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8년 6월 29일 금요일

리브 노 트레이스(Leave No Trace)


톰(왼쪽)과 윌은 사회를 등지고 숲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산다.

세상 등지고 숲에서 사는 아버지와 딸의 생존과 사랑


세상을 등지고 숲속에서 사는 아버지와 딸의 세상 주변인들로서의 삶과 사랑과 존경으로 연결된 두 사람의 관계를 그린 조용하고 부드럽고 사려 깊은 소품 드라마로 강렬한 충격을 주지는 못하나 보고 난 후에도 영화의 이미지와 내용과 배우들의 연기가 한동안 뇌리와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우아한 작품이다.
감독은 제니퍼 로렌스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소품 ‘윈터즈 본’(Winter‘s Bone-2010)을 만든 여류 데브라 그래닉으로 두 영화가 다 사회의 주변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얘기는 빈약할 정도로 간결하지만 감독은 아버지와 딸을 연민과 동정과 깊은 이해의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검소하고 사려 깊게 이들의 생존과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일종의 소녀의 성장기이기도 한데 아버지로 나오는 벤 포스터와 딸로 나오는 뉴질랜드 배우 토마신 하코트 맥켄지의 콤비와 착 가라앉은 연기가 감동적이다. 맥켄지는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 
영화는 오레곤 주 포틀랜드의 국립공원의 깊은 숲속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윌(포스터)과 그의 13세 난 딸 톰(맥켄지)이 아침에 일어나 밥 지어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윌은 철저히 문명과 사회를 기피하는 사람으로 딸이 독립 정신을 갖도록 격려하면서도 사회로 내려 보내진 않는다. 톰도 이에 불만 없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둘이 평화 공존하는데 둘은 서로에게 철저히 의존하면서 사는 관계다. 
둘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때는 식료품을 살 때와 재향군인인 윌이 병원에서 약을 받으러 갈 때 뿐이다. 윌이 세상을 기피하는 이유는 그의 종군 후유증 때문임을 알 수가 있다. 
윌과 톰은 당국의 단속에 걸려 사회보장센터에 보내지는데 여기서 잠시 헤어졌던 둘은 센터의 도움으로 목장을 경영하는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사회와 문명을 하나의 교도소로 여기는 윌은 며칠 못 가 톰을 데리고 다시 숲속으로 돌아간다. 
윌과 톰은 숲속과 도시에서 다른 텐트 족들과 재향군인들과 사회봉사자들과 좌표를 잃은 10대들 그리고 친절한 종교지도자들을 만나는데 이들이 마지막에 조우하는 사람들은 숲 속에 자리 잡은 트레일러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여기서 톰은 자기가 더 이상 아버지와 함께 숲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디까지나 딸의 독립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윌은 톰을 남겨 놓고 다시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간다. 둘의 이별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드는데 영화는 윌과 톰이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연기를 잘 하는 포스터의 안으로 폭발할 것 같으면서도 자비롭고 부드러운 연기와 맥켄지의 나이를 넘어선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가득한 연기가 빛을 발한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주라기 세계: 몰락한 왕국 (Jurassic World: Fallen Kingdom)


오웬 그레이디(오른 쪽)가 자기가 어렸을 때 키운 공룡을 달래고 있다. 겁에 질린 여자가 클레어 디어링.

더 사나워진 공룡들을 구하라


스티븐 스필버그가 1993년에 고 마이클 크라이턴의 동명 공상과학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주라기 공원’의 4번째 속편 격으로 편을 거듭할수록 공룡들이 더욱 잔인하고 사나워진다. 이번 것은 3년 전에 나온 ‘주라기 세계’의 첫 속편이다. 
온갖 흉측한 모양을 한 거대한 공룡들이 나와 괴성을 지르면서 서로 사생결단을 하다가 사람을 보면 입으로 물어 씹어 먹어버리는 전형적인 여름철용 블록버스터 오락물로 얘기가 터무니가 없다 못해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러나 특수효과로 만든 공룡들의 난리법석과 두 주인공 크리스 프랫과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감독 론 하워드의 딸)의 콤비가 괜찮은데 종종 유머를 집어넣어 때로 살벌한 분위기를 다독여 주고 있다.
오프닝 크레딧 이전에 공룡들의 섬 이슬라 뉴블라에서 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이 원형 투명 수중 탐색선을 타고 해저에 가라앉은 공룡의 사체를 찾는데 갑자기 뒤에서 거대한 공룡이 나타나 탐색선을 공격하면서 둘은 공룡의 밥이 된다. 이들에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공룡들의 밥이 된다. 
이슬라 뉴블라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미 의회는 공룡들을 살릴 것이냐 또는 죽도록 놔둘 것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한다. 의회 청문회에 나와 공룡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주라기’시리즈의 단골 제프 골드블럼. 
이어 존 해몬드(시리즈에서 리처드 아텐보로가 역을 맡았다)와 함께 주라기 공원을 설립한 벤자민 락우드(제임스 크롬웰)가 캘리포니아의 박물관 같은 자택으로 클레어 디어링(하워드 달라스가 야무지다)을 불러 전편에서 함께 활동한 공룡 사육사인 오웬 그레이디(프랫이 너스레를 떨면서 잘 한다)와 함께 섬에서 공룡들을 구출해 인근 보호지로 옮겨달라고 당부한다.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이 어쩐지 정체가 수상한 벤자민의 비서격인 엘리(레이프 스팔). 
오웬과 클레어가 고생물학자 지아(다니엘라 피네다)와 컴퓨터 전문가 프랭클린(저스티스 스미스)과 함께 화산이 계속해 용암을 분출하는 섬에 도착하니 엘리가 고용한 용병들이 공룡 수거에 분주하다. 
엘리는 무슨 목적으로 공룡 구출작전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인가. 터무니없는 공룡의 유전인자 조작과 더욱 사나워진 공룡들을 국제경매에 내놓고 파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얘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에 갇혔던 공룡들이 우리를 부수고 밖으로 뛰어 나오면서 경매장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다가 공룡들에게 짓밟히고 물어 뜯긴다. 속편이 나올 것 같다. 
J.A. 베이오나 감독. PG-13.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불복종’ 의 레이철 바이스




영화 ‘불복종’(Disobedience)에서 유대교 랍비인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오래간만에 뉴욕으로부터 자기가 뛰쳐나온 런던 북부의 정통 보수 유대인 동네를 찾아와 결혼한 옛 동성애 연인과 사랑을 재점화시키는 사진사 로닛으로 나오는 레이철 바이스(48)와의 인터뷰가 최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호텔에서 있었다. 감독은 올해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탄 ‘팬타스틱 우먼’(A Fantastic Woman)을 만든 칠레의 세바스티안 렐리오.
짙고 뚜렷한 윤곽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지적인 바이스는 상냥하고 친절하게 물음에 대답했는데 친근감이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엄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바이스는 현재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역을 맡고 있는 대니얼 크레이그의 아내다.


“정통 유대교·동성애 소재로 자유를 찾는 여정”


▲당신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로닛의 상대역인 에스티로 레이철 맥애담스를 선택한 것도 당신인가.
“감독인 렐리오와 상의해 처음으로 고른 사람이 맥애담스였다. 맥애담스는 각본을 읽고 당장에 반해 내게 ‘내 가슴이 에스티 역을 하고파서 피를 흘리고 있다’며 역을 달라고 했다. 맥애담스에게 처음으로 역을 제공한 우리는 참 운이 좋았다.” 

▲배우로서 역에 깊이 함몰되기 위해 때로 음악에 의존하는가.
“맡은 역의 감정에 빠져들기 위해 음악을 듣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어떤 음악을 들을 때면 감정이 용솟음치곤 했다. 로닛과 에스티가 오래간만에 만나 사랑을 재점화시키는데 그들이 옛날에 듣던 팝뮤직이 크게 작용을 한 것처럼 오래된 팝뮤직은 그 어느 다른 것들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효과를 보이고 있다.”

▲로닛은 매우 강하고 남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로닛은 강하다기보다 반항적이라고 봐야겠다.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실 그는 연약하고 허점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오래 전에 떠난 집으로 잠시나마 돌아온 것은 자신으로부터 절단된 과거와의 재연결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언가로부터 계속해 도망 다니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개인의 자유를 찾는 이야기라고도 하겠다.”

▲이 영화는 렐리오의 첫 영어 영화인데 그와 일한 경험은.
“렐리오는 영어를 잘 구사하는데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내가 이 영화의 원작인 책을 그에게 보냈는데 가톨릭신자로 동성애자가 아닌 그가 연출을 쾌히 수락한데 대해 처음엔 놀랐다. 그는 각본에도 참여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렐리오가 런던에 사는 유대인들에 관한 이 영화를 만든 것은 대만 사람인 앙리가 옛날 영국 사람들의 얘기인 ‘이성과 감성’을 연출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렐리오는 책과는 아주 거리가 먼 문화권에 속하나 매우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 렐리오를 감독으로 선정했는가
“58세 난 여인의 성적욕망과 데이트의 실패를 사실적이면서도 우습게 그린 ‘글로리아’(Gloria)를 보고 감동했기 때문이다. 미국영화 같았으면 글로리아는 할머니로나 나왔을 것이다. 렐리오는 58세 여자도 성적 욕망이 강하고 또 그 나이가 생의 성숙기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 영화야 말로 걸작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 영화의 연출을 맡긴 것이다.”

옛 연인 사이인 로닛과 에스티(왼쪽)가 밀회장소를 찾아가고 있다.

▲무엇 때문에 영화의 소재에 이끌렸는가.
“정통 보수 유대교인들의 사회라는 외부와 차단된 사람들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난 두 여자의 얘기를 찾고 있었다. 소설은 내가 자란 런던 북부 사람들의 얘기이면서도 내가 전연 몰랐던 사회의 얘기라는 점에 이끌렸다. 그들의 사회는 철저히 사적인 사회다.”

▲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로닛이 어렸을 때 자기 사회를 떠났듯이 사라질 수 있는 용기다. 또 어떻게 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와 함께 어떻게 자신이 되고픈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통 보수 유대교인 사회의 얘기이면서도 모든 집단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얘기로 보는가.
“자기 사회에만 집념하는 모든 다른 집단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얘기다. 무슬림과 기독교를 비롯해 극단적으로 자기 집단에만 집착하는 모든 사람들의 얘기라고 생각한다. 렐리오가 이 얘기에 이끌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얘기는 소설을 쓴 네이오미 알더만의 경험담이다.”

▲로닛은 사진사인데 당신도 사진촬영에 능한가.
“사진사는 아니지만 사진 작품을 수집한다. 하셀블라드 카메라를 사용하는 방법은 배웠다. 나는 사진을 잘 찍는 재능은 없지만 사진을 사랑하고 사진 작품을 수집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당신의 부모는 유대인인데 그 부모 아래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
“아버지는 유대인이나 어머니는 엄격한 가톨릭 집안 태생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려고 개종했다. 따라서 나는 두 종교를 다 이해하며 자랐다. 그러나 난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내가 자란 사회의 사람들은 신에 집착하는 극보수파 유대인들이어서 내겐 이상하게 보였다. 하지만 믿음이란 아름다운 것이다. 난 아직 그 것을 찾지 못했으나 언젠가 신을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로닛과 에스티의 섹스 신은 매우 뜨겁고 또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데 그 장면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가. 
“섹스 신을 찍을 때면 늘 이것이 정말로 얘기에 필요한 것이냐는 점을 생각하곤 한다. 우리의 섹스 신은 얘기의 중심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성적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온 에스티가 로닛을 만나면서 비로소 둘만이 서로의 감정을 노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우 감정적인 부분이다. 감독이나 나나 연기하기 전에 준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장면만을 위해선 준비했다. 렐리오가 미리 구상한대로 섹스 신을 찍었는데 하루 종일 찍었지만 영화에는 단 6분간만 계속된다. 그리고 잘 보면 알겠지만 노골적인 나체장면은 없다. 나체를 보는 것보다는 상상하는 것이 더 에로틱하다. 그러나 우리의 섹스 신은 단지 섹스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영혼이자 마음의 표현이다. 매우 깊은 것이다.”

▲바쁜 연기자로서의 삶과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의 삶에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가.
“내 아들 헨리 챈스 아로노프스키(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마더!’ 감독)는 11살이다. 다른 모든 직업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직업과 가정에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직업여성으로 어머니 노릇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한 비결은 없다. 그저 일하다가도 시간을 내 아이에게 그 시간을 할애하는 수밖에 없다. 난 지금 직업여성으로서나 어머니로서 모두 스스로를 즐기고 있다.”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
“가을에 나올 ‘페이보릿’(The Favorite)으로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출했다. 1608년 영국의 앤 여왕시대 궁정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힘든 성격을 지닌 3명의 여자들의 권력쟁취 드라마다. 나와 엠마 스톤과 올리비아 콜만이 주연이다. 아직 완성된 영화는 안 봤지만 각본이 아주 좋다.”

▲에스티의 남편인 젊은 랍비 역의 알레산드로 니볼라는 어떻게 선정했는가.
“우린 20여 년 전에 마이클 윈터바틈 감독의 ‘나는 너를 원해’(I Want You)라는 영화에서 공연한 바 있다. 그래서 우린 그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온 사이다. 그가 각본을 읽은 뒤 완전히 자기 역에 몰입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역은 초강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고 또 완전히 자기를 바쳐야 하는 것이다. 정말로 하기를 원해야 되는 역이다. 니볼라는 참으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완전히 역과 동일 인물이 된 연기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인도 아니고 또 그런 사회에서도 자라지 않았다. 그런데도 니볼라는 자기 역을 진실로 이해했다. 그는 훌륭한 배우다.” 

▲영화의 메시지 중 하나가 자유라고 말했는데 당신에게 있어 자유는 어떤 뜻을 지녔는가.
“자유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도전이다. 그것은 인간이 되기 위한 가장 힘든 도전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난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겠다. 난 그저 하나의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 얘기를 사랑한 까닭은 그것이 자유에 대한 명상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우려면 불복종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인데 따라서 불복종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유럽 삼국지


세트 방문과 배우와 감독 인터뷰 차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나고 월드컵 경기가 시작된 지난 한주 간 스페인과 영국과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번갯불에 콩 구어 먹은 여정에서 인터뷰한 사람들은 조지 클루니를 비롯한 총 13명.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해변 가 좁은 골목에 오밀조밀 들어선 아파트마다 베란다에 빨래를 내건 정경이 한국 모습이다. 바르셀로나는 자치정부가 통치하는 카탈로니아의 수도. 카탈로니아는 작년 9월 주민투표를 통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을 했다가 스페인 정부로부터 불법조치를 당해 정치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망명을 했다.
그 후 카탈로니아는 최근에서야 자치권을 회복했는데 새로 지역 대통령으로 선출된 큄 토라가  다시 10월 1일에 독립 찬반투표를 하겠다고 선언, 귀추가 주목된다. 길을 걷다보면 아파트에 ‘리베르타’(해방)라고 쓴 현수막과 함께 카탈로니아기가 걸린 것을 보게 된다(사진).
소매치기 많기로 유명한 바르셀로나의 명품인 속칭 가우디성당을 보려고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의 키다리 스웨덴 동료회원 마그너스와 함께 폭염 속으로 나섰다. 갈증을 풀려고 성당 앞 노천카페에서 마신 생맥주 한 잔 값이 무려 10유로. 노상강도나 진배없다.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성당은 1882년에 짓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100년이 넘도록 계속해 짓고 있는데 곰팡이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옛 성당 자태가 엄숙하다.
그런데 옛 성당 뒤로 짓고 있는 새 건물의 뾰족탑 위 십자가와 허리춤에 조각한 성당이름에   빨간색을 입혀 불경스럽게도 마치 베이가스의 카지노를 옮겨 놓은 것 같다. 가우디 사망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야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나는 소위 관광지의 명물을 볼 때마다 감탄을 제대로 못하고 서먹하기만 해 공연히 죄책감에 빠지곤 한다. 마치 글로만 소통하던 여인을 막상 만나고 나니 안 보니 만 못한 심정이라고나 할까. 상상이 실제보다 아름다운 탓일까.
작년에 트럭테러로 14명이 사망한 산타모니카의 프로미나드 확대판인 올드타운을 걷는데 아프리카 흑인들이 대마초 사라고 권유한다. 부자들의 요트가 정박한 부두 주위로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상에 즐비하니 가짜 루이뷔통과 나이키 등을 늘어놓고 팔고 있다. 경찰이 단속도 안 한다.
사방에서 담배들을 태우고 한 집 건너 있다시피 한 노천카페에서 느긋하니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자유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통제가 심한 LA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다. 유럽의 서민적 자유가 미국의 그 것보다 훨씬 관대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이날 총 1만8,597보를 걸었다. 총 6.4마일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범죄 스릴러 ‘거미집의 여인’의 주인공 클레어 포이와 한국계 존 조가 주연하는 컴퓨터 스릴러 ‘서칭’의 인도계 감독 아네쉬 차간티 등을 인터뷰하고 런던에 도착했다. 내가 좋아하는 구름이 낀 날씨다.
스타즈 TV의 시리즈인 초현실적 스파이 스릴러 ‘룩’의 세트 방문에 이어 시리즈에 나오는 졸리 리처드슨(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딸) 등을 인터뷰한 뒤 저녁에 마그너스와 함께 템즈강 인근의 숙소로 런던에서 최초로 전기승강기를 설치한 사보이호텔을 나와 코벤트가든 주위로 산책을 나섰다. 영국의 선술집 펍에 들러 맥주를 시킨 뒤 싸늘한 공기가 기분 좋은 술집 앞 보도에서 마시면서 런더너 흉내를 냈다. 밤 11시가 되니 바텐더가 술집 기둥에 매어달린 종을 “땡 땡”하고 치면서 문 닫는다고 통보한다.
런던을 떠나 이탈리아의 피서지인 사르디니아 섬에 왔다. 조지 클루니가 제작·감독하고 출연도 하는 훌루 TV 시리즈 ‘캐치-22’의 세트를 방문하고 클루니 등을 인터뷰하기 위해서다. 진퇴양난의 처지를 뜻하는 ‘캐치-22’는 조셉 헬러가 쓴 전쟁 풍자소설이 원작이다. 올비아라는 마을의 안 쓰는 활주로에서 찍는 현장을 방문하고 인터뷰에 들어갔는데 내가 몹시 보고팠던 배우는 종종 만나는 사람 좋은 클루니 보다는 이탈리아의 베테런 스타로 시리즈에서 로마 사창가 포주로 나오는 지안칼로 지아니니(75)였다. 지아니니는 여류감독 리나 워트물러가 만든 ‘7명의 미녀들’과 ‘표류’ 등에 나온 명배우다.
사르디니아는 휴양지답게 하늘과 바다가 깨어질듯이 청명하고 태양이 제 성을 못 이겨 속 열기를 활활 내뿜고 있었다. 나는 이런 태양의 횡포를 볼 때마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생각난다. 뫼르소는 해변에 나갔다가 별 이유도 없이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는데 구태여 이유를 찾자면 작열하는 태양 탓. 나도 뫼르소처럼 가학적인 태양을 대하게 되면 머리가 아프다.
귀국 행 비행기를 타려고 다시 런던에 도착하니 바람이 불고 쌀쌀한 날씨가 쓸쓸해서 살 것 같았다. 땅에 머문 시간보다 공중에 떠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은 여행이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