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8년 5월 1일 화요일

불복종 (Disobedience)


에스티(왼쪽)와 로닛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회 장소를 찾아가고 있다.

성적 욕망과 믿음 사이 고뇌... 긴장감 있고 깊이 있게 고찰


 ‘글로리아’(Gloria)와 올 해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멋있는 여자’(A Fantastic Woman)에서 여성의 성적 갈망과 심리를 깊이 고찰한 칠레 감독 세바스티안 레리오의 첫 영어영화로 보수 유대교 신도들의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동성애자와 오래간만에 이 여인을 만난 옛 연인의 육체적 정신적 몸부림을 다룬 심오하고 자비로운 작품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대 신앙의 대결과 함께 욕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을 다룬 얘기로 전반부는 다소 느리고 지나치게 엄격하지만 후반에 들어 서서히 작품에 불길이 당겨지면서 서스펜스 영화를 보듯이 진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볼만한 것은 세 주인공의 연기. 오래간만에 재회해 사랑의 불꽃을 다시 점화시키는 두 여인 역의 레이철 바이스와 레이철 맥애담스 그리고 이들 여인 사이에서 인간적 정신적 갈등을 심하게 겪게 되는 남자 역의 알레산드로 니볼라의 연기가 깊이와 무게를 가득히 지녔다.     
오래 전에 런던의 보수 유대교 신자들의 사회를 떠나 뉴욕으로 온 사진사 로닛(바이스)은 막강한 힘을 지닌 유대교 목사인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받고 런던으로 온다. 왜 로닛이 런던을 버렸는지에 대한 이유는 명확히 전모가 밝혀지지 않으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영화 처음에 로닛의 아버지가 교회에서 인간의 자유와 신앙에 관해 설교를 하다가 쓰러지는데  로닛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충격에 빠져 긴 산책과 바에서의 음주 그리고 술에 취한 채 바의 화장실에서의 남자와의 섹스로 슬픔을 달랜다.
고향에 돌아온 로닛을 처음 맞는 사람이 로닛의 어릴 적 친구로 자기 아버지의 후계자로 꼽히는 도빗(니볼라). 그러나 도빗은 자기 가족과 커뮤니티를 버린 로닛을 다소 차갑게 맞는다. 그리고 로닛의 친척과 친지 및 동네 사람들도 “오래 살기를 바란다”라는 말 한마디로 매우 냉랭하게 로닛을  대한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로닛이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은 역시 어릴 적 친구인 에스티(맥애담스)를 만나면서다. 뜻 밖에도 에스티가 도빗의 아내가 된 것. 적극적인 로닛과 소심한 에스티는 학생 시절 연인 사이였다.           
로닛과 에스티가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로닛은 에스티가 경직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남편과 사랑 없는 섹스를 하면서(매주 금요일 의식처럼 치른다) 질식할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도빗은 선하고 연민의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둘이 만남을 거듭하면서 사랑이 재점화되고 이윽고 둘은 골목에서의 키스에 이어 호텔방을 빌려 뜨거운 성애를 나눈다. 둘의 섹스신이 마치 짐승들의 그것처럼 매우 노골적이요 뜨겁고 지극하다.
그리고 도빗의 아기를 가진 에스티는 남편에게 “날 자유롭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아내의 요구에 대한 대답을 자기에게 주어진 목사의 직무를 거절하는 답변으로 대신하는 도빗의 절규에 가까운 설교가 가슴을 강하게 친다. 바이스와 맥애담스의 대조적인 연기도 좋지만 거의 충격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니볼라의 안으로 꾹꾹 누르는 내적 폭발력을 지닌 연기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출생 100주년 잉그마르 베리만 대표작 상영


저승사자(왼쪽)와 기사가 체스를 두고 있다. ‘제7의 봉인’.

LACMA 빙극장서 ‘제7의 봉인’ 등 5월 한달 간


LA카운티 뮤지엄 내 빙극장(윌셔와 페어팩스)은 5월 1일부터 29일까지 매주 화요일 오후 1시에 영혼과 믿음, 고독과 도덕 등 삶의 심오한 문제들을 탐구한 스웨덴의 거장 잉그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상영한다. 올 해 출생 100주년을 맞는 베리만을 기리는 행사로 그의 영화들은 6월 말까지 빙극장 외에도 LA의 여러 극장에서 상영된다.

*1일
▲‘모니카와의 여름’(Summer with Monica·1953)
근로자 계층의 두 젊은 남녀의 여름 철 짧은 사랑을 민감하게 그렸다. 공격적인 젊은 여자와 아직도 소년 같은 젊은 남자가 사랑하고 아기를 가지지면서 결혼한다. 단순하고 맑고 아름답다.

*8일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1957)
십자군 전쟁에 나갔다가 모든 것에 실망한 채 귀가하던 기사(베리만의 단골 배우 맥스 본 시도)가 도중에 검은 망토를 입은 저승사자를 만난다. 기사는 자신의 죽음을 잠시 유예해준 저승사자와 체스를 두면서 삶의 신비에 대해 생각한다. 롱 샷으로 찍은 흑백 라스트 신이 경이롭다. 베리만을 국제적으로 알려준 불후의 명작이다. (사진)

*15일
▲‘산딸기’(Wild Strawberries·1957)
스톡홀름의 노 교수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차를 몰고 가면서 자기 삶의 실망스러운 것들을 회고한다. 플래시백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감정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주는 영화로 역시 베리만의 단골 배우인 교수 역의 빅토 쇼스트롬의 연기가 훌륭하다. 

*22일
▲‘마술사’(The Magician·1958)
19세기. 최면술사이자 마법사인 알베르트 에마누엘 보글러(맥스 본 시도)가 자신의 순회공연단을 이끌고 한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보글러가 엉터리 가짜라는 것을 밝혀내려고 한다. 그러나 보글러가 마을 주민들보다 한 발 앞서 간다.   .

*29일
▲‘처녀의 샘’(The Virgin Spring·1960)
중세. 신앙심 깊은 시골 농가의 한 가족의 딸이 약탈자들에 의해 겁탈당한 뒤 살해되자 딸의 아버지(맥스 본 시도)가 이들에게 가차 없는 보복을 시도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탄 심오하고 아름다운 우화.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최은희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던 최은희씨가 16일 92세로 별세했다. 최씨는 감독이자 남편인 한국영화계의 거목 신상옥과 함께 196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큰 별이었다. 최씨는 생애 총 130여 편의 영화에 나왔는데 여러 편이 신감독의 작품. ‘꿈’ ‘춘희’ ‘로맨스 빠빠’ ‘지옥화’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및 ‘빨간 마후라’ 등이 그 대표작들이다.
많은 영화들 중에서 최은희 하면 대뜸 생각나는 것이 ‘성춘향’(1961^사진)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칙을 무시하고 이 영화를 명보극장에서 봤는데 극장은 초만원을 이뤘었다. 총천연색 화면에 펼쳐지는 춘향과 이(몽령)도령의 계급을 무시한 파란만장한 사랑이 재미 만점이었는데 당시 30대의 최씨가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긴 했지만 춘향이로선 너무 늙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도령 역의 김진규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 영화에서 춘향과 도령보다 더 화면을 압도했던 배우는 변사또역의 이예춘이다. 호색한인 사또가 자기 집 마당에 관기들을 일렬횡대로 세워놓고 수청 들 여자를 고르면서 하나도 마땅한 것이 없다고 인상을 쓰며 상소리를 섞어 투덜대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와 함께 역시 나이는 먹었지만 방자역의 허장강과 향단역의 도금봉의 밀고 당기는 애정의 줄다리기도 볼만했다.
‘성춘향’하면 또 하나 못 잊을 사건이 1960년대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던 김지미가 나온 ‘춘향전’이다. 이 영화는 당시 김씨의 남편 홍성기가 감독, ‘춘향전’과 동시에 국제극장에서 개봉했는데 흥행서 참패했다. 30대였던 최씨에 비해 20대였던 김씨가 춘향역에는 더 어울렸지만 흥행 실패의 큰 까닭 중 하나는 도령역에 신인인 신귀식을 쓴 것. 그리고 방자역의 김동원과 향단역의 양미희도 허장강과 도금봉 콤비에 비하면 한 수 아래였다.
1961년은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최고의 해로 둘은 이 해 심훈의 계몽소설이 원작인 ‘상록수’와 ‘연산군’ 및 주요섭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원제 ‘사랑 손님과 어머니’)도 함께 만들었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주요섭의 또 다른 단편 ‘아네모네의 마담’과 함께 내가 고교시절 애독한 글이다.
내용은 어린 딸(전영선)을 둔 미망인인 어머니(최은희)가 사랑방에 하숙을 하는 남자(김진규)에게 애정을 느끼지만 재혼은커녕 연애조차 하지 못하고 생이별을 해야 하는 과거 한국의 모든 미망인들의 한숨과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손 한번 제대로 못 잡아보고 헤어져야하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안타까워 속을 태웠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어머니가 사랑에 타들어가는 속을 진화시키려고 피아노로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치는 모습. 소설도 그렇지만 신감독은 감상성을 잘 조절해가며 은근하고 애틋한 감정의 여운을 남기는 연출솜씨를 보여주었다.
총천연색인 ‘연산군’에서 폭군 연산군으로는 후에 ‘빨간 마후라’에서도 최씨와 공연한 신영균(90)이 나와 열연을 했는데 역시 명보극장에서 봤다. 표가 완전 매진이었고 영어자막이 없었는데도 외국인까지 관람하는 대성황을 이뤘었다.
단아한 이미지의 최씨로선 파격적인 역인 양공주로 나온 영화가 ‘지옥화’(1958)다. 한국전 후 기지촌 주변의 양공주들과 이들의 남자들인 범법자들을 둘러싼 애증과 배신과 폭력 그리고 형제간 갈등과 비극적 죽음을 그린 뛰어난 작품이다. 필름 느와르이자 멜로드라마로 네오리얼리즘 분위기마저 띠었는데 1950년대 영화로선 가히 충격적인 작품이다.
기지촌 주변에 살면서 패거리들을 이끌고 미군부대 군수품을 터는 터프가이 영식(김학)과 그의 여자로 팔등신 미녀인 소냐(최은희) 그리고 시골서 상경한 영식의 동생 동식간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양공주들과 범법자들의 삶과 한탕을 사실적이요 박력 있게 그렸다. 대담한 것은 과감히 노출된 여인들의 육체와 선정적인 섹스신. 안개가 자욱하니 핀 갯벌에서 영식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주하는 소냐를 쫓아가 칼로 찔러 죽이는 마지막 장면은 치정살인의 오페라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신감독과 최은희의 최고걸작은 이들 영화보다 1978년 둘이 몇 달 차이로 영화광 김정일의 지시로 홍콩서 납북된 사건일 것이다. 둘은 북한에서 7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최씨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서 주연상을 탔다. 두 사람은 1986년 영화를 만든다는 핑계로 비엔나에 갔다가 주 비엔나 주재 미대사관을 통해 망명, 그 후 한동안 LA에서 살았다.
이 때 어느 날  내게 신감독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당시 서울의 일간스포츠에 주 1회 쓰던 영화면에 자기가 줄 기사가 있으니 지면을 비워 놓으라는 지시적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감감 무소식. 둘의 납북사건은 기록영화 ‘연인들과 폭군’(The Lovers and the Despot)에서 흥미진진하게 다뤄졌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