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0월 27일 화요일

여성 참정권론자(Suffragette)


모드 와츠(가운데)가 동료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투표권 쟁취”여성들, 테러리스트가 되다


1912년 참정권을 얻기 위한 영국여성들의 맹렬한 투쟁을 튼튼하게 그린 드라마로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테러와 자기 희생 등에 놀라게 된다. 
내용에 몰입하기 전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연기와 촬영과 의상과 프로덕션 디자인 등이 다 좋은 긴박감 마저 감도는 작품인데 영화가 내용에 비해 열기가 부족하고 다소 창백한 것이 흠이다.
일종의 BBC-TV의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데 이와 함께 샐리 필드가 무식한 공장노동자로 나와 노조운동을 펼치는 드라마 ‘노마 레이’도 생각나게 만든다. 영화는 사실과 허구를 혼성해 만들었는데 참정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여성들에 고개가 숙여진다. 뜻 있고 또 숙연한 감동을 갖게 하는 볼만한 드라마다. 
24세난 모드 와츠(캐리 멀리간)는 남편(벤 위셔가 일차원적으로 묘사됐다)과 어린 아들을 둔 대형 세탁공장 노동자. 전연 정치와는 관계가 없던 와츠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참정권 운동가인 바이얼렛(앤-마리 더프가 가슴 아픈 연기를 한다)으로 인해 서서히 여성운동가로 변신한다. 이와 함께 짐승 같은 공장장의 횡포와 멸시가 와츠의 변신에 결정적 계기가 된다.
와츠는 여성운동의 총지도자로 당국의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에멜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이 잠깐 나온다)의 지시를 수행하는 행동가로 약제사인 이디스(헬레나 본햄 카터의 연기가 차분하다)와 바이얼렛 등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면서 경찰에 체포돼 옥에 갇힌다. 이로 인해 남편과 갈등이 생기고 결국 와츠는 집에서 쫓겨난다. 
의회가 여성참정권 의제를 부결시키면서 와츠 등은 본격적인 테러에 나선다. 우체통을 폭파하고 수상의 빈 저택을 폭파하는 등 여성운동가들의 행동이 격화하면서 이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법을 집행해야 하는 경찰국장(브렌단 글리슨이 묵직한 연기를 한다)도 이들의 체포에 총력을 집중한다.
그리고 영화는 한 여성 운동가의 자기 희생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 마지막에 이 여자의 장례식을 찍은 기록필름이 나온다. 여성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한데 특히 다변한 표정으로 무식한 노동자에서 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강렬하고 알차게 보여 주는 멀리간의 연기가 출중하다. 영국은 1918년에 가서야 일부 30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에 가서야 모든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다. 새라 개브론 감독. 
PG-13. Focus. 아크라이트와 랜드마크.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록 더 카스바(Rock the Kasbah)


미국인 록가수 매니저 리치는 아프간 소녀 살리마(왼쪽)를 TV쇼에 출연시킨다.

아프가니스탄 판 ‘아메리칸 아이돌’


주름살이 잔뜩 진 얼굴로 오만상을 찌푸려 가며 시치미 뚝 떼고 사람 웃기는 빌 머리의 영화는 웬만하면 다 괜찮은데 이 것은 엉망이다. 아프가니스탄 판 ‘아메리칸 아이돌’로 영화가 힘이 없고 늘쩍지근한데다가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은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얘기가 촛점을 잃고 그냥 되는대로 식인데 코미디로서 우습지도 않고 드라마로서도 극적 재미가 없다. 사실 내용의 중심인물이 아프가니스탄 최초로 과감하게 TV노래 경연대회에 나온 여자(실제 인물로 리마 사하르의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인데도 영화는 할리웃 수퍼스타인 빌 머리에게 아첨 하듯이 그가 맡은 역인 한 물 간 록뮤지션 매니저 리치의 횡설수설과 갈팡질팡에 조명을 비추고 있다. 재주 있는 빌 머리와 함께 명장인 배리 레빈슨의 실패작이다.
밴나이스의 모텔에 매니저 사무실을 차려 놓고 가수 지망생들의 돈이나 사기쳐 먹고 사는 리치는 바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미군위문공연 관계자의 주정을 듣고 가수 지망생인 여비서(조이 데샤넬)를 데리고 한탕 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도착한다. 
여비서가 도착하자 마자 리치의 돈과 여권을 훔쳐 미국으로 돌아 가면서 리치는 낯 설고 물 선 이역만리 타국에서 외톨이가 된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이니 만큼 리치는 별로 흥분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리치는 전쟁판에서 돈을 벌려고 뛰어든 미국인들인 용병(브루스 윌리스)과 군수업자들(대니 맥브라이드와 스캇 칸) 그리고 황금의 마음을 지닌 창녀 머시(케이트 허드슨) 등을 알게 된다.
리치와 머시는 매우 가까운 사이로 발전 하는데 알다가도 모를 일은 어떻게 머시가 돈 도 떨어지고 나이도 먹은 인생 낙오자인 리치를 사랑하는가 하는 것. 사랑이 아무리 눈이 멀었다 해도 이 관계는 불가사의다.       
그런데 어쩌다 리치가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마을 지도자의 딸 살리마(레엠 루바니)가 동굴에 숨어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그 재주에 경탄, 살리마를 카불의 노래자랑 TV쇼 ‘아프간 스타’에 출연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살리마는 리치의 힘으로 온갖 장애를 극복, 쇼에 나가 무슬림 미국가수인 캣 스티븐스의 노래를 영어(왜?)로 부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리마 사하르가 오디션에 나가 합격해 쇼에 나갔는데 할리웃 영화이니 만큼 미국인 리치가 아프가니스탄인 살리마의 구세주 노릇을 하고 있다. 
R. Open Road. 일부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0월 20일 화요일

스파이들의 다리(Bridge of Spies)


도노반(탐 행스)이 글리닉케 다리에서 U-2의 조종사 파워즈를 기다리고 있다.

스필버그와 탐 행스 이번엔‘스파이물’


냉전시대인 1962년 독일에서 진행된 미 스파이기 U-2의 조종사와 소련 간첩의 교환을 다룬 스파이 드라마이자 스릴러로 우수한 기능공이 만든 것 같은 준수하고 재미있는 영화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탐 행스가 네 번째로 손잡고 만든 영화로 향수감이 짙은 멜로드라마다.
스필버그는 장인이니 만큼 무슨 영화를 만들어도 특별히 흠 잡을 데가 없는 것은 이 영화에도 적용되지만 영화가 너무 반듯하고 모가 난 점이 없어 큰 충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대상을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은 사진으로 보는 기분이다. 
그러나 볼만한 영화로 긴장감도 꽤 있고 연기와 촬영과 세트와 디자인 등 모든 것이 좋다. 스필버그 영화의 음악은 지난 30년간 존 윌리엄스가 작곡했는데 이번에는 윌리엄스의 건강 문제로 토머스 뉴만이 지었다. 음악이 다소 내용을 압도하는 감이 있다.
영화는 1957년 뉴욕에서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마크 라일런스)이 FBI에 의해 체포되는 긴장감 있는 장면에서 시작해 1962년 동독과 서독을 잇는 글리닉케 다리에서의 아벨과 U-2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즈(오스탄 스토웰)의 교환으로 끝난다.
이 교환을 성사시킨 사람이 뉴욕의 보험전문 변호사 제임스 B. 도노반(행스). 도노반은 먼저 자기 회사에 의해 아벨의 변호사로 선정돼 승산 없는 싸움인 변호에 나선다. 아벨의 재판은 형식적인 것으로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 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에이미 애담스)와 두 딸을 둔 가정적이요 원리원칙적인 도노반은 미국의 헌법정신을 준봉하는 사람. 그는 지혜와 설득력과 협상술을 동원해 아벨을 전기의자 형에서 구해낸다. 이로 인해 그는 시민들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당한다.
한편 소련 상공을 정찰하던 U-2가 격추되면서 체포된 파워즈는 재판 끝에 실형이 선고된다. 이어 소련 측에서 간첩교환을 할 의향이 있다는 시사가 미 측에 전달되면서 도노반은 겨울에 동베를린으로 간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긴장감 감도는 간첩교환 협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이 막 세워질 때 동베를린에서 공부를 하던 미국 유학생 프레데릭 프라이어(윌 로저스)가 체포되면서 도노반은 프라이어까지 구출하기로 결심한다.
계획에 없던 2대1의 교환인데 문제는 파워즈는 소련이, 프라이어는 동독이 붙잡고 있다는 것. 감기에 걸려 계속해 콧물을 흘리는 도노반은 영특한 지혜와 기지 그리고 교활한 협상술을 발휘, 2대1일 교환을 성사시킨다. 마지막 다리 위에서의 새벽 간첩교환 장면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믿음직한 행스가 실팍하면서도 때론 코믹한 연기를 잘하는데 경탄스러운 것은 영국의 셰익스피어 배우 라일런스의 것.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시치미 뚝 떼는 유머와 함께 침착하고 아주 쉽게 연기하는데 오스카상감이다. PG-13. Disney. 전지역.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나라 없는 야수들(Beasts of No Nation)


코맨단트가 아구(왼쪽)에게 포로살해를 지시하고 있다.

아프리카 반군 소년병의 생존 이야기


내전이 끝날 새 없는 아프리카의 반군 소속 소년병에 관한 강렬하고 사실적인 영화로 채 틴에이저도 안 된 순진한 아이들이 악과 폭력의 제물이 돼 짐승으로 변화하면서 자행하는 잔인무도하고 끔찍한 살육에 몸서리가 처진다.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보는 사람의 영육을 유린하는 듯한 절실함을 느끼게 하는데 막상 가슴 아프고 무서운 것은 이런 폭력행위보다 어린 아이들이 무감각한 살육의 짐승들로 변하면서 잃어버리는 순수의 상실이다. 
가나에서 찍은 현장감 있는 촬영과 각본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을 지닌 연출과 서술은 모두 재주 있는 캐리 조지 후쿠나가(신 논브레)의 것으로 특히 소년병 역의 연기 경험이 없는 에이브래햄 아타와 체격과 카리스마가 모두 압도적인 이드리스 알바의 연기가 뛰어나다. 
영화에서 무대인 나라의 이름은 안 밝히고 또 반군들의 종교나 사상과 이념도 모른다. 형과 함께 아버지가 선생인 학교에 다니고 교회에 나가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린 아구(아타)의 삶은 마을로 몰려든 난민들을 쫓아온 반군들의 살육으로 하룻밤 사이 악몽으로 변한다. 
반군에게 아버지와 형이 살해된 뒤 도주한 아구는 곧 이들에게 붙잡혀 소년병이 된다. 반군의 대장은 안팎으로 거대한 카리스마를 지닌 복잡한 성격의 코맨단트(알바). 
아구는 코맨단트의 총아가 되면서 서서히 살육의 짐승으로 변화하는데 아구가 코맨단트의 명령에 따라 체포된 적을 정글용 칼로 살해하는 장면이 눈을 감게 한다. 아구의 첫 살인이다. 이런 혹독한 삶속에서 아구의 유일한 위로는 역시 소년병인 말 없는 스트리카와의 우정.
아이들과 젊은 부하들을 엄격하게 다루면서 밀어붙이는 코맨단트는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나 한편으로는 아구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역을 하는데 아구와 코맨단트의 관계가 드라마로서 영화의 중요한 플롯을 이룬다. 
반군은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마을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이어 반군의 통치자가 있는 도시에 도착한다. 그러나 여기서 통치자가 코맨단트의 공을 무시하고 그에게 응분의 보상행위를 거부하면서 코맨단트는 통치자에게 거역하는 게릴라가 된다. 
아타의 깊이와 너비를 감지하기 힘든 감정과 반응의 표정연기와 알바의 겹겹이 벗겨지는 내면연기는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들의 연기가 아니면 이 영화의 겁나도록 절실한 현실성이 이렇게 강하지는 못할 것이다. R. Bleecker Street. 일부지역.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트리거 모티스’




창백한 올리브 빛 피부에 짧게 깍은 머리 그리고 돗수 높은 쇠테 안경을 쓴 신재성은 30세 정도였으나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큰 키에 날씬하고 손가락은 길고 섬세했는데 말끔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 사람을 잡아 끄는 마력이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도도해 보였다.
신재성은 영국작가 앤소니 호로위츠가 본드소설의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의 TV쇼용 유고를 바탕으로 쓴 최신 제임스 본드 소설 ‘트리거 모티스’(Trigger Mortis^사진)에 나오는 본드 악한이다. 007시리즈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인 본드 악한으로 영어 이름이 제이슨 신(Sin)이어서 본드로부터 ‘타고난 죄인’이라고 조롱을 받는데 본드와는 정반대로 여자에 전연 관심이 없다.
신재성은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붙잡아 놓은 본드에게 “난 그 때 영혼과 인간성을 다 빼앗겼어. 그리고 나는 모든 느낌을 상실했지. 내 자신이 죽음이야”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
소설은 ‘골드핑거’가 끝난지 2주 후에 시작한다. ‘골드핑거’의 푸시 갤로어가 본드걸이 됐지만 본드는 한 여자와 오래 못 있는데다가 갤로어는 레즈비언이어서 둘은 얼마 못 가 헤어진다.
1957년 미국과 소련간에 냉전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두 나라가 막 우주경쟁에 들어 섰던 때. 본격적인 플롯인 소련의 미국 로켓발사 사보타지가 있기 전 서막식으로 본드는 독일의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리는 그랑프리에 마제라티를 타고 참가, 소련의 영국인 선수 살해 음모를 저지한다.
본드는 여기서 처음 신재성을 목격하고 소설의 본격적인 본드걸로 미 정보기관 요원인 제파디 레인을 만나는 것도 경주트랙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재성의 대저택 슐로스(성이라는 뜻) 브론자트에서다.
소련첩보기관인 악명 높은 ‘스메르쉬’(SMERSH)의 미국의 인공위성을 적재한 뱅가드로켓 발사 사보타지에는 나치가 만든 위폐제조기로 찍은 달러가 사용되는데 여기에 신재성이 동참하면서 마지막에 그와 본드간에 사투가 벌어진다.
신재성은 왜 복수심에 불타는 산송장 같은 인간이 되었을까. 6.25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때문이다. 1927년생인 신재성은 친 할머니가 민비를 모신 서울 양반집 태생으로 서울대를 나왔다. 그런데 6.25가 나면서 가족이 피난을 가던 중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300여명의 양민이 학살 당했을 때 신재성은 자기 부모와 두 여동생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 남는다.
그 후 부산으로 내려간 신재성은 피난 가기를 거절한 할머니가 준 여러 알의 푸른 다이아먼드 중 하나를 광복동 보석상에 팔아 받은 돈으로 하와이로 밀항한다. 이어 그는 뉴욕으로 옮긴 뒤 ‘블루 다이아먼드’라는 건설 및 청소회사를 차려 크게 성공, 미국내 최고의 한국인 부자가 된다.
이런 과거를 지닌채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재성이 소련측과 손 잡고 미 로켓발사 사보타지에 나선 것은 당연지사라고 보겠다. 그런데 사실 이 사보타지는 신재성이 계획한 뉴욕 맨해탄에 대한 본격적인 테러를 위한 양동작전인 셈이다.
본드의 악인들이 다 그렇듯이 신재성도 매우 잔인하고 사악하며 사무적이요 냉소적이다. 그런데 기차게 흥미 있는 것은 신재성이 자기 적을 죽일 때는 죽을 자로 하여금 죽는 수단을 선택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 때 쓰여지는 것이 화투장이다. 신재성은 자신의 희생물이 될 사람 앞에 화투장의 뒷면이 보이도록 깔아놓은 뒤 그로 하여금 한 장을 고르라고 지시한다. 뒤집은 화투장에는 ‘교수’와 ‘생매장’과 ‘독약’ 등 여러 가지 죽음의 수단들이 적혀 있는데 신재성에게 붙잡힌 본드는 ‘생매장’ 화투장을 골랐다가 생매장 당해 죽을 고생을 한다.
신재성의 최종 공격 목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이 빌딩을 파괴할 폭탄을 싣고 맨해탄 지하를 질주하는 지하철에서 본드와 신재성이 처절한 격투를 벌이면서 책은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모든 것이 끝나고 본드와 제파디는 플라자호텔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눈 뒤 헤어진다.
310쪽의 강건체 스타일로 군더더기 없이 쓴 책이 진행이 빠르고 스릴과 재미가 있어 순식간에 읽어 내려 갔다. 본드소설 답게 마제라티와 애스턴 마틴 등 차와 섹시한 여자들과 본드 악한 그리고 와인과 마티니 및 오메가시계가 나오는데 다소 과거 본드영화들인 ‘닥터 노’와 ‘선더볼’ 등의 일부를 빌려다 쓴 듯한 느낌이 있다.
때로 터무니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더러 있지만 원래 본드얘기는 꽤 터무니없는 것이 사실. ‘파트 투’부터 본격적으로 흥분감을 북돋우는 소설에는 본드의 오랜 주변인물들인 M과 Q와 모니페니 등이 재등장하고 본드의 권총인 월터PPK도 다시 사용된다. 그런데 왜 호로위츠는 한국인을 본드 악한으로 골랐을까.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과연 어느 한국배우가 신재성 역을 맡을지  궁금하다.
‘트리거 모티스’와 때를 맞춰 본드시리즈의 음악과 노래들에 관한 ‘제임스 본드 노래들’(The James Bond Songs)이 출간됐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0월 13일 화요일

영화음악 모음집 ‘시네마’ 출반하는 안드레아 보첼리




“음악보다 음성을 더 사랑해 가수가 돼”


팝 부를 땐 내가 테너란 것 잊어
안그러면 우스꽝스런 노래 나와
나의 현재는 이미 내 꿈을 초과
난 행운아로 매일 하늘에 감사



클래시컬 뮤직과 팝뮤직을 넘나들며 노래 부르는 이탈리아의 맹인 수퍼스타 크로스오버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56)와의 인터뷰가 지난달 23일 웨스트할리웃에 있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본부에서 있었다. 인터뷰는 보첼리가 오는 23일에 내놓을 영화음악 모음집‘시네마’(Cinema) 출반을 기념해 마련됐다. 음반에는‘마리아’(웨스트사이드 스토리),‘라라의 노래’(의사 지바고),‘문 리버’(티파니에서 아침을) 등 모두 15곡이 수록됐다. 그는 이 음반을 위해 9월18일 할리웃의 돌비극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콘서트는 11월27일 하오 9시 PBS를 통해 방영된다. 잿빛이 섞인 머리와 큰 키에 색깔 있는 안경을 쓴 보첼리는 카리스마가 있었는데 유머와 위트를 섞어 약간 서툰 영어로 질문에 길고 자세하게 대답했다. 가끔 영어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은 통역의 힘을 빌렸다. 보첼리는 이탈리안답게 여자 얘기가 나오면 신이 나서 활기차게 대답했다.  

-왜 당신은 제니퍼 로렌스와 셀린 디온 같은 팝가수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가.
“나는 음성을 사랑한다. 그것이 내 첫 번째 정열이다. 내가 가수가 된 것도 음악보다는 음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훌륭한 음성들과 무대를 함께 하는 것을 영광이요 기쁨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당신 같은 출중한 음성과 다른 가수들의 음성에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
“차이는 음성의 질에 달려 있다. 음성의 질이 대단치 않은 가수들보다는 그것이 훌륭한 가수들과 노래를 부르는 것이 물론 더 낫다. 왜냐하면 그에 의해 내가 고무되기 때문이다.”

-왜 오페라 가수가 다른 가수들보다 월등하다고 인식되는가.
“그것은 오페라 창법이 오랜 세월을 통해 기술적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오페라 가수는 오케스트라의 벽을 뛰어 넘어 음정을 고르게 지키면서 극장 맨 끝 좌석에까지 들리도록 노래를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페라가 수백 년에 걸쳐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것이며 또 직접적으로 청중의 내장에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크로스오버 가수로서 당신은 클래시컬 뮤직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팝뮤직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난 크로스오버 가수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은 클래시컬과 팝뮤직 사이에 새 스타일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난 다르다. 나는 오페라를 부를 때는 오페라 언어로 최선을 다하고 팝을 부를 때는 내가 테너라는 것을 잊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스꽝스런 노래가 나온다. 카루소와 질리와 델모나코 그리고 파바로티 등 많은 유명 가수들도 다 가요를 훌륭하게 불렀다. 그러니 왜 나라고 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팝을 불러 오페라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극장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효과도 있다.”

보첼리가‘시네마’ CD 출반 기념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영화음악은 어떻게 선정했으며 왜 할리웃에서 노래했는가.
“LA가 영화와 영화음악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선정은 영화음악의 걸작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로 했다. 나는 어렸을 때 시나트라가 부르는 ‘문 리버’와 ‘올드 맨 리버’ 그리고 마리오 란자가 부르는 ‘비 마이 러브’ 등을 자주 들었는데 이 노래들은 모두가 걸작이다.”

-이틀 후 가질 파바로티 추모 콘서트에 관한 소감은.
“마에스트로 파바로티는 내게 있어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우리는 같이 노래에 관해 많은 것을 자주 얘기했다. 내가 해외여행 할 때도 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를 오래 나누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 대해 달콤한 기억을 갖고 있다. 나는 그를 인간과 가수로서 모두 좋아한다. 내 아이폰에는 그의 노래 전곡이 담겨 있다. 그런 예술가의 특권은 레코드를 통해 결코 죽지 않고 우리의 삶에 남는다는 것이다.”

-파바로티는 테너는 자연 음성이 아니고 스스로 찾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테너는 처음부터 공부해 갖춰야 하는 기술이다. 오페라 가수의 창법은 아기가 소리 질러 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기처럼 오페라 가수도 목소리를 잃지 않고 하루 종일 울 수 있다. 문제는 말을 할 줄 알게 되면 노래의 기술을 잊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노래 부르는 것의 적이다. 따라서 오페라 가수가 할 일이란 자연이 그에게 준 것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갓난아이가 우는 것을 보면 그의 입이 테너가 고음을 부를 때와 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것은 정말로 진실이다. 내 아이 에이모스가 아기 때 울면 나는 가끔 그의 목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목이 움직이는 것을 공부했다. 한 번은 아이가 토하기까지 했다.”

-목소리의 힘이란 어떤 것인가.
“예술은 인간이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서로 대화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목소리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특별한 언어가 있다. 가수의 노래를 듣고 청중의 누군가가 눈물을 흘린다면 바로 그것이 목소리의 힘이다.”

-러시아 음악을 좋아하는가. 
“러시아는 노래의 오랜 전통을 지닌 나라다. 따라서 가수들이 많은데 특히 베이스와 소프라노들이 많다. 노래 외에도 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데 나는 그들이 쓴 책을 다 읽었다. 곧 톨스토이의 무덤을 방문하기를 꿈꾸고 있다.”

-당신은 여러 나라 언어로 노래하는데 어떻게 다른 언어에 적응하는가.
“듣는 귀가 좋으면 어렵지 않다. 각 언어는 각기 소리가 달라 좋고 또 아름답다. 영어는 매우 음악적이다. 그러나 그것의 문법은 질색이다.”

-아까 말한 말하는 것은 노래의 적이다 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 소리인가.
“말을 많이 하면 음성을 빼앗기기 때문에 가수는 침묵을 종일토록 지켜야 한다. 모든 위대한 가수들이 다 그랬다”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여자들이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들이 갖춘 여성적인 면이다. 여자로서의 욕망과 기쁨을 말한다. 남자가 갖고 있는 것을 여자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둘은 늘 이끌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자가 보다 여성적일 경우 더 좋아한다. 그밖에도 음성과 피부 등 좋아할 점이 많다.”

-여성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주 어려운 질문인데 다음과 같은 일화로 답을 대신하겠다. ‘여자들에 관해 내가 이해한 모든 것’이라는 책을 쓴 천재가 있다. 300쪽 짜리인데 열어 보니 전부 백지라는 것이다. 기찬 아이디어다.”

-당신이 지금 가진 것 외에 더 갖고 싶은 것이 있는가.
“특별히 기대하는 것이 없다. 이미 내 현실이 내 꿈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난 행운아로 매일 하늘에 감사한다.”

-집에선 어떻게 지내는가.
“하루가 매일 다르다. 칸트처럼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았으면 좋겠다. 난 거의 매일 다른 도시에 살면서 침대와 식당과 음식을 바꾸어가며 산다. 여자만 안 바꾸는데 그것을 바꾼다면 재미있을 것이다.”(인터뷰에는 그의 부인 베로니카도 참석 옆에서 지켜봤다)

-당신이 예전에 돈 호세로 나온 ‘카르멘’ 음반지휘는 한국의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했는데 그와 친한가.
“난 그를 잘 안다. 우린 아주 중요한 두 번의 녹음을 했는데 하나는 ‘신성한 아리아’(Sacred Arias)다. 아마 내 클래시컬 음반 중에 가장 많이 팔렸을 것이다. 그 때 내 음반회사는 누가 그런 것을 듣겠느냐면서 취입을 원치 않았었다. 그런데 500만장이 팔렸다. ‘카르멘’은 파리에서 녹음했다.”

-멋쟁이인데 옷은 누가 골라주는가.
“내 스타일리스트와 베로니카다.”

-당신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는데 인상이 어땠는가.
“내가 그에 대해 말할 자격은 없지만 그는 신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겸손하고 지적이며 총명하고 강하다. 그가 교황이 되고 TV에서 말하는 것을 처음 듣고 나는 울었다. 그의 음성 속에서 매우 심오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람을 가진 것은 우리 모든 인류에게 행운이다.”

-언제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을 알았는가.
“어렸을 때 기숙사학교에 다닐 때다. 그 때 연말 쇼가 열렸는데 누군가 나보고 노래를 부르라고 앞으로 밀어냈다. 그런데 청중이란 것이 온통 내 또래의 아이들어서 장내는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오 솔레 미오’를 불렀는데 아이들이 계속해 떠들어 첫 부분은 아마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노래의 첫 고음을 부르자 장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었다. 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환호를 보냈다. 그것이 내가 내 안에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첫 경우다. 그 후 나의 선생님이 내게 ‘네 음성은 네 특기가 아니라 신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 후 나는 지금까지도 그 말을 내 신념으로 삼고 있다. 지금은 옛날보다 더 그 말이 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목소리를 어떻게 돌보며 그것을 잃어 본 적이 있는가.
“특별히 돌보지는 않는다.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고 많이 안 먹는다. 난 아마 단 한 번도 대마초를 피워본 적이 없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목소리는 불행하게도 여러 번 잃어버린 적이 있다. 테크닉이 안 좋았을 때다. 그 때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랬다. 그리고 한 번은 이탈리아가 축구경기 챔피언이 됐을 때 밤새 소리를 질러 콘서트 스케줄을 재조정해야 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스티브 잡스(Steve Jobs)


스티브 잡스(마이클 화스벤더)가 자신의 신제품을 구상하고 있다.

이기적 천재, 잡스가 이룬 업적과 삶


둘 다 오스카 수상자들인 대니 보일(슬럼독 밀리어네어)이 감독하고 아론 소킨(소셜 네트웍)이 각본을 쓴 애플 컴퓨터의 공동 창립자인 스티브 잡스(마이클 화스벤더)의 전기인데 말의 홍수요 언어의 범람이다.
소킨 특유의 속사포 같은 대사가 2시간 내내 쏟아져 나오면서 극적 전개나 정경을 무시해 영화 내용과 인물들에게 전연 감정이입이 안 된다. 연극 같은 영화로 기능적으로는 우수하나 재미는 없다. 마치 보는 사람의 지능 테스트라도 하겠다는 듯이 기술용어를 포함한 무수한 단어와 언어를 들으면서 과다한 영양공급을 받는 듯한 거북한 포식감에 빠지게 된다.
각본이 연출을 앞선 영화로 화려한 스타일의 보일을 이런 고도의 지적인 영화감독으로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이 아니다. 영화는 잡스를 둘러싸고 몇 명의 주요 인물들이 들락날락하면서 대화하고 언성을 높이는데 잡스의 세 번에 걸친 새 컴퓨터 소개가 작품의 주요 플롯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맨 처음 1984년 잡스가 자신이 고안한 맥을 대중에게 소개하기 전의 준비과정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애플 회장 존 스컬리(제프 대니얼스가 잘 한다)에 의해 회사에서 쫓겨난 잡스가 1988년 자기 회사 넥스트를 설립한 뒤 역시 자신이 만든 새 컴퓨터를 소개하기 전의 준비과정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1998년 다시 애플사로 돌아온 잡스가 혁명적인 신제품 i맥을 소개하기 전의 준비과정이 얘기된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애플제품 선전영화가 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이 잡스의 충신과도 같은 일벌레 마케팅 책임자 조앤나 호프만(케이트 윈슬렛이 실팍한 연기를 한다)과 존 스컬리와 잡스가 성공하기 전 그와 함께 차고에서 컴퓨터를 고안한 프로그래머 스티브 워즈니액(세스 로건의 역은 아주 미약하게 개발돼 아까운 배우가 소모품이 된 셈) 그리고 맥의 소프트웨어 디자이너 앤디 허즈펠드(마이클 스툴바그).
잡스와 이들이 마치 스크루볼 코미디처럼 요란하게 대사를 겹쳐가면서 떠들어대는데 도대체 그런 말의 헛된 성찬에 관심이 가질 않는다. 그나마 영화의 진행 속도는 배우들이 말하는 속사포식 대사의 속도처럼 빨라 크게 지루하진 않지만 이 영화는 아이폰을 물신 숭배하듯 하는 골수분자 아이폰 사용자들의 것이라고 하겠다.
재미보다 지적인 것에 치중한 영화로 페이스북 창시자인 마크 저커버그의 얘기를 그린 ‘소셜 네트웍’과 같은 부류의 영화이지만 재미는 ‘소셜 네트웍’에 크게 못 미친다. 영화는 잡스를 이기적인 천재로 묘사하면서 그의 내면 묘사를 상세하게 보여주려고 했지만 충분치 못하다.
냉정한 인간으로 천재이자 기인인 잡스도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서브플롯으로 잡스와 그의 전 애인 크리산(캐서린 워터스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난 조숙하고 똑똑한 5세난 딸 리사(매켄지 모스가 깜찍한 연기를 한다)와의 관계, 그 중에서도 부녀관계를 영화의 나머지 부분과는 다르게 감정적으로 그렸으나 너무 늦었고 또 충분치도 못하다. 무슨 역을 맡아도 잘 해내는 화스벤더가 확신에 찬 연기를 하는데 연기파 배우들의 연기는 볼만하다. R. Universal.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빅토리아 (Victoria)


빅토리아가 존네(왼쪽) 친구의 등에 거꾸로 업혀 클럽에서 나오고 있다.

대마초·은행강도… 방황하는 베를린의 청춘


현대 베를린의 방황하는 청춘들의 은행강도와 그 후유증을 다룬 독일제 소품으로 상영시간 2시간을 손에 든 카메라 한 대로 단 한 번의 휴지도 없이 찍은 실험성 강한 흥미 있고 스타일 좋은 영화다.
특히 밤의 베를린 시내를 샅샅이 누비고 다니면서 찍은 버려진 듯한 도시의 적막과 소외감이 절실한데 이런 분위기 속을 서푼짜리 젊은 아마추어 범죄자들이 헤집고 다니면서 별 뜻도 없는 대사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대마초를 태우고 또 클럽에서 전자음악에 맞춰 광란의 춤을 추는 얘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들의 이런 행각을 보여주는 첫 부분은 다소 지나치게 제멋대로여서 보면서 빠져 들기에 인내심이 필요하나 이어 후반에 접어들어 은행강도와 그 후의 실수와 죽음이 있는 재난이 전개되면서 역동적인 스릴러로 변한다. 살벌한 것 같으면서도 감정이 있는 영화다.
스페인에서 온 처녀 빅토리아(라이아 코스타)는 베를린 시내 카페 종업원으로 밤에 혼자 클럽에서 춤추다 새벽에 카페로 돌아가려던 중 자기에게 접근하는 청년 존네(프레데릭 라우)와 대화를 나눈다. 이어 빅토리아는 존네와 그의 친구들인 박서(프란츠 로고브스키), 블링커(부라크 이기트) 및 푸스(막스 마우프) 등과 함께 행동을 같이 한다.
이들은 아파트 지붕에 올라가 술 마시고 대마초를 태우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빅토리아가 스페인 사람이어서 대사는 대부분 서툰 영어로 주고 받는다. 말이 많은데 이들을 따라 다니면서 역동성 있게 젊은이들의 모습을 포착한 촬영이 상당히 아름답다.
이어 직업 갱스터 안디(안드레 헤닉케)가 박서에게 은행강도를 지시한다. 박서는 감옥에 있을 때 안디의 보호를 받아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새벽 강도에 가담하는 것이 빅토리아인데 빅토리아는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무모한 것인지 알쏭달쏭하게 어느새 정이 든 존네의 잠깐이면 된다는 말에 순순히 응해 범행용 자동차를 운전한다.
은행강도는 순탄하게 성공하고 이들은 자축하기 위해 다시 클럽엘 들러 신나게 춤을 춘다. 그러나 곧 이어 경찰이 골목에 주차된 이들의 차를 발견하면서 도주와 추격 그리고 총격전이 일어난다. 마지막 부분은 비감하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처럼 그렸는데 마음이 싸하니 아프다.
연기들이 다 좋은데 특히 코스타와 라우가 좋은 콤비를 이루면서 튼튼하고 감정적인 연기를 한다. 새벽 4시 반에 촬영을 시작해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시내 22곳을 다니면서 촬영했다. 세바스티안 쉬퍼 감독. 성인용.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다친 영혼들을 위한 음악



지난 주말 모두 실화가 원전인 ‘스파이들의 다리’와 ‘스티브 잡스’의 프레스 정킷차 뉴욕엘 다녀왔다. 습기가 축축하니 배인 잿빛 하늘 아래 센트럴파크 앞 숙소를 나서니 시내트라가 부른 ‘오텀 인 뉴욕’이 생각났다. 토요일 저녁은 자유로워 얼마 전 알게된 줄리아드 음대의 강효 바이얼린 교수와 한국의 체임버 오케스트라 세종 솔로이스츠의 총감독 강경원씨 내외와 함께 저녁을 하면서 음악과 영화와 책에 관해 환담을 했다.
자연히 대화는 음악 얘기로 이어졌는데 토요일은 강효씨가 줄리아드 예비학교의 꼬마 천재들을 가르치는 날이었다. 이 예비학교를 ‘오! 캐롤’을 부른 닐 세다카가 다닌 얘기와 줄리아드의 전설적인 바이얼린 여교수 도로시 디레이 그리고 현재 LA의 디즈니 홀에서 LA필과 시몬 볼리바 심포니가 돌아가면서 연주하는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 등에 관해 얘기를 했다.
우리는 과연 베토벤 사이클을 잘 지휘할 사람으로 누가 가장 적합할까 하는 질문을 하다가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좋을 것 같다는데 동의했다. 두 사람은 다 매우 겸손하고 조용하고 따스하며 평화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을 만나기 전만해도 줄리아드 바이얼린 교수라는 생각에 공연히 위압감을 느꼈었는데 함께 하기가 너무 편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얘기를 나눴다.
그들과 헤어진 뒤 호텔로 돌아오면서 얼마 전 월스트릿 저널에서 감동 깊게 읽은 저명 콘서트 피아니스트 바이런 재니스의 글이 생각났다. 그는 ‘다친 영혼들을 위한 음악’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음악은 아름다운 것 외에도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면서 잘 치고 못 치고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한 손가락으로 음 하나를 튕기어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니스는 이어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경험을 적었다. 1960년 냉전의 분위기가 고조에 다다랐을 때 나는 소련과의 첫 번째 문화교류의 사절로 모스크바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내가 무대에 오르자 청중들은 “U-2, U-2”와 “클리번, 클리번”을 외치면서 야유를 했다. U-2는 소련이 그 때 막 격추한 미 스파이기의 이름이고 ‘클리번’은 2년 전에 국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경연대회서 우승한 밴 클라이번이다. 그들에게는 클라이번만이 미국의 유일한 훌륭한 피아니스트인 것처럼 보였다.      
청중이 조용해진 뒤 나는 모차르트의 소나타(G장조)와 슈만의 ‘아라베스크’ 그리고 쇼팽의 ‘장송행진곡’ 소나타를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귀가 먹을 것 같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고 청중들이 무대로 몰려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았다.
재니스는 음악은 이렇게 적대감을 눈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서 음악은 영혼 치유의 능력뿐 아니라 육체적 문제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11세 때 사고로 새끼손가락이 영구히 마비됐고 지난 40여년 간을 관절염에 시달리면서도 늘 음악이 치유의 힘이 되었다고 한다. 재니스는 피타고라스가 음악의 치유 능력을 말한 ‘음악적 약’이 자기 생애의 시도동기가 되어 왔다고 말했다.
음악은 참으로 다치고 피곤한 영혼을 위한 명약이다. 나도 마음이 힘들 땐 클래시컬 음악을 들으면서 위로한다. 우리나라와 아일랜드의 노래가 슬픈 것이 많은 까닭은 둘 다 어려운 역사를 지닌 탓인데 두 민족이 다 그런 슬픔을 슬픈 노래로 달래고 있다.
피곤한 직장의 하루가 끝나고 귀가 길에 술집에 들러 음주 방가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모차르트도 작곡한 ‘타펠무직’은 귀족들의 저녁식사 소화제 구실을 했고 낯선 사람들끼리 탄 엘리베이터 안의 긴장을 풀라고 트는 것이 엘리베이터 음악이다. 또 태아에게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주면 IQ가 좋아진다는 ‘모차르트 효과’도 있다.
음악의 질병 치유능력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됐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파라셀루스의대 여교수 베라 브란데스는 음악을 처방약으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프로그램은 환자의 문제에 따라 그에 맞는 음악을 처방해 주는데 4주간 주 5일 매일 30분씩 이 음악을 들었더니 질병치료에 큰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브란데스가 다루는 질병은 주로 정신적 불안정과 통증과 같은 문명병으로 음악처방은 전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이다(뉴욕타임스).
런던에서는 음악을 각종 지하철 범죄 퇴치용으로 써 효과를 봤다. 지하철 스피커로 비발디와 헨델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틀었더니 날치기 퍽치기 및 낙서 등 각종 범죄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트는 음악은 후기 낭만파 이전의 바로크나 고전파 음악이라고 한다(LA타임스).
‘오디세이’의 사이렌은 그 노래 소리로 인간의 혼을 홀려 사람 잡는 능력을 지닌 반면 음악은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도 한다. 공상 과학영화 ‘소일런트 그린’에서 에드워드 G. 로빈슨이 안락사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침대 앞 대형 스크린에 산과 들과 바다와 태양과 전원풍경이 펼쳐지면서(사진) 흐르는 음악이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제 1악장이다. 그는 이 음악을 들으며 평화롭게 ‘고향으로 돌아간다’. 가능하다면 나는 말러의 ‘부활’교향곡을 들으며 이 세상과 작별하고 싶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0월 5일 월요일

화성인(The Martian)



화성에 혼자 남은 마크(맷 데이먼)는 생존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다.


‘화성의 로빈슨 크루소’구출작전


‘에일리언’과 ‘프로메테우스’ 등 외계영화를 연출한 늘 믿을 만한 리들리 스캇이 감독한 지적이요 튼튼하고 잘 짜여진 외계 모험영화로 흥분감보다는 정신집중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그 것이 재미를 깎아먹는다.
화성에 달랑 혼자 남게 된 우주비행사의 생존 드라마로 ‘화성의 로빈슨 크루소’라고 하겠는데 내용이 오늘이라도 당장 일어날 수 있는 것이어서 화성에서 일어나는 얘기이지만 생소하지 않고 아주 사실적이다.
이주 똑똑한 영화로 촬영과 연기와 세트 등이 다 훌륭한데 굉장히 유머(1인 유머이지만)가 많아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고 있다. 과학용어가 좀 많아 잘 알아듣기가 힘든 점도 있으나 그것을 몰라도 전체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다. 
팀장 멜리사(제시카 체스테인) 등 4명의 동료(케이트 마라, 마이클 페냐 등)와 함께 화성탐사에 나선 마크(맷 데이먼)가 엄청난 흙먼지 폭풍을 만나 안테나 파편에 찔려 쓰러진다. 멜리사 등은 마크가 죽은 줄로 알고 급히 우주선을 타고 귀환길에 오른다.
뒤늦게 깨어난 마크는 적막강산 화성에 달랑 혼자 남아 그 때부터 생존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짠다. 식물학자인 마크는 낙천가요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자로 한 달분(다음 화성탐사는 4년 후에 나 있다)의 식량을 주도면밀하게 배분하는가 하면 자신과 동료들의 인분으로 감자밭까지 만들어 자급자족을 한다. 마크는 자기비하적인 신랄한 유머를 혼자 중얼대며 무료를 달래는데 영화의 유머는 전부 이런 마크의 독백에서 나온다.
한편 지구에서는 마크의 사망이 공식 발표되는데 화성의 표면을 모니터하던 미 국립항공우주국(NASA)의 직원이 화성의 표면에서 동작을 포착하면서 마크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NASA와 캘리포니아의 제트추진연구소가 공동으로 마크 구출작전 준비에 들어간다(이 두 기관의 직원들로 제프 대니얼스, 크리스튼 윅, 션 빈, 치웨텔 에지오포 등 앙상블 캐스트가 나온다). 이들을 돕는 것이 뜻밖에도 중국.
그러나 결국 가장 신속한 구출은 지구로 귀환 중이던 우주선의 마크의 동료들에 의해 이뤄질 수밖에 없게 된다. 문제는 이들이 다시 화성으로 돌아가다 사고라도 나면 1인 구출을 시도하다 5명이 떼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도덕적 딜레마.     
구출과정이 상당히 긴장감 있게 묘사되는데 우주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스탠리 쿠브릭의 ‘2001: 우주 오디세이’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라스트신은 정말로 필요 없는 사족이다. 들뜨지 않은 침착하고 이성적인 모험영화로 요르단에서 찍은 외부촬영이 매우 사실적이요 아름다운데 무슨 역이든지 잘 해내는 데이먼이 연기를 잘 한다. PG-13. Fox.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전설(Legend)


냉정한 레지(왼쪽)와 사이코 로니 형제는 스타처럼 으스대는 갱이었다.

‘쌍둥이 갱스터’ 1인2역 탐 하디 연기 볼만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런던의 이스트엔드 지역을 말아먹던 일란성 쌍둥이 갱스터 형제 레지와 로니 크레이의 실화를 만화적으로 야단스럽고 뻔뻔하게 그린 재미있는 오락물이다.
화려한 화면에 표현되는 찌르고 쏘고 두들겨 패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폭력이 보는 사람의 감관을 유린하는데 이런 폭력 속에 다소 엉뚱한 유머가 섞여들어 고약한 티를 낸다.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말초신경 자극적인 작품으로 볼만한 것은 두 형제 역을 혼자 맡아 한 탐 하디의 연기다. 실로 대담무쌍하고 오만방자한 연기로 성격이 완전히 다른 레지와 로니 역을 변화무쌍하게 보여준다. 강타를 맞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연기로 상감이다.
대뜸 레지와 로니가 이미 암흑세계의 세력을 장악한 1966년도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레지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프란시스(에밀리 브라우닝-이 역은 다소 미흡하게 쓰여졌으나 브라우닝이 호연한다)가 두 형제의 잘 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는 식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처음에 크레이 형제가 망치를 무기로 삼아 라이벌 리처드슨 갱과 펍에서 지역 관할문제를 놓고 벌이는 유혈폭력 장면부터 피가 튄다. 완전히 세력을 장악한 형제는 신사복을 빼입고 으스대면서 동네를 활보하고 여가수가 미 팝송 ‘메이크 더 월드 고 어웨이’를 부르는 사치스런 클럽을 드나든다. 둘은 세간의 이목의 조명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반영웅들이다.
형제와 둘의 졸개들의 범죄행각과 이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런던 경시청 형사 레나드(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의 노력과 함께 형제의 범죄세계의 내부사정이 상세히 묘사되면서 종종 인정사정없는 폭력이 횡포를 부린다.
레지와 로니는 완전히 다른 성격과 행동양식을 지닌 쌍둥이. 레지는 냉정하고 매력적이며 논리적인 지도자 형인 반면 안경을 쓴 동성애자인 로니는 사이코. 언제 무분별한 폭력성이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인물로 하디가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연기로 이 희비극적인 인물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육체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모든 것을 소진하 는 연기다.
로니는 가공스런 폭력을 구사하면서도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차와 케익을 즐기는 마마보이인데 이런 그의 모습은 갱영화 ‘백열’의 제임스 캐그니를 연상케 한다. 조연진들이 훌륭한 연기파들이나 개개인의 특성이 썩 잘 묘사되진 못했다.
채즈 팔민테리가 크레이 형제와 손을 잡고 일을 하는 미국의 갱스터로 데이빗 튤리스가 크레이 형제의 사업고문으로 그리고 폴 베타니가 형제의 라이벌 갱스터로 각기 나온다. 이들의 얘기는 지난 1990년에도 ‘크레이즈’(The Krays)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졌었다. 브라이언 헬게랜드 감독(각본 겸). R. Universal.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불멸의 베토벤’




개인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모두 혁명적이었던 베토벤처럼 극적인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평생을 질병과 우울증 그리고 고독과 짝사랑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자신의 이런 운명에 굴복치 않은 프로메테우스와도 같은 저항인이었다.
음악가로서 청각을 잃은 베토벤의 삶은 역경을 극복한 승전가로 그의 변덕스런 성격과 드라마틱한 인생이야 말로 영화의 소재로서 안성맞춤이다.
베토벤에 관한 영화로 고전 걸작은 프랑스의 거장 아벨 강스가 감독한 ‘베토벤의 삶과 사랑’(The Life and Loves of Beethoven·1937)이다. 베토벤의 일생을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한 표현력 강한 작품으로 덩지가 큰 코주부 프랑스 명우 하리 바우어가 베토벤으로 나와 강건한 연기를 한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베토벤이 32세 때인 1802년 10월 휴양 중이던 비엔나 인근의 광천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서의 산책 장면. 청각을 거의 상실한 베토벤이 시골길을 산책하다 나무 밑에 앉아 머릿속에 떠도는 새소리, 냇물소리, 대장간소리 그리고 천둥과 빗소리를 들고 있는 악보에 음표로 적는다. 이 때 온갖 소리를 사용한 음향효과가 극적이요 아름다운데 이 장면은 베토벤이 ‘전원 교향곡’을 작곡하는 모습이다.
나는 지난 2006년 5월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그가 묵으면서 유서를 썼던 하일리겐슈타트의 집을 찾아갔었다. 그 때 비를 맞으면서 베토벤이 거닐었을 보리수 길을 따라 걸으며 잠시나마 베토벤의 고뇌와 고독을 생각했었다.          
베토벤 영화로 잘 만든 또 다른 것은 게리 올드맨이 베토벤으로 나오는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1994·사진). 베토벤의 개인비서이자 그의 전기를 쓴 안톤 쉰들러가 베토벤 사후에 발견된 ‘불멸의 연인’에게 남긴 연애편지를 근거로 베토벤의 여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베토벤의 삶을 회상하는 식으로 엮었다. 영화음악은 조지 솔티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이안 하트가 베토벤으로 나와 그 때까지의 교향곡의 틀을 완전히 바꿔 놓은 ‘에로이카’ 교향곡을 작곡할 때의 내용을 다룬 ‘에로이카’(Eroica·2003)도 좋은 베토벤 영화로 사운드트랙의 음악은 존 엘리옷 가디너가 지휘했다. 그리고 청각장애와 고독에 시달리는 베토벤(에드 해리스)과 그가 자신의 악보 정리를 위해 고용한 여음악학도와의 관계를 그린 여류 아그니스카 홀란드 감독의 ‘카피잉 베토벤’ (Copying Beethoven·2006)도 볼만하다. 사운드트랙의 피아노 연주는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것이다.
이들 극영화 못지않게 흥미 있는 것이 기록영화 ‘베토벤을 찾아서’(In Search of Beethoven·2009)이다. 유명 음악인들과 음악학자 및 역사학자들과의 인터뷰와 베토벤의 음악과 서한 등을 통해 베토벤의 개인적 삶과 음악 그리고 그의 예술혼을 다루었다.
그런데 새로 베토벤 영화를 만든다면 과연 어느 배우가 베토벤으로 적합할까. 내 생각에는 케이블 TV 쇼타임의 인기 시리즈 ‘정사’의 도미닉 웨스트가 적격이다.
베토벤의 음악 중 삼척동자라도 아는 것이 ‘타 타 타 타’로 시작되는 ‘운명’ 교향곡의 제1악장 첫 부분과 ‘합창’ 교향곡 제4악장의 합창 ‘환희의 송가’일 것이다. ‘운명’의 첫 부분은 디스코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1970년대 중반 월터 머피에 의해 ‘베토벤의 다섯 번째’라는 디스코로 편곡돼 빅 히트를 했었다. 이 곡은 그 후 눈이 먼 여자 피겨스케이터의 역경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로맨스 드라마 ‘아이스 캐슬’의 스케이팅 장면에서 멋있게 쓰여졌다.
‘환희의 송가’가 폭력장면에서 쓰여져 변태적인 쾌락감을 느끼게 한 것이 스탠리 쿠브릭이 감독하고 말콤 맥도웰이 주연한 사회비판 영화 ‘클라크웍 오렌지’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제목으로 쓰여졌다. 아내와 아들을 둔 목사가 소녀 때 데려다 키워 성장한 눈 먼 거트루드를 사랑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비극이다. 영혼의 삶과 세속의 삶의 혼란 속에서 빚어지는 드라마로 1946년에 신비롭게 아름다운 미셸 모르강 주연의 프랑스 동명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음악의 신과도 같은 베토벤보고 “저리 물러가라”고 노래한 락뮤직이 있다. 비틀즈가 요란하게 부른 ‘롤 오버 베토벤’(Roll Over Beethoven). 동네 DJ에게 로킨 리듬 뮤직을 틀어 달라는 편지를 쓰겠다면서 “베토벤아 무덤에서 돌아누워라/그리고 차이코프스키에게도 그 뉴스를 말해라”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이 노래는 원래 미국 록가수 척 베리가 부른 것을 베리의 팬들인 비틀즈가 편곡해 불러 히트했다.
LA필이 요즘 LA 다운타운의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2015~2016시즌 개막곡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전 9곡을 연주하고 있다. ‘불멸의 베토벤’(Immortal Beethoven)이라는 제목으로 11일까지연주되는 사이클은 모두 베네수엘라 태생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음악감독인 LA필(제1, 2, 5, 6번)과 베네수엘라의 청소년 오케스트라 시몬 볼리바 심포니 오케스트라(제3, 4, 7, 8번)가 번갈아가며 연주하고 제9번은 두 오케스트라와 LA 매스터코랄이 함께 연주한다.
문의는 laphil.com이나 (323)850-2000.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