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3월 9일 월요일

‘다운턴 애비’



PBS-TV에서 매주 일요일 오후 9시에 방영하는 영국 드라마 ‘다운턴 애비’(Downton Abbey)는 TV 드라마 사상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시청자들이 관람하는 의상 드라마다. 영국 TV의 자랑거리인 ‘매스터피스 클래식’의 한 작품인 이 드라마는 영화 ‘고스포드 팍’으로 오스카 각본상을 탄 줄리안 펠로즈의 역작으로 한 번 보기 시작하면 TV에서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나도 이 드라마의 중독자로 얼마 전 본 극중 주인공 백작 로버트 크롤리의 대저택 다운턴 애비에서 그의 온 가족과 하인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로 말미를 장식한 시즌 5가 끝나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콧등이 시큰해지는 피날레였다. 현재 시즌 6를 촬영 중이다.
역시 ‘매스터피스’ 시리즈의 하나인 ‘업스테어즈, 다운스테어즈’를 연상시키는 ‘다운턴 애비’는 1910년에 즉위한 국왕 조지 5세의 통치기간에 요크셔 카운티의 다운턴 애비에서 벌어지는 로드 그랜담(로버트 크롤리를 이렇게 부른다)의 가족과 친척과 친지와 하인들의 얘기로 시즌 5는 영국 사회가 서서히 현대화하면서 귀족계급이 신분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1924년에 끝났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왔다 사라지고 또 새 인물이 등장하면서 드라마가 엮어지는데 주요 인물만 해도 수십명에 이른다. 이들이 각자 사연과 비밀이 있고 또 사랑하고 이별하니 그 사정이 얼마나 구구각색이겠는가.
다운턴 애비의 주인은 권위 있고 인자한 로드 그랜담(휴 본느빌)과 그의 돈 많은 현모양처 미국인 아내 레이디 코라(엘리자베스 맥거번). 과거 한 때 돈 많은 미국 여인들이 거액의 지참금을 싸들고 와 영국의 돈이 궁한 귀족 남자들과 결혼했는데 코라도 그 중 하나다.
이들 부부의 장녀로 차가운 젊은 미망인 메리(미셸 도커리)를 비롯한 딸들과(로드 그랜담의 사촌남자 상속자는 타이태닉호의 희생자다) 친척과 친지들이 위층 사람들이요, 우두머리 하인인 미스터 카슨(짐 카터)과 우두머리 하녀 미시즈 휴즈(필리스 로간)를 비롯한 하녀와 발레와 후트맨과 쿡들이 아래층 사람들.
그런데 하인층에서도 계급의식이 위층만큼이나 철저해 미스터 카슨이 식당엘 들어오면 모두들 기립한다. 어깨에 힘 들어간 위층 사람들의 얘기도 재미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흥미 있는 것이 아래층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얘기다.
위층 사람들 중에(다운턴 애비에서 떨어진 곳에 살긴 하지만) 톡톡 튀는 사람이 로드 그랜담의 어머니인 백작 미망인 바이올렛(매기 스미스-시즌 6로 드라마에서 퇴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앙시앙 레짐’의 전형적인 인물인 이 냉소적인 독설가가 “주말, 주말이 뭐야”라며 평민들을 깔보는 발언을 할 때면 웃으면서도 심기가 뒤틀린다. 놀고 먹는 그에겐 매일이 주말이니까 나온 말이다.
아래층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관심 있고 흥미롭게 보는 사람은 미스터 카슨이다. 그는 하인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으로 로드 그랜담보다 더 권위적이요 구식이다. 그래서 얼마 전 ‘다운턴 애비’의 세트 방문차 런던에 갔을 때도 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미스터 카슨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내가 “카슨씨, 당신은 로드 그랜담보다 더 보수적이요 귀족적이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그는 “아무렴 그렇지요”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큰 코와 검고 굵은 눈썹에 묵직한 마스크를  한 그의 육중한 저음이 오페라에 나왔으면 딱 맞겠는데 그래서 내가 “카슨씨, 오페라 출연 제의 받은 적 있나요”하고 물었더니 “나 음치입니다”라며 껄껄대고 웃었다.
2월의 런던답게 런던서 차로 1시간 반쯤 떨어진 다운턴 애비의 실제 모델인 촬영장소 하이클레어 캐슬에 찾아간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뿌연 연무 속에 저 멀리 다운턴 애비(사진)가 보인다. 아는 집이나 방문하듯 반가웠다. 이 캐슬은 1749년에 지은 것으로 현 주인 레이디 카나본이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의 우리들을 반갑게 맞았다.
로드 그랜담과 레이디 메리가 도서실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저택 안팎을 둘러 본(무지무지하게 넓고 크다) 뒤 출연진들과의 기자회견에 이어 점심을 그들과 함께 했다. 줄리안 펠로즈와 매기 스미스를 비롯해 자리에 함께한 배우들이 초면인데도 TV로 자주 봐 구면 같다. 식사 장소에는 귀족들이 사냥할 때 입는 빨간 코트와 검은 모자 등 드라마의 의상이 진열돼 있어 나도 코트 입고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었는데 후에 보니 아주 어색하다. 귀족이 될 팔자가 아닌가 보다.
런던에 돌아와 상류층 프라이빗 클럽인 새빌 클럽에서 미스터 카슨의 “레이디즈 앤 젠틀멘 디너 이즈 서브드”라는 통보에 따라 로드 그랜담과 레이디 코라 등 극중 인물들과 함께 포도주를 겸한 저녁을 들면서 훈훈한 기운 속에 얘기를 나눴다. 제일 궁금한 것이 시리즈가 언제 끝날까 하는 점. 그러나 이에 대해 펠로즈를 비롯해 출연진 모두가 “그 건 나도 몰라요”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긴 미리 알면 재미가 없긴 하지. 시즌 6가 학수고대 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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