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4월 26일 일요일

‘에피 그레이’ 클라우디아 카르디나레




“함께 일한 가장 아름다운 남자는 록 허드슨”

150여편 영화 출연…‘표범’ ‘8 ½’ ‘부베의 여인’ 애착

브리짓 바르도와는 라이벌 아닌 아주 친했던 사이


1960년대 전성기에 BB로 불린 프랑스의 육체파 브리짓 바르도에 맞서 CC라 불리면서 전 세계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왕년의 이탈리아의 글래머 스타 클라우디아 카르디나레(77)와의 인터뷰가 지난 3월30일 뉴욕의 레파드 식당에서 있었다. 육감적이던 얼굴이 전연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 카르디나레를 보면서 세월의 무상을 다시 한 번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카르디나레는 그런 세월을 무시나 하듯이 매우 정력적이요 쾌활하고 유머가 많았다. 튜니지아 태생인 카르디나레는 특유의 저음에 다소 서툰 영어로 질문에 간단하면서도 위트 있게 대답했는데 록 허드슨과 케리 그랜트 등 과거 자기와 공연한 스타들의 얘기를 할 때는 그리움에 젖은 모습을 보였다. 카르디나레는 주제가‘시노 메 모로’로 유명한‘형사’와‘부베의 여인’ 및‘가방을 든 여자’로 올드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카르디나레는 최근 개봉된 19세기 영국의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과 19세 때 결혼, 불행한 삶을 산 꿈 많은 에피 그레이의 실화를 그린‘에피 그레이’(Effie Gray)에서 베니스의 귀부인으로 나온다.  

―당신의 영화들은 한국에서 굉장한 인기를 모았었다. 특히 한국 여자들은 당신과 조지 차키리스가 공연한 ‘부베의 여인’을 사랑했는데 그 영화와 차키리스에 대한 좋은 추억이라도 있는지.
“그것은 정말로 멋있는 영화였다. 지난 번 내가 LA에 들렀을 때 차키리스가 날 기다려 만났다. 그리고 내게 선물을 듬뿍 주었다. 그 영화는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다음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나레가 되려는 젊은 배우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겠는가.
“모르겠다. 난 배우가 될 생각이 없었으니까. 감독 등 영화인들이 나를 못 살도록 조르는 바람에 배우가 된 것이다. 그들은 마치 연인을 쫓아다니듯이 날 쫓아다녔다.” 

―당신은 맹렬 여권운동가인데 그것이 영화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다고 보는가.
“난 여권신장을 위한 유네스코 대사다. 난 그것을 위해 늘 싸우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나라에선 남자들이 왕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늘 그런 남자들에 맞서 싸웠다.” 

―남자와 사랑에 대해 배운 것이 무엇인가.
“내가 결코 결혼 안한 것 보면 짐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겐 딱 한 명의 중요한 남자가 있는데 그는 내 딸의 아버지인 나폴리 태생의 영화감독 파스쿠알레 스퀴티에리이다. 영화들을 찍을 때 많은 남자들이 내게 구애를 했지만 다 ‘노’했다.”

―영화 ‘표범’에 대해 말해 달라.
“참으로 훌륭한 영화였다. 처음 영화에 버트 랭카스터가 나온다고 하자 사람들이 ‘아니 그는 카우보이인데 이런 시대극을 해낼 수가 없을 걸’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그는 멋있게 해냈다. 그 후 랭카스터와 난 절친한 사이가 됐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나레가 사랑하는 영화 중 하나인‘부베의 여인’. 왼쪽은 공연한 조지 차키리스.

―영화 선택을 어떻게 하나.
“감독과 각본이 우선이다. 각본이 나쁘면 출연을 거절한다. 그리고 세트에선 감독이 제일 중요하다. 좌우단간에 나는 남들은 다 은퇴했지만 77세에도 일을 하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지금까지 150여편의 영화에 나왔다.”

―돌아보건 데 당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고쳐 보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지.
“인생은 단 한번 뿐인데 고치긴 뭘 고치는가. 한 가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직업은 안으로 심지가 굳어야 해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조차 모르게 된다. 카메라 앞의 나는 허상으로 촬영이 끝나면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가.
“엄마라는 것은 참 멋있다. 난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지금 내 딸과 아들은 다 혼자 살고 있다. 우린 서로 아주 가깝다.”

―당신에게 있어 성공과 명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이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난 거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산책하고 신문을 사서 읽고 바디가드도 없다.”

―명성 중에 가장 즐길 만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아랍 사람이어서 날 공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형수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난 그것을 싫어하고 하지도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나더러 ‘넌 늘 하하하 하고 웃기 때문에 주름살을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성형수술을 하고 난 뒤 거울을 보면 자신을 알아볼 수가 없을 것 아닌가.”                    

―당신은 BB라 불린 브리짓 바르도에 맞서 CC라 불리며 그로부터 가장 섹시한 여배우의 왕관을 빼앗았는데 둘의 관계가 어땠는지.
“파파라치들이 우리를 놓고 금발 대 검은 갈색머리의 대결이라고 부추기면서 우리가 서로 죽이기라도 할 것이라고 했지만 우린 아주 좋은 관계였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할리웃에서의 재미있는 경험은 무엇인지.
“난 늘 바디가드 없이 혼자 걸어 다녔는데 경찰들은 날 보면 늘 세운 뒤 ‘왜 바디가드가 없느냐’고 묻곤 했다. 그 때마다 내 대답은 ‘난 바디가드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신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남자는 누구인지.
“난 많은 아름다운 남자와 일을 해서 고르기가 쉽지는 않지만 록 허드슨이라고 해야겠다. 그는 나의 좋은 친구였다. 당시엔 동성애자는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있을 땐 마치 연인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 때 동성애는 배우에겐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서로가 주고받는 대화요 통신이다.”

―지금 어디서 사나.
“파리다. 31년째 살고 있다.” 

―딸이 혹시 당신의 전철을 밟을 생각은 없었는지.
“그런 제의가 있었지만 딸은 싫단다. 굉장히 예쁘다. 한 번은 LA에서 딸에게 잔 다르크 역이 주어졌는데 딸은 거절했다.”

―요즘 애인이 있나.
“내게 남자란 단 하나 내 딸의 아버지다. 그러나 난 늘 혼자 살고 있다.”

―어떻게 해서 배우가 됐는가.
“우연이다. 튜니지아에서 미인대회가 있었는데 그 때 행사 관계자 한 남자가 거기에 있던 나를 무조건 잡아끌어 무대에 내보냈다. 그리곤 당선 부상으로 베니스영화제에 보냈다. 거기서 비키니를 입었는데 파파라치들이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법석을 떨더라. 그 때 비키니 처음 입어 봤다. 이어 영화감독과 제작자들이 영화 출연을 제의했지만 난 ‘노’라고 했다. 집에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영화를 거절한 여자’라는 제목의 나에 관한 기사를 일고 깜짝 놀랐다. 그 후 영화 관계자들이 내 아버지에게 전보를 수 없이 보내 날 배우로 내보내라고 독촉을 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갑자기 로마의 촬영 실험센터에 등록을 하게 된 것이다. 난 성질이 있어 주위 사람들이 다 날 싫어했다.”

―그 때 영화인들이 당신의 섹시한 음성을 싫어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이탈리아 말을 못하는데다가 음성까지 남자 것 같아서 싫어했다. 내 얼굴을 안 보고 목소리만 들으면 날 남자로 착각했다.”        

―누구의 옷을 입나요. 또 장신구들을 좋아하나. 
“늘 아르마니다. 장신구들을 좋아한다.”

―당신의 가슴에 아주 가깝게 느끼는 영화들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두 영화는 비스콘티의 ‘표범’과 펠리니의 ‘8 ½’이다. 그리고 ‘가방을 든 여인’과 ‘부베의 여인’이다.”

―할리웃에서의 경험 중 기억나는 것은 무엇인가.
“존 웨인이 주연한 ‘서커스 월드’를 찍을 때 리타 헤이워드가 내 캠퍼를 찾아와 내 얼굴을 보더니 울기를 시작하더라. 난 영문을 몰랐다. 이어 그는 나보고 ‘나도 한 때 아름다웠지’라고 했다. 그는 그 때도 아름다웠는데도 과거의 자기가 더 아름다웠다고 여긴 것 같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워터 디바이너 (The Water Diviner)


아버지 조슈아(러셀 크로우)와 다정한 때를 보내고 있는 조슈아의 장남 아서(라이언 코·왼쪽).

돌아오지 않는 세 아들 찾아 전쟁터로


러셀 크로우가 감독으로 데뷔하고 주연도 겸한 전쟁과 가족애에 관한 멜로드라마로 구식 스타일의 영화다. 크로우는 마치 ‘의사 지바고’와도 같은 자신의 야심적인 서사 전쟁액션 로맨스 드라마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깊이가 모자라는 평범한 오락물이 되고 말았다.
그는 방대한 스케일 속에 감정적이고 내밀하며 또 아주 가깝고 사소하고 작은 것들까지 섞어 넣어 고루 균형을 갖춘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그것들이 썩 잘 배합이 되질 못했다. 내용이 우연이 많고 감정적으로 자연스럽다기보다 조작적인 흔적이 역력한데 특히 그와 올가 쿠리렌코(본드 걸)와의 억지춘향 같은 로맨스 장면은 보기에 낯간지럽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지나치게 전쟁액션이 많은 점이다. 이런 대규모의 액션은 영화의 드라마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를 저해하면서 작품의 흐름과 초점을 흐리게 만든다. 그러나 촬영과 실화에 바탕을 둔 흥미 있는 내용 또 크로우의 진지한 뜻이 엿보이는 볼만한 작품이다.
갈리폴리 전투에 관한 얘기여서 호주의 피터 위어가 감독하고 새파랗게 젊은 멜 깁슨이 주연한 ‘갈리폴리’(명작으로 보기를 권한다)가 생각날 것이다. 제목은 나뭇가지나 철사를 이용해  광야의 지하수를 찾아내는 사람을 말한다.
호주의 농부 조슈아 코너(크로우)는 1차 대전이 끝난 뒤 4년이 됐는데도 터키의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했던 세 아들이 귀국하지 않자 아들들이 사망한 것으로 체념한다. 그런데 조슈아의 아내 일라이자(재클린 매켄지)가 슬픔을 못 견뎌 자살하면서 조슈아는 보따리를 싸들고 터키로 아들들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간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조슈아는 호텔 유객행위를 하는 꼬마 오르한(딜란 지오지아데스-호주 배우)에 이끌려 오르한의 전쟁미망인인 어머니 아이셰(쿠리렌코)와 아이셰와의 결혼을 기다리는 삼촌 오메르(스티브 바스토니-판에 박은 역이다)가 경영하는 호텔에 묵는다. 조슈아와 아이셰 간에 어떤 감정이 솟아날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일.
그리고 조슈아는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인 갈리폴리 전장에 도착한다. 여기서 그는 터키군 소령 하산(일마즈 에르도간)과 그의 하사관 제말(셈 일마즈)의 도움을 받으며 전사자들의 유해발국 작업을 지휘하는 영국군 장교 휴즈(자이 코트니)의 배려로 차남과 삼남의 유골을 찾아낸다. 조슈아는 유골을 물을 찾는 철사를 사용해 찾아낸다.
마음 좋은 하산이 조슈아의 장남 아서(라이언 코)가 터키군의 포로가 됐다는 정보를 조슈아에게 주면서 조슈아는 하산과 제말과 함께 아서를 찾으러 가다가 터키를 침공한 그리스군의 포로가 된다. 전투와 탈출과 도주의 통속적인 액션이 다른 영화에서 빌려온 것처럼 전체 얘기에 잘 어울리질 않는다.  크로우는 묵직한 것이 보기 좋으나 에르도간을 제외한 쿠리렌코 등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는 간신히 합격점이다. 촬영은 아주 좋다.
R. WB.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애들라인의 나이 (The Age of Adline)


엘리스(왼쪽)가 애들라인을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벼락 맞은 뒤 영원히 20대 미모로...


20대 미녀가 벼락을 맞은 뒤 늙지를 않고 그대로 있다는 씨도 먹히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영화에선 못할 소리가 없기 때문에 이 공상과학과도 같은 로맨스 영화도 보고 즐길 만하다. 특히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주인공 애드라인 역의 블레이크 라이블리(27)의 우아한 아름다움만 봐도 족하다. 배우 라이언 레널즈의 부인은 라이블리는 그녀가 결혼하기 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반해 구애 끝에 몇 달간 데이트를 했으나 헤어졌다.
현재 상영 중인 ‘롱게스트 라이드’의 원작을 쓴 니콜라스 스팍스의 소설을 닮은 로맨틱하고 감상적인 우여곡절도 많은 사랑의 얘기로 영화는 현재의 신년 전날에 시작해 과거로 돌아가면서 내레이션으로 서술된다.
1908년 북가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애들라인(라이블리)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이어 미망인이 된다. 1935년 겨울 밤 애들라인이 몰던 차가 사고가 나고 차 위로 번개가 떨어지면서  애들라인은 영원히 늙지 않는 여자가 된다. 
그래서 영원한 20대가 된 애들라인은 이 같은 저주(?)를 혼자 간직하기 위해 수시로 거처를 옮기면서 자기 신원도 바꾼다. 물론 연애도 안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예쁜 여자에게 그게 어디 그렇게 오래 갈 일인가. 애들라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할머니 나이인 그의 딸 플레밍(엘렌 버스틴·82).
애들라인은 엘리베이터에 건장하고 잘 생긴 자선가 엘리스(홀랜드 태생의 배우 미힐 후이스만)와 단 둘이 탔다가 엘리스의 구애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던 애들라인과 엘리스는 결국 뜨거운 정사를 나눈다. 물론 애들라인은 자기 비밀을 깊이 간직한다.
엘리스가 애들라인을 자기 부모(해리슨 포드와 캐시 베이커)에게 소개하겠다며 자기 집에 데리고 가는데 아이구머니나 가만히 보니 엘리스의 아버지가 애들라인이 자기 비밀 때문에 버린 옛 애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애들라인은 자기 애인의 아버지와 옛 날에 동침한 것이다.   
철저히 환상이자 동화 같은 얘기로 믿거나 말거나 식인데 후이스만은 잘 생기긴 했지만 로맨스 배우론 잘 어울리지가 않는다. 따라서 그와 라이블리와의 화학작용도 썩 좋은 편이 아니다. 포드도 자기 역이 어색하다는 듯이 우물쭈물하고 있다. 환상적 로맨스 영화답게 컬러와 촬영이 몽환적이요 꿀빛이다. 라이블리가 의상을 계속해 갈아입으면서 무슨 패션쇼를 하는 것 같다. 데이트용 영화다. 리 톨랜드 크리거 감독. PG-13. WB.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베이츠 모텔’




마마보이 노만 베이츠가 “마더 마더”하며 식칼로 샤워를 하던 매리온 크레인을 난자해 살해하고 막 돌아온 어머니를 향해 소리를 지르던 노만의 언덕 위의 집은 늦은 하오의 후광을 받으며 음흉하게 서 있었다. 히치콕의 걸작 공포스릴러 ‘사이코’(Psycho·1960)에서 노만이 자기 어머니와 단 둘이 살던 2층짜리 이 집은 언덕 아래 베이츠 모텔을 경영하는 두 사람의 거처로 히치콕이 1959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이 영화를 찍을 때 쓴 세트다.
나는 칠흑 같은 밤에 노만이 실루엣을 그리며 서 있던 모텔과 집을 연결하는 계단에서 노만의 흉내를 내면서 얼른 사진 한 장을 찍었다(사진). 아직 낮인데도 몸에서 한기가 흐른다.
A&E TV가 현재 방영중인 ‘사이코’의 전편격인 시리즈 ‘베이츠 모텔’(Bates Motel)을 위한 리셉션이 며칠 전 모텔 앞 마당에서 열렸다. 먼저 ‘Office’라는 빨간 네온사인이 걸린 모텔 사무실에 들어갔다. 
벽에 걸린 텅 빈 모텔 방들의 열쇄와 테이블에 놓인 숙박부를 보자니 비쩍 마른 키다리 노만(앤소니 퍼킨스)이 거액의 현찰을 훔쳐 도주 중인 부동산회사의 여사원 매리온 크레인(재넷 리)을 테이블 뒤에서 호기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서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매리온이 여장을 푼 사무실 바로 옆의 1호실 침대 위에는 노만의 어머니가 매리온을 살해한 식칼이 놓여 있다. 그런데 매리온이 수십 차례의 칼질에 비명과 함께 욕조에 쓰러지면서 붙잡고 늘어지던 샤워 커튼이 안 보인다. 노만은 어머니가 죽인 매리온을 이 샤워 커튼에 싸 자기 차 포드의 트렁크에 넣은 뒤 모텔 근처의 늪에 빠뜨렸는데 이 범행에 쓴 포드가 모텔 앞에 놓여 있다. 어쩌면 이 차 트렁크에 매리온의 사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어 나는 2층의 자기 침실 창 앞 흔들의자에 앉아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노만의 어머니를 만나 보려고 집 뒷문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흔들거리는 의자에 앉은 노만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다가가보니 어머니는 몸의 모든 살이 제거된 해골이었다. 텅 빈 검은 동공과 흉한 이빨을 드러낸 채 몸을 흔들거리는 모습에 “아악”하고 절로 비명이 나왔다.  ‘베이츠 모텔’은 남편이 사망한 뒤 10대인 아들 노만(프레디 하이모어)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하려고 오리건주의 한 작은 마을에 있는 모텔을 사 이주한 노마(베라 파미가)의 모자간의 이야기로 현재 시즌 3가 방영중이다. 밴쿠버 교외의 알더그로브에서 촬영한 시리즈는 어머니에게 유난히 집착하는 노만이 시리얼 킬러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파미가가 모텔 앞에서 방문객들을 미소로 맞았다. 우아하게 아름다운 파미가(‘업 인 디 에어’)는 연기파로 시리즈에서도 하이모어와 함께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히치콕의 ‘사이코’는 이 영화 이전까지 있던 스릴러의 틀을 완전히 깨어놓은 대담하고 가차 없는 영화로 소위 ‘슬래셔 무비’(난도질해 사람을 살해하는 영화로 존 카펜터 감독의 ‘핼로윈’이 그 대표적 작품)의 효시로 대접 받고 있다. 위스콘신주의 변태살인자 에드 게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로버트 블락의 소설이 영화의 원전이다.
이 영화는 변태적이요 폭력적이며 냉소적이고 또 음탕한데 가장 유명한 장면이 매리온의 ‘샤워 신’이다. 매리온은 모텔 방에서 샤워를 하다가 아들이 이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데 분노한 노만의 어머니가 휘두르는 식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욕조에 쓰러져 비명횡사한다.
이 소름끼치는 장면은 특히 히치콕 영화의 음악을 여러 곡 작곡한 버나드 허만의 기분 나쁘게 신경을 거스르는 음악 때문에 공포 분위기가 더욱 가증된다. 바이얼린과 비올라와 첼로 등 현악기만으로 연주되는 음악은 마치 한 많은 처녀귀신들이 집단으로 내지르는 비명과도 같아 듣노라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히치콕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은 까닭은 매리온이 흘리는 피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매리온이 흘리는 피로는 초컬릿 시럽을 썼고 노만의 어머니가 휘두르는 식칼이 내는 바람소리는 칼로 멜론의 살을 찔러 나오는 소리를 사용했다. 그리고 매리온이 지르는 비명은 세 여자의 비명을 조합해 만들었다.
당시 수퍼스타였던 재넷 리를 영화의 제1막 끝에 가서 죽여 없앤 것도 획기적인 일이며 매리온이 찢은 노트북의 조각을 변기에 넣고 물로 씻어내는 장면 또한 할리웃 영화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히치콕은 영화를 완벽하게 즐기도록 하기 위해 영화 중간에 관객이 극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는데 나도 고등학생 때 지금은 없어진 중앙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상영시간 훨씬 전에 극장 앞에서 기다렸다가 입장했다. 그 때 영화를 보면서 경악하고 감탄하던 내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사이코’는 그 뒤 3편의 속편이 나왔고 브라이언 디 팔마 등 여러 명의 감독들이 영화의 장면을 흉내 내면서 히치콕을 치하했는데 박찬욱의 ‘스토커’(Stoker)도 그 중 하나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