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5월 9일 화요일

연인들(The Lovers)


대화 불통 부부 메리와 마이클(오른쪽)이 소파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소통 부재로 나태하고 무기력해진 중년의 부부


인간간의 관계란 끊임없이 흐르지 않으면 고여 부패하게 마련으로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소통 부재와 감정의 소진으로 인한 나태하고 무기력해진 중년의 부부관계에 관한 희비극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미 사이가 현격히 벌어진 부부가 겪어야하는 갈등과 체념과 함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두 사람의 심정과 탈선을 때로 유머를 섞어가면서 사실적이요 자세하게 묘사했다.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려온다.
오래간만에 왕년의 빅스타 데브라 윙거(‘어반 카우보이’ ‘사관과 신사’)가 나와 침착하고 담담하면서도 야무지게 관계의 위기를 맞고 갈팡질팡하는 아내의 모습을 절실하게 보여준다. 61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답다.
캘리포니아 주 산타 클라리타. 영화는 처음에 평범한 회사원인 마이클(트레이시 레츠)이 침대에 쓰러져 우는 애인 루시(멜로라 월터즈)를 서서 내려다보면서 “제발 울지 마, 루시”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마이클의 얼굴 표정이 약간 경멸에 차 있다. 루시는 발레 선생.
마이클의 아내 메리(윙거)도 회사원으로 그 역시 작가인 애인 로버트(에이단 길렌)을 두고 있다. 메리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로버트를 찾아가 섹스를 즐긴다. 영화는 육체적 근접을 자주 보여주면서 정신과 감정적 거리감을 대체하다시피하고 있다.
마이클과 메리가 집에서 나누는 대화는 고작해야 “치약이 떨어졌네”라는 것 정도다. 둘은 함께 침대에 누워 자면서도 대화 불통으로 툭하면 회사에서 늦게 일한다고 핑계를 대고 서로 애인과 시간을 보낸다. 둘은 서로 상대방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은데도 이를 따지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이클과 메리가 아직도 서로를 육체적으로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둘은 매일 같이 섹스를 한다. 마치 불이 다 까진 둘의 관계를 섹스로 되 살려나 보겠다는 듯이 둘은 결사적으로 섹스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과거에 서로가 서로를 속였듯이 마이클과 메리는 각기 자신들의 애인에게 거짓말을 한다. 루시와 로버트는 각기 마이클과 메리를 깊이 사랑해 함께 살자고 애걸복걸하는데 과연 마이클과 메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매우 심각한 내용을 큰 소리 내지 않고 과장 없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울적하다. 마이클과 메리가 리빙룸 소파에 앉아 오래간만에 같이 와인을 마시면서도 대화를 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부부관계란 끊임없는 타협과 양보를 행사해야하는 모험인데 마이클과 메리를 보면서 과연 저들이 양보와 타협을 한다고 해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아자젤 제이캅스 감독(각본 겸). 성인용. A42. 일부극장.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파닉(Panique)


이르씨(왼쪽)는 요부 알리스를 깊이사랑한다.

프랑스 명장 쥘리앙 뒤비비에의 심리 범죄 스릴러


‘페페 르 모코’ ‘무도회의 수첩’ ‘파리의 하늘 밑’ 그리고 ‘나의 청춘 마리안’ 등과 같은 명화를 만든 프랑스의 명장  쥘리앙 뒤비비에의 심리 범죄 스릴러 ‘파닉’(1947)은 고독과 소외에 관한 영화이자 관음증과 우매한 집단의 떼거리 근성을 파헤친 걸작이다.
이 필름 느와르의 원작은 벨기에 태생의 소설가 조르지 시메농의 ‘이르씨의 약혼’이 원작. ‘시계 만드는 사람’과 ‘베티’ 등 생애 500여 편의 장?단편 소설을 쓴 시메농의 소설은 300여편이 영화와 TV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의 주연 배우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명우 미셸 시몽. 그는 ‘익사 직전에 구원 받은 부뒤’와 ‘암캐’ 및 버트 랜카스터가 주연한 미국영화 ‘기차’ 등에 나온 연기파로 이 영화에서도 중후한 연기를 보여준다.
파리 교외의 작은 마을에 사는 과묵한 이르씨(시몽)는 인간 기피증자로 동네 사람들도 자기들과 한 통속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르씨를 눈에 가시처럼 취급한다. 이 마을에 막 교도소에서 출감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알리스(비비안 로망스-초점을 잃은 듯한 눈 때문에 더 고혹적이다)가 범죄자 애인 알프레드(폴 베르나르)를 찾아오면서 알리스는 이르씨의 집념의 대상이 된다.
알리스는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는 냉정하고 간교한 알프레드의 강도사건의 누명을 대신 뒤집어쓰고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여인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은 알프레드.
알리스가 이르씨의 아파트 길 건너 아파트에 입주하고 이르씨는 이 여자를 창밖으로 훔쳐보면서 동경과 사랑의 질병을 앓는다. 이르씨의 관음증은 영국의 명장 마이클 파월의 스릴러 ‘피핑 탐’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이르씨가 자기를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매정한 알리스는 오히려 이를 즐기면서 알프레드와 함께 이르씨의 자기에 대한 집념을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이르씨가 알프레드의 범행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알리스와 알프레드는 이르씨를 범인으로 만들기로 계획을 짠다. 알리스와 알프레드는 이르씨가 알리스를 사랑하는 한 결코 증거를 폭로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영화에서 매우 감정적이요 가슴 싸하니 아름다운 장면은 이르씨가 자기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하는 알리스가 자기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알프레드를 버리고 자기와 살자고 구애하는 장면.
이르씨의 구애를 거짓으로 받아들인 알리스와  알프레드는 그들의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르씨를 싫어하는 마을 주민들의 집단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이르씨를 집단 테러의 희생양으로 만든다. 이르씨가 주민들의 폭력을 피해 지붕 위로 도망가는 장면이 아찔하다. 그리고 이르씨는 죽어서 복수를 한다.
고독하고 과격한 남자를 둘러싸고 모여드는 의혹의 구름이 거의 초현실적인 폭력행위의 비바람을 몰고 오는 가학적 쾌감을 지닌 집단 히스테리에 관한 작품이다. 사실주의와 필름 느와르 장르를 잘 혼합한 명작으로 전쟁 중의 프랑스 사람들의 나치에 대한 협력을 은유한 작품이기도 한데 이와 함께 잔인한 낭설과 공포 그리고 원한의 근저를 파헤치고 있다.  
시몽과 함께 로망스와 베르나르의 연기도 좋은데 이 밖에도 아파트 주인과 정육점 주인을 비롯해 가지각색의 주민들로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필름 느와르의 전통을 살린 그림자와 명암을 잘 이용한 촬영도 훌륭하다.
쓴 맛나고 미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이 영화는 지난 1989년에 ‘이르씨’(Monsieur Hire)로 리메이크 됐다. 이르씨 역에는 쥐처럼 생긴 미셸 블랑이 알리스 역에는 산드린 본네르가 각기 나와 좋은 연기와 함께 몸에서 소름이 돋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긴장감과 서스펜스 그리고 심장을 도려 내는듯한 집념의 통증이 느껴지는 명작이다.
‘파닉’은 뒤비비에의 전후 첫 작품으로 그의 가장 어둡고 개인적인 영화로 알려졌다. 1930년대 훌륭한 영화를 양산한 뒤비비에는 그래암 그린과 오손 웰즈 그리고 잉그마르 베리만 및 장 르느와르 같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명장 르느와르는 “만약에 내가 건축가로 영화의 기념비를 만든다면 기념비 입구에 쥘리앙 뒤비비에의 동상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미셀 시몽과 장 르느와르는 평생 친구로 둘이 함께 ‘암캐’ 등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프랑스의 국민배우인 시몽은 르느와르 외에도 장 비고(아탈랑트)와 마르셀 카르네(안개 낀 부두) 및 르네 클레어(미녀와 악마) 등 여러 명의 프랑스 명장들의 작품에 출연했다.
디지털로 새로 복원된 ‘파닉’이 5일부터 11일까지 로열극장(11523 산타모니카)에서 상영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푸른 다뉴브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다와 페스트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다뉴브(헝가리어로는 두나)는 저녁 황금 햇살을 받으며 서두르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월츠를 물결치고 있었다. 해 진 후 다뉴브 위를 만보하는 유람선에 앉아 불빛에 안긴 위풍당당한 의사당(사진)을 비롯해 강 양안에 의젓이 서 있는 옛 건물들을 보고 있자니 슈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의 월츠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난 달 영화와 TV시리즈 세트방문과 스타 인터뷰 차 부다페스트와 런던에 다녀왔다. 헝가리 공항이름은 이 나라가 낳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의 이름을 딴 부다페스트 프란츠 리스트 국제공항인데 국제공항치곤 초라하다. 한국인 관광객들로 붐빈다.
부다페스트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마치 고전을 읽듯 볼수록 도시의 시간을 잊어버린 자태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더 깨닫게 되는듯하다. 이 곳에서 영화촬영이 자주 있는 이유도 아름답고 품위 있으며 또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인건비가 싼 것도 그 이유 중 하나. 도시 전체가 하나의 영화 세트라고 해도 되겠다.
근처에서 창녀들이 호객을 하는 페스트의 숙소인 포 시즌스 호텔 앞의 사자머리가 지키고 있는 150년 된 늠름한 체인브리지가 나라의 한 때 강건하고 기품 있던 내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금은 줄어들었지만 헝가리는 과거 하이든을 전속 음악가로 고용해 먹여 살렸던 귀족 에스터하지의 나라요 중부유럽을 군림했던 막강한 합스부르크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의 파트너였다.
강 건너 이 다리 건너편 부다의 언덕 꼭대기 캐슬 힐에 올라가서 내려다 본 부다페스트는 다뉴브의 진주라는 말답게 고상하고 아름답다. TV시리즈 ‘에일리어니스트’(The Alienist)의 배우들과 함께 캐슬 힐의 피셔멘즈 배스티언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물론 굴라쉬가 나왔다. 굴라쉬는 한국의 찌개 같아 해외여행 때마다 서양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고생하는 내겐 꿀맛이다.
로빈 후드의 젊은 시절을 그린 ‘로빈 후드:오리진’(Robin Hood:Origins)의 세트를 찾아간 날은 춥고 바람이 거셌다. 이 때문에 나는 헝가리감기에 걸려 귀국 후 며칠을 고생했다. 로빈 후드(태론 에저턴)가 전쟁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애인 매리안(이브 휴선)과 작별을 하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의상과 세트를 보니 현대적 터치다. 로빈 후드의 동료 리틀 존으로는 제이미 팍스가 그리고 로빈 후드의 천적인 셰리프로는 각기 벤 멘델손이 나온다.    
부다페스트 거리를 막고 찍고 있는 ‘에일리어니스트’는 살인 미스터리 스릴러. 19세기 말 뉴욕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푸는 경찰과 심리학자(대니얼 브륄)의 얘기로 제목은 심리학자를 나타낸 것. 루크 에반스와 다코다 패닝이 공연하는 이 시리즈는 올 해 말 TNT를 통해 방영된다. 그런데 촬영 현장을 비롯해 주위 건물들이 모두 옛날 영화를 찍으려고 세운 건물들처럼 핏기가 없다. 부다페스트의 건물들이 다 옛날 그대로 잘 보존된 것은 반드시 오래된 것을 잘 간직하려는 의도뿐만이 아니라 돈이 없어 보수를 못해 그렇다는 얘기를 들었다.
부다페스트를 떠나 런던에 왔다. 난 런던을 매우 좋아한다. 도시가 아늑한데 사람들이 떼를 지어 길거리에서도 맥주를 마시는 펍들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서 찍고 있는 네트플릭스의 시리즈 ‘크라운’(Crown)은 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의 젊은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얘기한다. 작년에 방영된 시즌1은 골든 글로브 TV드라마 부문과 엘리자베스 역의 클레어 포이가 각기 작품상과 주연상을 받았다.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배우들과의 인터뷰 후 엘리자베스와 그의 남편 필립(맷 스미스)이 궁정에 마련한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 촬영현장엘 들렀다. 잘 차려 입은 여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지체 높은 귀빈들이 원을 그리며 월츠를 춘다. 잠시 환상적이요 로맨틱한 시간여행을 하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다뉴브 위에서 이어 다시 월츠의 감미로운 율동에 발장단을 쳤다.
마침 화창한 날씨에 시간이 나 런던에 오면 의식처럼 치루는 템즈의 워털루 브리지에로의 행보에 나섰다. 채링 크로스를 거쳐 워털루 브리지와 얼마 전 테러가 일어난 웨스트민스터 브리지를 지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꽃들이 놓인 광장에 섰다.
떠나기 전날 매기 존스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 식당은 지난 1960년대 엘리자베스여왕의 동생 마가렛공주가 궁궐을 빠져나와 사진작가 애인 안토니 암스트롱-존스와 데이트를 하던 곳. 마가렛은 예약 시 ‘매기 존스’라는 가명을 써 주인이 그 후 이름을 매기 존스로 바꿨다. 평범한 식당에는 요즘에도 왕족들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원래 영국음식이 맛이 없다곤 하지만 이 집 음식도 무미건조하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