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네 이름으로 날 불러다오 (Call Me by Your Name)

17세 난 소년 엘리오(왼쪽)는 연상의 올리버를 사랑하면서 부쩍 성장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정열적이고 애잔한 ‘금지된 사랑’


아름답고 뜨겁다. 태양열에 구은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과 두 젊은이의 드러난 육체와 그 육체가 율동하면서 벌이는 사랑의 행위 그리고 그들의 준수한 미모와 첫 사랑의 희열과 궁극적으로 다가오는 이별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열정으로 끓는다. 
17세 난 소년이 첫 사랑을 하면서 감정적으로 어른이 되는 성장기이자 인간의 본능과 내성 그리고 상호관계를 매우 지적이요 감성 깊게 그린 작품이다. 뜨거운 여름 한철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감정적으로 깊이 맺어지는 17세 난 소년과 24세 난 대학원 인턴의 동성애를 훤히 들여다 보여주는 식으로 솔직하게 그렸다. 
두 주인공 역의 잘 생기고 신체 늠름한 아미 해머와 버들가지처럼 간들거리는 육체와 거의 소녀같이 곱게 생긴 총명한 모습의 티모데 샬라메의 화학작용이 절묘하다. 감독은 이탈리아의 루카 과다니노(‘아이 앰 러브‘ ’어 비거 스플래쉬‘)로 그는 이 두 사람 간의 정서적 육체적 로맨스를 매우 상세하고 통찰력 있으며 또 부드럽게 화면에 담고 있다. 원작은 앙드레 아시만의 소설로 과다니노와 제임스 아이보리가 공동으로 각색했다.
이탈리아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시골 롬바르디의 고저택에 사는 그레코 로만 조각 전문교수 펄만(마이클 스툴바그)의 집에 미국에서 24세 난 인턴 올리버(31세의 해머가 24세의 인턴 역을 하기엔 좀 늙었다)가 연구차 한 여름 묵기 위해 찾아온다. 펄만은 올리버에게 17세의 갈비씨 책벌레 아들 엘리오의 방을 내주고 엘리오는 자기 방 옆의 창고로 쓰이는 방으로 옮긴다. 
두 방이 바로 붙어 있어서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서로를 엿보게 된다. 이런 설정부터 봐이에리즘의 선정성을 부추긴다. 처음에 엘리오는 이 잘 생긴 미국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 올리버도 마찬 가지.
둘은 책과 문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동네 고적과 마을 광장과 들과 해변으로 함께 다니면서 서서히 서먹함을 푸는데 두 사람이 모두 간편한 여름 옷 차림인데다가 때로 짧은 수영복만 입어 육체의 자연미가 광채를 발하면서 둘의 성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런 감춰진 욕망은 두 사람의 응시와 접촉과 표정 그리고 대화 등을 통해 암시된다. 
둘은 마침내 첫 키스에 이어 정열적인 정사를 나누는데 이 장면이 매우 에로틱하고 아름답다. 한편 올리버는 엘리오를 타락시키지(?) 않겠다는 의도로 관계에 쉼표를 찍으나 엘리오는 기갈 들린 사람처럼 올리버를 계속해 더 원한다. 그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다. 그리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엘리오의 복숭아 장면이 나온다. 잘 익은 복숭아가 이토록 에로틱한 효과를 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엘리오는 올리버를 사랑함으로써 부쩍 성장하는데 여름이 저물면서 올리버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침묵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긴 엘리오와 올리버의 이별 장면이 애잔하니 아름답다. 
해머가 파격적인 역을 맡아 진지하면서도 민감하고 정감 있는 연기를 잘 하는데 특별히 볼만한 것은 샬라메의 연기다. 별 말 없이 얼굴 표정과 몸동작으로 첫 사랑에 들뜨고 희열하고 아파하는 연기를 깊고 다양하게 연기한다. 그리고 스툴바그의 연기도 훌륭하다. 이와 함께 자연과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광채 나게 찍은 태국 촬영감독 사이욤부 묵데프롬의 촬영도 눈부시다. R등급. Sony Pictures Classics. R.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등 일부지역.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크리스마스를 만든 사람 (A Man Who Invented Christmas)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집필하고 있다.


소설‘크리스마스 캐롤’ 집필 둘러싼
디킨스 주변 사람들 재미있게 담아


찰스 디킨스가 어떻게 해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쓰게 되었는가를 허구를 마음껏 사용해 묘사한 요란하고 변덕스럽게 그린 코미디 드라마로 다소 무겁고 신선감은 없으나 그런대로 즐겁게 볼 수 있는 할러데이 시즌용 가족영화다. 
일종의 전기영화로 디킨스의 삶과 ‘크리스마스 캐롤’의 내용을 자유롭게 변용해 현실과 책의 내용을 뒤섞어 드라마로 만들었다. 출연진의 다양한 연기와 충실히 묘사한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소설의 집필 과정을 그럴싸하게 묘사, 즐길 만 하다.
디킨스가 이 소설을 쓴 것은 31세 때. 그 전에 낸 책이 세 차례나 대중의 외면을 받아 디킨스(댄 스티븐스)는 지금 재정난과 함께 슬럼프에 빠져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디킨스가 다음 소설로 구상하고 있는 것이 ‘크리스마스 캐롤’의 내용. 그러나 그의 출판사는 크리스마스 얘기는 안 팔린다고 출판을 거부한다. 
이에 아랑곳 않고 디킨스는 소설을 6주 만에 집필해 자비로 출판한다. 그가 글의 아이디어를 찾아 방안을 헤매면서 난리법석을 떠는 모습이 재미있다. 작가의 창조적 예술적 과정에 대한 얘기이기도 한데 물론 책은 불티나게 팔린다. 디킨스는 책의 아이디어를 자기 가족과 자기가 만나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얻는다. 인자하고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케이트(모피드 클락)와 어린 자기 아이들에게 베드타임 스토리를 읽어주는 하녀 타라(안나 머피) 그리고 사람은 좋으나 무책임한 아버지 존(조나산 프라이스) 등이 가족.
그리고 그의 소설 속 인물의 아이디어를 주는 사람들로는 에브네저 스크루지의 모델이 되는 나이 먹고 인정 없는 구두쇠 사업가(크리스토퍼 플러머)와 병약한 조카. ‘험버그’를 소리치는 구두쇠는 스크루지가 돼 디킨스의 환상 속에서 디킨스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디킨스는 그 외 소설 속에 나오는 혼들과도 만난다. 물론 병약한 조카는 소설 속의 타이니 팀의 모델이다. 
이들 외에도 영화에는 디킨스의 친구이자 에이전트인 존 포스터(저스틴 에드워즈)와 디킨스 소설의 삽화가(사이몬 캘로우) 그리고 디킨스와 동시대 작가로 디킨스의 실패를 고소해 하는 윌리엄 메이크피스 대커리(마일스 줍) 등 여러 인물들이 나와 내용에 다양성을 제공한다.
BBC-TV 드라마 시리즈 ‘다운턴 애비’로 유명해진 스티븐스가 복잡하고 다소 이기적인 디킨스 역을 과장되게 코믹하면서도 경쾌하게 잘 해내고 스크루지의 모델인 자린고비 역의 베테런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역시 베테런인 조나산 프라이스 등이 호연한다. 이 밖에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PG.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등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사무라이’(Le Samourai·1967)

캡션 추가

고독하고 냉혈하지만 쿨한 킬러, 알랑 들롱 매력 가득


신사복 정장에 타이를 맨 킬러는 트렌치 코트를 입은 뒤 코트 깃을 올리고 이어 페도라를 쓴다. 킬러는 페도라의 앞을 손으로 좌우로 쓰다듬은 뒤 문을 열고 아파트를 나선다. 킬러는 이어 길에서 자동차를 훔쳐 탄 뒤 차고에 들러 자동차 번호판을 바꾸고 차고 주인으로부터 권총을 건너 받고 자기 임무를 위한 목적지로 간다. 목적지에 도착한 킬러는 손에 흰 장갑을 낀 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이 무표정한 얼굴의 쿨한 킬러가 프랑스 갱스터영화의 명장 장-피에르 멜빌(‘도박사 밥’ ‘밀고자’ ‘붉은 원’ ‘형사’)의 우아한 스타일을 지닌 ‘사무라이’의 주인공 제프 코스텔로다. 제프 역으로는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도는 비수 같은 눈동자를 지닌 알랑 들롱이 나온다. 이 영화는 들롱의 연기 생애를 확정지은 킬러영화로 1940년대의 미국 갱스터영화와 1960년대의 프랑스 팝문화 그리고 일본 사무라이영화의 외톨이 검객의 신화를 칵테일한 쿨한 작품이다. 
과묵한 들롱이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을 압도하면서 고독하고 냉혈한 킬러의 창백한 매력을 독소를 품은 향기처럼 발산한다. 그가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름답고 차가운 얼굴의 미간을 찌푸리면서 노려보는 눈매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는 시계의 앞면을 오른손 안쪽으로 보이게 차 시계를 볼 때마다 옷소매를 올리는 제스처가 독특한 멋을 발산한다. 
파리의 칙칙하게 어두운 곰팡이 색깔의 검소한 싱글 룸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는 제프를 카메라가 멀리서 찍은 장면으로 시작된다. 4월4일 토요일 오후 6시다. 방에는 새장에 갇힌 새 한 마리가 있는데 이 새는 자기 운명에 갇힌 제프의 고독과 신세를 상징한다고 봐도 좋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와 ‘태양은 가득히’ 등 프랑스의 많은 명화들을 찍은 앙리 드카에의 무드 짙은 촬영이 영화의 스산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칼러인데도 시종일관 찌푸린 날씨처럼 음산하다. 
프로 킬러인 제프는 목표를 살해하기 전에 고급 창녀인 애인 제인(들롱의 부인 나탈리 들롱)을 찾아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는다. 영화는 시작해서 제프와 제인이 대사를 나누기까지 10분 간 말이 없다. 
제프의 목표는 고급클럽 마티스의 주인. 살인을 하고 나오는 제프를 클럽의 몇 명의 사람들이 목격하는데 그 중에서도 제프의 얼굴을 정면에서 가까이 본 사람이 클럽의 흑인 여 피아니스트 발레리(캐시 로비에). 발레리가 치는 재즈곡과 함께 프랑솨 드 루베가 작곡한 재즈음악이 킬러영화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제프는 자기 일의 대가를 받으러 갔다가 배신을 당해 자기를 고용한 자가 보낸 하수인이 쏜 총에 팔에 부상을 입는다. 여기서부터 제프는 복수를 하려고 자기를 고용한 자를 찾는다. 한편 형사반장(프랑솨 페리에)이 이끄는 수사팀이 수사에 나서면서 제프를 비롯한 거리의 ‘평상시 용의자’들이 대거 경찰서에 끌려온다. 
클럽에서 제프를 목격한 사람들이 서로 엇갈리는 증언을 하는 가운데 발레리도 제프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위증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제인도 제프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밤 자기와 함께 있었다고 위증하면서 제프는 풀려난다. 그러나 형사반장은 제프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제프의 뒤를 집요하게 쫓는다. 
집에 돌아온 제프를 맞는 자가 자기에게 총상을 입힌 하수인. 이 자가 제프에게 200만 프랑을 주면서 자기 두목이 지시한 자의 살해를 요구한다. 제프가 이 자를 때려누인 뒤 그로부터 자기를 고용한 자의 이름과 주소를 받아낸다. 제프가 배신의 복수를 위해 자기를 고용한 자를 찾아가는 뒤를 형사들이 추적하는데 제프가 이를 피하려고 지하철을 여러 차례 갈아타고 형사들을 따돌리는 장면이 멋과 함께 서스펜스와 스릴이 있다. 
그가 찾아간 집은 배신자의 집은 발레리가 사는 집. 제프는 배신자를 총으로 사살하고 마티스클럽으로 간다. 그리고 모자 보관소에 모자를 맡긴 뒤 티켓도 남겨놓고 이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흰 장갑을 끼고 발레리에게 다가가 그에게 총구를 겨냥한다. 그리고 요란한 총성이 들린다. 제프는 왜 모자 보관 티켓을 안 받았으며 왜 발레리에게 다가갔는가. 이 고독한 외톨이 늑대의 실존적 킬러영화가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새로 복원된 블루-레이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원더’(Wonder)

이자벨(줄리아 로버츠)은 얼굴이 오그라든 아들 오기를 키우는데 온갖 정성을 쏟는다.

장애아 둘러싼 갈등과 용서… 훈훈한 연말 가정영화


할러데이 시즌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훈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을 고양시키는 드라마로 주인공이 10세 난 초등학생이어서 그 또래의 아이들이 즐겨 보겠다.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수용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인정 그리고 용서와 친절과 연민을 강조한 얘기다.
내용이 다소 진부하고 감상적이지만 작품의 의도가 진지하고 인간적이며 또 순수해 뉘앙스의 부족과 같은 단점들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넘어서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유머도 있다. 특히 주인공 꼬마 역의 제이콥 트렘블리(‘룸’)의 경탄을 금치 못할 연기와 그의 부모로 나오는 줄리아 로버츠와 오웬 윌슨의 콤비와 연기가 좋은 조화를 이룬다. 이와 함께 조연진의 연기도 다소 가벼운 영화에 무게를 실어준다. 
뉴욕에서 따스한 어머니 이자벨(로버츠)과 유머가 많으나 약간 아이처럼 구는 아버지 네이트(윌슨) 그리고 착하고 예쁜 고등학생인 누나 비아(이자벨라 비도빅)와 함께 사는 10세 난 오기 풀만(트렘블리)은 출생 때부터 얼굴이 흉하게 오그라져 그 후 수술을 27회나 받았으나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오기는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을 받고 우주인의 헬멧을 쓰고 산다. 
오기가 열살이 되면서 이자벨은 오기를 학교에 보내기로 한다. 이에 네이트는 동조는 하나 아들이 학교에서 또래들로부터 받을 차별에 대해 걱정이 태산 같다. 물론 오기는 학교에서 줄리안(브라이스 가이사) 등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지만 이에 굴복치 않는다. 
오기는 매우 총명하고 성숙해 교사들도 놀랄 정도인데 오기에게 특별히 자상한 사람들은 교장선생 투쉬만(맨디 패틴킨)과 담임선생 브라운(데이빗 딕스) 그리고 오기가 특별히 잘 하는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 페트나(알리 리버트) 등.
영화는 오기와 오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아끼는 친구 잭(노아 주프) 그리고 비아와 비아와 사이가 어긋난 단짝 친구 미란다(다니엘 로즈 러셀) 및 줄리안 등의 얘기 식으로 챕터가 나뉘어 서술된다. 
오기의 학교생활과 가정생활과 함께 오기 때문에 부모의 관심에서 물러나 있는 비아의 얘기가 큰 플롯을 이루는데 비아는 부모가 온 정성을 오기에만 쏟는 것에 가끔 좌절을 느끼나 이를 이해하는 착한 소녀다. 그리고 비아와 미란다의 관계와 함께 비아의 첫 사랑인 학교 동급생으로 연극광인 저스틴(나지 지터)과의 풋사랑이 아름답게 얘기된다. 
영화가 원체 선해 오기를 못 살게 굴던 줄리안마저 나중에 구원(?)을 받게 되는데 세상에 이렇게 좋고 착한 사람들만 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요즘 세상에 딱 필요한 영화이기도 하다. 나이보다 작은 체격의 오기가 무수히 변화하는 감정의 사이클을 다변하게 연기한다. 분장으로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인데도 제스처와 음성과 분위기로 에너지 충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스티븐 치보스키 감독(공동 각본).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신의 섭리’(The Divine Order)

노라와 남편 한스. 뒤에‘주부 파업중’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평범한 주부서 여권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 아담하고 재미있고 그려


1971년 알프스 인근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여권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아담하고 재미있고 경쾌하게 그린 스위스영화다. 집 밖에는 모르던 여자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면서 자아발견을 함과 동시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까지도 혁신의 바람을 몰아다주는 ‘여성 만세’ 드라마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심각한 주제를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이끌어가는 여류 감독 페트라 볼페의 솜씨가 사뿐하다. 시의에 어울리는 얘기이기도 한데 어떻게 끝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 긴장감이 새는 것이 흠이다. 보기 좋은 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조연진의 다양한 연기. 독어 대사에 영어자막.
노라(마리 로이엔베르거)는 목재공장에 다니는 남편 한스(막스 지모니쉑)와 어린 두 아들 그리고 시아버지와 가사를 돌보는 전형적인 모범주부. (*노라라는 이름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의 주인공인 여권해방론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리라). 노라는 자기도 직업을 갖고파 보수적인 남편에게 얘기했다가 딱지를 맞는다. 당시 스위스 법으로 아내는 남편의 허락 없이는 직업도 못 가진다. 그러니 여자에게 투표권이 있을 리가 없다. 
노라가 여권운동에 앞장서게 된 직접적 이유는 자기 언니(라헬 브라운슈바이크)의 반항적인 딸 한나(엘라 룸프)가 장발의 오토바이족 애인과 함께 달아났다가 붙잡혀 수용소에 갇히게 되면서다. 한나가 그렇게 된 데는 노라의 책임도 있기 때문. 
여기서부터 얌전하던 노라는 남편과 주위 남자 그리고 일부 여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여권운동에 나선다. 이에 동조하는 여자들 중에 특히 돋보이는 여자가 옛날부터 여권운동에 나섰던 7순의 브로니(지빌레 브룬너)와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신여성 그라지엘라(마르타 조폴리). 
이들과 나머지 여성들은 그라지엘라의 식당에 본부를 차리고 투표권을 비롯한 각종 여권신장운동에 돌입한다. 그리고 노라 등은 베른에서 열리는 여권운동 시위에 동참하고 스웨덴에서 온 여성 선각자로부터 여자의 은밀한 부분이 지닌 힘을 배운다. 그러나 노라와 동지들의 여권 운동에 남자들이 마이동풍 식으로 나오자 이들은 아내와 어머니 역을 거부하는 스트라이크를 시작한다. 
영화 끝에 남녀평등이 스위스 헌법에 명기된 것은 1981년이요 전 스위스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얻게 된 것은 1990년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온 런던 브리지’


‘난 어제 밤 런던 다리 위를 걸었지요/가로등 불빛에 당신을 보았어요/종소리가 졸린 런던타운에 울리면서/런던다리가 내려왔어요. 하늘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지만/우리가 키스를 했을 때 마치 마법처럼/달과 별들이 주위에서 빛났지요/런던다리가 내려왔을 때였어요. 다리 위엔 오직 당신과 나만이 있었고/두 마음은 허공중에 매달려 있었지요/그리고 강 위 높은 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어요. 두 텅 빈 마음은 끌어안을 사랑을 발견했어요/두 개의 담배연기 고리는 황금의 반지로 변했지요/나는 우리가 런던타운에서 만난 날을 찬미 한답니다/런던 다리가 내려왔을 때지요.’ 
내가 좋아하는 여가수 조 스태포드가 부르는 ‘온 런던 브리지’다. 런던에 가면 생각나는 노래다. 이달 초 영화일로 런던에 1주일간 다녀왔다. 런던날씨는 생각보다 온화했다. 갖고 간 버버리코트도 하루 저녁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동료회원인 키다리 스웨덴친구 마그너스와 같이 숙소인 랭함호텔 인근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하이드파크를 걸을 때 딱 한번 입었다.
런던은 그 동안 영화일로 여러 번 방문, 내 동네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피카딜리 서커스의 대형 전자간판에는 Samsung이 점멸하고 빨강색 2층버스 옆에는 손흥민의 웃는 얼굴사진이 붙어있다.
거리 공중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인 천사가 매달려 행인들을 내려다보고 있고 펍 앞에는 여전히 보도까지 꽉 메운 술꾼들이 너도 나도 손에 맥주잔을 들고 서있다. 버스를 타고가다 당장 뛰어내려 그들 속에 끼어들어 맥주 한잔 하고픈 생각에 갈증이 났다.
런던은 차도의 폭이 좁은 탓인지 교통 혼잡이 맨해탄 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차도도 인도도 차와 사람들로 대 혼잡을 이루고 있는데 이런 번잡함으로 겪는 피로는 바비 다린이 노래한 ‘어 나이팅게일 생 인 바클리 스퀘어’의 바클리 스퀘어를 비롯한 도심 곳곳에 자리 잡은 손바닥만한  공원에서 풀어도 될 것 같다.   
하루 가는 비가 왔는데 비 맞은 탓인지 런던에서 처음으로 대형 우산가게를 봤다. ‘셰르부르의 우산’의 우산가게가 생각났다. 노점에 매어달린 히틀러 콧수염을 한 트럼프의 얼굴이 새겨진 셔츠를 보고 킬킬대고 웃었다. 미국에서도 저런 셔츠 파나.
랭함호텔을 비롯해 클래리지와 로즈우드호텔로 옮겨 다니며 인터뷰한 배우가 자그마치 22명.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세트방문하고 인터뷰하고 영화까지 보는 초 강행군 일정이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새새 짬을 내 거리를 걸었지만 피곤이 누적돼 늦가을 런던정취를 만끽하지 못해 지금도 찜찜하다.
만난 배우들은 줄리아 로버츠, 벤 애플렉, 에디 레드메인, 미셸 파이퍼, 갤 개돗, 페넬로피 크루즈, 오웬 윌슨, 브라이언 크랜스턴 및 미셸 도커리 등. 이들이 나오는 영화들은 현재 촬영 중인 ‘팬태스틱 비스츠 2’를 비롯해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살인’과 ‘래스트 플랙 플라잉’ ‘저스티스 리그’ ‘원더’ 그리고 TV시리즈 ‘갓리스’ 등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인터뷰에 녹초가 된 몸으로 애플렉과 개돗 등 호화캐스트가 나오는 ‘저스티스 리그’를 봤는데 어찌나 꼴불견인지 난장판 액션 소음 속에서도 깜빡 깜빡 졸면서 봤다.   
‘팬태스틱 비스츠 2’를 찍고 있는 런던 인근의 리브스텐 스튜디오는 ‘해리 포터’시리즈를 찍은 곳이다. 의상과 소품실에 이어 1927년대 파리거리 세트를 둘러보고 뉴욕 고층건물 꼭대기 세트에서 영화에 나오는 레드메인 등을 인터뷰했다.
이번 런던 방문에서 가장 뜻 깊었던 일은 ‘영화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12월 15일 개봉)의 실제 주인공 피터 터너를 만난 것. 내년으로 창립 75주년을 맞는 HFPA가 이를 기념해 대부분 영국의 영화와 TV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메이페어 호텔에서 연 파티에서였다.
우연히 나만한 키를 한 대머리에 단단한 체구를 지닌 남자와 대화를 나눴는데 이 사람이 “내가 그 영화의 피터 터너”라고 자기를 소개했다.(사진) 난 그에게 “정말이냐. 너무나 반갑다”며 악수를 나눈 뒤 서로 긴 얘기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터너는 영화에서 자기 역을 한 제이미 벨과 얼굴이 닮았다.   
이 영화는 할리웃 황금기의 섹시스타 글로리아 그램이 생애 마지막 무렵인 56세 때 런던에서 만난 28세 연하의 터너와의 로맨스를 그린 것이다. 영화에서 그램으로는 아넷 베닝이 나온다. 터너는 먼저 “나 한국 음식 아주 좋아 한다”고 운을 떼더니 얘기를 자기 애인에게로 돌려 ”그램의 눈을 보면 그 안으로 빨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그램은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다“고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어렸을 때 그램의 ‘빅 히트’를 보고 그에게 반해 그램의 팬이 되었다고 말하자 터너는  “그 영화와 ‘인 더 로운리 플레이스’가 좋았었지”하면서 “우리는 정말로 뜨거운 사랑을 나눴고  난 지금도 그램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내가 좋아하던 옛 스타의 실제 연인을 만나 과거를 얘기하자니 내가 마치 흑백영화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