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6월 20일 월요일

'마블 코믹스 창시자' 스탠 리




벽을 기어가는 파리 보고 ‘스파이더-맨’영감 받아



영화로 만들어져 전 세계에서 빅히트를 하고 있는 마블 코믹스의 주인공들인 X-멘과 스파이더-맨 그리고 아이언 맨과 인크레더블 헐크 등을 창조한 스탠 리(93)와의 인터뷰가 지난달 25일 할리웃에 있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에서 있었다. 점퍼차림에 선글라스를 쓴 리는 90대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정하고 활기에 넘쳤는데 귀가 잘 안 들려 질문을 옆에서 반복해줄 통역사를 대동하고 있었지만 대답하는 음성은 크고 내용도 정확했다. 리는 유머가 굉장히 많은 사람으로 시종일관 농담과 위트를 구사해가면서 대답했는데 연기하듯 손으로 큰 제스처를 써가면서 신나게 인터뷰를 즐겼다. 인터뷰 후 필자와 기념사진을 찍을 때 필자가 자신을“한국사람”이라고 소개하자 리는“남한이지”라며 웃었다.  

-당신은 당신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 캐미오(잠깐 얼굴을 비추는 것)로 나오기를 즐기는데 그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우연한 일이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첫 ‘X-멘’ 영화를 찍을 때 나더러 해변의 핫독 장사 노릇을 시켰다. 그 후 ‘스파이더-맨’을 찍을 때 감독이 나보고 ‘당신 X-멘’에서의 캐미오가 좋던데 내 영화에서도 해보라고 제안해 나왔고 그 다음부턴 캐미오가 습관이 돼버렸다.”

-그러면 배우노조 카드도 있겠네.
“캐미오 때문에 받은 것은 아니고 오래 전에 프랑스 감독 알랭 르네의 영화에 나온 탓에 카드를 받게 됐다.”

-당신은 언제 당신의 수퍼히로들을 만들기로 결정했는가.
“난 책을 읽기를 좋아해 책 속의 모든 주인공들이 내겐 수퍼히로들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셜록 홈즈다. 내가 수퍼히로들을 만들게 된 이유는 수퍼맨 때문이다. DC 코믹스에서 수퍼맨을 창조, 히트하자 내 출판사 사장이 나더러 ‘당신도 수퍼히로를 만들어보라’고 제의해 X-멘, 스파이더-맨 및 헐크 등을 만들게 된 것이다.”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가.
“스파이더-맨이 나오게 된 동기는 이렇다. 어느 날 벽을 기어가는 파리를 보던 중 파리처럼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수퍼히로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름을 생각했는데 ‘인섹 맨’ ‘플라이 맨’ ‘모스키토 맨’ 등 잡다한 이름을 생각하다가 스파이더-맨이 좋겠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의 다른 수퍼히로들과는 달리 하기 위해 주인공을 개인적 문제가 많은 틴에이저로 만들기로 했다. 이 아이디어를 출판사 사장에게 말했더니 사장이 ‘내가 들은 아이디어 중 가장 나쁜 것’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출판사의 만화 중 폐간하는 ‘어메이징 팬터지’ 마지막 호에 스파이더-맨을 그려 슬쩍 집어넣었는데 이것이 빅히트를 하게 된 것이다.”               
스탠 리가 그린 만화‘X-멘’.

-DC 코믹스의 만화가요 공동사장인 한국계인 짐 리를 잘 아는가.
“몇 번 만난 적은 있으나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훌륭한 화가요 얘기꾼이라는 것을 잘 안다. 우리만은 못하지만.”

-당신을 ‘만화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화 잘 그리고 쓰는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겸연쩍은 소리다. 난 때를 잘 만나는 운이 좋았다. 내가 만화를 시작했을 때 다른 만화가들은 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만화를 그려 별로 글들이 안 좋았다. 그러나 나는 어른들을 위한 만화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남을 위해 얘기를 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읽고 싶은 얘기들을 쓰기로 했다. 좌우간 나는 나를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도 당신의 팬이라고 들었는데.
“내 사무실이 뉴욕에 있을 때 그가 나를 만나러 왔다. 검은 레인코트를 어깨에 걸친 멋쟁이였다. 그는 영화인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모두 훌륭한 사람이다.”

-DC 코믹스와는 늘 라이벌 관계였는가.
“우리가 그들보다 월등한데 라이벌이 될 수 있겠는가. 이 건 농담이다. 우린 서로 잘 알고 친구처럼 지냈다.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하겠다. 우리 이름은 처음에는 애틀라스 코믹스였다. 우리의 만화가 잘 팔리면서 회사명을 고치기로 하고 생각해낸 것이 마블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따라 당초 이름이 내셔널이었던 저들도 DC 코믹스로 개명하더라.”

-할리웃이 당신 만화를 영화로 만들 것이라고 짐작했었는가.
“전연 생각을 못했다. 우린 그저 만화가 잘 팔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야 먹고 사니까. 이렇게 블락버스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어느 영화가 가장 잘 당신의 만화를 잘 나타냈다고 보는가.
“전부 다 훌륭하다. 그 중에서도 ‘아이언 맨’이 가장 내 뜻을 잘 나타냈다고 본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선택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스파이더-맨’과 ‘X-멘’도 아주 좋다. 그러나 내가 만든 인물들이 590명에 가까워 다 기억을 못하겠다.”

-수퍼히로의 인기는 얼마나 계속될 것으로 보는가.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린 어렸을 때 다 동화를 보면서 자랐다. 나이를 먹으면서 동화를 더 이상 읽지는 않지만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에 대해 결코 싫증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수퍼히로들의 얘기를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본다.”

-어린 팬들이 당신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산타클로스로 생각한다. 식당에서도 아이들은 자기들 엄마와 함께 나를 찾아와 함께 사진 찍자고 부탁하는데 참 좋은 일이다.”

-TV에 나오는 당신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시리즈를 보는가.
“난 귀가 잘 안 들리고 눈도 침침해 TV를 안 보나 그에 대한 얘기는 읽고 있다. 그리고 난 몇 작품에 캐미오로 나왔다. 그래서 내가 나오는 시리즈가 인기가 좋다.”          

-당신의 작품은 현 시세를 어느 정도로 반영하고 있는가.
“난 세상일에 뒤 떨어지지 않으려고 라디오를 경청한다. 그리고 내 작품에 가급적 시의를 충실히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현실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당신 만화에는 과학적 용어도 많고 또 공상과학적인 면도 많은데 과학 지식이 깊은가.
“과학적으로 들리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감마 레이나 코즈믹 레이 같은 용어를 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만화의 수퍼히로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의 대성공은 영화계를 변화시켰을 정도다. 그래서 사실에 입각한 내밀한 드라마들을 만들기가 힘들어졌다는 소리도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퍼히로들의 장소는 늘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얘기에 결코 물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보통 얘기도 설 자리가 있다고 본다. 내 작품 중 여러 편의 인기 있는 것들도 다 사실적인 얘기들이다. 지금은 수퍼히로들의 영화가 너무 많은 것 같지만 때가 되면 다른 드라마와 균형을 맞추게 되리라고 본다.”

-사람들이 수퍼히로에 지칠 것으로 보는가.
“모든 것이 다 지나치면 지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마블사는 영리해 팬들이 보고 싶어 하는 얘기를 만들려고 진력하고 있다. 궁극적인 판단은 대중에 달려 있다. 그들이 이제 됐다고 느끼게 되면 영화도 장사가 잘 안 될 것이다.”

-당신의 작품에 있는 유머는 어디서 오는가.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코미디를 좋아한다. 난 수퍼히로 얘기 쓰는 만큼이나 우스운 얘기 쓰는 것을 좋아한다. 난 코미디언 친구들이 많다.”

-당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좋았던 때와 나빴던 때는 언제인가.
“가장 좋았던 때는 내 회사 사장이 나쁜 아이디어라고 한 ‘스파이더-맨’이 잘 팔린 일이고 가장 나빴던 때는 내가 오래 전에 우리 영웅들을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거절당했을 경우다. 그 멍청이 책임자가 한다는 소리가 사람들이 영화를 안 좋아하면 만화도 안 팔린다는 것이다.”

-당신의 부인 조운 클레이턴(1947년에 결혼해 두 딸을 두었다)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타이프라이터에 매달려 글을 쓰는데도 아내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내는 자기 할 일을 잘 만드는데 특히 집 안 자익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난 아내가 만화를 한 번도 읽지를 않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개밥을 살 돈과 집안 장식을 할 수 있는 돈을 버는 한 개의치 않는다. 참 멋있는 여자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도리를 찾아서(Finding Dory)


도리(앞)가 네모(가운데), 네모 아버지와 함께 자기 가족을 찾아가고 있다.


건망증 심해 길 잃은 도리… 가족 찾아 떠나


무슨 물고기가 그렇게 말이 많은가. 새파란 색깔의 물고기 도리가 영화 내내 어떻게나 말이 많고 재잘대는지 짜증이 나고 피곤해진다. 잡아서 사시미를 해먹어 조용하게 만들어 버릴까보다. 
2003년에 나온 픽사의 ‘네모를 찾아서’의 속편 격인데 내용이나 그림이나 서술형태 그리고 플롯의 아기자기한 묘미가 전편에 훨씬 못 미친다. 
우선 주인공 도리의 묘사가 1차원적이고 이야기도 부족하다. 그리고 상상력이나 창의성도 충분치 못하다. 그런대로 우습고 재미는 있어 어린아이들이 보기엔 좋겠지만 얘기가 하다만 것처럼 중간에 막혀 답답하다. 음성연기는 좋다.
캘리포니아 인근에서 부모(다이앤 키튼과 유진 오닐 음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사는 도리(엘렌 디제네러스)는 방금 전의 것을 까먹어버리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시달린다. 도리가 어느 날 자기 영역 밖으로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리면서 망망대해에 표류하게 된다. 기억력이 짧으니 쉽게 집을 찾게 되겠는가.
도리가 도착한 곳은 호주 근해. 여기서부터 도리는 오렌지색의 네모(헤이든 롤렌스)와 그의 아버지(알버트 브룩스)와 함께 태평양을 헤엄쳐 부모를 찾아 나선다. 도리의 ‘엄마 찾아 3만리’다. 도리 일행은 대양을 가로지르면서 모험과 각종 수중생물들을 만나지만 특별히 새로울 것도 또 흥미 있는 일도 생기질 않는다.
도리 일행이 도착한 곳이 캘리포니아 모로베이에 있는 거대한 수족관인 해양생물 인스티튜트. 이 곳은 시고니 위버(물론 목소리만 나오는데 재미있다)가 관리하는데 위기에 처한 해양생물들을 구해 돌본 뒤 다시 바다로 방출한다. 
그러나 영화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대양모험 영화가 제한된 공간 안에 갇히면서 진행이 막히고 플롯이나 서술도 협소하게 된다. 답답하다.
여하튼 도라는 여기서 근시의 상어와 방향감각이 어두운 고래 그리고 야단스런 광대 같은 물개 등을 만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이 모양과 색깔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낙지 행크(에드 오닐의 음성연기가 일품). 
행크는 생존력이 강하고 재주가 많고 또 신랄한 농담을 내뱉는 ‘잭 오브 올 트레이즈’ 같은 낙지인데 문제는 바다에 나가 사는 것보다 클리블랜드의 수족관에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점. 수족관으로 이사 가려면 꼬리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행크는 도리가 가진 꼬리표를 받는 조건으로 도리의 부모 찾기를 도와주기로 한다. 여기서 야단스런 액션이 일어난다. 그런데 도리의 부모도 이 수족관 안에 있지 않은가. 더 이상 모험하기 싫어 얘기를 중도에 포기하는 식이다. 
영화에서 정말로 재미있고 그림 좋고 보기 좋은 것은 본 영화 전에 상영되는 6분짜리 ‘파이퍼’(Piper). 어미 도요새가 새끼 도요새에게 생존술을 가르쳐주는 얘기다. 앤드루 스탠턴 감독.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막스 형제의 영화(Marx Brothers Movies)


‘거울 장면’

아무 생각없이 즐기는 요절폭통 코미디


1905년부터 1949년까지 순회 쇼단과 브로드웨이 그리고 스크린을 종횡무진으로 주름잡았던 막스 5형제의 영화들이 17~19일(하오 7시30분) 매일 2편씩 샌타모니카의 에어로극장(1328 몬태나 애비뉴)에서 상영된다. 치코, 하포, 그라우초, 검모 및 제포 등 예명으로 잘 알려진 형제들 중 치코, 하포 그리고 그라우초 등 3명이 코미디의 핵심으로 이들은 허튼소리와 허튼짓에 노래까지 부르면서 요절복통할 코미디를 양산했었다. 이들의 영화는 내용의 이치를 따지지 말고 봐야 한다. 거기에 이들의 매력이 있다.  

■‘덕 수프’(Duck Soup·1933)-파산한 소국 프리도니아의 부잣집 부인이 국가 재건을 위해 돈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루퍼스 T. 화이어플라이(그라우초)를 수상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한다. 수상에 취임한 화이어플라이가 아무 이유 없이 이웃 국가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불난리가 일어난다. ‘거울 장면’(사진)이 유명하다. 
■‘코코넛’(The Coconuts·1929)-막스 형제의 첫 영화. 플로리다의 속도 빠르게 망해가는 호텔 코코넛의 주인 해머(그라우초)가 호텔을 살리기 위해 날사기꾼들인 형제와 음모를 꾸민다. 
■‘애니멀 크래커스’(Animal Crackers·1930)-유명한 아프리카 탐험가 캡튼 스펄딩(그라우초)을 위한 파티가 열리는 동안 귀중한 그림이 도난당하면서 스펄딩이 수사에 나선다.         
■‘몽키 비즈니스’(Monkey Business·1931)-미국으로 향하는 여객선에 막스 4형제가 무임 승선해 본인들의 뜻과 상관없이 승객들을 위한 서비스를 맡게 되면서 온갖 해프닝이 일어나게 된다. 
■‘호스 페더즈’(Horse Feathers·1932)-헉슬리대학의 총장(그라우초)이 라이벌인 다윈대학과 겨루기 위해 풋볼팀을 조직한다.         
■‘경마장의 하루’(A Day at the Races·1937)-돈 많은 부인이 주요 환자인 요양소에서 일어나는 뒤죽박죽 코미디. 배꼽 빠지게 우스운 장면이 많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연인들과 폭군’




오는 9월에 개봉되는 ‘연인들과 폭군’(The Lovers and the Despot)의 연인들은 영화감독 신상옥과 그의 아내이자 배우인 최은희(89)요, 폭군은 북한의 영화광 김정일이다. 영국의 로버트 캐난과 로스 아담이 공동으로 감독한 최은희와 신상옥의 김정일의 지시에 따른 북한에로의 피랍사건을 다룬 기록영화다.
두 부부의 개인적 면모와 김정일의 영화에 대한 집념을 비롯해 북한의 실상을 흥미 있고 또 유익하게 다룬 영화로 서스펜스 스릴러이자 멜로드라마 같다. 흥미 있는 것은 최은희와 신상옥이 몰래 녹음한 김정일과의 전화통화 내용. 김정일의 육성으로 그의 영화에 대한 애착을 들을 수 있다.
신상옥은 1950년대 영화 활동을 시작해 1960년대 신필름을 통해 300여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절정기를 이뤘는데 그의 많은 작품에 최은희를 사용했다. 그 대표적 영화가 최은희와 김진규가 나온 빅히트작 ‘성춘향’(1961). 그러나 신상옥은 신필름이 1978년대에 이르러 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최은희와의 이혼 및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최은희는 자신과 신감독과의 만남과 남편의 부정으로 인한 이혼 그리고 북한에서의 재회와 관계의 재연결 및 작품활동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최은희가 홍콩으로부터 영화 제작자를 자처하는 여자에게서 영화를 함께 만들자는 전화를 받은 것은 1978년 7월. 홍콩에 간 최은희는 7월11일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는데 최은희는 증언에서 회물선을 타고 북한으로 가는 8일간 몇 명의 터프가이들이 자신을 감시했다고 말한다. 영화 제작자를 자처한 여자는 북한의 스파이였다.
북한에 도착한 최은희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이 김정일. 김정일은 최은희와 악수를 하면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반색을 한다. 그 뒤로 최은희는 집이 제공되고 좋은 대접을 받으나 방기된 상태로 남는데 최은희는 증언에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집 마당에 각종 채소를 가꿨다고 말한다.
김정일이 최은희를 납치한 것은 그가 남한의 영화를 북한의 그것보다 월등하다고 느끼면서 동경을 했기 때문인데 그가 북한 영화인들에게 “왜 우리는 남조선처럼 영화를 못 만드냐”고 질책하는 것을 녹음테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최은희가 실종된지 2개월 후 신상옥이 홍콩으로 최은희를 찾으러 갔다가 역시 실종된다. 당시 신상옥이 실종되자 그가 한국의 중정요원에 의해 살해됐다는 설과 함께 북한에로의 자진 입국설 그리고 납북설 등 각종 추측이 난무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신상옥이 나타난 것은 납북된지 5년 후 그가 만든 북한 영화가 알려지면서이다. 이 5년간 신상옥은 북한의 감옥에 투옥돼 있었는데 과감히 탈출해 기차를 타고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혀 독방에 갇혀 세뇌를 받게 된다. 여기서 신상옥은 살아남기 위해 김정일에게 충성서약의 글을 쓰는데 그로 인해 신상옥은 감옥에서 풀려나 최은희와 재회, 영화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둘은 김정일의 총감독 하에 특혜를 받으면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1986년 유럽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핑계로 비엔나에 갔다가 주비엔나 미대사관을 통해 탈출하기까지 2년여동안 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사진) 김정일은 신상옥과 최은희에게 ‘주의’ 대신 감정적인 영화를 만들어 북한 영화를 세계적 수준에 올려놓자고 격려했다. 그래서 ‘춘향’을 비롯한 러브스토리도 만들었고 대규모 제작비가 든 ‘불가사리’도 나왔다. 둘이 만든 ‘소금’으로 최은희는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북한 탈출 이후 신 감독부부는 미국에서 살면서 신상옥은 아이들 영화 ‘닌자’를 만들었는데 이어 한국으로 돌아가 지난 2006년 80세로 별세했다. 미국에 있을 때 신상옥의 생애 마지막 꿈은 대하극 ‘징기스칸’을 만드는 것이었으나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나는 신상옥 납치 때 한국의 한국일보에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는데 그 때 그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며칠간을 그의 집에서 죽치고 앉아 야근을 했었다. 그 후 내가 신상옥의 전화를 받은 것이 1986년 LA의 한국일보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 나는 서울의 한국일보 자매지 일간 스포츠에 매주 1회씩 2면에 걸쳐 할리웃에 관한 얘기를 연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반말로 “나 신상옥인데 일간 스포츠 지면을 나를 위해 남겨 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그의 음성이 반갑기는 했지만 “거 참 거만하기도 하구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후 코리아타운의 한 식당에서 신 감독부부를 목격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신상옥과 최은희라면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오래 전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였다. 안내원의 안내로 조선예술영화 촬영소를 둘러보면서 내가 안내원에게 “신상옥과 최은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안내원은 “우리가 그렇게 잘 대접해 주었는데 배신했다”면서 “죽일 것들”이라고 악담을 했었다. 가슴이 섬뜩했었다.    
*지난주 칼럼 내용 중 바그너는 베니스에서 숨졌기에 고칩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