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7월 28일 화요일

왼손잡이 (Southpaw)


피투성이가 된 빌리가 링에서 짐승처럼 소리지르고 있다.

“딸을 위하여”몰락한 챔피언의 최후일전


주인공 역의 제이크 질렌한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와 권투액션 신을 박진하게 찍은 촬영 그리고 튼튼한 각본과 연출 등 모든 것이 제대로 된 가족 드라마이자 권투영화인데 문제는 예전에 이런 영화는 많이 봤다는 기시감이다. 언더독의 당연한 최후의 승리와 자기 구제의 얘기가 주제로 액션이 있는 권투보다 앞서 가는데 따라서 처음과 마지막의 피가 튀는 두 경기 사이의 드라마가 너무 길고 느린 느낌이다.
안톤 후콰 감독(‘이퀄라이저’)은 마치 이 영화는 권투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라도 하려는 듯이 드라마 부분에 역점을 두고 영화의 상당부분을 장황하게 끌고 가 권투액션을 기다리느라 좀이 쑤신다. 왕년에 만든 권투영화들인 ‘챔피언’ ‘상처뿐인 영광’ ‘레이징 불’ 및 ‘로키’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많은 것도 영화의 신선미를 감소시키는 큰 이유. 그러나 보고 즐길 만한 영화다.
첫 장면은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전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빌리 호프(질렌할)가 고함을 지르면서 상대방을 공격, 챔피언 벨트를 따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 라커룸에 들어온 빌리는 섹시한 아내 모린(레이철 맥애담스가 잘 한다)이 보는 앞에서 의사로부터 찢어진 왼쪽 눈을 치료 받는다. 이 왼쪽 눈이 빌리의 결정적 핸디캡이 된다.
11세난 영리한 딸 레일라(우나 로렌스)와 함께 거대한 저택에서 호사를 누리면서 사는 빌리와 모린은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는데 모린은 빌리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은퇴할 것을 원한다. 이어 얘기는 이런 영화의 정석대로 빌리의 급격한 몰락으로 이어진다(이 부분이 너무 급작스럽다).
남편과의 갈등으로 빌리의 매니저 구실을 하던 모린이 떠나고(영화의 후반부 대부분 모린은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빌리는 자신의 벨트를 노리는 젊고 오만한 미구엘 에스코바르(미구엘 고메스)와 언쟁을 벌이다가 둘이 주먹싸움을 하면서 빌리는 왼쪽 눈을 크게 다친다.
빌리는 여기서부터 빚더미에 올라 앉아 가산을 몽땅 차압당하고 알거지가 되고 레일라까지 뺏겨 레일라는 아동보호소에 들어간다. 물론 빌리는 재기를 하는데 폐인이 되다시피 한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링에 오르기로 결심하는 까닭은 오로지 딸을 되찾기 위해서다.
빌리가 찾아간 체육관은 왕년의 명 박서 틱(포레스트 위타커)이 경영하는 동네 불우아동과 아마추어 선수들을 위한 후진 장소. 빌리는 프로는 안 받는다는 틱의 거절에도 불사하고 집요하게 틱에게 자기 트레이너가 돼 줄 것을 요구, 둘은 일치 합심해 맹훈련에 들어가 돈에 눈이 먼 경기 알선책(며칠 전 파산신청을 한 커티스 ‘50센트’ 잭슨)의 주선으로 베이가스에서 미구엘과 한판 붙는다.
올해 ‘나이트크롤러’로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질렌할의 피비린내 나면서도 민감한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로 얼마 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영화음악 작곡가 제임스 호너의 유작인데 음악이 무드가 짙다. R. Weinstein.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삼바 (Samba)


삼바(왼쪽)와 알리스는 국경과 피부색깔을 초월해 사랑에 빠진다.

‘불체자와 로맨스’ 코믹·슬픔 교차


프랑스를 비롯한 서 유럽국가의 현재 당면한 큰 문제 중 하나인 불체자의 얘기를 진지하면서도 유머와 감상적 비감을 고루 섞어 만든 프랑스 영화로 프랑스 시민들의 외국인 기피증과 함께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메시지를 뚜렷이 제시하면서도 핏대를 세우는 식이 아니라 불체자들에게 연민과 이해심을 보여줄 것을 상냥하게 설득시키고 있는데 그런 메시지 전달의 수법으로 국경과 피부 색깔을 초월한 몸 사리는 로맨스를 선택했다. 로맨스와 사회문제의 좋은 배합인데 영화가 후반에 들면서 얘기가 처지고 이에 따른 불필요한 긴 상영시간이 흠이다. 
파리의 식당 접시닦이인 세네갈 태생의 불체자 삼바(오마르 시-빅 히트작 ‘인터처블스’ 주연)는 셰프가 꿈인데 10년간 몸조심 잘하다가 최근에 단속에 걸려 추방절차를 밟기 위해 수감된 신세. 거구에 호인이요 생명력과 개성이 강한 남자로 그를 담당한 소셜워커가 수줍고 가녀린 알리스(샤를르 갱스부르).
알리스는 사무직 생활 15년에 넌덜머리가 나 신경쇠약 증세로 한 동안 치료소에 있다가 최근에 나왔다. 그녀가 동료 직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삼바에게 개인적 감정을 느끼고 그의 문제를 마치 자기 것처럼 다루기 시작하면서 삼바와 알리스는 피치 못하게 감정적으로 연결된다. 물론 삼바의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알리스와 결혼하는 것이지만 영화는 그렇게 쉽게 상투적인 길을 택하지 않는다. 
삼바와 알리스의 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에피소드가 엮어지는데 그 중 하나가 수감상태에서 일단 풀려난 삼바가 약속대로 동료 수감자의 미용사 애인을 찾아내 서로가 외로운 중에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것.
이와 함께 영화의 다소 심각한 분위기에 코믹 터치를 가미하기 위해 등장하는 사람이 삼바와 그의 알제리 태생의 불체자 친구(타하르 라힘이 호연한다). 이 친구는 알제리 산이면서도 여자를 보다 잘 유혹하기 위해 자신을 브라질 사람이라고 속이는데 그와 삼바가 고층건물 유리를 닦다가 불체자 단속반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인터처블스’에서 보여준 대로 시는 카리스마가 가득한 연기를 하는데 그와 프랑스의 명 연기파 갱스부르의 호흡이 아주 잘 맞는다. 불체자의 문제를 다룬 점에서라도 한국인들에게 권하는 썩 괜찮은 작품이다. 에릭 톨레다노와 올리비에 나카쉬 공동감독. R.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정창화 감독의 ‘노다지’




나는 며칠 전에 한국 영상자료원이 처음 내놓은 정창화 감독(사진)의 ‘노다지’(Bonanza·1961)를 보면서 “야 이건 할리웃영화 뺨치게 잘 만들었네”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야 말로 호랑이 담배 태우던 시절의 영화인데 속도 빠른 서술과 잽싼 편집 그리고 플래시백과 긴 세월의 얘기를 자막으로 처리하는 수법을 비롯해 박진한 액션 등이 장인의 솜씨 그대로였다.
황금을 둘러싼 인간의 탐욕이 주제인 이 영화는 정 감독 특유의 액션영화라는 장르 속에 가족 멜로드라마와 갱스터의 필름느와르 및 코미디에 로맨스까지 다양한 요소를 연금술사의 솜씨로 절묘하게 섞어 재미 만점이다. 내용과 연기와 기능 등 모든 면에서 훌륭한 작품이다.
캐스트도 보통 화려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스크린의 별이란 별은 다 떴는데 주연 김승호를 필두로 황해, 엄앵란, 허장강, 윤인자, 조미령, 박노식, 장동휘, 주선태, 전영선, 정애란, 김칠성, 장혁, 최성호, 남미리 및 장훈 등 당대 내로라하는 배우들은 다 모였다. 음악은 한국 가요계의 거성 박춘석이 작곡했고 임권택이 조감독으로 정 감독을 도왔다.
금에 미쳐 산으로 들어간 운칠(김승호)과 달수(허장강)에 의해 버림받고 성장한 운칠의 딸로 갱단원인 영옥(엄앵란)과 달수의 아들인 갱스터 출신의 선원 동일(황해) 등과 함께 이들을 둘러싼 잡다한 군상들이 황금을 둘러싸고 서로들 감나무에 연줄 얽히듯 얽히면서 드라마와 액션이 일어난다.
이 영화의 황금에 대한 욕망은 존 휴스턴의 ‘시에라마드레의 황금’과 에릭 본 스트로하임의 ‘탐욕’을 연상시키는데 물질에 대한 욕심과 그것의 부작용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정 감독은 드라마와 액션을 적절한 순간에 맞춰 교체, 자칫하면 느슨해질 수도 있는 서술에 활기를 주고 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둘 다 콧수염을 한(김승호도 역시 콧수염) 구봉서와 김희갑이 날사기꾼들로 나와 웃기는 모습으로 이는 자칫 살벌해질 수도 있는 영화의 내용에 쉼표 구실을 하고 있다.
또 하나 파격적인 것은 운칠과 과거 자기를 버리고 돈 많은 사장에게 달아났으나 지금은 몰락해 바 마담이 된 운칠의 옛 애인 연옥(윤인자)이 오래간만에 재회, 나누는 러브신. 카메라가 둘의 키스 신을 클로스업으로 잡더니 이어 운칠의 등과 침대의 이불을 꽉 부여잡는 연옥의 손을 포착하면서 둘의 정염을 불사른다.
운칠이 연옥에게 배신당하고 홧김에 결혼한 아내로 나오는 조미령과 아역배우로 유명한 전영선 그리고 스크린의 터프 가이의 대명사였던 박노식과 장동휘의 얼굴을 보자니 옛날이 무척 그리워진다.
아기자기하고 다정하고 아이들 장난처럼 귀엽고 코믹하기까지 한 것이 마도로스 캡을 쓴 동일과 점퍼에 몸에 꼭 끼는 바지를 입은 영옥 간의 사랑의 줄다리기 놀음. 영옥이 “키가 작아서 흠이지만 멋쟁이야”라고 호감을 보이는 동일과 그가 말썽꾸러기 소녀 다루듯 하는 영옥과의 콤비가 묵직한 분위기의 영화를 아늑한 감정으로 채색하고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사금이 있는 계곡의 산에서 벌어지는 동일과 갱 두목 황돼지(박노식) 간의 주먹대결. 속도감 있고 박력 있는 편집이다. 연기들도 좋은데 특히 대한민국의 국보급 배우였던 김승호의 무게 있으면서도 민감한 연기가 돋보인다.
이 영화는 ‘대중영화 감독’으로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 모토인 정 감독이 또 다른 액션영화 ‘햇빛 쏟아지는 벌판’으로 흥행감독의 대열에 올라선 뒤 만든 그의 초기 걸작 중 하나다. 한국 영화계에 액션장르를 정립한 정 감독은 1960년대 한국서 활동하다가 1970년대 들어 홍콩의 명제작자 쇼브라더스의 초청으로 홍콩으로 건너가 많은 쿵푸영화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 정 감독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것이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 이 영화는 미국에 수입돼 개봉 첫 주말 흥행 1위를 하는 쾌거를 이뤘다.    
나는 현재 남가주 샌디에고에 거주하는 정 감독과 가끔 전화로 영화 얘기를 나누고 있다. 늘 현역임을 자처하는 정 감독의 변치 않는 영화에 대한 열정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고개가 숙여진다. 정 감독과는 부산영화제에도 두 번이나 함께 참석해 감독의 소개로 한국 영화계의 원로들인 김기덕(젊은 김기덕이 아님)과 김수용 감독 등을 만나 영화 얘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정 감독은 ‘노다지’ 출반에 맞춰 내게 DVD와 함께 짤막한 소감을 보내왔다. ‘1950년대 암울했던 우리 한국 사회의 단면을 그리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필름느와르로 속도감 있게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 봤다.’ 한국 영화계의 대부인 노익장 정창화 감독의 건투를 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