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9월 7일 수요일

모르는 여인(Complete Unknown)


15년만에 앨리스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탐의 전 애인(레이철 바이스).

수시로 신원을 바꾸는 수수께끼 같은 여인


우리는 모두 가끔 현재의 자신의 껍질을 벗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새 삶을 살고 싶은 환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노예들인 우리에겐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아름답고 감각적이며 수수께끼 같은 여인 앨리스(레이철 바이스)는 몇 년마다 자기 신원을 바꾸고 삶의 터전도 이동해 가면서 거듭 태어난다. 
매우 의미심장하고 은유적이며 또 얘기가 밤에 일어나는 무드 짙은 드라마로 심리스릴러 분위기마저 지녔다. 일상의 무사안일과 매일 같이 비슷하고 잘 아는 것들을 견딜 수가 없어 변화와 탈출을 시도하는 앨리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겠다. 
영화는 처음에 수년마다 앨리스가 거처를 이동해 가면서 매번 다른 직업을 얻어 다른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홍콩에서는 마술사의 조수로, 미국에서는 떠돌이 히피였다가 응급실 간호사가 되기도 하고 교외에 사는 정장을 한 직장 여성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호주에서 희귀종 개구리를 연구한 과학자가 된다. 이렇게 새 환경에서 다양한 직업을 수행하며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변신욕망을 신비하게 얘기하고 있어 상징적인 것이어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의회에 제출하는 법안 문구 수정이라는 따분한 일을 하나 뉴욕에서 아름다운 부인 라미나(아지타 가니자다)와 함께 넉넉히 사는 탐(마이클 섀넌)의 생일파티에 탐의 친구가 고혹적으로 아름다운 앨리스를 데리고 나타난다. 그런데 미술가인 라미나가 샌디에고에 직장을 얻게 되면서 탐도 아내를 따라가느냐 아니면 별거하느냐는 문제가 생기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순탄치 않은 것으로 암시된다.   
그런데 탐은 앨리스가 15년 전에 자기를 버리고 떠난 다른 이름을 가졌던 애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도대체 왜 앨리스는 15년만에 불쑥 탐 앞에 나타났는가.
영화의 전반부는 앨리스가 자신의 다양한 삶에 관해 얘기하면서 파티 손님들이 이에 여러 가지로 반응하는 장면으로 진행되다가 후반 들어 앨리스와 탐이 뉴욕의 밤거리를 거닐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둘은 이 밤의 만보와 대화를 통해 둘이 과거 애인이었을 때로 돌아가는 셈인데 정착해 평범한 남편으로 살고 있던 탐은 이 밤의 여정을 통해 다시 앨리스의 궤적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잠깐이지만 탐은 다시 만난 앨리스를 통해 현재의 껍질을 벗고 변신을 한다. 삽화식으로 섞인 둘이 걷다가 들르게 된 노부부(캐시 베이츠와 대니 글로버) 집에서의 얘기도 흥미 있다.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변신을 추구하는 앨리스와 현실 정착을 고수하는 탐의 밤의 산책은 새벽이 되어 끝난다. 그리고 앨리스는 탐에게 자기와 함께 떠나자고 제의한다. 바이스의 섹시한 모습과 짙은 연기 그리고 섀넌의 극도로 자제하는 연기가 뛰어난 깊고 선정적인 영화다. 조슈아 마스턴 감독(공동 각본). 성인용.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대양 사이의 불빛’의 알리시아 비칸더




"아직 나이 어린데 벌써 어머니 역만 여섯 번 해"


2일 개봉된 드라마‘대양 사이의 불빛’에서 1차 대전 참전군인으로 호주의 외딴 섬의 등대지기인 남편 톰(마이클 화스벤더)이 주워온 아기를 자기 딸로 키우다가 남편과 함께 비극을 맞게 되는 젊은 아내 이사벨로 나온 알리시아 비칸더(28)와의 인터뷰가 최근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사무실에서 있었다. 스웨덴 여자로서는 남달리 가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비칸더는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한 귀여운 소녀 모습이었는데 질문에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액센트가 있는 말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적인 물음에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부끄러워하면서도 활기 있고 명랑한 어조로 꾸밈없이 응했다. 비칸더는 얼마전‘제이슨 본’ 홍보차 맷 데이먼과 함께 서울에 다녀 왔는데 인터뷰 후 필자와 기념사진을 찍을 때“서울서 먹은 비빔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며 활짝 웃었다. 그런데 비칸더는‘대양 사이의 불빛’을 찍다가 화스벤더와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비칸더는 올해‘덴마크 여인’으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탔다.     

△이 영화에 나오기로 결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감독 데렉 시안프란스와 일하고 싶어서다. 나는 데렉의 ‘블루 밸런타인’과 ‘플레이스 비연드 더 파인즈’를 극장에서 두 번이나 봤는데 보기에 쉬운 것들이 아니다. 내 역도 하기 힘든 것으로 이런 도전적이라는 점도 출연에 응한 또 다른 이유다. 그리고 뛰어난 연기자인 화스벤더와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렉은 어떤 감독인가.
“그는 매우 구식으로 철두철미한 감독이다.”  

△영화에서 톰은 행복한 사람이 아닌데 이사벨은 그런 남자에게서 무엇을 찾을 수가 있다고 보는가.
“그가 침울한 것은 전쟁 후유증 탓이다. 역시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이사벨은 전쟁에서 돌아온 톰을 영웅으로 보면서 그를 통해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 자기 가족의 전장에서의 삶을 관찰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사벨은 엄격하고 빈 말을 하지 않는 톰에게 깊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둘이 사랑을 하게 되면서 톰이 걸어 잠근 마음 문이 열리게 된다.”

△톰같은 남자를 좋아하는가.
“믿을 수가 있고 친절하며 무엇이든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하는 남자라면 가까이 하고 싶다.”

△외딴 섬에서의 촬영경험이 어땠는가.
“우린 가장 가까운 작은 마을에 가려면 차로 3시간이나 걸리는 섬에서 촬영했다. 내 생전 이렇게 자연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문명과 완전히 절연된 고독한 장소로 어떤 등대지기가 미쳐서 나갔다는 말도 들었다. 고독과 함께 밤이면 등대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할 만하다. 기상도 변덕이 심해 매일의 해돋이와 석양의 모습이 달랐고 폭풍우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톰과 이사벨이 사랑의 기운에 흠뻑 젖어 있다.

△마이클과 일한 경험은 어땠는가.
“우린 과거 영화제에서 만난 적은 있으나 진짜로 대화를 나눈 것은 웰링턴에서 있은 이 영화의 리허설 때였다. 그리고 난 처음부터 그와의 콤비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영화는 감정적이요 매우 심오한 작품이어서 두 사람 사이의 잘 맞는 호흡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는 내가 본 그 어느 배우보다 더 용감한 연기자다. 그런데 그가 매우 치열한 배우여서 처음에는 다소 겁이 났다”

△이사벨처럼 어머니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내가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해 난 어머니와 함께 오래 살았다. 우린 매우 가까웠는데 그래서인지 난 10대 때부터 가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난 아직 어린 나이라고 하겠는데 벌써 어머니 역을 여섯 번이나 했다. 난 이 영화에서 아기를 임신하고 또 유산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하려고 세트에서 일하는 여러 어머니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톰과 이사벨은 사랑에 빠지면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당신도 사랑을 하면서 같은 경험을 했는가. 
“모르겠다. 모든 사람의 안에는 다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난 커서 날 사랑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살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 다른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사랑을 앎으로써 우리는 남을 존경하게 되며 또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난 내가 이렇게 배운 것을 남에게 돌려주고 싶다.”

△사랑이 톰과 이사벨을 어떻게 어려운 지경에서도 서로를 연결시켜 주었다고 보는가.
“처음에 둘이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가 달라 충돌했다. 그래서 둘은 아마도 서로가 연결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서로 모두 같은 정열을 지녔고 삶과 인간성과 사랑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둘의 사랑은 뜬 구름 같은 것이 아닌 진짜 지적이며 어른다운 사랑이다.”            

△마이클과 다시 공연할 계획이라도 있는가.
“좋은 감독과 각본이 있다면 다시 함께 일하고 싶지만 현재로선 아무 계획도 없다.” 

△패션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LA에서 활동하면서 자연 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것이 스트레스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재미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고 난 옷을 만드는 사람들을 훌륭한 예술가라고 여긴다. 그런데 내 스타일리스트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러나 난 보통 때는 그저 편하고 느슨한 옷을 즐긴다.”

△유산하는 장면을 찍기가 힘들었는가.
“그 장면은 영화 내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찍기 전에 정말로 안절부절 못했다. 그리고 데렉은 촬영을 간단히 끝내는 감독이 아니어서 그 장면을 찍는데 무려 45분이 걸렸고 그런 장면을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인가를 반복해야 했다. 한 번 찍고 나면 완전히 졸도할 지경이 되곤 했다.”                

△배우들은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사는데 어디서 사는가.
“지난 5년 전부터 런던에서 살고 있다. 난 나를 유러피안으로 생각한다.”

△삶에서 매우 아끼고 긍정적이며 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경험은 어떤 것인가.
“삶 전체가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잃고 이루지 못해 슬퍼하는 일들도 많지만 시간이 지나고 또 그것들과 거리를 두게 되면 과거를 통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새로운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도 이룰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런던에서 살고 LA에서 활동하면서 어느 나라 말로 생각하고 꿈을 꾸는가.
“스웨덴 말인데 영어를 주로 쓰다 보니 모국어마저 서투르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어느 한 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셈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로스 올비다도스(Los Olvidados·1950)


불량배 소년들이 거리의 악사를 희롱하고 있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의 삶


스페인의 명장 루이스 부누엘(공동 각본)이 멕시코에서 찍은 멕시코 영화로 영어제목은 ‘The Young and the Damned’. ‘소년들과 저주 받은 아이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멕시코시티에 사는 찢어지게 가난한 아이들의 삶을 매우 사실적이요 진지하게 다룬 사회 비판적인 명작이다. 
사회적 사실주의 작품으로 흑백촬영(가브리엘 피게로아)이 뛰어난데 부누엘의 많은 다른 영화들처럼 초현실적인 요소가 가미됐다. 부누엘이 칸영화제서 감독상을 받았다. 당초 부누엘은 멕시코시티에 사는 복권을 파는 소년의 얘기를 만들려고 했으나 제작자의 권유에 따라 내용을 변경했다.  
소년원에서 탈출한 불량배의 리더 엘 하이보는 갱과 함께 거리의 맹인 악사를 털고 악기를 부순다. 이어 엘 하이보는 친구 페드로와 함께 자기를 경찰에 고발한 훌리안을 찾아간다. 훌리안은 자신이 고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나 엘 하이보는 훌리안을 죽이고 그의 돈을 훔쳐 페드로와 나눠 갖는다. 
페드로는 자기 어머니가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것을 알고 정직하게 살려고 대장간에 취직한다. 그런데 엘 하이보가 찾아와 비싼 칼을 훔치면서 페드로가 누명을 쓰고 교화소에 들어간다. 그는 여기서도 말썽을 피우는데 교화소장이 페드로를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50페소를 주고 심부름을 시킨다.
페드로는 심부름을 제대로 수행할 작정이었으나 길에서 만난 엘 하이보가 페드로로부터 돈을 훔치면서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 그리고 페드로는 엘 하이보가 훌리안을 죽였다고 소리치면서 엘 하이보는 달아난다. 
이어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면서 엘 하이보가 페드로를 죽인다. 그리고 달아나던 엘 하이보는 쫓아온 경찰의 총을 맞고 죽는다. 영화는 페드로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장면으로 끝난다. 
내용이 너무 참담해 멕시코 정부가 부누엘에게 압력을 행사, 페드로가 교화소 소장의 심부름을 제대로 수행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된 일종의 해피 엔딩이 있다. ★★★★½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암캐’




순진하고 어리숙한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안내하는 여자를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여자의 원조는 아마도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어보라고 꼬드겨 인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이브일 것이다. 그리고 삼손을 영육으로 눈멀게 만든 딜라일라와 호세의 칼에 맞아 죽은 카르멘도 이브의 후예다.
팜므 파탈은 전후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장르인 필름 느와르에서 단골로 나온 주인공들로 그 대표적 여자가 필리스 디트릭슨이다. 로스펠리즈에 사는 필리스 디트릭슨(바바라 스탠윅)은 빌리 와일더가 감독한 ‘이중배상’에서 봉같은 보험 세일즈맨 월터 네프(프레드 맥머리)를 유혹해 보험에 든 나이 먹은 자기 남편을 살해시키는 요부로 팜므 파탈 중에서도 으뜸가는 여자라고 하겠다.
소심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모리스가 넋을 잃고 욕정과 사랑에 빠지는 룰루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팜므 파탈이다. 룰루는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느와르의 아들로 ‘위대한 환상’과 ‘인간 짐승’ 및 ‘게임의 규칙’ 같은 명화를 만든 장 르느와르 감독의 애욕과 기만과 살인이 뒤엉킨 삼각관계의 치정극 ‘암캐’(La Chienne·1931·사진)의 주인공이다. 원작은 조르지 드 라 후샤르디에르의 소설.
영화는 인형극 속의 인물의 “이 영화는 드라마도 아니요 희극도 아니며 또 도덕적 메시도 없다”로 시작되지만 실은 계급과 신분을 비롯한 사회적 현상과 도덕성을 다룬 코미디 드라마다. 파리 몽마르트르에 사는 회사 경리사원으로 아마추어 화가인 수줍은 모리스 르그랑(미셸 시몽)은 바가지를 긁어대는 아내 아델의 엉덩이에 깔려 사는 불행한 공처가.
그의 유일한 위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어느 날 밤 회사 회식 이후 귀가하다가 길에서 자기 애인인 핌프 데데(조르지 플라망)에게 얻어터지는 젊고 섹시한 밤의 여자 룰루(자니 마레즈)를 구해 주면서 파멸의 길로 접어든다. 룰루는 데데와 짜고 자기에게 반한 모리스의 껍데기를 벗겨 먹기로 하면서 모리스는 룰루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회사 돈을 횡령한다.
룰루와 데데는 돈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모리스의 그림을 팔아먹는데 룰루는 화상에게 자기를 클라라 우드라고 소개하고 그림을 자기가 그렸다고 속인다. 그런데 그림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고가로 불티나게 팔린다. 모리스는 자기 그림을 팔고도 한 푼도 못 건지지만 룰루가 행복한 한 자기도 만족하는데 룰루가 데데의 애인이요 둘이 짜고 자기를 기만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와 질투에 눈이 멀어 룰루를 편지봉투 여는 칼로 찔러 죽인다. 그리고 살인혐의는 데데가 뒤집어쓴다.
마지막 장면이 역설적 희극으로 끝난다. 알거지가 된 모리스가 팔려서 고급 승용차에 실리는 자신의 자화상을 보면서 함지박 미소를 짓는다. 거지가 되면서 비로소 자유로워진 모리스의 커다란 미소에 체념의 예지가 가득하다. 우물쭈물하는 시몽의 뛰어난 연기와 화면 구성과 흐름이 좋은 흑백촬영 그리고 발자국 소리 등 실제 음을 쓴 음향효과 및 유효 적절히 쓴 노래 등이 모두 훌륭한 명화로 플라망과 마레즈도 잘 한다. 그런데 플라망은 아마추어 배우로 실제로는 직업 범죄자였다.
영화에서 모리스가 그리는 그림은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르느와르는 늘 아버지의 그늘을 의식하며 살았는데 이 영화를 위해 아버지의 그림을 팔아 제작비를 조달했다고 한다.
한편 마레즈는 룰루처럼 실제로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르느와르는 영화의 사실성을 살리려고 마레즈와 플라망이 실제로 사랑에 빠지도록 부추겨 둘은 애인이 됐다. 그런데 시몽도 마레즈를 사랑하면서 영화 밖에서도 삼각관계가 발생했다.
그리고 운전이 서툰 플라망은 출연료로 산 자동차에 마레즈를 태우고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마레즈가 사망했다. 방년 23세로 영화는 마레즈 사망 3개월 후인 1931년 11월에 개봉됐다.
‘암캐’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감독 프리츠 랭(‘M’ ‘메트로폴리스’)에 의해 ‘진홍의 거리’(Scarlet Street·1945)로 리메이크 됐다. 프랑스 판보다 훨씬 어두운 가학적 영화로 병적인 염세주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주인공들은 공처가 크리스(에드워드 G. 로빈슨)와 폭력적이요 간교한 핌프 자니(댄 듀리에) 그리고 자니의 애인으로 자극적인 거리의 여자 키티(조운 베넷).
특히 상스러우면서도 치명적인 색정미를 발산하는 베넷의 모습과 연기가 눈부시다. 크리스가 잠옷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길게 누운 키티가 앞으로 길게 내민 맨발의 발톱에 정성껏 패디큐어를 해주는 모습이 선정적이다. 이 영화는 냉소적으로 끝나는 ‘암캐’에 비해 비극적 여운을 남긴다. 유럽의 여유가 아쉽다. ‘암캐’가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DVD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