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0월 20일 화요일

스파이들의 다리(Bridge of Spies)


도노반(탐 행스)이 글리닉케 다리에서 U-2의 조종사 파워즈를 기다리고 있다.

스필버그와 탐 행스 이번엔‘스파이물’


냉전시대인 1962년 독일에서 진행된 미 스파이기 U-2의 조종사와 소련 간첩의 교환을 다룬 스파이 드라마이자 스릴러로 우수한 기능공이 만든 것 같은 준수하고 재미있는 영화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탐 행스가 네 번째로 손잡고 만든 영화로 향수감이 짙은 멜로드라마다.
스필버그는 장인이니 만큼 무슨 영화를 만들어도 특별히 흠 잡을 데가 없는 것은 이 영화에도 적용되지만 영화가 너무 반듯하고 모가 난 점이 없어 큰 충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대상을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은 사진으로 보는 기분이다. 
그러나 볼만한 영화로 긴장감도 꽤 있고 연기와 촬영과 세트와 디자인 등 모든 것이 좋다. 스필버그 영화의 음악은 지난 30년간 존 윌리엄스가 작곡했는데 이번에는 윌리엄스의 건강 문제로 토머스 뉴만이 지었다. 음악이 다소 내용을 압도하는 감이 있다.
영화는 1957년 뉴욕에서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마크 라일런스)이 FBI에 의해 체포되는 긴장감 있는 장면에서 시작해 1962년 동독과 서독을 잇는 글리닉케 다리에서의 아벨과 U-2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즈(오스탄 스토웰)의 교환으로 끝난다.
이 교환을 성사시킨 사람이 뉴욕의 보험전문 변호사 제임스 B. 도노반(행스). 도노반은 먼저 자기 회사에 의해 아벨의 변호사로 선정돼 승산 없는 싸움인 변호에 나선다. 아벨의 재판은 형식적인 것으로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 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에이미 애담스)와 두 딸을 둔 가정적이요 원리원칙적인 도노반은 미국의 헌법정신을 준봉하는 사람. 그는 지혜와 설득력과 협상술을 동원해 아벨을 전기의자 형에서 구해낸다. 이로 인해 그는 시민들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당한다.
한편 소련 상공을 정찰하던 U-2가 격추되면서 체포된 파워즈는 재판 끝에 실형이 선고된다. 이어 소련 측에서 간첩교환을 할 의향이 있다는 시사가 미 측에 전달되면서 도노반은 겨울에 동베를린으로 간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긴장감 감도는 간첩교환 협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이 막 세워질 때 동베를린에서 공부를 하던 미국 유학생 프레데릭 프라이어(윌 로저스)가 체포되면서 도노반은 프라이어까지 구출하기로 결심한다.
계획에 없던 2대1의 교환인데 문제는 파워즈는 소련이, 프라이어는 동독이 붙잡고 있다는 것. 감기에 걸려 계속해 콧물을 흘리는 도노반은 영특한 지혜와 기지 그리고 교활한 협상술을 발휘, 2대1일 교환을 성사시킨다. 마지막 다리 위에서의 새벽 간첩교환 장면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믿음직한 행스가 실팍하면서도 때론 코믹한 연기를 잘하는데 경탄스러운 것은 영국의 셰익스피어 배우 라일런스의 것.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시치미 뚝 떼는 유머와 함께 침착하고 아주 쉽게 연기하는데 오스카상감이다. PG-13. Disney. 전지역.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나라 없는 야수들(Beasts of No Nation)


코맨단트가 아구(왼쪽)에게 포로살해를 지시하고 있다.

아프리카 반군 소년병의 생존 이야기


내전이 끝날 새 없는 아프리카의 반군 소속 소년병에 관한 강렬하고 사실적인 영화로 채 틴에이저도 안 된 순진한 아이들이 악과 폭력의 제물이 돼 짐승으로 변화하면서 자행하는 잔인무도하고 끔찍한 살육에 몸서리가 처진다.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보는 사람의 영육을 유린하는 듯한 절실함을 느끼게 하는데 막상 가슴 아프고 무서운 것은 이런 폭력행위보다 어린 아이들이 무감각한 살육의 짐승들로 변하면서 잃어버리는 순수의 상실이다. 
가나에서 찍은 현장감 있는 촬영과 각본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을 지닌 연출과 서술은 모두 재주 있는 캐리 조지 후쿠나가(신 논브레)의 것으로 특히 소년병 역의 연기 경험이 없는 에이브래햄 아타와 체격과 카리스마가 모두 압도적인 이드리스 알바의 연기가 뛰어나다. 
영화에서 무대인 나라의 이름은 안 밝히고 또 반군들의 종교나 사상과 이념도 모른다. 형과 함께 아버지가 선생인 학교에 다니고 교회에 나가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린 아구(아타)의 삶은 마을로 몰려든 난민들을 쫓아온 반군들의 살육으로 하룻밤 사이 악몽으로 변한다. 
반군에게 아버지와 형이 살해된 뒤 도주한 아구는 곧 이들에게 붙잡혀 소년병이 된다. 반군의 대장은 안팎으로 거대한 카리스마를 지닌 복잡한 성격의 코맨단트(알바). 
아구는 코맨단트의 총아가 되면서 서서히 살육의 짐승으로 변화하는데 아구가 코맨단트의 명령에 따라 체포된 적을 정글용 칼로 살해하는 장면이 눈을 감게 한다. 아구의 첫 살인이다. 이런 혹독한 삶속에서 아구의 유일한 위로는 역시 소년병인 말 없는 스트리카와의 우정.
아이들과 젊은 부하들을 엄격하게 다루면서 밀어붙이는 코맨단트는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나 한편으로는 아구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역을 하는데 아구와 코맨단트의 관계가 드라마로서 영화의 중요한 플롯을 이룬다. 
반군은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마을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이어 반군의 통치자가 있는 도시에 도착한다. 그러나 여기서 통치자가 코맨단트의 공을 무시하고 그에게 응분의 보상행위를 거부하면서 코맨단트는 통치자에게 거역하는 게릴라가 된다. 
아타의 깊이와 너비를 감지하기 힘든 감정과 반응의 표정연기와 알바의 겹겹이 벗겨지는 내면연기는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들의 연기가 아니면 이 영화의 겁나도록 절실한 현실성이 이렇게 강하지는 못할 것이다. R. Bleecker Street. 일부지역.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트리거 모티스’




창백한 올리브 빛 피부에 짧게 깍은 머리 그리고 돗수 높은 쇠테 안경을 쓴 신재성은 30세 정도였으나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큰 키에 날씬하고 손가락은 길고 섬세했는데 말끔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 사람을 잡아 끄는 마력이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도도해 보였다.
신재성은 영국작가 앤소니 호로위츠가 본드소설의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의 TV쇼용 유고를 바탕으로 쓴 최신 제임스 본드 소설 ‘트리거 모티스’(Trigger Mortis^사진)에 나오는 본드 악한이다. 007시리즈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인 본드 악한으로 영어 이름이 제이슨 신(Sin)이어서 본드로부터 ‘타고난 죄인’이라고 조롱을 받는데 본드와는 정반대로 여자에 전연 관심이 없다.
신재성은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붙잡아 놓은 본드에게 “난 그 때 영혼과 인간성을 다 빼앗겼어. 그리고 나는 모든 느낌을 상실했지. 내 자신이 죽음이야”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
소설은 ‘골드핑거’가 끝난지 2주 후에 시작한다. ‘골드핑거’의 푸시 갤로어가 본드걸이 됐지만 본드는 한 여자와 오래 못 있는데다가 갤로어는 레즈비언이어서 둘은 얼마 못 가 헤어진다.
1957년 미국과 소련간에 냉전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두 나라가 막 우주경쟁에 들어 섰던 때. 본격적인 플롯인 소련의 미국 로켓발사 사보타지가 있기 전 서막식으로 본드는 독일의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리는 그랑프리에 마제라티를 타고 참가, 소련의 영국인 선수 살해 음모를 저지한다.
본드는 여기서 처음 신재성을 목격하고 소설의 본격적인 본드걸로 미 정보기관 요원인 제파디 레인을 만나는 것도 경주트랙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재성의 대저택 슐로스(성이라는 뜻) 브론자트에서다.
소련첩보기관인 악명 높은 ‘스메르쉬’(SMERSH)의 미국의 인공위성을 적재한 뱅가드로켓 발사 사보타지에는 나치가 만든 위폐제조기로 찍은 달러가 사용되는데 여기에 신재성이 동참하면서 마지막에 그와 본드간에 사투가 벌어진다.
신재성은 왜 복수심에 불타는 산송장 같은 인간이 되었을까. 6.25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때문이다. 1927년생인 신재성은 친 할머니가 민비를 모신 서울 양반집 태생으로 서울대를 나왔다. 그런데 6.25가 나면서 가족이 피난을 가던 중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300여명의 양민이 학살 당했을 때 신재성은 자기 부모와 두 여동생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 남는다.
그 후 부산으로 내려간 신재성은 피난 가기를 거절한 할머니가 준 여러 알의 푸른 다이아먼드 중 하나를 광복동 보석상에 팔아 받은 돈으로 하와이로 밀항한다. 이어 그는 뉴욕으로 옮긴 뒤 ‘블루 다이아먼드’라는 건설 및 청소회사를 차려 크게 성공, 미국내 최고의 한국인 부자가 된다.
이런 과거를 지닌채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재성이 소련측과 손 잡고 미 로켓발사 사보타지에 나선 것은 당연지사라고 보겠다. 그런데 사실 이 사보타지는 신재성이 계획한 뉴욕 맨해탄에 대한 본격적인 테러를 위한 양동작전인 셈이다.
본드의 악인들이 다 그렇듯이 신재성도 매우 잔인하고 사악하며 사무적이요 냉소적이다. 그런데 기차게 흥미 있는 것은 신재성이 자기 적을 죽일 때는 죽을 자로 하여금 죽는 수단을 선택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 때 쓰여지는 것이 화투장이다. 신재성은 자신의 희생물이 될 사람 앞에 화투장의 뒷면이 보이도록 깔아놓은 뒤 그로 하여금 한 장을 고르라고 지시한다. 뒤집은 화투장에는 ‘교수’와 ‘생매장’과 ‘독약’ 등 여러 가지 죽음의 수단들이 적혀 있는데 신재성에게 붙잡힌 본드는 ‘생매장’ 화투장을 골랐다가 생매장 당해 죽을 고생을 한다.
신재성의 최종 공격 목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이 빌딩을 파괴할 폭탄을 싣고 맨해탄 지하를 질주하는 지하철에서 본드와 신재성이 처절한 격투를 벌이면서 책은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모든 것이 끝나고 본드와 제파디는 플라자호텔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눈 뒤 헤어진다.
310쪽의 강건체 스타일로 군더더기 없이 쓴 책이 진행이 빠르고 스릴과 재미가 있어 순식간에 읽어 내려 갔다. 본드소설 답게 마제라티와 애스턴 마틴 등 차와 섹시한 여자들과 본드 악한 그리고 와인과 마티니 및 오메가시계가 나오는데 다소 과거 본드영화들인 ‘닥터 노’와 ‘선더볼’ 등의 일부를 빌려다 쓴 듯한 느낌이 있다.
때로 터무니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더러 있지만 원래 본드얘기는 꽤 터무니없는 것이 사실. ‘파트 투’부터 본격적으로 흥분감을 북돋우는 소설에는 본드의 오랜 주변인물들인 M과 Q와 모니페니 등이 재등장하고 본드의 권총인 월터PPK도 다시 사용된다. 그런데 왜 호로위츠는 한국인을 본드 악한으로 골랐을까.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과연 어느 한국배우가 신재성 역을 맡을지  궁금하다.
‘트리거 모티스’와 때를 맞춰 본드시리즈의 음악과 노래들에 관한 ‘제임스 본드 노래들’(The James Bond Songs)이 출간됐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