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4년 11월 4일 화요일

나이트크럴러(Nightcrawler)

루(제이크 길렌할)가 사전현장에 도착, 현장을 엿보고 있다.

도덕성? 양심? 웃기지들 마, 대중은 피를 원해!


태블로이드 저널리즘 특히 시청률에 매어달려 센세이셔널한 사건에만 집착하는 TV 저널리즘과 이런 뉴스를 즐기는 시청자들을 싸잡아 비판하고 조롱한 어둡고 폭력적이며 고약하도록 우스운 스릴러다.
 TV방송국의 이면을 파헤친 영화‘네트웍’의 시궁창 냄새가 나는 새카만 풍자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화로 생존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지 마다하지 않는 비도덕적인 한 야행성 들쥐 같은 인간을 통해 빗나간 아메리칸 드림을 조소하고도 있다.
영화가 다소 과장되고 야단스럽긴 하지만 흡혈귀 노스페라투 같은 모습으로 필사적인 연기를 하는 주인공 제이크 길렌할과 조연진의 좋은 연기 그리고 LA(여러 장면을 코리아타운에서 찍었다)의 밤을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찍은 촬영과 함께 흥미진진한 내용 등 대중에게 어필할 흥분되는 영화다.
루 블룸(길렌할)은 LA의 밤을 헤매는 도둑이자 날치기요 사기꾼으로 시궁창 쥐와도 같은 영혼에서 도덕성이 빠져나간 자다. 살기 위해선 어떤 짓이라도 하는 루는 어느 날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프리랜서 비디오 카메라맨들이 현장을 찍어 TV 방송국에 팔아먹는다는 것을 배운다.
루는 이어 베니스비치에서 비싼 자전거를 훔쳐 전당포에 가 자전거를 비디오카메라와 경찰 호출 스캐너와 바꾼 뒤 야간 사고현장에 들이닥친다. 앰뷸런스 뒤를 쫓는 프리랜서다.
루가 처음 찍은 것은 카재킹 피해자 모습. 그는 이것을 시청률 꼴찌인 TV 방송국의 심야 뉴스제작자로 시청률 상승에 혈안이 된 니나(르네 루소가 오래간 만에 영화에 나와 섹시하면서도 절박한 연기를 잘 한다)에게 팔아먹는다.
‘대중은 피를 원한다’는 것이 자신의 좌우명인 니나는 루에게 더 화끈한 필름을 가져오라고 요구하면서 루는 밤새 LA의 사건과 사고현장을 쫓아다니면서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리고 루는 장래를 보장한다는 온갖 감언이설과 요설을 늘어놓으면서 싼 값으로 릭(리즈 아메드도 잘 한다)을 조수로 고용한다.
둘은 밤의 LA를 헤매고 다니면서 피투성이의 교통사고나 총격사건 따위를 카메라에 담는데 루는 사고를 보다 드러매틱하게 찍기 위해 시체를 조명 밝은 곳으로 옮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경찰보다 먼저 삼중 살인사건 현장에 도착, 참혹한 현장을 찍어 니나에게 판다. 이 때문에 루와 니나는 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내면이 심각하게 썩어 문드러진 루는 보다 충격적인 필름을 요구하는 니나에게 자기와 데이트를 안 하면 필름을 다른데 팔겠다고 공갈을 한다. 돈 독이 오르고 아울러 끔찍한 사고와 사건을 찍으면서 흥분감을 즐기게 된 루는 충격적인 물품을 내놓기 위해 현장 훼손을 밥 먹듯이 하는데 급기야는 준 살인행위마저 저지른다.
길렌할은 영화를 위해 체중을 많이 줄였는데 피골이 상접한 얼굴에 뚫린 두 눈이 마치 해골을 보는 것 같다. 필사적인 연기인데 대단한 배우라고 감탄하게 된다. 좀 도가 넘었지만 그런대로 사실감마저 있는 사납고 재미있는 영화다. 댄 길로이 감독(각본 겸). R. Open Road.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뿔(Horns)


이마에 뿔 난 이그는 자기 애인 살해자를 찾는다.

갑자기 뿔이 나면서 독심술 능력 생기는데… 


초현실적인 공포 우화이자 로맨스 이야기요 또 블랙 코미디로 성경을 빗댄 내용이 담긴 괴이한 영화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과 지옥 같은 어둡고 두려운 장면을 뒤섞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데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해리 포터’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주연하는데 그는 ‘킬 유어 달링스’와 ‘왓 이프’ 그리고 이 영화로 세 번째 해리 포터의 이미지를 벗어버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걱정되는 것은 그의 ‘해리 포터’ 후의 영화들이 흥행이 부진한 점. 이 영화도 크게 흥행이 잘 될 것 같지 않다.
미 북태평양 연안의 작은 동네에 사는 이그 페리쉬(래드클리프)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사랑해 온 애인 메린(주노 템플)이 살해되면서 애인 살해자로 몰려 동네에서 왕따를 당한다. 영화는 이그와 메린이 마치 애담과 이브처럼 따뜻한 태양빛 아래 초원에 누워 사랑에 잠긴 플래시백 장면으로 시작된다.
경찰도 이그가 범인이라고 단정하나 증거가 없어 체포하지 못한다. 그의 부모는 아들을 감싸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유일하게 이그의 편을 드는 사람이 그의 어릴 때부터 친구로 공익 변호사인 리(맥스 밍겔라).
어느 날 이그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이마 양쪽에 작은 뿔이 난 것을 발견한다. 병원에서도 뿔난 이유를 모르는 것은 물론이요 제거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뿔은 자꾸 자라 이그는 동안의 마귀 모습이 된다.
뿔을 제거하려고 애를 쓰던 이그는 뿔이 다른 사람들의 어두운 비밀과 충동을 간파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것을 깨닫는다. 이그는 남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그래서 이그는 이 신통력을 이용해 메린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선다.       
괴상하지만 악의 없는 동화 같은 얘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두워지면서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공포영화로 발전한다. 특히 이그가 수많은 뱀들을 풀어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보복을 하는 장면은 겁난다. 래드클리프가 이 장면을 즐기면서 해낸다. 
마침내 이그는 메린을 죽인 자를 찾아내는데 여기서 특수효과가 이용되고 이어 다시 영화의 평화로운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대단한 영화는 아니지만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얄궂은 작품이다. 알렉산더 아자 감독. R. Dimension.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바그너의 유대인들’



옛날에 한국의 한 여류작가는 바그너의 음악을 ‘도도히 흐르는 강’에 비유했지만 난 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때면 늘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압도적이요 장엄하고 신비하고 아름다우며 또 깊고 두렵다. 그의 음악을 듣노라면 마치 막중한 문제를 풀듯이 신열마저 나는데 이런 고난 끝에 깨닫게 되는 선험적이요 지고한 아름다움과 거의 여성적인 음의 몸매를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의 큰 희열이다.
바그너의 음악을 얘기할 때면 항상 논란되는 것이 그의 반유대주의다. 바그너의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에 관한 글은 히틀러와 나치즘에 의해 수용돼 유대인 박해의 교본처럼 이용됐다.
바그너가 “유대인들은 음악을 창작할 능력이 없으며 그들은 모방자이자 기생충이고 또 안 보이는 독”이라면서 “유대인들을 독일의 삶에서 제거해야 된다”고 유대인들을 증오한 이유는 바그너가 오랫동안 자신을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로엔그린은 “내 이름과 나의 민족에 관해 묻지를 말라”고 노래 부르고 있다. 바그너의 심정을 나타낸 노래다.
그러나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반면 그에 가까운 많은 음악인들이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많은 유대인 음악인들이 바그너에 헌신하며 그의 작품활동을 도왔고 바그너 역시 젊고 재능 있는 음악인들을 받아들이고 키웠다.
이런 사실은 최근 나온 1시간짜리 DVD ‘바그너의 유대인들’(Wagner’s Jewsㆍ사진)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바이얼리니스트인 힐란 와쇼가 감독한 이 기록영화는 바그너와 유대인들과의 복잡한 개인적 관계와 이스라엘에서의 바그너 음악에 관한 작품이다.
과연 숭고한 음악은 편견과 편협 그리고 역사의 무게를 초월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데 바그너를 반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를 옹호하는 이스라엘 및 비유대인 음악인들의 의견을 공평히 다룬 사려 깊고 흥미 있는 영화다.        
영화는 처음에 텔아비브에 사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내가 살아 있는 한 바그너가 결코 이스라엘에서 연주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예루살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영구 객원지휘자인 레온 보트슈타인은 바그너의 음악은 이스라엘에서 연주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나는 바그너를 결코 인간으로서는 존경하지 않지만 그의 음악을 떠나 있을 수는 없다”고 말한 주빈 메이타와 다른 이스라엘 지휘자와 작곡가들도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강조하면서도 그의 음악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구원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현지 촬영한 영화는 바그너와 그의 첫째 부인 미나(역시 유대인을 증오했다)와 둘째 부인 코지마 및 리스트 등의 편지와 함께 문헌과 인터뷰와 과거 사실의 재현 그리고 바그너의 음악연주 등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런데 리스트와 쇼팽도 모두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이스라엘에도 바그너 음악 애호가 단체인 바그너 소사이어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그너는 실패한 독일혁명 후 도주해 살고 있던 스위스에 있을 때 유대인인 폴란드 태생의 젊고 유능한 피아니스트로 후에 자신의 많은 오페라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칼 타우직과 부자지간과도 같은 우정의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 역시 유대인이자 피아니스트인 요젭 루빈슈타인은 자기 집에 묵게 하면서 돌봤는데 둘은 모두 바그너에게 헌신했고 루빈슈타인은 바그너가 1883년 베니스에서 사망하자 그 다음 해 총으로 자살했다. 루빈슈타인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피아노곡으로 만들어 연주한 사람이다.
특히 진기한 내용은 바그너와 유대인으로 뮤닉 로열오페라의 지휘자였던 헤르만 레비와의 관계. 바그너는 레비에게 자신의 오페라 ‘파르지팔’의 초연 지휘를 맡기기로 한 다음 그가 세례를 받고 개종하도록 온갖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기독교 얘기인 이 오페라를 유대인에게 맡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레비는 후에 바그너의 성지가 된 바이로이트의 페스트슈필하우스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를 지휘했는데 바그너는 이 공연 후 1년이 채 못돼 사망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본 뒤 바그너를 사랑하는 내 친구 C에게 예술가의 인성과 그의 작품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친구의 대답이다.
“창작자와 그의 작품은 별개의 것이다. 동양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전통이 보다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나도 이에 동의한다. 예술가와 그의 작품의 분리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쁜 정치가라도 그의 업적이 그의 좋지 못한 성품을 초월할 경우 그를 받아들이듯이 예술가의 경우에도 바그너처럼 성품에 단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의 작품이 우리의 기대를 넘어설 경우 그 같은 단점마저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좋아했고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라는 사실이 사람들이 바그너의 오페라를 즐겨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