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월 26일 월요일

‘아메리칸 스나이퍼’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인간이 계속 싸우고 죽이는 건 유전자 탓”


이라크전 실화를 다룬‘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를 감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84)와의 인터뷰가 LA 다운타운에 있는 애슬레틱 클럽에서 있었다. 
총을 휘두르는‘황야의 무법자’요‘더티 해리’로 거칠고 사나운 남성의 대표상으로 여겨졌던 그도 나이는 못 속이는지 잿빛 머리에 고목의 등걸처럼 주름진 목을 한 모습이 다소 쇠약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상표와도 같은 째려보는 눈매는 여전했다. 
이스트우드는 질문에 위트와 유머를 섞어 여유만만하게 대답했는데 기분이 좋은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가며 상냥하게 굴었다. 자기 여자문제에 관해 얘기할 때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이스트우드는 한국전 때 군에 징집됐으나 미국에서 근무했는데 인터뷰 후 기념사진을 찍을 때 필자가“나는 한국인”이라고 소개하자 그는“이젠 한국에 가야지. 그러나 1951년에는 안 간 것이 나았지”라고 말했다. 이에 기자가“한국에 가보라. 아름다운 나라”라고 종용하자 그는 큰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9.11사태 후 조국과 가족을 지킨다며 해군 특공대(SEAL)에 자원 입대해 이라크전에서 저격수로 활약, 160여명의 적을 사살한 텍사스 태생의 크리스 카일의 호전적인 실화로 카일로는 브래들리 쿠퍼가 나온다. 카일은 이라크전에 4차례나 참전한 뒤 제대, 2013년 2월 고향의 사격장에서 전투경험 후유증을 앓던 제대 해병의 총에 맞아 38세로 사망했다. 
이 영화는 15일에 발표한 제87회 오스카상 후보에서 작품과 남우주연 및 각색상 등 총 6개 부문에 올랐다.

―브래들리 쿠퍼와 일한 경험은 어땠는가.
“그는 일단 카일 역을 맡은 뒤로는 세트를 떠나서도 카일과 같이 살다시피 했다. 저녁을 먹을 때도 텍사스 액센트를 써가며 말을 했는데 영화를 다 찍을 때까지 카일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게 됐는가.
“신문에 난 카일의 얘기와 그의 전투경험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워너 브라더스에서 전화가 걸려와 영화를 감독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각본을 받아 읽고 있는데 이번에는 브래들리 쿠퍼가 전화를 걸어 연출을 맡아 달라고 해서 오케이를 했다. 그리고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작품의 충실을 기하기 위해 쿠퍼와 함께 텍사스로 내려가 카일의 미망인을 비롯한 가족을 만났다.”

-성조기 앞에 섰을 때 어떤 기분이며 당신의 군대 경험에 대해서도 말해 달라.
“난 1930년대와 40년대에 자랐다. 11세 때 2차 대전이 일어났는데 그 땐 모두가 열렬한 애국자였다. 따라서 나도 애국주의 세대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 돼 한국전이 일어났고 나도 1951년에 군에 징집됐다. 그러나 이 땐 2차 대전과 달리 우린 도대체 우리가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회의들을 했다. 베트남전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왜 우린 이렇게 계속해 싸우는 것이며 전쟁은 도대체 언제나 끝날 것인가 하고 크게 회의를 하게끔 됐다. 내 생각엔 역사는 평화의 편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전쟁에는 창의적인 면도 있다. 전쟁 중에는 인간성과 함께 기술이 크게 발전한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내 군대 경험을 말하자면 M1 같은 장총을 쏠 줄 안다. 여러 분의 눈알을 쏴 빼낼 수도 있다.”

―이라크전을 어떻게 생각하나.
카일(오른쪽·브래들리 쿠퍼)이 전우와 함께 적진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처음에 우리나라가 이라크에 들어갔을 때 난 그것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내가 한국전을 비롯해 모든 다른 전쟁에 반대한 이유와 같다. 전쟁은 많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배우로서 또 감독으로서 매우 과감한 사람인 줄 아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겁이 없나.
“겁 없이 살 수야 없겠지. 공포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그 삶이 행복할 수는 없으니 긍정적인 것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영웅이란 전쟁에서 자기 동료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며 불타는 집 안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 곳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이다. 요즘은 전쟁에 나가는 사람을 다 영웅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웬만해선 영웅이라고 안 했다. 전에 나는 뭔가 목에 걸려 숨이 막혀 하는 사람을 구해준 적이 있는데 그 때 날 보고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하더라. 그러나 그 것은 결코 영웅적 행동이 아니었다.”

―특수효과가 큰 구실을 하는 가상현실을 다룬 아이들과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는지.
“나도 여러 분야의 영화를 좋아하고 또 영화는 장르마다 특색이 있지만 난 만화 속의 인물을 다루거나 미래를 그린 아이들의 영화에는 관심이 없다. 난 이오지마 전투와 같은 옛 역사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이 전투를 일본군의 눈으로 본 영화도 만든 것이다.”

―왜 인간은 성서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죽인다고 생각하는가.
“거 참 훌륭한 질문이다. 나도 그 문제를 어렸을 때부터 궁금하게 여겼는데 그것은 우리의 유전인자 탓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원치도 않는 다른 나라에 민주주의를 심어놓으려고 하는데도 문제가 있다. 철학가들은 언제나 인간은 이성을 찾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왔는데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찌 보면 삶의 하나의 사실이라고 하겠다.”

―요즘처럼 미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 때에 이런 전쟁영화들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얘기하며 또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는가.
“전쟁이란 극적이요 삶과 죽음이며 또 고난으로 결국 충돌과 갈등이다. 따라서 이런 것은 좋은 극적 소재다. 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전쟁에 가족 드라마가 포함됐다. 요즘 전쟁영화가 여러 편 나온 것은 영화계의 정기적인 사이클이다. 어느 한 장르의 영화가 특정기간에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좋고 흥미 있는 얘기가 있다면 만들라는 것이다.”

―당신의 여성관계와 사랑과 결혼관이 과거와 달라졌으며 또 아직도 사랑을 추구하기를 원하는지.
“그것들은 내게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이 영화도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카일과 그의 아내와의 관계와 그것의 유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내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랑과 결혼에 성공한 편이 못되네. 두어 번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순간 순간적으론 성공하기도 했다. 나는 사랑이 매우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성취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특히 요즘엔 그러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 너무 많고 또 각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서 그렇다. 내 나이에 다시는 사랑을 안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결코 그것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위대한 철학자가 ‘결코 아니다 라는 말을 결코 하지 말라’고 했거든.”

―당신은 16세짜리 막내를 비롯해 자손들이 많은데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는가.
“난 내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이들에게도 깊은 정을 느낀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특히 교육을 비롯해 여러 문제에 있어서 도움과 조언을 주면서 그들이 가능한 최고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한동안 내 유전인자가 맹활동을 해 아이들을 많이 보았지만 이젠 다 끝난 것 같다. 그러나 또 모르는 일이지.”           

―배우들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는 무엇인지.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망친다. 배우로서 최고의 것은 본능을 따르라는 것인데 본능이 옳다고 느끼지 않을 땐 안 하면 된다. 난 배우들이 자기가 낫다고 느끼는 연기를 할 때면 그것이 얘기의 방향과 반대로 가지만 않는다면 허락하는 유연성이 있다.”  

-미국의 애국주의를 강조한 이 영화의 해외 반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는지.
“난 내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에 대해선 생각하질 않는다. 그러나 내 영화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다루고자 하기에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것도 사실이다.”   
―젊은 당신에게 충고를 준다면 무엇입니까.
“난 똑똑한 아이는 아니었다. 배우는 것이 아주 느렸지. 따라서 ‘속도 좀 내라’고 조언하겠다. ‘좀 더 많이 연습해라’고.”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겨울 잠 (Winter Sleep)


아이딘(왼쪽)이 자기에 등을 돌린 아내 니할에게 독선적인 말을 보내고 있다.

빈자와 부자의 세상에 대한 엄숙한 탐구


독선적이요 지적으로 오만한 남편과 그의 편견과 냉정한 가슴으로 인해 영육이 피폐해진 젊은 부인과의 부식해 가는 결혼관계를 해부하고 또 사소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여러 겹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관계를 탐구한 터키 영화로 궁극적으로 영혼 탐구의 엄숙한 걸작이다. 
지난해 칸영화제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는데 알다가도 모를 일은 15일에 발표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서 탈락했다는 사실. 기자가 지난해에 본 외국어 영화 중 가장 훌륭한 영화다. 머리를 질끈 싸매고 입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봐야 할 대사가 많고 느린 상영시간 196분짜리의 진지한 영화다. 체홉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심오하고 사색적이며 영혼을 압도하는 영화로 칸영화제서 이미 상을 두 번이나 탄 터키의 명장 누리 빌지 세일란(‘기후’ ‘옛날 옛적 아나톨리아에’)이 연출했는데 롱샷으로 찍은 촬영과 암석과 말 달리는 초원 등 황홀한 정경 그리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감동적인 작품이다.
때로는 대사가 너무 길어 부담감을 느끼게도 되지만 그 대사 안에서 인물들의 성격이 표현되고 또 그것으로 인해 작품이 서술되기에 인내심을 갖고 보면 큰 기쁨을 맞보게 될 것이다. 특히 중간 부분에 이르기까지가 인내심이 필요한데 후반으로 가면서 유머마저 곁들여 극적 재미를 주면서 끝에 이르러선 충분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든다.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의 동쪽에 있는 카파도시아의 작은 시골마을이 무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의 은퇴한 배우 아이딘(할룩 빌지너)은 대지주. 그에게는 젊고 아름답고 총명한 아내 니할(멜리사 소젠)이 있으나 니할은 남편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에 내몰리다시피 해 남편과 거의 대화나 관계가 없다. 
카파도시아는 기암괴석과 함께 푸른 초원이 공존하는 풍광이 수려한 곳으로 아이딘은 암석에 난 동굴들을 개조해 관광객을 상대로 한 호텔을 만들고 이름을 오텔로라고 지었다. 그리고 자기는 거실에 죽치고 앉아 동네 신문용 칼럼을 쓴다. 아이딘과 니할을 비롯해 아이딘의 집에 묵고 있는 그의 이혼한 도시 누나 네클라(데멧 크박) 등이 자아내는 을씨년스런 고독의 분위기가 으스스하다.
어느 날 아이딘이 충실한 하인 히다옛(아이베르크 펙칸)이 모는 지프를 타고 마을로 가던 중 아이딘의 소유인 집에 세든 가족의 어린 소년이 지프에 돌팔매질을 하면서 큰 사고가 날 뻔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얼마 전에 출소한 전과자로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신다. 그런데 아이딘은 자기 땅에 사는 여러 못 사는 사람들의 실상을 잘 알면서도 이를 못 본 체한다. 
이에 반해 니할은 동정심이 많은 여자로 동네 학교를 위한 기부금을 걷는데 열심인데 이를 안 아이딘이 니할을 윽박질러 그녀의 좋은 뜻을 뭉개버린다. 
길긴 해도 영화의 중요한 부분은 아이딘과 니할의 상호 충돌하는 대화와 네클라와 아이딘의 대화. 네클라와의 대화에서 부자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냉소주의가 스며나온다. 아이딘이 오랫동안 도시에 가 있겠다고 나갔다가 샛길로 빠져 들른 친구 집에서 벌어지는 음주장면 등 몇 개의 이색적인 에피소드가 엄숙한 분위기를 다소 녹여줘 보는 마음도 쉬게 한다. 그리고 끝에 일말의 희망이 엿보인다. 
경직되다시피 듬직한 빌지너의 연기를 비롯해 배우들의 연기와 멀리 대자연 안에 하나의 점처럼 있는 인간과 장엄하고 아름다운 정경을 길게 잡은 촬영이 출중하다. 
성인용. 로열(310-478-3836) 등 일부극장.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흑해 (Black Sea)


로빈슨(주드 로)이 해저에서 건져 낸 금괴를 만져보고 있다.

흑해에 가라앉은 황금을 찾아라


해저에 갈아 앉은 황금을 건지러 가는 현대판 해적 스릴러로 황당무계하지만 재미있는 얘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산소부족으로 질식사하고 말았다. 당연히 액션 모험 스릴러인데도 케빈 맥도널드 감독(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은 영화 속 인물들의 충돌과 후회와 갈등 묘사에 더 주력, 공연히 심각한 영화가 됐다. 
따라서 잠수함이라는 협소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말 많은 연극 같은데 주드 로가 육체를 단단히 단련시킨 모습으로 잠수함 선장으로 나와 다부지고 엄격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혼자서 영화를 살려낼 재간이 없겠다. 그리고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도 뻔한 일로 ‘액션, 액션’하고 기다리다 지치겠다.                
난파선 화물구조 작업회사에서 일하던 전직 베테런 잠수함 선장 로빈슨(주드 로)은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뒤 함께 해고된 동료들을 모아 보물찾기에 나선다. 2차 대전 때 소련이 히틀러에게 보내는 금괴를 실은 독일 잠수함이 흑해 해저에 침몰했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건져내자는 것이다. 물주는 미국인으로 로빈슨은 소련제 고물 잠수함을 사서 개조한다.
승무원은 영국인 6명과 러시아인 6명 등 총 12명인데 일종의 감시책으로 미국인 물주가 보낸 하수인 대니얼스가 탔다. 영국 선원 중 한 명은 아직 어린 토빈으로 로빈슨은 토빈을 실직 후 자살한 동료 대신 배에 태웠다.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로빈슨이 아내와 어린 아들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로빈슨은 선원들에게 금괴를 건지면 모두에게 똑같이 배분하겠다고 약속하고 잠수함을 흑해로 몰고나간다. 그런데 좁은 배안에 서로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거친 두 나라의 뱃사람들이 탔으니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의 다툼과 함께(말리는 것은 물론 로빈슨) 기계가 고장을 일으키면서 잠수함 영화의 상투적인 것들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그런데 황금에 눈이 먼 일부가 사람 수가 줄면 줄수록 자기에게 돌아올 몫이 많아진다는 것을 잘 알고 탐욕에 눈이 멀어 사람까지 잡는다. 마치 해저의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을 연상시킨다. 액션이 가끔 있지만 신통치가 못한데 스릴러가 스릴과 긴장감이 결여돼 맥이 빠진다.
로의 연기가 볼만하고(때론 너무 굳은 표정이긴 하지만) 협소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찍은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등은 좋다. 그러나 해저의 잠수함을 만든 컴퓨터 그래픽은 아주미숙하다. R.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오스카는 백색이다




해도 너무 했다. 15일 발표된 오스카 각 부문 후보 발표에서 연기상 후보 총 20명 중 흑인은 단 1명도 없었다. 흑인이 이런 처지니 라티노나 아시안은 말할 것도 없다. 연기상 후보 20명이 모두 백인인 것은 1998년 이후 두 번째 있는 일이다.
LA타임스도 사설을 통해 아카데미 회원들의 소수계 푸대접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연기와 감독 및 각본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오른 35명 중 소수계는 멕시칸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버드맨) 단 1명뿐이라고 개탄했다.
6,000명에 이르는 회원들 중 94%가 백인이요 72%가 남자 그리고 중간 연령이 62세(2012년 통계)인 아카데미 회원들의 소수계 푸대접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카데미는 그동안 여성을 비롯한 소수계를 보다 많이 수용하고 또 현 회장인 셰릴 분 아이잭스도 흑인 여성이긴 하지만 이 수치에서 볼 수 있듯이 아카데미는 은퇴한 백인 남자 세상이다.
이번에 다시 아카데미의 흑색에 대한 색맹증세가 논란이 된 까닭은 비평가의 격찬과 함께 관객의 큰 호응을 받고 있는 흑인영화 ‘셀마’(Selma·사진) 때문이다. 1965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앨라배마주 셀마에서부터 몬고메리에 이르기까지의 민권운동 행진을 그린 이 영화는 작품과 주제가상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으나 흑인 여류감독 에이바 뒤버네이와 킹 박사 역의 데이빗 오이엘로는 각기 해당부문에서 탈락했다.
15일은 킹 박사의 생일이고 19일은 이를 기리는 공휴일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킹 박사는 자기 영화가 푸대접을 받는 생일선물을 받은 셈이다. 아카데미가 여전히 흑인을 차별한다는 비판을 받을 만한데 후보 발표가 있은 뒤 다넬 헌트 UCLA 아프리칸 아메리칸 연구센터 소장은 “이는 할리웃과 미국과의 불통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또 흑인 민권운동가인 알 샤프턴은 할리웃 지도자들과의 비상회의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난해에는 흑인 노예문제를 다룬 ‘12년간 노예생활’이 오스카 작품과 각색 및 노예 역의 루피타 니온고가 여우조연상을 각기 탔다. 또 2011년에는 역시 흑인인 옥타비아 스펜서가 ‘헬프’에서의 하녀 역으로 조연상을 탔는데 일부 냉소적인 사람들은 1939년 ‘비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하녀 역으로 흑인 최초의 오스카상 수상자가 된 해티 맥대니얼처럼 흑인은 하녀나 노예로 나와야 상을 탄다고 비아냥거렸다.
아카데미가 흑인을 차별한다는 것은 1963년에 가서야 시드니 포이티에가 ‘들에 핀 백합’으로 흑인으로선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탔다는 것만 봐도 안다. 그 후 무려 38년이 지난 2001년에  가서야 덴젤 워싱턴이 ‘트레이닝 데이’로 흑인으로선 두 번째로 주연상을 받았다.
흑인 여배우의 경우는 이보다 더 심하다. 2001년 할리 배리가 ‘몬스터즈 볼’로 흑인으로서는 최초의 주연상을 탔으니 해티 맥대니얼이 흑인으로서는 첫 오스카상을 탄지 무려 62년만의 경사였다.  
영화계 일부에서는 ‘셀마’가 오스카 회원들로부터 물을 먹은 까닭이 제작사인 파라마운트가 영화의 제작마감이 늦어져 회원들에게 스크리너(영화 DVD)를 못 보내 많은 회원들이 후보 선정 마감일 안에 영화를 못 봤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한편 기자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는 ‘셀마’를 작품(드라마 부문), 감독, 남우주연 및 주제가상 부문에서 후보로 지명, 주제가 ‘글로리’에 상을 주었다.      
LA타임스는 아카데미 회원들이 수상 후보들을 고르는 것은 회원 각자에게 달린 일이라면서 이들의 소수계 푸대접보다 진짜로 중요한 문제는 할리웃 연예산업계에서의 소수계 종사자 부족이라고 지적했다.            
통계에 따르면 2013년 100편의 흥행 탑 영화감독 중 흑인 감독은 단 5명뿐이고 흑인 여류감독은 단 1명도 없다. 이번 오스카 후보 발표에서도 감독·각본가 및 촬영감독 중에서 여성은 단 1명도 없었다.
흑인과 여성뿐 아니라 할리웃에 종사하는 라티노 영화인들도 태부족이다. 통계에 의하면 라티노는 미 전체인구의 16%를 차지하는데도 2013년 흥행 탑 영화들 중에서 말하는 역을 맡은 라티노 배우는 불과 4.9%에 지나지 않았다.
LA타임스는 이어 유색인종이 오스카 경쟁에서 매번 불리한 입장에 빠지는 것은 할리웃에서 일하는 유색인종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매듭지었다. 그러고 보니 오스카는 황금색이 아니라 백색이다.
얼마 전에 미국인 친구 마이크와 바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이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마이크는 마침 TV에서 중계하는 농구경기를 가리키면서 “농구선수의 절대다수가 흑인이라고 해서 백인들이 불공평하다고 하는 말 들어본 적 있느냐”면서 “오스카 후보 발표 때마다 인종차별을 들먹이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배우도 운동선수처럼 실력에 따라 상을 주는 것 아니겠느냐”며 흥분했다. 물론 마이크는 백인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2015년 1월 20일 화요일

패딩턴 (Paddington)

패딩턴이 양손에 치솔을 들고 용도를 생각하고 있다.

“난 말하는 곰… 귀여운 사고뭉치죠”


진짜로 재미있고 훈훈한 정이 넘쳐흐르는 온 가족용 영국 영화다. 장난이 심한 사고뭉치의 말하는 곰과 이 곰을 집안에 수용한 런던의 한 가족 간의 관계를 그린 영화로 속도 빠르고 우습고 유연하며 또 재치 넘치고 다정다감하다.
가족의 사랑을 강조한 물 떠난 물고기의 얘기인데 액션과 스턴트가 콩 튀듯 하고 냉소적인 유머와 위트가 촘촘히 담겨 있는가 하면 곰의 표정과 동작을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기술 그리고 곰의 음성 연기와 인간 배우들의 연기가 만점이다. 
탐정영화 티를 내면서 액션과 스릴을 마음껏 활용했는데 의상과 프로덕션 디자인 및 밝고 알록달록한 색깔과 시각효과 등 나무랄 데 없이 잘 만든 매력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처음에 주인공인 말하는 곰 패딩턴(벤 위셔의 음성)의 페루 정글에서의 삶에 대해 얘기한다. 1930년대 이곳으로 온 친절한 탐험가 부부가 찍은 필름에 의해 설명되는데 이들 부부 때문에 패딩턴과 그를 키우는 삼촌 곰 파스투조(마이클 갬본 음성)와 아줌마 곰 루시(이멜다 스턴튼 음성)는 완전히 영국통이 된다.
그런데 정글에 지진이 나면서 삼촌은 죽고 아줌마는 양로원에 들어가게 되자 패딩턴은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고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런던으로 밀항한다. 도착한 곳이 런던의 패딩턴 기차역. 여기서 패딩턴은 보험회사 중역인 엄격한 헨리 브라운(휴 본느빌)과 그의 생기발랄한 아내 메리(샐리 호킨스) 그리고 이들의 두 남매 주디(마들렌 해리스)와 조나산(새뮤얼 조슬린)에 의해 발견된다.
헨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메리가 우겨서 패딩턴을 곱게 단장한 정리정돈이 잘된 집에 데려와 묵게 한다. 정글에 살던 곰이 도시 인간의 집에 살면서 자행하는 온갖 시행착오로 인해 헨리의 인형 집과도 같은 집은 난장판이 된다. 
그러나 패딩턴이 원래 귀엽고 또 속은 착한 곰이어서 곧 이어 브라운네 온 가족과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면서 한 가족처럼 산다. 
이렇게 곰과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희귀종인 패딩턴을 잡아 박제를 해서 자기 수집품으로 만들려는 예쁘게 생긴 독한 여자 박제사 밀리센트(니콜 키드만)가 등장하면서 패딩턴과 브라운네는 뜻하지 않은 액션과 음모와 모험에 휘말려든다.
브라운네 가정부 역의 줄리 월터스를 포함해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다 훌륭한데 그 중에서도 빼어난 것은 호킨스다. 철저히 꾸밈이 없는 아름답고 편한 연기다. 이와 함께 사파리 복장을 한 키드만의 요부 닮은 차가운 모습과 연기도 일품인데 키드만은 디즈니의 만화영화 ‘101마리의 달마시안’의 나쁜 여자 크루엘라 드 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들 인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것은 패딩턴이다. 패딩턴 곰 인형께나 팔려나가게 생겼다. 100% 귀엽고 즐겁고 신나며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다. 폴 킹 감독. PG. TWC.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휴먼 캐피털(Human Capital)

투자전문가 지오반니(오른쪽)와 그의 아내 칼라가 집에서 연 파티에서 축배를 들고 있다.

한밤 빗속 교통사고, 그리고 두 가족 운명은


심야 우중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운명이 연결되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브리안자에 사는 두 가족에 관한 가족 드라마이자 성격탐구 영화이며 스릴러로 블랙 코미디의 기운도 갖춘 이탈리아영화. 화려함 속에 초조와 불안을 감춘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경기침체와 함께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파헤친 사회 드라마이기도 한데 인간의 가치를 유로로 재려는 황금만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제목은 법률용어로 사고의 희생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할 때 계산하는 희생자의 순 가치를 말한다.
영화는 매 에피소드마다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얘기되는 4막극 형식으로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심야의 비극적 교통사고가 재연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 사고에 관한 정보가 확대 제공된다.   
투자전문가인 지오반니(화브리지오 지후네)와 그의 배우 지망생이었던 ‘트로피 부인’ 칼라(발레리아 브루니 타데스키)는 백만장자로 둘 사이에는 고교생 아들 마시밀리아노(구그리엘모 피넬리)가 있다.
지오반니네의 부와 신분을 동경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상류층에 이르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는 중류층 부동산 업자 디노(회브리지오 벤티볼리오)는 쌍둥이를 임신한 착한 아내 로베르타(발레리아 골리노)와 전처 사이에서 본 여고생 세레나(마틸데 베르나스키)가 있는데 둘 다 고급 사립학교에 다니는 마시밀리아노와 세레나는 애인사이다.
그런데 디노가 자기 집을 저당으로 융자를 해 지오반니에게 투자를 부탁한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디노의 돈이 몽땅 날아가면서 디노는 지오반니에게 본전이라도 달라고 부탁하나 거절당한다. 
이와 함께 두 가족의 아이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학생 표창식이 열리고 있는 밤에 치명적인 교통사고가 나면서 이 사고를 둘러싸고 두 집이 운명적으로 연결된다. 
과연 누가 사고차를 운전했는가. 챕터가 바뀔 때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향해 이야기가 조금씩 조금씩 진전한다. 
이탈리아의 초호화 캐스트의 연기가 볼만한데 특히 자신의 꿈을 접고 상류층 부인 행세하느라고 속이 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칼라 역의 브루니 타데스키의 연기가 조용하니 압도적이다. 프로덕션 디자인과 현지에서 찍은 촬영 그리고 서스펜스 기운이 있는 음악도 좋다. 영화는 미국 작가 스티븐 아미돈의 소설이 원작으로 미 코네티컷주가 무대인 것을 이탈리아의 브리안자로 옮겼다. 파올로 비르지 감독. 성인용.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제7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결산

작품상부터 연기상까지‘독립영화들 잔치’


텍사스에 사는 한 소년의 삶과 그의 부모와의 관계를 12년 간에 걸쳐 만든 ‘보이후드’는 리처드 링크레이터가 감독상을 그리고 소년의 어머니로 나온 패트리샤 아켓이 여우조연상을 타 3관왕이 됐다. 이로써 LA와 뉴욕 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서도 2014년도 최우수 영화로 뽑힌 이 영화는 2월에 있을 오스카 시상식에서도 작품상을 탈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드라마 부문 작품상‘보이후드’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에디 레드메인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둘러싼 과격하고 파격적으로 상상력이 무성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작품상 수상은 깜짝 놀랄 일이었다. 코미디/뮤지컬 부문 작품상은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가 연출한 ‘버드맨'(Birdman)이 탈 것으로 예상됐었기 때문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감독한 웨스 앤더슨은 수상소
코미디/뮤지컬 부문 작품상‘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감에서 골든 글로브를 주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의 일부 회원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3년 연속 두 여류 코미디언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이번으로 마지막 사회)의 재치 있는 사회로 진행된 시상식에서는 사회자를 비롯해 수상자들이 언론의 자유에 대해 강한 지지발언들을 했는데 이는 지난해에 발생한 소니사에 대한 북한 측(미 정부의 주장)의 해킹과 얼마 전 파리에서 발생한 풍자잡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무슬림 테러 때문이다. 
이날 뜻밖의 손님은 북한군 복장을 한 한국계 여류 코미디언 마가렛 조. 마가렛은 시종 엄격한 표정을 지으면서 김정은의 표지사진이 있는 북한 영화잡지 ‘무비즈 워우’의 기자로 나와 잡지를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가 메릴 스트립과 셀피를 찍겠다고 요구했다. 이어 마가렛은 무대로 올라가 나치군인처럼 거위걸음으로 퇴장해 만장의 폭소와 함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전에 두 사회자는 인사말에서 “오늘 우리는 북한이 O.K.하는 모든 영화들에 시상할 것을 기대한다”고 이죽거렸다.           
드라마 부문 남자주연상은 ‘모든 것의 이론’(The Theory of Everything)에서 근육위축증을 앓는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으로 나온 에디 레드메인이 그리고 코미디/뮤지컬 부문에서는 ‘버드맨’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재기를 노리는 한물 간 영화배우로 나온 마이클 키튼이 각기 받았다. 그리고 ‘모든 것의 이론’은 음악상을 ‘버드맨’은 각본상을 추가로 받았다. 
코미디/뮤지컬 부문 여우주연상 에이미 애담스.
드라마 부문 여자주연상은 ‘스틸 앨리스'(Still Alice)에서 알츠하이머를 앓는 대학 교수로 나온 줄리앤 모어가 코미디/뮤지컬 부문에서는 ‘빅 아이즈'(Big Eyes)에서 날사기꾼 남편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남편이 그린 것처럼 묵인한 실존하는 여류화가 마가렛 킨 역을 맡은 에이미 애담스가 각기 받았다.
드라마 부문 남녀주연상에서 볼 수 있듯이 ‘상은 주인공이 아프거나 죽어야 탄다’는 말이 또 한 번 여실히 증명됐는데 레드메인과 모어는 이로써 오스카상도 탈 확률이 높아졌다. 그러나 모어는 떼 놓은 당상이나 레드메인은 키튼과 치열한 접전을 벌일 것이다.   
남자조연상은 재즈드라마 ‘윕래시'(Whiplash)에서 제자를 독재자처럼 다루는 선생으로 나온 베테런 J.K. 시몬스가 탔다.
주제가상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지지자들과 함께 흑인 투표권 확보를 위해 앨라배마주의 셀마에서부터 몬고메리까지 행진한 역사를 다룬 ‘셀마'(Selma)의 ‘영광'(Glory)이, 만화영화상은 속편 ‘용 훈련법 2'(How to Train Your Dragon 2)가 받았다. 만화영화상은 ‘레고영화’(The Lego Movie)가 그동안 죽 상승세를 타왔으나 이번에 밀려나면서 오스카상 수상에도 다소 먹구름이 드리우게 됐다. 
외국어 영화상은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을 무대로 부패관리에 저항하는 소시민의 얘기를 그린 ‘리바이아탄'(Leviathan)이 받았다. ‘리바이아탄’은 성경의 욥기를 현대화한 것이다. ‘리바이아탄’의 수상도 다소 이변으로 이 부문 수상작으로 가장 유력시됐던 것은 예비수녀의 얘기를 그린 폴랜드영화 ‘이다'(Ida)였다.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상을 탄 사람은 국제 인권변호사인 레바논 태생의 아말 알라무딘과 갓 결혼한 조지 클루니. 옷에 프랑스어로 쓴 찰리 에브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나는 샤를리’라는 배지를 단 클루니는 자리에 앉은 아내를 내려다보면서 “53세에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 어떤 연금술의 작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시했다. 
그는 이어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대해서 언급, 시상식 날 파리에서 열린 세계 정치 지도자들과 시민들의 행진을 상기시면서 “그들은 항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공포 속에서 걷지 않을 것이라는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 걸었다. 우리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샤를리다”고 말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골든 글로브는 TV 부문에 대해서도 시상한다. 이날 이 부문 수상작을 보면 여러 작품이 신작들로 TV가 아닌 아마존이나 넷플릭스 같은 인터넷을 통해 관람이 가능한 것들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HFPA는 통상 사기진작을 위해 좋은 신작에 대해 시상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은 각부문 수상작들이다.
*시리즈(드라마)-‘정사'(The Affair 신작) *드라마(코미디)-‘트랜스페어런트'(Transparent 신작) *영화/미니 시리즈-‘파고'(Fargo) *여자주연(드라마 시리즈)-루스 윌슨(정사) *남자주연(드라마 시리즈)-케빈 스페이시(‘하우스 오브 카즈’ House of Cards) *여자주연(코미디 시리즈)-지나 로드리게스(처녀 제인 Jane the Virgin-신작) *남자주연(코미디 시리즈)-제프리 탬보(트랜스페어런트) *여자주연(미니시리즈/영화)-매기 질렌할(‘명예로운 여인’ The Honorable Woman) *남자주연(미니시리즈/영화)-빌리 밥 손턴(파고) *여자조연(미니시리즈/영화)-조앤 프로갯(‘다운턴 애비’ Downton Abbey) *남자조연(미니시리즈/영화)-맷 보머(‘노말 하트’ The Normal Heart)     

11일 베벌리힐스의 베벌리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7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독립영화들의 잔치였다. 이날 드라마 부문과 코미디/뮤지컬 부문(골든 글로브는 작품과 남녀 주연상 부문에 한해 드라마와 코미디/뮤지컬 부문으로 나눠 시상한다)에서 각기 작품상을 받은‘보이후드’(Boyhood)와‘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은 모두 독립영화사나 메이저에 속한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들의 작품이다. 이 밖에도 각본과 여우주연과 남우주연 및 조연상 등을 받은 작품도 모두 메이저의 영화들이 아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북한 HFPA 기자



나는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에 북한 여기자 조영자가 새 회원이 된 것을 11일에 열린 제7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때야 비로소 알았다. 조영자가 HFPA의 회원이 되려면 먼저 회원이 된 같은 한국 사람인 내게 그가 예의상 절차상으로 먼저 회원가입 의사를 밝히는 것이 우리 협회의 관례인데 내가 조영자의 가입을 몰랐으니 이야말로 경악할 지경으로 파격적인 이변이다.
HFPA의 회원이 되려면 2명의 기존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 되는데 난 누가 조영자를 추천했는지 알바도 없지만 내가 그를 추천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시상식의 두 사회자인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가 서 있는 무대에 북한 장군 군복 차림의 조영자가 등단(사진)한 뒤 두 사회자가 그를 HFPA의 새 회원이라고 소개했을 때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야 이거 강력한 새 경쟁자가 생겼구나’하는 경계심과 함께 ‘아니 이럴 수가’하고 당황했는데 마치 6.25 때처럼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식이 끝난 후 만난 HFPA의 이탈리아 동료회원 루카가 나보고 “너 북한 기자 들어와도 상관없니”라며 약을 올렸다. 
기자란 유독 경쟁심이 심한 직업이어서 나는 조영자가 시종일관 방귀 참는 얼굴을 해가지고 무대에서 익살을 떨어대며 만장의 폭소를 받는 것이 부럽고 속상했다.
HFPA 회원 된지 8년 만에 이제야 비로소 할리웃 스타들과 얼굴을 익혀 서로 “하이”하는 사이인 나와 달리 풋내기인 조영자는 시상식 무대에까지 서고 또 순식간에 자기 이름이 할리웃에 파다하게 알려졌으니 내 속이 상할 것은 당연지사다.
조영자의 매체는 잡지 ‘무비즈 워우!’(Movies Wow!)로 그는 이날 이 잡지를 들고 나와 김정은의 사진이 박힌 표지를 시상식 중계 TV 카메라 앞에다 대고 내휘둘렀으니 앞으로 이 잡지가 불티나게 팔릴 것이라는 생각에 라이벌 의식이 속에서 강하게 요동을 쳤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 잡지의 부장인 조영자는 인민군 장군으로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장군이 연예지 기자 노릇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조영자에 대한 이런 착잡한 감정과 함께 ‘야 이젠 우리 한국에서 남북한 기자가 함께 HFPA 회원이 됐구나’하는 뿌듯한 자긍심 또한 느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 우리나라가 통일도 되겠구나 하는 가는 희망마저 가져봤다.
그러나 알고 보니 꿈에서 깨어난 듯이 조영자는 북한 기자가 아니라 유명한 한국계 코미디언 마가렛 조였다. 나는 1994년 TV 시리즈 ‘올-아메리칸 걸’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마가렛을 단독 인터뷰해 그와는 구면이다. 
마가렛은 이날 시상식의 큰 흐름인 표현의 자유를 위트와 농담으로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시상식에서는 소니의 해킹과 파리의 풍자잡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를 규탄하고 아울러 어떤 위협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력히 표현됐다.
미 정부가 소니 해킹의 주범으로 밝힌 북한은 이날 여러 차례 야유와 농담의 대상이 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먼저 페이와 폴로가 서두에서 “오늘 우리는 북한이 O.K.하는 영화들을 축하하게 될 것”이라고 북한의 소니사 영화 ‘인터뷰’에 대한 강력한 불만의 표현을 비웃었다. 
이어 등단한 조영자는 “너희들 쇼에는 1,000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기타도 치지 않고 큰 그림을 만들기 위해 많은 카드를 든 사람들도 없으며 데니스 로드맨도 없다”면서 서툰 영어로 북한과 김정은을 조롱했다.
조영자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는 메릴 스트립을 향해 삿대질을 해가면서 함께 셀피를 찍겠다고 강력히 요구, 자리에 앉았던 마이클 키튼(그는 이날 ‘버드맨’으로 코미디/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을 탔다)이 조영자의 셀폰으로 둘을 함께 찍어줬다.
이어 단상에 오른 조영자는 나치 병정식의 거위걸음으로 퇴장했는데 이날 일부에서는 마가렛의 북한 조롱에 대해 ‘인종차별적’이라고 비판하는 트위터가 날아들었다. 이에 대해 마가렛은 “나는 북한과 남한의 부모를 가진 후손이다. 너희들이 나의 사람들을 투옥하고 굶기고 세뇌하니 나에 의해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대응했다. 나도 동감이다.
이어 마가렛은 “내 농담보다는 이날 시상식에 무대에 선 아시아계 연예인은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이라고 할리웃의 소수민족에 대한 푸대접을 비판했다.
이 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언급한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반응을 받은 사람은 HFPA 회장 테오 킹마(네덜란드 사진기자). 그는 인사말에서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파리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곳에서나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단결해 맞설 것”이라고 말해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참석자들이 먹고 마시면서 진행되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식후 각 영화사들이 마련하는 파티와 함께 통상 샴페인이 넘쳐흐르는 주신 바커스의 야단스런 잔치로 알려졌다. 이날도 샴페인과 캐비아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예년의 쇼와는 달리 재미와 엄숙함이 겸비된 매우 성숙한 시상식이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2015년 1월 11일 일요일

빅 아이즈 (Big Eyes)


월터(크리스토프 월츠)가 마가렛(에이미 애담스)에게 수작을 걸고 있다.


얼굴 전체에 균형이 맞지 않는 크고 텅 빈 검은 눈을 한 아이들의 초상화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여류 화가 마가렛 킨(87)과 그의 날사기꾼 남편 월터와의 파란만장한 관계를 그린 얄궂고 재치 있는 코미디 드라마인데 화폭 위의 물감처럼 알록달록하게 재미있다.
1960년대 초의 얘기로 당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했던 여자들에 대한 불평등과 함께 예술작품의 저작권과 소유권에 대한 사뿐한 탐사로 영리하고 귀엽고 날렵한 작품이다. 괴짜라고 불러도 좋을 팀 버튼이 감독했는데 그의 다소 과격하고 이색적인 터치가 가득하다.
교외에서 살던 남편과 헤어진 마가렛(에이미 애담스)은 어린 딸 제인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한다. 마가렛은 공원에서 1달러를 받고 아이들의 얼굴을 그려 주는데 한결같이 허공을 응시하는 텅 빈 검은 눈을 가진 아이들로 그린다. 마가렛 옆에서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했다는 월터(크리스토프 월츠)가 그림 장사를 하는데 이 자가 마가렛에게 다가와 온갖 감언이설로 마가렛을 꼬드긴다.
마가렛은 천하의 날사기꾼이면서 말 잘하고 사람의 감정을 조작하는데 능수능란한 매력적인 월터의 유혹에 넘어가 그와 결혼한다. 월터는 마가렛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독려, 아내의 그림을 팔러 다니다가 후에 유명한 예술촌이 된 노스비치에 있는 엔리코 반두치(존 폴리토)가 경영하는 클럽 화장실 입구에 그림을 걸어놓는다.
그림이 손님들의 인기를 얻자 월터는 자기가 그린 것이라고 선전을 한다. 이에 마가렛이 항의를 하자 월터는 또 감언이설로 이 항의를 묵살시킨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여자가 그린 그림은 갤러리에서도 전시하기를 마다해 마가렛은 이래저래 월터의 말대로 집에서 ‘빅 아이즈’ 그림을 마치 국화빵 찍어내듯이 그려 내놓는다.
그런데 이 그림의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월터는 벼락 유명 화가가 되는데 마가렛이 다시 불평을 하자 월터는 “이제 화가의 진짜 신원을 밝히면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진다”면서 “주머니 돈이 쌈지돈이 아니냐”고 달랜다. 그리고 킨갤러리를 개장하면서는 완전히 월터가 진짜 화가가 되고 마가렛은 뒷전으로 물러나 그림 생산하는 종이 되다시피 한다.  
견디다 못한 마가렛이 딸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 월터에게 이혼해 줄 것을 요구하나 월터는 그림을 100개 이상 그려줘야 이혼해 주겠다고 대꾸한다. 그림을 계속해 그려 남편에게 보내던 마가렛은 마침내 자신을 제대로 추슬러 지역 방송에 나가 ‘빅 아이즈’의 화가가 자신이라고 밝힌다. 이에 월터가 마가렛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정공방이 벌어지는데 현명한 판사(제임스 사이토)에 의해 당연하게 종결된다. 이 재판과정이 아주 재미있고 우습다.
기차게 잘하는 것은 애담스와 월츠의 연기다. 애담스는 남편한테 눌려 살다가 독립하면서 개화하는 여자의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그러나 영화를 말아먹다시피 하는 것은 월츠다.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악한데도 미워하기가 힘든데 카멜레온의 변신과도 같은 연기다. 이밖에도 월터와 가까운 사이가 된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의 칼럼니스트 딕 놀란 역의 대니 휴스턴과 ‘빅 아이즈’를 싸구려 장난 같은 그림이라고 혹평한 뉴욕타임스의 미술비평가 존 카나데이 역의 테렌스 스탬프 및 화랑 주인 역의 제이슨 슈와츠맨 그리고 제임스 사이토 등의 연기도 일품이다.
이와 함께 시대를 잘 표현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의상과 촬영도 좋고 라나 델 레이가 부르는 주제가 ‘빅 아이즈’가 거의 귀기서린 것처럼 으스스하게 아름답다. PG-13. TWC.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이틀 낮과 하루 밤 (Two Days, One Night)


상드라(마리옹 코티야르)가 공장 동료들의 앞을 지나가고 있다.

근로자 서민들의 나날의 투쟁과 애환을 주로 다루는 벨기에의 형제감독 뤽과 장-피에르 다르덴의 또 하나의 소시민의 생존투쟁에 관한 드라마로 ‘장밋빛 인생’에서 프랑스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로 나와 오스카 주연상을 탄 마리옹 코티야르가 주연한다.
두 감독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경제적 연출이 돋보이는 훌륭한 사회문제 드라마이자 시간에 쫓기는 긴장감 가득한 스릴러의 기운을 갖추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과 함께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특히 주인공을 계속해 따라가면서 손으로 들고 찍은 촬영이 내용의 숨 가쁜 상황을 잘 포착하고 있다.
동네의 태양열판 제조공장에 다니는 상드라(코티야르)는 금요일에 전화로 느닷없이 해고 통보를 받는다. 회사의 사정에 따라 17명의 직원 중 1명을 해고하든지 아니면 1,000유로의 보너스를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동료 공원들의 공개투표에서 상드라가 제물이 된 것. 
노동자인 남편과 어린 두 아이를 가진 상드라네는 최근에야 달동네에서 탈출하고 웰페어 수령 신세도 면해 상드라의 해고로 집안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게다가 상드라는 최근 신경쇠약증세로 직장을 한동안 쉬었다. 이 때문에 상드라가 해고의 표적이 된 것 같다.
회사에서 상드라에게 이번에는 비밀투표로 재투표의 기회를 주겠다고 언급, 상드라는 이 때부터 동료 직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신의 구명운동을 시작한다. 
첫 번째 투표에서 상드라 편을 들어준 동료는 단 2명뿐으로 총 7표를 얻어야 해고가 무효가 되는데 이를 위해 상드라는 같은 근로자들의 집을 찾아가 사정을 한다. 투표는 월요일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다. 
머리를 뒤로 따고 진바지에 원색의 탱크탑을 입은 상드라가 절박하게 동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사정하는 모습에 가슴이 막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져 호흡이 가쁘게 된다. 결과야 어찌 됐든 상드라는 좋은 싸움을 하고 자아 재발견을 하는데 다르덴 형제의 인간의 근본적 선에 대한 믿음이 엿보인다.
경탄할 것은 코티야르의 연기다. 그는 영화의 모든 장면에 나오면서 아주 사실적이요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데 특히 표현력이 가득한 커다란 눈으로 표현하는 상드라의 착잡한 심정이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절실해 보는 사람의 가슴을 파고든다. 작중 인물과 배우가 하나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성인용. IFC. 일부극장.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기자 40년



2015년 1월4일은 내가 한국일보 기자생활을 한지 정확히 41년째가 되는 날이다. 나는 미국에서 사는 것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지금도 가끔 그리운 한국의 정경은 나의 한국에서의 7년간의 한국일보 기자시절이다. 특히 전쟁터처럼 와글바글 대는 편집국 내의 생명력과 이 생명력을 뿜어내는 선후배 기자 간의 패기와 우정과 의리가 사무치게 그리운 때가 있다.
기자의 소명 중 하나가 불의를 의롭게 하는 것일진대 당시 정보부 요원이 신문사에 상주하던 불의 하에서 글을 써야 했던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모두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서로 똘똘 뭉쳤었는지도 모른다. 펜과 혀의 자유가 없었던 그 때 우리는 퇴근하면 경복궁 앞 중학동에 있던 회사 근처의 무교동 빈대떡 집에 들러 막걸리를 퍼마시면서 시대를 고뇌하고 또 속의 울분을 토해냈었다.
그 때 한국일보에는 김성우와 정달영 선배 등 재사와 문필가들이 많았다. 내가 아직까지 글을 쓰면서 살고 있는 것도 이들 선배들이 ‘쿠사리’를 주면서 글 단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사에서는 ‘사스마리’와 ‘게라’ 같은 일본 용어를 여럿 썼었다.
나의 신문사 대선배로 후에 주불 특파원을 지낸 똑똑이 ‘타이거’ 김승웅 형과의 일화 하나. 사회부 기자 시절 키신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쓴 내 기사를 김형이 데스크를 보면서 한다는 말이 “야, 박흥진 너는 박스기사는 잘 쓰면서 스트레이트 기사는 왜 이 모양이냐”고 핀잔을 주었다. 김형과 나는 지금도 교신하면서 친구처럼 지내지만 어디까지나 형은 형이다.
그러나 이런 망신은 졸병 기자들이 선배들에게 매일 같이 당하는 것이어서 어떤 때는 야단을 안 맞으면 오히려 이상했다. 쓴 기사가 그대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군대처럼 엄격한 서열 하에 우리 선후배는 이렇게 필설로 때리고 맞으면서도 친형제들처럼 사랑했다. 그 정이란 가족보다 더할 정도였다. 한국일보의 전통이자 큰 자랑 중 하나가 한국 언론사들 중 가장 선후배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일보 창간 20주년인 1974년 1월 입사해 6개월 간의 견습을 거쳐 먼저 3년간 외신부에서 근무했고 그 후 4년은 사회부에서 경찰 기자와 김포공항 출입 기자를 하다가 1980년 5월 LA의 한국일보 미주본사 근무를 자원해 지금까지 이 곳에서 글을 쓰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 기자생활 7년짜리는 졸병에 지나지 않아 선배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완전히 군대식인데 툭하면 야근을 하면서 집보다 신문사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런 고난을 정의구현에 일조하는 엘리트라는 자부심으로 달랬다. 이 정의구현 하려다가 남산(정보부)에 찍혀 도주하거나 해고당하거나 이꼴 저꼴 다 보기 싫어 미국으로 이주한 선배들도 있다. 지금 우리 후배들이 누리는 언론 자유는 이들이 겪은 아픔 위에 마련된 것이다.
나는 무려 2,000여명이 지원한 입사시험을 통과한 견습 29기인데 입사동기 중에 한 명이 소설가 김훈이다(창간 20주년 운동회 사진-앞줄 맨 오른쪽이 나 그 뒤가 김훈). 김훈은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아래지만 서로 죽이 맞아 함께 술께나 마셨는데 그 때부터 그는 뭔가 달랐다.
외신부에 들어가자마자 닉슨이 하야 했고 이어 월남 패망의 역사를 지켜 봤다. 기자란 박봉이어서(돈 때문이라면 삼성이나 현대에 들어갔을 것이다) 당시 외신부원들은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 영문판을 찢어 나눠 번역해 푼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어 사회부로 옮겨 동대문서(청량리와 태능서 포함)를 출입했는데 다른부 기자들은 경찰 출입 기자들을 개떼들이라고 불렀다. 경찰 기자의 총책인 시경출입 기자(캡틴)의 지시 하에 떼로 몰려다니며 주로 살인과 강도와 방화 같은 험한 사건을 취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부의 꽃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입사동기 중 나이가 제일 많은 데다가 내성적이어서 들개와도 같은 경찰 출입기자 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진짜로 스트레스 심한 고된 생활이었는데 현재 한국일보 시카고 지사장인 김인규 후배는 사회부 견습시절 큰 사건이 난 경찰서에서 아예 상주를 하는 바람에 새댁이 경찰서로 그의 내복을 갖다 주기도 했다(기자 부인들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이렇게 고되니 퇴근 후 술로 노고를 아니 풀 수가 없었다. 졸병들끼리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면서 선배 흉도 보고 박정희 욕도 하다가도 주위를 둘러보기가 일쑤였다. 우리말을 들은 누군가의 고발로 남산에 끌려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부 기자 시절 가장 인상에 남았던 일은 눈물을 흘리면서 취재한 농약이 묻은 번데기를 먹고 죽은 달동네 어린 아이들 사건과 영화 ‘인천’에서 맥아더 역을 맡아 한국에 온 로렌스 올리비에를 단독 취재한 것.
과연 나는 기자로서의 소명을 제대로 했는가 하고 자문할 때도 있지만 내 인생은 신문의 인생이요 한국일보의 인생이다. 배운 것이 있다면 지구력과 확인과 사사건건 궁금해 하는 것. 앞으로 몇 년을 더 할지는 모르겠으나 40년 기자생활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니 다행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2015년 1월 4일 일요일

‘인간의 음성’ 소피아 로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생의 기본은 사랑”


과거 모국인 이탈리아와 할리웃에서 맹활약한 연기파이자 육체파 수퍼스타 소피아 로렌(80)과의 인터뷰가 할리웃에 있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사무실에서 있었다.
이 자리는 로렌의 아들 에도아르도 폰티가 감독하고 로렌이 주연한 26분짜리 단편영화‘인간의 음성’(Human Voice)을 홍보하기 위해 마련됐다. 로렌이 최근 출판한 자서전‘어제, 오늘, 내일: 나의 인생’(이 제목은 비토리오 데 시카가 감독하고 로렌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공연한 1964년작 동명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딴 것이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가슴 윗부분이 들여다보이는 셔츠 위에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로렌은 나이가 있어 젊은 시절만큼의 아름다움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그러나 터질 것 같은 육체미를 뽐내던 로렌의 주름진 얼굴과 피부를 보면서 세월의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금발의 긴 머리와 큰 눈에 옅은 갈색 선글라스를 낀 로렌은 액센트를 써가면서 질문에 위트와 유머를 섞어 솔직하고 진지하게 답했는데 생의 예지가 가득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로렌은 현재 스위스의 제네바에 살고 있다.      

-인생 80을 살면서 자기 삶에 대해 후회한 것이라도 있는가.
“왜 후회한 일이 없겠는가. 살면서 너무나 많은 일을 겪다 보면 후회도 하게 마련이나 난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애써 왔다. 그것은 결국 양심대로 사는 것이다.”

-나이를 먹은 이제 과거보다 현명해졌다고 생각하는가.
“난 늘 내 감정에 따라 살아 왔기 때문에 현명하진 못하다. 그러나 난 전후의 이탈리아에서 문제가 많고 어려운 가정환경 하에서 고생을 하며 자라 그 같은 삶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그 같은 경험을 보석처럼 중하게 여기는데 나이를 먹어서도 그때의 경험에서 삶의 예지를 빌려다 쓴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며 또 기대하는가.
“난 이제 내가 과거에 원했던 것을 성취했기 때문에 평화로운 삶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좋은 가족과 아름다운 자식들과 손주들이 있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단 하나 유감이라면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지 못한 것이다. 그 꿈만은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다.”

-삶이 사랑에 관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가.
“사랑이란 인생의 모든 면의 기본이다. 그것 없이 무얼 할 수가 있겠는가. 난 사랑 없이 살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모두가 늘 찾는 것이며 또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명성과 성공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난 명성과 성공이 내게 찾아오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와 함께 시골서 로마로 갔을 때 그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리라 다짐했었다. ‘쿼바디스’의 엑스트라부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갔다. 내가 성공한 큰 이유는 나와 같은 나폴리 출신의 비토리오 데 시카가 나를 나폴리가 무대인 영화에 썼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나는 점차 무게 있는 역을 맡게 됐다. 난 데 시카와 함께 20년을 일했다. 그는 나의 꿈을 이뤄준 사람이다.”

-아들 감독과 다른 감독들과의 차이라도 있었는가.
“감독은 비교할 수 없다. 무슨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장 콕토의 1인 독백극이 원작인 ‘인간의 음성’은 나이 먹은 여자의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난 늘 이 역을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안 돼 못했다. 2년 전에야 작품의 여인과 나이가 비슷해 만들었다. 꿈의 실현과도 같은 영화다.”

-아직도 영화에 대한 정열을 지니고 있는가.
“아직도가 아니다. 난 늘 열정을 가지고 있다.”

-당신의 손주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라도 있는가.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난 그들로부터 단순함을 배우고 있다. 아이들이 있을 때면 집에 생기가 돈다.”

-당신이 오스카 주연상을 받은 ‘두 여인’에는 어떻게 나오게 됐는가.
“원래 그 역은 안나 마냐니에게 제공됐고 난 그의 딸 역을 맡을 예정이었는데 마냐니가 역을 거절하는 바람에 내가 맡게 된 것이다. 정말로 좋은 역으로 역시 데 시카가 감독했다.”

-요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난 육체적 운동을 싫어한다. 아침 4시 반에 일어나 이런 저런 할 일들을 한다. 난 매사에 정확한 것을 좋아한다. 이젠 마치 아이들처럼 무엇이든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어 좋다.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데 난 쉬는 것을 좋아한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당신에게 그런 힘과 열정과 추진력을 준다고 생각하는가.
“나도 모르겠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이것이 내 인생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난 아직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열성이 있다. 난 늘 그랬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요즘 미국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젤라(소비아 로렌)는 자기를 버리고 간 님을 애타게 그리워한다. 영화‘인간의 음성’ 장면.
“시상시즌이 오면 영화들이 집으로 배달되는데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별로다. 난 음악과 뮤지컬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인’에도 나왔다. 난 이 영화를 몹시 좋아하는데 특히 공연한 대니얼 데이-루이스 때문에 더 좋아한다.”

-얼마 전에 미 영화학회(AFI)가 주는 생애업적상을 받은 소감은.
“아름다웠다. 마치 4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는데 유감인 것은 모두들 셀피를 찍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난 그 때까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는데 아주 성가시더라. 나는 원래 그런 행사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번엔 정말 즐겼다.”

-당신을 사모하던 그 멋진 사람들이 이젠 여기에 없는데 그들을 생각하면 고독해지는가.
“참 슬프다. 자기에게 매우 귀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내 남편 칼로 폰티(명 제작자)가 죽었을 때가 그랬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나와 함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사망했다 할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케리 그랜트가 당신에게 구혼했을 때 왜 거절했는가.
“그가 내게 구혼하진 않았다. 그와는 나의 첫 미국 영화 ‘자랑과 정열’에서 처음 만났다. 프랭크 시내트라도 나왔다. 그랜트는 정말로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우린 아주 좋은 관계였는데 난 23세였고 그랜트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들었었다. 나이 23세엔 사랑이 무언지도 잘 모른다. 그 후 난 이탈리아에서 칼로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어쨌든 그랜트와 나는 오래 관계를 유지했다. 우린 좋은 우정을 지키면서 편지와 전화로 교통했다. 그랜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린 아름다운 우정을 지켰다.”

-건강의 비결은 무엇인가.
“많이 안 먹는다. 난 파스타를 좋아하지만 체중을 적당히 유지하기 위해 과식은 안 한다.”

-스위스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해 달라.
“작은 마을에 산다. 난 외출을 잘 안 한다. 가능하면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침 7시 반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돌아와선 미국에 있는 아들과 손주들과 전화로 통화한다. 매우 단순한 일상으로 책과 각본을 많이 읽는다. 이 자서전을 쓰는데 1년이나 걸렸다. 누군가 날 저녁에 초대해도 난 거의 응하지 않는다. 공원에 가면 사람들이 날 보고 셀피 찍자고 요구하는데 다 들어준다.”

-과거 할리웃에서의 생활은 어땠는가.
“아주 즐겼다. 조지 큐커와 찰리 채플린 같은 훌륭한 감독들과 일한 것은 정말로 멋있는 일이었다. 특히 채플린과 일한 것에 대해선 굉장한 자부심을 느낀다.”

-아시아 영화에서 일할 생각이 있는가.
“당장은 없지만 난 새 장소를 발견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럴 생각이다. 난 세계의 구석구석과 연결되고 싶다.”

-당신과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 가까웠는가.
“아주 가까웠다. 내가 이렇게 된 근원은 어머니 때문이다.”

-혹시 미를 위해 당신 모습을 고쳐볼 생각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사람은 태어나서 나이를 먹게 마련인데 뭘 고치려고 하는가. 젊어 보이려고 성형수술을 하다간 괴물이 되는 수가 있다. 주름살이 있지만 난 슬픈 주름살보다는 행복한 주름살을 갖고 싶다. 성형수술을 하면 영원히 슬픈 주름살을 갖게 된다.”                

-편지를 무엇으로 쓰는가.
“펜으로 종이에 쓴다. 난 컴맹이다. 내 생일에 팬들이 카드를 보내오면 난 일일이 친필로 글을 써 답신한다. 컴퓨터로 답한다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셀마 (Selma)

닥터 킹(가운데)이 지지자들과 함께 민권운동 행진을 하고 있다.

“흑인 투표권 보장”비폭력 행진 생생히


1965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흑인들의 투표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민권운동 지지자들과 함께 앨라배마주 셀마에서부터 몬고메리까지 비폭력 무저항 행진을 한 역사적 사실을 지적이요 강력하고 감동적이며 또 사려 깊게 그린 심금을 뒤 흔드는 작품이다.
단역 배우들의 표정과 민권행진을 둘러싼 막후 토론 그리고 행진 대열에 가한 기마경찰들의 가혹한 진압 등 작은 것에서부터 스케일 큰 것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정성껏 고르게 잘 다루고 있다. 
서사적이면서 세밀하고 영혼이 떨리는 감동을 일으키면서 아울러 냉정한 자세를 잃지 않는 빼어난 솜씨로 연출한 감독은 흑인 여류 에이바 뒤버네이. 장인의 연출력과 지적인 각본 그리고 좋은 촬영과 앙상블 캐스트의 완벽한 연기 등을 즐기면서 아울러 역사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는 훌륭한 영화다.
1964년 존슨 대통령(탐 윌킨슨)이 민권법에 서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앨라배마와 같은 미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의 방해와 위협으로 투표를 할 수가 없었다. 영화는 처음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스톡홀름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어 버밍햄의 흑인교회에 폭탄이 투척되면서 4명의 소녀들이 사망한다. 그리고 장소는 셀마로 이동한다. 흑인 여자(오프라 윈프리-공동 제작 겸)가 투표를 하기 위해 유권자 등록을 하려고 하나 퇴짜를 맞는다. 
닥터 킹(데이빗 오이엘로)이 셀마에 본부를 차리고 지지자들과 함께 흑인 투표권 확보를 위한 사전운동을 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진다. 토론과 반박이 격론을 벌이고 궁극적 지지로 이어지는 전략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닥터 킹의 이런 공적인 활동과 함께 그의 개인적 문제를 공평하게 얘기하면서 그가 회의하고 개인적 결함에 갈등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보여 주는데 그와 부인 코레타 스캇 킹(카르멘 에조고)의 긴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다. 
닥터 킹은 목적을 달성키 위해 존슨을 여러 차례 만나는데 둘의 대면장면이 산 역사를 보듯이 생생하다. 그리고 존슨이 조지 월래스(팀 로스) 앨라배마 주지사를 만나는 장면이 우습고 재미있다.
이윽고 닥터 킹의 추종자들이 셀마로부터 몬고메리까지 첫 행진을 시작(이 때는 닥터 킹은 참여하지 않았다),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 이르렀을 때 기마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받고 해산된다. 이 장면이 충격적으로 긴박감 있다. 그러나 경찰의 이런 잔혹한 진압이 TV를 통해 생중계되면서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백인들이 셀마로 찾아와 행진에 참여하면서 며칠 후 다시 행진을 시작한 대열은 몬고메리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흑인 투표권 법안에 회의를 표하던 존슨도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의회에서 법안 통과를 위한 감격적인 연설을 한다. 연설은 “위 셜 오버컴”으로 끝난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힘차고 감정적이며 공정하고 또 현명한 영화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특히 오이엘로의 웅변과 함께 묵직하면서도 내밀한 연기가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 그 밖에도 윌킨슨과 로스와 에조고의 연기도 훌륭하다. 그리고 잠깐 나오는 말콤 X 역의 나이벨 태치의 연기가 비수처럼 빛난다. PG-13. Paramount. 일부 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아메리칸 스나이퍼 (American Sniper)

카일(브래들리 쿠퍼)이 라이플로 표적을 겨냥하고 있다.

이라크전서 160여명 사살한 ‘전설의 저격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만든 잘 생긴 영화이긴 하나 너무 겅-호 마초식의 호전적 영화여서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다. 이라크전에 4차례나 참전해 무려 160여명을 사살한 미 해군 특공대(SEAL)원 크리스 카일의 실화로 총을 사랑하는 이스트우드에게 맞는 소재다.
약간 반복적이요 카일의 내면 묘사와 그와 아내와의 갈등을 비롯한 가족 얘기를 할 때는 마지못해 하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으나 매우 긴장감 있고 사납고 또 생생한 작품이다. 특히 볼만한 것은 체중을 많이 늘리고 텍사스 액센트를 써 가면서 카일의 역을 해낸 브래들리 쿠퍼의 듬직한 모습과 연기다.  
레드 넥 미국인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영화로 카일은 9.11사태가 나자 “하느님과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해군 특공대에 자원입대한다. 카일의 아버지는 신심이 깊은 사람으로 카일이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가르쳤다. 따라서 카일은 총을 잘 쏴 저격수가 된다.
저격수는 표적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적이냐 또는 민간인이냐를 구분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처음에 카일은 대형 수류탄으로 미군을 겨냥하는 어린 소년을 망원 렌즈로 조준하면서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갈등한다. 그러나 카일과 그의 동지들은 적을 “야만인”이라 부르면서 “그 곳에는 악이 있어 우리는 그 악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카일은 바에서 만난 타야(시에나 밀러)와 결혼, 아이까지 두고 있지만 그가 전쟁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수록 부부관계는 악화된다. 카일은 집에 있는 것보다 전선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현지에서 적을 골라 단 한 발에 사살하면서 ‘전설’이라 불리게 된다. 
먼지와 흙바람과 땀과 피로 얼룩진 전투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졌는데 영화가 이같은 전투와 카일의 저격수 모습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어 긴박감이 약해진다. 
한편 카일에 맞설 만한 이라크의 저격수로 올림픽 출전 사격선수가 나타나 신출귀몰하면서 미군을 저격, 재미를 부추기긴 하나 ‘천일야화’에나 나옴직한 칼 잘 쓰는 페르샤 사나이처럼 보여 실감이 나질 않는다.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전쟁에 4차례나 투입됐던 카일은 마침내 지쳐 제대를 한다. 그리고 그는 귀향해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폭력의 보수가 어떤 것인지를 묻고도 있어 이스트우드 특유의 멜랑콜리한 기운도 스며들어 있지만 어디 까지나 총기예찬과도 같은 영화다. 믿음직한 연기를 하는 쿠퍼가 내면 묘사를 보다 깊이 있게 했더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R. WB.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골드핑거’



며칠 전에 지나가버린 2014년은 역대 007시리즈 중 가장 잘 만들었다는 시리즈 세 번째 영화 ‘골드핑거’(Goldfinger)가 개봉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물론 살인면허를 지닌 영국 정보부 MI6 요원인 제임스 본드이지만 사실 본드보다 더 흥미 있는 인물은 본드의 적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인 ‘닥터 노’(1962)와 이 영화의 제목이 다 본드의 적의 이름인 것만 봐도 악한이 정의한보다 더 매력적이라는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드가 “프랑스제 손발톱용 니스 이름 같다”고 비웃은 이름을 지닌 오릭 골드핑거(독일 배우 게르트 프뢰베)는 ‘색깔과 광채와 신성한 무게’ 때문에 황금을 사랑하는 황금광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골드핑거가 자기가 보유한 금값을 올려놓기 위해 켄터키주 포트낙스에 있는 미연방준비위의 금괴를 방사능으로 오염시키려는 ‘그랜드 슬램작전’을 본드가 저지한다는 것. ‘마이다스 터치’를 지닌 골드핑거는 억만장자이면서도 카드놀이와 내기골프에서 속임수를 쓰는 승부욕에 집착하는 ‘소어 루저’로 시리즈 중 하나인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처럼 황금총을 소지했다.
골드핑거는 비행하는 개인용 비행기 안에서 이 총을 본드에게 겨눈 채 “난 2시간 후면 쿠바에 있다”고 말하는데 얼마 후 미-쿠바 간 국교가 정상화될 요즘 같았으면 그런 말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골드핑거는 이 총으로 본드를 쏴 죽이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황천으로 날아간다.
골드핑거가 하늘로 날아간 뒤 본드걸 푸시 갤로어가 본드에게 “골드핑거 어디에 있어요”라고 묻자 본드는 “하늘에서 황금 하프를 켜고 있지”라며 이죽거린다.
골드핑거는 배신자를 살해할 때도 황금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본드걸이 된 질(셜리 이튼)을 발가벗긴 뒤 온몸에 도금을 해(사진) 기공을 막아 질식사 시킨다. 
그런데 질을 죽인 사람은 한국인이다. 그는 골드핑거의 벙어리 바디가드 아드잡(잡일이라는 뜻으로 역은 일본인 올림픽 역도선수 해롤드 사카다)으로 거구에 검은 상의와 타이를 매고  치명적인 금속 테두리를 한 검은 실크햇을 쓰고 다니는데 히죽이 웃으면서 사람 잡는다.
골드핑거가 자기 소유의 골프클럽에서 본드와 골프를 치러 가면서 아드잡에게 “한국에선 아직 골프가 국민경기가 아니지”라고 빈정거리는데 한국은 그 때 막 보릿고개를 넘어선 때였으니 그 말이 틀리진 않다.
본드 시리즈에서 본드 악인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본드걸이다. 보통 본드는 진짜 본드걸을 만나기 전 여러 준 본드걸들과 동침을 하는데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 천하의 플레이보이다. ‘골드핑거’의 본드걸 푸시 갤로어(Pussy Galore)는 그 외설적인 이름 때문에 미국에서 검열 때 논란이 됐었다. 푸시 역의 오너 블랙만은 역대 본드걸 중 가장 나이 먹고 성숙한 여인으로 본드와의 화학작용의 농도가 황금도 녹일 만큼 강렬하다. 
최근에 본드의 새 상관 M(주디 덴치)은 새 본드(대니얼 크레이그) 보고 “당신은 술과 색에 탐닉하는 공룡과도 같은 존재”라고 본드의 구세대적 남성행위를 비판했지만 본드만 탓할 일이 아니다. 가슴에 시커먼 털이 무성한 늠름한 체격에 강한 마스크 그리고 멋과 맛을 아는 데다가 박학다식하고 출중한 정력을 지닌 이 ‘섹시 비스트’를 보고 자기 몸을 스스로 바치는 여자들도 문제다.
그런데 나는 수많은 본드걸 중에 넘버원이요 영원한 본드걸을 M의 비서 모니페니라고 본다.  모니페니는 본드가 플레이보이인 줄 알면서도 그를 간절한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데 이를 잘 알고 있는 본드가 모니페니와 나누는 아이들 소꿉장난 같은 사랑의 행위가 재미있다. 
시리즈의 또 다른 유명한 것이 주제가. 금관악기가 강조된 ‘골드핑거’의 음악은 이 영화 외에도 ‘선더볼’ 등 여러 편의 본드영화 음악을 작곡한 존 배리가 지었는데 노래는 셜리 배시가 불러 빅히트했다. 고함지르듯 하는 노래가 강철의 쓴맛이 느껴지도록 섹시하다. 배시는 이 노래 외에도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등 3편의 시리즈 노래를 불렀다.
미디엄 마일드 보드카 마티니(셰이큰 낫 스터드)를 즐겨 마시는 본드의 또 다른 멋은 위기 속에서도 결코 냉정을 잃지 않고 툭툭 내뱉듯이 하는 위트 있는 말이다. 때로 냉소적인데 ‘골드핑거’에서도 “총을 늘 차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열등감 때문”이라고 답하고 물 담긴 욕조에 빠진 적을 감전사시킨 뒤 “쇼킹”이라고 한마디 한다. 그리고 M이 본드에게 아무 여자하고나 잔다고 나무라자 본드는 “나는 내 단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호색을 시인한다.  
본드는 영화 끝에 미국을 위기에서 구해준 공로를 치하 받기 위해 백악관으로 가는데 영화에는 안 나오나 린든 존슨과 레이디 버드가 본드를 맞았음에 분명하다. ‘골드핑거’는 이 영화 외에도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등 시리즈 4편을 만든 가이 해밀턴이 감독했다.
한편 대니얼 크레이그가 주연하고 샘 멘데스가 감독하는 24번째 본드영화 ‘스펙터’(Spectre)가 11월에 개봉된다. 본드의 적으로는 크리스토프 월츠가 그리고 본드걸로는 레아 세이두와 모니카 벨루치(50)가 나온다. 벨루치는 역대 본드영화 사상 가장 나이 먹은 본드걸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