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3월 7일 월요일

‘경주’의 주인공 오웬스의 실제 딸들 베벌리 오웬스 프래더와 마를렌 오웬스 랜킨




“흑인 아니었다면 즉시 인정 받았을 것”

생존 때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진 않았다

늦게나마 아버지 영화 나와 자랑스러워



현재 상영 중인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웬스의 삶을 그린‘경주’(Race)의 주인공 오웬스의 실제 딸들인 베벌리 오웬스 프래더(사진 왼쪽)와 마를렌 오웬스 랜킨과의 인터뷰가 지난 1월25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오웬스는 손기정이 일장기가 인쇄된 셔츠를 입고 달려 마라톤에서 우승한 1936년도 베를린 올림픽에서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겠다며 호언장담을 한 히틀러가 보는 가운데 독일 선수를 제치고 혼자서 무려 금메달을 4개나 딴 세계 신기록 수립자다. 곱게 나이가 먹은 오웬스의 두 딸들은 기품이 있는 숙녀들로 차분하게 앉아 조용한 음성으로 아버지와의 과거 삶을 자상히 들려주었다. 매우 겸손한 사람들이다. 대답은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한 것이다.   

-당신들의 아버지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을 언제 알았는가.
“10대 초반에 가서야 아버지가 유명 인사라는 사실과 그의 업적과 그리고 그것의 중요성을 알았다. 집 안으로부터 알았다기보다 바깥 사람들이 얘기를 해서 알았다. 우리들의 부모는 집에서 그 사실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려서 어떻게 자랐으며 왜 아버지의 업적이 집에서 얘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부모는 우리를 사랑했지만 엄격한 분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 집 안에서 화제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린 잘 알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올림픽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우리에겐 아버지가 올림픽 선수가 아닌 그냥 아버지였다. 그러나 일단 아버지의 업적을 알고 나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민권운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했는가.
“연단에 서서 열변을 토하는 스타일이 아닌 아버지는 자기가 할 만큼 민권운동에 개입했다. 아버지도 차별대우를 받고 살았으니 만큼 민권운동을 믿었으나 비폭력적으로 그 활동에 참가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었던 것은 가족이다. 우린 모든 일을 가족단위로 했다. 그 중에서도 크리스마스 할러데이를 아버지는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사랑이 많고 베풂이 큰 사람이어서 크리스마스는 정말로 특별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특히 자기 생일파티를 즐겼는데 파티 때면 아버지의 단골 옛 친구들이 참석했다. 아버지와 함께 올림픽에 출전했던 육상선수들이 모이곤 했다.”
제시 오웬스역의 스테판 제임스.
-어디서 자랐으며 지금은 어디서 사는가.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컬럼버스로 이사 갔다가 다시 디트로이트로 옮겼다. 거기서 7년을 살다가 시카고로 이사해 지금까지 거기서 살고 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인내심이 컸다. 온건한 성격으
실제의 제시 오웬스.
로 호인이었다. 보자마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를 엄격히 키웠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우리에게 벌을 줄 때도 매를 든 것이 아니라 훈계정도였다. 그러나 나이가 먹어 병이 들면서 아버지는 다소 화를 냈다. 몸이 불편한 것에 대한 화라고 생각한다(다음은 베벌리의 말이다. ‘아버지가 딱 한 번 내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머리에 염색을 한 것에 대해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그 뒤론 아버지가 화를 내는 것을 못 봤다’).

-유명한 아버지를 둬 부담감이라도 느꼈는가.
“우린 늘 사람들이 우리를 알고 있으며 또 나름대로 판단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린 모범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 행동했다가는 그 여파가 아버지와 우리 가족에 미칠 것이어서 조심스러웠다.”

-당신들의 아버지는 사후 10년이 지난 1990년에나 가서야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았는데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자기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
“뒤늦은 감이 있다. 흑인이 아니었더라면 그 즉시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지금이라도 아버지에 관한 영화가 나와 매우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아버지는 지금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래 때가 됐어’라고 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생존 때 인정받기 위해 투쟁을 하진 않았다. 그저 아버지는 세상 흐름대로 살았다. 아버지는 올림픽 챔피언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업가요 아버지요 인본주의자로서 가족을 돌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직업에 집중했다. 올림픽 챔피언은 과거의 일로 흘려보내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집중했다.” 

-베를린에 간 적이 있는가.
“처음으로 베를린에 간 것은 지난 1980년 스테디엄 인근의 거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행사 때였다. 그 때 스테디엄을 본 경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테디엄 벽에 쓰인 아버지의 이름을 보는 것은 한 마디로 아찔한 경험이었다. 스테디엄 위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보면서 아버지가 저기서 수많은 관중 앞에서 달렸을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깊은 감동에 젖었었다. 지금도 2층인가에 있는 라운지의 이름이 제시 오웬즈 라운지다. 방 벽은 아버지의 사진들로 도배질을 하다시피 했다.”

-영화를 본 소감이 어떤가.
“아버지 역의 스테판 제임스가 대단한 일을 했다. 그는 아버지의 본질을 잘 나타냈는데 참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영화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 개입했다. 각본도 우리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읽으면서 조언을 했고 일부는 수정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가득한 영화다. 아버지의 역사가 다시 써지는 것이 아닌 만큼 우리는 사실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했다.”

-아버지의 달리기 실력을 물려받기라도 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자녀들은 어떤가.
*마를렌의 대답: “내 아들은 뛰어난 육상선수인데도 경쟁적인 시합에는 안 나간다. 그 아이는 우리 집에서 아버지 이후의 유일한 남자인데 아마도 압력을 느껴서 그런 것 같다. 자신을 할아버지의 업적과 비교하는 입장에 두지 않으려고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아들은 그냥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육상경기를 한다. 그런데 아들은 진짜로 소질이 대단하다.”

-아버지가 뛰는 것을 봤는가.
“올림픽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뛰질 않았다. 단지 몇 차례의 시범만 보여줬을 뿐이다. 아버지는 달리기 대신 골프를 쳤다. 아버지는 골프광이었다.”
-아버지는 트랙 앤 필드를 중단한 뒤로 어떻게 지냈는가.
“올림픽 후 처음 6개월간은 뉴욕에 가서 생계를 위해 자신에게 약속됐던 어떤 일을 통해 돈을 벌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됐다. 그리고는 뉴욕에서 유명한 흑인 연예인 빌 보쟁글스 로빈슨을 만나 춤도 추고 밴드 리더도 했다. 음악을 몰랐는데도 색서폰을 들고 폼을 잡으면서 보쟁글스 밴드의 리더로 일했다. 그러나 6개월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클리블랜드로 돌아왔다. 직장을 얻기가 아주 힘들었는데 아버지는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는 아이들의 감독으로 일했다. 아이들과의 작업에 아버지는 열과 성을 다했다. 그리고 후에는 홍보활동과 함께 동기부여 강사로 성공했다.”

-아버지는 금메달을 어디에 보관했는가.
“그냥 집 어딘가에 두었다. 정확히 어딘지는 모른다. 아버지가 남들이 보게 두었던 것은 구릿빛의 육상화다.”

-아버지의 업적을 안 것은 정확히 언제인가.
“우리가 10대 초반 때 시카고로 이사간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올림픽 승리에 대해 설명하는 만찬에서였다.”

-영화에서 아버지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던 라이벌 독일 육상선수 루츠의 가족을 만났는가.
 “못 만났다. 그러나 내 아들이 루츠의 손녀를 만났다. 아들이 독일에서 일할 때 술집에 친구와 들렀다가 우연히 루츠의 손녀인 율리아를 아는 여자를 만나 이 여자의 중개로 서로 만난 것이다. 그 후 아들과 율리아는 지금까지 서로 소식을 나누고 있는데 언젠가 베를린에서 월드게임이 열렸을 때 아들과 율리아가 100미터 우승선수에게 금메달을 시상자로 나갔었다.”

-아버지는 스포츠의 중요성을 장려했는가.
“물론이다. 특별히 아이들에게 스포츠의 중요성을 강조해 청소년 스포츠 장려에 열과 성을 다 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주토피아(Zootopia)


주디(왼쪽)와 왕년의 라이벌 닉은 팀이 돼 실종사건을 수사한다.

맹수와 초식동물이 모여 사는 대도시


 꿈과 환상을 찍어내는 디즈니의 만화영화로 제목이 말하듯이 맹수와 초식동물들이 평화 공존하는 지상천국과도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모험과 액션을 양념 식으로 곁들인  수사물이자 걸맞지 않는 짝의 티격태격과 우정의 드라마다.
그림과 내용과 대사와 음성연기 그리고 각기 독특한 모습을 잘 살린 동물들을 비롯해 모양과 색깔과 크기와 식성 및 종류를 초월한 동물들의 공존은 물론이요 ‘하면 된다’는 긍정적 정신을 얘기한 메시지 영화이기도 한데 기차게 재미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모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즐길 수 있는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특히 알록달록한 색깔로 동물들과 이들이 거주하는 건물과 자연을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동원해 그린 그림이 눈이 아플 정도로 다채롭고 다양한데 한 번 봐 가지고서는 그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채 다 감지할 수 없도록 훌륭하다.
시골에 사는 작고 귀여운 암토끼 주디 합스(지니퍼 굿윈 음성)는 어려서부터 분쟁조정에 실력이 뛰어나 학교의 왈패 여우 닉 와일드(제이슨 베이트만)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재치 있게 처리한다. 성장한 주디는 경찰학교에 입학,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수석으로 졸업한다. 그리고 보따리를 싸들고 임지인 대도시 주토피아를 향해 기차를 타고 떠난다. 주디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통과하는 열대의 사하라 스퀘어와 추운 툰드라타운 등 여러 형태의 도시들이 마치 디즈니랜드의 갖가지 놀이터를 구경하는 것 같다.
주토피아는 큰 사슴과 백표범이 TV의 저녁 뉴스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각기 행동양식이 다른 동물들이 자기 특성에 맞게 직업을 선택해 생활하는 지상낙원. 주토피아의 여러 동물들의 모습과 행태를 스케치 식으로 묘사한 장면이 배꼽 빠지게끔 우습고 재미있다. 그 중에서도 말과 행동이 엄청나게 느린 DMV(당연하다)에 근무하는 나무늘보들의 모습이 매우 재치 있고 또 ‘대부’의 흉내를 낸 뾰족 뒤쥐의 장면도 재미있다.  
경찰서에 와 보니 동료 경찰들은 덩지가 엄청나게 큰 코뿔소와 호랑이와 물소 등으로 작은 암컷(성차별이다) 주디 알기를 우습게 안다. 물소 서장 보고(이드리스 엘바)도 마찬가지로 주디를 주차위반 딱지 발급 일을 맡긴다. 주디에게 다정한 경찰은 치타 리셉셔니스트 클로하우저(네이트 토랜스)와 포유동물의 경찰 복무를 발의한 시장 라이언하트(J.K. 시몬스)의 털북숭이 여비서 벨웨더(제니 슬레이트).
지금 경찰서가 해결해야 할 큰 문제는 관할지역 동물들의 잇단 실종사건. 딱지 발급에 좌절감을 느낀 주디는 경찰 배지를 내던지고 단독으로 수사를 시작하는데 실종된 동물들은 다 전에 육식하던 맹수들. 수사하는 주디의 파트너가 된 동물이 뜻밖에도 오래간만에 만난 닉. 닉은 여전히 술수꾼이긴 하나 더 이상 옛날의 못된 닉이 아니다. 과연 납치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그런데 이런 플롯은 다소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걸맞지 않는 한 쌍이 서로 협조를 하면서도 경쟁하고 티격태격하면서 우정을 쌓는 전형적인 ‘아드 커플’(odd couple)의 얘기 식으로 전개된다. 낙천적이요 에너지가 충만한 주디와 약아 빠진 닉의 콤비가 절묘한데 이런 화학작용이 두 배우의 음성연기와 함께 생동감과 재치 있게 그려진 애니메이션에 의해 효과적으로 묘사된다. 마지막에 영양(샤키라)이 열창하는 주제가 ‘트라이 에브리싱’도 화끈하다. 바이런 하워드와 리치 모어 공동감독. PG. 전지역.★★★★★(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파도(The WAVE)


크리스티안이 아내 이둔을 부축하고 쓰나미를 피해 달아니고 있다.

여기저기서 빌려다 짜깁기한 것 같은 타작


특수효과 위주의 대재난 영화로 미국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지진’ 그리고 한국 영화 ‘해운대’의 여기저기를 빌려다 짜깁기한 것 같은 타작이다. 컴퓨터 특수효과로 만들어낸 산더미만한 쓰나미에 온 마을이 침수되고 주민들이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것을 보면서 시간 죽이기에는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나 할리웃 스튜디오 영화를 그대로 모방한 이 영화는 재난영화의 상투적인 것은 다 빌려다 쓴 창의성이 결핍된 작품으로 노르웨이의 올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 출품작이나 탈락했다. 재난 속에 시달리고 고난 받으면서 궁극적으로 재결집하는 가족의 얘기가 너무 억지요 인위적인 데다가 감상적이고 또 믿을 수가 없다.
영화는 지난 1905년 노르웨이 해변 마을 로엔이 산사태를 일으키면서 유발한 쓰나미로 쑥대밭이 된 실화를 기록영화로 보여주면서 노르웨이에는 이런 지역이 300곳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 중 하나가 영화의 가상의 마을인 게이란저. 자연을 사랑하는 지질학자 크리스티안(크리스토퍼 요너)은 자나 깨나 마을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경고 시스템에 매달려 산다.
그래서 그의 아내 이둔(안 달 토프)은 최근 남편이 도시에 새 직업을 얻어 곧 동네를 떠날 생각에 기쁘기만 한데 크리스티안은 마을에 대한 애착에 고민한다.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그의 10대 아들 손드레(요나스 호프 오프테브로)인데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10대가 즐길 것이 많은 도시보다 아무 것도 안 일어나는 시골을 더 좋아한다는 것도 억지다.
영화 전반부는 이런 개인적인 얘기들로 진행되다가 후반 들어 동네에 산사태가 일어나고 이로 인해 가공할 쓰나미가 발생해 동네를 향해 밀어닥치면서 아수라장이 된다. 마을이 완전히 수장될 위기에 처하자 사람들은 고지를 향해 달리는데 그 과정에서 크리스티안과 이둔이 손드레를 잃으면서 위기 때마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가족을 찾아 헤매는 이런 영화의 상투적인 플롯이 끼어든다.            
아들을 찾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크리스티안. 그리고 마지막에 그야말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데 이야말로 해도 너무 했다. 어쨌든 크리스티안 가족은 위기를 넘기고 그 뒤로 내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로어 우타욱 감독은 남의 것 베끼는 우를 저질러 도무지 신선한 느낌이 없다. PG-13 정도. 일부 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오인된 남자’




서스펜스의 장인 알프레드 히치콕은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뒤 영화 내내 괴롭히는 악취미를 지닌 새디스트다. 이 생사람 잡는 히치콕의 대표적 피해자 중 하나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케리 그랜트다.
그는 이 영화에서 스파이로 몰려 뉴욕에서부터 시카고를 거쳐 큰 바위 대통령들의 얼굴이 있는 사우스다코타주의 마운트 러시모어까지 도망 다니면서 죽을 고생을 한다. 그랜트는 또 ‘나는 결백하다’에서는 왕년의 자기 수법을 본 딴 보석 전문털이의 혐의를 받는다. 이 밖에도 ‘하숙생’ ‘39계단’ ‘영 앤 이노선트’ ‘기차 안의 낯선 사람들’ 및 ‘프렌지’ 등의 주인공들도 킬러나 스파이로 오인돼 곤욕을 치른다.
그런데 히치콕의 1956년 작으로 긴장감 가득한 드라마 ‘오인된 남자’(The Wrong Man·사진)의 주인공 매니 발레스트레로(실명 크리스토퍼 에마누엘 발레스트레로)는 히치콕에 의해 누명을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강도로 오인돼 짧지만 악몽과도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이다.
매니의 얘기는 히치콕에겐 딱 알맞은 소재로 이 영화는 그의 유일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매니의 사건이야 말로 사실이 허구보다 더 기막히고 극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로 영화를 보면서 ‘만약 내가 매니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에 몸서리가 처졌다.
뉴욕주 퀸즈의 잭슨하이츠에서 두 아들과 현모양처인 로즈(베라 마일즈-히치콕의 ‘사이코’에도 나왔다)와 함께 넉넉지는 못하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매니(헨리 폰다)는 나이트클럽 ‘스토크’의 베이스 연주자. 매니는 1953년(당시 38세) 1월14일 아내의 치통 치료비 300달러를 대부 받기 위해 보험회사에 찾아갔다가 자기를 이 회사를 턴 강도로 오인한 여직원이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체포된다.
여기서부터 도대체 자기가 왜 체포됐는지를 몰라 어안이 벙벙해하는(폰다의 과묵한 연기가 좋다) 매니의 악몽이 시작되는데 이 악몽은 매니 뿐 아니라 로즈와 두 아들과 매니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비롯한 온 가족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매니는 강도 피해자들의 확인과 필적감정 등에 의해 범인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자기 때문에 남편이 저지경이 됐다는 자책감과 죄의식에 빠진 로즈는 정신파탄을 일으켜 요양소에 입원한다.
그러나 재판 중 진범 찰스 제임스 대니엘이 델리가게를 털다 붙잡히는 바람에 매니는 석방된다. 매니가 찰스로 오인된 까닭은 두 사람이 너무나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만약 찰스가 체포되지 않았더라면 매니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편 40여건의 강도 전과가 있는 찰스는 경찰 진술에서 매니가 유죄판결을 받으면 자신이 진범임을 자백할 예정이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매니는 입원한지 2년 만에 퇴원한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플로리다로 이사해 거기서 악사로 일하며 살다가 지난 1998년 88세로 사망했고 로즈는 이보다 14년 전에 먼저 타계했다. 영화의 끝은 로즈가 완전히 회복됐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히치콕이 실루엣으로 등장해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시작되는 ‘오인된 남자’는 기록영화처럼 모든 것이 세밀하고 정확한데 이런 사실성은 로버트 버크스의 뛰어난 흑백촬영이  포착한 강렬한 이미지에 의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와 함께 ‘사이코’와 ‘현기증’ 등 히치콕의 여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버나드 허만의 재즈풍 음악이 매니의 상황을 잘 알려준다.
뉴욕이 하나의 인물처럼 뚜렷한 역할을 하는 영화에서 히치콕은 실제사건의 목격자들을 단역으로 쓰고 매니가 수감됐던 110지구 경찰서 영창과 ‘스토크 클럽’ 및 요양소와 법정 등 현장 촬영을 통해 가급적 사실성을 살려 마치 한 편의 기록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이 사건은 당시 전국적인 화제가 됐었는데 무혐의로 풀려난 매니는 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진짜로 새 출발을 하려면 모든 것이 달라져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친척들과 집과 가구를 다 남겨놓고 떠나야 했다”고 말했다. 매니는 시와 보험회사를 상대로 50만달러의 소송을 냈으나 법정 외 합의로 7,000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히치콕의 팬이었던 매니는 자기 얘기의 영화화 판권을 20만달러에 팔았으나 아내의 입원비로 다 썼다고.
지난 2014년 매니가 살던 집 근처의 73스트릿과 41블러버드 교차로가 “매니 ‘더 렁 맨’ 발레스트레로 웨이”(“Many ‘The Wrong Man’ Balestrero Way”)로 명명됐는데 명명식에 형 로버트와 함께 참석한 매니의 차남 그레고리(사건 당시 5세)는 “이것은 우리 부모가 겪은 고통과 아픔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매니는 지난 1953년 라이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를 고발하기 전에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은 내 삶이 파괴될 뻔했던 것처럼 한 가정을 물리적 정신적으로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인된 남자’가 워너 아카이브에 의해 블루-레이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