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3월 23일 월요일

‘신데렐라’ 릴리 제임스




“조연 오디션서 덜컥 여주인공… 마법 걸린 듯”

화 났을 때 날 웃게 만드는 사람이 나의 멋진 왕자
댄스는 유튜브 보며 연습… 무도회에 가본 적 없어


지난 13일 개봉, 주말 사흘간 7,000만여달러의 수입을 올리면서 흥행순위 1위를 차지한 화려하고 환상적인‘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 역을 한 영국의 신성 릴리 제임스(25)와의 인터뷰가 최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긴 금발의 소녀 같은 모습의 제임스는 PBS가 방영하는 영국의 인기 드라마 시리즈‘다운턴 애비’에 나오는데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와의 공식 인터뷰가 처음이어서인지 인터뷰 내내 손가락을 깨물고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수줍어했다. 그러나 매우 명랑했는데 액센트가 있는 약간 굵은 음성으로 솔직하고 편안하게 답변을 하면서 다소 흥분한 듯이 우리들에게“정말 고마워요”라고 인사를 했다. 신데렐라처럼 고운 색싯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디션 과정과 함께 세트에 섰을 때의 소감은 어땠는가.
“원래 나는 신데렐라의 계모의 두 딸 중 하나인 아나스타시아 역의 오디션에 참가했는데 그 때 ‘다운턴 애비’에 나올 때여서 금발이었다. 이런 나를 본 감독이 금발이니 이왕이면 엘라(신데렐라의 본명) 역 대사를 읽어 보라고 해서 달랑 15분만 연습하고 대사를 읽었다. 그 뒤로 3개월간에 걸친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야 신데렐라 역을 땄다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마법과 같은 경험으로 내가 진짜로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곤 역을 제대로 해낼 수가 있을까 하고 겁에 질리고 또 압박감에 시달렸다.” 

-당신은 용감하고 우스운가.
“그러길 바란다. 힘과 용기와 친절을 지닌 엘라 역을 하면서 그처럼 되고자 했다. 그런 것들은 아주 단순한 메시지이면서 아울러 심오한 것들이다.” 

-당신과 패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신데렐라 역을 맡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다. 난 원래 오렌지색과 밝은 색을 좋아하는데 내 의 의상 담당자가 기자회견을 위한 여러 벌의 엷은 색깔의 드레스를 만들어줘 입은 뒤로 내 자신이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자신감을 느끼게 되더라. 그러나 난 평소엔 찢어진 진 바지에 티셔츠를 입는다.”

-신데렐라는 못된 계모와 그의 두 딸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는데 당신도 이들처럼 못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으며 또 질투의 대상이 된 적이 있는가.
“질투를 받아 본 적이 있다. 특히 이 직업에선 그런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럴 때마다 옆으로 치워 놓으려고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질투를 무시하려면 두꺼운 피부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배우란 엷은 피부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러자면 삶의 태도를 변질시켜야 한다는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못되고 민한 사람들에게는 신데렐라처럼 용기와 친절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동화 속의 왕자들은 대부분 약간 멍청한 사람들이기가 십상인데 당신의 왕자는 어땠는가.
“난 멍청한 왕자를 원치 않는다. 난 우습고 영리한 왕자가 좋다. 내가 이 영화를 자랑스럽게 느끼는 이유도 왕자와 내가 다 깊이와 개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왕자고 그의 애인이고 간에 난 멍청한 사람은 싫다.”

-젊은 여인들은 다 나름대로 멋진 왕자에 대한 개념이 있는데 당신의 멋진 왕자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화가 잔뜩 났을 때 날 웃게 만드는 유머감각이 있는 남자다. 난 어떤 특정 타입의 남자를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자기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자신 있는 사람이 좋다.”

-신데렐라를 하면서 무엇을 배웠나.
“역을 맡은 뒤로 공주들이 나오는 만화영화들을 모조리 봤는데 그 중에서 ‘미녀와 야수’와 ‘인어공주’가 특히 좋았다. 두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다 무언가를 찾고 보다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자 하는 독립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혼과 삶에 있어 무언가를 바라고 동경하는 것을 배웠다.”

신데렐라가 황금마차를 타고 왕궁에 도착했다.
-당신의 삶에 있어 모범이 된 사람은 누구인가.
“미국인인 내 할머니다. 그는 아름답고 멋있고 강하다.”

-무도회 춤에 능하며 집에 영화의 유리 구두를 만든 스바로브스키 제품을 가지고 있는가.
“댄스는 유튜브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배웠지만 난 무도회에 가본 적은 없다. 영화의 춤은 안무가가 준비한 대로 철저히 따라 한 것이다. 스바로브스키 제품은 영화의 분장 팀이 준 유리나비가 있는데 침실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

-신데렐라는 용기 있는 여자이긴 하나 아직도 멋진 왕자가 나타나 자기를 처참한 환경에서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태도가 다소 수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맞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에서 보여준 신데렐라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신데렐라는 단 한 번도 왕자와 결혼할 것을 꿈꾸지 않았다. 센데렐라는 삶을 실제로 다루면서 아버지에게 약속한 대로 고난 속에서도 자기 집을 지킨다. 그는 그런 삶에서 기쁨을 찾고 있다. 신데렐라는 끝에 왕자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여자다. 그러나 이 건 동화이니 만큼 왕자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둘이 사랑에 빠진 것이지 반드시 왕자가 신데렐라를 구해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로맨스란 마법적인 것 아닌가. 그런데 난 불치의 로맨틱한 사람이다.”

-여기서 신데렐라는 별명인데 당신도 별명이 있는가.
“없다. 단지 사람들이 릴리라는 이름을 이리 저리 바꿔 부르면서 놀리는 적은 있다.”

-신데렐라는 양심대로 살면서도 제대로 보답을 못 받는데 그래도 그럴 필요가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 보상과 행복의 길로 다다르지 못할지라도 용기와 친절은 필요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얻는 행복감은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영화를 찍을 때 켄(감독 케네스 브라나)이 내게 명상에 관한 책을 줘서 요가를 많이 했다. 그리고 내적 힘은 당신에게 보상의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켄은 내게 삶의 아주 작은 것에라도 용기를 가지고 친절을 적용하라고 일러 줬다. 그러면 하루가 보다 나은 삶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의 삶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인가.
“자라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다 난 아버지를 18세 때 잃었다.”      

-가장 좋아하는 러브스토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가.
“유머와 함께 날 뇌쇄시킬 수 있는 눈동자를 지닌 남자다.”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교훈이 무엇인가.
“아버지가 가르쳐 준 관대하라는 것이다. 난 그 말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당신 이름을 지닌 백합을 좋아하는가.
“원래 내 세례명은 클로에였는데 아버지가 내가 두 살 때 릴리로 바꿨다. 난 내 이름과 함께 향기가 좋은 백합을 좋아하나 그것이 장례식 꽃이란 점이 슬프다.”

-지금 무슨 작품에 나오고 있는가.
“BBC-TV의 6부작 시리즈 ‘전쟁과 평화’다. 오는 6월까지 찍는다. 대하서사 극으로 나는 나타샤 역을 맡았고 폴 데이노가 피에르로 나온다. 대단한 경험이지만 겁이 난다. 그리고 짐 브로드벤트와 제임스 노턴 및 질리안 앤더슨 등 초호화 캐스트다. 옛날 영화에서 내가 사랑하는 오드리 헵번이 내 역을 맡았는데 그 걸 보려고 해도 한 번 보면 그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안 보기로 했다.”

-일 안할 땐 어떻게 지내는가.
“친구와 함께 맥주 집에 간다. 그리고 나는 거의 집착할 정도로 사랑하는 애완용 고양이 코코가 있다. 코코는 내가 집을 자주 비워 신경이 곤두 서 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땐 코코를 극진히 돌봐준다.”

-다음 영화는 무엇인가.
“샘 라일리가 다시로 나오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들’이다. 난 여기서 좀비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액션 영웅으로 나온다.

-영국 사람이니까 축구 팬일 텐테 어느 팀 팬인가.
“첼시다.”

-어떤 배우로 나아가고 싶은가.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하는 배우다.”

-부와 명성에 관해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해줄 말은.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그것에 눈이 멀어 샛길로 나가는 수가 있다. 그리고 사람과 환경과 열광을 끌어안으라고 말해 주고 싶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대니 칼린스 (Danny Collins)


대니 칼린스(알 파치노)가 오래간만에 올드팬들을 위해 무대에 섰다.

속물이 된 록 스타의 뒤늦은 깨달음


이야기가 다소 조작적이긴 하지만 알 파치노가 쉰 목소리로 노래까지 부르면서 열연을 하는 따뜻하고 감상적인 드라마로 파치노의 연기는 마치 그가 오스카 주연상을 탄 ‘여인의 향기’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호탕하기 짝이 없다.
오랫동안 절연된 부자지간의 관계 연결을 통한 한 나이 먹은 수퍼스타 록가수의 뒤늦은 속죄와 자기 구원의 얘기이자 부와 명성의 부질없음을 다룬 내용으로 파치노를 비롯해 베테런 조연진들의 연기가 눈부시다. 올드팬들을 위한 영화다.
재미있는 것은 오래 전에 예술적 주체성을 잃고 팬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싸구려 수퍼스타 가수가된 주인공 대니 칼린스의 얘기가 파치노의 생애를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그는 한 동안 일련의 싸구려 영화에 나와 LA타임스의 영화평론가 케네스 투란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었는데 얼마 전부터 정신을 차렸는지 짭짤한 소품 드라마에 나와 호연을 하고 있다.
영화는 대니 칼린스(에릭 슈나이더가 파치노를 판에 박은 듯이 닮았다)가 아직 나이 어린 진지한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1971년 음악잡지와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인터뷰에서 부와 명성이 예술가의 진실된 영혼을 손상시킬 것을 우려하는 말을 한다. 
그로부터 40년 뒤 대니는 돈과 명성을 지닌 수퍼스타가 되었지만 이미 예술적 혼을 상실한지 오래 된다. 술과 약물에 취해 살면서 새파랗게 젊은 여자(카타리나 카스)를 약혼자로 두고 케케묵은 옛날 노래들을 반복해 부르면서 올드 팬들의 비위를 맞추며 산다. 탐 존스와 폴 앵카가 된 것이다.
이 때 그의 오랜 매니저이자 친구(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대니에게 40년 전에 존 레논이 대니의 인터뷰를 읽고 그에게 보낸 편지를 전한다. 내용은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라는 것으로 레논은 편지에 자기 전화번호를 적고 대니에게 전화를 걸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대니가 인터뷰한 잡지사 기자가 가로채는 바람에 대니에게 전달이 안 된 것. 이 같은 내용은 영국의 포크가수 스티브 틸슨의 실화를 빌려다 쓴 것이다.              
이 편지를 읽은 대니는 갑자기 대오각성하고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뒤 자기가 옛날에 하룻 밤 정사를 나눈 여자 팬이 낳은 아들 탐(바비 카나발리)을 찾아 아들이 사는 뉴저지주의 서민동네 인근의 힐튼호텔에 장기 투숙한다. 이런 얘기는 좀 억지다.  
그리고 불쑥 탐과 그의 심지가 굳은 임신한 아내 새만사(제니퍼 가너)와 특수교육이 필요한 이들의 어린 딸 호프(지젤 아이젠버그)가 사는 집을 찾아온다. 아기 때 자기를 버리고 간 대니를 맞아 탐은 노발대발하며 꺼지라고 소리친다. 일단 호텔로 물러간 대니는 상심을 스카치로 달래면서 호텔의 아름다운 매니저(아넷 베닝)에게 수작을 건다.  
대니는 그 후에도 끈질기게 아들 집을 찾아와 손녀를 맨해턴의 최고급 특수학교에 입학시키고 선물을 산더미 같이 사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과 화해하려고 애를 쓴다. 이에 탐의 마음도 서서히 녹아든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연결에 불치병이라는 통속적인 플롯을 쓴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라스트신이 좋다. 
파치노가 요란한 제스처에 약장수 같이 술술 나오는 대사를 구사하면서 야단스럽고 코믹하면서도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다채로운 연기를 하는데 보기 좋다. 플러머와 카나발리와 베닝과 가너 등도 잘한다. ‘이매진’을 비롯한 비틀즈의 노래가 여럿 나온다. R. Bleecker Street.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쿠미코, 보물 찾는 여인 (Kumiko, The Treasure Hunter)


도쿄 노처녀 쿠미코(린코 키쿠치)가 마침내 미네소타주의 화고에 도착했다.

영화-현실 혼돈, 노스다코타 눈보라 속으로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무시한 이 다크 코미디는 영화를 현실로 믿는 일본의 한 노처녀 회사원의 돈 보따리 찾아 가는 이역만리 오디세이로 분위기가 초현실적이다. 순전히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이야기로 약간 공포영화와 일본 귀신영화 분위기마저 지녔다.
‘바벨’로 오스카 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일본 배우 린코 키쿠치가 거의 대사 없이 눈으로 연기하는 큰 수고를 하는데 눈 덮인 겨울 노스다코타주의 설원을 찍은 촬영과 신경을 건드리는 전자음악도 좋다.
코엔 형제 감독의 새카만 코미디 스릴러 ‘화고’(Fargo)의 내용이 중요한 플롯을 구성하는데 데이빗 젤너 감독의 솜씨에서 ‘화고’ 냄새가 물씬 난다. 데이빗과 그의 형제인 네이산이 공동으로 각본을 썼는데 매우 기이하고 독특한 영화다. 그리고 진행 속도가 무지무지하게 느리다.      
29세난 도쿄의 과묵한 회사원 쿠미코는 친구도 애인도 없이 토끼 한 마리를 데리고 고독하게 산다. 시골 사는 어머니는 전화로 시집 안 간다고 보채고 회사의 사장(노부유키 카추베)은 쿠미코를 식모 다루듯 하고 동료 사원들은 쿠미코를 왕따 놓는다.
쿠미코의 유일한 낙은 VHS로 ‘화고’를 보는 것. 그리고 쿠미코는 영화에서 스티브 부세미가 눈밭 속에 거액의 현찰이 든 가방을 숨기는 것을 보고 이것을 현실로 알고 언젠가 그 가방을 찾아가리라고 다짐한다. 영화는 쿠미코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이상한 여자인지에 대해 언급이 없다.
그리고 쿠미코는 사장이 자기 결혼기념일을 위한 선물을 사오라고 준 크레딧카드를 이용해 미니애폴리스행 비행기표를 산다. 쿠미코는 눈 오고 추운 노스다코타에 도착, 화고행 버스를 탄다. 그리고 화고로 가는 길에 모두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절한 노스다코타 주민들을 몇 만나는데 그 중에서 아주 아름다운 만남이 언어소통이 불편하고 돈도 떨어진 쿠미코를 불쌍히 여겨 정성껏 돌봐 주는 셰리프(데이빗 젤너).
쿠미코는 셰리프의 ‘화고’는 영화라는 말에 역정을 내고 그를 떠나 혼자 걸어서 화고를 찾아 간다. 모텔의 이불을 찢어 코트처럼 걸치고 눈보라 속을 걷는 쿠미코의 모습이 마치 고난의 길을 가는 순례자 같다. 그리고 쿠미코는 마침내 현장에 도착한다. 꿈과도 같은 결말이다. 고독한 사람에겐 영화가 현실 도피의 수단이자 진짜로 현실도 될 수가 있다는 얘기로 어찌 보면 쿠미코는 기자처럼 영화에 미친 사람이라고 하겠다. 성인용. 26일까지 뉴아트극장(11272 샌타모니카). ★★★(5개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단성사



1907년 종로 3가에 개관한 한국 최초의 영화관으로 나운규의 ‘아리랑’을 상영한 단성사가 수 년 전 폐관, 경매에 내놓았지만 3차 경매까지 유찰돼 아직까지 새 주인을 못 찾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뉴스를 읽으면서 ‘아, 단성사’하는 한숨과 함께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영화 구경을 단체로 수업시간 전 꼭두새벽에 담임선생 인솔 하에 극장에 가서 했다. 혼자 따로 극장에 갔다가 걸리면 정학을 받았다. 무지한 학칙이었다.
내가 특히 단성사의 폐관에 남다른 석별의 정을 느끼는 것은 경복중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단체 관람한 ‘셰인’을 여기서 봤기 때문이다. 말을 탄 셰인이 그랜드 티튼을 배경으로 멀리서 조이의 농가를 향해 다가오는 첫 장면부터 “셰인 컴백”하고 외치는 조이를 남겨 놓고 셰인이 말을 타고 그랜드 티튼을 타고 넘는 마지막 장면까지 넋을 잃고 봤다.
이렇게 꼬마 때 처음 간 단성사는 내가 어른이 돼서도 자주 갔던 극장이다. ‘대경주’ ‘네바다 스미스’ ‘알라모’ ‘대장 부리바’ ‘나바론’ ‘졸업’ 및 ‘줄루전쟁’ 등도 다 여기서 봤다.
당시 종로 3가는 극장가로 단성사 건너편에는 피카디리가 있었고 피카디리에서 종로길 건너편에는 서울극장이 있었다. 학생 때 피카디리에서 단체 관람한 영화가 후에 제임스 본드가 된 로저 모어가 나온 ‘기적’인데 그 밖에도 ‘양귀비도 꽃이다’ ‘633 비행중대’ ‘황야의 7인’ ‘엘 시드’ 및 ‘007/위기일발’ 등을 여기서 봤다. 서울극장에서는 고등학교에 붙은 날 폴 뉴만이 나온 권투영화 ‘상처뿐인 영광’을 봤고 ‘형제는 용감했다’도 여기서 봤다.
그런데 그 때 단성사나 피카디리에 가려면 공연히 남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피카디리 옆 골목이 소위 ‘종3’이라 불리는 유명한 사창가로 때론 아가씨들이 극장 근처에까지 나와 유객행위를 했었다. 
피카디리는 멀티플렉스로 개조돼 운영되고 있다고 하나 내가 어렸을 때 다니던 극장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다. 난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면서 인격 형성이 되고 또 자랐다고 해도 될 만큼 영화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들 극장이 폐쇄됐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내 과거의 살점이 한 줌씩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곤 한다.
단성사나 피카디리는 일류극장이어서 고등학교를 나와서야 자주 갔고 중·고등학생 때는 2류 극장들인 현 조선호텔 앞의 경남극장과 서대문의 동양극장 그리고 명동극장과 용산에 있던 성남극장이 내 단골이었다.
동양극장은 내 인생의 좌표를 정해 주다시피 한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본 곳. ‘쾌걸 조로’와 ‘7인의 신부’도 여기서 봤다. 성남극장에서는 ‘제17 포로수용소’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봤고 명동극장에서는 ‘뜨거운 것이 좋아’와 ‘태양은 뜨거워’ 및 ‘초연’과 내가 좋아하던 수전 헤이워드가 나온 신파극 ‘백 스트릿’을 봤다.
이들 극장 중 내가 제일 자주 간 곳이 경남극장. 여기서 고1 때 앨란 래드가 주연한 웨스턴 ‘대혈산’을 보고 나오다가 단속원에게 걸려 2주 정학을 받았다. 그러나 난 정학기간에도 회개하지 않고 마치 벌을 명예의 배지처럼 착용하고 열심히 극장엘 갔다. ‘노인과 바다’와 ‘피서지에서 생긴 일’과 ‘기관총 켈리’와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및 ‘십계’도 여기서 봤다.
이 네 극장 외에도 싸구려 극장들인 계림, 마포, 우미관, 광무극장 그리고 화신백화점 꼭대기에 있던 화신극장 등 서울바닥을 헤집고 다니면서 안 가본 극장이 없다. 화신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이미 다른 극장에서 하도 많이 돌려 화면에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옛날 극장 이름을 생각하면 극장마다 대뜸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국도극장은 어머니와 같이 본 ‘쿼바디스’, 을지극장은 ‘파계’, 명보극장은 존 웨인이 징기스칸으로 나온 ‘정복자’, 국제극장은 마리오 란자가 노래 부르는 ‘세레나데’, 중앙극장은 역시 존 웨인이 나온 ‘리오 브라보’, 수도극장은 이탈리아의 육체파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나온 ‘외인부대’, 아카데미는 루이 말르 감독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서대문극장은 장-폴 벨몽도가 나온 ‘네 멋대로 해라’. 
단성사의 폐관은 급속히 변화하는 영화산업 구조 탓이라고 하겠다. 단독관이던 단성사도 시류에 따라 멀티플렉스로 개조했으나 식당가와 샤핑가까지 복합 운영하는 3, 4개의 대기업 유통망으로 재편된 배급시장 구조에 밀려 부도를 내면서 폐관했다는 소식이다. 그런 상황은 미국도 마찬가지로 LA를 비롯한 대도시의 단독 상영관들도 모두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기사를 쓰려고 구글을 들춰 찾아낸 사진을 보니 상영 중인 영화가 엘비스 프레슬리가 백인-인디언 혼혈아로 나온 웨스턴 ‘평원아’(Flaming Star·1960)이고 그 위에 차기 상영작인 말론 브랜도의 유일한 감독 작품이자 주연도 겸한 ‘애꾸눈 잭크’(One-Eyed Jacks·1961)와 프랑스배우 장 마레가 나오는 칼싸움 영화 ‘기사 푸라카스’(Le Capitaine Pracasse·1961)의 간판이 보인다. (사진)  
참 옛날이다. 단성사의 폐관을 보면서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말이 생각난다. 마치 ‘황혼열차’를 탄 기분으로 쓸쓸하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