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3월 6일 월요일

로간(Logan)


화가 난 로간의 손에서 강철 손톱이 튀어 나온다.

노쇠한 울버린‘로건’낯선 소녀‘로라'를 만나


마블만화 ‘X-멘’의 주인공 중 하나로 손에서 날카로운 강철 손톱이 튀어나오는 돌연변이 늑대인간 울버린으로 빅스타가 된 휴 잭맨이 울버린 역에서 은퇴하는 마지막 영화다. 초능력을 지닌 돌연변이들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고뇌하는 울버린은 여기서 피곤하고 지친 로간으로 나와 본의 아니게 어린 소녀를 돌보게 되면서 폭력을 가차 없이 구사한다. 
지나치게 잔인하고 유혈폭력이 자심하고 길지만(137분) 연출과 기술적인 면과 내용 그리고 연기 등이 다 말끔하고 군더더기 없다. 일종의 속편이나 속편 같지 않게 독립해 혼자 따로 선 영화다.
느와르 분위기 속에 지구 종말 얘기와 웨스턴을 모방하고 있는데 알란 래드가 나온 ‘셰인’(Shane)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 경배를 하고 있다. 과도하게 끔찍한 폭력이 흠이긴 하나 액션 속에 유머와 감정과 감상 그리고 서정성 까지 내포하고 있는 볼만한 영화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에겐 적당치 않아 등급이 R(17세 미만 관람 시 부모나 성인의 조언이 필요함)이다.
2029년. 돌연변이들은 이제 멸종 상태다. 남아 있는 것이 삶에 지쳐 술꾼이 된 채 리모 운전사로 연명하는 로간(잭맨)과 그가 돌보는 X-멘 리더 찰스(패트릭 스튜어트) 그리고 백변종인 캘리반(스티븐 머천트). 이들은 텍사스의 엘 파소 변두리에 있는 버려진 제철소에서 산다.     그런데 9순의 찰스는 뇌가 과거와 달리 작용을 제대로 못 해 막강한 텔레파시 힘을 자유재로 다루지 못 한다. 
어느 날 로간 앞에 현찰 더미를 들고 나타난 소녀 로라(대프니 킨)가 자기를 빨리 캐나다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이에 로간과 로라 그리고 찰스가 대형 리모를 타고 미국의 중간을 가로질러 캐나다로 내빼면서 폭력과 액션이 일어난다. 강렬한 시선을 지닌 로라는 로간처럼 손에서 강철 손톱이 나오는 돌연변이로 로라와 다른 돌연변이 아이들을 멕시코의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사람은 사악한 생명공학자 라이스박사(리처드 E. 그랜트).
여기서 도주한 로라를 라이스의 하수인인 도널드 피어스(보이드 홀브룩)와 그의 인조인간 졸개들이 뒤를 쫓으면서 로라가 로간의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맹렬한 추격과 도주가 있는 로드 무비로 이 과정에서 로간과 로라 간에 이뤄지는 부녀와도 같은 관계가 매우 감정적이다. 
잭맨이 폭력적이면서도 정감 있는 모습을 힘차고 다양하게 보여주고 과묵한 로라 역의 킨이 몸과 마음을 모두 안으로 팽팽하게 휘어감은 당찬 연기를 한다. 대성할 아이다. 울버린이 이 영화로 팬들과 작별을 고하긴 했으나 할리웃에선 죽은 사람도 되살아나는 것이 보통이어서 언제 다시 울버린이 부활해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 Fox.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유언(The Last Word)


해리엣이 고독을 술로 달래고 있다.

81세 고약한 이혼녀… 뒤늦게 인생의 교훈 배워


8순의 베테런 스타 셜리 매클레인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춤까지 추면서 스크린을 종횡무진으로 휩쓸고 다니는 원 우먼 쇼와도 같은 달곰씁쓸한 코미디 드라마다. 얘기가 너무 틀에 박힌 대로 엮어진 대다 과다하게 감상적인 것이 흠이긴 하나 매클레인의 의기양양한 연기 하나만 봐도 즐길 수 있는 매클레인에게 보내는 찬사다.
올드 팬들을 위한 영화인데 한 여자가 드래곤 레이디에서 뒤 늦게 인생의 교훈을 배워 가슴이 넉넉해지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얘기를 인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렇게 내면적으로 가슴이 넉넉해지면서 동시에 실제 심장도 과다하게 커져 비로소 새 인생을 값지게 살아보려는 순간 의사로부터 슬픈 진단을 받는다. 
LA인근 허구의 마을 브리스톨에서 혼자 사는 81세난 해리엣 롤러(매클레인)는 심술꾸러기요 허영에 찼으며 퉁명스럽고 남 알기를 신발털이 깔개 정도로 아는 고약한 이혼녀다. 티 없이 깨끗한 큰 집에서 혼자 사는 해리엣은 고독을 달래기 위해 포도주를 상음하는데 어느 날 수면제에 포도주를 섞어 먹어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녀가 자살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해리엣은 동네신문 브리스톨 가젯의 부음을 읽다가 문득 자기가 죽으면 어떻게 보도될 것인가를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래서 자기가 알기엔 모두 별 볼 일 없는 사람인데도 생전 훌륭하고 좋은 일을 한 사람으로 부음기사를 쓰는 신문의 여기자 앤(아만다 사이프리드)을 찾아가 자기 부음기사를 위한 참고로 자기를 아는 100명의 이름을 주면서 기사 준비를 시킨다. 
그러나 앤이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해리엣에 관해 물어보니 모두 독한 소리만 한다. 심지어 동네 신부마저 해리엣을 증오한다고 고백한다. 해리엣에 대해 관용적인 유일한 사람이 그녀의 전 남편 에드워드(필립 베이커 홀). 
해리엣은 이제부터 좋은 일을 하겠다며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나선다. 달동네의 9세난 당돌한 흑인소녀 브렌다(앤 주얼 리)의 후견인이 되고 관계가 소원했던 딸 엘리자베스(앤 헤시)와의 화해를 시도하고 동네 라디오 방송국에서 옛 록뮤직을 트는 D.J. 까지 하면서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서의 재생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앤이 엘리자베스를 대신한 딸처럼 된다. 마크 펠링턴 감독. R. Bleecker Street.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팜므 파탈‘살로메’




처녀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틴에이저 살로메가 한을 품으니 세례 요한의 목이 날아갔다. 성경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살로메 얘기를 극적으로 각색한 것이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이요 리햐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연극을 보고 오페라 ‘살로메’(Salome)를 작곡했다.
성경과 달리 오페라에서는 살로메가 세례 요한에게 애걸복걸하다시피 구애하다 퇴짜를 맞은데 앙심을 품고 자기를 탐내는 의붓아버지 헤롯왕에게 자기가 춘 ‘일곱 베일의 춤’의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살로메의 얘기는 욕정과 피, 집념과 복수가 얼키설키 엮어진 퇴폐적 향락주의로 채색된 내용으로 여성의 성적 힘을 노골화한 우먼 파워의 얘기이기도 하다. 병적이요 변태적이며 가학적 야만성을 지닌 야단스런 내용 때문에 살로메의 얘기는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좋은 창작소재가 되어왔다.
살로메의 드라마는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요염한 선정성 때문에 ‘요부’라 불린 무성영화 시대 수퍼 스타 테다 바라가 1918년에 주연한 것에서부터 켄 러셀 감독의 ‘살로메의 마지막 춤’(1981) 까지 다양하다.
내가 중학생 때 수도극장에서 본 ‘살로메’(1953)도 그 중 하나다. 에로틱한 글래머 스타 리타 헤이워드가 주연인데 질은 떨어지나 값 싼 재미가 있다. 영화에서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숨을 구하려다 실패한 뒤 예수의 복음에서 구원을 찾는다. 헤이워드가 긴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나긋나긋한 육체를 미친 듯이 흔들어 대면서 ‘일곱 베일의 춤’을 춰 헤롯(찰스 로턴)뿐만 아니라 어린 녀석이었던 나의 넋까지 빼앗아 갔었다.    
그리고 빌리 와일더가 감독한 ‘선셋 대로’의 마지막 장면에서 머리가 돌아버린 무성영화 시대의 빅 스타 노마 데즈몬드(글로리아 스완슨)가 “드밀 씨, 나 클로스-업 준비 다 됐어요”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면서 연기하는 여인의 모습도 살로메의 것이다.
살로메의 오페라로는 마스네의 ‘에로디아드’도 있지만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은 슈트라우스의 것이다. 1막짜리로 지난 1905년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초연됐는데 대사도 원작인 와일드의 연극대사를 사용했다.
그런데 연극이나 오페라 모두 과격하고 자극적인 내용 때문에 판금과 공연불가 조치를 당하면서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었다. 오페라 ‘살로메’는 1907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의해 미국에서 초연됐으나 역시 내용 때문에 단 1회 공연 후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내용이나 음악이 모두 혁명적인 오페라 ‘살로메’가 현재 LA오페라에 의해 LA 다운타운의 뮤직센터에서 공연 중이다(19일까지.) 살로메 역은 10대 소녀의 유연한 동작과 바그너 오페라의 강력한 음역을 지닌 소프라노를 겸비해야 하는 어려운 것이다. 살로메가 혼자 오페라를 어깨에 짊어지다 시피 한 것이어서 초인적인 스태미나를 요구한다.
LA오페라의 살로메는 50대의 패트리시아 라셋이 맡았는데 노래는 곱고 힘차며 연기는 육감적이었다. 중년 여인이 소녀 역을 맡아 독무대다 싶을 만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소리 지르고 울부짖으면서 카리스마가 가득한 노래와 연기를 했다. 라셋의 노래 소리는 청아하고 결이 고우면서도 폭과 깊이를 갖춘 강렬한 것이었다. 동작은 율동적이며 고무공이 튀듯이 탄력이 있는데 애교를 부리면서 저돌적이기 까지 했다.
특히 감동적으로 강렬한 것은 살로메와 세례 요한(바리톤 토마스 토마슨)과의 이중창. 살로메가 자기를 마다하는 세례 요한에게 구애의 말들을 폭우처럼 쏟아놓는데 이야말로 불꽃 튀는 성의 대결이다. 이와 함께 살로메가 손에 든 세례 요한의 머리를 보면서 욕정과 복수의 말들을 토해내는 병적으로 섹시한 장면(사진) 역시 보는 사람의 감관을 사로잡을 만하다.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관능적인 음악에 맞춰 살로메가 추는 ‘일곱 베일의 춤’. 이 춤 때문에 세례 요한의 목이 날아가는데 라셋은 4명의 남자댄서들과 함께 정열적인 춤을 추다가 마지막에 완전 나체로 헤롯과 관객을 유혹했다. 충격적이다.
살로메의 세례 요한에게 보내는 대사가 아름답고 감각적이며 시적이다(그런데 대사 중 일부가 반유대적이다.)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흰 피부와 검은 머리 그리고 붉은 입술을 찬미하는데 살아서 못한 세례 요한에 대한 키스를 잘라진 머리의 입술에다 하면서 육욕과 복수에 환희하는 모습을 보자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살로메야말로 남자 잡는 팜므 파탈이다.
음악이 힘차고 격정적이며 사정없이 몰아대면서도 곱고 서정적인데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LA오페라 오케스트라가 훌륭하게 연주했다. 세트는 보잘 것 없었으나 토마슨을 비롯해 살로메를 짝사랑하다 자살한 근위대장 역의 테너 이사카아 새비지와 나사렛인 역의 한국계 바리톤 윤기훈 등이 다 노래를 잘 불렀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