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1월 3일 화요일

‘애수’


내일 하루가 가면 2016년도 간다. 연말 분위기란 치열한 쾌감 뒤에 느끼는 공허와도 같다. 슬프고 착잡하고 어수선하고 어리둥절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간다는 것은 안 됐고 슬프다. 이런 것을 미련이라고 하나보다.
나이를 먹으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그저 그들은 다 시간일 뿐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도 그 시간의 한 줌인 연말이 되면 과거가 아쉽다. 가슴은 천성이 센티멘탈한 것인가 보다.
이 과거의 감상성을 슬프면서도 달래주는 듯이 피력한 노래가 신년 전야 자정 직전에 부르며 새 해를 맞는 ‘올드 랭 자인’이다. ‘옛날 오래 전에 가버린 날들’을 뜻하는 ‘올드 랭 자인’은 스코틀랜드의 시에 민요의 멜로디를 붙여 지은 노래로 멜로디가 감미롭고 감상적이다.
“슈드 올 어퀘인턴스 비 포갓 앤드 네버 브럿 투 마인드? 슈드 올 어퀘인턴스 비 포갓 앤드 올 랭 자인?”으로 시작되는 노래는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며 늘 기억하리라 다짐하면서 아울러 술 한 잔 차 한 잔을 서로 들고 나누는 인간의 친절을 기리고 있다.
이 안개가 자욱이 낀 듯한 곡은 지난 1929년 캐나다 태생의 지휘자 가이 롬바르도의 밴드 로열 커네이디언즈가 뉴욕의 신년 전야 파티에서 연주하면서 유명해졌는데 그 후 팝, 컨트리, 디스코 및 폴카로 편곡돼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팝으로 히트한 것이 5중창단 G-클렙스가 부르는 ‘아이 언더스탠드’다. 떠난 님을 이해한다면서도 마음이 바뀌면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이 노래는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해 다방과 음악감상실에서 자주 틀곤 했다.
‘올드 랭 자인’을 노래 부른 가수들도 많다. 바비 다린, 짐 리브스, 빙 크로스비 및 줄리 앤드루스 등이 불렀고 노래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스카티시 백파이프스 밴드의 여자의 고음 울음과도 같은 백파이프 연주도 좋다. 또 이 노래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로 시작되는 찬송가로도 불리고 있다.
‘올드 랭 자인’은 이런 내력을 지니고 있어 할러데이 시즌 영화에 즐겨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로맨틱하거나 감상적인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많이 나온다. 이 노래가 가슴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영화의 으뜸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 멜로드라마의 결정판 ‘애수’(Waterloo Bridge^1940^사진)일 것이다. 멜로드라마를 잘 만들던 머빈 르로이 감독의 흑백영화로 MGM이 배급했다.
콧수염을 한 귀족집안의 영국군대령 로이(로버트 테일러)가 런던의 워털루 브리지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장면은 제1차 대전 때로 돌아간다. 공습경보에 지하대피소로 피하던 로이대위와 발레댄서 마이라(비비안 리)가 첫 눈에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을 약속한다.
전선에 나간 로이를 기다리던 마이라는 로이가 사망자 명단에 오른 것을 보고 자포자기해 워털루 역을 무대로 군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가 된다. 그러나 전쟁포로가 됐던 로이가 귀국해 워털루 역에서 마이라와 재회, 둘은 사랑을 재확인하지만 죄책감에 못 견딘 마이라는 워털루 브리지에서 달려오는 트럭에 투신자살한다. 로이와 마이라의 댄스 장면을 비롯해 ‘올드 랭 자인’이 영화 내내 작품의 분위기를 애처롭게 감싸 안고 돌아 눈물깨나 쏟게 된다.      
나는 이 영화 때문에 런던에 세트방문이나 배우 인터뷰를 위해 갈 때마다 어느덧 워털루 브리지와 워털루 역을 찾아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영화는 MGM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그런데 워털루 브리지는 실제로 전쟁 당시 창녀들이 런던을 거쳐 가는 군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려고 모여들었던 곳이다.
‘올드 랭 자인’은 할러데이 시즌 단골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1946)에서도 콧등이 시큰해지도록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작은 마을 베드폴스에서 아내 메리(다나 리드)와 어린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던 조지(제임스 스튜어트)가 사업에 실패, 강에 투신자살하려는 순간 조지의 수호천사 클래런스가 나타난다.
클래런스는 조지에게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베드폴스가 어떤 꼴이 되었겠는가를 보여준다. 이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가를 깨달은 조지와 메리와 둘의 아이들을 찾아온 동네 사람들이 ‘올드 랭 자인’을 부르고 집안의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들이 깜빡이면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이 밖에도 주디 갈랜드가 부르는 ‘해브 유어셀프 어 메리 리틀 크리스마스’가 나오는 뮤지컬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와 빌리 와일더가 감독하고 잭 레몬과 셜리 매클레인이 나오는 ‘아파트먼트’ 그리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포사이던 어드벤처’ 및 내가 올 해 인상 깊게 보았던 스코틀랜드영화 ‘선셋 송’에도 ‘올드 랭 자인’이 나온다. 해피 뉴 이어!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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