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9년 2월 28일 목요일

‘용 길들이기: 감춰진 세상’(How to Train Your Dragon: The Hidden World)


투스리스를 탄 히컵이 신천지인 감춰진 세상에 도착하고 있다. 옆은 투스리스의 애인 라이트 퓨리.

전설속 세계 찾아 떠나는 모험·액션
히컵과 투스리스의‘사랑의 2중주’


용감한 바이킹 소년과 입에서 불을 뿜는 검은 용의 우정과 모험과 액션을 그린 만화영화 ‘용 길들이기’ 시리즈의 제3편으로 온 가족이 즐길 시각미가 눈부신 드림웍스(DreamWorks)의 작품이다. 
액션과 모험에 유머를 곁들인 재미있는 영화로 컴퓨터로 그린 총천연색 이미지들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데 특히 바이킹들이 용들과 함께 새로 이주한 감춰진 신세계의 정경이 마치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 발산하는 다채로운 광채처럼 알록달록하다.
편수를 거듭하면서 주인공 소년 히컵도 이제 청년이 됐는데 그와 자기를 좋아하면서도 새침을 떠는 용감무쌍한 처녀 아스트리드와의 소꿉장난하듯 하는 로맨스와 함께 검은 용 투스리스와 그가 반한 성질 까다로운 순백색의 용 라이트 퓨리와의 구애와 그에 대한 응답이 사랑의 2중주를 연주한다. 로맨스영화라고 해도 되겠다.
사망한 아버지 스토익(제라드 버틀러의 음성)의 대를 이어 바이킹 섬마을 버크의 리더가 된 청년 히컵(제이 바루첼)과 그가 구해준 뒤로 절친한 사이가 된 검은 용 투스리스 그리고 히컵이 좋아하는 겁 모르는 씩씩한 처녀 아스트리드(아메리카 페라라) 및 뒤늦게 찾은 히컵의 어머니 발카(케이트 블랜쳇)를 비롯해 섬마을 주민들은 용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다. 이들의 임무는 우리에 갇힌 용들을 구출해 섬으로 옮기는 일인데 그러다보니 섬마을이 인구(?) 포화상태가 됐다.
여기에 히컵의 지상낙원과도 같은 섬마을을 파괴하려는 사악한 그림멜(F. 머리 에이브래햄)의 위협이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면서 히컵은 주민들과 용들과 함께 그 때까지 전설 속의 장소로 알려진 감춰진 세상을 찾아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투스리스가 느닷없이 나타난 매력적인 라이트 퓨리에게 반해 구애와 거절과 궁극적 응답의 사랑의 놀음을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리더로서의 자격에 회의를 품고 있는 히컵은 투스리스와의 관계를 새삼 따져보게 된다. 투스리스와 라이트 퓨리와의 공중에서 벌어지는 구애의 윤무가 마치 우아한 발레를 보듯 아름답다.
히컵 일행은 마침내 지상낙원과도 같은 감춰진 신세계에 도착하고 끈질기게 자신들을 추격하는 그림멜과 그의 용들과 결전을 벌인다. 누가 이길지는 명약관화한 일. 그리고 히컵은 라이트 퓨리와 살림을 차리기 위해 떠나는 투스리스와 작별을 고한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히컵은 결혼한 아스트리와의 사이에 어린 두 남매를 두었는데 오래 동안 만나지 못했던 투스리스가 나타나면서 제4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긴다. 
감정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또 기술적으로도 모두 만족할 만한 영화로 배우들의 음성연기도 좋다. 딘 드브롸 감독. PG.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9년 2월 20일 수요일

‘버드 오브 패시지’(Birds of Passage)


잘다가 화련한 의상을 입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성인식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약밀매로 돈 맛본 원주민 사회의 갈등과 몰락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함께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예비후보 9편 중에 올랐다가 최종 5편 선정에서 탈락한 콜롬비아의 범죄 서사스릴러로 촬영을 비롯한 형식미와 마약밀매를 둘러싼 치열한 갈등과 이로 인한 가족과 원주민 집단사회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다소 길고 진행이 거북이 걸음이지만 서서히 타들어가는 눈부신 영화로 1970년대 국제 마약밀매단이 콜롬비아의 평화로운 마을을 잠식하면서 급작스런 부가 꽁꽁 뭉쳤던 가족을 무참히 파괴시키는 과정을 인종학 연대기를 다루듯이 묘사했다.
제목은 콜롬비아 북동쪽 구아히라 지역에 수천 년간 살아온 원주민들의 전설 속의 새들이기도 하고 이와 함께 마리화나를 운반하기 위해 뜨고 내리는 경비행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 마리화나는 미국으로 공수되는데 이로 인해 원주민들은 손쉽게 부를 획득하나 탐욕으로 인해 유혈폭력이 벌어지면서 그들을 분해하고 만다. 
처음에 원주민 소녀 잘다(나탈리아 레이에스)의 성인식으로 시작된다. 다채로운 색채 속에 펼치는 음악과 춤으로 장식된 파티가 황홀하다. 잘다의 어머니 어슐라(카르미나)는 절대권력으로 마을 원주민을 통치하는 리더. 이 파티에 청년 라파옛(호세 아코스타)이 나타나 잘다에게 청혼한다. 어슐라와 라파옛의 현명한 삼촌 페레그리노(호세 빈센테 코테스)는 결혼 지참금에 대해 합의하나 술과 커피를 밀매하면서 연명하는 라파옛이 부담하기에는 과하다.
이어 라파옛과 그의 성질 급한 친구 모이세스(이온 나바레스)는 귀국해서 국내에 팔기 위해 대마초를 구하러 온 미 평화봉사단원들을 만난다. 여기서부터 원주민들은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대마초 밀수업에 개입되면서 순수를 상실하게 되고 그 결과 엄청난 유혈폭력과 파괴와 비극이 일어난다. 액션은 영화 후반에 발생한다. 
한편 라파옛은 정글 속에서 대규모로 마리화나를 경작하고 있는 또 다른 삼촌으로 나이는 먹었으나 막강한 권력을 쥔 아니발(완 마티네스)과 손을 잡고 본격적인 마리화나 장사를 시작한다. 이로 인해 서푼짜리 밀매업자였던 라파옛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내가 된 잘다와 잘다의 가족과 함께 오두막에서 방대한 사막 한복판에 있는 초현대식 대저택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부는 라파옛과 총질하기를 즐기는 모이세스와 잘다의 성질 사나운 오빠 레오니다스(그레디에 메사)와의 갈등과 욕심 그리고 라이벌 마약밀매단과의 충돌 등의 부작용을 동반하면서 집단과 가족의 초석이 붕괴되고 만다. 
20세기 초 외국인들이 콜롬비아의 원주민 사회 속으로 파고들면서 마약과 돈과 외부세력에 의해 부패하고 마는 원주민들의 전통과 문화를 탐구한 이색적인 범죄대하극으로 두 감독 크리스티나 갈레고와 시로 게라는 이 같은 얘기를 지적이요 확실한 솜씨로 처리했다. 
보기 좋은 것은 와이드 스크린 총천연색 화면. 아찔하도록 눈부신데 광대한 백사의 사막과 바다 등 자연을 큰 폭으로 찍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우행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연기들도 자연스럽다.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설원의 추적’(Cold Pursuit)


칵스맨이 자기 아들을 살해한 갱두목을 살해하기 위해 라이플을 겨냥하고 있다

설원 위 펼쳐지는 리암 니슨의 복수극‘재미 만점’


10년 전에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나쁜 놈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전직 CIA요원으로 나온 ‘테이큰’으로 뒤늦게 나이 먹어 액션 스타로 부상한 리암 니슨(‘쉰들러 리스트’)의 또 다른 액션 스릴러로 상영시간 2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재미 만점이다. 
니슨은 ‘테이큰’ 이후에도 ‘테이큰’의 2편과 3편을 비롯해 ‘난-스탑’과 ‘커뮤터’ 등 내용이 비슷한 액션 스릴러에 나왔는데 ‘설원의 추적’은 이들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고 아찔하니 흥분된다.
그 큰 까닭은 이 영화가 2014년에 수입된 노르웨이 영화로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주연한 ‘실종 순서’(In Order of Disappearance)의 리메이크이기 때문이다. 내용이 원작과 거의 비슷한데 감독도 원작의 한스 페터 몰란드가 했다. 능숙한 연출 솜씨다. 
백설이 만건곤한 겨울 콜로라도의 스키마을 키호에서 일어나는 유혈 낭자하고 가차 없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화로 시뻘건 피가 하얀 눈 위에 흩뿌려져 그 잔인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이런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깔깔대고 웃게 되는 이유는 온갖 범죄자들이 내 뱉는 대사가 때로 엉뚱하고 새카만 유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감독이나 배우들이 우리 재미있게 즐기니 당신들도 즐기라는 식으로 유유자적한데 유머와 폭력을 적절히 잘 섞어 잔인성을 중화시켜주고 있다. 영화를 보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 픽션’ 및 코엔형제의 ‘화고’가 연상된다.   
키호의 외딴 곳에 아내 그레이스(로라 던이 잠깐 나온다)와 비행장의 화물 운송자로 일하는 아들 카일과 살고 있는 넬스 칵스맨(니슨)은 제설차 운전사. 그런데 카일이 마약밀매단 갱에 의해 살해된다. 그러나 부검 결과는 헤로인 과다복용. 칵스맨과 아내는 이를 믿지 않는데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평소 사이가 소원하던 부부는 급기야 별거한다. 
카일과 함께 일하던 친구로부터 아들이 마약 갱에 의해 살해된 것을 알게 된 칵스맨은 이 친구로부터 갱의 한 명인 스피도의 이름을 전해 듣고 그를 찾아가 아들 살해에 동참한 다른 범인의 이름을 알아낸다. 물론 칵스맨은 스피도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여기서부터 칵스맨은 마치 사다리 타고 올라가듯이 마약 갱을 차례로 하나씩 처치한다. 갱두목은 성질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거부 바이킹(탐 베이트만이 약 먹고 흥분한 사람처럼 연기를 한다)으로 그는 이혼 수속중인 아내와의 사이에 조숙한 어린 아들을 두고 있다. 
한편 칵스맨은 한 때 바이킹의 하수인이었던 형(윌리엄 포사이트)을 찾아가 바이킹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한 발작 한 발작씩 그에게 접근한다. 그런데 처음에 자기 졸개들의 황천행을 오래 전에 마약거래 영토를 분할해 그 동안 평화공존을 해온 인디언들의 소행으로 오해한 바이킹이 인디언 족장의 아들을 납치해 살해하면서 사건은 엉뚱하게 바이킹 갱 대 인디언 갱의 유혈폭력으로 비화한다. 
이런 와중에 칵스맨은 바이킹을 유인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납치한다. 칵스맨과 바이킹의 아들과의 관계가 폭력영화에 유머와 자비를 베푼다. 세다가 포기할 정도로 여러 명이 비명횡사하는데 니슨이 묵직하게 연기를 잘 한다. R. Lionsgate 배급.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모두가 알고 있어’(Everybody Knows)


딸을 안고 있는 라우라와 그녀의 옛 연인 파코(오른쪽)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납치극이 멜로드라마로… 이란 화라디 감독 맥빠진 연출


‘이혼’(A Seperation)으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란의 아스가르 화라디의 가족 드라마이자 납치극 미스터리 스릴러인데 페넬로피 크루즈와 그의 남편 하비에르 바르뎀 등 스페인 배우들을 사용해 스페인에서 찍었다. 인물들의 성격묘사와 이란의 사회상 비판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감독이 자기 보금자리를 떠나 국제적인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영화가 맥이 빠진 신파 타작이 되고 말았다.
납치극이면서도 별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데다가 여러 인물들이 나와 엮는 얘기도 중언부언 식이고 결말이 완전히 바람 빠진 풍선 같아 화라디의 촘촘하고 강인한 연출 솜씨를 기대하던 사람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볼만한 것은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다시피 하는 크루즈의 연기와 그와 바르뎀의 화학작용이다.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라우라(크루즈)가 여동생의 결혼식을 위해 오래간만에 스페인의 시골 마을을 찾아온다. 온 가족이 모여 파티를 열면서 시끌벅적대던 저녁에 라우라의 10대 난  딸 이레네(칼라 캄프라)가 실종된다. 이어 정체불명의 납치범으로부터 이레네의 몸값을 요구하는 통지가 온다. 이 소식을 들은 라우라의 남편 알레한드로(아르헨티나의 베테런 배우 리카르도 다린)도 스페인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라우라의 가족들의 삶의 실타래가 풀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안고 있는 과거의 비밀들이 드러난다. 이 과거들 중에는 라우라와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그의 전 애인 파코(바르뎀)의 깊고 뜨거웠던 사랑이 있다. 라우라의 가족이 몸값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겉으론 완벽하게 보이던 그의 가족의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난다.     
개인들의 비밀과 납치를 다룬 영화로선 감정이 결여됐는데 영화를 멜로드라마처럼 이끌어 가는 바람에 강렬한 긴장감이나 극적 폭발력이 아주 미약하다. 그리고 결말을 맺는 부분이 다분히 조작적인데다가 느슨해 맥이 빠진다. 클라이맥스가 엉성하기 짝이 없다. 기대에는 못 미치나 볼만은 하다. 화라디의 주도면밀한 연출과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얘기 그리고 섬세한 인물과 성격개발이 아쉽다. R등급. Focus.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내 딸’(Daughter of Mine)


생모 안젤리카(가운데)와 기른 엄마 티나는 딸 비토리아의 사랑을 놓고 서로 겨룬다.

기른 정이냐, 낳은 정이냐, 과연 딸의 선택은?



기른 엄마와 낳은 엄마가 10세난 딸의 사랑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참 모성애를 발견하게 되는 여인의 자아발견의 얘기이자 소녀의 성장기인 이탈리아 영화다.
한 여름 사르디니아 해변 마을에서 열린 축제의 로데오를 구경하러 온 소녀 비토리아(사라 카수)는 어쩌다 축사에 숨어서 섹스를 하던 안젤리카(알바 로어바허)를 목격한다. 이어 비토리아는 엄마 티나(발레리아 골리노)를 찾아 가는데 갸름한 얼굴의 빨강머리 비토리아가 둥근 얼굴의 검은 머리 티나 보다는 갸름한 얼굴의 딸기빛 금발을 한 안젤리카를 닮았다.
안젤리카는 비토리아의 생모로 마을에서 떨어진 시골에서 혼자 사는데 비토리아를 자기 딸로 삼고 키워온 티나는 종종 술주정뱅이요 섹스와 향락을 즐기는 안젤리카의 집에 찾아와 식료품을 남겨놓고 청소도 한다. 이는 티나와 남편 움베르토가 비토리아를 자기들에게 준 안젤리카에게 치르는 비공식적 계약에 대한 보답 행위다.
무일푼의 안젤리카가 집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안젤리카는 티나에게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딸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티나가 비토리아를 안젤리카에게 데려다 주면서 비토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상하고 아이 같은 안젤리카에게 마음이 끌린다. 안젤리카는 술과 섹스를 즐기는 향락주의자인 반면 티나는 동네 양어장에서 일하면서 성당에 나가는 성실한 사람.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나 고지식한 부모 밑에서 사는 비토리아가 아이 같고 자유혼을 지닌 안젤리카에게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면서 티나가 깊은 슬픔과 고통에 빠지게 된다.
딸을 잃을까봐 두려움에 떠는 티나와 뒤늦게 모성애를 깨달은 안젤리카 간에 갈등이 인다. 이런 둘을 꼭두각시 다루듯 하는 사람이 비토리아. 과연 비토리아는 둘 중 누구를 엄마로 선택할 것인지.
골리노의 심지 굳은 연기와 로어바허의 자유로운 연기가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히 경탄스런 것은 신인 카수의 성숙한 연기다. 촬영도 좋다. 라우라 비스푸리 감독.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크라이슬러 빌딩


맨해턴은 도시 전체가 영화세트다. 이곳을 안 가본 사람들에게라도 많은 영화에 나온 도시 곳곳의 명소들로 인해 맨해턴은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도시라고 하겠다. 센트럴파크와 뮤지컬 ‘42번가’로 유명한 브로드웨이와 42번가,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과 타임스 스퀘어와 워싱턴 스퀘어, 그리니치빌리지와 월스트릿 그리고 브루클린브리지와 퀸스보로브리지 및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과 크라이슬러빌딩 등은 모두 우리를 맨해터나이트로 만들어 주다 시피 한 명소와 명물들.
맨해턴의 정취와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 영화가 LA를 우습게 아는 맨해터나이트인 우디 알렌의 흑백 ‘맨해턴’(Manhattan)이다. 영화에서 신비하도록 로맨틱한 장면은 주인공인 작가 아이작(알렌)과 그의 애인 메리(다이앤 키튼)의 퀸스보로브리지 아래 데이트 장면. 새벽안개가 자욱하니 깔린 퀸스보로브리지 아래 벤치에 앉은 두 연인의 뒷모습이 실루엣으로 비쳐지는 가운데 거쉬인의 ‘섬원 투 워치 오버 미’의 멜로디가 흐르는 이 장면은 신비할 정도로 고혹적이다.
거쉬인의 노래 ‘섬원 투 워치 오버 미’(Someone to Watch over Me)는 첫 장면에서 밤의 크라이슬러빌딩을 공중회전 촬영한 리들리 스캇 감독의 로매틱 스릴러의 제목으로도 쓰였다. 퀸스에서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뉴욕형사(탐 베렌저)가 살인위협으로부터 자기가 보호하는 맨해턴의 아름다운 상류층 여인(미미 로저스)에게 빠져드는 얘기로 크라이슬러빌딩이 소시민인 형사의 잡을 수 없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듯이 쓰였다. 맨해턴의 밤하늘을 마치 유린이라도 하듯이 찌르고 선 그 고고하도록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티아라를 쓴 우아한 몸매의 여인과도 같은 크라이슬러빌딩이 최근 매물로 나왔다. 77층 1,046피트 높이의 이 아르 데코 양식의 건물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뾰족탑과 괴물형상의 가고일로 유명한데 1930년에 완공되었을 때만해도 세계 최고 높이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1931년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건설되면서 채 1년도 못 가 깨어지고 말았다. 크라이슬러빌딩은 아직도 세계 100대 최고층건물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에 맨해턴의 최고자리를 내준 뒤로 두 건물은 지금까지도 라이벌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
크라이슬러빌딩의 뾰족탑은 당시 월스트릿에 짓고 있던 맨해턴은행에 최고층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신축중인 건물 안에서 남 몰래 지어 불과 90분 만에 올렸다고 한다. 건축기술상 한 쾌거로 알려져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크라이슬러빌딩을 제치고 맨해턴을 대표하는 건물로 여겨지는 이유는 반드시 높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 진짜 이유는 영화 탓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의 위용을 천하에 과시한 영화가 ‘킹 콩’이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생포돼 맨해턴 쇼의 구경거리가 된 킹 콩이 탈출해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자기를 공격하는 군용기를 맨손으로 박살내는 장면으로 이 빌딩은 킹 콩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애초 ‘킹 콩’의 이 클라이맥스 장면은 크라이슬러빌딩에서 찍을 예정이었으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세워지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니 두 빌딩이 라이벌이 아니 될 수가 없겠다.
‘킹 콩’ 못지않게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을 만인의 가슴에 뚜렷이 새겨놓은 영화가 ‘잊지 못할 연정’(An Affair to Remember)이다. 여객선에서 만난 각자 임자가 있는 니키(케리 그랜트)와 테리(데보라 카)는 배가 뉴욕항에 도착하면서 6개월 후인 7월 1일 하오 5시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꼭대기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때까지 서로를 못 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6개월 후 테리는 약속장소로 달려가다 교통사고로 쓰러진다. 니키는 천둥번개가 치는 속에 빌딩 꼭대기에서 밤이 늦도록 테리를 기다리다 지쳐 돌아선다.
이들 영화와 달리 크라이슬러빌딩은 주로 영화의 이스태블리싱 샷(첫 장면)이나 잠깐 스쳐지나가는 식으로 비쳐져 주연인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의 조연 취급을 받고 있다.
크라이슬러빌딩이 주연급이다 시피하게 묘사된 영화가 스릴러 ‘Q‘(사진)다. 영화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하늘을 나는 선사시대의 거대한 뱀이 맨해턴을 박살내면서 크라이슬러빌딩 꼭대기에 알을 까는데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거구의 고릴라로 유명해졌다면 크라이슬러빌딩은 커다란 날개를 가진 뱀으로 그나마 알려진 셈이다. 그런대로 헐한 재미가 있는 컬트무비다.
크라이슬러빌딩은 이 밖에도 ‘스파이더-맨’ ‘멘 인 블랙’ ‘아마게돈’ ‘디프 임팩’ ‘인디펜던스 데이’ 및 ‘고질라’ 등에도 출연했다. 2008년에 아부 다비 투자회사가 8억달러에 산 크라이슬러 빌딩의 연 부지 임대료는 작년에 3,250만달러로 2028년에는 무려 4,100만달러로 오른다고. 이 역사적 건물이 과연 누구에게 얼마에 팔릴지 자못 궁금하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9년 2월 15일 금요일

‘북극’(Arctic)


북극의 눈과 얼음 황야에 추락한 조종사 오버가드는 혹독한 자연과 대결하면서 생존 투쟁을 벌인다. 뒤에 추락한 비행기가 보인다.


북극 얼음벌판에 추락한 조종사
처절한 생존투쟁 담은 대서사시



혹독한 환경의 눈과 얼음 벌판에 버려진 남자의 처절한 생존 투쟁기이자 자연대 인간의 치열한 대결을 그린 군살 없는 검소한 작품으로 침통하고 절망적이며 몸과 마음을 쥐어짜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올 이즈 로스트’와 제임스 프랭코가 주연한 ‘127시간’ 그리고 이드리스 엘바와 케이트 윈슬렛이 공연한 ‘당신과 나 사이의 산’ 등을 연상케 하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생존을 위한 인내와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북극 얼음벌판 황야에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인 구형 비행기 조종사 오버가드로 나온 덴마크 배우 매즈 미켈슨의 원맨쇼로 상영시간 97분 내내 거의 대사 없이 진행된다. 그의 실존적 연기와 함께 아이슬랜드에서 찍은 광활하고 황량한 눈과 얼음벌판을 찍은 촬영 그리고 자연의 위압감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절묘하게 대변하는 음악이 아주 좋다.
결점이라면 이야기가 부족해 극적 흥미가 감소된 것과 함께 긴장감의 불연속성이라고 하겠는데 브라질 감독 조 펜나(그의 데뷔작이다)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주인공에게 이런 저런 불상사와 장애를 던져 놓지만 단편적이다. 
처음에 적색의 방한 재킷을 입은 오버가드가 백색의 눈벌판에서 꽁꽁 얼어붙은 눈을 삽질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어 카메라가 공중 높이 오르면서 오버가드가 눈 위에 대형 SOS를 파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멀리에 추락해 파괴된 비행기가 보이고 오버가드가 싸놓은 돌들이 그의 부조종시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버가드는 생존기술에 능한 사람으로 얼음구덩이를 판 물고기를 낚아 연명하고 이어 고지에 올라 수동 조난신호 송신기를 돌려 구조를 요청하는데 매일 같이 이런 일과를 정확하게 반복한다. 마침내 구조 헬기가 도착하나 강풍을 동반한 폭설에 휘말려 추락한다. 남자 조종사는 사망하고 그의 여자 부조종사(마리아 텔마 스마라도티르)가 살아남지만 복부에 심항 부상을 입고 혼절한 상태다. 
영화는 이 때부터 두 사람이 나오지만 여자 조종사가 거의 영화 내내 기절한 상태인데다가 둘이 언어도 달라 1인 주인공의 무성영화 식으로 진행된다. 무성의 단조로움을 오버가드의 걸음과 숨소리 그리고 바람과 폭설의 소리가 달래준다. 오버가드는 헬기에서 지도와 라이터 그리고 라면과 간이 취사용 개스난로를 챙긴 뒤 여자를 눈썰매에 싣고 자기 비행기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여자를 극진히 돌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혼자서도 살아남게 될지가 의문인 오버가드가 이 여자를 정성을 다 해 돌본다는 것이 다소 믿어지질 않는다. 
이어 오버가드는 눈썰매에 여자를 싣고 자기가 앞에서 끌면서 지도를 이용해 마을을 찾아 떠난다. 도중에 거대한 백곰과 폭설과 얼음비를 만나고 얼음구덩이에 빠져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온갖 시련을 겪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를 악물고 썰매를 끌고 밀면서 목적지를 향해 간다. 절망적인 눈동자를 하고 피폐한 모습으로 생존하려고 기를 쓰는 미켈슨의 바짝 마른 연기가 다소 단조로운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PG-13. Bleecker Street.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달로부터 돌아오지 말아요’(Don‘t Come Back from the Moon)


둘 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믹키와 소니아가 자전거를 함께 타고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황폐한 시골마을, 가출한 아버지… 방황하는 아이들


은유가 많은 검소하고 군더더기 없는 기억에 관한 영상시로 남가주 인랜드 엠파이어의 황폐한 사막 변두리 마을 살턴 시를 무대로 한 아름답고 무드 짙은 드라마다. 한때 휴양지였으나 지금은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버려진 이 마을의 성인 남자들은 모두 일자리를 찾거나 가족에 대한 부양책임을 피해 가출한 뒤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달에 갔다”고 말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이 달은 어쩌면 하나의 이상향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살턴 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황폐하면서도 아름다운 살턴 시는 인물들만큼이나 영화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남편과 아버지들은 하나 둘씩 가출해 돌아오지 않고 남은 여자들은 슬픔과 고통에 시달리다가 서서히 재기하고 아이들은 분노와 불안에 휩싸여 방황하지만 이를 통해 성장한다. 영화는 주인공인 16세난 소년 믹키(제프리 왈버그)의 성장기이도 하다. 
영화는 전반부는 다소 이야기가 빈약하고 반복적이나 후반에 들면서 감정적으로 강렬한 파고를 일으킨다. 이 감정적 격랑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촬영과 짙은 물감의 감촉을 느끼게 하는 칼라가 한껏 북돋아주고 있다.
믹키는 아버지(제임스 프랭코가 잠깐 나온다)가 가출한 뒤로 미용사인 어머니 에바(라쉬다 존스)가 완전히 생기를 잃어버리면서 어린 동생 콜리아(재카리 아서)를 돌본다.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말 한마디 없이 가출했다. 남자들의 가출은 이 마을의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아버지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믹키와 다른 아이들은 버려진 트레일러에서 고철을 모아 중고품 생필품과 교환한다. 믹키와 가장 가까운 친구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분노를 야생 앵무새 훈련으로 승화시키는 사촌 닉(헤일 라이틀). 
믹키가 좋아하는 소녀 소니아(알리사 엘 스타이낵커) 역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속으로 끙끙 앓는데 믹키는 이런 소니아에게 분노를 참지 말고 밖으로 분출하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소니아는 가출한 아버지를 용서할 마음이어서 믹키와 갈등을 빚게 된다. 
한편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시름을 줄담배를 태우면서 달래던 에바는 서서히 무기력 상태에서 재기해 집에서 다시 손님들의 머리 손질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인 과묵한 식품점 점원(헨리 하퍼)이 에바에게 애정을 느끼면서 둘 사이에 아름다운 감정의 다리가 놓여진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넘어선 희망과 밝음의 빛이 느껴진다.
촬영감독 출신인 감독 브루스 티에리 청은 작중 인물들에 대해 지극한 연민의 감정을 표시하면서 죽은 마을과도 같은 세상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을 따스하고 정감이 넘치도록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강한 극적 추진력을 느끼게 하는 영화로 촬영뿐 아니라 아이들을 비롯해 어른들의 연기도 모두 보기 좋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버닝’


1월 22일 발표된 제91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서 이창동감독의 ‘버닝’(Burning)이 탈락된 것에 대해 나보다 훨씬 더 크게 실망한 사람은 LA타임스의 영화평론가 저스틴 챙이다. 저스틴과 나는 함께 LA영화비평가협회(LAFCA)의 회원으로 그는 중국인이고 나는 한국인이어서 남달리 친한 사이다.
저스틴을 지난 해 한 시사회에서 만났을 때 그에게 “‘버닝’을 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봤는데 너무 좋아 다시 보려고한다”며 큰 미소를 지었다. 저스틴을 1월 13일 센추리시티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LAFCA의 2018년도 베스트를 기리는 만찬에서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닥아 오더니 “‘버닝’을 세 번이나 봤다”면서 다시 극구 칭찬을 했다.
‘버닝’은 LAFCA에 의해 일본의 코레-에다 히로카주 감독의 ‘어느 가족’(Shoplifters)과 함께 최우수 외국어영화로 뽑혔다. 그리고 ‘버닝’에 나온 한국계 미국배우 스티븐 연은 최우수 조연남우로 뽑혔다. 그런데 지난 해 칸영화제 대상수상작인 ‘어느 가족’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나 ‘버닝’은 탈락됐다.
이에 저스틴은 1월 23일자 LA타임스의 아카데미상 후보 선정 분석기사에서 ‘버닝’의 탈락은 심히 유감이라면서 “이창동감독의 걸작은 내가 2018년에 본 영화 중 최고의 것으로 아카데미 회원들의 이 영화에 대한 애정결핍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나도 ‘버닝’이 9편의 외국어영화상 예비후보에 포함됐을 때만해도 이 영화가 최종 후보 5편 중 하나로 오르리라고 확신했었다. 한국영화가 예비후보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버닝’이 최종후보에 오를 것을 믿은 까닭은 이 영화가 LAFCA와 전미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서 최우수 외국어영화로 뽑힌 것 외에도 저명한 영화잡지 사이트 & 사운드와 필름 코멘트가 비평가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베스트로 뽑혔기 때문이다.
‘버닝’은 일본의 하루키 무라카미의 단편소설이 원작. 막일을 하는 청년 작가 지망생 유아인과 그의 애인으로 상품선전원인 전종서 그리고 정체불명의 부자 청년 스티븐 연을 주인공으로 한 신분과 빈부의 차이 그리고 이룰 수 없는 꿈과 좌절감 및 3각 로맨스와 복수를 다룬 의문투성이의 로맨틱 드라마이자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관객들보다 비평가들이 더 좋아할 예술성 짙은 영화로 ‘버닝’에 대한 칭찬을 입에 달고 다니다 시피 하던 저스틴은 “아카데미회원들이 2시간 반 동안 느리고 마음을 어지럽히며 쉽게 극적으로나 주제의 뜻을 수용하기가 힘든 이 영화 대신 대중에게 쉽게 어필할 ‘어느 가족’과 ‘카퍼나움’을 선정한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고 피력했다. ‘카퍼나움’(Capernaum)은 독일의 ‘네버 룩 어웨이’(Never Look Away), 폴랜드의 ‘콜드 워’(Cold War) 및 멕시코의 ‘로마’(Roma)와 함께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레바논영화다.     
13일 LAFCA의 시상만찬이 시작되기 전 호텔 로비에서 이창동감독과 스티븐 연을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면서 축하의 뜻을 전했다(사진). 긴 머리에 목에 머플러를 걸친 모습이 타고난 예술인 스타일인 이감독에게 “아카데미상 예비후보에 올랐는데 최종 후보에도 오르겠지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이감독은 뜻 밖에도 이에 대해 “자신이 없네요”라고 대답했다. 이감독은 “다른 예비후보 영화들은 배급사가 막강해 자기 작품들을 맹렬히 후원하고 있는 반면 내 영화의 배급사는 힘이 약한 것이 낙관을 할 수없는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감독은 처음에 일본의 NHK측에서 자기에게 작품의 연출을 제의했을 때만해도 본인에게 맞는 작품이 아닌 것 같아 제작에만 참여하기로 했다가 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연출을 맡기로 하면서 작품이 미스터리가 많은 훌륭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
이감독과 함께 있던 스티븐과도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그가 손에 칵테일잔을 들고 있기에 “스카치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누군가 보드카를 주어 마시지만 난 술을 잘 못한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가느다란 콧수염에 깨끗한 용모를 한 스티븐은 매우 겸손했는데 좀 서투르긴 하지만 한국말을 꽤 잘했다.
그의 연기에 대해 칭찬을 한 뒤 한국에서 욱일기 문제로 겪은 경험에 대해 물었더니 “그 경험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어 그에게 영화의 알쏭달쏭한 미스터리들에 관해 물었더니 스티븐은 “그런 미스터리에 대한 답은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라며 빙긋이 웃으며 한국어로 말했다.
스티븐의 역은 F. 스캇 핏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은 이 영화로 코리언 개츠비가 되었다”고 농을 했더니 스티븐은 “난 절대로 코리언 개츠비가 아니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감독과 스티븐은 모두 만나 대화하기가 편하고 서민적이어서 잠시 만났지만 금방 가까워질 수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저스틴의 소개로 상패를 받기 위해 연단에 오른 이감독은 영어로 “스티븐 연과 일본작품과 함께 아시안영화가 상을 받게 돼 기쁘다”면서 “미스터리가 많은 이상한 영화에게 영예의 상을 줘 고맙다”고 말했다. 스티븐은 수상소감에서 먼저 이감독에게 찬사를 보낸 뒤 “내가 상을 타다니 믿을 수 없는 기적이다. 유아인과 전종서에게 감사 한다”면서 “이 영화로 나의 영화와  연기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히로카주감독은 수상소감에서 “존경하는 이감독과 함께 상을 받아 더욱 영광”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샌드라 오의 밤


6일 베벌리힐즈의 베벌리힐튼호텔에서 열린 제76회 골든 글로브시상식은 샌드라 오(사진)의 밤이었다고 해도 되겠다. 샌드라는 이날 앤디 샘버그와 함께 시상식의 공동 사회자로 무대에 섰을 뿐 아니라 연기자로서도 TV부문에서 드라마 ‘킬링 이브’(Killing Eve)로 주연상을 탔다.
필자를 포함해 세계 50여 개 나라의 LA상주 기자로 외국에 송고하는 90명 정도로 구성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주는 골든 글로브상은 영화 외에도 TV부문에 대해서도 시상한다.  샌드라는 이로써 아시안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상식 사회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1981년 TV시리즈 ‘쇼군’으로 일본 여배우 요코 시마다가 주연상을 탄 이후 최초로 같은 상을 받은 아시안 배우가 됐다. 샌드라는 이미 TV시리즈 ‘그레이즈 아나토미’로 조연상을 타 아시안 배우로서는 최초로 골든 글로브상을 두 번이나 타는 기록도 세웠다.
샌드라는 수상소감을 말할 때 식에 함께 참석한 부모님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면서 한국말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말해 부모님과 한국에 대한 사랑을 함께 표시했다. 샌드라의 사회와 수상은 식장에 앉아 있던 나의 가슴을 뿌듯하게 해주었다.     
이날 시상식은 다양성을 찬양하듯 많은 흑인과 아시안 영화인들이 눈에 띠었다. 샌드라도 개막사에서 이들을 가리키며 “나는 처음에 이 무대에 서기가 겁이 났지만 당신들을 보고 아울러 이 변화의 얼굴들을 목격하기 위해 사회를 수락했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샌드라와 앤디의 개막사는 너무 무사안일 해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일체 정치적인 발언을 회피하고 그냥 쇼나 즐기자는 식으로 톡톡 쏘는 맛이 없어 심심했다.         
이날 이변이라 할 정도로 크게 물을 먹은 영화는 브래들리 쿠퍼가 감독으로 데뷔하고 가수로 주연도 한 ‘스타 탄생’이었다. 이 영화는 드라마 부문에서 작품과 남^녀주연상을 탈 것으로 유력시 됐었으나 쿠퍼의 가수 애인으로 공연한 레이디 가가 작곡하고 노래한 주제가 ‘쉘로’ 하나만 상을 탔다.
이 부문 작품과 남자주연상은 영국의 록그룹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다룬 ‘보헤미안 랩소디’와 프레디로 나온 라미 말렉이 각기 탔다. 드라마 부문 여자주연상은 레이디 가가 대신 ‘아내’에서 평생 독선적인 작가인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뒤 늦게 독립선언을 하는 아내로 나온 글렌 클로스가 받았다. 모두 예상을 뒤엎는 선정이었다. 골든 글로브상은 작품과 남녀주연상에 한해 드라마와 코미디/뮤지컬 두 부문으로 구분해 시상한다.
이 날 가장 감동적인 발언은 클로스(71)의 수상소감이었다. 그는 “아내들은 남편과 자식들을 돌보는 사람들로만 여겨져 왔다”면서 “그러나 아내들도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설 수 있어야한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보헤미안 랩소디’ 외에 이 날 큰 승리 작들은 ‘그린 북’과 ‘로마’였다. 1962년 인종차별이 심하던 때 미 남부를 순회공연하는 흑인 피아니스트와 그의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운전사가 8주간의 여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으로 맺어지는 실화다. 작품상(코미디/뮤지컬)과 각본상 그리고 흑인 피아니스트 역의 마허샬라 알리가 남자조연상을 각기 탔다. 대중의 입맛에 맞춘 이 영화가 같은 부문의 수상 후보작으로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은 ‘페이보릿’(The Favourite)을 제치고 수상한 것은 이변이라 하겠다.
멕시코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연출하고 흑백으로 촬영도 한 ‘로마’는 외국어영화상과 감독상을 탔다. 이 영화는 쿠아론의 소년시절 멕시코시티의 중류층 거주지인 로마에서의 성장기다.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이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외국어영화는 작품상 후보가 될 수 없는 골든 글로브상의 규칙 때문이다. ‘로마’는 오는 22일에 있을 아카데미상 각 부문 후보발표에서 작품상과 동시에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도 오를 가능성이 크다. 
한편 코미디/뮤지컬 부문의 남자주연상은 ‘바이스’(Vice)에서 체중을 40여 파운드나 늘이고 아들 부시대통령 밑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딕 체이니 부통령으로 나온 크리스천 베일이 탔다. 이 부문 여자주연상은 ‘페이보릿’에서 18세기 초 영국을 통치하던 변덕스러운 동성애자 여왕 앤으로 나온 영국배우 올리비아 콜먼이 탔다. 여자조연상은 ‘이프 빌 스트릿 쿠드 톡’(If Beale Street Could Talk)에서 1970년대 초 할렘의 시련을 겪는 젊은 흑인 아내의 강인한 어머니로 나온 레지나 킹이 탔다.   
영화 부문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 상은 배우 제프 브리지스가 탔다. HFPA는 올해 새로  TV의 전설적 여류 코미디언 캐롤 버넷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 캐롤 버넷 생애업적상을 마련했다. 첫 수상자는 당연히 캐롤 버넷이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