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2월 18일 수요일

킹스맨: 시크릿 서비스 (Kingsman: The Secret Service)


신사 스파이 갤라하드(오른쪽)가 수제자 엑시를 스파이 본부로 데려가고 있다.

‘유혈 코믹’ 난무하는 액션 스파이 스릴러


말더듬이 조지 6세 영국 왕이 치명적인 신사 스파이가 되어 스크린에 돌아 왔다. 전형적인 영국 신사 스타일의 콜린 퍼스가 이렇게 사납게 액션을 구사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만화가 원전인 영화로(그래서 얘기가 터무니가 없다) 감독 매튜 번은 만화 같으면서도 폭력이 난무하는 ‘킥-애스’를 만든 사람으로 이 영화는 ‘킥-애스’와 풍자판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짬뽕한 코믹 터치의 난장판 액션 스파이 스릴러다. 
어리석은 재미가 있긴 한데 유혈폭력이 쓸데없이 잔인하고 액션과 내용을 너무 과다하게 늘어놓아 중간쯤 지나가면서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관객보다 감독이 만들면서 더 즐긴 티가 나는데 본드 영화뿐 아니라 아서 왕의 캐멜롯과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마이 페어 레이디’로 만들어졌다)의 내용까지 빌려다 썼다. 
1997년 영국의 비밀첩보부 요원들이 중동(요즘 어디 다른 곳이 있겠는가)에서 작전 중 작전이 잘못되면서 랜슬롯이 동료 해리 하트(일명 갤라하드-콜린 퍼스)의 생명을 구하다가 사망한다. 귀국 후 갤라하드는 랜슬롯의 집에 찾아가 미망인을 위로하고 그의 어린 아들 엑시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메달을 준다. 그리고 언제고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를 걸라고 일러준다.
그로부터 17년 후. 지구를 구하기 위해선 인구를 줄여야 한다고 믿는 미국의 인터넷 백만장자 사이코 리치몬드 발렌타인(야구 모자를 쓴 새뮤얼 L. 잭슨이 과장된 코믹한 연기를 잘 한다)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영국 첩보부에 비상이 걸린다. 발렌타인에게는 자기 애인을 사살한 남아공의 육상선수 오스카 피스토리어스처럼 두 다리가 금속제 인조다리인 애인이자 비서인 가젤(소피아 부텔라)이 있다. 섹시한 가젤은 살인광으로 날카로운 금속제 발로 사람을 두 쪽으로 갈라 죽인다. 
한편 학교도 중퇴하고 날건달이 된 엑시(태론 에저턴)가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남의 차를 훔쳐 타고 거리를 질주하다가 경찰에 잡혀 영창엘 들어간다. 이에 엑시는 메달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엑시를 영창에서 빼낸 갤라하드는 엑시를 스파이로 키우기로 하고 그를 새빌로(런던의 유명한 양복점 거리로 이 때문에 옛날에 한국에서는 신사복을 세비루라고 불렀다) 에 있는 양복점으로 위장한 본부로 데려간다. 
본부장은 아서(마이클 케인-본드 시리즈의 M)이고 아서의 참모는 멀린(마크 스트롱-본드 시리즈의 Q). 이어 멀린은 엑시와 함께 7명의 젊은 남녀 스파이 후보들의 훈련에 들어간다. 엑시를 뺀 다른 후보들은 다 엑시와 계급이 다른 집 자녀들이어서 엑시는 왕따를 당한다. 훈련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스파이가 된다. 그런데 속이 여린 엑시가 마지막 판에 가서 아서의 지시를 수행치 못하는 바람에 퇴교 당한다.
우산과 라이터 모양의 온갖 신무기가 맹활약을 하면서 중간 중간 피바람을 일으키는 액션이 작렬하는데 그 중에서도 그야말로 눈알이 360도로 돌아가는 장면은 미국의 켄터키주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다니는 교회 안에서의 긴 액션 장면. 갤라하드 혼자서 100여명의 신도들을 상대하는데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굉장히 잔인하고 인정사정없이 유혈 폭력적이지만 액션 안무 하나 일품이다. “아이구 이젠 그만 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신사 퍼스와 불량배 에저턴의 콤비가 좋은데 퍼스의 연기도 좋지만 뛰어나게 돋보이는 것은 에저턴의 연기. 화면에서 연기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느낄 정도로 다변한 연기다. 대성할 배우다. R. Fox.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겟, 비비안 암살렘의 재판 (Gett, the Trial of Viviane Amsalem)


비비안(왼쪽서 두 번째)이 남편 옆에서 재판장에게 이혼승락을 간청하고 있다.

“제발 이혼해주세요”5년간의 법정투쟁


중세에나 있을 법한 기막힌 얘기로 남편의 동의 없이는 이혼을 할 수 없는 이스라엘 여자가 이혼을 하기 위해 투쟁한 5년간의 법정 드라마다. 전 내용이 법정과 대기실에서 진행되고 말이 많아 대중용 오락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믿기 힘든 이스라엘 율법에 따른 이혼에 관한 희한한 내용과 뛰어난 연기 그리고 긴장감 가득한 연출과 클로스업을 많이 쓴 촬영 등 여러 모로 훌륭한 이스라엘 영화다. ‘겟’은 이혼장을 말한다. 
법정에서 일어나는 공방전이 마치 실제로 법정에서 있는 실화를 보는 듯 사실감 있는 영화로 매우 검소하고 꾸밈이 없는데 자칫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얘기를 유머와 연민의 정으로 다독여주고 있다. 매우 밀도 짙고 촘촘하게 짜여진 풍성한 드라마로 남매 감독 쉴롬과 로닛 엘카베츠의 장인적 연출 솜씨가 돋보인다. 
비비안 암살렘(감독인 로닛 엘카베츠)과 그의 변호사 카멜(메나셰 노이)은 랍비 솔로몬(엘리 고른스타인)이 재판장인 3인 판사 주재 하의 이스라엘 율법 법정에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남편 엘리샤(시몬 압카리안)로부터 이혼 동의를 얻어내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황소고집인 엘리샤는 자기 형이자 변호사인 교활한 쉬몬(사손 가바이)의 지시에 따라 법정에 출정조차 하지 않으며 지연작전을 쓰면서 비비안이 지쳐 소송을 취하하도록 나름대로 온갖 수단을 쓴다. 엘리샤는 화가 난 재판장이 출정명령을 어기면 위법 처리하겠다는 위협을 받고서야 출정한다. 
영화는 자막으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데 이러기를 5년이 지난다. 그런데 비비안이 왜 이혼을 요구하는지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사연을 알게 된다. 비비안은 사정하고 호소하고 울고불고 화를 내고 또 때로는 미소작전을 쓰면서 재판장에게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나 율법에 어긋나 허락이 안 된다. 나중엔 재판장마저 지쳐 재판을 기피한다.
그런데 아내를 사랑하는 엘리샤는 아내의 간청에 이혼을 허락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오리발을 내밀어 비비안의 속뿐만 아니라 관객의 속도 태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바짝 조여드는 긴장감에 빠지게 된다. 
뛰어난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특히 눈이 큰 로닛 엘카베츠의 섬세하고 민감한 표정 변화가 큰 칭찬감인데 그는 이런 표정의 변화로 자신의 감정과 상대방에 대한 느낌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일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인용. Music Box.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덕수와 나




‘국제시장’의 윤덕수는 나보다 나이가 너댓 살 위이긴 하지만 그의 얘기는 나의 얘기다. 그래서 영화가 내겐 더욱 절실히 느껴졌다.
나의 아버지도 덕수의 아버지처럼 함경북도 출신인데 9.28 서울 수복 때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를 하면서 아버지를 납치해 가는 바람에 나도 덕수처럼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가족도 졸지에 생과부가 된 어머니와 함께 덕수네처럼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가 셋방살이를 하면서 고생깨나 했다. 나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다행히 우리는 난리 통에도 헤어지진 않았다.  
나는 덕수처럼 독일이나 월남(군시절 자칫했으면 월남전에 파병됐을 뻔했지만)에는 안 갔지만 그가 산 한 많고 피눈물 나는 인생은 나도 경험해 잘 알고 있다. 아니 덕수의 인생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내 또래 대한민국의 모든 이산가족의 인생이다.
영화에도 나왔지만 부산 피난시절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달리는 군용차에 탄 양키 군인들이 던져주던 허쉬바 초컬릿과 리글리검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허쉬바를 먹을 때면 꼬마 때 맛보던 입맛이 되살아나는 것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달콤한 맛이 변함이 없으니 미제가 좋긴 좋네.
우리 고교 선배 현인이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하면서 노래 부른 국제시장이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라며 흥남철수 때 헤어진 여동생 금순이(영화에선 막순이)를 그리워하던 영도다리도 아직까지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나의 피난시절의 기념물들이다.
난 특히 국제시장에서 올려다 보이는 용두산 꼭대기에서 영화에서처럼 텐트를 친 초등학교엘 다니며 공부를 한데다가 어머니가 한때 국제시장 인근의 남포동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이 동네에 대해선 남달리 애착이 간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부산영화제에 갔을 때 국제시장과 남포동과 광복동 그리고 용두산과 자갈치시장을 헤집고 다닌 것도 꼬마 때의 과거가 내 심장을 찌르며 재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국제시장에서 둘이 함께 사 먹은 노천가게 호떡이 꿀맛이었다.
이러니 내가 ‘국제시장’(사진)을 보면서 추억에 흥분하고 감상에 젖으며 눈물을 안 흘릴 재간이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모두들 운다는 소리를 들어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하고 갔는데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특히 여의도 광장에서 벌어진 이산가족 찾기 장면에선 그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렀는데 난 구태여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했다. 아마도 내가 헤어진 아버지가 그리워졌던가 보다. 우리 아버진 참 멋쟁이셨다. 그 옛날에 오하이오 주립대를 나오셨는데 난 지금도 내 방에 있는 중절모를 쓰고 짧은 바지에 반소매 상의를 입고 흰 양말에 백구두를 신은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장충단 공원에서 찍은 낡은 사진을 볼 때마다 그와 함께 보낸 짧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곤 한다.
덕수의 삶은 대한민국 역사의 축소도다. 남자들은 독일에 광부로 그리고 여자들은 간호사로 가 외화벌이를 했고 그 뒤로는 베트남과 중동에 가 달러벌이를 했다. 나는 한국의 한국일보 기자시절 김포공항엘 출입했는데 그 때 중동에서 떼를 지어 귀국하던 근로자들이 모두 하나씩 대형 외제 붐박스를 손에 들고 있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덕수는 부산에서 어렸을 때 영화를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부산시절 무성영화부터 본 뒤로 영화광이 되고 말았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나는 영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사는 것같다.
영화를 보니 대양극장에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서툴게 그린 ‘로마의 휴일’ 간판이 붙었는데 내 단골극장은 범일동 집 동네 근처의 삼일극장이었다.
지지리도 못살던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모두 덕수들의 탓이다. 대한민국이 1960년대 중반에 가서야 보릿고개를 넘긴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발전은 정말로 기적이다. 그 기적이 ‘아버지’ 덕수들의 피와 땀으로 맺어진 것일진대 그들은 찬양받을 만 하다. 그래서 영화의 영어제목도 ‘나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송가’다.
영화 끝에 가서 덕수는 끝내 만나지 못한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이 고생을 자기 자식들 때가 아니라 자기가 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로 힘들었거든예”라고 고백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참으로 힘들고 슬픈 역사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덕수의 말처럼 아버지들은 자식 대신 고생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덕수들의 모든 자식들이 사서 고생할 것까지는 없지만 자신들의 과거는 간직하고 있었으면 하고 바랄뿐이다. 이 영화를 놓고 이념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공연한 일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