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6월 15일 월요일

‘비치 보이즈’리더 브라이언 윌슨




“배우들이 나를 너무 잘 묘사해 깜짝 놀라”


브라이언 윌슨의 삶과 음악 다룬‘러브 & 머시’개봉

1960년대‘서핀 USA’‘굿 바이브레이션즈’‘슬룹 잔 B’‘우든 잇 비 나이스’‘헬프 미, 론다’ 및‘아이 겟 어라운드’ 등 수많은 히트 곡을 내면서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캘리포니아 서프뮤직의 창조자들인 5인조 보컬 락그룹‘비치 보이즈’(Beach Boys)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72)과의 인터뷰가 3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인터뷰는 그의 삶을 다룬 영화‘러브 & 머시’(Love & Mercy-영화평 참조)의 개봉에 맞춰 있었는데 셔츠 차림의 윌슨은 인터뷰장에 들어오자마자 실내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짧은 즉흥연주를 한 뒤“할로”하고 인사를 했다. 거동이 다소 불편한 윌슨은 입안에서 중얼대는 소리로 질문에 아주 짤막한 대답을 했는데 한 쪽 귀가 안 들려 질문을 큰 소리로 해야 했다. 무표정했지만 시치미 뚝 떼고 웃기기도 했는데 가끔 가다 질문에 피아노를 치면서 대답했다. 인터뷰장 뒤에는 그의 두 번째 아내로 그의 음악적 활동에 큰 공헌을 한 멜린다가 남편을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음악을 사랑하는지 알게 됐는가.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서 ‘랩소디 인 블루’(거쉬인 곡)를 듣고 그 곡을 무척 사랑하게 되면서 부터다.”

-영화를 본 소감은.
“너무 잘 만들어 놀랐다. 각기 젊었을 때와 나이 먹었을 때의 나로 나온 폴 데이노와 존 큐색이 정말로 나를 잘 묘사했다.”

-음악가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작곡이 안 될 때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가.
“그냥 꾸준히 음악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고 가장 놀란 것은 무엇인가.
“멜린다와의 관계를 그린 부분이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뱅스가 내 아내 역을 참 잘 해냈다.”

-영화를 보면서 기뻤는가 아니면 슬펐는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꼈다.”

-어떤 점이 슬펐는가.
“존 큐색이 내 아내 역의 엘리자베스에게 보여준 민감한 감정 표시 때문이었다.”

-비치 보이즈와 또 다른 서프뮤직의 대표 보컬이었던 잰 앤 딘은 동시대에 활동했는데 두 그룹의 관계는 어땠는가.
“우리 멤버 중의 한 사람인 마이크 러브가 그들을 위해 작곡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뒤로 우리로부터 배웠다.” (윌슨은 이 때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대답했다.)

-잰 앤 딘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주 흥미 있고 흥분되고 또 행복한 음악이다.”    

-누가 당신에게 음악을 가르쳐 주었는가.
“나의 삼촌이 내가 12세 때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서퍼 걸’을 작곡했다. 난 스스로 작곡을 배웠다.”

-작곡하기 전에 음악적 영감을 어떻게 얻는가.
“난 오른 쪽 귀가 안 들려 스튜디오에 들어가기 전 들리는 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머리로 음악을 듣고 앉아 연주하는 것이다.” (그는 이 때 다시 피아노를 쳤다.)   

-음악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
“그렇다.”
해변 복장을 한 비치 보이즈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른쪽서 두 번째가 브라이언 윌슨.

-음악이 없었다면 무엇을 했겠는가.
“메이저리그 야구선수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한 때 풋볼 쿼터백이었다.”

-어떻게 해서 당신의 개인 얘기의 영화화를 허락했는가.
“영화를 통해 내가 겪은 삶의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당신의 아내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무척 많은 것을 뜻한다. 그녀는 17년 전에 내가 솔로로 활동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 뒤로 나는 지금까지 많은 순회공연을 아내와 함께 하고 있다.”

-아내에게 바친 노래라도 있는가.
“‘원 카인드 오브 러브’다.”

-영화 제목은 당신의 노래 제목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제목을 생각했는가.
“어느 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노래는 비치 보이즈 노래가 아닌 나 개인의 노래다.”

-작곡하기에 가장 쉬웠던 것과 어려웠던 것은 무엇인가.
“가장 쉬웠던 곡은 ‘409’이고 어려웠던 것은 ‘갓 온리 노우즈’다.”(그는 이 때 ‘갓 온리 노우즈’를 짤막하게 피아노로 쳤다.)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무엇인가.
“피아노와 베이스다. 난 혼과 바이얼린 같은 악기는 연주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의 음악적 영감은 피아노로부터 오는가.
“그렇다.” 

-가장 빨리 작곡한 곡은 무엇인가.
“‘서핀 사파리’다.”

-연주자로서 피아노는 언제부터 치기 시작했는가.
“24세 때부터다.”

-당신은 한동안 매우 어두운 삶을 살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내 가슴과 피아노와 친구들에 의해서다. 내게 찾아와 ‘브라이언 너는 이겨낼 수 있어’라고 격려해 준 친구들이 많다.”

-그런 어두운 과거를 생각할 때 화나지 않는가.
“아니다.”

-요즘 어떤 음악을 듣는가.
“70년대와 80년대 음악을 듣는다.” 

-가수 중 누구를 좋아하는가.
“폴 매카트니다.”

-낮에 무엇을 하는가.
“운동한다.”

-작곡과정에 대해 알려 달라.
“머릿속에서 음표들이 떠오르긴 하지만 직접 소리는 스튜디오에 들어가서야 듣는다. 그리고 곡을 제작할 때 비로소 스피커를 통해 소리를 듣게 된다.”

-작사도 직접 하는가.
“혼자도 하고 도움 받을 때도 있다.”

-당신은 서프뮤직을 만들고도 서핑을 할 줄 모르는 것으로 아는데.
“서핑을 못 배웠다. 늘 겁이 나서 그랬다. 그런데 비치 보이즈의 멤버이기도 한 내 동생 데니스가 내게 서핑이 굉장히 인기이니 그에 관한 음악을 지어보라고 해서 우리 둘이 같이 작곡했다.”

-폴 데이노와 존 큐색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는가.
“1주일 정도 함께 지냈는데 그 과정에서 둘은 내 매너리즘과 나의 다른 것들을 배웠다.”

-당신의 촤근 앨범 ‘노 피어 프레셔’는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내 자신의 영감에 의해서다. 비치 보이즈의 음악처럼 달콤한 멜로디가 많은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4명의 게스트 싱어들이 노래 부른다.” 

-당신은 지금 비치 보이즈의 오랜 멤버 중 하나인 알 자딘과 순회공연을 하는데 무대에 서는 기분이 어떤가.
“자딘은 훌륭한 가수다. 우린 오랜 역사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 무대에 다시 서니 참 좋다.”   
-당신의 많은 자녀들로부터 무엇을 취하는가.
“나이가 먹어 모자라는 에너지다.”

-당신의 나이 먹은 딸들이 음악사업을 하는데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먼저 노래부터 할 줄 알아야 사업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

-당신의 아이들과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고자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해 줄 충고는.
“드럭을 하지 말라는 것과 자연스럽게 작곡하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영화이기도 한데 당신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 것은 아주 자연스런 것이다. (피아노를 치며)사랑은 ‘랩소디 인 블루’요 음악이다.

-당신은 음악이 가슴으로부터 온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그 것은 먼저 느낀 다음에 듣게 된다.”

-밴드와 솔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솔로보다 밴드가 나은 점은 무대에서 연주한다는 것이다.”

-요가나 명상을 하는가.
“선험적 명상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못하겠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TV 보고 공원에 가서 걷고 피아노를 친다.”

-비치 보이즈 때와 지금 하는 순회공연의 차이라도 있는가.
“지금이 더 재미있고 신난다. 그 때와 달리 지금은 진짜로 나의 밴드라는 느낌이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과 저녁에 자기 전 제일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일어나면 먼저 ‘또 다른 날을 주셔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녁에는 ’바라건대 또 다른 날을 주소서’하고 기도한다. 

-첫 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는가.
“믿는다.”

-마이클 잭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어땠는가.
“매우 우울해 피아노에 가서 ‘갓 온리 노우즈’를 작곡했다.”

-당신의 앨범 ‘펫 사운즈’는 음반사상 가장 훌륭한 것 중의 하나로 꼽히는데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는가.
“하모니다. 비틀즈의 ‘사전트 페퍼’는 우리 음반을 아주 가깝게 따라 온 것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Me and Earl and the Dying Girl)


그렉과 레이철(왼쪽)이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고전영화광 소년, 백혈병 소녀를 만나다


다정다감하고 슬프고 또 우스운 10대의 성장기이자 암으로 죽어가는 소녀의 드라마로 작년에 나온 셰일린 우들리와 앤셀 엘고트가 주연한 10대들의 깨끗한 로맨틱 신파극 ‘폴트 인 아우어 스타즈’를 많이 닮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폴트 인 아우어 스타즈’와는 달리 주인공들 간에 채 로맨스는 영글지 못한다. 가슴보다는 마음이 만나는데 그래서 더 실제적이고 정이 간다.
이런 내용의 영화는 처음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약간 괴팍하고 별난데다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젊은 배우들의 꾸밈없는 연기 그리고 자칫하면 감상적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을 약간 멋을 부린 냉소적인 주변 얘기로 중화시켜 신선하고 감정적으로 뿌듯한 느낌을 겪게 한다. 한 치의 가식도 없는 진짜 느낌이 화면을 포근히 적시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제시 앤드루스의 소설이 원작으로 작가가 각본을 썼는데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영화의 촬영감독이 한국인 정정훈이라는 사실. ‘올드보이’등 박찬욱의 단골 촬영감독인 그는 박 감독의 ‘스토커’로 할리웃에 데뷔했는데 와이드앵글로  주인공들의 관계와 심적 상황을 아름답게 포착했다. 
제목을 단 챕터와 함께 가끔 애니메이션을 사용해 주인공 나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피츠버그의 고등학교 3학년생인 그렉(토머스 맨)은 왕따를 안 당할 정도의 외톨이로 자신의 취약점을 시치미 뚝 딴 표정과 매사에 무관심한 태도로 감추고 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흑인 친구인 얼(R.J. 사일러)을 조수 삼아 온갖 고전영화들의 단편 패러디를 만드는 것. 따라서 그렉은 얼을 친구라기보다 동료 작업인으로 부른다.   
어느 날 그렉의 어머니(카니 브리튼)가 아들에게 그렉의 동급생인 레이철(올리비아 쿡)이 불치의 백혈병이 걸렸으니 찾아가 보라고 압력을 넣는다. 그렉은 레이철과 친구는 아니지만 어머니의 압력에 못 견뎌 레이철을 방문한다. 이 때부터 둘은 때로는 얼이 끼어든 만남을 이어가면서 서서히 짙은 관계를 맺게 되는데 시간이 가면서 레이철의 병세는 악화한다.
그렉은 죽어가는 레이철과의 관계를 통해 변신과 성장을 경험하게 되는데 죽어가는 레이철이 미래에 대해 안절부절 못하는 그렉에게 오히려 삶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영화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그렉이라는 민감한 소년의 성장기요 우정의 얘기로 그렉이 레이철의 악화하는 병세를 자기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어 엉뚱한 짓을 하는 모습이 우습고도 가슴 아프다. 
고전 영화광인 그렉은 이런 좌절감을 얼과 함께 옛날 영화들을 풍자하면서 달래는데 ‘브레스리스’ ‘돈 룩 나우’ ‘400 블로우즈’ 등 많은 고전영화들이 풍자된다. 둘 다 국외자들인 소년과 소녀의 마음의 만남은 결국 슬픔으로 끝나는데 마지막 장면이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슬픔을 웃음으로 감싸고 있는 순진하고 순수한 작품이다. 알폰소 고메스-레혼 감독. PG-13. Fox Searchlight. 일부 지역.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네온 신의 반항아들(Rebels of the Neon God)


대입 준비생 샤오캉이 좀도둑 아체(왼쪽)를 따라가고 있다.

“세상은 너무 권태로워” 방황하는 젊음


불만의 도시 타이베이에 사는 20대 젊은이들의 이유 없는 반항과 좌절감과 권태를 시치미 뚝 떼고 유머와 함께 비감을 섞어 그린 대만의 명장 차이 밍-리앙의 1992년도 작으로 그의 감독 데뷔작이다.
플롯보다 무드와 스타일로 인물들의 심리상태와 상호관계를 피력하고 있는 그는 카메라 동작을 가급적으로 아끼면서 검소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독특한 영화적 시각을 지닌 미니멀리스트로 선배인 허우 샤오 센(그의 회고전이 오는 20일까지 웨스트우드 해머뮤지엄 내 빌리 와일더극장에서 열린다)과 작고한 에드워드 양 감독과 함께 1990년대 대만 영화계의 뉴 웨이브를 형성한 감독이다.
절제돼 아름다운 화면으로 대만이라는 도시의 우수와 비인간성 및 질식할 것 같은 무료와 나태를 자신의 전 작품을 통해 이강셍이라는 배우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차이 감독의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물이 흥건하다는 것이다. 이 영화도 이강셍이 나오고 그의 아파트는 하수구에서 올라온 물로 작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가끔 가다가 호우가 사정없이 쏟아져 내린다.
차이 감독의 또 다른 영화로는 ‘강’ ‘구멍’ ‘굿바이, 드래곤 인’ 및 ‘나 혼자 자기 싫어’ 등이 있다. 매력적인 감독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4명의 젊은 남녀. 택시기사인 아버지(역시 차이 감독의 단골배우인 루 이칭)와 어머니와 함께 아파트에서 사는 과묵한 샤오캉(이강셍)은 대입준비 학원에 다니는데 일상이 따분해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그는 부모 몰래 학원비를 환불 받아 게임방과 롤러스케이트장에서 시간을 죽인다.
‘이유 없는 반항’의 대형 포스터가 세워진 이 게임방을 자주 들르는 또 다른 젊은이들이 공중전화 동전 통을 터는 좀도둑 아체(첸 차오중)와 그의 친구(젠 창빈). 그런데 아체는 롤러스케이트장에서 일하는 아쿠에이(왕 유웬)와 사랑도 없는 로맨스 관계를 맺고 있다. 샤오캉과 아체는 둘 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닌다.
샤오캉은 이상하게 아체에게 집착하게 되는데 어느 날 아체가 샤오캉 아버지의 택시의 왼쪽 거울을 파괴하면서 이 집착은 더욱 강해져 아체를 스토킹하다시피 한다. 플롯이 전무하다시피 한 영화로 영화는 섹스와 파괴와 폭력으로 끝나는데 그러고도 무료하기 짝이 없다.
완전히 무표정한 이강셍이 지루하고 불안하고 또 반사회적이면서도 막연히 무언가를 찾는 도시 젊은이의 내면 묘사를 거의 코믹할 정도로 절실하게 해낸다. 보고 있자니 그의 무료와 권태에 전염이 돼 좀이 쑤신다. 성인용. 18일까지 뉴아트(310-473-8530).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빨간 구두 아가씨’




하이힐을 신은 여자의 쪽 뻗은 맨살 다리 뒷모습은 섹시하다. 2차 대전 때 전장의 미 G.I.들이 귀엽게 생긴 할리웃 수퍼스타 베티 그레이블을 넘버 원 핀업 걸로 뽑은 것도 그레이블의 위로 쪽 솟은 아름다운 다리 때문이었다.
2차 대전 영화를 보면 G.I.들이 전투에 나가기 전 등과 다리가 훤히 드러난 수영복 차림에 하이힐을 신은 그레이블이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사진)에 손키스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사진은 G.I.들의 부적으로 그레이블의 다리를 ‘100만달러짜리 다리’라고 불렀었다.
여자의 예쁜 다리는 강력한 성적 무기이기도 한데 영화에서도 이 때문에 남자들이 여자에게 반한 경우가 더러 있다. ‘종착역’의 몬고메리 클리프트와 ‘여정’의 로사노 브라지 그리고 ‘이중배상’의 프레드 맥머리는 각기 제니퍼 존스와 캐서린 헵번 그리고 바바라 스탠윅의 다리에 첫 시선이 끌려 결국은 이들을 사랑하게 된다. 발가락이 제일 예쁜 여자는 14세짜리 팜므 파탈 롤리타이고.
이처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의 다리는 아무래도 단화보다 하이힐을 신었을 때가 훨씬 더 섹스어필하다고 보겠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 의하면 남성이 단화보다 하이힐을 신은 여성에게 호의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이힐을 신은 여성이 장갑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남성이 주워 줄 확률이 단화 여성보다 50%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를 한 과학자들은 “여성의 구두 높이는 남성의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고 결론지었다.
남일해가 부른 ‘빨간 구두 아가씨’의 아가씨도 하이힐을 신었음에 분명하다. “솔 솔 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똑 똑 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단화가 “똑 똑 똑” 소리를 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지난 5월에 열린 칸영화제 때 이 하이힐 소동이 일어나 ‘플래트게이트’(Flatgate-단화 게이트)라는 가십을 나았었다. 영화 ‘캐롤’ 프리미어 때 레드 카펫의 가드가 단화를 신은 여자들을 카펫 밖으로 내쫓아 세계적인 화제가 됐었다. 이에 영화제에 참석한 할리웃 스타 에밀리 블런트는 기자회견 때 “난 운동화가 더 좋다. 솔직히 말해 모든 여자들은 단화를 신어야 한다”고 칸 측 조치에 항의하기도 했다.
‘패션=고통’이라는데도 여자들이 하이힐을 선호하는 까닭은 그것이 단화보다 더 섹시하고 멋  있으며 또 힘과 자신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패션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도 “여자들에게 안성맞춤의 구두를 주어 봐요. 그러면 세계라도 정복할 테니까요”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구두의 굽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섹시해지는 것인지 그 높이가 무려 5인치에 이르는 스틸레토힐도 있다. ‘스틸레토’(stiletto)는 단검을 뜻하는데 과연 이런 하이힐은 남성을 무력화할 치명적 매력을 지녔다고 봐도 좋겠다. 타인에 의한 인식이 전부이다시피 한 여배우들의 경우 불편해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이힐을 신는 경우가 많다. 나는 매년 1월에 열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 때 레드 카펫에서 일을 하면서 입장하는 여배우들을 감상하는데 단화 신은 스타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여배우들은 할 수 없이 하이힐을 신다가도 일단 레드 카펫을 벗어나면 하이힐을 벗어 내동댕이치는 경우가 있다. 하이힐 증오파 중 으뜸인 영국 배우 엠마 탐슨은 2014년 1월 골든 글로브 시상식 때 전 세계 팬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하이힐을 벗어 내동댕이쳐 큰 화제가 됐었다.
그녀는 전 세계로 TV 중계되는 이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석했는데 무대에 오를 때 왼 손에 안이 빨간색인 하이힐을 들고 맨발로 나타났다. 그리고 무대에서 “이 빨간 색은 내 피에요”라고 말한 뒤 하이힐을 뒤로 내던져버렸다. 용감한 여자다. 탐슨은 요즘도 종종 샌들을 신고 레드 카펫을 밟는다.
키다리 니콜 키드만도 하이힐 팬이 못 된다. 얼마 전 그녀와의 인터뷰 때였는데 맨발로 인터뷰에 응해 나를 깜짝 놀라게 했었다. 자기보다 키가 작은 탐 크루즈와 이혼한 뒤 “이젠 하이힐 신어도 되겠네”라고 말했던 키드만도 하이힐이 주는 고통이 심했었던 것 같다.
하이힐이 단화보다 더 섹시할 줄은 몰라도 단화를 신어도 멋있는 배우들도 많다. 셰일린 우들리, 매기 질렌할, 크리스튼 스튜어트, 에밀리 블런트. 옛날 스타들 중에서 단화를 신어 더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배우들로는 오드리 헵번과 잉그릿 버그만이 있다.              
여자들이 발병이 나고 발가락이 흉하게 돼도 제니퍼 로렌스가 ‘악마의 구두’라고 말한 하이힐을 신는 것은 그들의 화장처럼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려니. 남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반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서 라고는 하나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주체를 못해 뒤뚱거리면서 오리걸음을 걷는 여자들을 보면 추하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럴 때면 낸시 시내트라가 부른 ‘디즈 부츠 아 메이드 포 워킨’이라도 불러주고 싶은 심정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