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2월 9일 수요일

청춘(Youth)


프레드(안경)와 믹이 알몸으로 입욕하는 미스 유니버스를 망연자실하니 관람하고 있다.

80대 두 예술가, 삶에 대한 심오한 성찰

진지하면서도 위트 넘쳐... 조수미 피날레 송 인상적

과도하게 예술적인 것은 사실이나 두 나이 먹은 예술가의 삶에 대한 성찰이자 회고인 이 영화는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비롯한 모든 감관과 함께 영혼마저 아름다움과 심오함에 듬뿍 적셔주는 예술의 향연과도 같은 작품이다.
2013년에 ‘그레이트 뷰티’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탈리아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각본 겸)의 영어대사 영화로 ‘그레이트 뷰티’와 유사한 느낌과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펠리니의 장난기 짙은 초현실적이요 엉뚱한 이미지와 진지하나 부담이 되지 않는 철학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펠리니는 소렌티노의 우상이다).
내용이 80노인들의 인간으로서 또 예술가로서의 삶과 작품의 마감에 대한 것인데도 무겁지가 않고 오히려 경쾌하고 사뿐하다. 지적이요 변덕스럽고 또 생명력과 위트와 유머가 가득한 영화로 이야말로 성숙한 어른들을 위한 작품으로 마치 박쿠스의 잔치에 참석해 춤과 노래와 포도주에 잔뜩 취한 기분이다. 
은퇴한 영국의 베테런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80세인 프레드 밸린저(마이클 케인)과 그의 친구인 미국인 영화감독 믹 보일(하비 카이틀)은 스위스 알프스의 온천장에서 목욕하고 마사지 받으면서 시간을 함께 보낸다. 둘이 농담하고 음담패설하고 또 노인증세인 불편한 소변 보기와 기억력 약화 등에 관해 얘기하면서 노는 모양이 꼭 아이들 같다. 둘은 물론 생에 대한 심각한 대화도 나눈다.  
프레드는 완전히 음악에서 손을 뗐는데 이 곳까지 영국 여왕의 특사가 찾아와 작위를 줄 테니 그의 가장 유명한 곡인 ‘심플 송즈’(Simple Songs)를 지휘해 달라고 부탁한다. 여왕이 듣고 싶어 한다는데도 프레드는 이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한편 믹은 프레드와는 달리 여러 명의 각본가들을 데리고 와 마지막 걸작에 대한 구상을 한다. 
프레드는 비록 은퇴는 했지만 음악을 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가 시골길을 걷다가 젖소들의 울음소리와 목에 단 방울소리에 맞춰 지휘를 하는 모습에서 잘 알 수가 있다. 두 사람 외에 갖가지 군상들이 온천에 머무는데 그 중에 비중이 큰 사람이 젊은 미국인 배우로 독일의 초기 낭만파 작가 노발리스를 읽고 있는 지미 트리(폴 데이노)와 아버지의 등한시로 가슴에 상처를 입은 신경이 예민한 프레드의 아름다운 딸 레나(레이철 바이스).
이 밖에도 식당에서의 저녁식사 때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잘 차려 입은 부부(대화 부재에는 이유가 있는데 어느 날 식사 중 아내가 남편의 뺨을 느닷없이 후려갈기는 장면이 폭소를 자아낸다). 이와 함께 대낮 숲속에서의 두 남녀의 야단스런 섹스 등 엉뚱한 이미지 희롱이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영화에 가뿐한 채색을 한다.
영화에서 프레드와 믹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빼앗아 가는 장면이 프레드와 믹이 몸을 담고 있는 스파에 완전 알몸으로 들어온 미스 유니버스(루마니아 배우이자 모델인 마달리나 디아나 게데아의 풍만하고 굴곡이 유려한 육체가 비너스는 저리 가라다)의 입욕 장면. 여기에 믹의 뮤즈이자 그의 단골배우인 제인 폰다(상 감이다)가 짙은 화장을 하고 나타나 상소리를 마구 내뱉으면서 영화에 변태적 활기를 부여한다.
마침내 프레드는 여왕 앞에서 ‘심플 송’을 지휘하기로 결정하고 노래를 부를 가수로 조수미를 선정한다. 프레드의 지휘로 조수미가 아름답고 슬픈 ‘심플 송’(미국 작곡가 데이빗 랭 작곡)을 깊고 곱고 뜨겁게 부르면서 끝난다. 두 베테런 배우 케인과 카이틀의 조용하고 확신에 가득하면서도 경쾌한 연기가 눈부시고 눈 덮인 알프스 마을의 정경을 포착한 촬영이 곱다. 
R. Fox Searchlight. 일부 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히치콕/트뤼포(Hitchcock/Truffaut)


프랑솨 트뤼포(왼쪽)가 알프레드 히치콕을 인터뷰하고 있다.

트뤼포, 히치콕과 8일간에 걸친 인터뷰


1962년 유니버설 스튜디오 내 한 사무실에서 프랑스의 젊은 감독 프링솨 트뤼포(당시 30세)가 ‘서스펜스의 장인’ 알프레드 히치콕(당시 63세)을 상대로 8일간에 걸쳐 가진 인터뷰에 관한 기록영화. 두 사람의 인터뷰 사진(필름촬영은 안 했다), 히치콕 영화의 장면들, 그의 영화 제작 배경사진 및 홈무비 그리고 마틴 스코르세지, 폴 슈레이더, 피터 보그다노비치, 데이빗 핀처 등 현존하는 저명 감독들의 히치콕에 대한 해석 등을 모아 만들었다.
영화 비평가로 시작해 자전적 영화 ‘400 블로우즈’(400 Blows·1959)로 감독으로 데뷔,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프랑스 누벨 바그의 기수 중 하나인 트뤼포는 이 인터뷰 내용을 ‘히치콕/트뤼포’라는 제목의 책으로 냈는데 이 책은 영화학도와 영화인은 물론이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녹음상태가 좋아 히치콕과 트뤼포의 대담을 자세히 들을 수 있는데(영어통역 대동) 특히 히치콕의 진지하다가도 때때로 내뱉는 듯한 짓궂은 농담이 매우 우습다. 영화는 배우 밥 밸라반의 해설로 진행된다.      
히치콕의 무성영화로 시작된 영국에서의 초기 활동에 이어 그가 할리웃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와 1940년대와 50년대에 걸쳐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됐는데 이와 함께 트뤼포의 프랑스에서의 비평가와 감독으로서의 활동이 얘기된다.
트뤼포의 요청으로 이뤄진 이 인터뷰는 특히 상기한 감독들 외에도 일본의 키요시 쿠로사와와 미국의 제임스 그레이 및 리처드 링크레이터 등 여러 감독의 히치콕에 대한 통찰력 있고 주도면밀하며 또 애정이 어린 해석이 들 을 만하다.    
영화의 말미 3분의 1은 스코르세지의 히치콕 작품 ‘사이코’와 ‘버티고’에 대한 외과의사의 수술과도 같은 빈틈없는 분석으로 진행된다. 
특히 ‘버티고’의 여주인공 킴 노박의 변용에 대한 그의 해석이 치밀한데 그는 고지공포증자인 전직 형사 제임스 스튜어트의 킴 노박에 대한 집념을 사체에 대한 애정으로 해석한다.
트뤼포는 히치콕을 가벼운 오락영화 감독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진지한 예술가로 승화시킨 사람으로 둘은 이 인터뷰 후 히치콕이 죽을 때까지 서신을 교환하며 깊은 우정을 지켰다. 히치콕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훌륭한 기록영화다. 켄트 존스 감독. 
10일까지 뉴아트극장(11272 샌타모니카 310-473-8530). ★★★½(5개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세추코 하라와 야수지로 오주



세추코 하라(사진)가 지난 9월5일 도쿄 인근의 해안도시 카마쿠라에서 95세로 별세했다. 스크린에서 늘 큰 누님 같은 분위기를 지녔던 사람이어서 마치 내 누님을 잃은 것 같은 마음이다.
하라는 가장 일본적인 감독 야수지로 오주(1903~1963)의 뮤즈로 함께 모두 6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몇 편의 영화에서 혼기를 놓친 딸 노리코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토실토실하니 살이 찐 긴 얼굴에 늘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었던 하라는 절제의 장인 오주의 스타일답게 오히려 감추어 드러내 보인 연기를 했다.
태평양전쟁 중에 만든 전쟁고무 영화 ‘하와이에서 말레이아까지 해전’과 전후 아키라 쿠로사와의 성격드라마 ‘우리 청춘에 후회는 없다’를 비롯해 생애 총 75여편의 작품에 나온 하라는 오주의 전후 3대 명화로 꼽히는 ‘만춘’(Late Spring·1949)과 ‘맥추’(Early Summer·1951) 그리고 오주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도쿄 이야기’(Tokyo Story·1953)에서 노리코로 나왔다. ‘만춘’에서는 나이 먹은 홀아버지를 남겨 놓고 시집을 갈 수 없어 혼기를 놓친 딸로 나오고 ‘맥추’에서도 28세의 노처녀로 나와 가족을 걱정시킨다. ‘도쿄 이야기’에서는 상경한 시부모를 시부모의 아들과 딸보다 더 극진히 모시는 젊은 전쟁미망인으로 나와 우수가 가득히 배인 아름다운 연기를 한다.  
하라는 독립심이 강한 전후의 전형적인 ‘모던 걸’로 나와 가족의 전통과 사회의 관습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조용하면서도 심오하게 보여주었다.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습의 여인이었으나 늘 노처녀나 미망인으로 나와 이런 식으로 속 걱정을 해 불행해 보였다.
‘도쿄 이야기’의 끝 부분에 노리코의 시누이 교코가 자기 모친 장례식을 마친 후 노리코에게 “삶이란 실망스런 것이지요”라고 묻자 노리코가 “네 그래요”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이 ‘삶은 실망’이라는 말은 오주의 철학이자 노리코의 뜻이기도 하다.
하라는 1963년 자기와 염문설이 나돌던 오주가 죽자 배우로서의 절정기에 은퇴를 선언했는데 그 후 죽기 전까지 평생을 혼자 살면서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하라는 ‘영원한 처녀’요 ‘일본의 가르보’라고도 불렸다.
오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또 모든 것이 일어난다. 오주 영화의 주제는 소시민 가족의 평범힌 삶으로 특히 전통 일본 가족의 해체를 자주 그리고 있다. 그의 영화는 별 내용이 없는 자질구레한 일상의 소묘인데도 그것이 매우 보편적인 데다가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어질고 자상해 그의 영화를 보느라면 미열과도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
많은 그의 영화들을 보면 가족들이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와 직장에 가고 오후에는 각자 귀가해 다시 밥 먹고 얘기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게 일이다. 그는 이런 평범한 것들을 통해 세대 차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실망 그리고 가족의 죽음과 부부갈등 및 부모의 자녀 결혼걱정과 같은 우리 모두의 얘기를 거의 반 극적으로 천천히 들려주고 있다.
그의 영화는 얘기뿐만 아니라 영상형태도 지극히 고즈넉하고 검소하다. 얘기에서 분명한 플롯과 과다한 드라마를 포기했듯이 카메라도 앉은뱅이의 부동자세를 취한다. 다다미 위에 앉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놓은 카메라(다다미 촬영법) 앞에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데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 다다미 위를 오락가락하는 맨발들을 자주 보게 된다. 오주는 ‘적을수록 많다’는 것을 실현한 미니멀리스트였다.
꼼짝도 않는 카메라는 이런 서민가족의 삶과 함께 다다미방과 복도, 밥상과 혼자 놓인 꽃병과 새장 안의 새, 통근열차와 조는 듯한 후원 그리고 빨랫줄에 걸린 빨래와 연기 나는 굴뚝과 지붕 같은 사물과 풍경을 멀리서 낮은 각도로 관조하듯이 포착하면서 화면에 은근한 감정적 파랑을 일군다. 그것이야말로 정일 속의 힘찬 감동으로 오주의 화폭은 얘기만큼이나 쓸쓸하니 아름답다. 삶을 이토록 솔직하고 편견 없이 보여준 감독도 찾아보기 힘들다.
서민들의 일상의 자태를 고상하게 승화시켜 준 오주의 작품이 좋은 까닭은 그가 우리의 실수와 과오를 넉넉히 관용하면서 삶의 문제를 체념에 가까운 자세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를 받아들일 줄 아는 현자로 우리가 아무리 삶 때문에 울고불고 안달을 해도 그것은 마련된 제 코스를 따라간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었다.
하라의 부음을 듣고 다시 본 ‘맥추’에서 부인과 함께 공원에 놀러 나온 노리코의 아버지가 아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선 안 되지”라고 한 말에 오주의 이런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오주의 영화는 체념적인 기분 속에서도 결코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그의 영화는 촉촉한 비감과 함께 따스하고 때로는 짓궂은 유머가 알게 모르게 섞여 있는데 이런 장난기 있는 유머감각은 ‘맥추’에서 노리코의 버릇없는 어린 조카 이사무의 세수장면에서 우습게 묘사됐다. 오주는 멜로드라마 같은 삶을 웃어넘길 줄 아는 스크린의 소박한 사색가였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