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추코 하라(사진)가 지난 9월5일 도쿄 인근의 해안도시 카마쿠라에서 95세로 별세했다. 스크린에서 늘 큰 누님 같은 분위기를 지녔던 사람이어서 마치 내 누님을 잃은 것 같은 마음이다.
하라는 가장 일본적인 감독 야수지로 오주(1903~1963)의 뮤즈로 함께 모두 6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몇 편의 영화에서 혼기를 놓친 딸 노리코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토실토실하니 살이 찐 긴 얼굴에 늘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었던 하라는 절제의 장인 오주의 스타일답게 오히려 감추어 드러내 보인 연기를 했다.
태평양전쟁 중에 만든 전쟁고무 영화 ‘하와이에서 말레이아까지 해전’과 전후 아키라 쿠로사와의 성격드라마 ‘우리 청춘에 후회는 없다’를 비롯해 생애 총 75여편의 작품에 나온 하라는 오주의 전후 3대 명화로 꼽히는 ‘만춘’(Late Spring·1949)과 ‘맥추’(Early Summer·1951) 그리고 오주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도쿄 이야기’(Tokyo Story·1953)에서 노리코로 나왔다. ‘만춘’에서는 나이 먹은 홀아버지를 남겨 놓고 시집을 갈 수 없어 혼기를 놓친 딸로 나오고 ‘맥추’에서도 28세의 노처녀로 나와 가족을 걱정시킨다. ‘도쿄 이야기’에서는 상경한 시부모를 시부모의 아들과 딸보다 더 극진히 모시는 젊은 전쟁미망인으로 나와 우수가 가득히 배인 아름다운 연기를 한다.
하라는 독립심이 강한 전후의 전형적인 ‘모던 걸’로 나와 가족의 전통과 사회의 관습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조용하면서도 심오하게 보여주었다.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습의 여인이었으나 늘 노처녀나 미망인으로 나와 이런 식으로 속 걱정을 해 불행해 보였다.
‘도쿄 이야기’의 끝 부분에 노리코의 시누이 교코가 자기 모친 장례식을 마친 후 노리코에게 “삶이란 실망스런 것이지요”라고 묻자 노리코가 “네 그래요”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이 ‘삶은 실망’이라는 말은 오주의 철학이자 노리코의 뜻이기도 하다.
하라는 1963년 자기와 염문설이 나돌던 오주가 죽자 배우로서의 절정기에 은퇴를 선언했는데 그 후 죽기 전까지 평생을 혼자 살면서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하라는 ‘영원한 처녀’요 ‘일본의 가르보’라고도 불렸다.
오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또 모든 것이 일어난다. 오주 영화의 주제는 소시민 가족의 평범힌 삶으로 특히 전통 일본 가족의 해체를 자주 그리고 있다. 그의 영화는 별 내용이 없는 자질구레한 일상의 소묘인데도 그것이 매우 보편적인 데다가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어질고 자상해 그의 영화를 보느라면 미열과도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
많은 그의 영화들을 보면 가족들이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와 직장에 가고 오후에는 각자 귀가해 다시 밥 먹고 얘기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게 일이다. 그는 이런 평범한 것들을 통해 세대 차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실망 그리고 가족의 죽음과 부부갈등 및 부모의 자녀 결혼걱정과 같은 우리 모두의 얘기를 거의 반 극적으로 천천히 들려주고 있다.
그의 영화는 얘기뿐만 아니라 영상형태도 지극히 고즈넉하고 검소하다. 얘기에서 분명한 플롯과 과다한 드라마를 포기했듯이 카메라도 앉은뱅이의 부동자세를 취한다. 다다미 위에 앉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놓은 카메라(다다미 촬영법) 앞에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데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 다다미 위를 오락가락하는 맨발들을 자주 보게 된다. 오주는 ‘적을수록 많다’는 것을 실현한 미니멀리스트였다.
꼼짝도 않는 카메라는 이런 서민가족의 삶과 함께 다다미방과 복도, 밥상과 혼자 놓인 꽃병과 새장 안의 새, 통근열차와 조는 듯한 후원 그리고 빨랫줄에 걸린 빨래와 연기 나는 굴뚝과 지붕 같은 사물과 풍경을 멀리서 낮은 각도로 관조하듯이 포착하면서 화면에 은근한 감정적 파랑을 일군다. 그것이야말로 정일 속의 힘찬 감동으로 오주의 화폭은 얘기만큼이나 쓸쓸하니 아름답다. 삶을 이토록 솔직하고 편견 없이 보여준 감독도 찾아보기 힘들다.
서민들의 일상의 자태를 고상하게 승화시켜 준 오주의 작품이 좋은 까닭은 그가 우리의 실수와 과오를 넉넉히 관용하면서 삶의 문제를 체념에 가까운 자세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를 받아들일 줄 아는 현자로 우리가 아무리 삶 때문에 울고불고 안달을 해도 그것은 마련된 제 코스를 따라간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었다.
하라의 부음을 듣고 다시 본 ‘맥추’에서 부인과 함께 공원에 놀러 나온 노리코의 아버지가 아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선 안 되지”라고 한 말에 오주의 이런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오주의 영화는 체념적인 기분 속에서도 결코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그의 영화는 촉촉한 비감과 함께 따스하고 때로는 짓궂은 유머가 알게 모르게 섞여 있는데 이런 장난기 있는 유머감각은 ‘맥추’에서 노리코의 버릇없는 어린 조카 이사무의 세수장면에서 우습게 묘사됐다. 오주는 멜로드라마 같은 삶을 웃어넘길 줄 아는 스크린의 소박한 사색가였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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