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5월 30일 월요일

‘범죄자’의 케빈 코스너




“내 인생과 가족과 아이들, 모두가 큰 축복”


액션 스릴러‘범죄자’(Criminal)에서 죽은 CIA 요원의 기억을 이식 받은 흉악범 제리코로 나온 케빈 코스너(61)와의 인터뷰가 지난 1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안경을 끼고 간편한 차림에 늠름한 모습을 한 코스너는 굵은 음성으로 미소를 지어가면서 유머러스하게 인터뷰에 응했는데 나이가 먹어서인지 옛날의 다소 뻣뻣하던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비롯해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는데 농담을 하면서도 침착한 태도는 잃지 않았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누구의 것을 택하겠는가.
“내 아내다. 그래서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 내가 왜 늘 그 생각을 제대로 이해 할 수가 없는지를 알고 싶다. 역사적 인물로는 링컨이다. 위기의 때에 나라를 단결시키려고 노력한 그의 생각을 알고 싶다.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그의 두뇌가 절실히 필요할 때다.”

-이 영화는 솔직히 말해 내용이 비현실적인데 당신도 각본을 읽었을 때 그렇게 느꼈는가.
“맞다. 이 영화는 팝콘영화다. 사실 난 이 영화 출연을 두 번 거절했었다. 제작자와 감독이 어떻게 해서 내가 이런 폭력적인 인물 역을 맡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을 맡기로 한 뒤로 나는 완벽한 폭력적 악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관객들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이식 받는다는 영화의 주제를 받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기억을 못하는 알츠하이머 증세가 노인들에겐 큰 문제인데.
“나도 그것을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난 나보다도 우선 내 부모가 날 잊지 말기를 바란다. 어서 과학이 발달돼 그 같은 질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나오기를 바란다.”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지 못한 재능 중 당신 두뇌에 더하고 싶은 재능은 무엇인가.
“그림 그리는 것이다. 난 오렌지조차 그릴 줄 모른다. 다른 사람이 그리는 것을 보면 쉬운 것 같은 데도 난 안 된다. 그밖에도 바라는 것이 많지만 난 지금 매우 많은 일을 할 수가 있기에 더 이상 바란다는 것은 욕심이다. 내 인생과 가족과 아이들이 다 큰 축복이다.”

-당신은 열렬한 환경보호자로 알고 있는데.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은 멋진 광고를 내는 석유회사들이다. 늘 사람을 이끌어온 돈이 문제다. 사람들은 돈을 위해 죽이고 파괴하고 또 그것으로 권력을 산다. 내 회사는 지금 석유회사들이 쓴 물을 정화시키는 일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으로 농업용수를 만들기 위해서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실험 중이다.”  
명 수사관의 기억을 이식 받은 범죄자역 의 케빈 코스너.

-바야흐로 선거철인데 정치적 의견이 개인적 편견으로 추락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남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자기 음성만이 중요하다. 정치란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따라서 정치가란 우리나라의 이상을 앞서 나가게 할 수 있는 거대한 이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고도로 성숙해야 한다. 요즘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오겠다는 사람들의 토론을 보면 토론이 아니라 고함지르는 것이다. 아이 같은 짓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난 솔로몬이 아니다. 모르겠다.”

-당신에게 있어 좋은 액션영화란 어떤 것인가.
“이야기가 액션에 상응해야 한다. 플롯에 구멍이 안 나야 훌륭한 액션영화다. 이 영화는 액션이 멋있지만 플롯에 다소 구멍이 난 것도 사실이다. 난 이 영화의 액션장면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다. 역을 위해 머리를 흉측하게 깎은 것을 보고 내 어린 딸이 ‘엄마 아빠가 사람들하고 싸워’라고 물었다. 요즘 영화는 이야기에서 멀어지는 대신 특수효과에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요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아직도 신체 강건하고 또 젊음을 유지하는가.
“영화를 위해 불린 12파운드의 체중을 영화가 끝나면서 말끔히 제거했다. 내가 얼마나 젊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내 아이들을 위해 건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막내딸을 위해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강한 남자가 되려고 애쓴다. 그 아이가 자기 남자를 찾기 전까지는.”

-제리코는 감정이 없는 사람인데 당신이 할 수 있다면 자신으로부터 어떤 감정을 제거하고 싶은가.
“나는 공포가 사람들을 주춤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난 그것을 물리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왔다. 삶에 있어 높낮이가 있긴 했지만 뒤돌아보니 난 내가 살고자 하는 그대로 살아 왔다. 난 세트에 나갈 때면 나와 일할 사람들이 내게 대해 어떤 위압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서로 협력해 일을 잘 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긴장했을 때보다 느슨할 때 더 연기를 잘 한다.”

-당신 부모는 어떤 사람들인가.
“난 캘리포니아의 캄튼에서 검소하게 자랐다. 나의 아버지는 경제공황 때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로 와 평생 한 직업에만 종사했다. 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이 야구를 하면 놓치지 않고 보러 왔다. 우리에게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었다. 난 어렸을 때 우리 마당을 왕국으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집에 풀이 있는 것을 보기 전까진. 가난했지만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부모가 당신에게 해 준 조언은.
“아버지는 내게 내가 하는 일에 바른 제목을 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캔디가 먹고 싶은데 돈을 내고 사면 그것이 하는 일에 옳은 제목을 다는 것이고 배가 고프다고 그냥 집어가면 그것은 그른 제목을 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는 일에 바른 제목을 달아야 그것이 인생의 길잡이가 된다고 했다. 우린 가난해서 아버지와 나는 식당엘 가도 추가로 음식을 시키지 않았다. 이런 일이 늘 마음에 걸렸는지 그 후 난 내 친구를 식당에 초대하면 사이드 오더 시키라고 권하곤 한다. 어머니는 사랑에 빠지기란 아주 쉬워 데이트 상대를 신중하게 고르라고 했다. 누구를 만나든지 최소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한 가지 특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어떻게 지금의 아내와 사랑하게 됐는가.
“내가 처음 아내(크리스틴 바움가르텐은 모델이다)를 만난 것은 영화 ‘워터월드’(1995)의 제작이 끝난 뒤 단 30분 동안이었다. 그 때 난 막 이혼했을 때로 난 늘 크리스틴의 미모에 끌렸었다. 크리스틴은 그 때 아마 20세가 아니면 21세였을 것이다. 그 뒤로 우린 6년을 못 만났다.  어느 날 내가 식당엘 갔는데 크리스틴이 내게 다가와 자기를 기억하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얘기를 나눴는데 내가 그에게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언제’라고 하더라. 그래서 2주 후라고 그랬더니 크리스틴은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가 2주라고 말한 것은 그 때 막 이혼을 해 치를 일들이 많았고 아이들을 내가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그리고 우린 헤어졌는데 난 다음 날로 크리스틴에게 전화를 걸어 그 때 찍고 있던 ‘13일’의 세트로 초대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일도 안 가고 하루 종일 세트에 있었고 촬영이 끝나자 난 그를 저녁에 초대, 그 뒤로 우린 7년을 데이트했다. 난 평생 단 두 여자와 데이트 했는데 그들과 다 결혼도 했다.”  

-행동은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가 아니면 유전적 인자에 의해 형성되는가.
“유전적 인자라고 생각한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당신 어머니가 당신에게 할리웃은 험악한 곳이라고 했다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7학년 때 만나 지금까지 70년을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이 어리고 젊었을 때는 매주 영화 가는 것이 습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할리웃에 관한 가십을 잘 알았다. 가십 내용과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호본능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아래층 사람들(The Ones Below)


테레사(왼쪽부터 시계방향)와 존 부부 그리고 케이트와 저스틴 부부가 저녁을 들고 있다.

아래층에 이사온 부부… 악몽처럼 변해버린 삶


대낮 양지바른 곳에서도 기분이 나쁠 정도로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게 만드는 잘 짜인 심리 드라마로 시종일관 보는 사람을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불안감에 잡아가둔다. 이런 공포는 노골적이요 자극적이라기보다 소매치기의 솜씨처럼 민감하니 마음 안으로 파고들어 심적 부담감을 더 준다. 
영국 영화로 연출 솜씨가 빼어난데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엉겨드는 클로스업과 귀기 서린 자장가 같은 음악이 두려움을 바글바글 끓여댄다. 마치 살균된 무균실 같은 분위기 속에 얘기의 중요 부분이 아파트에서 일어나 협소감이 겹쳐 좌불안석하게 만든다. 폴란스키의 ‘로즈메리의 아기’와 히치콕의 ‘이창’을 연상케 하는 영화로 이웃집 사람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만든다. 
런던 북부 이슬링턴에서 안정된 직업과 넉넉한 살림 그리고 10년을 같이 살면서도 여전한 서로의 애정 또 곧 낳을 아기로 인해 남부러울 것이 없는 부르좌 부부 저스틴(스티븐 캠벨 모어)과 케이트(클레망스 포에지)의 쾌적한 삶은 아래층에 새로 이사 온 존(데이빗 모리시)과 그의 북구 태생의 활기찬 육체파 아내 테레사(로라 번)로 인해 서서히 악몽처럼 변하게 된다. 그런데 테레사도 임신 중이다. 
재정 전문가인 존은 무례할 정도로 직선적이요 무뚝뚝한데 존과 테레사는 저스틴과 케이트와는 정반대형. 이를 나타내듯이 존의 실내장식은 야하고 아이들 방처럼 장식했고 저스틴의 실내장식은 이와 반대로 은근하다. 그런데 명랑한 테레사와 조용한 케이트가 가까워지면서 케이트가 존 부부를 저녁에 초대한다.
식탁에서 존이 저스틴에게 묻는 질문이 매우 공격적인데 여기서 뜻밖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모두 의심과 고통 그리고 심리적 공포에 휘말려들게 된다. 그리고 테레사는 케이트에게 “넌 네 안의 것을 가질 자격이 없어”라고 저주를 한다. 이어 존 부부는 다시 안 돌아 온다는 쪽지를 남기고 독일로 이사 간다.
케이트는 아들을 낳고 얼마 후 존 부부가 다시 돌아와 화해를 제의하면서 다정한 이웃 행세를 한다. 이 때부터 분위기가 스산해지기 시작한다. 아이는 밤 내내 계속해 울고 아파트 밖의 자동차 알람이 툭하면 울리면서 케이트 부부는 잠을 제대로 못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 이렇게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케이트를 보면서 우리는 그녀가 미쳐가고 있는 것이나 아니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마지막 부분이 너무 작위적인 것이 흠이다. 연기들도 좋은데 특히 포에지가 조용하면서도 깊이 있다. 데이빗 화 감독. 성인용.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X-멘: 아포칼립스(X-Men: Apocalypse)


세상 종말을 놓고 싸우는 좋은 수퍼히로들과 나쁜 수퍼히로들.

수퍼히로 총동원, 아수라장과 같은 혼란의 극치


현재 히트 중에 있는 마블만화의 주인공들로 구성된 수퍼히로들의 대난장판인 ‘어벤저스: 시빌 워’에서도 초능력을 지닌 수퍼히로들이 막 싸우더니 또 다른 마블만화가 원작인 이 영화에서도 역시 초능력을 지닌 수퍼히로들이 막 싸운다. 몇 주 사이를 간격으로 나온 두 영화를 보면서 하도 많은 수퍼히로들이 나와 소란을 떨면서 치고받는 바람에 도대체 누가 누구인 줄을 분간할 수가 없어 머리가 다 아프다. 제목처럼 세계 종말을 맞은 아수라장과도 같은 혼란의 극치다. 
물론 이 시리즈의 팬들은 즐기겠지만 그냥 수퍼히로들이 나와 닥치는 대로 싸우는데 서술이 뒤죽박죽인 데다가 가능한 한 많은 수퍼히로들을 집어넣자는 식으로 총동원해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아이들 장난 같은 영화다. 이 시리즈를 만든 브라리언 싱어 감독이 다시 연출한 4번째 시리즈다. 
첫 장면은 기원 전 3,600년 이집트의 나일 계곡의 거대한 피라미드 신전이 무너지면서(특수효과가 엉성하다) 그동안 5,600년간을 동면하시던 무지무지하게 강한 초능력을 지닌 사악한 신 아포칼립스(오스카 아이작-베이가스의 ‘블루 맨’쇼의 주인공을 닮았다)가 깨어난다. 그가 깨어난 시간은 1983년.
두 말할 것 없이 이 신은 세계를 박살내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야망을 지니고 있기에 이를 막기 위해 많은 수퍼히로들이 각자의 초능력을 발휘하면서 아포칼립스가 고용한 다른 수퍼히로들과 싸우는 것이 얘기의 전부다. 
영화는 이집트에서 시작해 폴란드와 영국과 카이로 그리고 미국의 CIA 본부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는데 아포칼립스는 우선 자기 졸개로 어려서 부모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은 폴 마그네토(마이클 화스벤더)를 고용한다. 아포칼립스는 마그네토에게 그의 처참한 과거를 보여주면서 그의 내면에 세상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준다.
아포칼립스와 대적할 수퍼히로들은 X맨 교수 찰스 자비에르(제임스 매카보이)가 교장으로 있는 천부의 초능력을 지닌 학생들을 교육하는 학교의 제자들. 물론 이들은 다 돌연변이들이다. 
아포칼립스는 세계를 박살내기 위해 지구상의 모든 핵미사일을 발사시키게 만드는데 세상종말 이전에 인류를 구할 자들은 자비에르 교수의 제자들과 함께 미스티크(제니퍼 로렌스)와 비스트(니콜라스 훌트) 같은 수퍼히로들. 그리고 울프맨(휴 잭맨)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잠깐 나와 이들을 돕는다. 143분 동안 액션은 많으니 액션 팬들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으나 심심하니 시끄러운 영화다. PG-13.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뮤지컬 ‘로마의 휴일’




사슴처럼 맑고 큰 눈을 한 오드리 헵번을 대뜸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로맨틱 코미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1953)이 뮤지컬로 만들어진다. 내년 5월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극장에서 초연되는데 이어 가을에 브로드웨이로 옮겨질 뮤지컬의 제목은 ‘로마의 휴일-코울 포터 뮤지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뮤지컬은 영화 내용에 코울 포터의 음악을 사용한다.
포터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작 뮤지컬을 작곡한 브로드웨이의 대명사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의 대표적인 노래들로는 ‘트루 러브’ ‘나잇 앤 데이’ ‘비긴 더 베긴’ ‘아이브 갓 유 언더 마이 스킨’ ‘인 더 스틸 오브 더 나잇’ 및 ‘아이 러브 패리스’ 등이 있다.
명장 윌리엄 와일러(벤-허)가 감독한 ‘로마의 휴일’은 할리웃이 만든 로맨스 영화들 중에서도 으뜸 갈만치 아름답고 정결하고 청순하며 또 미풍과도 같은 감촉을 지닌 흑백명화다. 이 영화로 스튜디오 영화에 첫 주연한 헵번이 오스카와 골든글로브 주연상(드라마)을 탔고 오스카 의상상과 함께 각본상도 탔다.
특히 여성 미용사에 길이 남을 것이 골체미를 지닌 헵번의 짧은 헤어스타일. 이 ‘헵번 헤어스타일’이 삽시간에 전 세계로 유행되면서 한국의 많은 젊은 여성들도 머리를 싹둑싹둑 잘랐었다. 당시 방년 24세의 헵번의 소녀처럼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아름다움 때문에 빛이 나는 작품으로 공연한 그레고리 펙도 말했듯이 “헵번은 이 영화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되겠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이면서도 끝에 가서 콧등이 시큰해지는 아쉬움을 남기게 하는데 사랑하는 공주 앤과 작별을 나누고 돌아서는 평민 조의 착잡하면서도 행복했노라 하는 듯한 얼굴 표정이 인상적이다.
유럽의 한 소국의 공주 앤이 로마 방문 중 형식과 절차에 시달리다 못해 밤에 혼자 몰래 숙소인 대사관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먹은 진정제로 인해 시내 벤치에서 잠에 빠진 앤을 발견한 사람이 조. 조는 앤의 정체를 발견한 뒤 세계적 특종을 할 욕심에 사진기자 친구 어빙(에디 앨버트)을 불러내 자기와 함께 로마관광에 나선 앤의 일거수일투족을 라이터 카메라로 찍게  한다. 그러나 조는 앤을 사랑하게 되면서 공주의 비밀을 곱게 지켜주기로 한다.
이 영화는 로마 관광영화라고 해도 될 만큼 조와 앤은 시내 관광명소란 명소는 다 찾아다닌다.  먼저 ‘스페인 계단’. 이 계단을 아이스크림을 아이처럼 빨아 먹으면서 걸어 내려오는 헵번(사진)의 모습이 귀엽다. 여기서 만난 두 사람은 트레비 분수를 찾아간다. 영화 ‘애천’과 ‘달콤한 인생’에도 나온 이 분수를 등에 지고 동전을 던지면서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고 한다.
소나무가 많은 로마에는 분수가 곳곳에서 물을 내뿜고 있는데 레스피기는 교향시 3부작에서 ‘로마의 소나무’와 ‘로마의 축제’와 함께 정오의 트레비 분수를 포함해 ‘로마의 분수’를 찬미한바 있다.
이어 조와 앤은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에 있는 커다란 석조얼굴상의 벌린 입 앞에 선다. 이 입은 ‘진실의 입’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입 안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것이다. 일종의 고대 거짓말 탐지기인데 조가 입 안에 넣었던 손이 잘려나간 제스처를 쓰자 이를 보고 질겁한 앤이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재미있다. 물론 이것은 조의 속임수인데 이에 앤이 두 손으로 조의 넓은 가슴을 다듬이질 하듯 두드리면서 둘 사이에 사랑의 불길도 달아오른다. 이 장면은 펙의 아이디어이고 헵번의 놀란 반응도 즉흥적인 것이다.
나도 몇 년 전 로마에 갔을 때 이 영화를 따라 조와 앤이 들른 곳을 찾아갔었다. ‘스페인 계단’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앤을 뒤에서 훔쳐보던 조의 흉내도 냈고 트레비 분수에서는 유로동전도 던졌는데 아뿔싸 소원 비는 것을 까먹어 본전 생각이 간절했었다. 그리고 ‘진실의 입’ 안에 손을 넣었으나 손이 지금도 멀쩡한 것을 보면 나는 꽤 진실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는 멋쟁이 신사배우 펙에게 남다른 선물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가 영화 촬영을 위해 로마로 가던 중 파리에 들렀을 때 파리 스와르지의 여기자 베로니크 파사니와 인터뷰를 하고 목적지로 갔다. 그 후 촬영이 끝나고 펙이 다시 파리에 왔을 때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베로니크에게 점심 데이트를 요청하자 장시간 침묵이 이어진 뒤 오케이를 받았다고 한다.        
펙이 베로니크와 점심을 먹으면서 “왜 그렇게 오래 대답이 없었느냐”고 묻자 베로니크가 “오늘 오후에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사르트르를 인터뷰하기로 돼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더라고 펙은 자신의 기록영화에서 회고했다. 베로니크는 펙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펙이 지난 2003년 87세로 LA에서 타계할 때까지 남편의 곁에 있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