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월 20일 화요일

북한 HFPA 기자



나는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에 북한 여기자 조영자가 새 회원이 된 것을 11일에 열린 제7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때야 비로소 알았다. 조영자가 HFPA의 회원이 되려면 먼저 회원이 된 같은 한국 사람인 내게 그가 예의상 절차상으로 먼저 회원가입 의사를 밝히는 것이 우리 협회의 관례인데 내가 조영자의 가입을 몰랐으니 이야말로 경악할 지경으로 파격적인 이변이다.
HFPA의 회원이 되려면 2명의 기존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 되는데 난 누가 조영자를 추천했는지 알바도 없지만 내가 그를 추천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시상식의 두 사회자인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가 서 있는 무대에 북한 장군 군복 차림의 조영자가 등단(사진)한 뒤 두 사회자가 그를 HFPA의 새 회원이라고 소개했을 때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야 이거 강력한 새 경쟁자가 생겼구나’하는 경계심과 함께 ‘아니 이럴 수가’하고 당황했는데 마치 6.25 때처럼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식이 끝난 후 만난 HFPA의 이탈리아 동료회원 루카가 나보고 “너 북한 기자 들어와도 상관없니”라며 약을 올렸다. 
기자란 유독 경쟁심이 심한 직업이어서 나는 조영자가 시종일관 방귀 참는 얼굴을 해가지고 무대에서 익살을 떨어대며 만장의 폭소를 받는 것이 부럽고 속상했다.
HFPA 회원 된지 8년 만에 이제야 비로소 할리웃 스타들과 얼굴을 익혀 서로 “하이”하는 사이인 나와 달리 풋내기인 조영자는 시상식 무대에까지 서고 또 순식간에 자기 이름이 할리웃에 파다하게 알려졌으니 내 속이 상할 것은 당연지사다.
조영자의 매체는 잡지 ‘무비즈 워우!’(Movies Wow!)로 그는 이날 이 잡지를 들고 나와 김정은의 사진이 박힌 표지를 시상식 중계 TV 카메라 앞에다 대고 내휘둘렀으니 앞으로 이 잡지가 불티나게 팔릴 것이라는 생각에 라이벌 의식이 속에서 강하게 요동을 쳤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 잡지의 부장인 조영자는 인민군 장군으로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장군이 연예지 기자 노릇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조영자에 대한 이런 착잡한 감정과 함께 ‘야 이젠 우리 한국에서 남북한 기자가 함께 HFPA 회원이 됐구나’하는 뿌듯한 자긍심 또한 느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 우리나라가 통일도 되겠구나 하는 가는 희망마저 가져봤다.
그러나 알고 보니 꿈에서 깨어난 듯이 조영자는 북한 기자가 아니라 유명한 한국계 코미디언 마가렛 조였다. 나는 1994년 TV 시리즈 ‘올-아메리칸 걸’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마가렛을 단독 인터뷰해 그와는 구면이다. 
마가렛은 이날 시상식의 큰 흐름인 표현의 자유를 위트와 농담으로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시상식에서는 소니의 해킹과 파리의 풍자잡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를 규탄하고 아울러 어떤 위협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력히 표현됐다.
미 정부가 소니 해킹의 주범으로 밝힌 북한은 이날 여러 차례 야유와 농담의 대상이 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먼저 페이와 폴로가 서두에서 “오늘 우리는 북한이 O.K.하는 영화들을 축하하게 될 것”이라고 북한의 소니사 영화 ‘인터뷰’에 대한 강력한 불만의 표현을 비웃었다. 
이어 등단한 조영자는 “너희들 쇼에는 1,000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기타도 치지 않고 큰 그림을 만들기 위해 많은 카드를 든 사람들도 없으며 데니스 로드맨도 없다”면서 서툰 영어로 북한과 김정은을 조롱했다.
조영자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는 메릴 스트립을 향해 삿대질을 해가면서 함께 셀피를 찍겠다고 강력히 요구, 자리에 앉았던 마이클 키튼(그는 이날 ‘버드맨’으로 코미디/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을 탔다)이 조영자의 셀폰으로 둘을 함께 찍어줬다.
이어 단상에 오른 조영자는 나치 병정식의 거위걸음으로 퇴장했는데 이날 일부에서는 마가렛의 북한 조롱에 대해 ‘인종차별적’이라고 비판하는 트위터가 날아들었다. 이에 대해 마가렛은 “나는 북한과 남한의 부모를 가진 후손이다. 너희들이 나의 사람들을 투옥하고 굶기고 세뇌하니 나에 의해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대응했다. 나도 동감이다.
이어 마가렛은 “내 농담보다는 이날 시상식에 무대에 선 아시아계 연예인은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이라고 할리웃의 소수민족에 대한 푸대접을 비판했다.
이 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언급한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반응을 받은 사람은 HFPA 회장 테오 킹마(네덜란드 사진기자). 그는 인사말에서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파리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곳에서나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단결해 맞설 것”이라고 말해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참석자들이 먹고 마시면서 진행되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식후 각 영화사들이 마련하는 파티와 함께 통상 샴페인이 넘쳐흐르는 주신 바커스의 야단스런 잔치로 알려졌다. 이날도 샴페인과 캐비아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예년의 쇼와는 달리 재미와 엄숙함이 겸비된 매우 성숙한 시상식이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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