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1월 11일 수요일

데비 레놀즈 별세...“딸과 함께 있고 싶어”


데비 레놀즈(왼쪽)와 딸 캐리피셔.

1953년‘사랑은 비를 타고'로 스타 대열에 올라
‘스타 워즈’캐리 피셔 딸 사망 하루 만에 숨져


내가 아메리칸 스위트하트라 불리며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할리웃 황금기 빅 스타 데비 레놀즈를 스크린에서 처음 만난 것은 ‘그것은 키스로 시작했다’(It Started with a Kiss·1959)였다. 고등학생 때 명동극장에서 본 하찮은 코미디로 데비의 상대역은 글렌 포드였다. 영화보다는 데비가 참 귀엽고 예쁘구나 하고 탐을 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지난 2011년 6월 데비를 직접 만났을 때 난 그에게 “글렌 포드와의 키스가 얼마나 화끈했느냐”고 물었더니 데비는 “포드는 굿 키서였다”며 활짝 웃었다.
내가 이어 데비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자신을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데비는 “나 한국전 때 한국에 갔었는데 좋지 않은 때였지”라며 반가워했다. 데비는 그 때 한국전 참전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 방한했었다.
HFPA 회원들에게 소장품을 설명하고 있는 데비 레놀즈.
착한 이웃집 처녀와도 같았던 데비 레놀즈가 지난 달 28일 뇌일혈로 84 세로 타계했다. ‘스타 워즈’의 레아공주로 유명한 딸 캐리 피셔가 사망한지 하루 만에 딸을 따라 갔다. 데비를 임종한 아들 타드 피셔에 의하면 어머니는 “딸과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할리웃의 전설이었던 데비 레놀즈 하면 대뜸 떠오르는 영화가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1953)이다. 방년 18세의 데비가 진 켈리와 도널드 오카너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영화 소장품 경매장에서 필자와 데비 레놀즈.
명품 뮤지컬로 데비는 이 영화로 대뜸 스타가 됐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데비는 1950년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전성기에 30여 편의 뮤지컬과 가벼운 코미디에 나왔는데 대부분 평범한 것들이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뮤지컬 ‘가라앉지 않는 몰리 브라운’(The Unsinkable Molly Brown·1964)으로 이 영화로 생애 딱 한번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는 타이태닉호 침몰에서 살아남은 미국 사교계여성이자 박애주의자였던 마가렛 브라운의 삶을 그린 것이다.
내가 본 데비의 영화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상기 두 편 외에 올스타 캐스트의 ‘서부 개척사’(How the West Was Won·1962)와 데비가 달콤한 주제가 ‘태미’를 직접 불러 노래와 영화가 다 히트한 10대들을 위한 ‘태미와 총각’(Tammy and the Bachelor·1957)이다.
데비의 다른 영화들로는 ‘2주간의 사랑’(Two Weeks with Love·1950), ‘도비 길리스의 연애’(The Affairs of Dobbie Gillis^1953), 토니 커티스와 공연한 ‘랫 레이스’(Rat Race·1960) 및 딕 밴 다이크와 공연한 ‘미국식 이혼’(Divorce American Style·1967) 등이 있다.
그러나 데비는 영화배우로서 인기가 시들해지자 무대와 TV로 방향을 틀어 나이 먹어서도 연기활동을 꾸준히 한 ‘가라앉지 않는 데비 레놀즈’를 입증한 배우다. 브로드웨이와 베가스의 나이트클럽에서 활약했을 뿐 아니라 NBC-TV쇼 ‘윌과 그레이스’(Will & Grace)에 나와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지난 1996년에는 좋은 드라마 ‘어머니’(Mother)에 나와 진지한 연기로 찬사를 받았는데 마지막 작품은 2013년에 방영된 HBO영화 ‘가지 촛대 뒤’(Behind the Candelabra)로 리베라치(마이클 더글러스)의 어머니로 나왔다.
데비 레놀즈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세기의 스캔들의 희생자다. 데비의 첫 남편은 히트송 ‘오 마이 파파’를 부른 유명 팝송가수 에디 피셔. 그런데 피셔가 느닷없이 데비를 버리고 데비의 절친한 친구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가면서 전 세계의 화제가 됐었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영화제작자인 마이클 타드가 비행기사고로 사망해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피셔가 이런 엘리자베스를 위로하다가 사랑에 빠져 데비와 어린 남매 캐리와 타드를 버린 것이다. 그러자 데비를 사랑하던 미국인들이 피셔를 ‘죽일 놈’이라고 미워하면서 그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그리고 얼마 못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피셔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에서 공연하던 리처드 버튼에게 갔다.        
데비는 피셔를 평생 원망하며 살았다. 내가 데비를 만난 것은 그가 평생을 수집한 영화의상과 소품들을 경매하기 전 이를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회원들에게 소개할 때였다. 베벌리힐스의 페일리센터에서 였는데 그때 우리에게 “난 아직도 피셔라는 성이 싫다”고 고백했다. 이에 내가 “정말 아직도 싫으냐”고 묻자 데비는 단호히 “예스”라고 말했다.
데비는 그러면서도 유머감각이 풍부했다. 소품중 하나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소녀 때 나온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1944)에서 입은 승마복에 대해 설명할 때였다. 데비는 “나는 엘리자베스와 좋은 친구였다”면서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그에게 내 남편을 줬으니까”라며 깔깔대고 웃었다.
금발의 작고 아담한 데비는 당시 79세의 나이에도 영화에서처럼 여전히 귀엽고 예쁘고 명랑했다.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면서 위트와 농담을 섞어가며 과거를 줄줄이 펼쳐 놓았는데 나이답지 않게 생기발랄하고 신선했다.
그런데 데비는 얘기 중에 자주 자신의 늙음과 죽음에 대해 내던지듯이 말했는데 그것들을 직접 거명함으로써 그에 대해 염려를 걷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스크린을 통해 보고 즐기며 사랑했던 밝고 맑고 고운 데비의 피치 못할 죽음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어수선해졌던 기억이 난다.
텍사스에서 태어나 LA인근 버뱅크에서 자란 데비 레놀즈의 본명은 메리 프랜시스 레놀즈. 16세에 미스 버뱅크에 당선되면서 워너 브라더즈와 계약을 맺었는데 데비라는 이름은 워너의 사장 잭 워너가 지어준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유감인 것은 내가 속한 LA영화비평가협회(LAFCA)가 그 동안 몇 차례 데비 레놀즈를 생애업적상 후보로 거론했지만 막상 최종 투표에서 탈락한 일이다. 나는 찬성표를 던졌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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