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아니었다면 즉시 인정 받았을 것”
생존 때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진 않았다
늦게나마 아버지 영화 나와 자랑스러워
현재 상영 중인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웬스의 삶을 그린‘경주’(Race)의 주인공 오웬스의 실제 딸들인 베벌리 오웬스 프래더(사진 왼쪽)와 마를렌 오웬스 랜킨과의 인터뷰가 지난 1월25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오웬스는 손기정이 일장기가 인쇄된 셔츠를 입고 달려 마라톤에서 우승한 1936년도 베를린 올림픽에서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겠다며 호언장담을 한 히틀러가 보는 가운데 독일 선수를 제치고 혼자서 무려 금메달을 4개나 딴 세계 신기록 수립자다. 곱게 나이가 먹은 오웬스의 두 딸들은 기품이 있는 숙녀들로 차분하게 앉아 조용한 음성으로 아버지와의 과거 삶을 자상히 들려주었다. 매우 겸손한 사람들이다. 대답은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한 것이다.
-당신들의 아버지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을 언제 알았는가.
“10대 초반에 가서야 아버지가 유명 인사라는 사실과 그의 업적과 그리고 그것의 중요성을 알았다. 집 안으로부터 알았다기보다 바깥 사람들이 얘기를 해서 알았다. 우리들의 부모는 집에서 그 사실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려서 어떻게 자랐으며 왜 아버지의 업적이 집에서 얘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부모는 우리를 사랑했지만 엄격한 분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 집 안에서 화제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린 잘 알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올림픽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우리에겐 아버지가 올림픽 선수가 아닌 그냥 아버지였다. 그러나 일단 아버지의 업적을 알고 나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민권운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했는가.
“연단에 서서 열변을 토하는 스타일이 아닌 아버지는 자기가 할 만큼 민권운동에 개입했다. 아버지도 차별대우를 받고 살았으니 만큼 민권운동을 믿었으나 비폭력적으로 그 활동에 참가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었던 것은 가족이다. 우린 모든 일을 가족단위로 했다. 그 중에서도 크리스마스 할러데이를 아버지는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사랑이 많고 베풂이 큰 사람이어서 크리스마스는 정말로 특별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특히 자기 생일파티를 즐겼는데 파티 때면 아버지의 단골 옛 친구들이 참석했다. 아버지와 함께 올림픽에 출전했던 육상선수들이 모이곤 했다.”
제시 오웬스역의 스테판 제임스. |
-어디서 자랐으며 지금은 어디서 사는가.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컬럼버스로 이사 갔다가 다시 디트로이트로 옮겼다. 거기서 7년을 살다가 시카고로 이사해 지금까지 거기서 살고 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로 호인이었다. 보자마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를 엄격히 키웠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우리에게 벌을 줄 때도 매를 든 것이 아니라 훈계정도였다. 그러나 나이가 먹어 병이 들면서 아버지는 다소 화를 냈다. 몸이 불편한 것에 대한 화라고 생각한다(다음은 베벌리의 말이다. ‘아버지가 딱 한 번 내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머리에 염색을 한 것에 대해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그 뒤론 아버지가 화를 내는 것을 못 봤다’).
-유명한 아버지를 둬 부담감이라도 느꼈는가.
“우린 늘 사람들이 우리를 알고 있으며 또 나름대로 판단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린 모범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 행동했다가는 그 여파가 아버지와 우리 가족에 미칠 것이어서 조심스러웠다.”
-당신들의 아버지는 사후 10년이 지난 1990년에나 가서야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았는데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자기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
“뒤늦은 감이 있다. 흑인이 아니었더라면 그 즉시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지금이라도 아버지에 관한 영화가 나와 매우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아버지는 지금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래 때가 됐어’라고 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생존 때 인정받기 위해 투쟁을 하진 않았다. 그저 아버지는 세상 흐름대로 살았다. 아버지는 올림픽 챔피언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업가요 아버지요 인본주의자로서 가족을 돌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직업에 집중했다. 올림픽 챔피언은 과거의 일로 흘려보내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집중했다.”
-베를린에 간 적이 있는가.
“처음으로 베를린에 간 것은 지난 1980년 스테디엄 인근의 거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행사 때였다. 그 때 스테디엄을 본 경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테디엄 벽에 쓰인 아버지의 이름을 보는 것은 한 마디로 아찔한 경험이었다. 스테디엄 위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보면서 아버지가 저기서 수많은 관중 앞에서 달렸을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깊은 감동에 젖었었다. 지금도 2층인가에 있는 라운지의 이름이 제시 오웬즈 라운지다. 방 벽은 아버지의 사진들로 도배질을 하다시피 했다.”
-영화를 본 소감이 어떤가.
“아버지 역의 스테판 제임스가 대단한 일을 했다. 그는 아버지의 본질을 잘 나타냈는데 참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영화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 개입했다. 각본도 우리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읽으면서 조언을 했고 일부는 수정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가득한 영화다. 아버지의 역사가 다시 써지는 것이 아닌 만큼 우리는 사실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했다.”
-아버지의 달리기 실력을 물려받기라도 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자녀들은 어떤가.
*마를렌의 대답: “내 아들은 뛰어난 육상선수인데도 경쟁적인 시합에는 안 나간다. 그 아이는 우리 집에서 아버지 이후의 유일한 남자인데 아마도 압력을 느껴서 그런 것 같다. 자신을 할아버지의 업적과 비교하는 입장에 두지 않으려고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아들은 그냥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육상경기를 한다. 그런데 아들은 진짜로 소질이 대단하다.”
-아버지가 뛰는 것을 봤는가.
“올림픽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뛰질 않았다. 단지 몇 차례의 시범만 보여줬을 뿐이다. 아버지는 달리기 대신 골프를 쳤다. 아버지는 골프광이었다.”
-아버지는 트랙 앤 필드를 중단한 뒤로 어떻게 지냈는가.
“올림픽 후 처음 6개월간은 뉴욕에 가서 생계를 위해 자신에게 약속됐던 어떤 일을 통해 돈을 벌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됐다. 그리고는 뉴욕에서 유명한 흑인 연예인 빌 보쟁글스 로빈슨을 만나 춤도 추고 밴드 리더도 했다. 음악을 몰랐는데도 색서폰을 들고 폼을 잡으면서 보쟁글스 밴드의 리더로 일했다. 그러나 6개월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클리블랜드로 돌아왔다. 직장을 얻기가 아주 힘들었는데 아버지는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는 아이들의 감독으로 일했다. 아이들과의 작업에 아버지는 열과 성을 다했다. 그리고 후에는 홍보활동과 함께 동기부여 강사로 성공했다.”
-아버지는 금메달을 어디에 보관했는가.
“그냥 집 어딘가에 두었다. 정확히 어딘지는 모른다. 아버지가 남들이 보게 두었던 것은 구릿빛의 육상화다.”
-아버지의 업적을 안 것은 정확히 언제인가.
“우리가 10대 초반 때 시카고로 이사간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올림픽 승리에 대해 설명하는 만찬에서였다.”
-영화에서 아버지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던 라이벌 독일 육상선수 루츠의 가족을 만났는가.
“못 만났다. 그러나 내 아들이 루츠의 손녀를 만났다. 아들이 독일에서 일할 때 술집에 친구와 들렀다가 우연히 루츠의 손녀인 율리아를 아는 여자를 만나 이 여자의 중개로 서로 만난 것이다. 그 후 아들과 율리아는 지금까지 서로 소식을 나누고 있는데 언젠가 베를린에서 월드게임이 열렸을 때 아들과 율리아가 100미터 우승선수에게 금메달을 시상자로 나갔었다.”
-아버지는 스포츠의 중요성을 장려했는가.
“물론이다. 특별히 아이들에게 스포츠의 중요성을 강조해 청소년 스포츠 장려에 열과 성을 다 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