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웃음만 위한 영화는 원치 않아”
지금 뉴욕엔 부자와 빈민 두 계층만 있어 아주 슬픈 일
아내 순이가 늘 서울 가자 조르는데 난 가능한 미루려해
삶과 자기 직업에 깊은 회의를 느끼는 작은 마을 대학의 철학교수(와킨 피닉스)가 여제자(엠마 스톤)와의 로맨틱한 관계와 함께 뜻밖의 끔찍한 실존적 행위를 저지르면서 다시 생의 활기를 찾는 어두운 드라마‘비이성적인 남자’(Irrational Man)를 감독한 우디 알렌(79)과의 인터뷰가 7월25일 뉴욕의 런던 호텔에서 있었다. 알렌은 한국계 순이(44)의 남편. 안경 속에 놀란 토끼 눈을 한 알렌은 청력이 나빠서 손으로 귀를 감싼 채 질문을 듣고 대답을 했는데 자기비하적인 농담을 시치미 뚝 떼고 하면서 인터뷰를 즐겼다. 재치와 유머가 대단해 인터뷰가 재미 만점이었는데 순이 얘기를 할 때는 두 손으로 야단스러울 정도의 제스처를 써가면서 젊은 아내를 찬양했다. 둘이 굉장히 행복한 관계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와는 구면인 데다가 필자 역시 한국 사람이어서 그는 필자를 만나자 반색을 하면서“할로”하고 인사를 했다. 인터뷰 후 사진을 찍을 때 내가 그의 손을 꼭 잡자 알렌은“만나서 반갑다”며 미소를 지었다.
―영화의 교수는 창조적 능력을 상실한 채 허우적대는데 당신이 그런 경우에 처할 때면 거기서 어떻게 빠져 나오는가.
“난 다행이 그렇게 심하게 글이 안 써지거나 작품을 만들지 못해 허우적댄 경험을 하진 않았다. 내가 정신적으로 침체되거나 우울하거나 또는 의기소침해 질 때면 난 일을 함으로써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낸다.”
―작은 결정이 때론 우리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가.
“그렇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결정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 결정은 때론 큰 보상을 가져다주기도 하나 또 때론 평생을 저주처럼 따라다니기도 한다.”
―뉴요커 영화인으로서 옛 뉴욕과 요즘 뉴욕이 많이 달라졌다고 보는지.
“살기가 더 비싸졌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도시 자체는 변함없다. 9.11사태가 일어난 후 사람들이 나보고 ‘뉴욕이 이 이후로 과거와 같을 수가 있겠느냐’고 묻더라. 그에 대해 난 ‘예스’라고 대답했다. 그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거리를 걷고 극장과 식당엘 가면서 왕성한 에너지와 열광과 더불어 살고 있다. 뉴욕은 여전히 창조적이며 로맨틱하고 살기에 위대한 도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빈부 차가 벌어지면서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뉴욕에는 부자와 생계를 위해 투쟁하는 두 계층만이 있다. 아주 슬픈 일로 뉴욕에 중산층이 되살아나야 도시도 중흥하게 될 것이다.”
―오랜 감독생활을 해오면서 당신의 스타일에 달라진 점이라도 있는지.
“세트에선 변함없다. 난 조용한 편이고 별로 재미없는 개성을 지닌 것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외엔 모든 것이 변했다. 난 지금까지 45편 정도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아무리 바보라도 그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다보면 경험상 기술과 지식을 얻게 마련이다. 내가 위대한 감독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나 1969년의 데뷔작인 ‘돈을 갖고 튀어라’를 만들었을 때보다는 나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연출기법이 많이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이제 난 생의 문제에 처한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 따라서 영화가 옛날 것처럼 속도가 빠를 필요도 없다. 난 아직도 웃음을 사랑하나 옛날처럼 웃음만을 위한 웃음을 원치는 않는다.”
―요즘 정치·사회문제 중 관심이 있는 것이 있는지.
“난 예술가로서 그런데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시민으로선 우리 정부와 대통령과 나의 도시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민주당원으로서 빈부의 격차와 불평등 등 제반 문제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영화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난 늘 철학적 심리적 문제와 인간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문제들보다는 지속적인 관심사에 더 신경을 쓴다.”
“잘 있다. 지금 아이들과 함께 ‘파리의 미국인’을 구경하고 있다. 그들이 집에 없으니 혼자 조용히 각본을 쓸 수 있어 아주 좋다. 그런데 사실 나 오늘 여기 오는 것 깜빡 까먹었었다. 집에서 각본을 쓰고 있는데 내 언론담당자가 내게 전화를 걸어 ‘아니 당신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 기자회견에 와야 해요’라고 말해 부랴부랴 달려 왔다.”
―당신은 2년 전에 내게 순이 때문에 둘이 함께 서울에 간다고 해놓고 안 갔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똑같다. 우선 내 딸이 한국에 가 고아원에서 봉사하고 며칠 전에 돌아왔다. 순이가 몸살 나게 서울에 가고 싶어 한다. 모두들 순이에게 ‘너 꼭 서울에 가야해’라고 부추기는데 난 정말로 별로 가고 싶지가 않거든. 그러나 순이가 몇 년째 조르고 있어 결국은 가야 할 줄 안다. 나는 순이에게 ‘우리 파리나 바르셀로나에 가자’고 제의를 하지만 순이는 ‘거긴 그만 가도 돼’라면서 ‘당신 12월에 80세가 되고 곧 죽을 텐데 그 전에 서울 가고 싶어’라고 조른다. 따라서 불원 순이를 데리고 가야할 줄 알지만 가능한 한 지연작전을 쓰고 있다. 운이 좋으면 그 전에 죽을지도 모르지.”
―인생에서 돌연한 우연의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많다. 우린 살면서 모두 수백만 번의 우연한 순간을 경험한다고 본다. 내게 있어 그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예를 들지. 내가 옛날에 신년파티를 열었을 때다. 파티 후 며칠 지나 미아 패로로부터 초청해 주어 고맙다는 감사선물로 책이 왔다. 그래서 답을 한다고 전화를 걸다가 ‘다음 주에 점심이나 할까요’라고 제안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세계적인 뉴스가 됐지 (배우인 패로는 프랭크 시내트라와 앙드레 프레빈의 전처로 그녀가 한국 고아원으로부터 입양한 아이가 순이다. 알렌은 패로와 애인 사이였을 때 순이와도 관계를 가져 큰 화제가 됐었다).
―80세 생일을 어떻게 보낼 것이며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난 다섯 살 때부터 죽음에 집착해 왔다. 그래서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난 늘 죽음에 문턱에 섰다고 느껴왔고 그러면 공포에 휩싸여 몸이 굳어진다. 생일파티는 전연 계획이 없다. 난 그런 것 별로 안 좋아한다.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면서 ‘자 이제 너는 80이다, 70이다, 또는 90이다’라면서 축하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런 분위기는 불안만 조성할 뿐으로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저 가족과 식당에 기서 조용히 저녁을 먹을 예정이다. 건강이 지속되는 한 일을 계속해 하고 싶을 뿐이다. 내 아버지는 100세까지 살았으니 나도 그러고 싶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 보다 나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영화의 장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술의 발전으로 곧 사람들이 극장에 안 가고 집에서 큰 스크린으로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볼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는 일어나자마자 극장에 갈 생각에 흥분했었다. 크고 아름다운 극장에서 수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마법적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젠 랩탑으로들 영화를 본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옛날 영화에 관해 애기하면 그들은 ‘시민 케인’과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봤다고 하는데 극장이 아니라 전화기로 본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국 밖으로 나가 어딘가 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극장이 그렇게 쉽게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비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너무 이성적이다. 그래서 난 예술가보다는 선생 타입이다. 내가 조금만 더 비이성적이었다면 보다 나은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너무 중간층이고 이성적이고 조직적이며 비겁하다. 이성적인 것은 나를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주기에 어떤 면에선 좋다. 그런데 너무 정신이 멀쩡한 것은 예술가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다.”
―여전히 왕성한 당신의 창작활동의 근원은 무엇인가.
“건강이 좋았고 이 나이에도 활동적이요 정력적인 것은 유전인자 탓이다. 운동하고 잘 먹고 담배도 안 피고 또 건강을 해치는 어떤 나쁜 습관도 없다. 난 일하기를 좋아하고 또 즐긴다. 건강이 유지되는 한 내 아버지처럼 90 넘게 살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 나도 그렇게 산다면 계속해 쓰고 영화를 만들 것이다. 난 백만 가지의 아이디어가 있거든. 난 쓰고 영화 만드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영화의 주인공은 대학 교수인데 당신은 좋은 교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난 논리적이요 생각이 분명하고 또 가르칠 수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자신이 영화인으로서보다 선생으로서 더 잘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 아주 불량한 대학생이었다. 뉴욕대의 영화제작과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부모 탓이다. 그러나 1학년 때 모든 과목에서 낙제를 해 퇴학당했다. 그런데 요즘 미국 대학교육은 아주 엉망이다. 어떻게 가르칠지를 모른다. 따라서 셰익스피어를 배운 학생들이 오히려 셰익스피어를 미워해 다시는 그 근처에 가려고 하지를 않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