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모비-딕’




우리는 모두 자기 안의 악마와 싸워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자기 구제일진대 이 구제는 자신 속의 악마와의 싸움이 있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포경선 피쿼드의 에이해브 선장과 백경 모비-딕과의 치열한 대결도 에이해브의 자기 구제를 위한 영혼의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허만 멜빌이 쓴 미국의 성경이요 신화라고 불리는 ‘모비-딕’(Moby-Dick)의 영문판을 대학생 때 읽기 시작했다가 분량이 너무 방대하고 또 내용이 형이상학적이요 어려워 중도에 책을 접고 말았다. 며칠 전 필라델피아에서 ‘록키’의 부산물인 권투영화 ‘크리드’(Creed·26일 개봉)에 나오는 실베스터 스탤론을 인터뷰했는데 그도 ‘모비-딕’을 다 읽는데 장구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비-딕’의 얘기는 중학생 때 경남극장에서 본 ‘백경’(1956)을 통해서다. 존 휴스턴이 감독하고 그레고리 펙이 에이해브로 나온 이 영화는 연출과 연기 등이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흥미진진한 모험영화다. 펙이 고래 뼈로 만든 다리를 짚고 다니면서 자기 다리를 물어 뜯어버린 모비-딕에게 복수하려고 광인이 되다시피 해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이 극적이다. 그의 이런 모습은 후에 ‘조스’에서 식인상어 조스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퀸트(로버트 쇼)를 생각나게 한다.
‘모비-딕’은 또 인간의 집념이 불러오는 재앙에 대한 경고문이기도 하다. 에이해브는 자신의 집념을 풀기 위해선 신에게마저 대어드는데 문학 비평가들은 모비-딕을 신이요 자연이며 또 운명이라고도 해석한다.
에이해브의 이런 반-신적 행동과 언사는 지난 7일 본 LA 오페라가 공연한 ‘모비-딕’(사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독재자 에이해브는 자기가 종들처럼 부리는 선원들 앞에서 “그것이 날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때려 부수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에이해브는 자기가 마치 신처럼 행세하는 선동가로 부질 없는 허영이나(젊은 선원 그린혼이 이렇게 노래한다) 다름없는 집념 때문에 결국 자신을 비롯한 선원들과 배에 죽음과 파괴를 불러 오는데 유일한 생존자는 순수와 순진을 상징하는 그린혼(소설에서는 이쉬매엘). ‘모비-딕’은 이처럼 다분히 신앙적 색채도 품고 있다.
신에게 거역하면서 백경과 싸우다 죽은 에이해브를 생각하면 신의 지시를 어긴 탓으로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회개하고 구출된 요나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이다.
오페라 ‘데드 맨 워킹’을 작곡한 제이크 헤기가 작곡하고 진 쉬어가 대사를 쓴 2막짜리 오페라(공연시간 3시간) ‘모비-딕’은 현대음악치고는 멜로디가 상당히 다채롭다. 특히 바다의 정령들의 맑은 울음소리 같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시작해 바다의 거센 물결과 선원들과 백경과의 사투를 연상시키는 격렬한 리듬으로 이어지는 서곡이 매우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음악이 장엄하고 강렬하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음들의 씨줄과 날줄들이 절묘하게 직조돼 지루한 줄 모르고 흥미 있게 관람했다.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LA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를 들으면서 곡의 바그너풍을 느꼈다.
에이해브는 테너 제이 헌트 모리스가 불렀는데 고음일색이었다. 에이해브 역을 바리톤이 불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선적인 에이해브에 맞선 양심적인 1등 항해사 스타벅은 바리톤 모간 스미스, 포경선을 처음 탄 그린혼은 테너 조슈아 게레로 그리고 나머지 선원들인 남태평양 태생의 신령한 혼을 지닌 퀴킥은 베이스 바리톤 무사 엔쿤그와나, 에이해브의 시종 핍은 소프라노 재클린 애콜스(오페라에서 유일한 여자)가 각기 맡아 잘 노래했는데 특히 스미스의 노래가 듣기 좋았다.
2010년 4월 달라스 오페라가 초연한 ‘모비-딕’은 음악뿐 아니라 “백금을 바다로부터 거두리라”를 비롯해  대사도 매우 시적이고 심오하다. 이와 함께 뛰어난 것은 큰 돛대가 무대를 군림한 검소하면서도 튼튼한 세트와 밤하늘에 뜬 별들과 대양을 질주하는 피쿼드 그리고 거칠게 몸을 뒤트는 파도 등을 스크린에 투사한 영상처리. 입체감이 압도적이다. 모비-딕은 맨 끝에 거대한 눈이 노려보는 머리가 에이해브를  향해 달려들면서 그 위용을 나타낸다.
소설은 혼자 살아남은 이쉬매엘(그린혼)이 퀴켁이 생전에 자기에게 부탁해 만든 관을 타고 포류하면서 “나를 이쉬매엘이라고 부르세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오페라는 이 말로 끝이 난다.          
한편 멜빌의 ‘모비-딕’의 모델이 된 실제사건을 나사니엘 필브릭이 소설로 쓴 ‘바다의 심장 속에서’(In the Heart of the Sea)를 원전으로 론 하워드가 감독하고 크리스 헴스워드가 주연한 동명영화가 오는 12월11일에 개봉된다. 이 소설의 제목은 오페라에서 노래로 불려진다. 오페라 ‘모비-딕’은 19일, 22일, 28일 3차례 공연이 남아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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