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네 이름으로 날 불러다오 (Call Me by Your Name)

17세 난 소년 엘리오(왼쪽)는 연상의 올리버를 사랑하면서 부쩍 성장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정열적이고 애잔한 ‘금지된 사랑’


아름답고 뜨겁다. 태양열에 구은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과 두 젊은이의 드러난 육체와 그 육체가 율동하면서 벌이는 사랑의 행위 그리고 그들의 준수한 미모와 첫 사랑의 희열과 궁극적으로 다가오는 이별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열정으로 끓는다. 
17세 난 소년이 첫 사랑을 하면서 감정적으로 어른이 되는 성장기이자 인간의 본능과 내성 그리고 상호관계를 매우 지적이요 감성 깊게 그린 작품이다. 뜨거운 여름 한철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감정적으로 깊이 맺어지는 17세 난 소년과 24세 난 대학원 인턴의 동성애를 훤히 들여다 보여주는 식으로 솔직하게 그렸다. 
두 주인공 역의 잘 생기고 신체 늠름한 아미 해머와 버들가지처럼 간들거리는 육체와 거의 소녀같이 곱게 생긴 총명한 모습의 티모데 샬라메의 화학작용이 절묘하다. 감독은 이탈리아의 루카 과다니노(‘아이 앰 러브‘ ’어 비거 스플래쉬‘)로 그는 이 두 사람 간의 정서적 육체적 로맨스를 매우 상세하고 통찰력 있으며 또 부드럽게 화면에 담고 있다. 원작은 앙드레 아시만의 소설로 과다니노와 제임스 아이보리가 공동으로 각색했다.
이탈리아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시골 롬바르디의 고저택에 사는 그레코 로만 조각 전문교수 펄만(마이클 스툴바그)의 집에 미국에서 24세 난 인턴 올리버(31세의 해머가 24세의 인턴 역을 하기엔 좀 늙었다)가 연구차 한 여름 묵기 위해 찾아온다. 펄만은 올리버에게 17세의 갈비씨 책벌레 아들 엘리오의 방을 내주고 엘리오는 자기 방 옆의 창고로 쓰이는 방으로 옮긴다. 
두 방이 바로 붙어 있어서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서로를 엿보게 된다. 이런 설정부터 봐이에리즘의 선정성을 부추긴다. 처음에 엘리오는 이 잘 생긴 미국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 올리버도 마찬 가지.
둘은 책과 문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동네 고적과 마을 광장과 들과 해변으로 함께 다니면서 서서히 서먹함을 푸는데 두 사람이 모두 간편한 여름 옷 차림인데다가 때로 짧은 수영복만 입어 육체의 자연미가 광채를 발하면서 둘의 성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런 감춰진 욕망은 두 사람의 응시와 접촉과 표정 그리고 대화 등을 통해 암시된다. 
둘은 마침내 첫 키스에 이어 정열적인 정사를 나누는데 이 장면이 매우 에로틱하고 아름답다. 한편 올리버는 엘리오를 타락시키지(?) 않겠다는 의도로 관계에 쉼표를 찍으나 엘리오는 기갈 들린 사람처럼 올리버를 계속해 더 원한다. 그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다. 그리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엘리오의 복숭아 장면이 나온다. 잘 익은 복숭아가 이토록 에로틱한 효과를 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엘리오는 올리버를 사랑함으로써 부쩍 성장하는데 여름이 저물면서 올리버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침묵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긴 엘리오와 올리버의 이별 장면이 애잔하니 아름답다. 
해머가 파격적인 역을 맡아 진지하면서도 민감하고 정감 있는 연기를 잘 하는데 특별히 볼만한 것은 샬라메의 연기다. 별 말 없이 얼굴 표정과 몸동작으로 첫 사랑에 들뜨고 희열하고 아파하는 연기를 깊고 다양하게 연기한다. 그리고 스툴바그의 연기도 훌륭하다. 이와 함께 자연과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광채 나게 찍은 태국 촬영감독 사이욤부 묵데프롬의 촬영도 눈부시다. R등급. Sony Pictures Classics. R.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등 일부지역.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크리스마스를 만든 사람 (A Man Who Invented Christmas)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집필하고 있다.


소설‘크리스마스 캐롤’ 집필 둘러싼
디킨스 주변 사람들 재미있게 담아


찰스 디킨스가 어떻게 해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쓰게 되었는가를 허구를 마음껏 사용해 묘사한 요란하고 변덕스럽게 그린 코미디 드라마로 다소 무겁고 신선감은 없으나 그런대로 즐겁게 볼 수 있는 할러데이 시즌용 가족영화다. 
일종의 전기영화로 디킨스의 삶과 ‘크리스마스 캐롤’의 내용을 자유롭게 변용해 현실과 책의 내용을 뒤섞어 드라마로 만들었다. 출연진의 다양한 연기와 충실히 묘사한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소설의 집필 과정을 그럴싸하게 묘사, 즐길 만 하다.
디킨스가 이 소설을 쓴 것은 31세 때. 그 전에 낸 책이 세 차례나 대중의 외면을 받아 디킨스(댄 스티븐스)는 지금 재정난과 함께 슬럼프에 빠져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디킨스가 다음 소설로 구상하고 있는 것이 ‘크리스마스 캐롤’의 내용. 그러나 그의 출판사는 크리스마스 얘기는 안 팔린다고 출판을 거부한다. 
이에 아랑곳 않고 디킨스는 소설을 6주 만에 집필해 자비로 출판한다. 그가 글의 아이디어를 찾아 방안을 헤매면서 난리법석을 떠는 모습이 재미있다. 작가의 창조적 예술적 과정에 대한 얘기이기도 한데 물론 책은 불티나게 팔린다. 디킨스는 책의 아이디어를 자기 가족과 자기가 만나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얻는다. 인자하고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케이트(모피드 클락)와 어린 자기 아이들에게 베드타임 스토리를 읽어주는 하녀 타라(안나 머피) 그리고 사람은 좋으나 무책임한 아버지 존(조나산 프라이스) 등이 가족.
그리고 그의 소설 속 인물의 아이디어를 주는 사람들로는 에브네저 스크루지의 모델이 되는 나이 먹고 인정 없는 구두쇠 사업가(크리스토퍼 플러머)와 병약한 조카. ‘험버그’를 소리치는 구두쇠는 스크루지가 돼 디킨스의 환상 속에서 디킨스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디킨스는 그 외 소설 속에 나오는 혼들과도 만난다. 물론 병약한 조카는 소설 속의 타이니 팀의 모델이다. 
이들 외에도 영화에는 디킨스의 친구이자 에이전트인 존 포스터(저스틴 에드워즈)와 디킨스 소설의 삽화가(사이몬 캘로우) 그리고 디킨스와 동시대 작가로 디킨스의 실패를 고소해 하는 윌리엄 메이크피스 대커리(마일스 줍) 등 여러 인물들이 나와 내용에 다양성을 제공한다.
BBC-TV 드라마 시리즈 ‘다운턴 애비’로 유명해진 스티븐스가 복잡하고 다소 이기적인 디킨스 역을 과장되게 코믹하면서도 경쾌하게 잘 해내고 스크루지의 모델인 자린고비 역의 베테런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역시 베테런인 조나산 프라이스 등이 호연한다. 이 밖에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PG.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등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사무라이’(Le Samourai·1967)

캡션 추가

고독하고 냉혈하지만 쿨한 킬러, 알랑 들롱 매력 가득


신사복 정장에 타이를 맨 킬러는 트렌치 코트를 입은 뒤 코트 깃을 올리고 이어 페도라를 쓴다. 킬러는 페도라의 앞을 손으로 좌우로 쓰다듬은 뒤 문을 열고 아파트를 나선다. 킬러는 이어 길에서 자동차를 훔쳐 탄 뒤 차고에 들러 자동차 번호판을 바꾸고 차고 주인으로부터 권총을 건너 받고 자기 임무를 위한 목적지로 간다. 목적지에 도착한 킬러는 손에 흰 장갑을 낀 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이 무표정한 얼굴의 쿨한 킬러가 프랑스 갱스터영화의 명장 장-피에르 멜빌(‘도박사 밥’ ‘밀고자’ ‘붉은 원’ ‘형사’)의 우아한 스타일을 지닌 ‘사무라이’의 주인공 제프 코스텔로다. 제프 역으로는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도는 비수 같은 눈동자를 지닌 알랑 들롱이 나온다. 이 영화는 들롱의 연기 생애를 확정지은 킬러영화로 1940년대의 미국 갱스터영화와 1960년대의 프랑스 팝문화 그리고 일본 사무라이영화의 외톨이 검객의 신화를 칵테일한 쿨한 작품이다. 
과묵한 들롱이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을 압도하면서 고독하고 냉혈한 킬러의 창백한 매력을 독소를 품은 향기처럼 발산한다. 그가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름답고 차가운 얼굴의 미간을 찌푸리면서 노려보는 눈매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는 시계의 앞면을 오른손 안쪽으로 보이게 차 시계를 볼 때마다 옷소매를 올리는 제스처가 독특한 멋을 발산한다. 
파리의 칙칙하게 어두운 곰팡이 색깔의 검소한 싱글 룸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는 제프를 카메라가 멀리서 찍은 장면으로 시작된다. 4월4일 토요일 오후 6시다. 방에는 새장에 갇힌 새 한 마리가 있는데 이 새는 자기 운명에 갇힌 제프의 고독과 신세를 상징한다고 봐도 좋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와 ‘태양은 가득히’ 등 프랑스의 많은 명화들을 찍은 앙리 드카에의 무드 짙은 촬영이 영화의 스산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칼러인데도 시종일관 찌푸린 날씨처럼 음산하다. 
프로 킬러인 제프는 목표를 살해하기 전에 고급 창녀인 애인 제인(들롱의 부인 나탈리 들롱)을 찾아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는다. 영화는 시작해서 제프와 제인이 대사를 나누기까지 10분 간 말이 없다. 
제프의 목표는 고급클럽 마티스의 주인. 살인을 하고 나오는 제프를 클럽의 몇 명의 사람들이 목격하는데 그 중에서도 제프의 얼굴을 정면에서 가까이 본 사람이 클럽의 흑인 여 피아니스트 발레리(캐시 로비에). 발레리가 치는 재즈곡과 함께 프랑솨 드 루베가 작곡한 재즈음악이 킬러영화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제프는 자기 일의 대가를 받으러 갔다가 배신을 당해 자기를 고용한 자가 보낸 하수인이 쏜 총에 팔에 부상을 입는다. 여기서부터 제프는 복수를 하려고 자기를 고용한 자를 찾는다. 한편 형사반장(프랑솨 페리에)이 이끄는 수사팀이 수사에 나서면서 제프를 비롯한 거리의 ‘평상시 용의자’들이 대거 경찰서에 끌려온다. 
클럽에서 제프를 목격한 사람들이 서로 엇갈리는 증언을 하는 가운데 발레리도 제프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위증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제인도 제프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밤 자기와 함께 있었다고 위증하면서 제프는 풀려난다. 그러나 형사반장은 제프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제프의 뒤를 집요하게 쫓는다. 
집에 돌아온 제프를 맞는 자가 자기에게 총상을 입힌 하수인. 이 자가 제프에게 200만 프랑을 주면서 자기 두목이 지시한 자의 살해를 요구한다. 제프가 이 자를 때려누인 뒤 그로부터 자기를 고용한 자의 이름과 주소를 받아낸다. 제프가 배신의 복수를 위해 자기를 고용한 자를 찾아가는 뒤를 형사들이 추적하는데 제프가 이를 피하려고 지하철을 여러 차례 갈아타고 형사들을 따돌리는 장면이 멋과 함께 서스펜스와 스릴이 있다. 
그가 찾아간 집은 배신자의 집은 발레리가 사는 집. 제프는 배신자를 총으로 사살하고 마티스클럽으로 간다. 그리고 모자 보관소에 모자를 맡긴 뒤 티켓도 남겨놓고 이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흰 장갑을 끼고 발레리에게 다가가 그에게 총구를 겨냥한다. 그리고 요란한 총성이 들린다. 제프는 왜 모자 보관 티켓을 안 받았으며 왜 발레리에게 다가갔는가. 이 고독한 외톨이 늑대의 실존적 킬러영화가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새로 복원된 블루-레이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원더’(Wonder)

이자벨(줄리아 로버츠)은 얼굴이 오그라든 아들 오기를 키우는데 온갖 정성을 쏟는다.

장애아 둘러싼 갈등과 용서… 훈훈한 연말 가정영화


할러데이 시즌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훈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을 고양시키는 드라마로 주인공이 10세 난 초등학생이어서 그 또래의 아이들이 즐겨 보겠다.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수용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인정 그리고 용서와 친절과 연민을 강조한 얘기다.
내용이 다소 진부하고 감상적이지만 작품의 의도가 진지하고 인간적이며 또 순수해 뉘앙스의 부족과 같은 단점들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넘어서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유머도 있다. 특히 주인공 꼬마 역의 제이콥 트렘블리(‘룸’)의 경탄을 금치 못할 연기와 그의 부모로 나오는 줄리아 로버츠와 오웬 윌슨의 콤비와 연기가 좋은 조화를 이룬다. 이와 함께 조연진의 연기도 다소 가벼운 영화에 무게를 실어준다. 
뉴욕에서 따스한 어머니 이자벨(로버츠)과 유머가 많으나 약간 아이처럼 구는 아버지 네이트(윌슨) 그리고 착하고 예쁜 고등학생인 누나 비아(이자벨라 비도빅)와 함께 사는 10세 난 오기 풀만(트렘블리)은 출생 때부터 얼굴이 흉하게 오그라져 그 후 수술을 27회나 받았으나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오기는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을 받고 우주인의 헬멧을 쓰고 산다. 
오기가 열살이 되면서 이자벨은 오기를 학교에 보내기로 한다. 이에 네이트는 동조는 하나 아들이 학교에서 또래들로부터 받을 차별에 대해 걱정이 태산 같다. 물론 오기는 학교에서 줄리안(브라이스 가이사) 등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지만 이에 굴복치 않는다. 
오기는 매우 총명하고 성숙해 교사들도 놀랄 정도인데 오기에게 특별히 자상한 사람들은 교장선생 투쉬만(맨디 패틴킨)과 담임선생 브라운(데이빗 딕스) 그리고 오기가 특별히 잘 하는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 페트나(알리 리버트) 등.
영화는 오기와 오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아끼는 친구 잭(노아 주프) 그리고 비아와 비아와 사이가 어긋난 단짝 친구 미란다(다니엘 로즈 러셀) 및 줄리안 등의 얘기 식으로 챕터가 나뉘어 서술된다. 
오기의 학교생활과 가정생활과 함께 오기 때문에 부모의 관심에서 물러나 있는 비아의 얘기가 큰 플롯을 이루는데 비아는 부모가 온 정성을 오기에만 쏟는 것에 가끔 좌절을 느끼나 이를 이해하는 착한 소녀다. 그리고 비아와 미란다의 관계와 함께 비아의 첫 사랑인 학교 동급생으로 연극광인 저스틴(나지 지터)과의 풋사랑이 아름답게 얘기된다. 
영화가 원체 선해 오기를 못 살게 굴던 줄리안마저 나중에 구원(?)을 받게 되는데 세상에 이렇게 좋고 착한 사람들만 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요즘 세상에 딱 필요한 영화이기도 하다. 나이보다 작은 체격의 오기가 무수히 변화하는 감정의 사이클을 다변하게 연기한다. 분장으로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인데도 제스처와 음성과 분위기로 에너지 충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스티븐 치보스키 감독(공동 각본).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신의 섭리’(The Divine Order)

노라와 남편 한스. 뒤에‘주부 파업중’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평범한 주부서 여권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 아담하고 재미있고 그려


1971년 알프스 인근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여권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아담하고 재미있고 경쾌하게 그린 스위스영화다. 집 밖에는 모르던 여자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면서 자아발견을 함과 동시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까지도 혁신의 바람을 몰아다주는 ‘여성 만세’ 드라마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심각한 주제를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이끌어가는 여류 감독 페트라 볼페의 솜씨가 사뿐하다. 시의에 어울리는 얘기이기도 한데 어떻게 끝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 긴장감이 새는 것이 흠이다. 보기 좋은 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조연진의 다양한 연기. 독어 대사에 영어자막.
노라(마리 로이엔베르거)는 목재공장에 다니는 남편 한스(막스 지모니쉑)와 어린 두 아들 그리고 시아버지와 가사를 돌보는 전형적인 모범주부. (*노라라는 이름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의 주인공인 여권해방론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리라). 노라는 자기도 직업을 갖고파 보수적인 남편에게 얘기했다가 딱지를 맞는다. 당시 스위스 법으로 아내는 남편의 허락 없이는 직업도 못 가진다. 그러니 여자에게 투표권이 있을 리가 없다. 
노라가 여권운동에 앞장서게 된 직접적 이유는 자기 언니(라헬 브라운슈바이크)의 반항적인 딸 한나(엘라 룸프)가 장발의 오토바이족 애인과 함께 달아났다가 붙잡혀 수용소에 갇히게 되면서다. 한나가 그렇게 된 데는 노라의 책임도 있기 때문. 
여기서부터 얌전하던 노라는 남편과 주위 남자 그리고 일부 여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여권운동에 나선다. 이에 동조하는 여자들 중에 특히 돋보이는 여자가 옛날부터 여권운동에 나섰던 7순의 브로니(지빌레 브룬너)와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신여성 그라지엘라(마르타 조폴리). 
이들과 나머지 여성들은 그라지엘라의 식당에 본부를 차리고 투표권을 비롯한 각종 여권신장운동에 돌입한다. 그리고 노라 등은 베른에서 열리는 여권운동 시위에 동참하고 스웨덴에서 온 여성 선각자로부터 여자의 은밀한 부분이 지닌 힘을 배운다. 그러나 노라와 동지들의 여권 운동에 남자들이 마이동풍 식으로 나오자 이들은 아내와 어머니 역을 거부하는 스트라이크를 시작한다. 
영화 끝에 남녀평등이 스위스 헌법에 명기된 것은 1981년이요 전 스위스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얻게 된 것은 1990년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온 런던 브리지’


‘난 어제 밤 런던 다리 위를 걸었지요/가로등 불빛에 당신을 보았어요/종소리가 졸린 런던타운에 울리면서/런던다리가 내려왔어요. 하늘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지만/우리가 키스를 했을 때 마치 마법처럼/달과 별들이 주위에서 빛났지요/런던다리가 내려왔을 때였어요. 다리 위엔 오직 당신과 나만이 있었고/두 마음은 허공중에 매달려 있었지요/그리고 강 위 높은 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어요. 두 텅 빈 마음은 끌어안을 사랑을 발견했어요/두 개의 담배연기 고리는 황금의 반지로 변했지요/나는 우리가 런던타운에서 만난 날을 찬미 한답니다/런던 다리가 내려왔을 때지요.’ 
내가 좋아하는 여가수 조 스태포드가 부르는 ‘온 런던 브리지’다. 런던에 가면 생각나는 노래다. 이달 초 영화일로 런던에 1주일간 다녀왔다. 런던날씨는 생각보다 온화했다. 갖고 간 버버리코트도 하루 저녁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동료회원인 키다리 스웨덴친구 마그너스와 같이 숙소인 랭함호텔 인근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하이드파크를 걸을 때 딱 한번 입었다.
런던은 그 동안 영화일로 여러 번 방문, 내 동네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피카딜리 서커스의 대형 전자간판에는 Samsung이 점멸하고 빨강색 2층버스 옆에는 손흥민의 웃는 얼굴사진이 붙어있다.
거리 공중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인 천사가 매달려 행인들을 내려다보고 있고 펍 앞에는 여전히 보도까지 꽉 메운 술꾼들이 너도 나도 손에 맥주잔을 들고 서있다. 버스를 타고가다 당장 뛰어내려 그들 속에 끼어들어 맥주 한잔 하고픈 생각에 갈증이 났다.
런던은 차도의 폭이 좁은 탓인지 교통 혼잡이 맨해탄 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차도도 인도도 차와 사람들로 대 혼잡을 이루고 있는데 이런 번잡함으로 겪는 피로는 바비 다린이 노래한 ‘어 나이팅게일 생 인 바클리 스퀘어’의 바클리 스퀘어를 비롯한 도심 곳곳에 자리 잡은 손바닥만한  공원에서 풀어도 될 것 같다.   
하루 가는 비가 왔는데 비 맞은 탓인지 런던에서 처음으로 대형 우산가게를 봤다. ‘셰르부르의 우산’의 우산가게가 생각났다. 노점에 매어달린 히틀러 콧수염을 한 트럼프의 얼굴이 새겨진 셔츠를 보고 킬킬대고 웃었다. 미국에서도 저런 셔츠 파나.
랭함호텔을 비롯해 클래리지와 로즈우드호텔로 옮겨 다니며 인터뷰한 배우가 자그마치 22명.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세트방문하고 인터뷰하고 영화까지 보는 초 강행군 일정이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새새 짬을 내 거리를 걸었지만 피곤이 누적돼 늦가을 런던정취를 만끽하지 못해 지금도 찜찜하다.
만난 배우들은 줄리아 로버츠, 벤 애플렉, 에디 레드메인, 미셸 파이퍼, 갤 개돗, 페넬로피 크루즈, 오웬 윌슨, 브라이언 크랜스턴 및 미셸 도커리 등. 이들이 나오는 영화들은 현재 촬영 중인 ‘팬태스틱 비스츠 2’를 비롯해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살인’과 ‘래스트 플랙 플라잉’ ‘저스티스 리그’ ‘원더’ 그리고 TV시리즈 ‘갓리스’ 등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인터뷰에 녹초가 된 몸으로 애플렉과 개돗 등 호화캐스트가 나오는 ‘저스티스 리그’를 봤는데 어찌나 꼴불견인지 난장판 액션 소음 속에서도 깜빡 깜빡 졸면서 봤다.   
‘팬태스틱 비스츠 2’를 찍고 있는 런던 인근의 리브스텐 스튜디오는 ‘해리 포터’시리즈를 찍은 곳이다. 의상과 소품실에 이어 1927년대 파리거리 세트를 둘러보고 뉴욕 고층건물 꼭대기 세트에서 영화에 나오는 레드메인 등을 인터뷰했다.
이번 런던 방문에서 가장 뜻 깊었던 일은 ‘영화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12월 15일 개봉)의 실제 주인공 피터 터너를 만난 것. 내년으로 창립 75주년을 맞는 HFPA가 이를 기념해 대부분 영국의 영화와 TV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메이페어 호텔에서 연 파티에서였다.
우연히 나만한 키를 한 대머리에 단단한 체구를 지닌 남자와 대화를 나눴는데 이 사람이 “내가 그 영화의 피터 터너”라고 자기를 소개했다.(사진) 난 그에게 “정말이냐. 너무나 반갑다”며 악수를 나눈 뒤 서로 긴 얘기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터너는 영화에서 자기 역을 한 제이미 벨과 얼굴이 닮았다.   
이 영화는 할리웃 황금기의 섹시스타 글로리아 그램이 생애 마지막 무렵인 56세 때 런던에서 만난 28세 연하의 터너와의 로맨스를 그린 것이다. 영화에서 그램으로는 아넷 베닝이 나온다. 터너는 먼저 “나 한국 음식 아주 좋아 한다”고 운을 떼더니 얘기를 자기 애인에게로 돌려 ”그램의 눈을 보면 그 안으로 빨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그램은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다“고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어렸을 때 그램의 ‘빅 히트’를 보고 그에게 반해 그램의 팬이 되었다고 말하자 터너는  “그 영화와 ‘인 더 로운리 플레이스’가 좋았었지”하면서 “우리는 정말로 뜨거운 사랑을 나눴고  난 지금도 그램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내가 좋아하던 옛 스타의 실제 연인을 만나 과거를 얘기하자니 내가 마치 흑백영화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빅토리아와 압둘’ 주디 덴치




“고독한 여왕에게 압둘은 잠자던 정열 깨운 존재”


‘빅토리아와 압둘’(Victoria and Abdul)에서 여왕 즉위 50주년을 맞아 인도에서 예물을 갖고 온 젊은 서기 압둘 카림과 오랜 우정을 지속했던 빅토리아 여왕으로 나온 주디 덴치(82)와의 인터뷰가 토론토영화제 중인 지난 9월 토론토의 페어몬트 로열 요크호텔에서 있었다.
짧은 백발에 품위를 지닌 덴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치미를 뚝 딴 유머를 섞어 친절하고 재치 있게 질문에 대답했는데 매우 명랑하고 인터뷰를 즐기는 모습이 마치 귀여운 소녀 같았다. 그런데 덴치는 시력이 나빠져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덴치는 ‘미시즈 브라운’(1997)에서도 빅토리아 여왕으로 나왔고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1998)에서 또 다른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 나와 오스카 조연상을 탔다. 

-빅토리아 여왕으로 두 번이나 나왔는데 여왕에 대한 의견은 어떤 것인가.
“두 번째로 빅토리아로 나오리라곤 전연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빅토리아와 압둘의 얘기도 몰랐다. 나는 빅토리아의 남편 알버트에 대한 정열과 함께 빅토리아가 남편을 잃은 뒤 겪은 슬픔에 대해선 알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정열적인 사람으로 이런 정열을 모두 포기하고 있을 때 압둘이 나타나 여왕의 내면에서 잠자던 정열을 다시 점화시켜 놓으면서 여왕의 말년을 구제해준 셈이다. 압둘은 그 누군가와 의견을 교환하고 얘기를 나누면서 긴장을 풀 필요가 있는 사람의 정열적인 면을 되살려놓은 사람이다. 그것은 마치 꽃이 다시 개화하는 것과도 같다.”

-80세가 되었을 때 뜻밖에 받은 선물은 무엇인가.
“내 딸과 함께 닥치는 대로 쇼핑을 하고 있는데 딸이 갑자기 문신을 새길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 ‘예스’라고 답했다. 그래서 팔목에 ‘카르페 디엠’(오늘을 마음껏 살아라)라는 문신을 새겼다.” 

-그렇다면 ‘카르페 디엠’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매일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만 보려고 팔찌로 문신을 가리긴 했으나 가끔 보면서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떻게 해서 압둘은 자기 나라의 정복자인 당신에게 ‘여왕 폐하를 섬기는 것은 몸 둘 바를 모르는 특전’이라며 순종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곤란한데.
“그는 예의범절이 매우 바른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섬긴다고 한 것은 단순히 하인 노릇을 한다기보다 영화에서 보다시피 여왕에게 우루드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고 봐야겠다. 그의 섬김으로 인해 여왕은 희망을 갖게 되고 또 매일 아침 일어날 그 무언가를 갖게 된 것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두 문화가 서로를 알게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 내용이 요즘 시의에도 적용된다고 보는지.
“그렇다. 아주 적당한 시기에 나왔다고 본다. 압둘은 회교도이고 빅토리아 여왕은 기독교도이지만 서로 이해하고 사랑했다. 요즘처럼 서로 다른 종교가 다투는 때 이보다 더 좋은 교훈도 없을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압둘로부터 우르드어를 배우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편지를 많이 썼는데 본인도 아직 글을 펜으로 쓰는가. 
“난 늘 편지와 엽서를 많이 썼는데 이젠 시력이 나빠져 더 이상 그렇게 많이 쓰지를 못한다. 내게 있어 그것은 큰 손실이다. 나는 이 인터뷰에 오기 전에 편지를 썼는데 눈이 안 보여 애를 먹었다.”

-보수적인 빅토리아 여왕이 어떻게 해서 회교도에게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있었다고 보는가.
“여왕은 고지식하고 엄격하고 자식들과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긴 하다. 이 영화가 흥미 있는 까닭은 그런 여왕이 놀랍게도 내면에 애정에 대한 심각한 갈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왕은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또 그것을 교환할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모든 것이 격식위주인 삶에서 마음 놓고 함께 웃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왕의 내면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이 영화가 흥미 있는 까닭이다.” 

-배우와 인간으로서의 긴 생애를 돌아 볼 때 무언가 달리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없는지.
“난 원래 무대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러나 지난 1950년대 스트래트포드의 무대에 설치된 ‘리어왕’의 디자인을 보고 내겐 저런 상상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배우가 됐고 그 결정에 대해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종종 무대 디자인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한다.”

-압둘로 나온 알리 화잘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는가.
“촬영에 들어가기 이틀 전에 만났는데 즉시로 일체감을 느꼈다. 그는 유머 감각이 많은 사람으로 처음 보는데도 긴장감이나 서먹서먹한 느낌이 전연 없었다. 그는 아주 멋쟁이로 함께 일 하기가 정말로 좋았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원작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도 나오는데 재미있었는지. 
“별로 대사도 많지 않고 그저 화려한 장신구에 잘 차려 입고 열차에 앉아 있으면 돼 즐거웠다. 그리고 내 친한 친구인 케네스 브라나가 감독해 더 좋았다. 그와 나는 이번으로 10번째 함께 일하는 것이다. 브라나는 감독일 뿐 아니라 영화의 주인공인 탐정 퐈로로도 나온다. 앙상블 캐스트 영화로 멋진 시간을 보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팬인가.
“그가 대단한 존재이긴 하나 특별한 팬은 아니다. 

-연극을 감독한 적이 있는데 영화를 감독할 생각은 없는지.
“케네스 브라나가 주연하는 연극을 두 편 감독했다. 그런데 그 일은 너무 힘들어 영화는 물론이요 연극도 더 이상 감독할 생각이 없다.”

-영화에서 여왕과 압둘은 만나는 즉시로 교감이 돼 둘은 영혼의 만남을 이룬 셈인데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는가.
“몇 차례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도 이해하고 또 느낌으로 금방 가까워질 수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과 친근해질 수 있는 일종의 지름길이다. 내가 함께 일한 감독들 중에도 더러 그런 사람이 있는데 이 영화를 만든 스티븐 프리어스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스티븐은 과묵한 사람이지만 우린 별 말이 없어도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다.”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시력이 나빠져 잘 볼 수는 없지만 그림을 좀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난다. 난 늘 친구 특히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모두 함께 모여 카드를 하고 게임을 하면서 즐기는 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다. 내게 있어 함께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뜻을 지닌 것은 없다.”

-여왕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나 사실은 자유도 없고 자기가 살고픈 대로 살지도 못하는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자리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도 표현됐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것을 스케줄에 따라 해야 한다. 매일 같이 그렇게 산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닌 막중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치하할만한 일이다.”

-여왕처럼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대면한 경험이 있는가.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폭군처럼 자신의 힘을 마구 행사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난 적이 있다.”

-운동은 하는지.
“두 무릎을 다 수술해 하루에 10분을 속보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시력이 나빠져 이젠 운전도 못하는데 운전면허증이 발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난 스포츠카가 있었는데 그 것을 몰고 어딘가를 가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로 유감이다. 시력이 호전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매일 같이 하는 반복해 하는 일이라도 있는가.
“이 닦는 것 외엔 없다.”

-본인에게 있어 매일은 날마다 다른가.
“바라건대 매일이 각기 다 달랐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루해 죽을 것이다. 난 지금까지 60년을 무대에서 활동했는데 이 나이에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운이 좋았다. 특히 이 직업에서 이 나이에 아직도 고용될 수 있다는 것은 진짜로 운이 좋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승객들.  왼쪽이 명탐정 퐈로역의 케네스 브라나.

초호화 캐스팅으로 리메이크한 살인 미스터리극


영국의 여류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원작으로 영국의 배우이자 감독인 케네스 브라나가 연출하고 주연도 겸했는데 특급열차가 영화에서처럼 눈사태를 맞아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연출이 지지부진하고 탄력이 없어 초호화 캐스트영화인데도 지루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살인 미스터리극이 되고 말았다. 
이 소설은 지난 1974년 시드니 루멧이 감독하고 알버트 피니, 션 코너리, 로렌 바콜, 리처드 위드마크, 잉그릿 버그만(이 영화로 오스카 조연상 수상), 마이클 요크, 재클린 비셋, 앤소니 퍼킨스 및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등이 출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이 영화도 잘 생기긴 했으나 외모만큼 내용이 실하진 못했으나 브라나의 것보단 훨씬 낫다. 
브라나의 영화의 대죄는 앙상블 캐스트의 영화에 미국과 영국의 탑클래스 배우들을 기용하고도 이들을 완전히 버리다시피 한 것이다. 배우들이 하나같이 제 구실을 못하고 마지못해 나왔다는 듯이 어색한데 그에 반해 브라나가 너무 독주를 하고 있다. 그는 자동차 운전대만한 콧수염을 하고 나와 심한 프랑스어 액센트를 구사하면서 자주 자기 얼굴을 클로스업으로 과시하고 있다. 브라나가 오버 액팅을 하는 원맨쇼다. 
브라나가 맡은 역은 세기의 명탐정인 벨기에 태생의 에르퀼 퐈로. 퐈로는 하도 유명해 과거 피터 유스티노프, 알버트 피니, 이안 홈 및 오손 웰즈 등도 이 역을 맡았었다. 
영화는 서막식으로 1931년 예루살렘에서의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모처럼 휴가를 즐기고 있는 퐈로가 통곡의 벽 앞에서 발생한 절도사건을 푸는 얘기다. 이어 런던에서 큰 사건이 발생해 퐈로에게 즉각 귀환해 달라는 전보가 날아든다. 
가장 빨리 돌아갈 수 있는 길이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유럽으로 가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열차의 사무장이 퐈로의 친구인 북(탐 베이트만)이어서 퐈로는 쉽사리 특급칸을 얻는다. 퐈로의 이웃 승객들은 직업과 국적과 출신 성분이 각기 다른 12명. 
여자 가정교사 메리 데벤햄(데이지 리들리), 집사 베도스(데렉 자코비), 영국인 의사 아부스노트(레즐리 오돔 주니어), 남자 찾느라 혈안이 된 고독한 허바드 부인(미셸 파이퍼), 하녀 출신의 선교사 필라(페넬로피 크루즈), 독일인 교수 게르하르트 하르트만(윌렘 다포), 영국인 노 귀부인(주디 덴치) 그리고 얼굴에 흉한 칼자국이 난 배경이 깨끗하지 못한 미국인 새뮤엘 래쳇(자니 뎁) 및 래쳇의 하인 매퀸(조시 개드) 등. 그런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래쳇이 퐈로에게 자기 신변보호자로 고용하겠다고 제안을 하나 퐈로로부터 거절을 당한다. 
기차가 “칙칙폭폭” 하면서 신나게 달리다가 대형 눈사태를 만나 탈선을 하는데 이어 래쳇이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죽는다. 이에 북은 퐈로에게 현지 경찰이 오기 전에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다. 현지 경찰이 알았다간 열차의 명성이 훼손될 것이 두려워서다.
열차의 수리반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퐈로는 수사를 시작하는데 12명이 모두 혐의자다. 여기서부터 브라나가 일인극이다시피하게 혼자서 대사를 외어가면서 독주하는데 그 바람에 다른 배우들은 주눅이 들어 우물쭈물하고 있다. 정차한 기차처럼 영화의 서술과 진행이 올스탑해 긴장감도 서스펜스도 느낄 수가 없고 감정도 결여됐다. PG-13. Fox.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펠리시테’(Felicite)


펠리시테가 골목 카페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열창하고 있다.

밤골목 카페 여가수의 애잔한 삶·노래
열정적 아프리카 선율‘한편의 뮤지컬’


화끈하게 정열적이요 땀 냄새가 나고 꺼칠꺼칠할 정도로 사실적인 한 여인의 사랑과 생존의 이야기로 뜨거운 아프리카 대륙 콩고의 킨샤사가 무대다. 거의 기록영화 같은 실존적이요 생명감이 넘치는 영화로 주인공이 골목 카페의 여가수여서 노래가 많이 나온다. 이 거리 노래들의 열기에 화상을 입을만하다.
열정적인 노래들이 거구의 주인공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듣노라면 영육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흥분감에 젖게 된다. 주인공 펠리시테 역의 신인 여배우 베로 티샨다 베야의 막강한 연기가 영화에 강한 에너지를 부어 담는데 킨샤사 현지 거리에서 찍은 생동감 넘치는 촬영도 영화의 사실성을 부추긴다.
처음에 펠리시테가 거리에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큰 제스처와 함께 열창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0대 아들 사모(가에탄 클라우디아)를 혼자 키우는 펠리시테는 골목 카페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런데 사모가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펠리시테는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는 사람마다 찾아다니면서 돈을 빌린다. 펠리시테가 동네 깡패 두목을 비롯해 생전 모르는 사람의 집마저 찾아다니면서 돈을 구걸하는 모습이 집요하고 처절하다. 보기에 고통스러울 정도인 모정과 생존의 적나라한 모양이다.
이와 함께 펠리시테의 밤 골목 카페에서의 노래가 섞여드는데 손님 중 하나가 주정뱅이이자 바람둥이인 동네 미케닉 타부(파피 므카파). 그러나 타부는 내면에 부드러운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자로 펠리시테를 사랑한다. 그리고 펠리시테도 그에게 마음을 준다. 영화의 후반부는 펠리시테와 타부와의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관계와 함께 역시 펠리시테의 노래들로 연결된다.
노래의 치유 능력도 이야기하고 있는 일종의 뮤지컬인 셈인데 펠리시테가 부르는 노래들이 하나 같이 아프리카 밀림 속의 짐승들처럼 야수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비롯해 북적대는 킨샤사 거리의 풍경 등 모든 것이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작품처럼 사실적인데 간혹 타오르는 대낮의 거리의 장면을 꿈을 꾸는 듯한 밀림의 모습과 대조한 촬영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와 함께 아마추어 연주자들로 구성된 킨샤사 교향악단이 낡은 창고에서 클래시컬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도 펠리시테의 폭발적인 열창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알랭 고미 감독.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레이디 버드’(Lady Bird)


고3 레이디 버드는 집을 떠나 훨훨 나르는 새처럼 살고싶다.

자유갈망 10대의 청춘고백, 첫 경험 등 위트 있게 그려


키가 껑충하니 크고 숲속의 요정처럼 맑고 신선한 분위기와 34세의 나이에도 소녀 같은 모습을 한 배우 그레타 거윅의 감독(각본 겸) 데뷔작으로 위트 있고 총명하고 재빠르며 통찰력이 뚜렷한 영화로 듣기 좋고 보기 좋다. 거윅은 벤 스틸러와 공연한 ‘그린버그’로 두각을 나타낸 자연스런 연기파로 주연한 ‘프랜시스 하’의 감독 노아 바움박의 애인이다. 
이 영화는 거윅의 고교 3학년 때의 자기 얘기로 그의 고향 새크라멘토에 바치는 연시이자 질식할 것 같은 가정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파 안달이 난 10대의 청춘고백이다. 특히 거윅은 캘리포니아 주의 수도이지만 서자 취급받는 새크라멘토를 마치 우디 알렌이 뉴욕을 사랑하듯이 극진한 마음으로 찬미하고 있다. 그러나 과하지 않고 절제 있게 다루었다.   
본명이 크리스틴 맥퍼슨인 주인공이 자기 이름을 마다하고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는 이유도 새처럼 자유롭고 싶은 마음과 자기를 사랑하나 사사건건 간섭하고 현실에 안주하라고 압력을 넣는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서다. 
이런 10대의 얘기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이 영화도 다소 기시감은 있으나 거윅은 레이디 버드와 그의 부모 그리고 애인과 친구의 얘기를 소상하게 보여주면서 이들을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다뤄 그의 관용과 이해심이 갸륵하게 느껴진다.
2002-2003년 새크라멘토. 중산층 가족의 외딸 레이디 버드(셔사 로난)는 가톨릭학교 졸업반. 착한 아버지 래리(트레이시 레츠)는 실직자여서 간호사인 어머니 매리온(로리 메트캐프)이 살림을 도맡다시피 한다. 그런데 매리온은 절대적 현실주의자로(꿈이 없어서 라기 보다 현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봐야겠다) 집을 떠나 훨훨 날아가고파 하는 딸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레이디 버드의 반발은 커지면서 지역대학교에 가라는 어머니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대학에 원서를 넣는다.           
이런 가정생활과 함께 레이디 버드의 학교생활과 친구와 애인과의 관계가 사실적이요 우습고 아기자기하게 그려진다. 먼저 반항적인 레이디 버드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석수녀(로이스 스미스)와의 관계가 포근하고 자비롭다. 
레이디 버드가 처음에 눈독을 들인 남자는 학교연극 ‘템페스트’에서 공연하는 잘생긴 대니(루카스 헤지스). 그러나 잘 나가던 둘의 관계는 레이디 버드가 전연 생각하지도 못한 일로 인해 끝이 난다. 이어 레이디 버드가 눈독을 들인 아이가 파격적인 독서광 카일(티모데 샬라메). 레이디 버드는 이 아이를 통해 섹스를 실험하고 경험하는데 첫 섹스를 경험하는 레이디 버드의 내면과 행위가 우습고 부끄럽고 겸연쩍고 아울러 저돌적으로 그려졌다. 아주 현실감이 있다. 
마침내 레이디 버드는 연극도 잘 끝내고 졸업을 한 뒤 대학에 진학한다. 입학에 큰 격려와 협조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뜻 밖에도 집안의 국외자 같았던 아버지 래리. 끝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다소 재잘대는 말이 많기는 하지만 거윅은 자기와 자기 주변 인물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는 심정으로 솔직하고 아름답게 그렸다.
연기들이 출중한데 특히 로난의 당돌하고 의기양양하면서도 10대의 허점이 있는 연기와 딸을 사랑하면서도 내리누르는 현실로 인해 본의 아니게 권위적인 사람이 되고만 매리온 역의 메트캐프의 다양한 연기가 눈부시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LBJ’


린든 존슨이 ‘에어포스 원’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36대 대통령 존슨의 정치 전기영화… 우디 해럴슨과 도노반의 연기 볼만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허수아비 같은 부통령이었다가 케네디의 사망으로 대통령이 된 뒤 민권법안을 통과시키고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프로그램 등을 만든 제36대 미국 대통령 린든 베인즈 존슨의 정치 전기영화다. 
쇼맨쉽이 강했던 케네디의 후광과 그의 비극적 사망으로 인해 진가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던 존슨의 개성과 정치적 역량을 새롭게 조명했는데 정통 전기영화의 틀을 답습하고 있지만  흥미 있는 영화다. 
존슨으로는 우디 해럴슨이 나오는데 분장을 진하게 했으나 전연 존슨 같지 않다. 그러나 해럴슨이 저속한 상소리를 내뱉으면서 저돌적으로 해내는 연기 하나만으로도 볼만한 영화다. 그와 함께 케네디로 나온 제프리 도노반의 해럴슨과 대조되는 점잖 빼는 차분한 연기 역시 아주 좋다. 그런데 도노반도 전연 케네디 같지 않게 생겼다. 
영화는 1963년 케네디가 재키와 함께 달라스를 방문해 오픈카를 타고 시내를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해 모터케이드와 케네디가 오스왈드의 저격을 받고 쓰러지는 장면이 얘기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식으로 진행된다.
존슨은 여당인 민주당의 상원 대표로 닳고 닳은 정치인. 입이 걸고 직선적이고 실무적이며 목표를 위해선 타협도 마다 않는 남부(텍사스) 토박이로 케네디에 맞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나 열세다. 그를 자상하게 돌보고 응원하는 사람이 그의 부인 레이디 버드(제니퍼 제이슨 리). 이어 케네디가 동생 바비(마이클 스탈-데이빗)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존슨에게 부통령직을 제의한다. 남부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존슨은 의원시절의 막강한 권력을 다 잃고 대통령의 들러리 노릇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극히 싫어하는 바비가 자기 대신 존에 이어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 분명하다고 믿게 되면서 그의 좌절감은 극도로 커진다. 
이를 뒤바꿔 놓은 것이 케네디의 죽음. 대통령이 된 존슨은 자기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남부출신 의원들을 배신(?)하고 케네디가 추진하던 민권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이로 인해 그는 막강한 남부 출신 의원들과 적이 된다. 마지막 장면은 케네디가 시작한 일을 계속하자는 존슨의 상하양원 의회합동연설로 장식되는데 아주 감동적이다. 존슨은 베트남전을 확대하면서 국민의 인기가 떨어지자 1969년까지의 임기를 마치고 차기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다시 한 번 존슨의 인물과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볼만한 작품이다.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뱀피르’


덴마크의 엄격한 감독 칼 테오도어 드라이어의 분위가 스산한 ‘뱀피르’(Vampyr^1932^사진)는 걸작 초기 흡혈귀영화 중의 하나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 최면에 걸린 것 같은 분위기와 혹독할 정도로 꾸밈이 없고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영상을 갖추어준 괴이하도록 아름다운 작품이다. 드라이어의 또 다른 걸작으로는 영화사에 길이 남는 마리아 팔코네티 주연의 ‘잔 다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1928)이 있다. 
‘뱀피르’의 잿빛 몽상과도 같은 영상은 헝가리 태생의 촬영감독으로 유럽서 활동하다 후에 할리웃으로 옮겨 촬영을 거쳐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루돌프 마테의 솜씨다. 마테가 할리웃에서 감독한 영화들은 ‘D.O.A.’   ‘낙인’ ‘유니언 스테이션’ ‘도둑왕자’ 및 ‘미시시피 도박사’ 등이다.  ‘뱀피르’는 드라이어의 첫 유성영화로 카메라 및 편집기술과 함께 다양한 음향효과를 써 꿈과 같은 공포무드를 조성하고 있는 73분짜리 작품. 움직이는 그림자와 빛의 명암을 극적으로 사용해 보는 사람을 악몽으로 몰아넣는데 세트는 독일 표현주의영화 ‘닥터 칼리가리의 관’(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을 연상케 한다.
내용은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젊은이가 파리 인근의 한 마을에 들렀다가 겪는 초현실적이요 불길한 현상과 악마적 현실이 뒤섞인 경험을 그렸다. 서서히 움직이는 안개와 죽음을 전조하는 큰 낫 그리고 불길한 메아리 등이 보는 사람의 감관을 두려움으로 감싸 안는다. 출연은 제작비를 댄 사람과 대부분 감독이 촬영현장에서 고른 사람들이 했는데 독일어 등 3개국어로 녹음했다. ‘뱀피르’가 최근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복원된 독일어판 블루-레이로 나왔다.
무성영화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만들어지고 있는 흡혈귀영화의 매력은 무엇인가. 우선 그 것은 우리 내면에 잠복한 어두운 욕망이 갈구하는 공포와 변태성을 충족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흡혈귀의 색깔이라 할 블랙은 감각적이요 퇴폐적이고 염세적이며 또 야수적으로 그 것은 두려움과 저주 그리고 비밀과 죽음을 품고 있다. 이런 성질은 모두 우리가 탐하거나 피치 못할 것들이다.     
검은 망토를 걸친 드라큘라는 밤에만 활동하는 사체이지만 매우 인간적이다. 그에겐 백작 칭호가 달려 있는데다가 초인의 능력을 지녀 어둠의 수퍼맨이라 부를만하다. 또 이 고독한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집착하는 로맨틱한 정열파다. 그리고 그는 치명적인 성적 매력을 지녔다. 그 성적 매력은 악마적인 것으로 아무래도 성적 매력이란 어두워야 제 가치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여자들이 ‘암흑의 왕자’라 불리는 드라큘라에게 자기 목을 서슴없이 내어주는 까닭을 알만하다.
그런데 드라큘라의 사랑은 저주받은 국외자의 것이요 반드시 피를 봐야하는데다가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간절하고 비극적이다. 그래서 그가 사랑을 못 이룬 채 인간에 의해 타살되며 내지르는 한과 고통의 비명을 듣게 되면 이 밤의 신사에게 깊은 연민의 정마저 갖게 된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이 원작인 드라큘라영화의 고전 중 하나인 유니버설사 작품 ‘드라큘라’(Dracula^1931)는 헝가리 태생의 주연 벨라 루고시를 공포영화의 빅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다. 그는 강한 액센트와 함께 천천히 대사를 구사하면서 압도적이요 초연한 연기로 흡혈귀의 신비감과 저 세상 같은 분위기를 완벽히 보여주었다. 그의 후배 드라큘라들로 크리스토퍼 리, 프랭크 란젤라, 잭 팰랜스 및 탐 크루즈 등이 있지만 지금도 루고시는 드라큘라와 동일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수 많은 흡혈귀영화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독일의 명장 F.W.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Nosferatu^1922)다. ‘노스페라투’는 흡혈귀의 루마니아어. ‘공포의 심포니’(A Symphony of Horror)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는 빛과 그림자와 조명 그리고 카메라의 동작을 통해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명작이다.
특히 꿈에 볼까봐 겁이 나는 흡혈귀 올록백작(막스 슈렉)의 모습은 욕지기가 날 정도로 추하다. 역대 드라큘라 중 가장 추남으로 쥐 같은 얼굴에 해골처럼 마른 몸과 길고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독수리 발톱을 닮은 야위고 긴 손가락을 한 그는 세균을 온몸에 묻히고 다니는 악의 화신과도 같다.
독일의 또 다른 명장 베르너 헤르조크가 ‘노스페라투’를 치하하면서 리메이크한 ‘노스페라투 흡혈귀’(Nosferatu the Vampyre^1977)도 내가 좋아하는 흡혈귀영화. 독일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가 드라큘라로 그의 희생물 루시 하커로는 프랑스의 따갑도록 아름다운 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나온다. 특이한 것은 드라큘라가 좋은 흡혈귀라는 점. 드라큘라는 루시를 사랑해 상사병에 걸리는데 그가 시름에 빠져 축 늘어져 있는 측은한 모습을 보자니 동정심마저 간다. 사랑엔 흡혈귀도 속수무책이로구나. 이 작품은 화사한 수채화 같은 칼러영상과 함께 시적 분위기를 지닌 아름다운 공포영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1월 2일 목요일

예비수녀(Novitiate)


캐슬린은 신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고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예비 수녀들의 갈등·고뇌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작


1960년대 초 수녀원의 기성 수녀들과 예비 수녀들의 관계와 갈등과 우정을 깊이 있고 지적으로 해부한 탁월한 드라마로 신성하면서도 세속적이다. 신병 훈련소 소장처럼 엄격하고 혹독한 수녀원장과 이에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나이 먹은 수녀들 그리고 원장의 독주에 저항하는 젊은 수녀의 얘기와 함께 이들의 밑에서 고된 훈련을 받는 예비수녀들의 종교적 인간적 정열과 신에 대한 믿음과 회의를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고 또 스타일 멋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회의와 함께 이 가운데서 시달리는 예비수녀들의 육체적 영적 갈등과 고뇌가 절실히 가슴을 파고드는데 이런 갈등에 서스펜스 스릴러 분위기마저 감돈다. 신인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함께 흥미진진한 내용에 함몰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1964년 장소를 알 수 없는 곳의 한 수녀원. 주인공인 예비수녀 캐슬린 해리스(마가렛 퀄리)가 어떻게 해서 수녀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가 회상식으로 얘기된다. 어린 캐슬린은 무신론자인 어머니에 끌려 동네 성당미사에 참석하는데 어머니가 딸을 이 곳에 데려온 이유는 종교란 허망한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캐슬린은 부부싸움이 잦은 집안 분위기와 정반대인 성당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이어 캐슬린은 장학금을 주는 지역 가톨릭학교에 입학하고 17세가 되면서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녀원의 예비수녀 후보로 들어간다. 
자신을 신의 대리인이라고 말하는 인정사장 없이 엄격한 원장(멜리사 리오가 과장됐을 정도로 신나게 열연한다) 밑에서 후보생들은 기혹할 정도로 모진 훈련을 받는데 이에 여러 명이 세상으로 돌아가고 12명 정도만 남는다. 다양한 후보생들의 모습과 성격이 골고루 묘사되는데 한 후보생은 오드리 헵번이 나온 영화 ‘파계’를 보고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이어 바티칸에서 획기적인 개혁안이 채택된다. 미사를 라틴어에서 일상어로 하고 자신에 대한 체형을 금지하며 타종교에 관대하며 아울러 수녀들이 지닌 권위를 대폭 위축시킨다는 내용이다. 이에 결사반대하는 것이 원장과 고참수녀들. 그런데 실제로 이 조치 이후 전 세계서 90,000여명의 수녀가 파계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캐슬린은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신부복을 입고 수녀가 되기 전의 한 의식인 신과의 결혼식을 치른다. 수녀들의 성적 욕망과 자위행위 그리고 동료 간의 육체적 접촉과 이에 대한 죄의식 등이 민감하고 절제 있게 묘사되면서 작품을 사실적이면서도 고상하게 격상시킨다. 
캐슬린과 원장과 함께 중점적으로 얘기를 이끌어 나아가는 사람이 진보적인 수녀 메리 그레이스(다이애나 애그론). 그레이스는 고집불통인 원장의 횡포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원장의 적이 되다시피 한다. 마침내 캐슬린이 정식 수녀가 되는 의식이 열린다. 라스트 신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림자와 빛을 잘 사용한 촬영과 고전 합창곡과 현대음악을 고루 쓴 음악도 좋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고참 리오를 비롯해 신인 배우들의 연기가 깊이가 있고 엄숙하며 고요하게 빛을 발한다. 여류 매기 베츠의 감독 데뷔작으로 그가 각본도 썼다. 적극 관람을 권한다. 성인용.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서버비콘(Suburbicon)


가드너(오른쪽)와 로즈의 평온한 삶은 심야강도에 의해 파괴된다.

코엔 형제 각본·클루니 감독… 치정살인 미스터리·인종차별 섞인 블랙코미디


유혈 낭자하고 사체가 쌓이는 블랙 코미디의 장인들인 코엔 형제가 각본을 쓰고 조지 클루니가 감독을 한 치정살인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인종차별을 다룬 드라마인데 완전히 다른 두 영화를 잘못 섞어놓은 것처럼 생경하다. 
겉으로는 멀쩡한 백인들의 인종차별과 우월의식을 넌센스 코미디 식으로 가차 없이 우습게 풍자한 내용과 치정을 둘러싼 보험금을 노린 살인극이 물에 기름 탄 것처럼 서로 겉돌고 있다. 빅 스타들이 나와 그들의 이미지와 다른 연기를 하는 희한한 영화다. 
1959년 미국의 어느 급조한 스필버그 영화의 마을 같은 교외의 백인 동네. 하얀 담장에 새로 지은 집들이 나란히 줄지어 선 이 동네에 어린 아들을 둔 흑인 부부가 이사 오면서 평소 이웃에게 친절하고 상냥하던 백인들의 타 인종에 대한 증오심이 타오른다. 
이들과 다른 가족이 라지 가족. 다소 비만하고 안경을 쓴 가장 가드너 라지(맷 데이먼)는 회사 재무담당 사원으로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나 속은 검다. 그의 부인 로즈(줄리안 모어)는 윌체어에 의지해 사는데 둘 사인엔 어린 아들 닉키가 있다. 이 집의 또 다른 구성원이 로즈의 쌍동이 자매 마가렛(모어). 진보적인 라지 가족은 닉키를 이웃인 흑인 가족의 아들과 놀도록 한다.
어느 날 밤 두 명의 괴한이 라지 집에 들어와 로즈를 살해하고 달아난다. 졸지에 어머니를 잃은 닉키를 자기 아들처럼 극진히 돌보는 것이 마가렛. 로즈의 생명보험금이 지불되기 전 보험회사로 부터 로즈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하려고 버드 쿠퍼(오스카 아이작)가 라지네 집을 방문한다. 이어서 유혈 낭자한 폭력과 살인이 일어난다. 끔찍한데도 킬킬대고 웃게 되는데 이런 설정이 코엔 형제의 ‘화고’를 연상시킨다. 
이런 살인 미스터리와 함께 백인 주민들의 흑인 이웃에 대한 증오심이 폭발하면서 방화와 폭력이 자행된다. 그리고 여기에 남군기가 등장한다. 클루니는 평소에 내면에 잠복해 있다 때가 되면 고개를 드는 점잖은 중산층 백인들의 위선과 인종차별을 다소 젠체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시사성이 있는 내용과 흥미 위주의 다크 코미디를 범벅했으나 가상한 뜻만큼 내용이나 연출이 따르질 못한다. 볼만한 것은 데이먼과 1인2역의 모어의 연기로 특히 데이먼이 겉은 순진해 보이나 속에 감춘 불만과 한이 있는 남자의 연기를 능청맞게 잘한다. R등급.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