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월 11일 일요일

기자 40년



2015년 1월4일은 내가 한국일보 기자생활을 한지 정확히 41년째가 되는 날이다. 나는 미국에서 사는 것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지금도 가끔 그리운 한국의 정경은 나의 한국에서의 7년간의 한국일보 기자시절이다. 특히 전쟁터처럼 와글바글 대는 편집국 내의 생명력과 이 생명력을 뿜어내는 선후배 기자 간의 패기와 우정과 의리가 사무치게 그리운 때가 있다.
기자의 소명 중 하나가 불의를 의롭게 하는 것일진대 당시 정보부 요원이 신문사에 상주하던 불의 하에서 글을 써야 했던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모두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서로 똘똘 뭉쳤었는지도 모른다. 펜과 혀의 자유가 없었던 그 때 우리는 퇴근하면 경복궁 앞 중학동에 있던 회사 근처의 무교동 빈대떡 집에 들러 막걸리를 퍼마시면서 시대를 고뇌하고 또 속의 울분을 토해냈었다.
그 때 한국일보에는 김성우와 정달영 선배 등 재사와 문필가들이 많았다. 내가 아직까지 글을 쓰면서 살고 있는 것도 이들 선배들이 ‘쿠사리’를 주면서 글 단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사에서는 ‘사스마리’와 ‘게라’ 같은 일본 용어를 여럿 썼었다.
나의 신문사 대선배로 후에 주불 특파원을 지낸 똑똑이 ‘타이거’ 김승웅 형과의 일화 하나. 사회부 기자 시절 키신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쓴 내 기사를 김형이 데스크를 보면서 한다는 말이 “야, 박흥진 너는 박스기사는 잘 쓰면서 스트레이트 기사는 왜 이 모양이냐”고 핀잔을 주었다. 김형과 나는 지금도 교신하면서 친구처럼 지내지만 어디까지나 형은 형이다.
그러나 이런 망신은 졸병 기자들이 선배들에게 매일 같이 당하는 것이어서 어떤 때는 야단을 안 맞으면 오히려 이상했다. 쓴 기사가 그대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군대처럼 엄격한 서열 하에 우리 선후배는 이렇게 필설로 때리고 맞으면서도 친형제들처럼 사랑했다. 그 정이란 가족보다 더할 정도였다. 한국일보의 전통이자 큰 자랑 중 하나가 한국 언론사들 중 가장 선후배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일보 창간 20주년인 1974년 1월 입사해 6개월 간의 견습을 거쳐 먼저 3년간 외신부에서 근무했고 그 후 4년은 사회부에서 경찰 기자와 김포공항 출입 기자를 하다가 1980년 5월 LA의 한국일보 미주본사 근무를 자원해 지금까지 이 곳에서 글을 쓰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 기자생활 7년짜리는 졸병에 지나지 않아 선배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완전히 군대식인데 툭하면 야근을 하면서 집보다 신문사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런 고난을 정의구현에 일조하는 엘리트라는 자부심으로 달랬다. 이 정의구현 하려다가 남산(정보부)에 찍혀 도주하거나 해고당하거나 이꼴 저꼴 다 보기 싫어 미국으로 이주한 선배들도 있다. 지금 우리 후배들이 누리는 언론 자유는 이들이 겪은 아픔 위에 마련된 것이다.
나는 무려 2,000여명이 지원한 입사시험을 통과한 견습 29기인데 입사동기 중에 한 명이 소설가 김훈이다(창간 20주년 운동회 사진-앞줄 맨 오른쪽이 나 그 뒤가 김훈). 김훈은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아래지만 서로 죽이 맞아 함께 술께나 마셨는데 그 때부터 그는 뭔가 달랐다.
외신부에 들어가자마자 닉슨이 하야 했고 이어 월남 패망의 역사를 지켜 봤다. 기자란 박봉이어서(돈 때문이라면 삼성이나 현대에 들어갔을 것이다) 당시 외신부원들은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 영문판을 찢어 나눠 번역해 푼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어 사회부로 옮겨 동대문서(청량리와 태능서 포함)를 출입했는데 다른부 기자들은 경찰 출입 기자들을 개떼들이라고 불렀다. 경찰 기자의 총책인 시경출입 기자(캡틴)의 지시 하에 떼로 몰려다니며 주로 살인과 강도와 방화 같은 험한 사건을 취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부의 꽃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입사동기 중 나이가 제일 많은 데다가 내성적이어서 들개와도 같은 경찰 출입기자 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진짜로 스트레스 심한 고된 생활이었는데 현재 한국일보 시카고 지사장인 김인규 후배는 사회부 견습시절 큰 사건이 난 경찰서에서 아예 상주를 하는 바람에 새댁이 경찰서로 그의 내복을 갖다 주기도 했다(기자 부인들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이렇게 고되니 퇴근 후 술로 노고를 아니 풀 수가 없었다. 졸병들끼리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면서 선배 흉도 보고 박정희 욕도 하다가도 주위를 둘러보기가 일쑤였다. 우리말을 들은 누군가의 고발로 남산에 끌려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부 기자 시절 가장 인상에 남았던 일은 눈물을 흘리면서 취재한 농약이 묻은 번데기를 먹고 죽은 달동네 어린 아이들 사건과 영화 ‘인천’에서 맥아더 역을 맡아 한국에 온 로렌스 올리비에를 단독 취재한 것.
과연 나는 기자로서의 소명을 제대로 했는가 하고 자문할 때도 있지만 내 인생은 신문의 인생이요 한국일보의 인생이다. 배운 것이 있다면 지구력과 확인과 사사건건 궁금해 하는 것. 앞으로 몇 년을 더 할지는 모르겠으나 40년 기자생활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니 다행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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