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4월 10일 금요일

‘의사 지바고’




6순이 넘는 나이에 오는 18일 새 장가를 드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부회장으로 이탈리안인 로렌조 소리아가 얼마 전 이메일로 청첩장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너의 나라에서는 간통을 법으로 처벌하지 않으니 썩 괜찮은 나라로구나.”
이는 물론 최근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간통을 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한 농담이다. 나는 로렌조의 글에 대해 “그래, 이제야 우리나라는 문화 선진국이 됐다”라고 답신했다.
간통은 성인 남녀 간 합의 하에 이뤄지는 행위로 그것은 도덕적 문제이지 국가가 나서서 법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간통을 범죄로 처벌한 것은 옛날에 우리나라 남자들이 “마누라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된다”고 떠들던 때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치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여성의 사회·경제적 위상이 크게 향상된 데다가 여성이 피보호대상이 아니라 자기 결정권의 주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과거 남편의 압박과 설움에 시달리던 우리나라의 아내들이 아직도 남존여비의 고루한 사고에 절어 있는 남편들을 버리는 경우가 부쩍 늘어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 그 일례다.
이사 갈 때 남편이 아내의 애견을 안고 아내보다 먼저 이삿짐 차에 달랑 올라탄다는 농담이 나온 지 오래다. 이번 헌재의 결정을 여성계가 환영한 것이 이렇게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간통은 성서시대부터 있어온 장구한 역사를 지녔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다윗과 바스세바다. 간통은 이처럼 오랜 역사를 통해 인간이 반복해 온 행위여서 소설과 영화의 주제로 자주 쓰여지고 있다. ‘간통소설’이라는 장르까지 있는데 김동인의 ‘감자’와 ‘김연실전’도 그런 소설이다. 또 ‘보바리 부인’ ‘안나 카레니나’ 및 ‘차털레이 부인의 사랑’ 그리고 ‘이산 프롬’과 볼품없는 준이치 와타나베의 ‘실낙원’ 등도 다 간통소설이다.
우리의 기억에 남는 많은 영화들도 간통을 주제로 삼고 있다. ‘간주곡’ ‘여정’ ‘종착역’ ‘자, 항해자여!’ ‘우체부는 항상 벨을 두 번 누른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및 ‘지상에서 영원으로’ 등의 주인공들이 다 간부들이다. 기혼남녀가 키스만 한 것도 간통이라면 ‘카사블랑카’와 ‘짧은 만남’도 간통영화다.          
소설이나 영화 못지않게 실제 명사들 중에도 간부들이 적지 않다. 최무룡과 김지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올가, 잉그릿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 그리고 프랑솨 미테랑과 안 팽조 등이 다 혼외정사의 당사자들이다.
간통영화의 금자탑은 ‘의사 지바고’(사진)라고 하겠다. 간통의 두 당사자인 지바고와 라라의 얼굴 표정이 늘 우수에 젖어 있고 또 그들의 안타까워하는 눈동자를 보면서 간통의 죄책감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지바고는 아내 토냐를 사랑하면서도 라라를 무슨 게시처럼 지고하게 사랑한다. 아내와 애인에 대한 사랑은 그 모습이 서로 다른가.
알다가도 모를 것은 사람들은 실제 간통은 단죄하면서도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에 대해서는 온갖 미사여구로 찬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의 사랑은 ‘아름답고 로맨틱하고 정열적이요 비극적이며 또 황홀하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간절하다’는 찬양 일색이지 그들을 ‘더러운 것들’이니 ‘벌 받아 마땅한 것들’이라고 비난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금기와 비밀스런 것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지바고와 라라가 대리 충족시켜 주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역설적이요 이율배반적이다.
간통은 너무도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어서 예수는 아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사전 경고를 했다. 나는 교회에 나가던 고등학생 때 예쁜 여학생을 훔쳐 볼 때마다 예수의 이 말 때문에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동부장로교회의 이용규 당회장은 남녀 신도 간의 악수도 금한다. 문제발생 가능성에 대한 사전 차단조치다. 예수도 말했듯이 간통의 주체는 남자로 간주되는데 같은 남자로서 억울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장난명 아니겠는가.
간통은 왜 저지르는가. 다르고 새로운 것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의 말에서도 내 비쳐져 있다. “간통의 심리란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한 매력은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진지한 애정과 공존할 수 없다는 관습적 도덕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헌재의 이번 결정을 놓고 앞으로 간통이 성해질 것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그것은 유치하고 전 근대적인 발상이다. 간통죄는 남녀 불평등 시대의 산물이다. 남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해질 때에 가서야 진짜로 간통죄가 폐지될 것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