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1월 2일 월요일

‘워크’(The Walk)의 실제 모델 필립 쁘띠




“삶도 줄타기도 양극단의 균형을 잡는 것”


1974년 맨해턴 쌍둥이빌딩 사이 8차례 공중보행 성공
영화의 일부는 사실과 다르나 내 모험 보여준 것에 만족
지금도 하루 3시간씩 연습… 다음 목표는 모아이 석상 축제


지난 1974년 8월 7일 뉴욕 맨해턴의 쌍둥이빌딩 월드 트레이드센터의 양쪽 꼭대기 사이에 쇠줄을 맨 뒤 안전장치 없이 균형봉 하나만을 들고 두 건물 사이를 여덟 차례를 왕복해 걸은 프랑스 태생의 필립 쁘띠(66)와의 인터뷰가 지난 10월 4일 뉴욕의 리츠 칼튼호텔에서 있었다. 쁘띠의 이 공중보행을 로버트 즈멕키스 감독이 조셉 고든-레빗을 주연으로 써 스크린에 옮긴‘워크’(The Walk)가 현재 상영 중이다. 빨강 머리의 쁘띠는 나이 답지 않게 젊게 보이는데다가 생명력으로 가득 찼는데 장난 꾸러기 아이 같았다. 시종일관 인터뷰도 일어서서 마치 춤 추고 연기 하듯이 야단스런 제스처를 써 가면서 했다. 속사포 같은 속도로 위트와 유머를 마구 뒤섞어 질문에 대답했는데 인터뷰에 자기가 쌍둥이빌딩 사이를 걸었을 때 신은 발레화 같은 신발과 건물 사이를 쇠줄로 연결 할 때 쓴 활 그리고 길에서 재주와 묘기를 보일 때 쓴 탑해트를 가지고 와 보여 주면서 자랑했다. 그는 현재 뉴욕주 캣스킬에 살고 있다.  

-영화에서 재현된 당신의 삶과 공중 보행을 보고 느낀 점은 무엇인가.
“즈멕키스로부터 처음 전화를 받은 것은 9년 전이다. 처음에는 내가 직접 해설하는 식으로 만들려고 했다(영화에서는 고든-레빗이 자유의 여신상 꼭대기에서 해설한다.) 처음엔 내 자문을 100% 받았으나 후반에 가선 얼마 안 받았다. 그래서 다소 걱정이 됐다. 그러나 난 영화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영화가 내 인물과 쌍둥이빌딩 그리고 내 모험의 정신을 살려 보여준 것에 만족한다. 물론 공중보행을 제외한 영화의 많은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쌍둥이빌딩이 9/11 테러로 무너졌을 때 느낌이 어땠는가.
“난 여기에 그 참상의 슬픔과 공포를 얘기하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삶의 슬픔과 기쁨의 균형을 얘기 하기 위해 왔다. 당신의 귀중한 사람이 사라졌다고 해도 삶을 멈춰서는 안 되고 삶이란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난 늘 쇠줄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잘 안다. 한 쪽으로는 눈물과 슬픔이 있지만 다른 한 쪽으로는 삶의 기쁨과 기억이 있다. 이 영화도 그 얘기를 하고 있다.”

-당신의 미국에서의 공중보행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내가 노트르담 성당의 두 탑 사이를 걸었을 때 전 세계가 그 사실을 1면에 보도했지만 유독 프랑스 신문들만 보도를 무시했다. 속 좁은 프랑스 사람들이다. 그 이후로 난 프랑스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난 수십년 동안 그들은 예술가로서 나를 고국에 초청하는 것도 아주 인색했다. 그러나 온 세계가 날 반기기 때문에 프랑스가 날 홀대한다 해도 신경 안 쓴다.”

-그 날의 일 중 공중보행 말고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 때 뉴욕에 온 뒤로 8개월 간 묘기를 보이면서 생활했다. 그러나 난 영화에서처럼 무언극은 안 했다. 그리고 모지를 돌려 가면서 관중들로부터 돈을 받았는데 그 것은 결코 구걸이 아니다. 늘 경찰이 잡으러 오곤 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내빼곤 했다. 마침내 거사의 날이 왔다. 쌍둥이빌딩 북쪽타워에 올라간 내 친구 장-루이가 내가 있는 남쪽타워로 화살을 쏴 날려 보냈다. 건물 사이를 쇠줄로 연결하는 도구다. 화살의 끝이 뭉툭하긴 했지만 그것에 찔릴까봐 아슬아슬 했다.”
필립 쁘띠가 월드 트레이드센터 사이를 공중보행하고 있다.

-고든-레빗이 당신과 닮은 데가 없는 점이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가.
“난 완벽주의자가 돼서 세상의 모든 것이 늘 마음에 안 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사실에 바탕을 둔 허구이니 만큼 마음에 거슬릴 것까진 없다. 영화란 늘 인물과 진실을 다소 꾸며대기 마련 아닌가. 영화에서 내가 쇠줄 위에서 떨어지는 것도 사실 아니다. 난 한 번도 줄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조셉 고든-레빗은 매우 훌륭한 배우로 난 그를 8주간 훈련 시켰다. 그는 그 동안에 줄타기 뿐만 아니라 내 속사포식 말하기와 제스처와 표정도 연구했다. 날 훌륭하게 표현한 고든-레빗에게 경의를 표한다.”

-당신은 죽는 것이 무섭지 않은가.
“죽음이란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 난 죽음을 깔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깔본다고 해야 옳다. 나는 줄 위에 올라 균형봉을 잡고 걷기를 시작, 첫 걸음이 성공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곤 한다. 거기엔 절대로 의문이 없다. 난 결코‘아이구머니 줄이 날 잘 받쳐 주기만을 바란다’는 따위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확신이 있기에 줄 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그 것이야 말로 삶에 대한 긍정이다. 난 결코 내 생명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신비롭고 고상하게 만드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 것은 요가와도 같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당신의 보통 삶의 스타일이란 어떤 것인가.    
“난 도구를 사랑하는 기능공이다. 그 도구란 어떤 때는 공중 돌리기용 공일 수도 있고 쇠줄 위의 균형봉일 수도 있으며 또 목수의 도구일 수도 있다. 난 18세기 목수의 도구로 내가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 그리고 난 불가능을 공격하기를 좋아한다. 죽음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제외하기 위해선 먼저 불가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또 난 투사다. 불가능을 인정하지 않는 집요한 작은 쥐다.”

-매일 운동을 하는가.
“한다. 사람들이 내가 66세라면 모두 놀란다. 그 나이에 아직도 죽지 않고 온갖 묘기를 하는 나를 보고 깜짝들 놀란다. 난 내가 늙는다는 것을 잊고 산다. 지금도 주 6일 하루에 3시간씩 줄타기 연습을 한다.”

- 그 날 줄을 타면서 바람의 변화나 거리의 소음에 대해 신경이 안 쓰였는가.
“그 것에 대해 준비를 했다. 내가 에펠탑을 걸었을 때도 기상청을 방문해 과거 10년간 에펠탑주위의 바람의 속도와 방향에 관한 자료를 연구한 뒤에 걸었다. 그러나 막상 줄 위에 올라가기 전에는 그런 것들에 대해 정확히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쌍둥이빌딩 사이를 걷기 전에 난 건축인부로 위장하고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밑의 소음을 조사했다. 철저히 빌딩과 친해지려고 했다. 빌딩을 내 가족처럼 아는데 8개월이 걸렸다. 따라서 그 뒤론 공포나 걱정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난 염려란 말에 신경 안 쓴다. 난 늘 신경을 총 집중해 만반의 준비를 한 뒤에 샐행에 들어간다.”

-8차례 왕복에 얼마나 걸렸는가.
“난 그 때 시계를 안 차서 몰랐지만 후에 친구들이 45분간 줄 위에 있었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게 있어 영원일 수도 있고 또 순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시간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안 늙는 것도 그 때문이다.

-8차례 왕복은 계획했던 것인가.
“한 번 건너간다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사전에 계획한 것이 없었다. 난 돈이나 신기록이나 명성 때문에 공중보행을 한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내가 걷다가 줄 위에 앉아 아래의 공백을 내려다 보면서 생각한 것은 사실인데 타워가 날 부르고 있다는 시심을 느꼈었다. 그 후 난 예술적 연기가 하고 싶어서 왔다 갔다를 한 것이다. 내가 왔다 갔다 한 것은 경찰이 빌딩 꼭대기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난 하늘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줄 위를 걷고 그 위에 앉고 또 누운 것은 다 즉흥적인 연기였다.”

- 그 때 당신을 도와준 친구들은 그 뒤 어떻게 됐는가.
“모두 제 갈 길로 갔다. 일부는 내 절친한 친구로 남아 있고 또 일부는 내 성공에 대한 시기와 부러움 때문에 내게 등을 돌렸다. 특히 내 공중보행을 담은 기록영화 ‘줄 위의 남자’가 오스카상을 받은 것이 그런 질투의 원인이 됐다. 슬픈 일인데 내겐 그들이 여전히 나의 친구들이다.” 

-당신의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쌍둥이빌딩 다음으로 내가 공중 예술을 표현한 것은 뉴욕에 있는 성요한 성당의 16층 높이를 걸은 것이다. 그 때 성당의 두 탑은 채 완공되지 않았을 때로 공중보행이 성공리에 끝나자 성당의 주교가 내게 성당전속 예술가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니까 난 등에 혹이 없는 현대판 콰지모도다. 난 지금 세계를 돌면서 공중보행을 하고 있다. 다음 목표는 남미의 이스터 아일랜드에 있는 모아이 석상들에서 쇼를 하는 것으로 라파 누이 원주민들과 함께 음악을 겸한 축제를 열 예정이다. 그리고 난 아직도 뉴욕공원에서 사람들에게 묘기를 보여주고 있다. 내 몸이 말을 안 들을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쌍둥이빌딩 공중보행 후 인간적으로 변한 점이라도 있는가.
“없다. 내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져 내 인생이 바뀌긴 했지만. 내게 있어 명성과 돈이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경험 이후 내 인생이 직업적으로는 바뀌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우리의 상표는 위기(Our Brans Is Crisis)


보딘(왼쪽)은 카스티요(오른쪽)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온갖 더티플레이를 한다.

술수 판치는 선거전 좌충우돌식 풍자


미 대통령 선거 시즌에 접어든 요즘 시의에 알맞은 정치 풍자 영화인데 심각한 드라마와 거의 스크루볼 코미디 같은 요소가 썩 잘 조화를 이루진 못 했다. 중구난방식의 짬뽕 같은 영화로 그런대로 즐길만은 하나 왜 하필이면 바나나공화국인 볼리비아에까지 내려가 그 나라의 선거에 개입하는 얘기를 만들었는지 그 까닭이 알쏭달쏭하다. 이 영화는 2002년의 볼리비아 대통령 선거 때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완전한 허구다.
이 영화는 원래 주인공인 선거전략가로 조지 클루니가 나오기로 했다가 샌드라 불락으로 교체 됐다. 불락이 머리를 산발하고 산소통을 들고 다니면서 온갖 더티 플레이를 구사해 가며 자기가 미는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 시키려고 좌충우돌 식으로 요란을 떠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골머리가 다 쑤신다. 지나치게 불락의 수퍼 스타 위치에 신경을 쓰면서 그녀를 부각시키려고 애 쓴 흔적이 역력해 거부감 마저 인다. 
선거에 질 사람 이기게 하는 마이다스 터치를 지닌 선거전략가 제인 보딘(불락)이 신경쇠약증세로 숲속 통나무 집에서 칩거하고 있는데 그녀를 잘 아는 두 명의 선거전략가(앤소니 맥키와 앤 다우드)가 찾아와 볼리비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전직 대통령 카스티요(호아킴 데 알메이다)를 위해 함께 일 하자고 제의한다. 그런데 카스티요는 국민지지도가 달랑 8%로 출마자들 중 5위를 달리고 있다.
볼리비아에 내려간 보딘은 고지병에 시달려 구토를 하고 산소통을 들고 다니면서 마치 뿔난 황소 같이 씩씩대며 선거운동에 나선다. 그 태도가 안하무인이요 오만방자하지만 실력이 있는 만큼 모두 그녀의 말에 복종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보딘은 스패니쉬도 못 하고 카스티요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보딘이 몰랐던 사실은 카스티요의 라이벌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리베라(루이스 아르셀라)의 선거참모가 자신의 천적인 팻 캔디(빌리 밥 손턴)라는 사실. 그는 여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교활하고 수리수리 마수리에 능통한 자로 보딘은 그와 맞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 이 번 대결이야 말로 개인적 복수의 일전이다.
보딘과 캔디가 치열하게 맞붙으면서 벌어지는 기만과 조작 그리고 더티 플레이의 정치적 게임이 가관인데 여기서 보딘이 내 건 슬로건이 ‘우리의 상표는 위기’. 즉 국민에게 카스티요 아닌 다른 사람을 뽑으면 위기가 오게 된다는 겁주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보딘은 서슴 없이 거짓말 까지 동원해 상대를 비방한다. 
정치란 원래 사기요 정치가들은 다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새삼스런 것도 아니나 이 영화에서 서 그 사실이 다시 드러난다. 그리고 정치가들도 할리웃 배우들 처럼 ‘인식’에 목을 매 단 사람들이라는 것도 다시 깨닫게 된다. 
각본이 독창적이라기 보다 남들이 말한 명언들을 빌려다 온 것처럼 인용구가 많고 불락의 연기가 과도하다. 기만과 술수를 생의 신조 처럼 여기며 살던 보딘이 정치가들에게 실망해 사회활동가가 되는 마지막 처리는 터무니 없는 농담이다. 데이빗 고든 그린 감독. R. WB.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번트(Burnt)


애담이 마치 예술품 창작하듯 요리를 하고 있다.

성질 고약한 셰프의 재기 몸부림


잘 나가던 자리에서 자기 잘못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가 자기 구제와 함께 재기하려고 몸부림 치는 판에 박은 얘기로 별 필요도 없는 지절대는 말이 많고 공연히 시끄럽고 분주한 통속적인 영화다.  
수퍼 스타 브래들리 쿠퍼가 몰락한 셰프로 나와 과거를 속죄하고 다시 명품 요리를 만들려고 열불을 내는데 성질이 고약한데다가 이기적이고 욕설을 밥 먹듯이 내 뱉는 바람에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각본가와 감독의 의도가 브래들리를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 놔야 그의 자기 구제와 재기가 더 극적이라는 것인 줄은 모르겠으나 보는 사람으로선 도무지 호감이 가질 않아 영화에 다가 가게 되질 않는다. 
볼만한 것은 식당의 요리사들이 음식을 만드는 장면. 마치 전쟁 하듯이 치열하고 또 때론 조각품을 만들 듯이 마음과 정성이 지극한데 긴장감 마저 감돈다. 
파리의 미셸린 스타 2개짜리 식당의 명 셰프이던 애담 존스(쿠퍼)는 약물과 술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뒤 속죄하는 식으로 뉴올리언스의 식당에서 일 하다가 재기를 위해 런던으로 간다. 여기서 그는 과거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토니(다니엘 브륄)가 경영하는 식당의 셰프로 취직한다. 애담이 수 셰프로 데려온 사람은 파리에서 있었을 때 라이벌이었던 미셸(오마르 시). 그런데 애담은 파리에서 미셸에게 못 할 짓을 했는데도 미셸은 애담을 쉽게 용서한다. 미셸이 그런데는 이유가 있다.
여기에 가담하는 다른 사람이 혼자 어란 딸을 키우는 독립심 강한 수 셰프 헬렌(시에나 밀러-그녀와 쿠퍼는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공연했다). 애담과 헬렌이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 헬렌이 어떻게 그렇게 성질이 더러운 애담을 사랑하게 되는지 불가사의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애담이 독재자처럼 요리사들을 부리면서 음식을 만드는 장면에 할애 되는데 애담이라는 인간이 그야말로 호로 자식 같은 자여서 헬렌과 토니와도 충돌이 잦다. 아무리 요리를 잘 한다 하지만 이런 인간을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는지 일다가도 모를 일.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미셸린이 파견한 음식 판정가에게 제공할 음식을 애담과 그의 요리사들이 만드는 장면. 마치 전투에 나가기 전 작전지도를 보면서 작전을 짜듯이 긴장감 감돈다.
쿠퍼에게 이런 역은 식은 죽 먹기나 마친 가지. 연기 실팍하게 하는 것은 밀러다. 음식평론가로 나온 우마 서만과 애담의 전처로 나온 알리시아 비칸더는 완전히 소모품. 눈 요기 거리로 적당한 영화다. 존 웰스 감독. R. Weinstein.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빨강머리 모린 오하라




새빨간 머리답게 성질도 불같았던 할리웃 황금기 스크린의 여왕으로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인  모린 오하라하면 대뜸 떠오르는 영화가 존 웨인과 공연한 ‘아일랜드의 연풍’(The Quiet Man 1952)이다.
원제와는 엉뚱하게 다른 한국어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미국에서 권투선수로 활약하던 웨인이 은퇴 후 아일랜드의 시골고향으로 돌아와 아름답고 불같은 성격을 지닌 오하라와 격정적인 로맨스를 엮는 흥미진진한 얘기다. 역시 아일랜드계인 존 포드가 감독해 오스카 감독상과 함께 눈이 따가울 정도로 알록달록한 총천연색 촬영도 오스카상을 받았다.  
난 꼬마 때 이 영화를 봤는데 특히 지금도 잊지 못할 장면은 캡을 쓰고 레인코트를 입은 웨인이 강풍에 빨강머리가 마당 빗질하듯 날리는 자기를 마다하는 오하라의 손을 잡아 끈 뒤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 모습이다(사진). 사랑이 무언지 채 모르던 꼬마의 가슴이 황홀감에 빠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하라와 포드는 이 영화를 비롯해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리오 그랜드’ 및 ‘롱 그레이 라인’ 등 총 5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오하라는 웨인과도 멋 있는 콤비를 이루면서 ‘아일랜드의 연풍’ 외에도 모두 웨스턴인 ‘리오 그랜드’와 ‘맥클린톡!’ 및 ‘빅 제이크‘ 등 모두 5편에서 공연했다.
웨인은 오하라를 “크고, 원기왕성하며 절대적으로 멋들어진-확실히 내 스타일의 여자”라고 찬탄했다. 오하라 역시 “나만이 존 웨인을 상대할 만큼 크고 강인한 주연여우였다”고 웨인의 말에 동의했다.
오하라가 지난 24일 아이다호주 보이지에서 95세로 별세했다. 그녀가 침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날 때 가족들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아일랜드의 연풍’의 음악을 틀었다고 한다.  
오하라는 아이리시 답게 성질이 불 같았을뿐 아니라 강하고 굳세며 담대했는데 빨강머리에 커다란 초록색 눈과 붉고 탐스런 입술 그리고 크림 빛 피부에 체격이 큰 화끈한 미녀여서 생전 ‘총천연색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거구의 웨인과 과연 맞설만한 여자로 스크린을 압도했는데   꼬마 때 그녀의 영화를 많이 본 나로선 오하라가 화면에 나타나면 위협감마저 느꼈었다.
오하라의 영화 중 내 기억에 생생한 또 다른 영화가 중앙극장에서 본 절세미남 타이론 파워가 해적으로 나온  ‘흑조’다. 두 미남미녀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다가 뜨겁게 입술을 맞추는데 오스카 촬영상을 탄 총천연색 영화에 딱 맞는 불타는 키스였다. 오하라가 나온 또 다른 해양모험영화로 재미 있는 것이 더글러스 페어뱅스 주니어가 신배드로 나온 화려한 총천연색 ‘뱃사람 신배드’다.
오하라는 부당한 것에 굴복치 않는 여자로 1950년대 후반 할리웃의 가십전문지 ‘칸피덴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큰 화제가 됐었다. 오하라는 이 잡지가 자신이 외간 남자와 차이니즈극장에서 뜨거운 애무행위를 나눴다고 허위보도를 하자 소송을 제기해 승소, 결국 ‘칸피덴셜’은 문을 닫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연극으로 연기실력을 쌓은 오하라는 18세 때인 1939년 런던에서 히치콕이 감독한 ‘자매이카 인’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는데 여기서 공연한 명우 찰스 로턴의 눈에 띄어  같은 해 할리웃에 진출했다. 오하라는 로턴이 콰지모도로 나온 ‘노트르담의 곱추’에서 집시 에스메랄다로 나왔는데 18세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성숙한 모습이다. 그리고 3개월만 머물기로 했던 미국체류가 유럽에서 전쟁이 나면서 그녀의 할리웃생애가 시작됐다.
오하라의 영화 중 내가 재미 있게 본 또 다른 것이 브라이언 키스와 1인2역의 헤일리 밀스와 공연한 ‘페어런트 트랩’과 경남극장에서 본 헨리 폰다와 공연한 ‘스펜서의 산’이다. 극장에서 오하라를 못 본 젊은 세대들이라도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TV를 통해 방영되는 ‘34가의 기적’을 통해 그녀를 만났을 것이다. 메이시백화점의 산타 클로스인 크리스 크링글이 산타를 믿지 않는 소녀(나탈리 우드)에게 자기가 진짜 산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법정에 까지 서는 얘기로 오하라는 우드의 어머니로 나온다.
생애 50여편의 영화에 나온 오하라는 미모 때문에 자신의 연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 못한 배우로 그녀의 많은 역이 주연남우의 장식품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오하라는 진지한 역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예쁜 여자’라는 이미지와 끊임 없이 다퉈야 했다. 오하라는 “내가 유럽으로 돌아 갔다면 보다 많은 강한 성격 위주의 역을 맡았을 것이 분명하다”면서 “그러나 스튜디오는 결코 내 재능이 내 얼굴을 능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술회한바 있다. 그녀의 명복을 빈다. 한편 TCM은 11월 20일 오하라의 영화를 24시간 마라톤 방영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