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줄타기도 양극단의 균형을 잡는 것”
1974년 맨해턴 쌍둥이빌딩 사이 8차례 공중보행 성공
영화의 일부는 사실과 다르나 내 모험 보여준 것에 만족
지금도 하루 3시간씩 연습… 다음 목표는 모아이 석상 축제
지난 1974년 8월 7일 뉴욕 맨해턴의 쌍둥이빌딩 월드 트레이드센터의 양쪽 꼭대기 사이에 쇠줄을 맨 뒤 안전장치 없이 균형봉 하나만을 들고 두 건물 사이를 여덟 차례를 왕복해 걸은 프랑스 태생의 필립 쁘띠(66)와의 인터뷰가 지난 10월 4일 뉴욕의 리츠 칼튼호텔에서 있었다. 쁘띠의 이 공중보행을 로버트 즈멕키스 감독이 조셉 고든-레빗을 주연으로 써 스크린에 옮긴‘워크’(The Walk)가 현재 상영 중이다. 빨강 머리의 쁘띠는 나이 답지 않게 젊게 보이는데다가 생명력으로 가득 찼는데 장난 꾸러기 아이 같았다. 시종일관 인터뷰도 일어서서 마치 춤 추고 연기 하듯이 야단스런 제스처를 써 가면서 했다. 속사포 같은 속도로 위트와 유머를 마구 뒤섞어 질문에 대답했는데 인터뷰에 자기가 쌍둥이빌딩 사이를 걸었을 때 신은 발레화 같은 신발과 건물 사이를 쇠줄로 연결 할 때 쓴 활 그리고 길에서 재주와 묘기를 보일 때 쓴 탑해트를 가지고 와 보여 주면서 자랑했다. 그는 현재 뉴욕주 캣스킬에 살고 있다.
-영화에서 재현된 당신의 삶과 공중 보행을 보고 느낀 점은 무엇인가.
“즈멕키스로부터 처음 전화를 받은 것은 9년 전이다. 처음에는 내가 직접 해설하는 식으로 만들려고 했다(영화에서는 고든-레빗이 자유의 여신상 꼭대기에서 해설한다.) 처음엔 내 자문을 100% 받았으나 후반에 가선 얼마 안 받았다. 그래서 다소 걱정이 됐다. 그러나 난 영화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영화가 내 인물과 쌍둥이빌딩 그리고 내 모험의 정신을 살려 보여준 것에 만족한다. 물론 공중보행을 제외한 영화의 많은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쌍둥이빌딩이 9/11 테러로 무너졌을 때 느낌이 어땠는가.
“난 여기에 그 참상의 슬픔과 공포를 얘기하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삶의 슬픔과 기쁨의 균형을 얘기 하기 위해 왔다. 당신의 귀중한 사람이 사라졌다고 해도 삶을 멈춰서는 안 되고 삶이란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난 늘 쇠줄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잘 안다. 한 쪽으로는 눈물과 슬픔이 있지만 다른 한 쪽으로는 삶의 기쁨과 기억이 있다. 이 영화도 그 얘기를 하고 있다.”
-당신의 미국에서의 공중보행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내가 노트르담 성당의 두 탑 사이를 걸었을 때 전 세계가 그 사실을 1면에 보도했지만 유독 프랑스 신문들만 보도를 무시했다. 속 좁은 프랑스 사람들이다. 그 이후로 난 프랑스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난 수십년 동안 그들은 예술가로서 나를 고국에 초청하는 것도 아주 인색했다. 그러나 온 세계가 날 반기기 때문에 프랑스가 날 홀대한다 해도 신경 안 쓴다.”
-그 날의 일 중 공중보행 말고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 때 뉴욕에 온 뒤로 8개월 간 묘기를 보이면서 생활했다. 그러나 난 영화에서처럼 무언극은 안 했다. 그리고 모지를 돌려 가면서 관중들로부터 돈을 받았는데 그 것은 결코 구걸이 아니다. 늘 경찰이 잡으러 오곤 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내빼곤 했다. 마침내 거사의 날이 왔다. 쌍둥이빌딩 북쪽타워에 올라간 내 친구 장-루이가 내가 있는 남쪽타워로 화살을 쏴 날려 보냈다. 건물 사이를 쇠줄로 연결하는 도구다. 화살의 끝이 뭉툭하긴 했지만 그것에 찔릴까봐 아슬아슬 했다.”
필립 쁘띠가 월드 트레이드센터 사이를 공중보행하고 있다. |
-고든-레빗이 당신과 닮은 데가 없는 점이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가.
“난 완벽주의자가 돼서 세상의 모든 것이 늘 마음에 안 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사실에 바탕을 둔 허구이니 만큼 마음에 거슬릴 것까진 없다. 영화란 늘 인물과 진실을 다소 꾸며대기 마련 아닌가. 영화에서 내가 쇠줄 위에서 떨어지는 것도 사실 아니다. 난 한 번도 줄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조셉 고든-레빗은 매우 훌륭한 배우로 난 그를 8주간 훈련 시켰다. 그는 그 동안에 줄타기 뿐만 아니라 내 속사포식 말하기와 제스처와 표정도 연구했다. 날 훌륭하게 표현한 고든-레빗에게 경의를 표한다.”
-당신은 죽는 것이 무섭지 않은가.
“죽음이란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 난 죽음을 깔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깔본다고 해야 옳다. 나는 줄 위에 올라 균형봉을 잡고 걷기를 시작, 첫 걸음이 성공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곤 한다. 거기엔 절대로 의문이 없다. 난 결코‘아이구머니 줄이 날 잘 받쳐 주기만을 바란다’는 따위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확신이 있기에 줄 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그 것이야 말로 삶에 대한 긍정이다. 난 결코 내 생명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신비롭고 고상하게 만드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 것은 요가와도 같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당신의 보통 삶의 스타일이란 어떤 것인가.
“난 도구를 사랑하는 기능공이다. 그 도구란 어떤 때는 공중 돌리기용 공일 수도 있고 쇠줄 위의 균형봉일 수도 있으며 또 목수의 도구일 수도 있다. 난 18세기 목수의 도구로 내가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 그리고 난 불가능을 공격하기를 좋아한다. 죽음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제외하기 위해선 먼저 불가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또 난 투사다. 불가능을 인정하지 않는 집요한 작은 쥐다.”
-매일 운동을 하는가.
“한다. 사람들이 내가 66세라면 모두 놀란다. 그 나이에 아직도 죽지 않고 온갖 묘기를 하는 나를 보고 깜짝들 놀란다. 난 내가 늙는다는 것을 잊고 산다. 지금도 주 6일 하루에 3시간씩 줄타기 연습을 한다.”
- 그 날 줄을 타면서 바람의 변화나 거리의 소음에 대해 신경이 안 쓰였는가.
“그 것에 대해 준비를 했다. 내가 에펠탑을 걸었을 때도 기상청을 방문해 과거 10년간 에펠탑주위의 바람의 속도와 방향에 관한 자료를 연구한 뒤에 걸었다. 그러나 막상 줄 위에 올라가기 전에는 그런 것들에 대해 정확히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쌍둥이빌딩 사이를 걷기 전에 난 건축인부로 위장하고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밑의 소음을 조사했다. 철저히 빌딩과 친해지려고 했다. 빌딩을 내 가족처럼 아는데 8개월이 걸렸다. 따라서 그 뒤론 공포나 걱정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난 염려란 말에 신경 안 쓴다. 난 늘 신경을 총 집중해 만반의 준비를 한 뒤에 샐행에 들어간다.”
-8차례 왕복에 얼마나 걸렸는가.
“난 그 때 시계를 안 차서 몰랐지만 후에 친구들이 45분간 줄 위에 있었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게 있어 영원일 수도 있고 또 순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시간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안 늙는 것도 그 때문이다.
-8차례 왕복은 계획했던 것인가.
“한 번 건너간다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사전에 계획한 것이 없었다. 난 돈이나 신기록이나 명성 때문에 공중보행을 한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내가 걷다가 줄 위에 앉아 아래의 공백을 내려다 보면서 생각한 것은 사실인데 타워가 날 부르고 있다는 시심을 느꼈었다. 그 후 난 예술적 연기가 하고 싶어서 왔다 갔다를 한 것이다. 내가 왔다 갔다 한 것은 경찰이 빌딩 꼭대기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난 하늘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줄 위를 걷고 그 위에 앉고 또 누운 것은 다 즉흥적인 연기였다.”
- 그 때 당신을 도와준 친구들은 그 뒤 어떻게 됐는가.
“모두 제 갈 길로 갔다. 일부는 내 절친한 친구로 남아 있고 또 일부는 내 성공에 대한 시기와 부러움 때문에 내게 등을 돌렸다. 특히 내 공중보행을 담은 기록영화 ‘줄 위의 남자’가 오스카상을 받은 것이 그런 질투의 원인이 됐다. 슬픈 일인데 내겐 그들이 여전히 나의 친구들이다.”
-당신의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쌍둥이빌딩 다음으로 내가 공중 예술을 표현한 것은 뉴욕에 있는 성요한 성당의 16층 높이를 걸은 것이다. 그 때 성당의 두 탑은 채 완공되지 않았을 때로 공중보행이 성공리에 끝나자 성당의 주교가 내게 성당전속 예술가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니까 난 등에 혹이 없는 현대판 콰지모도다. 난 지금 세계를 돌면서 공중보행을 하고 있다. 다음 목표는 남미의 이스터 아일랜드에 있는 모아이 석상들에서 쇼를 하는 것으로 라파 누이 원주민들과 함께 음악을 겸한 축제를 열 예정이다. 그리고 난 아직도 뉴욕공원에서 사람들에게 묘기를 보여주고 있다. 내 몸이 말을 안 들을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쌍둥이빌딩 공중보행 후 인간적으로 변한 점이라도 있는가.
“없다. 내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져 내 인생이 바뀌긴 했지만. 내게 있어 명성과 돈이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경험 이후 내 인생이 직업적으로는 바뀌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