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1월 26일 화요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로저(왼쪽)와 이브가 대통령 바위 얼굴을 타고 도주하고 있다.


여러 번 봐도 새로운 재미느끼는 상쾌한 명화


서스펜스의 장인 알프렛 히치콕이 자신의 미국 영화 중 최고의 것이라고 말한 다채롭고 장난기 짙은 멋진 스타일의 1958년 작 스파이 스릴러다. 잘 생기고 멋진 배우들의 매력과 연기, 대가다운 기술과 성적 의미가 내포된 대사와 성숙한 남녀의 은근한 로맨스 그리고 넉넉한 유머와 우여곡절이 심한 플롯 등으로 여러 번 봐도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되는 미풍과도 같은 상쾌한 명화다.
히치콕 특유의 멀쩡한 사람이 신원이 오인돼 계속해 도주하는 혼란과 악몽의 도주와 추격의 작품으로 영리하나 다소 경박한 삶을 살고 있는 광고회사의 고급 간부로 나오는 케리 그랜트의 냉소적이며 꿋꿋하면서도 멋있는 신사풍 매력이 만점이다.         히치콕이 각본가 어네스트 레만과 이 영화를 구상했을 때의 제목은 ‘링컨 코 위의 남자’로 히치콕은 늘 사우스다코타주의 명물인 링컨 등 4명의 미 대통령들의 얼굴들이 조각된 마운트 러시모어에서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음악은 ‘사이코’ 등 히치콕의 여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버나드 허만이 맡았고 히치콕은 늘 하던 버릇대로 여기서도 영화 첫 부분에 잠깐 나온다. 버스를 타려다가 문이 닫히는 바람에 못 탄 사람이 히치콕이다.              
멋쟁이이긴 하나 바람둥이에다 자기밖에 믿는 사람이 없는 이혼경력이 화려하고 내면이 얇은 광고회사 고급 간부 로저 손힐(그랜트)이 대낮에 뉴욕의 플라자호텔 내 오크룸 바에서 고객들과 사업논의를 하던중 공산국 스파이 두목 필립 밴댐(제임스 메이슨)의 졸개들에 의해 납치된다. 이들은 로저를 CIA 요원 조지로 오인, 납치한 것인데 필립은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버본을 병째로 로저의 입안에 부어넣은 뒤 만취한 그를 차 운전석에 앉혀 내쫓는다.
여기서 살아난 로저는 플라자호텔의 조지의 방을 뒤져 단서를 얻은 뒤 자기 납치사건의 의문을 풀어줄 외교관 타운센드를 찾아 유엔 빌딩으로 간다. 로저가 타운센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에 타운센드가 등에 칼을 맞고 쓰러지면서 로저는 살인범으로 몰려 이 때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 도주한다. 
로저는 조지의 행방을 찾아 시카고행 열차에 오르는데 열차 안에서 아름답고 우아한 이브(에바 마리 세인트)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경찰을 따돌린다. 그리고 이브의 주선으로 시카고 교외의 옥수수밭이 있는 들판에 가 여기서 만나기로 된 조지를 기다린다. 그러나 로저는 조지 대신 나타난 살충제 살포 비행기의 기총소사 세례를 받아 죽다 살아난다.
이에 로저는 이브의 뒤를 추적, 미술품 경매장에서 이브가 필립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 눈물을 머금는 이브에게 냉소적인 모멸의 말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로저는 여기서 일부러 벌인 소란으로 경찰에게 체포되는데 그 후 CIA 고위 책임자가 로저 앞에 나타나 조지와 필립과 이브의 정체를 알려준다.
클라이맥스는 한밤 마운트 러시모어의 대통령 얼굴 위에서 일어난다. 대통령 얼굴을 타고 넘으며 도주하는 로저와 이브를 뒤쫓는 필립 일당 간의 추격전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데 이 장면이 급격한 컷에 의해 열차 침대칸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열차는 기적소리를 내면서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26일 하오 1시 LA카운티 뮤지엄(윌셔와 페어팩스)내 빙극장에서 상영한다.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입맨 3(Ip Man 3)


입맨(오른쪽)과 갱스터 프랭크(마이크 타이슨)가 싸우고 있다.


 브루스 리 쿵푸 스승 실제 인물 ‘엽문’영화


1950년대 홍콩에서 윙춘이라는 스타일의 쿵푸를 지도한 실제인물인 입맨(엽문)의 눈부신 쿵푸액션이 있는 영화로 1편과 2편에 이어 돌의 표정을 지닌 조용하고 침착한 다니 옌이 다시 주연을 맡았다. 입맨의 제자 중 하나가 브루스 리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간단한 내용을 지닌 작품으로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데 눈알이 돌아가는 액션에 코미디와 감상적인 것을 고루 섞어 오락영화로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브루스 리가 거의 은퇴하다시피 한 채 아름다운 아내 윙-싱(린 훙)과 어린 아들과 함께 조용히 살면서 쿵푸도장을 운영하는 입맨을 찾아와 제자로 써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브루스 리 역의 대니 챈이 코믹한 연기를 잘 한다.  
그런데 동네 깡패들이 입맨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 부지를 교장에게 강제로 팔라고 윽박지르면서 입맨이 자기 제자들과 함께 이들과 겨룬다. 영화는 액션과 드라마를 강약박자 식으로 조합했다. 깡패들의 두목 프랭크는 과연 누구일까. 다름 아닌 ‘서양 악마’로 왕년의 프로권투 헤비급 챔피언인 마이크 타이슨. 영화는 타이슨을 밑천으로 흥행성공을 노리고 있다.
타이슨과 함께 경찰서장인 영국인도 ‘서양 악마’로 묘사하면서 제국주의적인 외국인  배척운동을 겸했는데 이 같은 반서양인 감정은 영국인 경찰서장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중국인 형사반장 포(켄트 쳉)의 불만을 통해 노출된다.
여기에 자기가 진짜 윙춘 스타일의 대가라고 주장하는 청 틴-치(장 진)가 입맨에게 도전을 하면서 입맨은 프랭크와 청 틴-치 양측의 협공에 시달린다. 그리고 윙-싱이 암에 걸리면서 입맨은 슬픔과 고뇌에 빠진다.
입맨은 먼저 프랭크를 찾아가 한판 붙는데 권투선수 타이슨과 실제로 윙춘 스타일에 능한 다니 옌 간의 주먹과 발을 이용한 액션이 볼만하다. 아내의 병을 돌보느라 청 틴-치의 도전에 불응하던 입맨은 아내의 권유로 청 틴-치의 도장을 찾아가 그와 과연 누가 윙춘 스타일의 매스터인지를 가름할 대결을 벌인다. 
빠르고 사뿐하고 리드미컬하면서도 치명적인 액션은 ‘와호장룡’의 무술을 지도한 전설적인 무술안무가인 유엔 우-핑이 맡았다. 윌슨 입 감독. PG-13.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오스카상 각 부문 후보작


캐나다 촬영장의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왼쪽부터) 감독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레버넌트’작품·감독 및 남우주연상 등 총 12개 부문 올라


*이 영화는 지난 10일 열린 제7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과 남우주연상(각기 드라마 부문) 및 감독상을 받아 3관왕이 됐다. 또 지난 14일에 발표된 오스카상 각 부문 후보에서 작품, 감독 및 남우주연상 등 총 12개 부문에 올랐다. ‘레버넌트’가 전 지역으로 확대 상영되는 것을 계기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소개한다.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영화제작이다. 방대한 스케일과 내장을 끄집어내 씹고 생살을 깎아내는 것 같은 쓰고 고통스런 생존의 몸부림과 복수, 폭과 깊이가 대하 서사적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영상미 그리고 불길하고 우울한 음악(사카모토 류이치와 알바 노토) 및 처절한 연기 등이 마치 명필가의 거대한 붓이 일필휘지로 쓴 것 같은 연출력에 의해 극단적으로 생생하게 표현된 걸작이다.
지난해에 ‘버드맨’으로 오스카 감독상을 탄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공동 각본)의 영화로 실제 있었던 모피사냥꾼의 사건을 바탕으로 캐나다의 캘거리와 아르헨티나에서 찍었는데 마치 영화 속의 복수심에 불타는 주인공처럼 이를 득득 갈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만든 것 같은 절박감과 치열한 작품 욕심이 느껴져 고개가 숙여진다. 
가차 없고 잔혹한 실존적 웨스턴이기도 한데 눈 덮인 광활한 동토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장정을 하면서 겪는 주인공이 겪는 견디어내기 힘든 조건과 상황 그리고 폭력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참혹하고 끔찍해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1823년 록키산 지역에서 캡튼 앤드루 헨리(돔날 글리슨)의 지휘 하에 모피사냥을 하던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사냥꾼 일행이 포니 인디언들에 의해 기습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장시간 진행되는 이 기습장면의 속도감과 공포와 잔인성 및 혼란이 감관을 유린하는 것 같은 카메라에 의해 박진감 있게 포착된다. 그런데 휴는 한 때 포니들과 함께 살면서 원주민과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은 사냥꾼으로 지역 지리에 대해 정통하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사냥꾼들은 철수를 시작하는데 숲 속에서 혼자 휴식을 취하던 휴가 거대한 어미 곰에 의해 습격을 받아 빈사의 지경에 이른다. 특수효과로 처리된 이 곰의 습격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으로 너무 생생해 진짜로 곰에게 물리고 발톱에 찢기고 밟히는 것 같은 현실감을 느끼게 된다(감독은 어떻게 찍었는지 밝히질 않는다).
들것에 실려 운반되던 휴를 날씨와 험한 지형 때문에 더 이상 운반할 수 없게 되자 앤드루는 사이코 같은 성질을 지닌 탐욕스런 존(탐 하디)과 양심적인 젊은 짐(윌 풀터)에게 휴를 잘 돌봐주다가 혹시라도 죽으면 제대로 매장을 하라고 당부하고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요새를 향해 떠난다. 그러나 얼마 후 존은 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를 거의 생매장하다시피 한 뒤 버리고 떠난다.
여기서 살아남은 휴가 처음에는 벌벌 기어 다니면서 먹고 마실 것을 찾아다니다가 기운을 차리고 나무 지팡이에 의존한 채 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설원과 산을 걷고 타고 넘고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집요하게 목적지를 향해 간다. 이 과정에서 휴는 거의 초인적 인내와  생존본능으로 온갖 위험과 고통을 극복한다. 특히 경악할 장면은 그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죽은 말의 내장을 손으로 꺼낸 뒤 말 속에 드러누워 혹한을 피하는 모습.
마침내 휴는 요새에 도착, 존의 행위를 폭로하나 존이 도주하면서 휴는 이번에는 달아난 존을 잡기 위해 다시 혼자 설원으로 떠난다. 자연광을 이용한 에마누엘 루베즈키의 촬영이 물 흐르듯 하고 급박한데 휴가 말을 탄 채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비롯해 경탄을 금치 못할 장면들이 많다. 내용이 간단한 영화에서 디카프리오는 별로 말을 많이 안 하는데 두꺼운 동물털가죽을 입고 텁수룩한 수염에 장발을 한 채 입안으로 웅얼대면서 강렬한 눈매와 사로잡힌 얼굴 표정으로 필사적인 연기를 한다. 디카프리오가 골든 글로브상에 이어 오스카상을 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영시간 2시간36분. R. Fox. 전지역.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이키루’




나는 신문을 볼 때면 꼭 부음을 읽는다. 우선 내가 어느덧 나이를 먹어 죽음을 낯설어하지 말아야 할 때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나이 또래의 어느 지인이 별세했는지도 궁금해서이다. 그런데 부음을 읽다보면 씁쓸한 심정이 들곤 한다. 부음란에 난 고인들은 다 살았을 때 ‘장’자리 하나 정도는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어서도 신분에 층이 있는가 하는 생각에 입맛이 써지곤 한다.
그런데 당신은 앞으로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는다면 그 기간에 무엇을 하겠는가. 도쿄 달동네 구청의 시민과장 와타나베 간지는 모기가 들끓는 동네 시궁창을 덮고 그 위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짓는다. 와타나베는 일본의 명장 쿠로사와 아키라의 죽음을 통한 삶의 확인을 연민의 마음으로 그린 ‘이키루’(Ikiru·1952)의 주인공이다.
인간은 미련해서 죽음을 맞아서야 삶을 추스르는데 평생을 공무원 생활을 한 와타나베도 의사로부터 위암으로 앞으로 6개월밖에 못 산다는 통고를 받고나서야 사람다운 삶을 시작한다. ‘이키루’(산다는 뜻)는 와타나베의 숨 막힐 것 같은 무기력한 삶으로부터 역동적 인간에로의 변신을 우수와 비감 속에 생명 찬가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쿠로사와의 영화이기도 하다.
홀아비로 불효자식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사는 와타나베(시무라 타카시)는 30년간을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산 공무원. 국화빵 찍어내듯이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서 퇴근시간 확인하느라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미라의 모습이나 진배없다.
이런 와타나베가 사망선고를 받으면서 비로소 자기가 지난 30년간을 헛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그 헛것과 함께 다가올 죽음에 대한 갚음으로 동네 아주머니들의 숙원인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건설에 집념하면서 행동의 인간이 되고 실존적 인물로 변용된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놀이터 건설에 앞서 생전 처음으로 우선 세상환락을 경험한다. 와타나베는 허름한 사케 집에서 만난 2류 작가(이토 유노스케)의 안내로 밤의 유흥가를 섭렵한다. 클럽과 바와 홍등가로 와타나베를 안내하는 작가가 마치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메피스토 같은데 와타나베가 들른 클럽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는 “인생은 짧은 것”을 듣노라면 가슴에 멍울이 생긴다. 이 와타나베의 환락가 구경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 기법으로 촬영한 눈부신 부분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던 와타나베는 자신의 젊은 부하 여직원 오다기리 토요(오다기리 미키)를 만나면서 비로소 생명력의 원천을 발견하게 된다. 와타나베는 오다기리에게 부탁해 둘이 함께 빠찡꼬장과 아이스스케이트장 그리고 요리 집과 극장엘 다니면서 여인의 젊음을 동경하고 또 희열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경직된 관료체제에 막혀 손도 채 대지 못했던 놀이터 건설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이렇게 삶의 목표를 찾은 와타나베는 그제야 평소 느끼지 못했던 자연의 아름다움마저 깨닫는다. 와타나베는 어느 날 석양을 바라보면서 “아, 참 아름답구나. 난 30년간 황혼을 보지 못 했어”라고 찬탄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짧은 6개월의 삶을 충분하고 평화롭게 마감한다. 그가 죽기 얼마 전 눈 내리는 겨울밤 완공이 가까운 놀이터의 그네를 타면서(사진) “인생은 짧은 것”을 부르는 모습에서 후회 없이 만족하게 산 사람의 아름다움이 어둠 속의 촛불같이 빛난다.
‘이키루’는 2부작 형식으로 구성됐다. 전반부는 와타나베의 고리타분한 일상을 그렸고 후반부는 와타나베의 장례식. 장례식의 조문객들이 와타나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의 변신의 원인을 자기들 마음대로 추측한다. 그리고 술에 취한 구청직원들은 “앞으로 잘 해보자”고 다짐하나 이튿날 출근해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영화는 일본의 고여 있는 관료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기도 하다.
죽음에 맞선 삶의 긍정에 관한 이 영화는 동양철학이기도 한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이 사는 방법을 배우는 길이라는 것을 단순하고 조용하게 말하고 있다. 부정 속의 긍정이라고 하겠다.
이런 와타나베의 변신을 시무라는 감지하기 어렵도록 심오하게 표현한다. 그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야 말로 진짜 사람의 얼굴이다. 시무라는 ‘7인의 사무라이’를 비롯해 쿠로사와의 여러 편의 영화에 나온 쿠로사와의 단골배우다.
‘이키루’가 23일(하오 7시30분) 쿠로사와의 1950년도 베니스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라쇼몬’(Rashomon)과 함께 이집션극장(6712 할리웃)에서 상영된다. 한편 ‘이키루’의 블루-레이판이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출반됐다.
나는 얼마 전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생의 마감 앞에서 와타나베가 될 수 있는가.’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6년 1월 19일 화요일

제7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작품·감독·남우주연상 수상작(드라마)‘레버넌트’의 감독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오른쪽)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및 제작진들이 무대에 올라 있다.


드라마 부문 - ‘레버넌트’남우주연상, 작품과 감독 3개 부문 석권
코미디/뮤지컬 - ‘화성인’작품과 남우주연상‘조이’여우주연상 수상


10일 베벌리힐스의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릭키 제르베즈(사진)의 사회로 열린 제7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폭스사가 주요 상을 독식 하다시피 한 폭스사의 잔치였다.
드라마 부문 작품과 감독 그리고 남우주연상 수상작인‘레버넌트’(The Revenant)와 코미디/뮤지컬 부문 작품과 남우주연상을 탄 ‘화성인’(The Martian) 및 여주주연상 수상작인 ‘조이’(Joy) 등이 모두 폭스사 작품이다. *골든 글로브는 작품과 남녀 주연상 부문에 한해 드라마와 코미디/뮤지컬 두 개의 부문으로 나눠 시상한다.
‘레버넌트’는 19세기 초 미국의 록키산 지역에서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빈사상태의 사냥꾼의 생존과 복수에 관한 혹독한 액션 드라마로 작품상과 함께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가 감독상을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상을 각기 탔다.
‘화성인’은 동료 우주인들과 함께 화성 탐사에 나섰다가 혼자 남게 된 우주인의 얘기로 작품상 외에 맷 데이먼이 주연상을 탔다. 그런데 작품상을 받으러 무대에 오른 이 영화의 감독 겸 제작자인 노장 리들리 스캇도 수상 소감 서두에 “코미디?”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듯이 ‘화성인’을 코미디/뮤지컬 부문에 포함시킨 것에 대한 회의가 나돌았었다.
‘화성인’을 이 부문에 넣은 것은 폭스사가 ‘레버넌트’와 ‘화성인’을 함께 드라마 부문에 출품, 제 닭 잡아먹기 식으로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마련한 궁여지책이다. 그 결과 두 영화가 다 작품상을 탐으로써 폭스사의 전략이 성공한 셈.
‘조이’는 특수걸레를 고안한 조이 망가노의 실화로 조이 역의 제니퍼 로렌스가 주연상을 탔다. 그런데 디카프리오와 로렌스는 골든 글로브를 주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사랑하는 배우들로 디카프리오는 과거 이 상을 두 번이나 탔고 로렌스도 한 번 탄 바 있다.
‘레버넌트’와 ‘화성인’이 이렇게 골든 글로브 주요 상을 휩쓸면서 이 두 영화는 오는 2월에 열릴 오스카 시상식에서도 크게 각광을 받게 됐다. 지금까지 모두 4번 오스카상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디카프리오가 마침내 주연상을 탈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레버넌트’의 작품상과 감독상 수상은 약간의 이변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시상식이 열리기 전만해도 드라마 부문 작품상은 보스턴 가톨릭 교구 내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을 폭로한 보스턴 글로브의 활약을 다룬 ‘스팟라이트’(Spotlight)가 그리고 감독상은 ‘화성인’을 연출한 리들리 스캇이 탈 것으로 유력시 됐었다.
또 다른 이변은 ‘스팟라이트’ 외에 작품상을 비롯해 여러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올랐던 ‘빅 쇼트’(The Big Short)와 ‘캐롤’(Carol) 및 ‘덴마크 여인’(The Danish Girl) 등이 모두 단 한 개의 상도 못 탄 것이다.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은 괴한에게 납치돼 오랜 세월 감금된 채 성폭행을 당하면서 아들까지 나은 젊은 여자의 삶과 탈출을 그린 ‘방’(Room)의 비교적 신인인 브리 라슨에게 돌아갔다.
여우조연상은 애플 컴퓨터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의 삶을 다룬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서 잡스의 충실한 참모로 나온 케이트 윈슬렛이 탔다. 그런데 채닝 테이텀과 함께 여우 조연상 시상자로 무대에 오른 조나 힐이 말끝마다 F자 상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시상식을 중계하는 NBC-TV 측이 이 말들을 삭제하느라 그의 말은 절반 이상이 무성으로 방영됐다. 잔에 든 맥주를 마시면서 사회를 본 제르베즈를 비롯해 F자 상소리가 난무하는 쇼였다.
이 날 가장 감격적이었던 모습은 ‘크리드’(Creed)로 남우조연상을 탄 실베스터 스탤론(69)의 것. 그는 여기서 자신의 출세작인 ‘록키’에서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아폴로 크리드의 아들의 코치로 나와 민감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스탤론이 무대에 오르는 순간 참석자들의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는 1977년 ‘록키’로 골든 글로브 각본과 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상은 못 탔는데 이번에 근 40년 만에 같은 인물로 나와 비로소 상을 탄 것이다. 록키처럼 언더독의 승리라고 하겠는데 스탤론은 인사말에서 “나의 보이지 않는 가장 친한 친구 록키 발보아에게 고마움을 표한다”라고 말해 다시 한 번 박수갈채를 받았다.
‘크리드’로 남우조연상을 탄 실베스터 스탤론.
그런데 스탤론은 너무 흥분해 답사에서 ‘크리드’의 감독인 라이언 쿠글러와 주연 배우인 마이클 B. 조단에게 미처 고맙다는 말을 못하고 퇴장하려다가 되돌아와 마이크를 붙잡고 두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광고가 나가는 바람에 TV로 방영되진 못했다.
‘스티브 잡스’는 여우조연상 외에도 아론 소킨이 각본상을 탔는데 흥행에서 참패한 영화가 이렇게 중요한 두 개의 상을 탄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 탓인지 윈슬렛과 소킨은 모두 수상 소감에서 “믿을 수가 없다”며 감격해 했다.
외국어 영화상은 또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인 ‘사울의 아들’(Son of Saul)이 탔는데 미 영화계의 통설인 ‘할리웃에서는 홀로코스트 영화를 만들면 꼭 상을 탄다’는 말이 이 번에도 적중한 셈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오스카상을 탈 확률도 부쩍 높아졌다.
음악상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피범벅 웨스턴 ‘헤이트풀 에잇’(The Hateful Eight)의 음악을 작곡한 이탈리아의 노익장 엔니오 모리코네(87)가 탔다. 모리코네는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의 음악을 작곡한 사람으로 이 날 건강문제로 식에 불참, 타란티노가 대신 받았다.
이 날 시상식에는 각기 코미디 부문의 남녀주연상 후보에 오른 알 파치노(‘대니 칼린스’)와 매기 스미스(‘밴 속의 여자’)도 불참했다. 한편 브래드 핏은 시상자로 식에 참석했으나 그의 부인 앤젤리나 졸리 핏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제가상은 영국 가수 샘 스미스가 작곡하고 노래한 007 시리즈 ‘스펙터’(Spectre)의 ‘라이팅 온 더 월’(Writing on the Wall)이 탔다. 조수미가 부른 ‘청춘’(Youth)의 주제가 ‘심플 송 #3’은 아깝게도 고배를 마셨다. 만화영화는 예상대로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이 받았다. 생애 업적상인 세실 B. 드밀 상은 덴젤 워싱턴이 받았다.
골든 글로브는 영화와 함께 TV 부문에 대해서도 시상하는데 HFPA는 보통 새 프로와 인물들에 대해 시상을 해 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 날 새 시리즈들인 ‘정글 속의 모차르트’(Mozart in the Jungle)와 ‘미스터 로봇’(Mr. Robot)이 상을 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날 사회를 본 영국인 코미디언 릭키 제르베즈는 이 번으로 4번째 마이크를 잡았는데 지난 3년간은 여류 코미디언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가 공동으로 사회를 봤었다. 제르베즈는 농담이 지나치다 못해 독설로 변하는 경향이 있어 시상식을 주관하는 HFPA와 식을 중계하는 NBC는 물론이요 식에 참석한 배우들을 싸잡아 조롱하고 야유하곤 했다.
이 날도 그는 맥주를 들고 마시면서 F자 상소리를 섞어 좌충우돌 식으로 골든 글로브를 ‘무가치한 상’이라고 야유를 한 뒤 NBC는 자사 작품이 단 하나도 수상 후보에 오르지 않았는데도 식을 중계한다고 조롱했다. 이어 그는 션 펜과 찰리 쉰을 비롯해 케이틀린 젠너와 함께 뒤 늦게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한 사람의 코미디 ‘트랜스패런트’의 주인공으로 식에 참석한 제프리 탬보 등을 농담거리로 삼았다.
그는 몇 년 전에 술에 대취해 유대인들을 욕한 멜 깁슨을 조롱해 큰 화제가 됐었는데 이 날 시상자로 무대에 오른 깁슨을 소개하면서 “난 빌 코스비보다는 차라리 멜과 함께 그의 방에서 술을 마시겠다”며 섹스 스캔들에 휘말린 코스비를 야유하면서 아울러 깁슨과는 일종의 화해를 했다. 제르베즈는 주최 측으로부터 어떤 경고를 받았는지 과거보다는 농담의 독기가 순화된 느낌이었다. 시상식이 끝나자 스타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일제히 호텔 내서 열리는 6군데의 파티장들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덴마크 여인(The Danish Girl)


게르다(왼쪽)가 여장을 한 남편 아이나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최초로 성전환 수술 받은 화가 베게너 전기영화


의학 사상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인 덴마크의 화가 아이나 베게너(1882~1931)의 전기영화로 아이나 역의 에디 레드메인과 그의 아내로 역시 화가였던 게르다 역의 알리시아 비칸더의 연기가 보석처럼 빛나는 영화다.
아름답고 섬세하고 민감하며 차분한데 좀 더 감정적으로 깊이와 무게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허풍을 떨지 않아선 좋긴 하나 지나치게 완벽하려다 오히려 사실성과 생명감이 약해진 우를 범하고 있다.
미 올림픽 금메달 육상선수 브루스 제너가 케이틀린이라는 이름의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해 화제가 되고 있는 요즘 시의에 딱 맞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작년에 나와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은 소품 ‘탠저린’(Tangerine)의 자매편과도 같은 작품이다. ‘탠저린’은 여자로 성전환한 두 명의 흑인 배우가 할리웃의 샌타모니카 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로 나오는 얘기인데 두 배우의 연기가 뛰어난 코미디 드라마다.  
‘덴마크 여인’의 시대는 1926년께. 아이나는 성공한 풍경화가요 그의 아내 게르다는 남편 보다 성공 못한 인물화가. 어느 날 게르다는 모델 없이 그림을 그리다가 아이나에게 여자 모델 노릇을 하라고 부탁한다.
이에 아이나는 스타킹에 발레 슬리퍼를 신고 비단 드레스를 입은 채 아내의 모델이 된다. 그리고 아이나는 자기 피부에 와 닿는 비단 옷의 감촉에 매료된다. 이로 인해 아이나는 서서히 자기 안의 여성적인 곳을 찾아 나아가고 게르다는 그런 남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화가로서 성공의 길에 오른다.
아이나가 여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간파한 게르다는 처음에는 다소 슬퍼하나 남편의 뜻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아이나에게 여성 화장과 함께 가발을 쓰게 하고 드레스를 입힌 뒤 릴리라는 이름으로 둘이 함께 사교계 무도회에 나간다. 그리고 릴리는 헨릭(벤 위셔)의 구애까지 받는다.
게르다의 성공으로 여유가 생긴 둘은 보다 자유롭고 개방된 파리로 이사한다. 그리고 여기서 아이나의 어릴 적 친구로 부유한 미술품 중개상인 한스(마티아스 쇠네르츠)의 주선으로 독일 의사 봐네크로스(세바스티안 코호)로부터 성전환 수술을 받기 위해 드레스덴으로 간다.
당시만 해도 이런 수술은 매우 위험한 혁명적인 것이어서 아이나는 그야 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수술을 받기로 결정한다. 게르다는 이런 아이나를 옆에서 충실히 돌본다. 아이나는 수술 후 이름을 릴리 일제 엘베네스(릴리 엘베라고 불렸다)로 바꿨는데 이 후 그림을 안 그렸다.
작년에 ‘모든 것의 이론’에서 스티븐 호킹 역으로 오스카 주연상을 탄 레드메인의 결이 고른 비단처럼 곱고 섬세한 연기가 훌륭한데 이보다 더 돋보이는 것이 레드메인의 고요한 연기에 맞선 생동감 넘치면서도 깊이가 있는 비칸더의 연기다. 의상과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등도 뛰어나다. 탐 후퍼 감독. R. Focus.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잔 다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


잔 다크가 십자가를 들고 화형장에 오르고 있다.

프랑스 가톨릭 신부들의 잔 다크 재판 재구성


덴마크의 칼 데오도어가 감독하고 연극배우 르네 잔 팔코네티가 잔 다크로 나오는 1928년 작 무성영화로 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오를레앙의 처녀’ 잔 다크(1412~1431)에 대한 프랑스 가톨릭 신부들의 마녀재판 기록을 바탕으로 재판과정과 화형을 치밀하게 재구성했는데 데오도어의 연출과 팔코네티의 연기 그리고 후에 할리웃으로 건너와 감독이 된 루돌프 마테의 촬영이 획기적이요 경이롭다.
특히 고뇌하는 잔 다크의 얼굴이 자주 크게 클로스업으로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무식한 촌색시 성녀의 고뇌를 함께 느끼도록 한다. 마테는 잔 다크와 그를 심문하는 신부들의 얼굴과 머리뿐 아니라 이들의 육체에 가깝게 접근해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있는 현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마테의 촬영은 투명하면서 간결하고 또 솔직한데 이와 함께 재판이 열리는 수도원의 흰 외부 내부를 비롯해 장식 없는 무대를 꾸며 잔 다크와 신부들 간의 치열한 영적 대결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화면구성이 과감한 영화로 인물들이 말을 하는 입술의 움직임과 제스처가 마치 무대의 무언극을 보는 느낌을 주는데 진행이 매우 느리다. 따라서 순간순간이 고뇌로 연결되면서 서서히 감정의 결을 축적하다가 이것은 마지막에 깊은 감동으로 승화된다.         
대담무쌍한 영적 드라마로 팔코네티의 체념과 고뇌와 불굴의 정신 그리고 자비로운 부드러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떠도는 얼굴 표정은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는 팔코네티의 유일한 주연 영화다. 그런데 드라이어는 배우들의 화장을 허락하지 않고 조명을 사용해 그 모습들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중인 1431년 영국군에게 포로가 된 잔 다크가 루앙으로 호송돼 영국에 충성하는 프랑스 로마 가톨릭 신부들에 의해 종교재판을 받는다. 신부들은 신의 소명을 받아 영국군을 물리치기 위해 출전했다는 잔 다크의 믿음을 꺾으려고 하나 잔 다크는 이에 굴복치 않고 결국 화형 당한다.       
이 영화가 영국의 남성 5인조 중창단 올란도 콘소트의 무반주 노래와 함께 16일 하오 8시 코스타메사의 시거스트롬 콘서트홀(615 Town Center Dr.)에서 상영된다. 중창단의 노래는 잔 다크 시대에 작곡된 중세 노래다. (949)553-2422, (714)556-2787. ★★★★★(5개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레오로부터 온 편지




지난 연말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사진)로부터 친필 편지가 날아왔다.
“디어 H.J. 
나를 최우수 주연 남우 후보로 지명해 줘 고맙습니다. 나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가 지난 21년간 내 생애에 보내준 후원에 영원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 영화는 알레한드로와 나 그리고 전체 영화팀의 사랑의 노고입니다. 당신의 인정은 정말로 많은 것을 뜻합니다. 1월에 당신을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마이 베스트,”
판독불명의 서명이 적힌 편지는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레버넌트’(The Revenant)에 나온 자기를 제73회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로 선정한 것에 대한 감사와 함께 은근히 진짜로 상도 달라는 의미가 내포된 글이다. 
그런데 레오는 그 뜻이 이뤄져 지난 10일에 열린 시상식에서 주연상(드라마 부문)을 탔다. 나도 레오와 작품 그리고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 감독에게 투표, 셋이 다 수상을 했는데 내가 레오에게 투표한 것은 그의 편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영화와 TV의 배우와 감독 그리고 제작자와 각본가를 비롯해 작곡가들이 우리들에게 카드와 편지 그리고 서명한 영화사진과 악보 및 음반 등을 보내오곤 한다. 이는 물론 송구영신 인사와 함께 자기들을 수상 후보로(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수상자) 밀어달라는 뜻이 담긴 운동을 겸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편지와 카드들은 내용은 인쇄하고 서명만 친필로 적은 것들로 레오의 편지처럼 내용까지 친필로 써 보내는 경우는 많지가 않다. 90명에 가까운 우리 회원들에게 일일이 친필로 편지를 써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아무래도 인쇄된 글보다는 친필에 더 마음이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물론 친필 편지를 써 보내왔다고 해서 표를 찍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레오 외에도 친필로 쓴 편지를 보내온 두 명의 배우가 골든 글로브를 탔다. 다음은 ‘크리드’(Creed)에서 나이 먹은 록키 발보아로 나와 남우조연상을 탄 실베스터 스탤론의 편지다.
“디어 H.J. 
나는 당신과 골든 글로브가 뜻밖에도 나를 후보로 지명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베스트, 슬라이 스탤론.”
이 글은 우리가 슬라이(실베스터의 애칭)를 조연상 후보로 뽑은 뒤에 보내온 것이다. 그런데  나는 슬라이가 아니라 ‘스파이들의 다리’에서 소련 스파이로 나온 영국 배우 마크 라일런스에게 투표했다. 
‘방’(Room)으로 여우주연상(드라마 부문)을 탐 브리 라슨도 후보로 지명된 후 친필 편지를 보내 왔다. 
“디어 H.J. 
저의 영화를 시간을 내 본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 영화는 제게 너무 많은 것을 뜻하며 당신과 함께 그 같은 의미를 나누게 된 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지원에 감사합니다. 베스트, 브리 라슨.” 라슨이 상을 탄 데는 내 표도 한몫했다. 
이번에 배우들이 보내온 카드들 중에 독특한 것은 수퍼스타 가수 레이디 가가의 것. 그는 TV(HFPA는 TV부문에 대해서도 시상한다) 미니시리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호텔’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에 감사하는 글을 인쇄해 보내 왔다. 

내 이름과 자기 서명은 친필인데 서명 옆에 새빨간 루즈를 바른 자신의 탐스런 입술을 찍어 보냈다. 키스 탓은 아니겠으나 레이디 가가는 주연상을 타고 무대에서 눈시울을 적시며 감격해 했다.
그러나 내가 받은 편지들 중 이들의 것보다 훨씬 더 반가웠던 것은 영국 여배우 조안 프로갓의 것이다. 프로갓은 TV 시리즈, 미니시리즈 및 영화 부문에서 ‘다운턴 애비’에서의 하녀 역으로 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상을 못 탔는데도 시상식 후 감사의 글을 E메일로 보내 왔다. 
“디어 H.J. 
저를 올해 골든 글로브 후보 중 한 명에 포함시켜 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큰 감사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아주 훌륭한 밤을 보냈으며 아름다운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이런 행사의 한 부분이 된 것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올 마이 베스트, 조 프로가트.”
나는 지난해에 이 시리즈(현재 PBS에서 마지막 시리즈가 방영 중이다)의 현장 방문차 런던에 갔을 때 프로가트와 한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눴었는데 사람이 매우 겸손해 좋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6년 1월 11일 월요일

컨커션(Concussion)


오말루 의사는 풋볼선수들의 조기사망과 뇌진탕과의 관계를 규명한다.


풋볼선수들의 어두운 이면 추적


미 프로풋볼 선수들의 비정상적인 죽음과 뇌진탕과의 관계를 규명한 나이지리아 태생의 병리학자 베넷 오말루의 실화로 약간 스릴러 분위기마저 지닌 튼튼한 드라마다. 특히 이 영화는 의사 오말루 역의 윌 스미스가 액센트와 함께 조용하면서도 안으로 강한 힘을 발산하는 연기를 하는데 그 외에도 조연진들의 연기도 아주 좋다.
스미스는 영화를 혼자 짊어지다시피 하고 있는데 잘 나가던 내용이 오말루의 애정과 가정문제를 묘사하면서 영화의 중심 내용으로부터 벗어나는 바람에 김이 빠진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풋볼선수들의 어두운 이면을 밝혀낸 드라마여서 좋은 연기와 함께 볼만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운동경기 중 받은 뇌에 가해진 강한 충격 때문에 선수들이 늙기도 전에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이 입증됐는데도 여전히 이 경기가 인기리에 열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때는 2002년. 장소는 피츠버그. 영화는 처음에 팬들의 큰 사랑을 받던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은퇴한 라인맨 마이크 웹스터(데이빗 모스)가 상거지가 돼 정신장애에 시달리다가 트럭에서 자살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웹스터의 사체를 부검하던 오말루(스미스)는 웹스터의 뇌에서 50세의 나이에 있을 수 없는 이상한 흔적을 발견한다. 오말루는 사체에 대한 부검 전에 사체와 친숙해지기 위해 사체에다 대고 말을 하는데 그의 이런 죽은 자에 대한 존경에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웹스터 외에도 은퇴한 풋볼선수들이 마약과 술에 절어 포악해지고 심한 우울증에 빠지거나 나이에 걸맞지 않는 또 다른 이상한 증세를 보이면서 자살을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들을 부검한 오말루는 모두에게서 웹스터의 뇌에 생긴 특이한 흔적을 발견하고 이를 경기 중 뇌에 입은 충격의 후유증이라고 발표한다.
오말루의 발표가 의학계에 관심을 모으자 전미 프로풋볼리그(NFL)는 오말루의 발표를 묵살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이야말로 다윗 대 골리앗의 싸움으로 그의 상사인 시릴(알버트 브룩스가 호연한다)은 오말루에게 “NFL은 예전에 교회가 소유했던 1주의 하루를 소유하고 있는 막강한 세력”이라면서 NFL과의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오말루는 시릴을 비롯해 다른 의사들인 줄리안(알렉 볼드윈)과 스티븐(에디 마산)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끈질기게 자신의 부검결과를 세인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오말루의 활약과 함께 그와 역시 아프리카에서 온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 프레마(구구 엠바타-러)와의 로맨스가 곁들여져 묘사되나 이는 이야기의 핵심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영화는 풋볼경기 중 입은 뇌에 대한 손상이 선수들의 비정상적인 죽음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고 아울러 NFL을 음모집단으로 묘사하긴 했지만 풋볼 자체를 부정적으로 그리진 않았다.   
오말루는 공적이 인정돼 정부로부터 고위 공직자의 자리를 제공 받았으나 이를 사양했다. 피터 란데스만 감독. PG-13. Columbia.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아노말리사(Anomalisa)


마이클(왼쪽)과 리사는 서로가 영혼의 반려자임을 느낀다.


영혼의 반려자를 찾는 로맨스


‘결점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과 ‘어답테이션’과 같은 가슴과 두뇌 모두를 자극하는 지적이면서도 야릇하게 마음으로 파고드는 정감 있는 영화를 쓰고 만드는 찰리 커프만(각본을 쓰고 감독은 듀크 잔슨과 같이 했다)의 스탑 모션 인형극 만화영화로 이상하면서도 심금을 울린다.  
상당히 심오하고 전체적으로 고독이 배인 성인용 고급영화로 삶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묻고 있는데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혼의 반려자를 찾는 로맨스 얘기다. 희한한 것은 내용이 우리들의 절실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어 처음에는 인형으로 보이던 주인공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진짜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데는 배우들의 구구절절한 대사 낭독이 큰 역할을 한다.   
영국의 동기유발 전문가인 중년의 고독한 남자 마이클 스톤(데이빗 튤리스)이 고객서비스 부문에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연 차 신시내티에 온다. 그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집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이어 룸서비스를 시킨 뒤 옛날 애인을 만나려고 시도했다가 낭패를 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호텔서 마이클이 만나는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한결 같이 억양 없는 어투로 단조롭게 말을 하는 것(모두 탐 누낸의 음성에 삶의 반복성과 지리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이런 중에 유일하게 자기만의 소리를 내는 여자가 마이클의 팬으로 자기의 외모와 내면 모두에 대해 자신이 없는 리사(제니퍼 제이슨 리-현재 상영 중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풀 에잇’ 유일한 여자 주인공)다.
마이클은 이런 리사에게 마음이 깊이 끌리면서 리사야 말로 자신의 영혼의 배필임을 깨닫는다. 리사도 마찬가지로 둘은 호텔 방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데 대단히 자극적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리사에게 아노말리사(변칙적이요 이상하다는 뜻의 아노말리와 리사의 합성어)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리사와 남은 삶을 함께 하리라고 마음먹는다. 
대단히 창조적인 작품으로 처음에는 다소 생경하나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가슴에 어필해 오는  혼이 있는 작품으로 우리의 고독과 소외감 그리고 관계의 어려움과 삶의 무료와 권태 및 사랑과 행복 같은 문제들을 연민의 가슴으로 다룬 별난 영화다. 보는 사람의 지능에 도전하는 철학적 작품이기도 하다. R. Paramount. 일부지역. ★★★★(5개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 베스트 텐




2015년도 할리웃은 새삼스런 일은 아니나 질보다 양이 앞서간 해였다. 이 해 북미의 총 흥행수입은 할리웃 사상 최고인 111억달러. 그러나 이런 기록은 순전히 메이저들의 대규모 예산을 투입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와 ‘주라기 월드’ 같은 블락버스터 덕에 이뤄진 것이다.
블락버스터들이 기승을 떨면서 이들보다 규모가 작은 중간급 영화들과 인디 영화들이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한국 영화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블락버스터들은 대부분 속편과 컴퓨터 만화영화이거나 만화와 장난감과 비디오게임을 바탕으로 만든 것들이 아니면 전에 빅히트한 영화들을 변용한 소위 ‘리부트’들이다. 따라서 이런 영화들은 오락적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예술적 가치나 질 면에서는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2015년은 메이저들이 대목을 본 해이긴 했으나 이들이 대규모 예산을 투입한 영화들 중 흥행서 참패한 영화들도 꽤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욕적인 수모를 받은 것이 앤젤리나 졸리가 감독하고 남편 브래드 핏과 공연한 ‘바닷가에서’다. 또 샌드라 불락이 주연한 ‘우리의 상표는 위기’와 론 하워드가 감독한 ‘바다의 심장 속에서’ 등도 본전도 못 건진 것들. 이 밖에도 ‘팬’ ‘투머로우랜드’ ‘팬태스틱 포’ ‘픽슬즈’ 및 ‘주피터 어센딩’ 등도 큰 손해를 봤다.
한편 영화 전문가들은 올해도 거액의 예산을 들인 속편 위주의 블락버스터 현상이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나의 2015년도 베스트 텐 중 1위는 지난해 오스카상을 탄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가 감독하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레버넌트’다. 2위와 3위는 각기 ‘스팟라이트’와 ‘45년’이고 나머지는 알파벳 순서대로다.
*‘레버넌트’(The Revenant)-동료들에 의해 동토에 버려진 빈사상태의 모피사냥꾼이 기사회생, 복수를 위해 처절한 생존투쟁을 하면서 설원을 간다.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위대한 영화제작의 표본과도 같은 작품으로 디카프리오가 골든 글로브상과 함께 네 번의 도전 끝에 오스카상을 탈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사진)
*‘스팟라이트’(Spotlight)-가톨릭 보스턴교구 내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을 폭로, 퓰리처상을 탄 보스턴 글로브의 특별취재팀의 활약.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 작품상을 탈 확률이 높다.
*‘45년’(45 Years)-결혼 45주년을 맞은 부부(탐 코트니와 샬롯 램플링)가 남편에게 날아든 편지 한 통 때문에 심각한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스파이들의 다리’(Bridge of Spies)-냉전시대 미국에 수감된 소련 스파이(마크 라일런스)와 소련에 수감된 미 스파이기 조종사의 교환을 성사시킨 미 변호사(탐 행스)의 실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브루클린’(Brooklyn)-혼자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젊은 여자(셔사 로난)가 정착해 결혼까지 하나 오래간만에 고향을 방문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회의한다.
*‘캐롤’(Carol)-1950년대 뉴욕주의 부유한 가정주부이자 어머니(케이트 블랜쳇)가 젊은 백화점 여직원(루니 마라)과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시-락’(Chi-Raq)-시카고의 라이벌 갱 간에 살육이 횡행하면서 이를 막으려고 갱스터들의 아내와 애인들이 섹스 스트라이크를 벌인다. 희랍연극 ‘라이시스트라타’를 원작으로 스파이크 리가 감독했다.
*‘희생 수’(Pawn Sacrifice)-소련의 세계 체스 챔피언 보리스 스파스키(리에브 슈라이버)와 미국의 체스 선수 바비 피셔(토비 맥과이어) 간의 세기의 대결.
*‘슬로 웨스트’(Slow West)-1800년대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의 콜로라도주로 애인을 찾으러 온 청년이 자신의 목적을 숨긴 바운티 헌터(마이클 화스벤더)를 바디가드로 고용한 뒤 목적지로 향한다. 총격적전이 환상적일 만큼 유혈폭력적이요 아름답다.
*‘청춘의 유언’(Testament of Youth)-1차 대전 때 옥스포드대 학업을 중단하고 간호사로 종군한 여자(알리시아 비칸더)가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할 뿐 아니라 자기 애인과 오빠가 모두 전사하는 비극을 맞는다.
이 밖에도 ‘탠저린’ ‘청춘’ ‘트럼보’ ‘매드 맥스: 분노의 길’ ‘룸’ ‘트레인렉’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 ‘크리드’ 및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등이 기억에 남는다.
와국어 영화 중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터키의 해변마을의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5자매의 생기발랄하면서도 가혹한 현실을 그린 프랑스 영화 ‘야생마’(Mustang)다. 벨기에 영화 ‘최신판 신약’(The Brand New Testament)은 배꼽 빠지게시리 우습다.
훌륭한 기록영화들로는 둘 다 여가수의 삶을 다룬 ‘에이미’(Amy)와 ‘미스 시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What Happened, Miss Simone?)와 사이언톨로지의 내막을 폭로한 ‘고잉 클리어’(Going Clear) 및 마약생산과 밀매문제를 다룬 ‘카르텔 랜드’(Cartel Land) 등이 있다. 지난해는 매우 우수한 기록영화들이 많이 나온 해였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6년 1월 4일 월요일

헤이트풀 에잇(The Hateful Eight)


바운티 헌터 존(왼쪽)이 또다른 바운티 헌터 마키스 소령을 총으로 맞고 있다.

폭력과 유혈·잔인함이 뒤죽박죽 가학적 쾌감 느끼는 영화


선혈과 잔인무도 그리고 폭력과 상소리가 무성한 말이 많은 영화를 기차게 잘 만드는 감독이 쿠엔틴 타란티노다. 옛날 영화를 모르는 것이 없어 자기 영화에 옛날 것들을 빌려다 쓰기로도 유명하지만 그는 정말로 뛰어난 각본가요 감독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타란티노가 이런 쓸데없는 잔소리들을 늘어놓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유혈낭자하고 무의미한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타란티노는 본인 자신도 말을 속사포 쏘듯이 청산유수로 쏟아내는데 영화에 나오는 앙상블 캐스트들이 되지도 않는 소리들을 계속해 주절대는 바람에 사람 피곤하다.
말과 폭력과 유혈과 잔인함이 모두 과도·과다한 뒤죽박죽 영화로 별 내용도 없는데 타란티노가 옛날 로드무비 식으로 필름을 사용해 70mm로 찍은 데다가 서주와 중간 휴게시간마저 있는 상영시간 3시간7분짜리여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이 거의 전부 폭설에 휩싸인 역마차 휴게소 안의 테이블 주위에서 전개돼 왜 그런 노고를 했을까 하고 의문이 간다.
영화는 후반부에 가서 끔찍하고 포악한 폭력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별 폭력 없이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덴 데어 워 논’처럼 알쏭달쏭한 추리물을 연상케 만들었는데 따라서 아가사 크리스티 웨스턴이요 설원의 스파게티 웨스턴이라고도 하겠다.
또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존 포드가 감독하고 존 웨인이 나온 웨스턴 ‘역마차’를 연상시키는데 복수심에 불타는 주인공과 함께 역마차 휴게소 안에서 ’를 그대로 본 땄다.
‘역마차’에 대한 피와 폭력의 헌사라고 하겠다. 여기에다 타란티노의 또 다른 유혈이 낭자한 폭력영화 ‘저수지의 개들’도 닮았으니 타란티노는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마구 뒤섞은 짜고 맵기만 하지 제 맛이 안 나는 짬뽕을 한 사발 내놓은 셈이다.
엔니오 모리코네(‘황야의 무법자’ 음악)의 으스스하게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멀리서 눈밭을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멋있는 첫 장면을 보면서 기대가 컸었다. 때는 남북전쟁 직후. 장소는 와이오밍주. 마차 안에는 레드락에서 사형이 집행될 흉악범 여죄수 데이지(제니퍼 제이슨 리)를 호송하는 바운티 헌터 존(커트 러셀)이 타고 있다. 곧 이어 마차는 북군 베테런인 또 다른 바운티 헌터 마키스 소령(새뮤얼 L. 잭슨)과 그가 사살한 무법자의 사체 2구를 태운다. 이어 레드락의 새 셰리프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크리스(월터 고긴스)를 태우는데 아무리 봐도 크리스는 셰리프 같질 않다.
마차는 ‘미니의 휴게소’에 도착하고 폭설이 쏟아지면서 출발이 지연된다. 밥(데미안 비치르)이 주인인 휴게소 안에는 남군 장교 샌디(브루스 던)와 덩지가 큰 카우보이 조(마이클 맷슨)와 말 많은 영국인 오스왈도(팀 로스)가 먼저 와 있다. 8번째 인물인 조디(채닝 테이텀)는 영화 거의 끝에 가서 나온다. 이들이 각자 한 마디씩 하는데 털어놓은 말 어딘가에 무언가를 숨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도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일까. 슬슬 궁금증이 끓기 시작한다.
후반부에 접어들어 폭력이 난무하고 피가 튀고 사체가 쌓이면서 마키스 소령에 의해 ‘미니의 휴게소’에 연관된 과거가 회상식으로 전개되면서 휴게소 안의 인물들의 정체가 양파껍질 벗겨지듯이 벗겨진다. 8명의 남자들 중 유일한 여자인 데이지가 죽을 고생을 하는데 이 건 완전히 여성학대다. 이와 함께 N자 상소리가 범람한다. 타란티노가 배우들을 폭력의 제물로 삼으면서 그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저 학대하면서 혼자 가학적 쾌감을 느끼는 영화다. 앙상블 캐스트의 연기는 볼만하다. R. Weinstein.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조이(Joy)


조이는‘기적의 걸레’를 고안, 백만장자가 된다.

 ‘기적의 걸레’조이 망가노의 실화… 로렌스 연기 일품


이야기꾼의 재주를 지닌 각본가 겸 감독 데이빗 O. 러셀이 다시 앙상블 캐스트를 사용해 만든 ‘미국인의 성공’ 코미디 드라마인데 그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번에는 플롯이 산만한데다가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으며 기라성 같은 배우들을 소모품처럼 다루고 있어 드문드문 재미가 있지만 전체적으론 실패작이다.
손으로 짜지 않아도 되는 ‘기적의 걸레’를 비롯해 자질구레한 가정용 도구를 여러 개 고안해 백만장자가 된 조이 망가노의 실화로 러셀의 ‘실버 리이닝스 플레이북’과 ‘아메리칸 허슬’에 나온 제니퍼 로렌스가 주연하는데 이 영화에서 볼만한 것은 로렌스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다.
로렌스 외에 로버트 드 니로, 브래들리 쿠퍼, 이사벨라 로셀리니, 다이앤 래드, 버지니아 맷슨 및 에드가 라미레스 등이 나오지만 이들은 산산조각이 난 얘기처럼 뿔뿔이 개별적으로 행동하면서 별 신통치도 않은 대사를 반복해 남발하고 있다.
조이는 어렸을 때부터 무에서 유를 고안해 내는데 특별한 재주를 지녔다. 고등학교도 우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똑똑한 아이인데도 대학을 안 가고 엄마 캐리(맷슨)를 버리고 새 여자를 찾아간 아버지 루디(드 니로)의 고철장사의 경리사원으로 일한다. 캐리는 하구한날 침대에 누워 소프 오페라를 보는 것이 취미.
조이는 가수 지망생인 백수 라티노 토니(라미레스)와 결혼해 아이를 둘 낳고 이혼을 했는데 토니는 아직도 조이 집 지하실에서 산다. 그런데 루디가 동거하던 여자한테서 쫓겨나면서 조이 집으로 짐을 싸들고 들어온다. 이런 난장판 집안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 조이인데 이해 난감한 것은 조이가 모든 사람에게 다 친절하고 상냥하며 집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한다는 점. 천사와도 같은 여자다.
그런데 조이가 어느 날 걸레질을 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고안해낸 것이 ‘기적의 걸레’. 아이디어는 있으나 제품생산 자본이 없어 고민인데 돈을 대는 여자가 루디의 새 애인으로 죽은 남편한테서 유산을 물려받은 트루디(로셀리니). ‘기적의 걸레’를 만든 조이는 견본을 들고 그 때 막 시작한 홈샤핑 TV 채널 QVC의 사장 닐(쿠퍼)을 찾아간다.
그러나 TV에서 ‘기적의 걸레’를 소개하는 사람이 사용법을 몰라 크게 실패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조이는 다시 닐을 찾아가 자기가 직접 쇼에 나가 시범을 보이겠다고 졸라 닐의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기적의 걸레’가 빅 히트를 한다.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공연히 시간을 낭비해 가면서 조이의 후일담을 늘어놓는데 사족이다. 조이의 콩가루 집안처럼 얘기나 인물들이 제각각 튀는 콩가루 같은 영화다, PG-13. Fox. 전지역. ★★★(5개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대통령이 될 뻔했던 지휘자




1991년부터 2002년까지 11년간 뉴욕 필을 이끌며 이 세계 굴지의 교향악단의 오랜 연주 태도인 날이 선 외형미에 대한 치중을 지양하고 보다 따스하고 쾌적한 소리를 만들어낸 상임지휘자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사진)가 지난달 19일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서 88세로 타계했다. 마주어는 주빈 메이타의 바톤을 이어 받아 뉴욕 필을 맡은 이래 이 교향악단과 청중을 크게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뉴욕 필은 웅장하고 윤곽이 뚜렷한 음악을 창조하는 악단이면서도 단원들의 성질이 까다로운 데다가 콧대가 높아 지휘자를 산 채로 잡아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음악 전문가들은 마주어가 뉴욕 필의 지휘자가 되면서 작품의 감정을 물 흐르듯 함으로써 작품이 스스로 숨 쉬고 노래하도록 고전음악의 전통적 의미를 되찾아 주었다고 평가한다. 즉 그는 모든 음표가 다 들리도록 허락함으로써 작품이 스스로 소리를 내게 하고 자연스러운 색채와 무게를 찾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약한 자들’로 알려졌던 단원들로 하여금 인간성을 서로 보다 가깝게 연결시켜주는 음악의 힘을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고 LA타임스가 현 뉴욕필의 상임지휘자인 알란 길버트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마주어는 지휘자로서 뿐 아니라 인도주의자로서도 세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현재 폴란드 땅인 브리크에서 출생한 그는 특히 동독 땅이었던 라이프치히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라이프치히 음대에서 피아노와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 마주어는 1970년부터 1996년까지 무려 26년간 세계적인 교향악단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그런데  멘델스존도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마주어는 1989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을 때 이를 저지하려고 출동한 진압군과 민중 간의 유혈사태를 막은 ‘라이프치히 6명’ 중 한 사람이다. 마주어는 그 때 시위군중과 진압군 양측 모두에게 평온과 대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라디오로 방송,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결국 라이프치히 시위 한 달 후 동독은 서독과의 국경을 개방했고 그 이듬해 독일 통일을 보았으니 마주어는 통독의 영웅이라고 해도 되겠다. 독일이 통일되자 마주어는 축하곡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연주했다. 그리고 통독 후 새 대통령 후보로 마주어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니까 마주어는 독일 대통령이 될 뻔했던 사람이다.  
마주어가 2012년 뉴욕 필을 떠난 것은 타의에 의해서다. 당시 막강한 힘을 지녔던 뉴욕 필의 대표로 진취적인 데보라 보다(현 LA 필 대표)에 의해 쫓겨난 셈이다. 이유는 마주어가 베토벤과 브람스와 브루크너 같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정통 고전 낭만파 음악가들을 좋아한 반면 현대음악을 기피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의 후임은 로린 마젤.
보다와 마주어의 대결은 지금 서울서 벌어지고 있는 서울시향의 예술감독 정명훈의 재임명을 둘러싼 논란을 연상케 만든다. 1년여 전에 정명훈과 시향대표였던 박현정 간에 세력다툼이 일어나 박현정이 물러났는데 지금 이 사건이 다시 도져 지난해로 끝난 정명훈의 예술감독직 재임명이 일단 보류된 상태다.
클래시컬 음악은 고상하고 거룩하며 또 순수하나 그것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의 지휘자와 단원들과 교향악단 관계자들 간의 세력다툼과 함께 섹스와 드럭과 술이 범람하는 막후 광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라고 한다. 이런 사정을 코믹하고 흥미진진하며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현재 방영되고 있는 아마존의 30분짜리 드라마 ‘정글 속의 모차르트’(Mozart in the Jungle)이다. 이 드라마는 뉴욕 심포니의 아이 같고 야단스럽지만 천재적인 멕시칸 지휘자 로드리고 데 수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와 이사장 글로리아(버나뎃 피터스) 그리고 단원들과 후원자 및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그렸는데 로드리고의 모델은 베네수엘라 태생의 두다멜이다. 그리고 글로리아도 보다를 닮은데가 있다.
두다멜과 베르날은 둘 다 라티노인 데다가 서로 작달막한 키까지 닮았는데 베르날이 두다멜의 지휘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어 드라마에서 베르날 즉 로드리고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 두다멜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시리즈는 현재 제2 시즌이 방영 중으로 시즌 첫 에피소드에는 할리웃보울과 함께 두다멜이 캐미오로 나왔다. 나는 지난 8월 이 에피소드를 찍을 때 보울 무대 뒤에서 두다멜과 베르날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둘이 나란하 서서 웃고 얘기하는 모습이 마치 정다운 형제 같았다.
나는 마주어가 지휘하는 뉴욕 필의 연주를 1998년 연말에 오렌지카운티 공연예술센터에서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연주곡목은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환’과 ‘죽음과 변용’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이었다. 독일 사람답게 큰 체구에 인자한 얼굴의 산타클로스처럼 생긴 마주어는 극히 절제된 제스처로 아름다운 화음을 빚어 나로 하여금 음들의 해심에 잠기게 만들었었다. LA 필의 소리보다 폭과 감촉이 깊고 짙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