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1월 27일 금요일

황금(Gold)


케니(왼쪽)와 마이클이 인도네시아의 정글에서 황금의 꿈을 쫓고 있다.

황금을 찾아 몸부림치는 사나이의 투쟁과 모험


황금을 찾아 집념과 꿈에 사는 사나이의 끈질기고 어떤 난관에도 굴복치 않는 거의 맹목적인 투쟁과 모험을 그린 옛 할리웃 스타일의 드라마로 영화에서처럼 열병이 난 환자와도 같이 전력투구하며 몸부림치는 매튜 매코너헤이의 연기가 장관이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은 이 연기를 따르지 못하는 부실하고 미적지근한 것이어서 기대를 했다가 실망했다. 보고 즐길 만은 하나 속이 튼튼치 못한 규모 큰 B급영화다.
이 영화는 배급사인 와인스틴사가 작년 말에 오스카상 수상후보에 올리기 위해 1주일간 개봉했다가 이제 다시 내놓았으나 상감엔 훨씬 못 미친다. 큰 결점은 극본에 있는데 통 큰 드라마틱하고 정열적인 내용을 초점이 흐리멍덩하게 그려 모험영화에서 볼 수 있는 박력이나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다.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에 사는 사나이의 얘기(사실에 바탕을 뒀다)의 주인공은 리노에서 와쇼광산회사를 경영하는 케니 웰즈(매코너헤이). 배불뚝이에 뻐드렁니를 하고 대머리에다가 술과 담배를 즐기는 케니는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를 신조로 삼는 정열가이자 낙천가.
서론은 1981년 회사가 잘 나갈 때 케니의 아버지(크레이그 T. 넬슨)가 아들에게 회사의 책임권의 일부를 넘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로부터 7년 후 경제 침체로 케니의 회사는 망하고 케니는 집마저 잃고 동네 바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견실한 애인 케이(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감독 론 하워드의 딸)의 집에서 산다. 그리고 일은 바에서 본다. 이런 처지에서도 케니의 허장성세와 낙천성은 여전하다.
이어 1997년. 어느 날 케니는 술에 취한 상태애서 인도네시아(태국서 찍었다)에서 일하는 유명한 지질학자 마이클 아코스타(에드가 라미레스)를 머리에 떠올린다. 케니와 달리 과묵한 마이클은 미 발굴 금광 이론의 신봉자. 그래서 케니는 인도네시아로 날아가 마이클에게 함께 정글 속에 발굴되지 않은 금광을 탐사하자고 제의해 둘이 팀이 된다.
채취 자금 마련을 위해 케니는 혼자 미국으로 돌아와 여기저기서 투자자를 물색하고 마이클은 장비를 마련해 본격적인 금 채취에 들어간다. 열대의 악조건 하에서 케니와 마이클은 집요하게 땅을 파는데 이 과정에서 케니는 열사병에 걸리는 등 둘은 온갖 악조건에 시달린다. 영화의 중심 플롯 중의 하나가 두 사나이의 의리와 우정인데 매코너헤이의 연기에 밀린 듯이 라미레스는 우물쭈물한다.
마침내 잭팟이 터지면서 금이 발굴되자 월스트릿의 회사들이 너도 나도 케니의 사업에 뛰어들려고 한다. 여기서 탐욕스런 월스트릿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진다. 그리고 얘기는 후반에 가서 뜻밖의 대반전을 시도한다. 매코너헤이의 연기 외에 촬영과 음악이 좋다. 소재가 좋아 보다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영화인데 아쉽다(등급 R.) *지난 1974년에 로저 모어(제 3대 제임스 본드)가 나온 ‘황금’이라는 영화가 재미있다. 세계 금값을 조정하기 위해 남아공의 금광을 폭파하려고 시도는 모험 액션영화다. R.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세일즈맨(The Salesman)


에마드는 변을 당한 아내에 대해 보호 본능과 함께 의심마저 품는다.

연극배우 부부의 갈등… 아내에 대한 보호 의식과 의심


지난 2011년 ‘이혼’(A Separation)에서 균열하는 부부관계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탄 이란의 아스가르 화라디 감독의 또 하나의 갈등하는 부부관계를 치밀하게 해부한 수작이다. 
연극과도 같은 영화로 화라디는 그의 작품들에서 관객에게 뚜렷한 해답을 안 주고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 남겨 놓기를 즐겨하는데 갈등하는 인간관계란 것이 그렇게 뚜렷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만큼 이해할만하다. 그래서 더 흥미가 있다.
화라디는 굉장히 치밀한 사람으로 연출과 연기 도출 등이 다 뛰어난데 연극무대 출신이어서 그의 영화들은 연극 같은 요소를 갖추고 있다. 잘 만든 영화이긴 하나 화라디의 다른 영화들인 ‘과거’(The Past)와 ‘엘리에 관하여’(About Elly) 등에 비하면 다소 뒤진다.              
테란에 사는 인텔리 부부인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와 라나(타라네 알리두스티)는 파트 타임 연극배우들로 지금 막 붕괴 위험에 있는 아파트에서 옛 거주자가 어질러 놓고 이사 간 아파트로 이사와 어수선한 상태. 둘은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두 주인공 부부 윌리와 린다 로만 역을 맡아 연습 중이다.  에마드는 학교 선생이다. 
그런데 어느 날 라나가 혼자 집에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나 아파트 문을 열어 주면서 한 남자의 공격을 받아 머리에 상처를 심한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화라디는 라다가 변을 당하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드라마를 엮어가도록 인도한다. 
이 사실을 안 에마드는 아내에 대한 보호 의식과 함께 상한 자존심에 치를 떨면서 범인을 찾으려고 하나 아내마저 범인의 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해 아마추어 형사 노릇이 뜻대로 안 된다. 따라서 그의 좌절과 분노는 더욱 상승하면서 그 분출구를 아내에 대한 의심과 화풀이에서 찾는다.               
두 부부의 관계가 이글어지면서 에마드는 아내에 대해 거의 적의마저 품게 되는데 이 와중에도 라나는 연극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관객은 둘이 무대에서 연습을 하면서도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긴장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연극 속의 연극을 보는 셈이다. 서브 플롯이 있으나 중심 플롯에 큰 도움은 못 되고 마지막 부분이 다소 억지스런 데가 있다. 
훌륭한 것은 호세이니와 알리두스티의 사실적인 연기. 연기라기보다 진짜로 갈등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는것 같다. 올해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 성인용. Amazon/Cohen. ★★★1/2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마르셀 파뇰의‘마르세유 3부작’


촬영하고 있는 마르셀 파뇰.
전후 이탈리아 영화계의 한 물결이었던 네오 리얼리즘의 창시자인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스크린의 네오 리얼리즘의 아버지는 내가 아니라 당신입니다”라고 찬양한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마르셀 파뇰이 극본을 쓴 서사적 3부작 사랑의 이야기 ‘마르세유 3부작’이 4K로 새로 복원돼 27일부터 로열(Royal)극장(11523 Santa Monica)에서 상영된다. (310)478-3836.
‘마리우스’(Marius^1931), ‘화니’(Fanny^1932) 및 ‘세자르’(Cesar^1936) 등으로 구성된 3부작은 남불 항구도시 마르세유를 무대로 일어나는 소시민들의 삶을 지극히 사실적이요 정답고 인간성 가득하게 그린 코믹 터치가 강한 영화다.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
성 잘 내는 세자르가 경영하는 술집 아들 마리우스와 생선가게 딸 화니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인간희극이요 러브 스토리인데 유유자적 하듯이 서두르지 않고 주인공들과 그들 이웃의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캐듯이 상세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면 영화 같지가 않고 우리 동네 사람들의 얘기 같아 정이 가는데 인물들이 나와 가십과 허튼 소리 그리고 욕설을 하면서 친목하고 오해하고 싸우는 모습이 자애롭게 그려졌다. 인간성 탐구이자 개인들의 성격 묘사 영화인데 극작가의 작품이어서 말이 많고 연극처럼 느껴진다. 이는 파뇰이 자기 작품을 영화화한 연극으로 취급하면서 이미지 보다 대사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시네마와 연극이 절묘하게 접목된 사랑스럽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작품이다.
‘마리우스’는 헝가리 태생으로 유럽을 전전하다 후에 영국에 정착해 ‘네 날개’ 등 여러 편의 명화를 만든 알렉산더 코다가 ‘화니’는 후에 명장이 된 프랑스의 신예 마크 알레그레가 그리고 ‘세자르’는 파뇰이 감독했다. 비록 파뇰이 감독을 하진 않았으나 ‘마리우스’와 ‘화니’는 파뇰의 통제 하에서 만들어졌다.
이 3부작은 최근의 프랑스의 배우이자 감독인 다니엘 오퇴유의 것을 비롯해 그 동안 모두 다섯 차례나 신판으로 만들어졌고 오페라로도 만들어진 세월을 초월해 사랑을 받고 있는 영화다. 파뇰의 다른 유명한 작품들로는 ‘빵 굽는 남자의 아내’ ‘우물 파는 남자의 딸’ 및 ‘마농의 샘’ 등이 있다.

‘마리우스’   
마리우스(왼쪽)와 화니가 사랑의 말다툼을 하고있다.
마르세유 부둣가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홀아비 세자르(레뮈)는 성질이 급해 화를 잘 내나 마음은 착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허풍쟁이요 농담 잘하는 낙천주의자로 아프고 슬픈 것도 유머러스하게 대처할 줄 아는 세상의 달인다.
그에겐 23세난 아들 마리우스(피에르 프레스네이)가 있는데 가게를 돌보는 마리우스의 꿈은 항구에 정박한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 하구한 날 배만 쳐다보고 있는 꿈에 사는 남자다. 마리우스에겐 총명하고 아름다운 20세난 애인 화니(오란 드마지-파뇰의 애인으로 그의 아들을 낳았다)가 있는데 어릴 적부터 사귀어온 둘은 떼어 놓을 레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 화니는 마리우스네 이웃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미망인 의 딸이다. 마리우스의 아내가 되고픈 화니도 마리우스가 집을 떠나 바다로 나가고파 안달이 난 것을 잘 알아 속이 아프다.
그런데 화니를 사랑하는 남자가 또 하나 있으니 그는 역시 항구에서 선박관계 물품을 파는 돈 많고 사람 좋은 50세의 오노레 파니스(페르낭 샤르팽). 화니는 마리우스를 사랑하면서도 그가 결코 자기와 결혼해 집에 남으면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그를 바다로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마리우스가 떠나기 전 날 밤 둘은 함께 지낸다. 제1부는 마리우스가 배를 타고 5년간의 항해를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주로 세자르가 얘기하는 미사여구와 터무니없는 소리 그리고 유머와 위트가 있는 대사가 쏟아져 나오는데 이와 함께 다소 과장된 연기로 인해 마치 스크루볼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눈부시게 훌륭한 레뮈의 연기가 다음 2편까지 이어진다. 화면을 가득히 메우는 연기다. 127분. 흑백.

‘화니’
제1부 끝을 바로 이어 시작된다. 마리우스를 떠나보내고 슬픔에 젖어 있는 화니는 마리우스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안다. 처녀가 아기를 가졌으니 큰 일이 났다. 계속해 화니에게 구혼하는 남자가 파니스. 파니스는 화니가 아기를 가졌는데도 그 아기는 하늘이 자기에게 준 선물이라며 아기 아버지 이름 알 필요도 없다며 결혼하자고 조른다. 그래서 화니와 파니스는 마을 성당에서 성대히 결혼식을 치른다.
그리고 아들 세자리오가 부활절에 태어난다. 세자리오의 대부는 사실은 친 할아버지인 세자르. 그런데 이를 어쩌나 집을 나갔던 마리우스가 출항 2년 만에 불쑥 나타난다. 그리고 세자리오가 자기 아들이라고 강변하나 먹혀들지를 않자 한을 품고 다시 집을 떠난다. 127분. 흑백.
‘화니’는 1961년 할리웃의 조슈아 로간 감독에 의해 영어 판으로 만들어졌다. 레즐리 커론이 화니로 호르스트 북홀즈가 마리우스로 그리고 모리스 슈발리에와 샤를르 봐이에가 각기 파니스와 세자르로 나온다. 매우 아름답고 로맨틱하다.  

‘세자르’
제2부로부터 20년 후. 세자리오는 군사학교에 들어가고 파니스는 심장병으로 자리에 눕는다. 죽음이 임박했다. 파뇰의 죽음과 슬픔을 대면하는 여유와 유머를 갖춘 자세가 배꼽 빠지도록 우습게 묘시되는 것이 자기를 찾아온 성당 신부와 파니스 간의 종부성사 장면.
신부가 10계명을 하나씩 말하면 파니스는 “아 난 그것은 지켰지요”라고 고백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내 외의 여자를 탐해 관계한 것. 그리고 신부는 파니스에게 죽기 전에 세자리오에게 자기가 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라고 다그치나 파니스는 결코 진실을 알리지 않고 죽는다. 장례식 장면에도 유머가 만발한다.
일시 귀가한 세자리오에게 화니가 마침내 사실을 고백한다. 그리고 마리우스가 마르세유에서 멀지 않은 툴롱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안 세자리오는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한다. 마리우스는 그 동안 다소 험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는데 아직도 자기를 내쫓다시피 한 세자르와 화니에 대해 한을 품고 있다. 마침내 세자리오가 마리우스를 찾아가 “내가 당신의 아들이요”라고 밝힌다. 둘의 첫 대면 장면이 아름답다.
이제 홀몸이 된 화니는 마리우스를 자기 남편으로 맞으려고 하나 마리우스는 지난 20년간 둘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 조화를 이루기가 힘들다며 화니의 구혼을 거절한다. 이를 가운데서 중재하는 것이 현명한 세자르. 그리고 모두들 그 뒤로 내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마지막 편이 제일 재미있고 좋은데 아름답고 우습고 평화롭다. 이 영화는 단순한 음악을 비롯해 내용이나 형식미가 오주의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141분. 흑백.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라 라 랜드’의 오스카




제 89회 오스카 시상식은 ‘라 라 랜드’(La La Land-사진)의 잔치로 이어질 것 같다.  옛 할리웃과 뮤지컬에 바치는 노스탤지어 가득한 이 영화는 지난 24일 발표된 오스카상 각 부문 수상후보에서 작품 감독 남녀주연 등 무려 14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다. 이는 베티 데이비스가 나온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1950)과 ‘타이태닉’에 이어 오스카 사상 최다 부문에 후보에 오르는 기록이다. ‘라 라 랜드’는 지난 8일에 있은 골든 그로브 시상식에서도 총 7개 부문에서 상을 타 골든 글로브 사상 초유의 기록을 냈었는데 이로써 이 영화는 오는 시상식에서 오스카 작품상을 탈 가능성이 유력해졌다.
아카데미는 지난 2년간 남녀연기상 부문에서 흑인배우를 한 명도 안 뽑아 ‘오스카는 온통 백색이다’라는 구설수에 올랐었는데 이번에는 작품, 감독 및 연기 부문에서 여러 명의 흑인작품과 영화인들을 후보로 선정했다.
작품상 후보에 오른 ‘문라이트’(Moonlight), ‘울타리‘(Fences)’, ‘히든 피겨즈’(Hidden Figures) 등과 감독상 후보에 오른 배리 젠킨스(문라이트) 그리고 주^조연상 후보에 오른 덴젤 워싱턴(울타리)과 바이올라 데이비스(울타리), 마헤르샬라 알리(문라이트)와 네이오미 해리스(문라이트)를 비롯해 루스 네가(러빙) 및 옥타비아 스펜서(히든 피겨즈) 등이 그 예다. 흑인 배우들이 연기상 부문에서 6명이나 후보에 오른 것은 오스카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 밖에도 기록영화 후보에 오른 5개의 영화들 중 4편이 흑인감독이 만든 것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신파극 ‘라이언’에 나온 데브 파텔은 인도태생이다. 이는 백인 일색에 대한 비판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데 이와 함께 작년에는 흑인들이 만들고 나온 영화들뿐 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다양하고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7,000여명으로 구성된 아카데미의 회원들은 아직도 대부분 나이 먹은 백인 남자들이다.
상기 작품들 외에 작품상 후보에 오른 것들로는 ‘도착’(Arrival), ‘헬 오어 하이 워터’(Hell or High Water), ‘바닷가의 맨체스터’(Manchester by the Sea), ‘라이언’(Lion) 및 ‘핵소 고지’(Hacksaw Ridge) 등 총 9편이다. ‘핵소 고지’를 감독한  멜 깁슨은 감독상 후보에도 올랐는데 이로써 유대인과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적 발언과 개인적 행동으로 과거 10년간 할리웃의 금기인물이 되었던 깁슨은 면죄부를 받은 셈이 됐다.
그리고 ‘핵소 고지’ 나온 앤드루 가필드는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또 다른 남우주연상 후보들은 케이시 애플렉(바닷가의 맨체스터), 라이언 가슬링(라 라 랜드) 및 거의 아무도 안 본 영화 ‘캡튼 팬태스틱’(Captain Fantastic)에서 자녀들을 자연 속에서 키우는 히피 아버지로 나온 비고 모텐슨이다.
해 마다 수상후보가 발표되면 뜻밖의 후보들의 선정과 함께 당연히 후보에 오를 줄 알았던 배우들의 탈락이 있게 마련인데 이번에도 그런 일들이 발생했다. 그 중 가장 놀랄 일은 외계인의 지구 방문을 그린 공상과학 영화 ‘도착’에서 언어학자로 나온 에이미 애담스의 주연상 후보 탈락이다. 애담스는 이 영화로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으면서 골든 글로브 등 여러 시상그룹에 의해 후보로 뽑혔으나 탈락했다. ‘도착’은 작품상 외에도 감독과 각색 및 촬영 등 모두 8개 부문에서 수상후보에 올랐다.
애담스의 탈락으로 어부지리를 본 사람들이 강간당한 후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반전 하는 섹시 스릴러 ‘엘르’(Elle)의 이자벨 위페르와 흑백결혼의 드라마 ‘러빙’(Loving)의 신인 루스 네가. 위페르는 프랑스의 베테런 배우로 이번에 처음으로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는데 올 해 골든 글로브 주연상을 탔다. 그런데 ‘엘르’는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선 탈락됐다.             탈락이라는 이변을 맞은 또 다른 여배우가 아넷 베닝이다. 베닝은 ‘20세기 여자들’(20th Century Women)에서 1970년대 북가주에서 10대의 아들을 혼자 키우는 어머니로 나와 깊고 섬세한 연기를 보여줘 비평가들의 호평과 함께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도 올랐었다.
오스카상 단골 후보인 메릴 스트립은 이번에도 또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스트립은 실화인 코미디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Florence Foster Jenkins)로 후보가 됐는데 이는 스트립이 지금까지 모두 20차례 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오스카 사상 초유의 기록이다. 또 다른 여우주연상 후보들은 ‘재키’(Jackie)의 나탈리 포트만, 엠마 스톤(라 라 랜드).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은 베테런 마틴 스코르세지 감독의 믿음에 관한 드라마 ‘침묵’(Silence)은 골든 글로브에 이어 아카데미로부터도 외면을 받았다. 종교와 신앙에 관한 치열한 탐구인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훌륭한 영화인데 달랑 촬영상 후보 하나에만 올랐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2월 26일 지미 킴멜의 사회로 할리웃의 돌비극장에서 열리고 ABC-TV에 의해 생중계 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월 20일 금요일

붉은 거북이(Red Turtle)


남자가 섬을 떠나려 하자 큰 붉은 거북이가 훼방을 놓는다.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 자연과 공존을 아름답게 그린 무언극 만화영화


인간과 자연의 평화공존을 신비한 기운 속에 그린 우화요 동화이자 전설이요 신화 같은 영화로 단순한 선과 아름다운 색채로 그린 무언극 만화영화다. 
네덜랜드계 영국인 만화가 마이클 두독 데 비트(1994년 ‘승려와 물고기’로 오스카 단편 만화영화상 수상) 가 감독한 이 영화는 플롯이 매우 단순하나 그런 단순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남녀노소(그러나 아주 어린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모두 즐길 수 있는 명상적인 작품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바람이 분다’ 및 ‘이웃집 토토로’ 등을 만든 하야오 미야자키와 이사오 타카하타(이 영화의 애니메이션을 공동제작)가 공동으로 창립한 만화영화사 스튜디오 기빌리가 공동으로 제작했는데 영화를 보면 기빌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요와 간단한 것이 지닌 미학과 힘을 깨닫게 해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다.
이름 없는 남자가 표류해 무인도에 도착해 자연과 다투고 공존하면서 생존의 지혜를 터득하는 얘기다. 남자는 뗏목을 만들어 섬을 떠나려고 하는데(‘캐스트어웨이’의 탐 행스 같다) 뗏목을 띠워 바다로 나갈 때마다 해저로부터 거대한 붉은 거북이가 뗏목을 치받고 올라와 번번이 실패한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남자는 거북이를 때려뉘어 모래 위로 끌고 가 죽기를 기다리는데 거북이가 꿈틀대며 변신해(영화에 자주 나오는 여러 모양의 변신 과정이 매우 신비하고 보기 좋다) 긴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자가 된다. 
그리고 둘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되어 아이도 낳고 세상의 부부처럼 산다. 둘의 단순한 삶은 가끔 자연의 강렬한 힘의 시련을 받는데 그 중 장관인 것은 쓰나미로 섬의 숲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 것. 
잉크와 수채로 그린 그림이 유연한 애니메이션에 의해 생명을 띠고 화면에서 살아나는데 짧지만(상영시간 80분) 깊이와 폭과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가족과 생존 그리고 실낙원의 이야기로 정수만 갖춘 로빈슨 크루소의 삶이라고 하겠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 속으로 더욱 빨려 들어가게 되는 산수화 시와도 같은 아늑한 작품이다. 음향효과가 좋다. PG.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화운더(The Founder)


레이 크락(중간)이 미네소타지점을 차린 뒤 종업원들과 함께 축하하고 있다.

맥도널드 제국을 창설한 레이 크락의 실화 영화


맥도널드의 음식이 결코 자양분이 풍부하고 맛이 있는 것이 못 되듯이 이 영화도 내용이 견실하지 못하고 전반부와 후반부가 균형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어정쩡한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끔 별식으로 맥도널드의 버거를 먹듯이 이 영화도 맥도널드 제국을 창설한 레이 크락의 실화라는 점에서 호기심 거리는 충분히 된다.
크락은 자본주의(자본주의 비판영화라고 하기엔 모질지가 못하다)가 낳은 전형적인 사업가이자 협잡꾼인데 그의 맥도널드 제국은 처음에 사실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버거가게 이름과 메뉴를 빌린 뒤 궁극적으로 이를 가로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어둡고 냉소적인 분위기를 지녀야 하는데도 잔 리 행콕 감독은 무엇이 두려운지 이런 모진 것을 다독인 솜방망이 터치로 연출해 소스가 빠진 버거를 먹는 맛이다.
50줄에 든 크락(마이클 키튼)의 얘기로 시작된다. 체코에서 이민 온 부모 밑에서 시카고에서 성장한 세일즈맨 크락은 주머니에 술이 담긴 플래스크를 넣고 다니는 술꾼으로 쉐비를 몰고 다니면서 밀크쉐이크를 만드는 믹서를 판다. 집을 자주 비우는데다 술꾼이어서 양처인 아내 에셀(로라 던)과의 관계가 안 좋다. 
세일즈 여행 중에 크락은 비서 준(케이트 니랜드)으로부터 캘리포니아주 남부 샌버나디노의  맥도널드 버거가게로 부터 여러 대의 믹서를 주문받았다는 전갈을 받는다. 크락이 찾아간 패스트푸드 가게는 맥과 딕 맥도널드형제(잔 캐롤 린치와 닉 오퍼맨)가 경영하는데 이들은 손님들이 주로 찾는 메뉴만 집중적으로 만들어 신속히 재공하면서 문전성시를 이룬다. 형제의 모토는 최고의 품질 버거다. 
이를 본 영악한 크락은 형제에게 가게를 확장하라고 종용, 메뉴와 식당 이름과 맥도널드의 상징인 ‘황금 아치’의 프랜차이즈권을 얻어 자기 고향이 있는 일리노이에 가게를 차린다. 크락은 아내에게 알리지도 않고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식당을 차려 아내와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진다.       
그리고 사업이 성공하면서 크락은 지점을 확장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 지점의 주인(패트릭 윌슨)의 금발미녀 아내 조운(린다 카델리니)과 눈이 맞는다. 
크락과 조운은 둘 다 돈벌이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로 크락은 조운의 독려를 받으며 맥도널드형제를 배신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를 촉진하는 것이 크락의 재정자문인 해리(B.J. 노백)의 아이디어. 즉 프랜치이즈 확장의 관건은 버거가 아니라 부동산에 있다는 것. 
여기서부터 크락은 일종의 악마처럼 변신, 맥도널드형제를 완전히 배신하고 상호와 ‘황금 아치’까지 빼앗는다. 
그리고 영화의 색조와 음조도 여기서부터 전반부의 밝고 경쾌한 분위기에서 다소 어두운 기운으로 변이하나 진짜로 어둡고 가혹하다기 보다 온건해 짜릿한 느낌이 모자란다. 볼만한 것은 키튼의 연기. 아첨 떠는 세일즈맨에서 인정사정 없는 사업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다채롭게 해낸다. PG-13. Weinstein.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미셸 모르강


프랑스 영화 ‘안개 낀 부두’의 주인공인 탈영병 장은 항구도시 르 아브르의 싸구려 술집에서 만난 넬리를 보고 “당신은 눈은 참으로 아름다워요”라고 사랑의 언어를 건넸다. 이 아름다운 눈을 지녔던 넬리 역의 미셸 모르강(Michelle Morgan^사진)이 지난 12월 20일 96세로 프랑스의 뫼동에서 사망했다.
영혼에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모르강의 눈을 닮았을 것이다. 그의 눈은 신비에 감싸인 깊고 맑은 호심과도 같아 보는 사람을 익사토록 유혹한다. 그래서 모르강의 부음을 들은 프랑솨 올랑드 대통령도 “모르강은 프랑스의 관객들을 사로잡은 눈을 지녔던 전설”이라고 애도했다. 모르강의 회고록 제목도 ‘이 눈들로써’이다.
내가 모르강의 눈을 처음 보고 최면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영화가 역시 ‘안개 낀 부두’(Port of Shadows^1938)다. 시인이자 극본가인 자크 프레베르가 극본을 쓰고 명장 마르셀 카르네가 감독한 이 영화는 193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 유행했던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염세적 분위기가 짙은 안개처럼 작품 전체에 깔려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인 고독한 두 남녀와 그들의 주변 인물들은 이 운명 같은 안개 때문에 사랑하고 헤어지고 자살하고 살인을 저지른다고 해도 되겠다. 모든 것이 안개 탓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안개와 음습한 기운과 불길한 분위기를 찍은 흑백촬영이 아름다운 ‘안개 낀 부두’의 남자 주인공은 군모를 삐딱하게 쓴 탈영병 장(장 가방). 장이 안개가 자욱한 비 내리는 밤 지나가던 트럭을 세워 운전사와 함께 르 아브르로 간다.
장은 르 아브르에서 가짜 여권을 얻어 항구에 정박한 유령선처럼 을씨년스런 검은 화물선을 타고 베네수엘라로 튀어 새 인생을 살아 보려고 이곳에 왔다. 장은 부둣가의 씨구려 술집에서 역시 현실에서 도주하려는 투명한 비닐 레인코트에 베레모를 쓴 넬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그러나 둘의 사랑은 애초부터 처형을 당한 것. 장은 넬리를 소유한 자벨(미셀 시몽)을 살해하고 배를 타기 위해 가다가 갱스터의 총을 맞고 넬리의 품에 안겨 죽는다. 종잇장처럼 얇은 입술에 큰 코를 한 과묵한 가방과 저 세상 여자 같은 모습의 모르강의 가라앉은 연기와 둘의 콤비가 보기 좋다. 절망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영화다.
염세적 색감을 머금은 이 영화는 그 성질 때문에 나치 점령 하 프랑스의 괴뢰정권 비시정부로부터 “프랑스가 전쟁에 진 것은 ‘안개 낀 부두’ 탓”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들었고 상영 금지 조치를 받았다.
시적 사실주의는 주로 파리의 주변을 무대로 한 노동자 계급의 도시 드라마로 어둡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신화 속 존재 같은 남자들이 주인공으로 이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저주 받은 사랑을 하다가 대부분 처절한 종말을 맞는다. 전쟁의 암운이 하늘을 가린 1930년대 당시 프랑스인들의 절망과 허무를 대변했는데 뛰어난 형식미 속에 서민층의 각박한 일상과 함께 서정적이요 감정적인 무드를 안고 있다.
‘안개 낀 부두’ 외에 장 가방이 나온 또 다른 좋은 시적 사실주의 영화들로는 ‘페페 르 모코’(Pepe le Moko^1931)와 ‘새벽’(Daybreak^1939) 등이 있다.        
본명이 시몬 르네 루셀인 모르강은 파리 교외의 부유층 동네에서 태어나 15세 때 배우가 되려고 집을 떠나 파리로 왔다. 미셸 모르강은 그가 영화에 엑스트라로 나올 때 지은 예명이다. ‘안개 낀 부두’는 모르강의 두 번째 주연 작품으로 모르강은 이 영화로 대뜸 스타가 되었다.
모르강은 프랑스가 나치의 침공을 받으면서 1940년에 할리웃으로 왔다. 여기서 프랭크 시내트라가 노래하는 뮤지컬 ‘하이어 & 하이어’(Higher & Higher^1943)와 험프리 보가트가 나온 전쟁영화 ‘마르세유로 가는 길’(Passage to Marseille^1944) 등 몇 편의 영화에 나오긴 했으나  타작들이다. 1942년 미국인 B급 배우이자 감독인 윌리엄 마샬과 결혼해 아들을 두었으나 6년 후 헤어졌다.
모르강의 배우로서의 생애는 전후 프랑스로 귀국하면서 만개했다. 귀국 후 첫 영화인 ‘전원 교향곡’(Pastoral Symphony^1946)으로 모르강은 칸영화제 최초의 여우주연상을 탔다. 앙드레 지드의 글이 원작인 이 영화에서 모르강은 자기를 데려다 키워준 아내와 자식이 있는 목사의 사랑을 받는 눈 먼 게르트뤼드로 나와 깊고 고요하며 엄격히 절제된 연기를 보여 주었다. 모르강의 영어영화로 유명한 것이 영국감독 캐롤 리드가 만든 ‘추락한 우상’(The Fallen Idol^1948)이다. 이 영화는 그래암 그린의 소설이 원작으로 아내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하인(랄프 리처드슨)을 우상처럼 여기는 소년의 드라마인데 모르강은 하인의 젊은 연인으로 나온다.
모르강은 30여 년의 연기 생활을 통해 총 60여 편의 영화에 나왔다. 그와 함께 일한 프랑스의 명장들로는 르네 클레망, 장 그레미용, 클로드 오탕-라라, 이브 알레그레, 사샤 귀트리, 르네 클레어, 앙리 베르뇌유, 로베르 오셍, 클로드 샤브롤 및 클로드 를루쉬 등이 있다.
할리웃의 바인 스트릿에 있는 ‘명성의 거리’에 모르강의 이름이 적힌 별이 있다. 아디외 모르강!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월 17일 화요일

줄리에타(Julieta)


줄리에타(앞)와 소안은 열차 안에서 만나 뜨거운 정사를 나눈다.

내용과 색깔이 모두 기이할 정도로 다채로운 작품을 만드는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20번째 영화로 그의 다른 작품인 ‘볼베르’와 ‘토크 투 허’처럼 여성이 주인공인 가족 멜로드라마이다. 운명과 상심, 죄의식과 기억에 관한 명상적인 작품으로 시간대를 오락가락 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기억에서 소멸시키려고 하는 사람과 이에 역주행하는 사람의 상반된 감정이 세월을 거쳐 신비한 기운에 안겨 이야기 되는데 약간 히치콕 스타일을 따른 장면도 있다. 
플롯이 질서 정연히 이어지지 않아 다소 산만하고 알모도바르의 뛰어난 다른 작품보다 처지긴 하나 흥미 있는 작품이다. 
눈부신 것은 주인공 줄리에타의 젊었을 때와 나이 먹었을 때의 역을 각기 맡은 두 배우의 연기와 적색과 청색 그리고 황금색 등으로 채색된 색채. 색깔은 작중 인물과 내용을 불타는 듯이 대변하고 있다. 이와 함께 디자인과 소품 등까지 작품의 내성을 감지시킨다.
마드리드에 사는 중년의 여류문학가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는 포르투갈로 주거를 옮기게 위해 애인 로렌조(다리오 그란디네티)와 함께 짐을 싼다. 
잠깐 밖에 나간 줄리에타가 자기 딸 아니타의 어릴 때 친구를 만나면서 줄리에타는 이사와 로렌조를 다 포기하고 불확실의 미로로 빠져든다.
그리고 줄리에타의 과거가 회상된다. 짧은 금발의 젊고 아름다운 줄리에타(아드리아나 우가르테)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다가 열차 안에서 정체가 다소 불분명한 늠름하고 토속적인 냄새가 나는 소안(다니엘 그라오)을 만나 달리는 열차 속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눈다. 
이어 둘은 소안이 사는 해안 마을의 집에서 동거에 들어간다. 그리고 줄리에타는 딸 아니타를 낳는다. 
이어 죽음이라는 비극이 일어나면서 모녀는 깊은 슬픔에 시달리는데 비극과 슬픔이 둘 사이를 점차 멀리 떼어 놓는다. 그리고 아니타(블랑카 파레스)는 18세가 되면서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안 남기고 집을 나가버린다. 
줄리에타는 그 뒤로 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나 찾지 못해 심신이 피폐해진다. 줄리에타가 딸의 옛 친구를 만난 뒤 이사와 애인마저 포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은 거의 치명적인 슬픔마저 치유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상처를 남기는데 이런 삶의 잔인함에 지쳐 후줄근해진 중년의 줄리에타의 모습을 수아레스가 깊이와 함량을 갖춰 연기한다. 이에 반해 삶의 쾌락을 탐하는 젊은 줄리에타를 우가르테가 생동감 넘치게 보여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봉하고 무언으로 감추려는 여인의 드라마로 스페인어 원제는 ‘침묵’이었으나 현재 상영 중인 마틴 스코르세지의 ‘침묵’과 혼동될 것을 우려해 ‘줄리에타’로 바꿨다. R. Sony Pictures Classics.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플레이하우스7(패사디나).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골든 글로브‘라 라 랜드’잔치


‘라 라 랜드’의 감독 데미언 차젤과 남녀 주연상(뮤지컬/코미디)을 탄 라이언 가슬링과 엠마 스톤(왼쪽부터).

작품상^남녀주연상 등 총 7개 부문 최다 수상
생애업적상 메릴 스트립, 트럼프 비판 수상소감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주관하는 제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라 라 랜드’(La La Land)의 잔치였다. 지난 8일 베벌리 힐스의 베벌리 힐튼호텔에서 거행된 시상식에서 작품상(뮤지컬/코미디)을 비롯해 남녀주연상 등 모두 7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오른 이 영화가 7개 부문의 상을 다 타면서 골든 글로브사상 최다 수상작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필자를 비롯해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전체 회원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HFPA가 이 같은 복고풍의 뮤지컬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다. 이로써 이 영화는 오는 24일에 발표될 오스카상 후보작들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게 됐고 마지막 영광을 누릴 가능성도 커졌다.
‘라 라 랜드’는 할리웃에서 성공하려고 몸부림치는 두 젊은 남녀(라이언 가슬링과 엠마 스톤)의 매력적이요 아름다운 작품으로 가슬링과 스톤이 각기 남녀주연상(뮤지컬/코미디)을 탔다. 이 밖에도 이 영화는 감독과 각본(데미언 차젤) 그리고 음악과 주제가상을 탔다. 차젤(‘윕래쉬’)은 이로써 이날 3관왕이 됐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각본상을 탄 것은 다소 이변이다.  
‘투나잇 쇼’의 지미 팰론이 사회를 본 시상식은 ‘라 라 랜드’의 첫 장면을 본 딴 올스타 캐스트의 춤과 노래를 담은 필름으로 시작됐는데 여기서부터 ‘라 라 랜드’가 여러 부문에서 상을 탈것이라는 조짐이 느껴졌다.
작품상(드라마) 등 총 5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올랐던 ‘바닷가의 맨체스터’(Manchester by the Sea)는 케이시 애플렉이 남자주연상을 타는 것으로 끝났다. 고통스런 과거를 지닌 남자의 자기 치유와 소생의 이 드라마는 남자주연상과 함께 작품과 각본상 수상이 유력했었다.
작품상(드라마) 등 총 6개 부문에서 수상후보에 올랐던 ‘문라이트’(Moonlight)는 시상 맨 마지막에 있는 작품상 수상작이  발표되기 전까지 단 한 개 부문에서도 상을 못 타 영패를 면치 못할 것처럼 보였으나 최후에 ‘바닷가의 맨체스터’를 제치고 작품상을 타는 영광을 누렸다. 이 영화는 마이애미인근의 달동네에 사는 흑인소년의 성장과 동성애자로사의 자기 정체를 수용하는 얘기를 세 개의 시간대로 나누어 그린 부드러운 드라마다.
시상식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에서 소년을 자기 품 안에 받아들이는 마약딜러로 나오는 마헤르샬라 알리가 남자조연상을 탈 것이 거의 확실했으나 뜻밖에도 이 상은 ‘야행성 동물’(Nocturnal Animals)에서 흉악무도한 모녀납치범으로 나온 아론 테일러-잔슨이 탔다. 시상식 첫 이변이었다.
이 날 가장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은 강간을 당한 50대의 여자가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복수자로서 여성의 힘을 행사하는 프랑스영화 ‘엘르’(Elle)의 주인공인 이자벨 위페르가 여자주연상(드라마)을 탄 것. 위페르는 미국의 내로라하는 에이미 애담스, 제시카 체스테인, 나탈리 포트만과 신인 영국배우 루스 네가를 제치고 상을 탔는데 이 베테런 배우가 골든 글로브상을 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위페르는 오스카상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원초적 본능’을 만든 네덜랜드 감독 폴 베어호벤이 연출한 ‘엘르’는 여자주연상과 함께 외국어영화상도 타 2관왕이 됐다. 필자를 포함한 외국인 기자들로 구성된 HFPA가 위페르에게 주연상을 준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다.        
한편 여자조연상은 덴젤 워싱턴이 감독한 오거스트 윌슨의 무대극 ‘울타리’(Fences)에서 피츠버그의 쓰레기차 용원으로 집안을 독재자처럼 지배하는 남편(워싱턴)의 횡포와 허세를 인내와 예지로 견디어내는 아내 역을 한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탔다. 만화영화상은 디즈니의 ‘주토피아’(Zootopia)가 받았다.
한편 이번 시상식에서는 지난 달 세상을 떠난 할리웃 뮤지컬과 코미디의 수퍼스타 데비 레놀즈와 그보다 하루 먼저 타계한 배우이자 작가인 딸 캐리 피셔를 기리는 필름모음을 내보내 장내를 숙연케 했다.    
그러나 이날 무엇보다도 시상식 장내를 침묵으로 잠기게 한 뒤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상을 탄 메릴 스트립의 수상소감이었다. 스트립은 상을 탄 후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도널드 트럼프 차기 미대통령을 신랄하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스트립은 “할리웃은 국외자들과 외국인들이 가득한 곳으로 우리가 그들을 모두 내쫓는다면 당신들은 예술이 아닌 풋볼과 종합무술 밖에 볼 것이 없게 될 것”이라면서 트럼프의 외국인 기피증을 꾸짖었다.
그는 이어 트럼프가 유세중 지제부자유자인 뉴욕타임스의 기자 세르게이 코발레스키의 흉내를 낸 것에 대해 “그것은 올 해 나를 아연케 만든 연기였다. 나는 그것을 보았을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아직도 그것을 내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화가아니라 실제 삶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분개해 했다.
스트립은 또 트럼프의 인간을 모멸코자하는 본능을 개탄하면서 “힘 있는 자들이 그들의 위치치를 위협용으로 쓴다면 우린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몇 시간 후 트위터를 통해 이렇게 반박했다. “메릴 스트립은 할리웃에서 가장 과대평가 받고 있는 배우 중 하나다. 그는 나를 모르면서도 어제 밤 골든 글로브시상식에서 나를 공격했다. 그는 대패한 힐러리의 추종자이다.” 대통령답지 못한 반응이다.
사실 이날 트럼프에 대한 힐난은 팰론의 첫 인사말부터 시작됐다. 팰론은 서두에서 “골든 글로브는 미국에서 아직도 일반투표를 존중하는 몇 안 되는 곳 중의 하나다”라면서 실제 유권자의 지지 투표수는 힐러리 보다 적었으나  선거인단수로 이긴 트럼프를 빗대어 조롱했다.
그리고 ‘야근 매니저’(The Night Manager)로 TV드라마 시리즈 부문(HFPA는 TV부문에 대해서도 시상한다) 국제적 무기 밀매상 거부로 나와 남자조연상을 탄 영국배우 휴 로리도 매섭게 트럼프를 공격했다. 로리는 수상소감에서 “이번이 마지막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할리웃’과 ‘포린’과 ‘프레스’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면서 “ 이 상을 모든 곳의 사이코 억만장자를 대신해 받는다”고 말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시상식 호스트를 맡은 지미 팰론의 사회는 톡 쏘는 맛이 없는 무덤덤한 것이었다. 작년과 그 전에 몇 차례 사회를 본 독설가 릭키 제르베즈의 할리웃과 HFPA를 조롱하는 신랄한 농담이 결여돼 맹물 먹는 맛이었다.
그런데도 NBC-TV를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된 시상식의 시청률은 작년보다 8% 높아져 전 미국에서 2,000만명이 시상식을 시청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굿 럭 이자벨”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열리는 베벌리 힐스의 베벌리 힐튼 호텔로 연결된 레드 카펫을 밟는 스타들을 향해 야외 석에 앉은 팬들이 스타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음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른다. 아예 도시락과 물까지 싸들고 온 팬들도 보인다. 팬들 뿐만이 아니다. 레드 카펫 옆으로 일렬횡대로 선 전 세계서 온 기자들도 스타들에게 인터뷰를 청하느라 고함을 지른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주최하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의 회원인 나는 지난 8일 거행된 제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의 레드 카펫 안내원 노릇을 했다. 스타들에 대한 우상 숭배와도 같은 팬들의 열광 속에 레드 카펫을 오라가락 하면서 도대체 스타란 무엇인가 하고 자문했다.
영화란 결국 미몽이요 허상이자 대리만족의 잔영일진대 그런 업무를 수행하는 스타들 역시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이날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 상을 받은 메릴 스트립은 배우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것이 어떤 느낌을 지녔는지를 당신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사람들이다.”
매년 레드 카펫에서 보는 여자가 ‘하이 눈’과 ‘그날이 오면’ 그리고 ‘흑과 백’과 같은 명화를 제작하고 감독한 스탠리 크레이머의 딸 캐서린 크레이머다. 마침 얼마 전에 TV로 ‘그날이 오면’을 다시 봐 캐서린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그의 아버지 얘기를 잠시 나눴다. 캐서린은 “올해가 아버지가 만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개봉 50주년이 되는 해”라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팬들이 “에이미”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돌아보니 이날 ‘어라이발’로 여우주연상(드라마) 후보에 오른 에이미 애담스가 카펫을 밟고 온다. 스타들의 인기에 비례해 팬들의 환호도 높아지는데 저스틴 팀벌레이크가 나타나자 팬들이 “저스틴, 저스틴”이라며 아우성을 친다. 스타란 자기를 알아주는 인식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어서 팬들의 이런 반응이야말로 그들에겐 필수적인 충전과도 같은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얼음색 푸른 드레스를 입고 카펫을 밟기에 용기를 내 찾아가 악수를 나누고 “당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난 당신을 사랑 한다”고 고백했다. 이자벨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고 묻기에 “한국”이라고 알려줬더니 “그럼 내 친구 홍상수도 알겠네”하며 반긴다. 모습이 고상하다.
이날 ‘엘르’로 여우주연상(드라마) 후보에 오른 이자벨과 사진을 찍은 뒤(사진) 식장으로 들어가는 그를 향해 “굿 럭 이자벨”이라고 소리쳤더니 이자벨이 뒤 돌아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내 “굿 럭”이 신통력을 발휘했는지 이자벨은 주연상을 탔고 ‘엘르’는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나도 이자벨과 영화에 표를 던졌다.
키다리 베테런 명우 존 리트가우도 만났다. 나는 그를 오래 전에 UCLA의 공연장인 로이스 홀에서 만나 목례를 나눈 적이 있어 “요즘도 로이스 홀에 가냐”고 물었더니 “물론이지”라며 반가워했다. 리트가우는 TV시리즈 ‘크라운’에서의 처칠 역으로 조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내가 “당신 처칠 역하기엔 키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커도 훨씬 크지”라며 활짝 웃었다. 그는 이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자 “박찬욱의 ‘아가씨’ 정말 잘 만들었더라”며 칭찬했다.
시상식 개막이 가까워지면서 별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팬들은 잃어버렸던 가족 만난 것처럼 반가워한다. 샴페인이 흘러넘치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오스카 시상식과 달리 먹고 마시고 떠드는 가운데 진행되는 스타들의 파티나 마찬가지다. 원조 ‘배트맨’으로 유명한 마이클 키튼은 시상식 전부터 식장에 딸린 오픈 바에서 칵테일을 시켜 들고 제 자리로 갔다. 나도 그를 따라 스카치 온 더 락스를 한잔 시켰다.  
스타들은 식 중에도 자리를 떠 오픈 바 옆 발코니로 나가 끽연들을 하는데 이날 ‘골리앗’으로 TV시리즈 남우주연상을 탄 빌리 밥 손턴은 손에 골든 글로브를 쥔 채 담배를 태운다. 역시 끽연하는 로렌스 피시번과도 인사와 함께 짧은 대화를 나눴다. 모두들 인터뷰를 통한 구면이어서 친구처럼 반갑다.
이 파티 저 파티 장으로 다니다가 이날 ‘핵소 리지’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신병 훈련 교관 역으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쾌활한 빈스 본을 만났다. 내가 “야 당신 진짜 겁나더라”고 추켜세웠더니 “그렇지. 해피 뉴 이어”라며 큰 미소를 지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시상식보다 식 후 여러 영화와 TV사에서 여는 파티가 더 인기 있다. 인 스타일/워너 브라더스, HBO, 폭스, NBC/유니버설/E!, 와인스틴/네트플릭스, WME 및 아마존 스튜디오 등이 각기 먹을거리와 술과 음악을 제공하며 손님들을 맞는데 파티장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난 대충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월 11일 수요일

데비 레놀즈 별세...“딸과 함께 있고 싶어”


데비 레놀즈(왼쪽)와 딸 캐리피셔.

1953년‘사랑은 비를 타고'로 스타 대열에 올라
‘스타 워즈’캐리 피셔 딸 사망 하루 만에 숨져


내가 아메리칸 스위트하트라 불리며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할리웃 황금기 빅 스타 데비 레놀즈를 스크린에서 처음 만난 것은 ‘그것은 키스로 시작했다’(It Started with a Kiss·1959)였다. 고등학생 때 명동극장에서 본 하찮은 코미디로 데비의 상대역은 글렌 포드였다. 영화보다는 데비가 참 귀엽고 예쁘구나 하고 탐을 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지난 2011년 6월 데비를 직접 만났을 때 난 그에게 “글렌 포드와의 키스가 얼마나 화끈했느냐”고 물었더니 데비는 “포드는 굿 키서였다”며 활짝 웃었다.
내가 이어 데비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자신을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데비는 “나 한국전 때 한국에 갔었는데 좋지 않은 때였지”라며 반가워했다. 데비는 그 때 한국전 참전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 방한했었다.
HFPA 회원들에게 소장품을 설명하고 있는 데비 레놀즈.
착한 이웃집 처녀와도 같았던 데비 레놀즈가 지난 달 28일 뇌일혈로 84 세로 타계했다. ‘스타 워즈’의 레아공주로 유명한 딸 캐리 피셔가 사망한지 하루 만에 딸을 따라 갔다. 데비를 임종한 아들 타드 피셔에 의하면 어머니는 “딸과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할리웃의 전설이었던 데비 레놀즈 하면 대뜸 떠오르는 영화가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1953)이다. 방년 18세의 데비가 진 켈리와 도널드 오카너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영화 소장품 경매장에서 필자와 데비 레놀즈.
명품 뮤지컬로 데비는 이 영화로 대뜸 스타가 됐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데비는 1950년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전성기에 30여 편의 뮤지컬과 가벼운 코미디에 나왔는데 대부분 평범한 것들이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뮤지컬 ‘가라앉지 않는 몰리 브라운’(The Unsinkable Molly Brown·1964)으로 이 영화로 생애 딱 한번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는 타이태닉호 침몰에서 살아남은 미국 사교계여성이자 박애주의자였던 마가렛 브라운의 삶을 그린 것이다.
내가 본 데비의 영화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상기 두 편 외에 올스타 캐스트의 ‘서부 개척사’(How the West Was Won·1962)와 데비가 달콤한 주제가 ‘태미’를 직접 불러 노래와 영화가 다 히트한 10대들을 위한 ‘태미와 총각’(Tammy and the Bachelor·1957)이다.
데비의 다른 영화들로는 ‘2주간의 사랑’(Two Weeks with Love·1950), ‘도비 길리스의 연애’(The Affairs of Dobbie Gillis^1953), 토니 커티스와 공연한 ‘랫 레이스’(Rat Race·1960) 및 딕 밴 다이크와 공연한 ‘미국식 이혼’(Divorce American Style·1967) 등이 있다.
그러나 데비는 영화배우로서 인기가 시들해지자 무대와 TV로 방향을 틀어 나이 먹어서도 연기활동을 꾸준히 한 ‘가라앉지 않는 데비 레놀즈’를 입증한 배우다. 브로드웨이와 베가스의 나이트클럽에서 활약했을 뿐 아니라 NBC-TV쇼 ‘윌과 그레이스’(Will & Grace)에 나와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지난 1996년에는 좋은 드라마 ‘어머니’(Mother)에 나와 진지한 연기로 찬사를 받았는데 마지막 작품은 2013년에 방영된 HBO영화 ‘가지 촛대 뒤’(Behind the Candelabra)로 리베라치(마이클 더글러스)의 어머니로 나왔다.
데비 레놀즈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세기의 스캔들의 희생자다. 데비의 첫 남편은 히트송 ‘오 마이 파파’를 부른 유명 팝송가수 에디 피셔. 그런데 피셔가 느닷없이 데비를 버리고 데비의 절친한 친구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가면서 전 세계의 화제가 됐었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영화제작자인 마이클 타드가 비행기사고로 사망해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피셔가 이런 엘리자베스를 위로하다가 사랑에 빠져 데비와 어린 남매 캐리와 타드를 버린 것이다. 그러자 데비를 사랑하던 미국인들이 피셔를 ‘죽일 놈’이라고 미워하면서 그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그리고 얼마 못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피셔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에서 공연하던 리처드 버튼에게 갔다.        
데비는 피셔를 평생 원망하며 살았다. 내가 데비를 만난 것은 그가 평생을 수집한 영화의상과 소품들을 경매하기 전 이를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회원들에게 소개할 때였다. 베벌리힐스의 페일리센터에서 였는데 그때 우리에게 “난 아직도 피셔라는 성이 싫다”고 고백했다. 이에 내가 “정말 아직도 싫으냐”고 묻자 데비는 단호히 “예스”라고 말했다.
데비는 그러면서도 유머감각이 풍부했다. 소품중 하나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소녀 때 나온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1944)에서 입은 승마복에 대해 설명할 때였다. 데비는 “나는 엘리자베스와 좋은 친구였다”면서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그에게 내 남편을 줬으니까”라며 깔깔대고 웃었다.
금발의 작고 아담한 데비는 당시 79세의 나이에도 영화에서처럼 여전히 귀엽고 예쁘고 명랑했다.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면서 위트와 농담을 섞어가며 과거를 줄줄이 펼쳐 놓았는데 나이답지 않게 생기발랄하고 신선했다.
그런데 데비는 얘기 중에 자주 자신의 늙음과 죽음에 대해 내던지듯이 말했는데 그것들을 직접 거명함으로써 그에 대해 염려를 걷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스크린을 통해 보고 즐기며 사랑했던 밝고 맑고 고운 데비의 피치 못할 죽음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어수선해졌던 기억이 난다.
텍사스에서 태어나 LA인근 버뱅크에서 자란 데비 레놀즈의 본명은 메리 프랜시스 레놀즈. 16세에 미스 버뱅크에 당선되면서 워너 브라더즈와 계약을 맺었는데 데비라는 이름은 워너의 사장 잭 워너가 지어준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유감인 것은 내가 속한 LA영화비평가협회(LAFCA)가 그 동안 몇 차례 데비 레놀즈를 생애업적상 후보로 거론했지만 막상 최종 투표에서 탈락한 일이다. 나는 찬성표를 던졌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패터슨(Paterson)


패터슨이 버스 안에서 노트에 시를 쓰고 있다.

매일 똑같은 버스 기사의 지루한 삶…‘시’쓰는게 유일한 낙


패터슨은 뉴저지 주의 한 작은 도시의 이름이다. 그리고 도시 버스를 운전하는 운전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사이면서 시인이다. 도시와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일상 그리고 시를 사랑하는 마음에 바치는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헌사는 미 인디영화의 탁월한 감독 짐 자무시가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꾸밈이라곤 없는 소박하고 로맨틱하며 명상하는 듯한 작품으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보통 사람의 다소 지루한 삶의 속 깊은 곳에 있는 풍요와 기쁨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담담하게 시처럼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것의 미학과도 같다. 
예술적 혼이 가득한 아름답고 명랑한 아내 로라(이란 배우 골쉬프테 파라하니)와 영국 불독 마빈과 함께 작은 집에서 살고 있는 패터슨(애담 드라이버)의 일상은 단조로울 정도로 똑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옆에 누운 로라를 바라보고 이어 로라가 만들어준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싸들고 걸어서 버스종점으로 간다. 
버스가 떠나기 전 패터슨은 갖고 다니는 노트에 떠오르는 시상을 적는다. 그리고 버스를 몰면서 다양한 승객들의 대화를 듣고 거기서 또 시상을 얻는다. 점심 땐 자기가 좋아하는 패터슨폭포를 찾아가 점심을 먹으면서 또 시를 쓴다. 그리고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로라가 그를 반갑게 맞는다. 이어 패터슨은 저녁을 먹고 마빈을 데리고 근처의 바에 들러 맥주 한잔을 마시면서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로라와 함께 잠자리에 든다. 매일이 똑 같다. 
패터슨과 로라는 전연 성격이 다르다 패터슨은 과묵하고 조용한 반면 로라는 쾌활하고 진취적이다. 집의 커튼과 자기 옷을 아름다운 무늬로 칠하고 예쁜 컵케이크를 만들고 또 컨트리싱어가 되겠다면 기타를 사 치고 노래한다. 로라가 걱정하는 것은 패터슨이 시를 적은 노트를 잃거나 훼손되는 것. 그래서 틈만 나면 패터슨에게 시를 복사를 해놓으라고 종용하나 패터슨은 시를 출판할 생각이 없어 별 신경을 안 쓴다. 
이런 패터슨의 반복되는 삶이 마치 시의 각운과 노래의 후렴처럼 순환하는데 패터슨의 시는 시인 론 패젯이 쓴 것이다. 매우 깊고 아름다운데 여느 시처럼 라임을 갖추진 않았다. 
평범하고 단조롭고 무상한 것의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을 극적 리듬이 없는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단조로움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에피소드가 좋다. 하나는 열 살 정도 난 소녀가 자기가 쓴 시를 패터슨에게 읽어 주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패터슨을 방문한 일본인 시인(마사토시 나가세)과 패터슨이 패터슨 폭포 앞에서 나누는 대화. 그러나 패터슨이 찾아간 바에서 짝사랑에 시달리던 흑인남자가 총을 휘두르는 에피소드는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초가을 일주일간의 패터슨의 하루하루를 주도면밀하면서도 너그러울 정도로 서정적으로 그린 영화는 드라이버의 차분하고 조용한 연기로 빛난다. 현자의 모습이요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정적으로 표현해 감동적이다. 그는 LA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 2016년도 최우수 주연배우로 뽑혔다. 촬영도 곱다.  영화를 보고나서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인다. R. Amazon.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세기 여자(20th Century Woman)


도로테아(왼쪽)는 아들 제이미를 책임감있는 남자로 키우려고 한다.

아들 제이미를 책임감 있는 남자로 키우려는 히피 엄마 이야기


틴에이저 이들을 홀로 키우는 히피 어머니의 얘기를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엮어 만든 사실적이요 따스하면서도 정답게 그린 드라마로 주연하는 아넷 베닝의 조용하면서도 다채로운 연기가 보기 좋다. 베닝(배우이자 감독인 워렌 베이티의 아내)이 뛰어난 연기자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준 아담한 영화로 볼만한 소품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도 연기가 좋지만 그들이 너도 나도 마치 극의 주도권이라도 잡겠다는 듯이 나서는 바람에 얘기를 산만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흠. 시간대가 1970년대 말로 사람들의 모습이나 상황과 장면을 비롯해 분위기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조촐하고 재미있는 영화다.
1979년 산타바바라. 58세의 줄담배를 태우는 도로테아 필즈(베닝)는 착하고 총명한 15세난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맨)를 홀로 키우는 과거의 히피. 도로테아는 루이 암스트롱과 ‘카사블랑카’와 험프리 보가트를 극진히 좋아한다.
도로테아는 아들을 책임감 있는 남자로 키우려고 하나 문제는 집안에 제이미에게 모범이 될 만한 남자가 없다는 것. 남자라고 하숙을 하는 핸디맨 윌리엄(빌리 크러덥)이 있긴 하나 윌리엄은 과거 히피로 기분대로 사는 바람둥이여서 하나도 도움이 못 된다.
그래서 도로테아는 또 다른 하숙생인 20대의 애비(그레타 거윅)와 제이미 나이또래의 여자 친구 줄리(엘리 패닝)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머리를 총천연색으로 물감을 들인 애비는 암을 앓는 사진사인데 진보적인 신여성으로 제이미에게 인체와 섹스에 관한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그러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조숙한 줄리는 툭하면 밤에 제이미의 방을 찾아와 잠자리를 같이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플래토닉한  잠자리이지 결코 섹스가 있는 잠자리가 아니다. 이들의 왁자지껄한 얘기가 재미있게 서로 포옹하고 감싸 돌면서 제이미의 성장기를 엮는데 제이미는 이렇게 자기 성장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영육이 성장한다.
이와 함께 도로테아는 나름대로 자기도 아들만큼이나 삶의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가 인물들의 미래를 보여주면서 환상적으로 끝난다. 베닝과 조연진들의 연기가 볼만하다. 마이크 밀스 감독(각본 겸)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촬영이 곱다. R.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나의 2016년 베스트 텐


1년 내내 영화만 보면서 살다보니 현실이 영화 같고 영화가 현실과도 같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영화가 내게 주는 위로와 휴식과 기쁨을 생각하면 영화는 내게 있어 하나의 종교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영화 때문에 한 가지 안 된 것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없다는 점.
내가 2016년에 한 해에 본 영화제목을 적은 노트북을 들춰보니 300편 정도의 영화를 봤다. 예년에 비해 좀 모자라는 수여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한 것 같은 마음이다.
한 해의 베스트 텐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이는 예술성과 재미를 완벽하게 겸비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러나 2016년은 재미있는 양질의 영화가 많다. 극영화 뿐 아니라 만화영화와 기록영화 및 외국어영화 등 모든 분야에서 좋은 것들이 많이 나왔다.
베스트 텐의 첫째 것과 둘째 것은 내가 좋아하는 순서대로요 나머지는 알파벳순이다.        
*‘바닷가의 맨체스터’(Manchester by the Sea)-보스턴 인근 맨체스터를 무대로 비극적 과거를 가진 아파트 막일꾼(케이시 애플렉)의 삶을 가슴 저미도록 사실적이요 우수 가득하며 또 때론 우습게 그렸다. 골든 글로브 작품상(드라마) 등 5개 부문 후보작. (사진)

*‘라 라 랜드’(La La Land)-젊은 배우지망생 여자(엠마 스톤)와 콧대  높은 재즈 피아니스트 청년(라이언 가슬링)의 사랑과 삶을 엮어 옛 할리웃과 뮤지컬에 바치는 향수 짙은 황홀한 헌사. 골든 글로브 작품상(뮤지컬/코미디) 등 7개 부문 후보작.

*‘아슬아슬한 17세’(Edge of Seventeen)-여고 3년생(헤일리 스타인펠드)이 겪는 10대 특유의 성장통. 지혜롭고 사실적이며 유머러스하다. 스타인펠드의 골든 글로브 주연상(뮤지컬/코미디) 후보작.

*‘핵소 리지’(Hacksaw Ridge)-신앙을 이유로 집총을 거부하고 의무병으로 오끼나와 전투에 투입돼 단신 수십 명의 부상당한 전우와 함께 일본군마저 구출한 데즈먼드 S. 도스(앤드루 가필드)의 실화. 골든 글로브 작품(드라마) 남우주연(드라마) 및 감독상(멜 깁슨) 등 3개 부문 후보작.

*‘헬 오어 하이 워터’(Hell or High Water)-차압 위기에 놓인 텍사스의 목장을 살리려고 은행을 터는 형제와 이들을 쫓는 노련한 텍사스 레인저(제프 브리지스)의 긴박감 넘치는 현대판 웨스턴. 브리지스의 골든 글로브 조연상 후보작.

*‘러빙’(Loving)-1960년대 흑백결혼이 불법인 버지니아에서 결혼한 백인 리처드 러빙(조엘 에저턴)과 흑인 밀드레드(루스 네가)의 결혼 합법화를 위한 투쟁 실화. 골든 글로브 작품(드라마) 및 남녀주연상(드라마) 후보작.

*‘문라이트’(Moonlight)-플로리다의 달동네에 사는 동성애자 흑인 소년의 성장을 세 시간대에 걸쳐 그린 달빛처럼 고운 감동적인 드라마. 골든 글로브 작품(드라마) 및 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작.

*‘패터슨’(Patterson)-뉴저지 패터슨시의 버스 운전사 패터슨(애담 드라이버)은 하루 하루의 삶을 시로 옮긴다. 마치 시의 각운처럼 패터슨의 일상이 아름다운 반복음을 낸다. 드라이버가 LA 영화비평가협회의 2016년도 최우수 주연배우로 뽑혔다.        

*‘침묵’(Silence)-17세기 일본에 자원해 간 두 명의 예수회 선교사(앤드루 가필드와 애담 드라이버)가 겪는 핍박과 믿음과 회의. 마틴 스코르세지 감독의 신을 향한 구원과 속죄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정열적이요 경건한 작품. 보고 나서 한참 지나서야 작품의 깊이와 열정을 느끼고 이해하게 된다.

*‘선셋 송’(Sunset Song)-19세기 초 스코틀랜드 농촌 처녀의 성장기. 대사와 연기와 연출 등이 연극과도 같은 서정적인 산문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의 분위기에 깊이 잠기게 된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 특유의 여유 있고 다소 묵직한 연출이 아름답다.        

이 밖에도 ‘아메리칸 하니’(American Honey), ‘나는 대니얼 블레이크‘(I, Daniel Blake), ’캡틴 팬태스틱’(Captain Fantastic), ‘어 비거 스플래쉬’(A Bigger Splash) 등이 좋았다.
외국어영화로는 첫 사랑과 그것의 오랜 후유증을 그린 ‘나의 황금기’(My Golden Days-프랑스), 겁탈 당한 50대 여인이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역전극을 펼치는 변태적으로 섹시한 ‘엘르’(Elle-프랑스), 파리 교외 달동네에 살면서 서푼짜리 범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10대 소녀의 생존 몸부림을 그린 ‘디바인즈’(Divines-프랑스) 그리고 데모하다 잡혀 경찰의 트럭에 갇힌 가지각색의 이집트 시민들의 모습을 통해 현 이집트의 사회 및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충돌’(Clash-이집트) 및 노벨상을 받은 소설가가 오래간만에 자기 작품의 영감이 된 고향을 찾았다가 겪는 온갖 해프닝을 그린 풍자극 ‘출중한 시민’(The Distinguished Citizen-아르헨티나)  등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월 3일 화요일

할리웃 배우‘커크 더글라스’100세 생일 맞아


커크 더글라스와 부인 앤. 


1950년~1960년대 흥행보증 수퍼스타로 군림
아내 앤과 함께 수천만 달러 기부 한 자선가


열화와 같은 사나이 커크 더글라스가 지난 9일로 100세가 되었다. 각이 진 얼굴에 옴폭 패인 턱이 트레이드마크인 더글러스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생명력과 에너지와 분기와 강인함 그리고 정열과 끈기이다.
더글라스를 대뜸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권투영화로 그의 첫 오스카 주연상 후보작인 ‘챔피언’(Champion^1949)과 신랄한 뉴욕형사로 나온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형사 이야기’(The Detective Story^1951) 그리고 반 고흐로 열연한 ‘삶의 열망’(Lust for Life^1956) 및 ‘스파르타커스’(Spartacus^1960) 등은 다 그의 이런 특성을 잘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배우요 제작자요 감독(그의 여러 일 중 가장 약하다)이자 작가요(10권의 저서) 박애주의자인 더글라스의 인생역정은 ‘빈자에서 부자’로라는 말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제정러시아 때  뉴욕으로 이민 온 유대인 부모 밑에서 6자매와 함께 자란 더글라스는 고물장수인 아버지를 도와 생계를 꾸리느라 어릴 때부터 길에서 물건을 팔았다. 학생 땐 카니발에서 레슬링을 해 돈을 벌기도 했다. 그의 강인성과 근면은 이런 성장과정에서 기인한다.
더글라스의 스크린 데뷔작은 바바라 스탠윅과 공연한 멜로물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The Strange Love of Martha Ivers^1946). 이 영화에서의 연약한 남자 노릇을 끝으로 더글라스는 생애 출연한 90여 편의 영화에서 거의 다 강하고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글라스는 1950년대와 1960년대 흥행보증 수퍼스타로 군림하면서 진지한 드라마와 웨스턴 및 전쟁영화에 많이 나왔다. 1950년 더글라스의 연기학교 동창이자 오랜 친구였던 로렌 바콜(험프리 보가트의 아내로 2014년 사망)과 공연한 ‘혼을 든 젊은 남자’(Young Man with a Horn)는 재즈 혼 연주자 빅스 바이더베키의 실화로 호평을 받았다. 
이어 특종에 눈이 먼 기자로 나온 빌리 와일더 감독의 ‘에이스 인 더 호울’(Ace in the Hole?1951)에서 뜨거운 연기를 하고 다음 해 라나 터너와 공연한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악인과 미녀’(The Bad nad the Beautiful)에서 무자비한 할리웃의 제작자로 나와 두 번째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와 함께 더글라스의 세 번째 오스카 주연상 후보작으로 반 고흐 전기인 ‘삶의 열망’도 미넬리가 감독했다. 생긴 것도 고흐처럼 생긴 더글라스는 ‘삶의 열망’에서 생애 최고의 것이라 해도 될 만큼 열광적인 연기를 해 오스카상은 놓쳤으나 골든 글로브 주연상(드라마)을 탔다.액션 터프 가이로 잘 알려진 더글라스는 코미디에도 능한 재주꾼. 쥘 베른의 소설이 원작인 ‘해저 20,000리’(20,000 Leagues under the Sea^1954)에서 유크렐레를 켜며 경쾌한 연기를 했다. 
더글라스는 1955년 자기 어머니 이름을 딴 브라이나 제작사를 설립, 그 후 많은 영화에서 제작과 주연을 겸했다. 양질의 영화들을 만들었는데 그 대표작이 반전영화 ‘영광의 길’(Paths of Glory^1957). 스탠리 쿠브릭이 감독한 이 영화에서 더글라스는 제1차 대전 때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군재에 회부된 부하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로 나와 맹렬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어 토니 커티스, 어네스트 보그나인 및 재넷 리 등 올스타 캐스트의 오락액션물 ‘바이킹’(The Vikings^1958)에서 외눈 바이킹으로 나왔다. 더글라스의 대명사와도 같은 영화가 1960년에 제작하고 주연한 ‘스파르타커스’. 쿠브릭이 감독한 영화에서 더글라스는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노예반군의 지도자로 나왔다.
이 영화는 정의파인 더글라스가 1950년대 할리웃에 존재했던 좌경영화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깬 역사적인 작품이다. 더글라스는 영화의 각본을 당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달턴 트럼보에게 맡긴 뒤 그 때까지 가명으로 글을 썼던 트럼보의 이름을 처음으로 크레딧에 올렸다. 이를 계기로 할리웃의 블랙리스트는 흐지부지 소멸됐다. 더글라스는 당시 경험을 ‘나는 스파르타커스다!’(I Am Spartacus!)라는 책으로 써냈다.
이어 만든 영화가 컬트 웨스턴 ‘용감한 자는 고독하다’(Lonely Are the Brave^1962). 역시 트럼보가 각본을 쓴 영화로 더글라스는 탈옥한 카우보이로 나와 현대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경찰 추격을 받는다. 사라져가는 서부에 대한 향수가 가득한 흑백명화다. 
1964년 더글라스의 친구이자 동료인 버트 랭카스터와 공연한 영화가 ‘5월의 7일간’(Seven Days in May). 랭카스터는 미 대통령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음모하는 공군장성으로 더글라스는 이를 저지하려는 해병대령으로 나와 서로 팽팽하게 맞선다. 둘은 이 영화 외에도 생애 모두 6편의 영화에서 공연했다.
그 첫 영화가 ‘나는 홀로 걷는다’(I Walk Alone^1948). 이어 ‘O.K.목장의 결투’(Gunfight at the O.K. Corral^1957)에서 더글라스는 폐병을 앓는 전직 치과의사 건맨으로 랭카스터는 애리조나주의 작은 무법마을 툼스톤의 명보안관 와이엇 어프로 각기 나왔다.
또 다른 둘의 공연영화로는 버나드 쇼의 희곡이 원작인 ‘악마의 제자’(The Devil‘s Disciple^1959), ‘에이드리안 메신저 리스트’(The List of Adrian Messenger^1963), ‘엔테베의 승리’(Victory of Entebbe^1976) 및 둘이 나이 먹은 열차강도로 나온 ‘터프 가이즈’(Tough Guys^1986) 등이 있다.
더글라스는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다. 1963년 브로드웨이 연극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에 주연했다. 그는 이 연극의 원작인 켄 케이시의 소설의 영화화 판권을 사 후에 자기 아들이자 제작자요 배우인 마이클 더글라스에게 줘 마이클이 오스카 작품상을 탄 영화로 만들었다. 
더글라스는 1970년부터 2008년까지 40편에 가까운 영화에 나오긴 했으나 작품의 질은 전성기 때만 못하다. 그가 감독으로 데뷔하고 주연한 ‘보물섬’의 서부판 ‘무뢰한’(Scalawag^1973)은 졸작이나 두 번째로 감독하고 주연한 웨스턴 ‘파시’(Posse^1975)는 볼만하다. 
헨리 폰다와 공연한 웨스턴 코미디 ‘사악한 자가 있었으니...’(There was a Crooked Man...^1970)는 재미있지만 브라이안 드 팔마가 감독한 ‘분노’(Fury^1978)와 시간여행을 하는 항공모함의 드라마 ‘마지막 카운트다운’(The Final Countdown^1980) 등은 타작. 1980년대 더글러스가 나온 영화 중 가장 훌륭한 것이 ‘매드 맥스’를 만든 호주 감독 조지 밀러가 연출한 ‘눈 내린 강에서 온 남자’(The Man from Snowy River^1982). 경치와 내용이 준수한 서사웨스턴이다.
더글라스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일례가 영화 ‘다이아몬드’(Diamonds^1999)다. 그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려져 거동과 말이 불편한데도 끈질기게 발성치료를 받은 뒤 이 영화에 나왔다. 여기서 그는 뇌졸중에서 회복하는 권투선수로 나온다. 그리고 2003년에는 마이클과 또 다른 아들 조엘 더글라스가 제작하고 온 가족이 출연 하다시피 한 ‘혈통 탓이야’(It Runs in the Family)에 나왔다. 그의 마지막 무대 출연은 지난 2009년 LA 인근 컬버시티에 있는 커크 더글라스극장에서의 자전적 1인 쇼 ‘잊기 전에’(Before I Forget).     
더글라스는 뇌졸중 이후 신을 찾기 시작, 현재 유대교 율법사와 함께 매주 1회씩 성경공부를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오스카 생애업적상 수상자인 더글라스는 또 지난 60년간을 함께 살아온 두 번째 아내 앤과 함께 수천만 달러 상당의 기부를 한 자선가이다. 
수년 전 그는 자기 소장 미술품을 팔아 캘리포니아의 400여 학교에 운동장을 만들어 주었다. 필자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는 최근 더글라스의 100세 생일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자선단체에 100,000 달러를 기부했다. 그리고 더글라스와 앤은 이 기부에 감사하는 비디오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왔다. 해피 버스데이 앤 롱 리브 미스터 더글라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침묵(Silence)


세바스티아오 로드리게스 신부(왼쪽)가 숨어서 예배보는 일본인 신도와 작별을 하고있다.

일본서 종교적 폭력과 박해를 받는 두 명의 예수회신부


가난과 핍박에 시달리는 기독교 신자들과 투옥돼 처형을 기다리는 예수회신부가 구원과 안내를 찾아 부르짖는 소리에 대해 신이여 당신은 왜 침묵하십니까. 이 같은 물음은 이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를 감독한 마틴 스코르세지 개인의 물음이다. 
보면서 162분 상영시간 내내 고행의 길을 걷는 인고와 참담함 그리고 고통과 쓰라림을 겪게 되는 믿음과 회의의 영화로 마지막에 가서 그 동안 기다렸던 구원을 받는 희열에 빠지게 된다. 인내심이 크게 필요한 영화다. 
주인공의 행적이 예수의 그것을 많이 닮은 이 묵직한 주제를 가진 ‘종교영화’는 스코르세지가 26년간을 만들려고 벼르다 완성한 것으로 그의 신에 대한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탈리아계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 신부가 되려고 했으나 신앙이 이를 뒷받침 해주지 못해 포기했다. 
그 후 그는 평생을 신에 대한 믿음과 회의간의 갈등 그리고 자책감을 안고 살았는데 이 영화는 그의 신을 향한 구원과 속죄의 부르짖음이라고 하겠다. 영화를 보면 그의 이런 의도가 절실히 느껴진다. 스코르세지의 또 다른 종교영화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도 어떻게 보면 그가 신에게 바친 번제와도 같다.  
슈사쿠 엔도의 소설이 원작. 1643년. 포르투갈의 두 젊은 예수회신부 세바스티아오 로드리게스(앤드루 가필드)와 프란시스코 가루페(애담 드라이버)는 자신들이 존경하는 크리스토바오 페레이라신부(리암 니슨)가 일본에서 종교 탄압에 못 견뎌 신을 부인하고 일본인으로 살고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려고 일본으로 간다. 
일본(대만서 촬영) 해변에 도착한 둘은 숨어서 예배를 보는 일단의 일본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합류한다. 여기서 둘은 일본인 통역사(타다노부 아사노)를 통해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신자들의 상황 등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신자들과 함께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면서 신도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이어 로드리게스와 가루페는 서로 헤어진다.           
이와 함께 기독교인들에 대한 마을 관리들의 가혹한 고문과 처형이 묘사되는데(해안에 세운 십자가에 신자들을 매단 뒤 밀물에 잠기게 해 죽인다) 이런 육체적 고통보다 더 보기 힘든 것은 신도들에게 신을 부인하라면서 예수의 모습이 새겨진 동판을 발로 밟게 하는 장면.  
페레이라를 찾아 가던 로드리게스는 어촌의 기독교신자들을 만나 그들과 생활하는데 배신을 당해 체포돼 투옥된다. 로드리게스는 장기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마을 군수 이노우에(이세이 오카타가 간교하고 코믹한 연기를 잘 한다)로부터 신을 부인하라는 종용을 받는다. 그리고 페레이라가 나타나 로드리게스에게 역시 신을 부인하라고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로드리게스는 믿음과 회의와의 갈등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다. 전반부는 다소 내용이 단조롭고 인물들의 묘사도 부족하나 후반 들어 영육으로 강력한 충격을 받게 된다. 연기 촬영 및 음악도 좋다. R. Paramount.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히든 피겨즈(Hidden Figures)


존 글렌을 맞이하는 도로시, 캐서린 그리고 메리(왼쪽 세번째부터).

1960년대 NASA에서 차별 받던 흑인 여성이 최고가 되기까지 이야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만백성이 보고 즐기고 박수 칠 영화로 이런 믿지 못할 얘기가 왜 이제야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1960년대 초 존 글렌의 지구궤도 선회를 성공시키는데 일등공신 노릇을 한 세 명의 여자 수학자들의 실화로 기분 좋고 감동적이다. 
흑백문제와 여성차별 그리고 미?소간 우주경쟁과 불의에 저항하는 투혼을 지닌 인간승리의 드라마로 앙상블 캐스트의 연기가 좋은 코미디이요 드라마이며 스릴과 긴장감까지 갖춘 흥미진진한 영화다.
미?소간 우주경쟁이고조에 이르렀던 1960년대 초. 캐서린 고블(타라지 P. 헨슨)은 수학의 천재로 NASA의 랭리과학센터에서 일하고 있으나 그의 실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흑인을 이물질 보듯 하는 백인남자들 틈에 끼어서 별 볼일 없는 일을 하는 그의 실력을 알고 중요한 일을 맡기는 사람이 무뚝뚝하나 정의파인 실장 알 해리슨(케빈 코스너). 
인종차별을 보여주는 우스운 장면이 캐서린의 화장실 이용 장면. 자기가 일하는 건물의 백인전용 화장실을 못 써 건물 밖에 한참 떨어진 화장실까지 왕복으로 달리느라 고생이 많다. 캐서린의 달리기를 파렐 윌리엄스가 작곡한 주제가 ‘러닌’이 재미있게 반주한다. 
셋 중 제일 젊은 여자가 NASA에서도 알아주는 뛰어난 과학자 메리 잭슨(그래미상을 받은 가수 자넬 모나에가 발군의 연기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메리는 버지니아주의 대학을 다니기 위해 법원에 청원서를 내서야 야간학교에 나간다. 판사에게 자신의 청원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메리의 모습이 당차다.
셋 중 맏언니 격인 여자가 역시 같은 곳에서 일하는 수퍼바이저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그러나 도로시는 책임만 많지 봉급은 백인여자에 훨씬 못 미친다. 
이들 세여자의 인종차별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을 지키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얘기가 아기자기하게 전개되는데 셋이 함께 있을 때가 각자 따로 있을 때보다 더 재미있다. 세 여자배우와 코스너의 연기가 좋다. 디오도어 멜피 간독. PG. Fox.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애수’


내일 하루가 가면 2016년도 간다. 연말 분위기란 치열한 쾌감 뒤에 느끼는 공허와도 같다. 슬프고 착잡하고 어수선하고 어리둥절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간다는 것은 안 됐고 슬프다. 이런 것을 미련이라고 하나보다.
나이를 먹으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그저 그들은 다 시간일 뿐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도 그 시간의 한 줌인 연말이 되면 과거가 아쉽다. 가슴은 천성이 센티멘탈한 것인가 보다.
이 과거의 감상성을 슬프면서도 달래주는 듯이 피력한 노래가 신년 전야 자정 직전에 부르며 새 해를 맞는 ‘올드 랭 자인’이다. ‘옛날 오래 전에 가버린 날들’을 뜻하는 ‘올드 랭 자인’은 스코틀랜드의 시에 민요의 멜로디를 붙여 지은 노래로 멜로디가 감미롭고 감상적이다.
“슈드 올 어퀘인턴스 비 포갓 앤드 네버 브럿 투 마인드? 슈드 올 어퀘인턴스 비 포갓 앤드 올 랭 자인?”으로 시작되는 노래는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며 늘 기억하리라 다짐하면서 아울러 술 한 잔 차 한 잔을 서로 들고 나누는 인간의 친절을 기리고 있다.
이 안개가 자욱이 낀 듯한 곡은 지난 1929년 캐나다 태생의 지휘자 가이 롬바르도의 밴드 로열 커네이디언즈가 뉴욕의 신년 전야 파티에서 연주하면서 유명해졌는데 그 후 팝, 컨트리, 디스코 및 폴카로 편곡돼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팝으로 히트한 것이 5중창단 G-클렙스가 부르는 ‘아이 언더스탠드’다. 떠난 님을 이해한다면서도 마음이 바뀌면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이 노래는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해 다방과 음악감상실에서 자주 틀곤 했다.
‘올드 랭 자인’을 노래 부른 가수들도 많다. 바비 다린, 짐 리브스, 빙 크로스비 및 줄리 앤드루스 등이 불렀고 노래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스카티시 백파이프스 밴드의 여자의 고음 울음과도 같은 백파이프 연주도 좋다. 또 이 노래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로 시작되는 찬송가로도 불리고 있다.
‘올드 랭 자인’은 이런 내력을 지니고 있어 할러데이 시즌 영화에 즐겨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로맨틱하거나 감상적인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많이 나온다. 이 노래가 가슴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영화의 으뜸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 멜로드라마의 결정판 ‘애수’(Waterloo Bridge^1940^사진)일 것이다. 멜로드라마를 잘 만들던 머빈 르로이 감독의 흑백영화로 MGM이 배급했다.
콧수염을 한 귀족집안의 영국군대령 로이(로버트 테일러)가 런던의 워털루 브리지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장면은 제1차 대전 때로 돌아간다. 공습경보에 지하대피소로 피하던 로이대위와 발레댄서 마이라(비비안 리)가 첫 눈에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을 약속한다.
전선에 나간 로이를 기다리던 마이라는 로이가 사망자 명단에 오른 것을 보고 자포자기해 워털루 역을 무대로 군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가 된다. 그러나 전쟁포로가 됐던 로이가 귀국해 워털루 역에서 마이라와 재회, 둘은 사랑을 재확인하지만 죄책감에 못 견딘 마이라는 워털루 브리지에서 달려오는 트럭에 투신자살한다. 로이와 마이라의 댄스 장면을 비롯해 ‘올드 랭 자인’이 영화 내내 작품의 분위기를 애처롭게 감싸 안고 돌아 눈물깨나 쏟게 된다.      
나는 이 영화 때문에 런던에 세트방문이나 배우 인터뷰를 위해 갈 때마다 어느덧 워털루 브리지와 워털루 역을 찾아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영화는 MGM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그런데 워털루 브리지는 실제로 전쟁 당시 창녀들이 런던을 거쳐 가는 군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려고 모여들었던 곳이다.
‘올드 랭 자인’은 할러데이 시즌 단골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1946)에서도 콧등이 시큰해지도록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작은 마을 베드폴스에서 아내 메리(다나 리드)와 어린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던 조지(제임스 스튜어트)가 사업에 실패, 강에 투신자살하려는 순간 조지의 수호천사 클래런스가 나타난다.
클래런스는 조지에게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베드폴스가 어떤 꼴이 되었겠는가를 보여준다. 이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가를 깨달은 조지와 메리와 둘의 아이들을 찾아온 동네 사람들이 ‘올드 랭 자인’을 부르고 집안의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들이 깜빡이면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이 밖에도 주디 갈랜드가 부르는 ‘해브 유어셀프 어 메리 리틀 크리스마스’가 나오는 뮤지컬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와 빌리 와일더가 감독하고 잭 레몬과 셜리 매클레인이 나오는 ‘아파트먼트’ 그리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포사이던 어드벤처’ 및 내가 올 해 인상 깊게 보았던 스코틀랜드영화 ‘선셋 송’에도 ‘올드 랭 자인’이 나온다. 해피 뉴 이어!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