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고 싶어 대학 중퇴… 영화제작은 또다른 기쁨”
제임스 브라운과 첫 만남 50여년 훌쩍 지났지만 당시 공연 생생히 기억해
1일 미국서 개봉되는‘소울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의 삶을 다룬‘겟 온 업’의 제작자인 영국의 락그룹 롤링스톤즈의 리드 싱어 믹 재거(71)와의 인터뷰가 7월21일 뉴욕의 맨다린 오리엔탈 호텔서 있었다. 반세기가 넘도록 계속하는 정열적인 공연 탓인지 재거는 갈비씨라고 할 만큼 날씬한 몸매에 건강해 보였는데 비록 얼굴에 주름은 갔지만 70세(7월26일로 71세)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재거는 액센트가 있는 다소 굵은 음성으로 위트와 유머를 구사해 가면서 질문에 답했다. 그는 신이 나면 가성과 함께 연기를 하듯 커다란 제스처를 써가면서 거침없이 질문에 답했는데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선 함구했다. 사람이 아주 명랑했는데 자신의 농담에 자기도 우습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큰 입을 활짝 벌리고“하 하”하면서 웃었다. 재거는 최근에 본 영화 중 봉준호의‘설국열차’를 감동 깊게 봤다고 찬양했다.
―영화에서 묘사됐듯이 당신이 21세 때 샌타모니카의 시빅센터에서 TV 쇼에 나왔을 때 제임스 브라운이 당신에 앞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일을 기억하는가.
“물론이다. 그러나 난 이미 그 전에 브라운을 만났다. 그가 뉴욕의 아폴로 극장에서 공연했을 때 만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난 샌타모니카에서의 공연 내용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때 난 21세여서 무서울 것이 없었다.”
―제임스 브라운이 당신의 삶에 어떤 영감을 주었는가.
“그는 위대한 가수였다. 작곡과 노래 해석에도 재주가 뛰어났지만 그가 내게 큰 영향을 준 것은 공연자로서였다. 그는 무대 공연자로서 엄청난 에너지를 지녔었는데 나는 그가 자신의 100%를 주면서 춤을 추고 청중을 희롱하고 사로잡는 무대 매너에 늘 경탄했었다. 그리고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난 여러 면에서 그에게 감탄했었다.”
―영화의 제작자로서 브라운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우선 중요한 것은 좋은 각본이었다. 우리의 각본은 훌륭했지만 난 몇 군데를 수정했다. 진행속도를 빨리하고 또 여러 인물들을 한 사람으로 융합시키기 위해서다. 내가 가장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비록 결함은 있지만 브라운이라는 인물에게 어떻게 하면 빨려들 수가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기와 영화에 쓸 노래와 공연장면의 편집과 브라운의 주변인물 등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제임스 브라운이 가수로서 좌절감을 느꼈듯이 당신도 그런 경험을 했는가.
“아니다. 난 그런 과정을 거치진 않았다.”
“내 개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당신도 브라운처럼 전설적 인물인데 누군가 당신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면 당신의 어떤 점을 다루지 않기를 바라는가.
“이 영화는 기록영화가 아니어서 브라운의 삶의 중요한 부분과 흥미 있는 부분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부정적인 면도 다뤘지만 그것을 너무 강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누군가 나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면 지나치게 부정적인 점을 강조하지 않기를 바란다. 너무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면 고약한 영화가 되고 말 것이다.”
―제임스 브라운은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았는데 아버지로서 당신은 당신의 아이들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는가.
“브라운은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색주가 포주인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다. 흥미 있는 경험이지만 내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권할 일은 아니다. 난 브라운과는 약간 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것에 감사한다. 받침이 든든한 어린 시절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부모로서는 늘 자기 아이들을 돌보고 또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브라운은 그런 사랑을 못 받았지만 그는 이것을 극복했다. 그는 생존을 위한 진취성을 지닌 사람으로 자신의 재능을 꽃 피움으로써 어두운 과거를 극복한 사람이다.”
―제임스 브라운의 영화는 먼저 제작자 브라이안 그레이저(‘아폴로’ ‘뷰티풀 마인드’)가 10여년간 만들려고 벼르다가 영화화 판권을 잃고 당신에 판권이 넘어갔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말해 달라.
“브라이안이 제임스 브라운이 살았을 때 영화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브라운이 하도 요구하는 사항이 많고 변덕이 심해서 성공하지 못했다. 브라운이 죽고 나서도 그의 자식을 비롯한 유가족이 너무 많아서 서로들 다투는 바람에 역시 만들지를 못했다. 그런 차에 내 친구이자 사업 동료로 브라운의 열렬한 팬이자 그에 관한 백과사전식 지식을 지닌 피터 애프터만이 브라운 유족을 찾아가 믹 재거가 브라운의 영화를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피터는 내게 찾아와 제임스 브라운의 기록영화를 만들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극영화로 만들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난 브라이안이 오랜 전부터 브라운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을 잘 알아 그에게 가서 함께 만들자고 말했다.”
―당신은 칠순에도 공연을 계속하고 있는 부지런한 사람인데 앞으로도 계속할 것인가.
“나는 이 여름과 오는 가을에도 공연을 한다. 언제 중단할지 나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아직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의 당신이 있도록 만든 젊었을 때의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
“나의 부모는 내가 쇼 업계에 종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적 계기라 한다면 내가 대학을 중퇴한 것이다. 나는 주말만 로큰롤을 노래하는 대신 일주 내내 노래하고 싶어서 대학을 중퇴했는데 그것이 매우 성공했고 또 음반도 냈다. 대학 중퇴가 내겐 인생의 큰 전환점인 된 것이다.”
―예술가의 정치참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자면 먼저 예술가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 확실히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예술가들은 늘 자기가 사는 세상을 반영해 왔다. 그것은 그들의 직무이다.”
―당신도 제임스 브라운처럼 공연할 때 전신을 움직이면서 노래 부르는데 브라운에게서 영향이라도 받았는가.
“그가 내게 큰 영감을 준 것이 사실이다. 내게 있어 전신을 움직이면서 노래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난 브라운처럼 두 다리를 완전히 벌려 주저앉는 동작은 할 수가 없다. 육체적 활동은 공연의 한 부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계속할 것이다.”
―당신의 섹스어필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타고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배울 수도 있다. 난 많은 가수들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청중의 분위기를 감 잡아 거기에 부응하는 공연을 하는가를 보고 배웠다. 청중과의 좋은 상호교류가 중요한데 제임스 브라운은 이에 능한 사람이었다.”
―곧 다가오는 생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현재 파티를 준비 중이다. 규모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춤추고 재미있게 노는 파티가 될 것이다.”
―당신이 최근 공연한 쇼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어느 것인가.
“2,000여년 전에 지은 이탈리아의 서커스 막시머스 야외극장에서 가진 공연이다. 진짜 흥분되는 멋있는 쇼였다. 그리고 오래 전에 가진 리우데자네이루 공연도 즐거웠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있어도 여기서 밝힐 수가 없다. 단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이 영화를 만든 것이 기쁘고 또 좋은 경험이었다. 난 현재 마틴 스코르세지와 함께 뉴욕에서 HBO-TV 시리즈를 찍고 있다.”
―미국의 어떤 음악 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
“컨트리/블루스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TV로 공연차 영국에 온 가수들의 가스펠에 탐닉했었다. 10대가 돼서는 극장에서 노래를 들었는데 대부분 포크송이었다. 나는 리틀 리처드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내 무대공연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준 가수다.”
―인상 깊게 본 영화들은 무엇인가.
“10대 땐 쿠로사와의 영화를 즐겼다. 난 자신을 지적으로 생각해 이런 영화들을 봤는데 내가 처음 본 외국어 영화 중 하나가 폴란스키의 ‘물속의 칼’이다. 우린 그 때 학교에 영화클럽이 있어 거기서 그런 영화들을 봤다. 이들 외국어 영화와 함께 그 당시 인기 있던 영국 영화들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광적인 팬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 꽤 많은 영화를 봤다.”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깊은 감동을 받은 영화가 무엇인가.
“대중적 영화로는 리들리 스캇의 영화를 좋아한다. 가장 최근 본 영화 중 정말 훌륭하다고 느낀 것은 ‘설국열차’다. 난 보통 이런 종류의 영화를 안 좋아하는데 ‘설국열차’는 정말로 재미있게 봤다.” <한국일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