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3월 3일 화요일

더블린 사람들




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더블린 공항에서 숙소인 쉘번 호텔까지 가는 차 안에서 안내원이 “2월에 더블린에 오면서 우산을 안 가져 오다니”하면서 핀잔을 준다. 그는 이어 “이런 날은 펍에서 기네스 마시기 딱 좋은 날”이라고 권주사를 건넸다.
차창 밖으로 새뮤엘 베켓다리가 걸린 리피강이 도심을 가로지르는 아담한 더블린을 바라보자니 학생 때 읽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 때 나는 이 15편의 단편들로 구성된 소설과 함께 조이스의 성장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으면서 더블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기억이 난다.
아일랜드 헌법이 여기서 초안됐다는 1824년에 지은 쉘번에 여장을 풀자마자 나는 안내원의 권유대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독일인 동료기자 엘마와 함께 호텔 인근의 80년된 오도노휴즈 펍엘 들렀다. 평일인데도 펍은 술꾼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기네스를 시키면서 바텐더에게 “늘 이렇게 초만원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펍은 유명한 포크그룹 ‘더블리너즈’가 활동을 시작한 곳으로 이 날도 펍 한구석에 대여섯명의 음악인들이 앉아 맥주를 거푸 마시면서 기타와 밴조와 아코디언과 플룻을 치고 켜고 불면서 아이리시 음악을 연주했다. 손님들 들으라기보다 자기들이 더 즐기는 것 같았다. 나도 기네스와 아이리시 위스키 재미슨을 번갈아 마시면서 신나는 리듬에 발장단을 맞추다가 아이리시 음악의 특유한 멜랑콜리 기운이 감도는 서정적인 곡이 연주될 때면 감상에 푹 젖어 들었다. 기네스와 재미슨의 완벽한 화학작용 탓이려니.
아이리시들 정말로 술 좋아한다. 꼭 한국 사람들 닮았다. 누가 누구를 먼저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리시와 한국 사람은 닮은 데가 많다. 우선 문학적이다. 조이스와 베켓, 오스카 와일드와 예이츠 그리고 조지 버나드 쇼와 브람 스토커 등이 다 아이리시 문학인들이다. 그리고 두 나라는 다 피점령국의 압박과 설움을 겪어야 했다.
아이리시들은 또 감정적이요 울기를 잘 하고 술 마시면서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다가 싸움박질 까지 하는 것도 서로 닮았다. 그래서 한국을 동양의 애란이라고도 했다. 이런 아이리시들의 특징은 존 포드가 감독하고 존 웨인과 모린 오하라가 나온 ‘아일랜드의 연풍’(The Quiet Man)에서 잘 그려졌다.
아이리시 술꾼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다. 그는 평소 술을 한꺼번에 몰아 마시고 대취하곤 했는데 그래서 영화사에서 그의 촬영현장에 구급차를 따라 보내기까지 했다는 설이 있다.  
아이리시 영어는 영국 영어보다 액센트가 훨씬 더 심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 때가 많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매우 운율적이어서 듣기가 좋다. 아이리시 노래가 아름다운 것이 이해가 간다.    
아일랜드하면 궁금한 것이 영국이 점령한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귀속문제다. 그래서 안내원에게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직도 북아일랜드를 되찾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것은 아주 미묘한 문제여서 대답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에 클로버 색깔 초록의 나라 아일랜드를 찾아간 것은 케이블 TV 쇼타임의 시리즈 ‘페니 드레드풀’의 세트방문(사진)과 출연진 인터뷰 때문이었다. 이 시리즈 제목은 19세기 영국에서 나온 선정적이요 무서운 주제를 다룬 싸구려 출판물을 말한다.
시리즈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인물들 그리고 메리 쉘리의 프랑켄스타인과 그가 창조한 괴물 등과 함께 온갖 잡귀들이 나와 난리법석을 떠는 공포물이다.
우리는 프랑켄스타인의 실험실과 초상화로 사방 벽을 가득 메운 도리안 그레이의 리빙룸 그리고 해골 샹들리에로 가꿔진 저택 및 시리즈용 의상실 등을 둘러본 뒤 그레이의 접견실에서 출연진과 인터뷰를 했다. 먼저 납치당한 딸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탐험가 말콤 머리경 역의 영국 배우 티머시 달턴을 만났다.
그는 ‘리빙 데이라이츠’와 ‘라이센스 투 킬’ 등 2편의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로 나왔다. 6순의 나이에도 늠름하고 섹시했는데 유머가 많은 호인이다. 달턴에 이어 미국 배우 조시 하트넷과 귀신을 자기 몸 안에 불러들일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여인 바네사 아이브스 역의 프랑스 배우 에바 그린을 인터뷰했다. 그린은 유럽 여인답게 젖가슴 노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배우로 산성이 있는 어둡게 아름다운 여자다. 그린은 007시리즈 ‘카지노 로열’에서 본드 걸로 나왔다.        
비는 하루 종일 쉬었다 내렸다 했다. 이러니 아이리시들이 술 안 마시고 배겨낼 재간이 없겠다. 호텔로 돌아와 몸과 마음에까지 묻은 물기를 털어내려고 바에 들렀다. 아일랜드 특산물인 우울을 선물로 받아들고 다음 목적지인 런던으로 떠났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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