡으면서 시작된다. 첫 장면에서 수줍은 기색의 화사한 사쿠라꽃을 보여준 카메라는 이어 눈 시린 푸른 기모노 차림에 입술에 새빨간 루즈를 바른 네 자매 중 둘째인 사치코(요시코 사카무)의 얼굴을 화면 가득히 클로스업 한다.
사치코를 비롯해 네 자매 중  첫째인 추루코(게이코 기시)와  유키코(사유리 요시나가) 그리고 막내 다에코(유코 고테가와) 및 사치코의 남편 데이노수케(코지 이시자카)는 연례 사쿠라 꽃 구경차 나들이를 나선 것.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어렸을 때 봄이 오면 모처럼 주말에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복작대던 창경원에 가서 사쿠라꽃 구경을 하던 옛날을 떠올렸었다.
추루코와 사치코는 시집을 갔으나 수줍음 많고 보수적이며 과묵한 유키코는 나이 서른이 되었는데도 아직 미혼이어서 언니들의 속을 태운다. 유키코는 여러 번 선을 보긴 하지만 매번 퇴짜를 놓는다. 그런데 데이노수케는 순수한 유키코를 연모한다.
넷 중 가장 신식이요 반항적인 다에코는 한 때 애인과 사랑의 줄행랑을 놓은 ‘모던 걸’로 집안 전통상 언니가 시집을 가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가 없어 아예 시집 갈 생각을 포기한 상태. 다에코는 마키오카 가문의 미운 오리 새끼.
마키오카 네는 과거 부상으로 크게 성공, 부와 호사를 누리던 집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운이 기울어가는 처지. 영화는 시대와 사회상과 가치관 및 가족의 전통 등이 변화하고 있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구시대를 상징하는 네 자매가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고요하고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네 자매는 몰락한 귀족사회를 상징하는데 이들의 현대화의 물결 앞에서 과거를 지키려는 안쓰러운 모습이 자매들의 내밀하고 세세한 일상사를 통해 거의 긴장감 감돌도록 무게 있게 묘사된다.
과거에 사는 자매들의 얘기이니만큼 작품 전체에 애잔한 노스탤지어가 고여 있다. 품위와 자존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의 권위의식과 체면과 신분유지의 꼿꼿함이 의연한데 이런 자매들의 양반의식은 이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기모노에 의해 함축성 있게 상징된다.
영화는 기모노와 오사카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카메라가 형형색색의 무늬와 색깔로 물든 기모노를 관상하면서 아울러 이를 입은 아름다운 자매들의 얼굴과 자태를 우아하게 포착한 촬영이 관능적이다. 이치가와는 색깔을 마치 무지개를 채색한 신의 조화처럼 부리고 있다. 봄의 분홍 일색인 사쿠라꽃들과 붉고 노란 가을 단풍 그리고 사방에 가득히 내리는 백설이 마치 살아 숨 쉬는 풍경화처럼 아름답고 몽롱하게 감각적이다.
끝에 도쿄로 전근하는 남편 다추오(‘담포포’ 등을 감독한 주조 이타미)를 따라 이사를 가기로한 추루코의 독백이 우리들의 삶을 잘 대변하고 있다. “계절도 변하고 일들도 벌어지지만 결국 변하는 것은 없구나.” 기품 있고 조락의 비감이 깃든 고운 영화로 가족을 한데  묶는 사랑을 강조한 작품인데 개봉이 되면서 일부 비평가들에 의해 ‘기모노 쇼’라는 평을 들었다. 그런데 이치가와는 기모노상의 아들이다.
‘마키오카 자매들’이 개봉 35주년을 맞아 22일 하오 7시 로열(11523 Santa Monica Blvd.)과 플레이하우스 7(673 E. Colorado Blvd. Pasadena) 및 타운센터 5(17200 Ventura Blvd, Encino) 등에서 상영된다. (310)478-3836.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